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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단 천주교 주요 교리와 역사 천주교의 이단성 장관섭 교수 (개혁신학연구소/크시연집행위원장/기이사연협)  우리는 천주교(Catholic)를 개혁교회의 장자교회로 생각을 하며 구교(Old Church)라고 부르기도 한다.그러나 천주교에 대하여 자세히 아는 것은 종말시대에 사는 정절한 기독신자(교회)의 바른 신앙으로서 음녀교회(거짓선지자)를 배척하는 길임을 깨닫게 된다.  아직도 천주교를 개신교를 포함한 기독교요, 구원이 천주교에도 있다고 말하는 자들이 있으므로 한국 교회의 앞날과 세계교회의 미래에 걱정이 되어진다. 음녀교회(거짓선지자)를 종말시대에 잘 대처해야 할 것이다.   1. 천주교의 유래 기독교는 예수님이 감람산에서 승천하시면서 분부하신 말씀(행1:1-8)를 듣고 120문도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열흘동안 기도하고 보내주겠다고 .. 공감수 1 댓글수 1 2025. 5. 10.
  • 중보기도 용어 사용해서는 안 될 성경적인 이유 중보기도 용어 사용해서는 안 될 성경적인 이유 (중보기도→도고기도)​닉네임: 진자인 (2009.7.27)​​"중보기도"라는 용어를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사용하고 있다.​오래전에 대한예수교 장로회(합동)교단에서는 총회결의에 의하여 중보기도 용어 사용을 중지할 것을 결의하고 각 노회에 통보하였다. 중보기도라는 용어 대신에 남을 위한 기도 혹은 이웃을 위한 기도로 사용하도록 권고하였다.​1. 합동총회에서 중보기도라는 용어사용을 중지할 것을 신문에 공고하였음​2. 성경 딤전 2:1 절에 “도고”, “엔튜크세이스”라는 용어가 있음으로 이 용어를 사용함이 적절함​3. 교단 헌법에도, 신도개요서에도, 대 요리문답에도 중보사역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데 중보사역을 훼손할 소지가 많으므로 사용 중지​4. 중보 기도하.. 공감수 4 댓글수 0 2025. 5. 9.
  • 존 후퍼와 복장 논쟁 존 후퍼(1495-1555) - 복장 논쟁​이진일 목사 (2016년경)​ 1) 시대적 상황​후퍼가 태어나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알아야 한다. 이 당시는 교황청이 개신교의 확산을 막기 위해서 평신도와 성직자들에게 우민화 정책을 펴고 있었다. 종교 개혁 운동이 한창 전개되던 16세기 중반의 영국교회는 흑암 가운데 있었다. 존 위클리프에 의하여 번역된 신약 성경이 존재하였으나, 성경을 접하지 못하는 일반 교인들은 성경의 내용을 알 수 없었다. 예배가 라틴어로 드려졌기 때문에 교인들은 설교나 기도의 내용을 알아들을 수 없었으며, 그나마 설교가 1년에 겨우 4번 정도 있을 뿐이었다.​또한 목회자들 역시 무지 가운데 있었다. 그들의 주된 사역이란 의식을 집전하는 것이 전부였기 때문에, 공부할 필요가 없었다. 후퍼.. 공감수 2 댓글수 2 2025. 5. 8.
  • 칼뱅과 제네바교회가 주는 교훈 ② 칼뱅과 제네바교회 이야기 (27-마지막) 칼뱅과 제네바교회가 주는 교훈 ② 임종구 목사의 칼뱅과 제네바교회 이야기 (27-마지막) ​임종구 목사 / 푸른초장교회 (김병국 기자/기독신문 2017.7.21)​​칼뱅과 제네바교회에 대한 연재를 마감하면서, 필자가 남기고 싶은 가장 중요한 이야기로 대미를 장식하게 되었다. 제네바교회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수없이 많다. 그 첫째는 목사의 문제요. 그 다음은 정통신앙의 수호이다.​교회의 문제는 언제나 지도자의 문제요, 목회자의 문제이다. 제네바교회는 ‘제네바목사회’라는 목회자들의 자정시스템, 성경해석과 교리일치의 검증시스템이 있었다. 이는 단순한 교회정치나 행정 차원의 모임을 넘어 목회자의 평생교육의 장이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이 두 가지 기능이 모두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를 위.. 공감수 1 댓글수 0 2025. 5. 7.
  • 칼뱅과 제네바교회가 주는 교훈 ① (칼뱅과 제네바교회 이야기 26) 칼뱅과 제네바교회가 주는 교훈 ① 임종구 목사의 칼뱅과 제네바교회 이야기 (26) ​임종구 목사 / 푸른초장교회 (김병국 기자/기독신문 2017.7.14)​​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은 지금, 세계 교회가 종교개혁의 의미를 되돌아보며 세미나를 비롯해 다양한 행사들을 진행하고 있다. 칼뱅은 종교개혁 제2세대로서 루터에서 시작된 종교개혁의 완성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5회에 걸쳐 ‘칼뱅과 제네바교회’라는 주제로 살펴본 내용의 결론으로서, 두 번에 걸쳐 칼뱅과 제네바교회가 한국교회에 던져주는 교훈에 대해서 다루려고 한다.​한국교회와 관련해 많은 문제가 언급될 때마다 언제나 ‘목회자의 문제’가 도마에 오른다. 제네바교회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제네바가 1536년 개혁되기 전까지 옛 질서 안에 있을 때 주교군.. 공감수 1 댓글수 1 2025. 5. 6.
  • 칼뱅의 죽음과 유언 (칼뱅과 제네바교회 이야기 25) 칼뱅의 죽음과 유언   임종구 목사의 칼뱅과 제네바교회 이야기 (25)​임종구 목사 / 푸른초장교회 (기독신문 2017.7.6)​​장 칼뱅(Jean Calvin, 1509~1564)은 제네바에 첫 발을 내딛은 후 28년을 사역하고 제네바 목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죽음을 맞았다. 시의회 회의록은 “오늘 저녁 8시 책임감이 강한 칼뱅은 하나님께 감사드리면서 감각과 정신이 온전한 채로 하나님께 갔다”라고 개혁자의 퇴장을 기록하고 있다.​칼뱅은 노년에 극심한 육체의 질고와 싸워야 했다. 평생 그를 따라 다녔던 편두통, 치질, 류머티즘에 시달렸다. 1561년부터는 방광통과 통풍까지 발병해 의자나 가마, 말 등에 앉은 채로 근무하고 이동했다. 죽음에 임박하여 불링거에게 보낸 칼뱅의 편지를 보면 “비록 고통을 덜 느.. 공감수 3 댓글수 1 2025. 5. 5.
  • 제네바교회, 세르베투스 제거하다 (칼뱅과 제네바교회 이야기 24) 제네바교회, 세르베투스 제거하다   임종구 목사의 칼뱅과 제네바교회 이야기 (24) ​임종구 목사 / 푸른초장교회 (김병국 기자/기독신문 2017.6.30)​​칼뱅 연대의 제네바목사회 회의록(RCPG)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기록물은 미카엘 세르베투스(Michael Servetus)에 대한 기소와 신학검증 및 재판관련 문건이다. 세르베투스는 스페인 출신인데 파리에서 학위를 받고 의사로서 유럽 최초로 혈액의 폐순환을 기술했고, 지리학에도 인정받은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삼위일체를 부정했고, 1531년 를 출간했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 로마가톨릭의 비엔공판과 제네바의 시의회로부터 사형을 선고받고 1553년 10월 27일 화형되었다.​16세기에 이단의 죄목으로 죽임을 당한 사람이 .. 공감수 1 댓글수 1 2025. 5. 4.
  • <시편찬송 45편> (찬송가 동일 멜로디) 북미- 중국 성도들 영상 시편찬송 45편 (10~17절) (북미- 영상) 중국인들이 시편찬송 부르는 모습입니다. 찬송가 '면류관 가지고'와 멜로디가 같습니다.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 성경본문 그대로 번역된 시편찬송입니다. 성경 말씀 그대로 찬양하게 되니 은혜가 더욱 넘칩니다.더구나 개역개정 보다 좀 더 번역이 좋은 '개역한글' 버젼으로 되어 좋습니다.악보 보시며 함께 불러보세요.       https://m.youtube.com/@osola24 Osola (유튜브)  Osola정통신학을 전하는 유튜브입니다. 지금 이 글을 클릭하시면 유익한 글들이 있는 다른 링크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 기독교 자료 (티스토리): https://hisola.tistory.com 기독교 자료 (네이버): https://cafe.nwww.youtube... 공감수 0 댓글수 0 2025. 5. 3.
  • 제네바교회, 제롬 볼섹을 추방하다 (칼뱅과 제네바교회 이야기 23) 제네바교회, 제롬 볼섹을 추방하다   임종구 목사의 칼뱅과 제네바교회 이야기 (23)​임종구 목사 / 푸른초장교회 (김병국 기자/기독신문 2017.6.23)​​칼뱅 당시 제네바에는 유럽 전역에서 종교의 자유를 찾아 수많은 망명자들이 유입되었다. 이들 가운데는 이단자들과 정통교리를 부정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렇다면 제네바교회는 이런 이단자들을 어떻게 처리했을까? 이제 제롬 볼섹과 미카엘 세르베투스의 사건을 두 번에 나누어 살펴보려고 한다. 칼뱅은 제네바에서 사역하는 동안 신학문제로 카롤리(1537), 볼섹(1551), 트롤리에(1552), 세르베투스(1553)와 4번의 논쟁을 벌였다.​1549년부터 제네바에는 엄청난 망명자들이 밀려들어왔다. 1551년 5월 15일에는 2명의 이단자가 들어왔는데, 금 세공업.. 공감수 2 댓글수 1 2025. 5. 2.
  • 제네바교회, 에클레시아 면직하다 (칼뱅과 제네바교회 이야기 22) 제네바교회, 에클레시아 면직하다   임종구 목사의 칼뱅과 제네바교회 이야기 (22)​임종구 목사 / 푸른초장교회 (기독신문 / 2017.6.15)​​제네바교회는 국가교회의 형태를 가졌다. 이는 신성로마제국, 즉 당시 독일에서 제후의 종교가 그 지역의 종교였다면, 스위스는 시의회가 선택한 종교가 그 도시의 종교였다. 제네바는 1536년 시의회의 결정으로 복음을 받아들였다. 옛 질서에서 종교권력을 주교와 교황이 가지고 있던 것을 시의회가 가지게 된 것이다.​그러므로 제네바목사회가 종교자문의 역할을 했지만, 결정권은 어디까지나 시의회가 가졌다. 목사의 임면은 물론, 설교의 횟수와 사역을 할 교구까지 시의회가 결정했다. 목사들은 소위 목사안수가 아닌 시장 앞에서 서약을 함으로써 임직되었다. 심지어 출교권까지 시.. 공감수 0 댓글수 0 2025. 5. 1.
  • 제네바교회, 장 페롱 목사 면직하다 (칼뱅과 제네바교회 이야기 21) 제네바교회, 장 페롱 목사 면직하다   임종구 목사의 칼뱅과 제네바교회 이야기 (21) ​임종구 목사 / 푸른초장교회 (김병국 기자 / 기독신문 2017.6.9)​​제네바교회는 권징으로 성찬의 성결을 목숨처럼 여겼던 것과 함께, 결혼제도가 하나님의 질서 안에서 유지되기 위해 성적 타락을 용인하지 않았다. 이를 위해 제네바교회는 결혼제도를 공적인 질서 안에서 다루었다.​결혼하지 않은 남자와 여자가 간음을 행하다 발견되면, 6일 동안 갇혀 빵과 물로만 연명해야 하고 60수를 벌금으로 내야 했다. 만약 그것이 간통이라면, 즉 한 사람이나 두 사람 모두 결혼한 자라면 그들은 9일 동안 갇혀 물로만 연명하고 사건의 경중에 따라 일정액의 벌금을 내야 했다. 약혼한 자들은 결혼식이 교회에서 엄숙히 거행되기 전까지는 .. 공감수 2 댓글수 1 2025. 4. 30.
  • 사랑의 교회 <중보기도학교>는 성경적인가요? 사랑의 교회 는 성경적인가요?(바른믿음 홈페이지에 올려진, 어떤 성도가 물어본 질문에 대한 답) 정이철 목사  질문> 목사님, 안녕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주신사명 감당하시느라 수고가 많으십니다. 오정현 목사님께서 시무하시는 서울의 사랑의 교회 에서 이루어지는 일곱 강의 중 6번째 강의 "중보기도의 영적전쟁"교재를 첨부합니다. 우리 한국의 장로교단(합동)을 대표하는 교회로서 너무 의아한 내용이라 생각됩니다. 왜 이런 강의가 사랑의 교회 같은 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는지, 오정현 목사님의 신학적 배경의 문제점이나 심각성에 대하여 개혁주의 신학사상에 근거하여 평가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답변> 보내주신 자료를 보고, 저도 또한 인터넷에서 찾은 사랑의 교회의 강의 제목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오정현 목사가 미국의 남가.. 공감수 1 댓글수 0 2025. 4. 29.
  • 제네바교회, 미신을 타파하다 (칼뱅과 제네바교회 이야기 20) 제네바교회, 미신을 타파하다   임종구 목사의 칼뱅과 제네바교회 이야기 (20) ​임종구 목사 푸른초장교회 (김병국 기자 / 기독신문 2017.6.2)​​칼뱅이 제네바에 철저하게 성경적인 교회를 건설하려고 했다. 그러나 옛 질서의 미신에 익숙한 제네바의 사람들을 설득하고 인도하는 일에는 많은 도전과 저항이 있었다. 이러한 저항에 대해 칼뱅은 성경이 명백히 규정하고 있는 것(diaphora)과 성경이 명백히 밝히지 않고 임의로 할 수 있도록 남겨진 것(adiaphora)을 구분했다. 또 교회가 아직 미숙한 것을 헤아려 장차 성숙된 교회로 나아가기까지 인내를 가지고 교회를 인도하였다.​성찬과 권징과 같은 부분은 목숨을 걸고 지켰고, 누룩을 사용하지 않은 떡을 고집하는 것에는 유연하게 대처하였다. 1536년에.. 공감수 1 댓글수 0 2025. 4. 28.
  • 제네바교회, 이렇게 교육했다 (칼뱅과 제네바교회 이야기 19) 제네바교회, 이렇게 교육했다    임종구 목사의 칼뱅과 제네바교회 이야기 (19)​임종구 목사 / 푸른초장교회 (기독신문 / 김병국 기자 2017.5.25)​​칼뱅과 제네바교회의 교육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칼뱅이 제네바시의회에 처음 제출했던 교회설립시안(1537)에는 정당한 성찬 시행을 위한 권징의 중요성을 첫머리에 두었던 반면, 그가 제네바에서 추방당하였다가 스트라스부르에서 다시 제네바로 재청빙될 때 제출한 교회법령(1541)은 교육의 문제로부터 출발하고 있다.​칼뱅은 교회법령의 서두에서 “우리 주의 거룩한 복음의 교리의 순수성이 보존되어야 하며 교회는 젊은이들에게 충실하게 가르쳐야 한다”고 밝히고, 우리 자녀들에게 교회가 황무지와 같은 곳이 되지 않도록 학교를 설립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또한 .. 공감수 1 댓글수 2 2025. 4. 27.
  • 제네바교회, 이렇게 구제했다 (칼뱅과 제네바교회 이야기 18) 제네바교회, 이렇게 구제했다 (임종구 목사의 칼뱅과 제네바교회 이야기 18)​임종구 목사 / 푸른초장교회 (기독신문 2017.5.18)​​(생략) 초대교회에서 ‘예배(worship)’와 ‘복지(welfare)’는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었다. 그렇다면 칼뱅이 사역했던 제네바교회의 구제사역은 어떠했을까?​베르게리오는 제네바의 모습을 “나는 교회에서 가난한 자들을 위해 공개적으로 모금을 하는 것을 결코 보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서 단 한 명의 거지도 만나지 못했다. 그것은 이 도시에서는 진정한 형제애 가운데 풍성한 도움이 이들에게 제공되고 있었던 것이다”라고 말하였다.​종교개혁 이전의 제네바에는 가난한 자들을 돕기 위한 7개의 구빈원이 있었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를 선언한 이후 일곱 곳의 구빈원.. 공감수 1 댓글수 0 2025. 4. 26.
  • 제네바 교회의 선교 (칼뱅과 제네바교회 이야기 17) 제네바 교회의 선교   임종구 목사의 칼뱅과 제네바교회 이야기 (17)​임종구 목사 / 푸른초장교회 (기독신문 2017.5.12)​​칼뱅의 제네바 사역에서 선교는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또 제네바교회는 어떻게 선교사역을 감당했을까? 여기에 관한 자료는 애석하게도 매우 제한적이다.​제네바교회의 선교 사역은 제네바교회가 처한 시대적 상황을 이해하는 것으로 출발해야 한다. 제네바는 신생 기독교 도시 국가였다. 그러므로 자신들의 교회를 견고히 세워야 하는 일차적 과업이 있었고, 이어 주변 도시와 국가, 나아가서 다른 대륙의 문제에 대해서 응답해야 했다. 칼뱅이 일차적 과업에 대해서 집중했던 것은 ‘교육 선교’와 ‘구제 사역’이었다.​칼뱅은 1537년과 1541년의 법령에서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이런 그의 .. 공감수 1 댓글수 0 2025. 4. 25.
  • 제네바 목사들의 일상 (칼뱅과 제네바교회 이야기 16) 제네바 목사들의 일상   임종구 목사의 칼뱅과 제네바교회 이야기 (16) ​임종구 목사 / 푸른초장교회 (기독신문 2017.5.1)​​칼뱅을 비롯한 제네바 목사들은 어떻게 한 주간을 보냈을까? 교회법령과 제네바목사회 회의록(RCPG)은 대부분의 시간을 성경연구와 강론, 심방, 아카데미에서 강의로 보냈음을 말해주고 있다. 제네바에는 총 3개의 교구가 있었다. 제네바의 중심부에는 생 피에르와 라 마들렌이, 그리고 강 건너편에는 생 제르베가 있었다.​일단 각 교구에는 매일 예배가 있었다. 일종의 아침 예배였다. 한국교회로 본다면 새벽 예배였다. 그리고 수요일 예배가 있었고, 주일에는 3번의 예배, 즉 아침예배, 오전예배와 오후 3시에 드려진 오후예배가 있었다. 정오에는 어린이를 위한 교리문답이 있었다.​제네바.. 공감수 1 댓글수 1 2025. 4. 24.
  • 제네바 목사들, 이렇게 설교했다 (칼뱅과 제네바교회 이야기 15) 제네바 목사들, 이렇게 설교했다 임종구 목사의 칼뱅과 제네바교회 이야기 (15) ​임종구 목사 / 푸른초장교회 / 김병국 기자 / 기독신문 (2017.4.20)​​종교개혁은 성사중심에서 성경중심으로 옮겨온 사건이다. 그래서 미신적인 미사와 라틴어라는 단일 언어를 통한 통제는 이제 모국어 성경의 번역을 통해 설교가 예배의 중심에 놓이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설교는 ‘들리는 말씀’으로, 성찬은 ‘보이는 말씀’으로 참된 교회의 표지가 되었다.​에서 교회의 표지를 통해 참 교회를 설명하던 칼뱅은 제네바에서 말씀과 성찬, 그리고 권징이 바로 선 교회를 세워나갔던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의 승패는 언제나 말씀에 달려 있었다. 그렇다면 제네바교회에서 설교는 어떻게 행하여졌을까?​제네바 목사들은 이렇게 설교했다... 공감수 1 댓글수 0 2025. 4. 23.
  • 제네바교회의 목사 선발 방식 (칼뱅과 제네바교회 이야기 14) 제네바교회의 목사 선발 방식    임종구 목사의 칼뱅과 제네바교회 이야기 (14) ​임종구 목사 / 푸른초장교회 (기독신문 2017.4.13)​​칼뱅이 건설했던 제네바교회는 종종 ‘프로테스탄트의 로마(the Protestant Rome)’로, 혹은 존 녹스에 의해서 “사도들의 시대 이후 가장 완벽한 그리스도의 학교”로 칭송되었다. 개혁교회가 칼뱅과 제네바교회로부터 그 모범을 계승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 가운데서도 목사직에 대한 성경적 이해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은 오늘날에도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제네바교회가 교회의 공적인 직분을 법령 속에서 명시한 것은 1541년부터이다. 이른바 ‘사중직제’인데, 교회법령에서 교회의 통치를 위해서 세우신 공적인 직분이 네 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법령은.. 공감수 0 댓글수 0 2025. 4. 22.
  • 올바른 성찬 시행을 위해 몸부림치다 (칼뱅과 제네바교회 이야기 13) 올바른 성찬 시행을 위해 몸부림치다     임종구 목사의 칼뱅과 제네바교회 이야기 (13)​임종구 목사(푸른초장교회) / 김병국 기자 (2017.4.6)​​칼뱅은 제네바교회에서 사역하면서 많은 모범을 만들었다. 그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이 바로 성찬과 권징의 시행이었다. 칼뱅이 목숨을 걸 정도로 철저하게 지키려 한 것은 말씀의 증거와, 정당한 성례의 시행, 그리고 이 두 가지 표지를 뒷받침하고 교회의 성결을 유지해줄 권징의 실천이었다. 한마디로 교회의 표지를 지키는데 타협하지 않았던 것이다.​칼뱅은 성찬의 필요를 처음부터 강조하였다. 1537년 기초법령에서도 성만찬이 아무런 경외감 없이 거행된다면 이것은 제대로 된 교회로 볼 수 없다고 하였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제정된 성찬이 스스로 사악하고 .. 공감수 4 댓글수 1 2025. 4. 21.
  • 제네바교회, 이렇게 장로를 선출했다 (칼뱅과 제네바교회 이야기 12) 제네바교회, 이렇게 장로를 선출했다   임종구 목사의 칼뱅과 제네바교회 이야기 (12) ​임종구 목사 / 푸른초장교회 (2017.3.30)​​칼뱅은 교회의 표지를 ‘말씀’과 ‘성례전’이라고 말했다. 이 표지가 지켜지는 참된 교회를 위해 ‘권징’이라는 표지를 추가로 제시하고 있다. 이렇게 권징을 시행하기 위해 목사와 함께 사역할 장로라는 직분이 필요했던 것이다.​이처럼 제네바에서는 교회의 표지를 시행하기 위해 목사회와 치리회가 있었다. 목사회가 행정회였다면, 권징을 시행하는 콩지스투와르(consistoire)는 치리회였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당회와 노회와 총회는 행정회와 치리회를 겸하고 있는 교회의 의회인 것이다.​칼뱅은 1537년 기초법령의 첫 머리말에서부터 권징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성만찬이 제.. 공감수 2 댓글수 0 2025. 4. 20.
  • 제네바교회, 결혼법령이 있었다 (칼뱅과 제네바교회 이야기 11) 제네바교회, 결혼법령이 있었다   임종구 목사의 칼뱅과 제네바교회 이야기 (11) ​임종구 목사 / 푸른초장교회 (2017.3.23)​​칼뱅이 목회했던 제네바교회를 연구하면서 눈길을 끄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결혼 규정이 매우 구체적이면서도 엄격했다는 사실이다. 결혼법령은 1537년 교회설립시안, 즉 기초법령에서 결혼법령이 제정되어야 할 필요성을 잠깐 언급하고 있지만 구체적인 법령은 제정되지 않았다.​이어 칼뱅이 스트라스부르에서 돌아온 1541년에 만들어진 표준법령 역시 결혼공고 후 공예배 시작 전에 결혼식을 올리는 것과 부부간의 문제는 치리회의 심의를 거쳐 시민법으로 판결한다는 내용 외에 앞으로 결혼법령을 만들어야 한다고만 밝히고 있다.​본격적인 결혼법령은 1542년에 결혼예법, 1546년의 결혼규칙.. 공감수 1 댓글수 0 2025. 4. 19.
  • 제네바 교회, 목회자윤리규정 있었다 (칼뱅과 제네바교회 이야기 10) 제네바 교회, 목회자윤리규정 있었다     임종구 목사의 칼뱅과 제네바교회 이야기 (10) ​임종구 목사 / 푸른초장교회 (2017.3.16)​​칼뱅이 주도한 개혁파가 제네바에서 살아남아 개혁교회의 좋은 모델이 될 수 있었던 여러 이유 가운데는 신학적 우위에 있었지만 동시에 윤리적으로도 우위에 있었기 때문이다.​칼뱅의 제네바목사회는 대외적으로 몇 가지 어려움을 지니고 있었다. 먼저 베른의 종교적 간섭이었다. 베른은 끊임없이 자신들의 신학을 강요했다. 그래서 베른영토에서 사역하는 제네바목사들은 예정설을 설교했다는 것만으로도 투옥되기까지 했다.​또 소위 정치목사들이 있었다. 이들은 시의회와 결탁하여 개혁파목사들을 괴롭혔다. 심지어 1555년에는 아예 제네바에서 프랑스 목사와 프랑스 신자들을 모두 죽이려는 음.. 공감수 2 댓글수 1 2025. 4. 18.
  • 제네바 목사들은 평생 공부했다 (칼뱅과 제네바교회 이야기 9) 제네바 목사들은 평생 공부했다 임종구 목사의 칼뱅과 제네바교회 이야기 (9) ​임종구 목사 / 푸른초장교회 (2017.3.10)​​공부하는 목사, 예외 없었다​1541년 칼뱅이 제네바에서 제2차 사역을 시작하면서 1차 체류(1536~1538)때와 비교하여 가장 큰 변화 중의 하나는 바로 제네바목사회(Compagnie des pasteurs de Genéve)가 매주 금요일 오전과 오후에 성경과 신학을 연구하기 위해 회집했다는 것이다. 이 회합의 명칭은 콩그레가시옹(Congrégation)으로 불렸고 제네바 목사들의 자율적인 모임이 아니라 교회 법령에 명시됨으로서 불참할 경우와 성경강해 발제가 불성실할 경우 파면의 사유가 될 정도로 강제적이면서 목사의 의무 중 하나였다. 제네바목사회는 아마도 1541년부터.. 공감수 3 댓글수 0 2025. 4. 17.
  • 세대주의에 대한 95개조 반박문 세대주의에 대한 95개조 반박문(The Ninety-Five Theses Against Dispensationalism) 로버트 L. 레이먼드 박사 (번역 : 김안식) 머리말 우리는 사람들이 이 세대주의 반박문을 보고 NiceneCouncil.com이나 역사적으로 성경을믿는 교회들이 모든 세대주의자들을 기독교 신앙에서 이탈해 버린 이들이라 말하고 있다는 식의 해석을 하지 않기 바란다. 상당수의 세대주의자들이 기독교의 기본적인 정통 교리를 인정하고 받들고 있다. 16세기의 칭의교리 논쟁과 달리, 이것은 기독교 내부적 논의이며, 복음주의 기독교인들 사이의 논쟁인 것이다. 우리는 세대주의의 교리적 틀 안에 있는 모든 거듭난 신자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요 자매로 인정하고 귀하게 여긴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할 .. 공감수 0 댓글수 0 2025. 4. 16.
  • 칼뱅, 교회법령을 만들다 (칼뱅과 제네바교회 이야기 8) 칼뱅, 교회법령을 만들다   임종구 목사의 칼뱅과 제네바교회 이야기 (8) ​임종구 목사 / 푸른초장교회 (2017.3.3)​​1541년 칼뱅은 제네바로 돌아온 후 가장 먼저 교회 법령을 만드는 일을 했다. 1537년의 교회설립시안과 1538년의 타협안보다 한 차원 더 발전된 체계적이고 구체적인 법령이었다. 이후에 1561년에 다시 한 번 법령이 제정되지만 1541년의 법령은 어느 모로 보나 제네바교회의 표준법령으로 손색이 없다. 칼뱅은 파리에서 부친의 뜻에 따라 법학을 공부했다. 몽떼귀에서 신학을 공부하던 중 경제적으로 더 유익하다고 느낀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여 1528년 오를레앙으로 옮겼다. ​그곳에서 피에르 드 레투알에게서 배우다가 부르주로 옮겨 안드레아 알치아티에게서 법학을 공부했다. 훗날 이런 .. 공감수 2 댓글수 0 2025. 4. 15.
  • 칼뱅, 다시 제네바로 돌아오다 (칼뱅과 제네바교회 이야기 7) 칼뱅, 다시 제네바로 돌아오다 임종구 목사의 칼뱅과 제네바교회 이야기 (7) ​임종구 목사 / 푸른초장교회 (2017.2.23)​​설교와 성찬, 타협하지 않았다​칼뱅은 제네바 시의회의 공식적인 초청을 받고 1541년 다시 제네바로 돌아온다. 물론 그가 고백했던 것처럼 다시 제네바로 돌아간다는 것은 그에게는 1000번의 죽음을 각오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이 무렵 파렐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하루에 1000번 부서져야 했기에 이 십자가를 지는 것보다 차라리 100번 이상이라도 다른 죽음의 고통을 당하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선택권이 나에게 있다면 나는 당신의 뜻을 따르는 것 외에 모든 일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나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나의 마음이 죽은 것 같이 여기며 주님께 나를 .. 공감수 1 댓글수 0 2025. 4. 14.
  • 칼뱅과 가정 (칼뱅과 제네바교회 이야기 6) 칼뱅과 가정 임종구 목사의 칼뱅과 제네바교회 이야기 (6)​임종구 목사 / 푸른초장교회 (2017.2.16)​​가정은 개혁신앙 증명해야 한다​​칼뱅은 스트라스부르에 머무는 동안 가정을 꾸리게 된다. 종교개혁은 종교, 직업, 교육, 가정에서 근대의 문을 열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 가운데서도 가정을 본래의 자리로 돌려놓는 역할을 했다.​칼뱅은 1540년 8월 10일 파렐의 주례로 이들레트 드 부르(Idelette de Bure)와 결혼한다. 그녀는 재세례파 장 스토르데르의 미망인으로, 남편이 흑사병으로 세상을 떠난 뒤 부처의 소개로 칼뱅과 가정을 이루게 되었다. 칼뱅이 결혼하기까지 몇 번의 우여곡절이 있었다. 칼뱅은 파렐에게 보낸 편지에서 장차 자신의 아내가 될 사람에 대해 ‘나를 사로잡는 유일한 아름다움.. 공감수 1 댓글수 0 2025. 4. 13.
  • 성경과 신학 정통한 칼빈 (칼뱅과 제네바교회 이야기 5) 성경과 신학 정통한 칼빈 임종구 목사의 칼뱅과 제네바교회 이야기 (5)​임종구 목사 / 푸른초장교회 (2017.2.10)​​회중 압도하는 하나님의 입​우리는 개혁자 칼뱅이 그 거대한 무지와 반대에도 불구하고 제네바에서 성경적인 교회를 건설할 수 있었는가 궁금증을 가질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시민권조차 변변찮게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의 고백과도 같이 나그네와 망명자의 신분으로도 종교권력과 맞서 싸우고 수많은 구교의 사제들과 수사들까지 굴복시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가 성경과 신학에 정통한 학자였으며, 강단의 거성과도 같은 설교자였기 때문이다. 그 일례로 한 가지 재미있는 사건을 소개하자면, 칼뱅의 한 번의 연설로 사제와 수사 200명이 한꺼번에 개혁신앙으로 돌아온 사건이 있었다.​1536년 로잔(.. 공감수 1 댓글수 0 2025. 4. 12.
  • 사돌레토 추기경의 편지에 대한 칼빈의 답변서 (종교개혁이야기) 사돌레토 추기경의 편지에 대한 칼빈의 답변서​김진흥 교수 (2016.4.5)​​종교개혁에 대한 개혁자들 자신의 인식과 이해를 살펴보는 과정에서, 우리는 종교개혁을 옹호하는 칼빈의 글 몇 편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지난 호에서는 그 첫 번째 글로서, 기독교강요 초판의 서문에 실린 ‘프랑스 왕 프랑스와 1세에 보내는 편지’를 살펴보았는데, 이번에 소개할 글은 로마교회의 사돌레토 추기경이 제네바 시민들에게 쓴 편지에 대한 칼빈의 답변서(1539)입니다.​​​I. 칼빈이 이 답장을 쓰게 된 까닭​제네바 시민들의 부도덕한 삶에 대한 권징으로 부활절 성찬을 거행하지 않으려 했던 일로 칼빈과 파렐을 비롯한 개혁자들이 제네바에서 추방된 이후에, 로마교회의 추기경이자 온건한 에라스무스주의자로 명성이 높았.. 공감수 2 댓글수 1 2025. 4.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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