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코틀랜드 국가 언약도 신앙고백과 서명은 한국에 있다.
정성구 목사 / 전 총신대, 대신대 총장
-개요-
교회개혁(Reformation)500주년을 넘기고, 한국교회는 개혁교회가 끊임없이 개혁되어야 한다는 과제를 안고 있다.
16세기 루터와 칼빈의 교회개혁 이후에 17세기 화란 개혁교회는 칼빈주의 신학과 신앙이 꽃을 피우고, 한편 영국의 청교도운동이 활발하여 말씀중심 곧 설교중심의 교회개혁 정신을 구체화 하는데 커다란 공을 세웠다. 하지만 청교도에는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성공회 극우파 등이 함께 있었다. 그러나 언약도 운동은 순수한 스코틀랜드 장로교 성도들의 진리투쟁 운동이었다. 이 언약도의 운동을 그들은 제二의 교회개혁 운동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교회 개혁자 요한 칼빈(John Calvin)과 요한 낙스(John Knox)의 영향으로 스코틀랜드 장로교회가 탄생했다. 그러나 국왕 챨스 1는 왕권신수설(Divine Right of Kings)을 주장하면서, 국왕은 국가의 머리인 동시에 교회의 머리라고 칙령을 내리고 로마 카톨릭으로 복귀하려 했다.
이에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성도들은 국왕의 칙령에 항거하고 교회의 머리는 국왕이나 카톨릭의 교황이 될 수 없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뿐임을 주장하여 모진 박해가 시작되자, 순교적 각오로 1,200명의 성도들은 에딘버러 그레이프라이어스 교회당 뜰에 모여 1638년 2월28일에 국가언약(National Covenant of Scotland )식을 하고 신앙고백을 한 후 서명을 했다.
이 언약도들의 신앙고백과 서명식에는 오직 삼위 하나님과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하원의원, 귀족, 남작, 신사, 공민, 장관, 평민, 목사가 포함되었다. 이 언약식을 주도하고 신앙고백서를 작성한 분은 언약도 운동의 지도자요 순교자인 알렉산더 헨더슨(Alexander Henderson) 목사였다. 이로 말미암아 언약도 성도들은 그레이프라이어스 교회 앞, 지붕 없는 감옥에 갇혀 추위와 더위, 굶주림으로 모두 순교의 잔을 마시었다.
이 언약도에 대한 처참한 박해는 50(1638-1688)년간 계속 되었고, 그 동안 약 18,000명의 언약도들은 카톨릭 의식과 교황권과 왕권에 도전하여, 하나님 중심의 신앙과 참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다가 순교함으로 오늘의 장로교회를 세웠다. 이를 생각해 볼 때, 우리 한국장로교회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개인적으로 반대한 주기철 목사, 이기선 목사, 손양원 목사, 박관준 장로 등 50여 분의 순교와 한상동, 주남선, 이인재, 손명복 등이 일제의 신사참배에 항거하다가 6, 7년 옥중에서 수난을 당하여 산 순교자로 알려졌다.
결국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항거하고 신앙을 지킨 분들은 개인적이며 소수였다. 또한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박해에 맞서 순교한 분들도 결국은 개인적으로 신앙의 순결성을 지키고 말씀대로 살려던 분들이었다.
하지만 한국장로교회는 부끄럽게도 1938년 27회 장로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하고, 교계 지도자인 목사, 장로들은 솔선수범하여 일본신사에 가서 참배를 하고, 1943년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이 된 후에는 주일 예배 중에 태양신숭배 즉 동방요배를 한 후, 황국신민으로 충성맹세를 하고, 일본천황을 찬양한 노래 우미유가바를 부른 후에 묵도로 예배를 드렸고, 헌금을 거두어 애국한다며 일제에게 전투 비행기를 헌납하고 이를 <장로호>라고 명명했다. (감리교는 전투기 3대를 헌납했다.) 그러니 한국교회는 과거에 여호와와 바알을 동시에 섬긴 죄를 범했다.
그 후 교회지도자들의 변명은 그 당시 일제의 강압에 어찌할 수 없이 신사참배를 했다고는 하나, 1,200명의 목사와 평신도 지도자들이 성경의 진리와 교회의 순결과 교리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서 범 교회적으로 그릇된 국가 권력에 항거하여, 하나님께 참된 진리를 지키기로 언약하고 기꺼이 순교의 길을 택한 스코틀랜드 장로교 언약도들의 삶과는 너무나 대조되는 모양이다.
금번에 한국칼빈주의연구원과 박물관은,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언약도의 신앙고백과 서명 원본(1638)으로부터 1870년경에 Facsimile 한 문건을 스코들랜드 고문서 취급점에서 발견하여, 한국교회 앞에 공개하게 되었다.
물론 이 자료의 원본은 언약도들이 순교 당한 장소인 <그레이프라이어스> 교회당 비밀한 곳에 보관되어 있으나, 일반에게 공개된 일이 없거니와 350년이 지나는 동안 글자가 희미하게 손상되어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 원본이 아직도 온전할 때 즉 빅토리아 여왕 때인 1870년경에 그 원본을 팩시밀리 해 둔 것이 발견되었다.
빅토리아 여왕 재임 61년동안인 1843년에 펙시밀리 기술이 발명되었고 산업혁명이 일어나서 대영제국이 되었다. 이 자료는 1870년대에 한 두 차례 필사본이 나왔으나 거기에는 언약도 대표들의 서명이 빠져있다. 그마저도 세월이 지나 희미하게 퇴색되어 알아 볼 수 없었다. 이번에 공개한 <스코틀랜드 언약도의 신앙고백과 서명>(가로 70cm×세로90cm) 자료는 현재 스코틀랜드에 없는 줄 알고 있다. 이 자료를 보면서 한국교회가 과거 우리의 연약과 죄악을 회개하고 반성을 하는 동시에, 진리를 지키다가 장렬히 순교한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언약도의 신앙을 본받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발견 경위와 의의
이 자료는 영국 리치필드(Lichfield) 고문서 전문점에서 나왔다. 한국칼빈주의연구원과 칼빈 박물관 정성구 원장은 수차례 스코틀랜드 에딘버러를 방문하고 원본을 직접 살펴보았다. 그러나 원본은 350년 된 것이라 글자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많이 마모되거나 퇴색되었을 뿐 아니라, 원본은 그레이프라이어스 교회당 안에 은밀한 장소에 보관되어 있으므로 세상에 알려진 일도 없고, 교회 역사교과서에서 단 한 번도 언약도의 문건이 공개된 일이 없었다. 정성구 원장은 칼빈주의 장로교신앙의 근간을 이룬 언약도들의 육필 서명을 수 십 년간 찾던 중 근자에 이르러 1638년 원본에서 펙시밀리한 이 자료를 찾았으며, 이를 한국칼빈주의연구원과 박물관에 소장하였고 금번에 기독교 언론에 공개하게 되었다.
가치
언약도들의 신앙의 전승을 이어 받았다는 에딘버러 대학교나 스코틀랜드 국가교회는 자유주의로 돌아서서 언약도의 신앙과 자료에 관심이 없고, 스코틀랜드 자유교회(Free Church of Scotland) 신학교에도, 존 낙스(John Knox)가 목회하던 성 자일레스(St. Giles) 교회도 이 자료가 없는 것을 보면, 이것은 그레이프라이어스 교회에 보관된 원본 이후에 1870년 경에 Facsimile한 것으로는 세계 유일본 이라고 할 때, 금번 언약도의 신앙고백과 서명장은 값으로 환 산 하기 어려울 듯하다. (에딘버러 박물관에 언약도들의 신앙고백 필사본이 있으나 이는 후일에 된 것으로 당시 친필 서명은 없다.)
희망사항
오늘 한국교회 특히 장로교회는 세계적으로 가장 급성장한 것도 사실이고, 세계선교의 선두에 선 것도 칭찬받을 만하다. 하지만 오늘의 한국장로교회는 모두가 칼빈주의 신앙을 지킨다고 말하면서도 백 수십여 개의 장로교회로 분열되었고, 강단이 세속화 되어 복음이 바로 증거되지 못하고, 칼빈주의적 장로교회의 교리와 신앙이 흐릿해졌다.
그래서 오늘의 한국교회는 예언자적 사명도 없고, 진리를 지키려는 열정도 없이 인본주의와 세속주의, 물량주의가 교회 안에 깊이 들어와서 하나님과 세상 앞에 부끄럽기 짝이 없다. 특히 금년은 1618년 돌트총회(Dordt Synod)가 열리어, 칼빈주의 5대교리(Five Points of Calvinism)를 발표한 지 꼭 400주년이 되는 뜻 깊은 해이다.
또한 앞서 말한 대로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성도들이 피로써 서명한 언약도들의 신앙고백과 순교의 서명을 한지 꼭 350주년 되는 해이다. 한편 한국교회는 일제의 신사참배 요구에 굴복해서 1938년 신사참배를 공식가결한지 꼭 80주년 되는 해이기도 하다. 진심으로 하나님께 우리의 죄악을 회개하는 운동이 있었으면 한다. 이 뜻 깊은 해에 위기에 처한 한국교회가 점점 쇄락해가는 것은 교회부흥만을 위주로 한 나머지 하나님 중심, 성경중심의 진리를 포기하고 번영신학과 신앙에 매몰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우리 선조들이 목숨 바쳐 지켜온 성경진리를 지키고 순교적 신앙을 회복하여 칼빈주의적 장로교회의 본래 모습을 되찾아 세계선교의 교두보 역할을 했으면 하는 바램이 간절하다.
■ 한국칼빈주의연구원장(ICSK) 정성구 박사 전 총신대 총장, 대신대 총장
교회 개혁과 언약도 운동
작년에 종교개혁 곧 교회개혁(Reformation of Church) 500주년을 맞아
기독교 언론매체나 신문 잡지에서 교회개혁의 의미를 되새겼다.
그래서 루터와 칼빈의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을 살펴보았다. 그 후 1년이 지났다. 종교개혁 500주년이 단회적 행사였는지 지금 한국교회는 진정 교회개혁의 의지는 있는 것이며, 그 방향은 있는가를 질문해 볼 때, 부끄럽게도 우리 교회들은 개혁의 관심도, 의지도 별로 없는 듯하다. 물론 교회는 끊임없이 개혁되기도 해야 하지만, 또한 부흥 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최근에 교회를 비판하는 사람들이나 일반인들 중에는 대형교회를 고운 시선으로 보지 않는 경향이 있는데, 그렇다고 작은 교회는 모두 아름답고 훌륭하거나, 매가처치(Mega Church)가 모두 문제라는 식의 이분법은 맞지 않다. 교회당의 크기나 교인의 숫자와는 아무 상관없이 목회자나 성도들이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얼마나 진실하게 따르고 진리를 사수하기 위한 열정과 헌신이 있는지를 문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한 세상의 변화가 있는지가 문제이다.
오늘의 현실을 살펴보니 노회에 등록된 목사들 거의 절반이 무임 목사라는데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 무임목사 또는 연약한 개척교회 목사님들의 고단한 삶은 그저 짐작하고도 남는다. 필자도 일찍이 농촌 개척교회를 3년간 목회한 경험이 있다. 교회당이라고는 천정도 마루도 없는 20평 정도의 브로크 건물에서 가마니를 깔고 두 명을 놓고 시작하면서 개척 전도자로서 눈물을 뿌려본 경험이 있다.
지금 한국교회는 어느 교단을 막론하고 이른바 대형교회는 손에 꼽을 정도이고 200명 이상 넘는 성도들이 출석하는 교회는 불과 20%에 불과하다. 나머지 80%는 열악하기 그지없다. 그럼에도 정부는 목사로부터 세원을 개발하고 세금을 거두어들이려 하고 있다. 그렇다면 연약한 개척교회 수준의 교회는 마땅히 정부가 지원을 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개혁이니, 부흥이니를 논하기조차 민망할 지경이다.
그래도 교회는 교회되어야 하고, 목사는 목사다워야 하고,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는 사명은 여전하다. 그러므로 이 글에는 17세기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목사와 평신도 지도자들이 벌였던 <국가 언약도들>의 삶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우리가 흔히 영국교회를 말할 때 청교도(Puritan)를 주로 말하고 있다.
청교도들은 로마 카톨릭과 국교회 운동에 대항해서,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설교운동을 통해서 백성들을 깨우고 이끌고 나갔던 청교도 운동은 오늘에 되살려야 할 위대한 유산이라고 본다.
칼빈의 신학과 페트릭 헤밀턴과 위쉬하르트의 순교의 영향을 받은 존 낙스의 불꽃같은 설교자를 따라서, 예컨대 리차드 벡스터(Richard Baxter), 윌리엄 퍼킨스(William Perkins), 토마스 굿윈(Thomas Goodwin)등의 성경적, 복음적 설교는 오늘의 우리들에게 놀라운 영감을 준다.
그런데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청교도 운동이 너무 강조된 반면에, 스코틀랜드 장로교인들이 벌인 언약도(Covenantor) 운동은 가리워진 것이 사실이다. 사실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 곧 영국은 아니다. 물론 왕실의 통합과 분열이 일어나서 같은 나라로 보아 이른바 대영제국(Great Briton)에 포함시키기는 하지만, 스코틀랜드는 엄연히 영국이 아니다. 요즈음 스코틀랜드에 가서 너희들은 영국인이냐 하고 묻는다면, 그들은 정색하고 힘주어 우리는 스코틀랜드인이라고 대답한다.
사실 제2 교회개혁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청교도 운동과 청교도 설교 운동은 참으로 다양하였다. 거기는 장로교회, 감리교회, 침례교회, 성공회 우파 등 참으로 다양하였다. 그러나 스코들랜드 언약도 운동은 순전히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목사와 평신도 지도자들이 생명을 걸고 진리를 지키고, 신앙의 정조를 지켜낸 운동이다.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목사와 평신도들은 국왕 챨스 1세가 왕권신수설(Divine Right of Kings)을 주장하면서, 국왕은 국가의 머리인 동시에 교회에도 머리라고 칙령을 내리면서 로마 카톨릭, 성공회, 감독교회로 되돌리려고 공작했다.
그 때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는 언약도 운동의 지도자요, 언약도의 신앙고백을 초안한 순교자인 알렉산더 헨더슨(Alexander Henderson, 1646)목사를 중심으로 하원의원, 귀족, 남작, 공민, 평민, 장관, 목사 등이 교회를 박해하는 잘못된 국가 권력에 생명 걸고 항거했다.
국왕이 말하기를 「짐은 국가에도 머리이고, 교회에도 머리」라고 주장하자, 언약도들은 교회의 머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이고, 성경만이 신학과 신앙과 삶의 유일한 표준인 것을 천명했다. 그러자 국왕과 카톨릭과 성공회는 순수한 성경적 신앙을 지키려는 장로교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스코틀랜드 언약도들은 1638년 2월 28일 1,200명의 성도들이 에딘버러 그레이프라이어스(Greyfriars) 교회당 앞뜰에 모여 저들의 신앙고백을 육필로 쓰고 1,200명 중에 대표들이 서명을 했다.
이로 말미암아 그들은 지붕 없는 감옥에 갇혀서 추위와, 굶주림으로 모두 순교의 잔을 마셨다. 그들은 마음만 먹었다면 얼마든지 모두 탈출 할 수 있었지만,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를 지키며 기꺼이 순교했다. 순교자들이 굶어죽거나 얼어 죽으면 시체는 에딘버러대학의 해부학교실로 보내져서 해체되고 연구 자료로 쓰였다.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그래서 해부학의 최대권위는 에딘버러대학이 되었다.
언약도들에 대한 박해는 1, 2년에 끝난 것이 아니고 1638~1688년까지 장장 50년간 계속되었고 그동안 언약도들은 목이 잘리거나 배가 갈라지는 등 18,000명이나 순교했다. 언약도들은 로마 카톨릭의식과 성공회 감독주의와 왕권에 도전하여, 하나님 중심 신앙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지키어 오늘날의 장로교회를 세웠다. 청교도들은 미국으로 가서 조합교회(Congregational Church)를 세웠지만, 후일 언약도들이 미국으로 가서 장로교회를 세웠다. 이 장로교회는 유럽에서는 개혁교회라 부른다. 그래서 언약도들이 직접세운 교회를 개혁장로교회(Reformed Presbyterian Church)라고 칭한다.
금년은 스코틀랜드 국가 언약도가 왕권과 교황권에 도전해서 하나님과 진리 안에서 살기로 언약식을 한지 350주년되는 해이다. 또한 금년은 화란에서 전세계 개혁교회 학자들 100명이 모여서 도르트신경(Dordt Canon)을 결정하고, 인간의 전적타락(Total Depravity)과 하나님의 항거할 수 없는 은혜(Irresistible Grace)등을 발표한 지 400주년되는 뜻있는 해이다. 한편 한국장로교회는 일제의 신사참배 요구에 굴복하여 1938년 27회 장로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한지 80주년 되는해이다. 물론 일제의 신사참배를 개인적으로 반대한 주기철 목사, 이기선 목사, 손양원 목사, 박관준 장로 등 50여명이 순교했다. 또한 신사참배를 소극적으로 반대하면서 해외로 망명했던 분들도 여럿 있었다.
뿐만 아니라 한상동, 주남선, 손명복, 이인재 목사 등이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6, 7년 옥고를 겪은 산 순교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개인적으로 신앙의 정조를 지키기 위한 것이며 소수였다. 또한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박해에 맞서 순교한 분들도 결국은 개인적으로 신앙의 순결을 지키고 말씀대로 살려던 분들이다.
그렇지만 한국장로교회는 부끄럽게도 신사참배는 종교가 아니고 국가의식이라는 변명으로 성명을 내고, 신사참배를 가결한 후 총회 지도자인 목사, 장로들이 솔선수범하여 일본신사에 가서 참배하였다. 특히 1943년 한국교회가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이 된 후에는 주일예배 중에 동방요배를 한 후에 황국신민으로 충성맹세를 하고, 일본 천황을 찬양하는 노래인 우미유가바를 부른후에, 묵도로 예배를 드렸고, 애국헌금을 모아 전투 비행기를 만들어 일제에 헌납하고 이를 <장로호>라고 명명했다. 한 편 감리교는 전투 비행기 3대를 헌납했다. 그러니 한국교회는 과거에 여호와와 바알을 동시에 섬긴 죄와 트라우마가 있다.
그 후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변명은 그 당시 일경의 강압에 어쩔수 없이 일제에 협력하고 신사참배를 했다고는 하지만, 1,200명의 목사와 평신도들이 성경의 진리와 교회의 순결과 교리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서 범교회, 범교단적으로 그릇된 국가 권력과 왕명에 항거하여, 하나님 앞에서 참된 진리를 지키기로 언약하고 기꺼이 순교의 길을 택한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언약도들의 삶과는 너무나 대조된다. 일경과 공산당에게 총 맞아 죽었다고 해서 모두 순교자라 할 수는 없다. 순교자는 분명한 창조주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과 확신 때문에 순교해야 참 순교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입만 열면 개혁이니 부흥이니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아니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정부와 국회가 동성애를 지지하고, 거짓된 이데올로기를 허용하고 교육을 통해서 역사를 왜곡하면서, 대형교회의 비리를 들추어내어서 공개적으로 언론이 이슈화하고, 교회가 마치 비도덕적 집단의 온상 인 듯이 몰고 가고 있는 것은 사실은 부끄러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교회는 머리 밀린 삼손처럼 아무 힘이 없다. 평화만 이루어지면 이념이나 진리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식으로 말하는 자들이 늘어나도, 강단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을 세우고 성경적 교리를 지키려고 뜨겁게 고함치며 발을 굴리는 목회자가 없다. 이 시대에는 선지자가 없어졌다. 평화와 타협과 화해만이 능사가 아니다. 국왕 앞에서 성경진리를 위해 생명을 걸었던 언약도가 그립다.
역사는 반복되는가? 오늘날도 교회의 순결과 교권을 허물어 버리려는 세력이 있고, 진리를 파괴하려는 공권력이 있다. 이런 때에 우리는 제2 교회개혁 운동이었던 스코틀랜드 국가언약도(National Covenant of Scotland)의 운동을 다시 생각한다.
(*이 스코틀랜드 「국가언약도의 신앙고백과 서명장」 원본(70X90Cm)은 지금 한국칼빈주의연구원, 칼빈박물관에 소장하고 있다.)
▲1638년 스코틀랜드 국왕이 왕권 신수설을 주장하면서, 국왕은 국가의 머리일 뿐 아니라 교회의 머리라고 하자 1,200명의 장로교 성도들이 이에 반대하여,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머리임을 공포하고 여기 서명하여 언약도가 되었다. 이들은 지붕 없는 감옥에서 모두 순교했다. 그리고 언약도를 박해하던 50년 동안(1638~1688) 바른 교리와 신앙을 지키려던 장로교 언약도 18,000명이 처참하게 순교했다.(한국칼빈주의연구원 및 칼빈 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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