교회사 산책 (2)
닉네임: 나그네 / 칼빈장로교회 (2016.5.22)
1.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 유대 땅의 정치적 종교적 상태
1.1 서양력에 따라 A.D.(Anno Domini)와 B.C.(Before Christ)로 나누는 역법은 기독교 정신에서 비롯되었다. 그리스도가 탄생하시기 전의 인류 역사는 그분의 오심을 위한 준비이고, 그 후의 역사는 그의 나라가 전진하는 과정이라고 볼 때 그리스도는 모든 인류 역사의 중심점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교회의 역사는 이민족과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 구별을 아브라함을 필두로 해서 새로운 출발점을 갖는다. 애굽 땅에서 민족을 형성하게 되고, 출애굽하여 광야에서 신정국가의 틀이 되는 율법을 받아 40년을 훈련받다가 여호수아에 의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갔다. 그후 사사시대를 거쳐 왕조국가가 되었고, 다윗과 솔로몬의 치세 때 전성기를 맞았다. 이후 두 왕국으로 분열하여 지속하다가 정복자들에게 포로로 70년간 잡혀 있다가 돌아왔으나 다시금 로마 제국의 압제 아래 들어가 암흑같은 시기가 그리스도의 오심을 위해 예비되었다.
1.2 가나안 땅은 주변에 이교를 숭배하는 고대 민족들과 지리적인 경계를 이루고 있었다. 세 개의 대륙 한복판에 자리를 잡고 남쪽과 동쪽으로는 사막이, 서쪽은 바다, 북쪽은 산이 이스라엘을 다양한 영향으로부터 지켜주었다. 그렇지만 이런 조건들이 그들의 완벽한 수호자가 될 수 없었다. 그들의 역사를 요동치게 하는 근원적인 조건들은 지리적 환경도, 주변 열강들의 정치적 야욕도 아니고 유대민족의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이었다.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 400여년의 기간은 유대민족의 신앙적인 부패와 타락상은 아마도 가장 극에 달했던 시기였을 것이다. 가장 어두울 때 가장 밝은 빛으로 그리스도가 오신 셈이다.
1.3. B.C.722년 앗시리아가 북이스라엘을 파멸시켰고, B.C.606년 바벨론에 의해 남유다가 멸망한 후부터 B.C.63년 예루살렘이 완전히 점령당하기 전까지 유대 땅은 페르시아 고레스 왕에 의해 일부 포로에서 풀려나 귀환한 유대인들과 남아있던 자들이 있었다. 이후 헬라에 의해서 지배를 받다가 B.C.166년 유대 가문의 마카비의 혁명으로 100여년 동안 독립하였고 로마에 점령당할 때까지 하스모니안 왕조로 지속되었다. 마카비 시대는 유대교라는 이름으로 종교적 형식주의 내지는 율법주의로 변색되어 가는 시기였다. 계시가 사라졌고 하나님께 부름받은 선지자들이 없던 시기였다. 예루살렘 성전이 있었지만 지역마다 회당들이 세워졌고 제사장들의 권력은 강해졌으며 부패한 성직자들은 온갖 이득에 눈 멀었다.
1.4. 신약성경에는 여러 명의 헤롯이 등장한다. 헤롯 가문의 후예들이다. 마카비 왕조는 이두매(에돔-에서의 후손) 지역을 점령한 후 지역의 수장인 안티파테르 1세를 총독으로 세웠다(마2:1~ 헤롯의 조부). 그는 헤롯 가문의 시초였다. 안티파테르 2세는 친로마 정책을 펴면서 마침내 B.C.63년 로마 황제 폼페이우스의 예루살렘 정복을 도왔다. 그 공로로 로마로부터 유대 총독에 임명된다.
이제 다시 이방나라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된 유대민족들. 헤롯가문이 형식적으로는 유대인이었지만 이는 마카비 왕이 이두매를 점령한 후 강제 할례를 통해서 이두매 족속을 유대인에 편입시켰기 때문이다. 헤롯의 가문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로마로부터는 유대인의 왕으로 생각해 주길 원했고, 유대인들에게는 로마를 등에 업은 폭군으로 군림했다. 이들은 해를 거듭할수록 무자비한 핍박을 가했다.
이러한 고초가 심해질수록 유대인들 사이에는 메시야 도래에 대한 갈망이 더욱 짙어만 갔다. 하지만 이미 신앙적으로 부패하고 타락한 상태에서 그들의 기대감은 선지자들의 예언과는 사뭇 다른 성격을 가졌다. 그들은 영적인 축복과 죄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단지 로마의 압제로부터의 해방과 다윗의 통치력의 회복을 통해 더 강력한 국가를 건설할 지도자를 원했던 것이다.
1.5. 정치적으로 혼돈기였고 종교적으로도 더 이상 계시가 없었던 암흑의 시기였다. 이때 유대사회 안에는 각기 입장을 달리한 분파들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크게 분류하면 세 분파 : 바리새파, 사두개파, 엣세네파가 있다. 여기에 더 하여 헤롯당, 열심당 등이 있었다.
① 바리세파는 율법주의로 알려졌다. 모세 율법에서 하나님의 뜻과 의미보다 그 형식의 준수에 치우쳤기 때문에 엄격한 형식을 중시했다. 아마도 당시 타락상에서 그 나름대로 정통신앙을 지키려는 노력이 빗나간 형태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이들의 형식주의와 외식은 주님으로부터 가장 큰 비난을 받았다. ② 사두개파는 비교적 소수였으며 회의적이고 합리적 사고를 가졌다. 주로 상류층에 속했으며 당시 권력이 집중되었던 제사장 그룹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부활과 영혼불멸을 부인했고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 부정적이었다. ③ 엣세네파는 신비주의와 금욕주의적 수도사들이었다. 주로 사막에서 은둔생활을 통하여 일상과 부패로부터 차단하여 높은 도덕적 성결을 추구하였다. ④ 헤롯당은 헤롯 가문의 권력 유지를 지지하던 유대인들이었다. 따라서 예수님이 오셨을 때 유대 사회가 그에 의해 소요가 일어날 것에 대하여 우려했으며 정치적 혁명가로 여겼기 때문에 상당히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⑤ 열심당은 헤롯당의 정치적 반대파로 민족주의 성격을 띄고 있었다. 반로마주의였고 당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가진 부패와 친로마 성향에 극렬하게 적의를 품었다.
이들은 각기 적대적 혹은 비우호적 관계로 있었으나 예수님에 대해서는 한통속이 되어 대적하던 자들이었다. 이처럼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 희미하게 남아있던 교회는 다양한 위기에 직면해 있었으나 그러한 위기 상황이 하나님의 은밀하신 섭리의 손길을 거쳤을 때 어떤 식으로 복음의 전진에 도움이 될지 인류는 알지 못했다. 헬라의 문화와 로마의 왕권은 각각 긍정적으로 부정적으로 직,간접적으로, 진리와 오류, 거짓과 불신앙이라는 양면으로 기독교와 결합하면서 영향을 주고 받았다. 오늘날 우리들의 삶도 어떤 환경이 하나님의 진노인지 축복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하지만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는 모든 환경을 그분의 백성들을 위하여 준비하시고 펼쳐나가실 것이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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