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사항
[Osola 유튜브] (2)편까지입니다. '기독교 자료' 블로그 '오디오 칼럼' 게시판에 다른 자료들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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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역사 안의 시편찬송
Reg Barrow 著, 지형기 譯
1.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
경외함으로 성경을 읽는 것;이해와 믿음과 존경으로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참된 설교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는 것; 은혜의 마음으로 시편을 찬송하는 것; 예수님에 의해 제정된 성례식을 시행하며 받기에 합당한 것으로 받는 것; 이러한 것들은 하나님에 대한 당연한 종교적 예배이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1문 5항, 1647). 회중이 모일 때나 사적으로 가정이 모일 때 시편을 찬송하면서, 공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기독인의 의무이다(하나님께 대한 공예배 규칙서; Said 규칙을 심의하고 입법화한 1645년 Anno에서 개최된 일반 의회에서 종교의 언약적 연합의 분과인 웨스트민스터 목회자 회의와 국회에 의해 인정됨).
제2계명에 따르는 의무들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제정하신 모든 종교적 예배와 명령을 받고, 살피고, 그리고 순수하고 궁극적으로 지키는 것이며 반대로 거짓된 예배를 인정하지 않으며, 혐오하며, 반대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의 필요와 요구에 따라 예배를 제거하는 것과 우상 기념물을 반대하는 것이다(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108문항, 1648). 제2계명에서 금하는 죄들은 하나님 스스로 제정하지 않으신 종교적 예배를 고안하고, 의논하며, 명령하고, 사용하고, 어떤 모양으로든 인정하는 것들이며, 거짓 종교를 용납하는 것과 하나님의 삼위나 그 중 어느 한 위의 형상이라도 내적으로 우리 마음 속에 가지든지 외적으로 피조물의 어떤 형상이나 모양이나 만든 것이며, 이 형상이나 혹은 이 형상 안에서나 그것에 의해 하나님을 예배하는 모든 일이며, 거짓 신들의 형상을 만들고, 그들을 예배하며 섬기는 것이며, 우리 자신들이 발명하고 취하든지 전통을 따라서 사람들로부터 받았든지 옛 제도, 풍속, 경건, 선한 의도 혹은 다른 어떤 구실의 명목으로 예배의 요소들을 추가하거나 제거하여 하나님의 예배를 부패하게 하는 미신적인 고안, 성직 매매, 신성 모독, 하나님이 정하신 예배와 규례들에 대한 모든 태만과 경멸, 방해, 반항이다(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109문항, 1648).
제2계명을 강화하기 위해 부가된 이유들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과 우리 안에서의 우월함과, 그분 자신의 예배를 위한 강렬한 열심과, 영적인 간음인 모든 거짓 예배에 대한 그분의 강한 진노에 있다. 즉, 이 계명을 어긴 자를 자신을 혐오한 자로 판단하시고, 그들을 여러 세대까지 벌하시기로 위협하시는 반면에, 이 계명을 지키는 자들을 사랑하는 자로 높이시고 그분의 계명들을 지키도록 인도하시며 여러 세대에 그들에게 자비를 약속하신다(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110문항, 부분발췌, 1648).
본 회보를 통해서 공적 예배시 부르는 노래에 있어, 하나님을 찬양하는 오직 적법한 역사적, 고백적, 그리고 가장 중요한, 성경적 방법은 시편찬송임을 굳건히 하려는 데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 우선적으로 본인은 본 회보에 있어서 이 점이 가장 큰 하나의 명령임을 밝힐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 글을 통해 할 수 있는 전부가 사람들로 하여금 이러한 중요한 점에 관심을 기울이도록 용기를 북돋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미 어느 정도의 성공을 이룬 셈이다.
많은 개혁주의 교계가 공격당할 수 없는 성경 해석학적인 힘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자신의 유산인 독특한 시편찬송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살펴봄으로써, 성경을 연구하고 우리 선조들의 지혜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하는 격려가 흘러 지나가는 소리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바이다. 이는 커다란 강조점을 주요한 개혁주의자들의 사역들 전반에 걸쳐 나타난 예배에 관한 토론의 중요성에 부여하는 것이다.
1539년, "왜곡되고 곡해된 예배보다 우리 구원에 있어서 더욱 위험스러운 것은 없다는 점을 당신이 인정하도록 하는데 있어 나는 아무런 어려움도 없소!"라고 칼빈이 로마카톨릭 학자인 Sadoleto 에 대해 답변한 것은 이러한 관점에서의 한 예가 되겠다. 그리고 "여러분이 우상숭배를 거부하므로써, 조국에서 쫓겨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상숭배자들은 끝없이 타오르는 지옥 불속에 몸과 영혼이 버림을 받게 될 것입니다."라고 John Knox가 말했을 때에, 그는 평소처럼 강하게 인간에 의해 고안된 거짓된 예배를 사랑하는 자들의 결말을 밝혔습니다.
이러한 논의는 개혁주의자들과 우리들에게 있어서 단지 학문적인 논쟁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 논의 안에는 영생과 영원한 죽음의 문제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주님은 예배에 있어서 인간의 고안물들에 대해 계속적으로 경고하셨고, 여기서 논의되어지는 바로 그 원리들과 관련된 죄들로 인해 주님의 가장 냉엄한 심판이 개인들과 국가들에게 있을 것이다(계21:8, 역대하24:27, 갈5:19-21). 반대로, 시편찬송은 기독교인들의 삶에 있어 가장 큰 기쁨 중에 하나이다. 하나님 스스로 제정하신 방식으로 찬양을 돌려드릴 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놀라운 축복이 함께 했었고, 또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2)
2. 역사적 증거
역사 언약은 우리에게 가장 흥미 진진한 장면을 드러내 준다. 그 장면 속에서 우리 주님은 위대한 빛으로 이 세상에 임하기를 간구하는 성도들의 기도를 받으셨을 때, 공예배시 유일하게 시편찬송을 부르도록 하기 위해 그의 인성의 빛을 소유한 자들에게 은혜를 주셨다. 사실, 이러한 언약은 너무나도 분명하여 거의 논쟁의 여지가 없었으며 오직 시편찬송을 부르는 것에 반대하는 자들에 의해서도 이미 인정된 바이다. 최근의 논문에서, Gary Crampton은 이러한 부류 중의 한 사람이었는데, 그는 수 세기의 교회 역사를 통틀어서 오직 시편찬송만이 개혁주의 교회에 속한 자들에 의해서 비중있게 인정되었다는 사실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고 말했다.
3. 초대 교회(The Early Church)
초대 교회와 관련해서, Bushell은 "교회 예배안으로 비영감적인 찬송이 나타난 것은 점차적인 과정 속에서의 일이었으며, 4세기가 돼서야 비로서 널리 퍼지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G. I. Williamson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두번째로 가치있는 사실은 비영감적인 찬송이 처음으로 등장했을 때, 그러한 현상은 오히려 정통 교회 내에서라기 보다는 오히려 이단 집단에서 나타났다. 만약 초기부터 교회가 사도들로부터 그러한 찬송을 만들고 이용하도록 권위를 부여받았다면, 그러한 현상이 나타나리라 쉽게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그러한 현상들은 처음받았던 믿음에서 떠났던 사람들 사이에서 나타났다."고 지적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증거는 예배의 규율적 원리를 고수하기를 주장하고 공예배시 비영감적 찬송 사용을 유지했던 사람들에게 많은 흥미로운 질문들을 야기시겼다.
첫째로, 만약 시편찬송이 불충분하다면 왜 예배를 위한 새로운 노래들을 만들도록 하는 계명이 없는가? (그 계명이란 고작 이미 존재하는 노래들을 부르도록 하는 계명이다.)
둘째로, 만약 하나님을 찬양하는 새로운 방법이 필요했다면 왜 사도들은 성령의 감동하에서 새로운 노래들을 작사(作詞)하지 않았을까?
셋째로, 어째서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교회 문서들 가운데서 비영감적인 찬송의 어떤 부분들도 발견되어 지지 않는가? 게다가 정통 교회에서는 이단적인 찬송-비영감적 찬송-들을 작사하기 전까지 그러한 찬송을 예배시 이용했다는 한마디의 언급도 찾아볼 수가 없으며 2세기 후기가 되기까지 그러한 찬송 사용에 대한 일체의 흔적도 없었다.
넷째로, 5세기로 접어들면서 왜 비영감적인 찬송이 나타나는 것에 대한 강한 반대가 있었는가? Laodicea 종교회의(A.D. 381)와 Chalcedon 회의(A.D. 451)는 비영감적인 찬송의 등장에 대해 반대하였다.3) 뿐만아니라 Bushell은 "9세기 말엽에 우리는 순수한 시편 찬송의 지지를 보낸 초기 교회 회의에 대한 호소(매력)들을 발견한다"고 말하였다.
4. 종교 개혁(The Protestant Reformation)
16세기 종교개혁시기에 들어섰을 때, 우리는 "보통의 사람들에 대해 성경을 부인하는 동일한 교권주의(clericalism)는 마침내 시편찬송을 부인했을 뿐 아니라, 무수한 예배자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말로 되어진 합창곡들을 회중찬송으로 대체하였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종교 개혁이 진행되면서 우리는 시편찬송으로의 완벽한 회귀가 이루어짐을 볼 수 있었다(예배에 있어서 오직 성경이라는 원리를 적용하지 않은 루터주의자들을 제외하고는). Bushell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스코틀랜드 개혁주의자인 John Knox는 이 점에 있어서 놀랍게도 Calvin를 따르지 않았다. 물론 전체로서의 개혁주의 교회는 그들의 노선을 따랐다. "이는 개혁주의 교회가 엄청난 분량의 라틴 찬송과 그러한 찬송을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데에서 스스로 단절시킬 때, 교회 찬양의 신성한 도구로서 구약의 시편찬송을 채택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칼빈주의자가 되는 것은 시편찬송을 부르는 자가 되는 것과 같았다. 종교개혁이 일어난 지 2세기 내지 2세기 반 동안 일반적으로 시편찬송외에는 어떤 찬송도 예배에서 허용되지 않았다. 운율을 갖춘 시편찬송은 칼빈주의 원리를 고수했던 모든 사람들에 의해 가르쳐지고 유지된 제네바 교회에서 태동되었다. 뿐만 아니라, 칼빈이 시편 찬송에 부여한 중요성은 다음의 글에서도 드러난다.
의회가 Bern의 견해를 수용한 예배 규정에 대해 거부안을 제출한 이유로 칼빈과 파렐이 제네바 시에서 추방될 때(1538년 4월 23일), 그들은 1538년 4월 29일 쮜리히에서 개최된 교회회의에 자신들의 사건을 의뢰하였다. 그 때 자신들이 제네바로 돌아가기를 염원하는 타협안을 담고 있는 14개의 글들이 칼빈에 의해 작성되었고, 그것을 제출하였다. 그들은 자신이 매우 엄격했다는 것과 논쟁을 일으켰던 다수의 규정들을 기꺼이 수용한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다른 몇 가지 점에 있어서는 여전히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들은 더욱 자주 주의 성만찬식을 시행하는 것과... 그리고 공예배의 한 부분으로서 시편찬송을 제정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것은 진리를 위한 지극히 강한 입장이었고 우리가 아는바대로, 칼빈은 제네바로 되돌아 갔으며, 시편 찬송이 시작되었다. 그가 더욱 성숙했을 때, 제네바시의 공예배시에는 오직 시편 찬송(무반주 찬송)만을 부르도록 규정을 제정하였다. 비영감적인 찬송에 대한 칼빈의 논쟁의 진행과 관련해 한가지 흥미로운 역사적 사실은 Bushell이 쓴 다음의 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리 모두가 반드시 알아야 하는 바와 같이, 칼빈은 그의 최후 해석에서 신중함의 사려와 양심의 사려는 동일한 일에 대해 말하고 있음을 알았다. 다른 일들과 마찬가지로, 예배 노래에서도 하나님은 우리가 드릴 수 있는 최고의 노래를 받으실 만한 분이시다. 다른 요소들이 더 나을 것이다라는 신중함이 발동할 때, 경건한 사람은 어느 누구도 깨끗한 양심으로 찬양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릴 수 없다. "그분 스스로에게서 비롯되어진 찬양을 하나님이 받지 않으신다면,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받으실 만한 찬양을 드릴 수 없다." 그리고 "인간은 자신들이 만든 노래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 양심의 거리낌을 갖고 있지 않다"라고 한 칼빈의 결론을 주목하는 방식은 우리의 이해력을 훨씬 뛰어 넘는다.
칼빈이 어거스틴(시편 31편에 관한 제1설교)에게서 가져와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 이러한 민감성은 하나님을 예배함에 있어서 비영감적인 찬송을 사용하는 점에 대한 모든 논쟁들의 바로 그 심층부에 자리잡고 있다. 시편찬송의 우월성에 대한 칼빈의 고집과 규범적 원리들의 옹호, 그리고 칼빈이 시편찬송에 스스로를 한계지었던 피할 수 없는 결론에 대한 모든 점들....
이러한 것은 시편 찬송을 채택하지 않는 여타의 모든 것들이 그릇되다고 칼빈은 생각했기 때문이다. 개혁주의 교회는 전체적으로 이러한 신념 안에서 그를 따랐으며 거의 2세기 동안 그 점을 고집스럽게 지켰다. 현대의 장로회의 예배는 이러한 점에서 칼빈의 이름을 언급할 권리가 없다. 자신의 발걸음을 따라왔다고 주장하는 오늘날의 교회에서 정작 불려지는 노래를 듣고서 칼빈은 침통한 마음으로 눈물을 흘렸을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제네바의 개혁주의자들은 분명히 시편찬송을 부르던 자들이었다는 점은 여전히 사실로 남아있다.
5. 청교도주의의 표지(The "signature of Puritanism)
시편을 찬송하는 것은 곧 "청교도주의의 표지"였다. 루터주의자가 아니라 칼빈주의자들인 영국 청교도들은 오직 합당한 예배 노래는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시편찬송이라는 견해를 견지했으며 이러한 점은 칼빈의 확신이기도 했다. 그래서 제네바 교회에서는 설교전후에 운율적 시편을 불렀다. 우리의 칼빈주의적 유산은 바로 시편찬송을 부르는 것이요, 따라서 그 유산을 져버리기를 택한 우리 개혁 교회들은 더 이상 예배의 형태에 있어서 칼빈주의적이지 않다.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시편찬송에 대한 연구는 웨스트민스터 의회의 노작들에 대한 문헌이 없이는 온전해 질 수가 없다. 이는 더 이상 시편찬송을 고집하지 않는 장로교회들 내에도 웨스트민스터 기준이 미약하나마 교리적 권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웨스트민스터 신학자들이 하나님을 예배함에 있어서 오직 시편만을 찬송하도록 인정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은 가치있는 일이다. 이러한 점에서 예배시 비영감적 찬송 사용에 대한 웨스트민스터 고백을 확인하고자 하는 시도에 대한 주된 논쟁이 나타난다. 고백서의 저자들은 성경적 예배의 규범적 원리들이 공예배시 모든 요소들에 대한 신적인 제정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고백서의 저자들이 성경에서 예배에 대한 신적인 제정을 발견하지 못했거나 이러한 부분을 고백서에 포함하지 않았을 것이다란 가정은 규범적 원리 그 자체를 잘못 이해한 점에의해 생겨 난다. 이것은 성경에서 금해지지 않은 것은 허용할 만하다고 한 루터주의자들의 견해이며, 이와는 반대는 칼빈주의자들은 성경에의해 제정되거나 성경에 기록되어진 것만을 필요로 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이점이 오늘날의 일반적인 오류이며, 심지어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할 장로교인들 가운데서도 이러한 오류들이 범해진다. 사실, 기록되어진 모든 문서들에 의하면, 비영감적 찬송이 예배 노래로서 적당하다는 생각에 대해서는 웨스트민스터 의회에서조차 논의되지 않았고, 단지 시편에서 '벗어나는' 예배시행에 대한 것과 시편찬송으로 Rous와 Barton의 'Metaphrase'판(版)중 어는 것을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어느정도의 논의만이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사실은 (공예배와 관련해서) 오직 시편찬송을 부르는 것을 제외할 경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정신과 문자의 파괴가 필연적으로 따라온다는 말과 다를 바 없다.
Bushell은 우리의 개혁주의 정신의 연구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신조적인 강압의 부재와 비영감적인 찬송이 흘러 넘쳤던 여타의 다른 종파에 의해 개혁교회에 끼쳤을 영향력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개혁주의와 장로주의 교회에서 불려졌던 유일한 시편찬송의 시행은 종교개혁후 2세기 동안 너무나 한결같이 지켜져 왔기 때문에 그 시기동안 예배의 시행에서 교회적으로 용인된 비영감적 찬송의 사용에 대한 명백한 증거들이 오늘날 존재하지 않는다.
짧은 역사적 조망을 통해서, 왜 개혁주의 역사에 대한 미약한 지식만으로도 오직 시편찬송을 부르는 것에 대한 역사적 논쟁들을 인정했는가 하는 이유들을 살펴볼 수 있었다.4)
6. 예배안에서의 오직 성경
역사가 아니라 오직 성경만이 우리의 최종 권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물론 역사적인 고찰이 도움을 주기는 했지만),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부분도 성경적인 근거하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첫째, 만약 인간이 문자 그대로 제단이나, 향불, 기타 여러 가지의 사용을 공예배시에 제정하려고 한다면, 계시의 책(성경)의 상징적, 특징적 의미들은 오늘날 더 이상 예배를 위한 안전한 안내자로 여겨질 수 없게 된다. 둘째로, 오직 시편찬송에 대한 거의 대부분의 논쟁들이 부정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이러한 반시편찬송의 논쟁들은 시편찬송의 입지가 옳지 못하다는 점을 인정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며, 반대로 규범적인 예배원리를 고수한다면, 오직 시편 찬송에 반대하는 부정적 논쟁들로 인해 생길 수 있는 '비영감적 찬송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제정하려는 것'을 인정할 수 없게 된다.
규범적인 예배 원리를 고수한다고 말한(그러나 여전히 공예배의 노래로써 비영감적인 찬송을 사용하는) 한 저명한 목사로부터 비영감적 찬송의 성경적 제정에 대해 나는 개인적으로 그점에 대한 증거를 요구했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어떠한 답변도 얻지 못했다. 그렇다면 혹, 당신은 이점에 대한 증거들을 제시할 수 있는가? 이것이 바로 비영감적 찬송을 고집하는 사람들의 약점이다. 공예배(신약시대)시 비영감적 찬송의 제정에 대한 승인이 성경 어디에 있는가? 윌리암슨은 그러한 혁신(현대의 비영감적 찬송들)을 조성하는 사람들에 의해 직면한 극복할 수 없는 장애물들과 관련해 다음의 점들을 지적하였다.
예배시 비영감적 찬송을 사용함을 보여주는 문서적 증거들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은 사소한 중요성을 갖는 것이 아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이 자신의 교회에게 예배시 시편찬송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을 부르라고 명하셨다는 점을 단 하나의 성경구절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이점에 대해 사람들이 부지런히 찾아보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몇 해전, 정통장로교회(Orthodox Presbyterian Church:OPC)의 한 분과(分科)위원회에서 이러한 시도들을 했었다. 이 위원회는 예배시 비영감적 찬송을 부르는 것에 대해 대부분 찬성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몇 년에 걸친 성경연구 후에, 그러한 증거들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 위원회의 의장은 비영감적 찬송이 성경에서 권위를 부여받았다란 사실을 증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을 인정하였다. 그는 심지어 선한 양심으로 비영감적 찬송을 부를 수 있기 전에 그러한 증명을 요구하는 것은 불가능 자체를 요구하는 것과 같다고 말하였다(The Presbyterian Guardian, Vol.17, p.73). 이것은 참으로 중대한 인정이다. 그러나 그 사실자체만으로도 충분하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신성한 예배시 비영감적 찬송의 사용을 명하는 단 하나의 성경구절도 찾을 수 없다라는 진리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명하신 방법 외의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아울러 기억하라.
이러한 위치에서, 비영감적 찬송을 지지하는 자들은 본인이 지금까지 에베소서 5장19절, 그리고 골로새서 3장16절을 생각하지 않았다라고 주장할 것이다. "비영감적 찬송부르기" 전통에서 생겨난 이러한 성경구절은 오히려 내가 애초에 견지했던 주장을 지지해 주는 것들이다. 그렇다면 윌리암슨이 제기한 다음을 살펴보자.5)
성경 용어의 적절한 해석은 오늘날 우리가 그 용어를 사용할 때의 의미하는 바가 아닌, 영감된 성경 저자들이 그 용어를 사용했을 그 당시의 의미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이 "시편(psalm)"과 이것을 대치했던 용어인 "찬송(hymns)"과 "노래들(songs)"의 의미를 추론하는 데 적용된다. 사실인즉슨, 이 세가지의 용어들이 구약성경의 시편찬송을 의미했던 다양한 용어로 성경에서 사용되어졌다는 것이다. 헬라어로 번역되어진 구약성경을 접했던 에베소인들이나 골로새 사람들에게 있어서 시편찬송은 곧 "시편"이란 제목으로 불리어졌다.
헬라어로 번역된 구약성경책에서 사용된 67개의 제목으로 "시편"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그중 6개의 제목은 "찬송(hymn)", 35개의 제목은 "노래(song)"가 사용되었다. 더욱 중요한 것으로, "시편"과 "노래"가 함께 사용된 경우가 12개, "시편"과 "찬송"이 같이 사용된 경우가 2개나 있다. 시편76편은 "시편, 찬송, 그리고 노래"의 의미로 쓰였다. 그리고 시편72의 마지막에서 '이새의 아들 다윗의 찬송'이란 부분을 읽을 수 있다(시편72:20). 환언하면, 사도가 "시편찬송"을 말할 때는 그가 "찬송"이나 "노래"를 말하기 보다는 "시편"을 의미했다라는 사실을 더 이상 생각해 볼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가지 용어가 "시편찬송"을 의미했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우리들은 시편찬송이 아닌 "찬송"이나 "노래"라는 용어들을 사용하는데 익숙해져 있다. 그러나 바울과 에베소와 골로새 지역에 있었던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용어들을 성경자체의 용법대로, 즉 구약 시편찬송의 다양한 시편들의 제목으로 사용한 것이다. 우리에게 그것은 매우 낯설거나 심지어 불필요하게 보이지만, 성령은 자신의 영감된 곡들을 기술하기 위해 다양한 제목들을 사용하셨다. 그리고 사실 역시 그러했다.
성령께서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신30:16)를, 그리고 "권능과 기사와 표적"(행2:22)을 말씀하신 것처럼, 그는 "시편과 찬송과 노래"를 말씀하신 것이다. 명령과 규례와 법도 모두가 성경의 언어로 모두 신성한 율법을 의미하는 것처럼, 권능과 기사와 표적이 모두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을 의미하는 것처럼, 시편(시)와 찬송과 노래는 바로 영감되어진 시편 찬송곡들을 의미한다. 신약성경은 이러한 결론을 보충한다.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저녁 만찬 때, 주님과 제자들은 찬송(hymn)을 불렀다(마26:30). 성경 주석가들은 이것은 유월절날 늘 불리우던 하렐시편(115-118편)의 두 번째 부분이었다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마태는 시편이 성경 용어상으로 찬송이었기 때문에 시편을 찬송으로 회상했던 것이다(신성경 주석 p.815). 동일한 측면이 히브리서 2:12에 인용한 구절에서 나타나는데, 구약이 시편과 찬송사이에 구분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헬라어 "찬송"은 바로 시편 찬송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성경에서 "시편"이 "찬송"으로, "찬송"이 "시편"으로 사용되었다면, 왜 우리는 그것을 굳이 구분지어야만 하는가? 만약 사도가 성경적인 의미에서 성경적 언어를 사용했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성경에서 영감된 시편을 찬송으로 표현하였기 때문에, 사도가 비영감적 찬송이란 말을 이 구절에서(골3:16, 엡5:19) 사용했다고 생각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
게다가, 이 구절에 관련된 윌리암슨의 설명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몇 가지 중요한 문제를 야기시킨다. 위에서 언급된 구절이 쓰여진 시기동안 비영감적 찬송이 존재했다는 어떠한 증거도 없음을 이미 살펴보았다. 오직 영감된 시편찬송(예를들면, 시편, 찬송 그리고 신령한 노래들) 만이 그 당시 공예배시에 사용되었다. 그리고 어느 곳에서도 이미 존재하는 신령한 시편 찬송을 무시하고 부가적인 찬송을 만들도록 명한 성경 구절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규범적 예배 원리에 오류가 있다는 것인가?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만약 위 구절이 그들이 주장하는대로 이해됐다면 초대 교회들에 의해서 지어진 새로운 노래들이 왜 없단 말인가?
사도들 자신들도 우리가 알고 있는대로 영감적 찬송이나 비영감적 찬송을 만들지 않았다. 이 점이 오늘날 현대의 "찬송가"로서 위 구절을 해석하지 않았다는 점을 보여주는데 도움을 준다. 또한, "찬송과 영적인 노래"에 현대적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접근하는 방법은 의심의 여지가 많고 예배시행에 있어 명백한 성경적 근거를 위한 규범적 원리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할 뿐 아니라, 성경의 문법-역사적 해석의 기반을 무너뜨리는 것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에베소서 5장 19절과 골로새서 3장 16절을 오직 시편 찬송의 관점에 반대하는 의미로서 볼 수가 없다. 이는 시편찬송으로 보는 해석이 완벽하게 들어맞는 반면에, 그러한 점을 반대하는 자들의 성경해석은 존재하는 성경의 어떤 부분에도 걸맞지가 않기 때문이다.
Bushell은 마침내 아주 중요하게 예배에 존재하는 인간 혁신의 문제의 근원을 밝히 드러내었다. 교만과 자만, 그리고 자기 주장은 시편찬송을 음악적 대체물로 대신하려고 기울이는 모든 시도에까지 이르렀다. 윌리암 로메인은 이러한 부분, 즉 예배에서 비영감적 찬송을 지지하는 점에 대해 비평을 가하였다.
"나는 성령보다 더욱 훌륭한 찬송을 만들려고 시도하는 자의 이름을 알고 싶다. 성령님의 찬송곡집은 참으로 충분하다. 그것은 어떠한 첨가도 필요없다. 저자(성령)가 그러하듯이 그것은 완벽하며 어떤 개선도 필요없다. 도대체 그런 경우에, 세상에 어떤 자가 교회에서 사용하기 위해 찬송곡을 쓰려고 의도하는가? 그것은 마치 그가 기존의 성경을 던져 버리고 새로운 성경을 쓰려고 하는 것과 같다.
이 얼마나 불경스런 시도인가? 그리고 내가 생각하기로는, 부주의하게 우리의 찬송 장사꾼들이 이러한 불경스러움을 저질러 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시편찬송을 내동댕이 치고 그들 자신들의 성경 구절을 교회 안으로 가지고 들어와서 아주 기쁘게 찬송을 부르며, 막대한 경제적 이득을 취했다. 결국 이러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축복에 상반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 시편찬송의 충분성과 신적인 기원이 그 자체로 예배에서 오직 시편찬송의 사용을 위한 적절한 논쟁에 부과되어 있음을 본다. 우리가 앞에서 여러 번 지적했듯이, 성경이 예배 중에 권위있게 읽혀지듯이 동일한 범주 안에서 영감적 시편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는 그 사실로 말미암아 예배시 불려져야 할 노래로 자리해야 한다."
7. 시편찬송, 분리 그리고 성만찬
오직 시편찬송을 부르는 것과 관련해 한 가지 중요하고 실제적인 질문이 남아 있다. 이는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라는 속담과 같다. 당신은 우상적인 비영감적인 찬송을 부르는 예배에 참석하면서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가? 나의 대답은 '그렇지 않다'이다. 비영감적인 찬송을 부르는 것은 제2계명을 어기는 것이다. 적어도 공적인 저항 없이 (그리고 이러한 죄를 조성하고 유지시키는 공적인 교회의 치리자들에 대해 정식의 책임을 묻지 않고서) 그러한 예배에 참석하는 것은 제2계명과 제9계명의 위반과 관련한다.
제2계명에서 요구되어 지는 의무에 "거짓된 예배를 부인하고 미워하며 반대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음을 기억하라. 또한 "정당한 소송에서의 부당한 침묵, 악한 행위가 우리 자신들의 책망과 다른 사람들의 항고를 요구할 때에 잠잠하는" 것은 제9계명에서 금하는 것들임을 기억하라. 개혁주의 장로회에 의해 가능한 우리의 언약적 개혁을 위해 행위와 선언과 그리고 증언을 가지고 우리는, 신성한 진리를 희생하면서 교회 연합을 운운하는 맹렬한 외침들과, 자유와 사랑의 우월성을 핑계로 삼는 모든 자들에 대항하여 증명해야 한다. 규범적인 예배 원리가 적용되는 곳에는 중립이란 있을 수 없다.
진정한 기독인은 이 점에 대해 우리가 외쳐온 요구들을 사랑한다. 침묵을 지키는 것은 사랑이 아니며, 형제가 죄가운데 있는 것을 알 때 경고하기를 주저하는 것은 친절함도, 그리고 신실함도 아니다. 이러한 문제들이 여전히 합의되지 않는 한 결코 현실적인 연합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하나님의 예배가 타락하는 곳에는 현실적이고도 지속적인 개혁이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은 결코 오직 시편찬송과 현대의 '찬송'을 동시에 명하실 수 없으신 분이다. 만약 그러한 것들에 아주 힘있게 합법적인 책망을 가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에 대한 거룩함의 의무는 언약 안에 맺어져 있는 것이며, 언약으로부터 벗어나 그것을 더럽히려는 자들에 반대하여 그 언약 안에서 원리들과 예배, 규율들과 그분의 규정들을 다스려가시는 열정을 이해하며, 죄와 죄를 짓는 자들에게서 피하여 책망하기를 거절하는 자들을 책망해야함"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예배에 성경으로 말씀하지 않은 인간의 고안에 의해 덧붙혀진 모든 종류의 우상숭배 관습과 의식들을 혐오하고 미워하고 그것을 끊어버리도록 애써야 한다. 아울러, 모든 이단과 거짓 교리, 그리고 모든 불경건과 모든 종류의 비도덕, 건전한 종교에 반대되는 모든 것을 혐오하고 미워한다. 한편,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그들의 죄에 대해 수긍하거나 연합, 동참, 협력, 응종으로 동의함으로써 인간들의 죄악에 참여하지 않도록 우리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 전혀 다른 예배를 시행하는 자들로부터 분리해야 하는 필연성은 주의 성찬식에 참여하는 문제와 관련해 잘 설명되어질 것이다.
교제와 오직 시편찬송을 다룬 약간의 인용을 가지고 예배 노래에 관련된 일관성을 제시하며 이 소고를 마치려 한다. 원래의 개혁주의 장로교회가 옳았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입장을 포기하는 것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하나의 죄이며, 그 죄의 심각성은 이러한 입장을 포기하는 집단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분리하는 것이 정당할 만큼 큰 것이다. 이는 우리가 계속적으로 죄에 대해 증명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웨스트민스터의 모든 기준을 받아들인다.
이 기준은 "하나님 자신에 의해서 제정되지 않은 종교적 예배를 생각해 내고 이용하고 인정하는 모든 것"을 금하는 제2계명을 선언한다. 계명들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신성한 예배에 사람들로 하여금 시편을 찬송하도록 하고, 사도시대처럼 악기들을 사용함이 없이6) 하나님을 찬송하는 거룩한 의무를 수행하도록 하며, 어두움의 체계로서 은폐주의를 버리도록 하는 것임을 오늘날 우리의 교회는 주목해야 한다. 만약 우리의 이러한 해석이 바르지 않다면 우리는 마땅히 해체해야 한다. 반대로 그 해석이 바르다면 우리의 판결은 판결권을 무시한 채 주의 탁자로 나아오기를 주장하는 사람들에 의해 모든 특별한 부분에서 명예를 얻어야 한다.
그 판단이 옳건 그르건, 우리는 성령께서 친히 영감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시편찬송이 아닌 다른 찬송을 가지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회개함이 없이 주의 만찬 탁자에 앉는 것이 죄인 것처럼 하나의 죄이며, 따라서 우리 교회나 기타 다른 곳에서 그들을 금지하여야 한다는 점을 아울러 견지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세상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이러한 내적으로 중요한 문제에 대해 우리와 다른 입장을 취하는 다른 교회들에 대해서 믿음의 계명을 지켜야만 하는 의무를 지고 있음을 우리가 깨닫게 된다는 사실이다. 교재의 탁자에서 우리의 계명은 절정에 다다른다. 우리가 가장 굳건해야 하는 점에 있어서 나약해 질 수 있는가? 우리가 견고하게 서야 할 곳에서 망설일 수 있는가? 거룩한 산에서 양심적으로 신실하게 서서 그 점을 공고히 할 수 있는가, 그리고 끝까지 그것을 견지함을 의미할 수 있는가? 또는 그것을 우리가 고백하는 것을 반만 믿는 다른 교회들이나 세상에 대해 공고히 하기 위해 거룩한 산을 선택할 수 있는가? 다른 모든 곳에서처럼 이점에 대해서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 온전하신 것처럼 우리도 온전해야 한다(마5:48).
<미주>
1 이 글은 "CHRISTIAN REFORMATION TODAY"에 발표한 Reg Barrow의 "PSALM SINGING IN SCRIPTURE & HISTORY"를 부분 번역하고 원문의 내용에 역자가 각주를 첨가하여 다시 정리한 것이다. 원문에는 각각의 인용문과 인용 구절에 해당하는 각주가 있지만 글의 분량상 삭제하였다. 또한 위와 같은 주제로 최근은 글은 "성경신앙"(1996년 겨울호)에서 미와노부오 교수의 글인 "개혁파교회에서 시편찬송을 부르는 이유"에도 잘 나타나 있는 데 특히 역사적으로 18세기 이후의 개혁파교회에서의 시편찬송의 변화과정을 잘 설명주고 있다.
2 이러한 사고방식(성경해석)은 역사적 개혁주의에 있어서 롬11:36절을 기초로한 중요한 사고방식이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3 최초 3,4세기에는 이단들이 찬송가를 사용하여 포교한 것에 반하여 정통교회는 시편만을 불렀다. 특히 영지주의의 말시온은 그 사상을 전하기 위하여 찬송가를 작곡하였다. 기독교의 교회 회의는 반복해서 시편의 찬송으로서의 충분성을 확인하고 찬송가의 도입을 부정하였다. 325년 니케야 회의나 653년 톨레도회의에서는 시편을 완전히 자기의 것을 삼지 않는 사람은 감독이 될 수 없도록 결의 하였다.(같은 책 p. 82)
4 미와노부오 교수는 그의 글에서 찬송가의 등장은 특히 18세기 이후에 대각성운동이(부흥운동) 일어나면서 시편이 찬송가로 바뀌어졌다고 제시하고 있으며, 또한 영국에서 1707년 아이작 와트가 쓴 찬송가들이 교회에서 사용되기 시작했다고 말하고 있다.(같은 책 p. 84)
5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골3:16).
"시(psalm)와 찬송(hymns)과 영적인 노래(songs)를 지어 말하고, 너희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아름다운 곡조를 만들고" (엡5:19).
6 Calvin은 그의 시편 주석에서 악기에 대한 사용은 구약의 제사제도 처럼 의식법으로서 현재는 사라진 것으로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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