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에 유익한 글 350

칼뱅, 교회법령을 만들다 (칼뱅과 제네바교회 이야기 8)

칼뱅, 교회법령을 만들다   임종구 목사의 칼뱅과 제네바교회 이야기 (8) ​임종구 목사 / 푸른초장교회 (2017.3.3)​​1541년 칼뱅은 제네바로 돌아온 후 가장 먼저 교회 법령을 만드는 일을 했다. 1537년의 교회설립시안과 1538년의 타협안보다 한 차원 더 발전된 체계적이고 구체적인 법령이었다. 이후에 1561년에 다시 한 번 법령이 제정되지만 1541년의 법령은 어느 모로 보나 제네바교회의 표준법령으로 손색이 없다. 칼뱅은 파리에서 부친의 뜻에 따라 법학을 공부했다. 몽떼귀에서 신학을 공부하던 중 경제적으로 더 유익하다고 느낀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여 1528년 오를레앙으로 옮겼다. ​그곳에서 피에르 드 레투알에게서 배우다가 부르주로 옮겨 안드레아 알치아티에게서 법학을 공부했다. 훗날 이런 ..

칼뱅, 다시 제네바로 돌아오다 (칼뱅과 제네바교회 이야기 7)

칼뱅, 다시 제네바로 돌아오다 임종구 목사의 칼뱅과 제네바교회 이야기 (7) ​임종구 목사 / 푸른초장교회 (2017.2.23)​​설교와 성찬, 타협하지 않았다​칼뱅은 제네바 시의회의 공식적인 초청을 받고 1541년 다시 제네바로 돌아온다. 물론 그가 고백했던 것처럼 다시 제네바로 돌아간다는 것은 그에게는 1000번의 죽음을 각오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이 무렵 파렐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하루에 1000번 부서져야 했기에 이 십자가를 지는 것보다 차라리 100번 이상이라도 다른 죽음의 고통을 당하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선택권이 나에게 있다면 나는 당신의 뜻을 따르는 것 외에 모든 일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나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나의 마음이 죽은 것 같이 여기며 주님께 나를 ..

칼뱅과 가정 (칼뱅과 제네바교회 이야기 6)

칼뱅과 가정 임종구 목사의 칼뱅과 제네바교회 이야기 (6)​임종구 목사 / 푸른초장교회 (2017.2.16)​​가정은 개혁신앙 증명해야 한다​​칼뱅은 스트라스부르에 머무는 동안 가정을 꾸리게 된다. 종교개혁은 종교, 직업, 교육, 가정에서 근대의 문을 열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 가운데서도 가정을 본래의 자리로 돌려놓는 역할을 했다.​칼뱅은 1540년 8월 10일 파렐의 주례로 이들레트 드 부르(Idelette de Bure)와 결혼한다. 그녀는 재세례파 장 스토르데르의 미망인으로, 남편이 흑사병으로 세상을 떠난 뒤 부처의 소개로 칼뱅과 가정을 이루게 되었다. 칼뱅이 결혼하기까지 몇 번의 우여곡절이 있었다. 칼뱅은 파렐에게 보낸 편지에서 장차 자신의 아내가 될 사람에 대해 ‘나를 사로잡는 유일한 아름다움..

성경과 신학 정통한 칼빈 (칼뱅과 제네바교회 이야기 5)

성경과 신학 정통한 칼빈 임종구 목사의 칼뱅과 제네바교회 이야기 (5)​임종구 목사 / 푸른초장교회 (2017.2.10)​​회중 압도하는 하나님의 입​우리는 개혁자 칼뱅이 그 거대한 무지와 반대에도 불구하고 제네바에서 성경적인 교회를 건설할 수 있었는가 궁금증을 가질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시민권조차 변변찮게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의 고백과도 같이 나그네와 망명자의 신분으로도 종교권력과 맞서 싸우고 수많은 구교의 사제들과 수사들까지 굴복시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가 성경과 신학에 정통한 학자였으며, 강단의 거성과도 같은 설교자였기 때문이다. 그 일례로 한 가지 재미있는 사건을 소개하자면, 칼뱅의 한 번의 연설로 사제와 수사 200명이 한꺼번에 개혁신앙으로 돌아온 사건이 있었다.​1536년 로잔(..

사돌레토 추기경의 편지에 대한 칼빈의 답변서

(종교개혁이야기) 사돌레토 추기경의 편지에 대한 칼빈의 답변서​김진흥 교수 (2016.4.5)​​종교개혁에 대한 개혁자들 자신의 인식과 이해를 살펴보는 과정에서, 우리는 종교개혁을 옹호하는 칼빈의 글 몇 편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지난 호에서는 그 첫 번째 글로서, 기독교강요 초판의 서문에 실린 ‘프랑스 왕 프랑스와 1세에 보내는 편지’를 살펴보았는데, 이번에 소개할 글은 로마교회의 사돌레토 추기경이 제네바 시민들에게 쓴 편지에 대한 칼빈의 답변서(1539)입니다.​​​I. 칼빈이 이 답장을 쓰게 된 까닭​제네바 시민들의 부도덕한 삶에 대한 권징으로 부활절 성찬을 거행하지 않으려 했던 일로 칼빈과 파렐을 비롯한 개혁자들이 제네바에서 추방된 이후에, 로마교회의 추기경이자 온건한 에라스무스주의자로 명성이 높았..

칼뱅과 사돌레토 추기경 (칼뱅과 제네바교회 이야기 4)

칼뱅과 사돌레토 추기경 임종구 목사의 칼뱅과 제네바교회 이야기 (4) ​임종구 목사 / 푸른초장교회 (2017.2.2)​​개혁자 칼뱅이 제네바 1차 체류에서 베른식의 기독교를 전복시키기에는 기반이 약했다. 제네바인들은 구교의 관습을 떨치지 못했고 성경적 교회 건설의 열망도 없었다. 기초법령은 시의회에 의해 난도질을 당했고, 신앙고백서는 저항에 부딪혔다. 1년이 채 되지도 않아 피에르 카롤리에게 아리우스자라고 고발을 당하기까지 했다. 이제 칼뱅의 남은 선택은 자신이 현실에 순응할 것인가 아니면 이 도시 거부할 것인가였다.​그러나 이 신임 개혁자는 보름스의 개혁자처럼 대담하게도 부활절 성찬의 집례를 거부해버렸다. 시의회도 실력으로 나왔다. 결국 제네바 강단의 3총사는 추방을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들은 제..

칼뱅, 교회건설의 첫 삽을 뜨다 (칼뱅과 제네바교회 이야기 3)

칼뱅, 교회건설의 첫 삽을 뜨다   임종구 목사의 칼뱅과 제네바교회 이야기 (3)​임종구 목사/ 푸른초장 교회 (2017.1.19)​​개혁자의 용기가 남아있는가​전 세계가 2017년을 종교개혁 500주년으로 삼고 기념하지만, 유독 스위스는 2019년을 종교개혁 500주년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자신들의 개혁의 출발점을 츠빙글리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독일의 종교개혁이 루터교회로 귀결되고, 스위스의 종교개혁이 개혁교회를 태동시켰다는 점에서는 일리 있는 주장이라 생각된다. 이것은 제네바 교회건설의 초기에도 베른식 종교가 제네바에 일방적으로 강요되었다는 점에서 흐름을 같이 한다.​당시 스위스에는 제네바, 쿠어, 코스탄츠, 바젤, 로잔, 시옹 등 6개의 주교구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베른은 로잔교구를 흡수하고 제네바..

왜 프로테스탄트를 받아들였나 (칼뱅과 제네바교회 이야기 2)

왜 프로테스탄트를 받아들였나 임종구 목사의 칼뱅과 제네바교회 이야기 (2) ​임종구 목사 / 푸른초장교회 (2017.1.12)​​1536년은 칼뱅과 제네바에 있어 매우 중요한 해이다. 먼저 칼뱅이 바젤에서 초판을 출판했고, 제네바는 복음을 따라 살기로 모든 시민이 결정한 해이기 때문이다. 제네바는 스위스 도시들 가운데서 가장 마지막으로 복음을 받아들인 도시 중 하나이다. 스위스에서는 취리히(1524)가 가장 먼저 복음을 받아들였고, 이어서 베른(1528) 바젤(1529) 뇌샤텔(1530) 제네바(1536)로 이어진다.​중세시대에 야만족을 대상으로 선교할 때 한 도시, 한 민족이 돌아오는 집단적 회심이 일어났다. 종교개혁시대의 회심 역시 개인적이라기보다는 여전히 집단적, 제도적 회심이었다. 이것이 제국에..

칼뱅과 제네바 (칼뱅과 제네바교회 이야기 1)

칼뱅과 제네바 임종구 목사의 칼뱅과 제네바교회 이야기 (1)​임종구 목사 / 푸른초장교회 (2017.1.6)​​순종의 신앙 없으면 개혁은 멀다​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는 의미 깊은 해에 개혁신앙의 원천인 칼뱅이 목회했던 제네바교회와 특별히 칼뱅이 회장으로 활동했던 제네바 목사회(The Company of Pastors in Geneva)에 대해서 소개할 수 있게 되어 감사하게 생각한다.​존 녹스는 “제네바는 사도들의 시대 이후 가장 완벽한 그리스도의 학교다. 다른 지역들에게도 그리스도가 참되게 선포되지만, 이 도시처럼 생활과 신앙이 참되게 개혁된 곳을 나는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가 본 제네바는 1556년의 제네바였다. 1536년 칼뱅이 처음 도착했을 때의 제네바는 신생기독교도시에 불과했다..

온라인 방송이 예배가 될 수 없는 이유 (성경, 교리)

온라인 방송이 예배가 될 수 없는 이유 (성경, 교리)​Sola (2020.9.13)​ ​108문 제 이 계명에서 요구하시는 의무는 무엇인가? ​답. 제 이 계명에서 요구하시는 의무는 이러하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으로 제정하신 모든 종교적인 예배와 규례를 순수하게, 그리고 전적으로 받아 지키고 보전해야 하는 것이다.(생략)​그 뿐 아니라, 모든 잘못된 예배를 인정하지 않고, 혐오하며, 반대하는 일, 각자의 처지와 부름 받으심을 따라 잘못된 예배를 배제하고 우상숭배를 위한 모든 기념물을 제거하는 일이다.​신 32:46,47, 마 28:20, 신 7:5, 사 30:22​​​109. 제 이 계명에서 금하시는 죄는 무엇인가? ​답. 제 이 계명에서 금하시는 죄는 하나님께서 친히 제정하신 일이 없는, 그 어떠..

비대면 예배?

비대면 예배?​정성구 목사 / 전 총신대, 대신대 총장 (2020.8.24)​​내가 처음 스위스를 가본 것은 1972년이었다. 마침 주일이 되어 취리히(Zurich)에 즉 쯔빙글리(Zwingli)가 목회하던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렸다. 그 교회를 물 교회라고 한 것은 교회의 기둥 절반이 쥐리히 호숫가에 박혀 있기 때문이다. 그날 따라 성찬식이 있어서 나는 스위스 개혁교회의 예배를 처음 드리게 되었다. ​쯔빙글리는 칼빈(J. Calvin)과 더불어 스위스가 낳은 위대한 종교개혁자였다. 나는 그 교회에서 예배 드린 것이 그렇게도 자랑스럽고 감사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꼭 14년 후에, 마침 헝가리 데브레첸에서 열린 세계 칼빈학회 참석차 츄리히에 머물면서, 다시 그 교회를 찾아가서 주일에배를 드리려고 했다. ..

결혼과 언약: 그리스도인 결혼의 전제조건

결혼과 언약: 그리스도인 결혼의 전제조건 [십계명(59) - 제7계명(4)]​한길교회 주일오후예배 설교문 (2015.4.12)​​설교본문낭독: 창세기 2장 18-25절; 고린도후서 6장 14-18절신조 낭독: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24장 3절;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제139문답​​서론​언약으로서의 십계명​십계명 강해를 시작한 지 제법 되었습니다만, 십계명을 처음 배울 때에 십계명의 개론적인 내용을 배우면서 십계명이 갖고 있는 여러 가지 성격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그 때 말씀드리기를 십계명을 단순하게 ‘하나님의 명령’으로만 이해해서는 안되고 여러 가지 측면으로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 중에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십계명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언약의 말씀’이라는 사실입니다..

결혼 ‘서약’에 담긴 의미

결혼 ‘서약’에 담긴 의미​기독교개혁신보 (2015.5.26)​​최근 들어 몇몇 연예인들을 비롯해 혼전동거를 찬동하는 사람들이 점차 많아지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결혼은 기본적으로 사회적 혹은 개인적 가치 기준에 따른 일종의 계약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다. 본래 결혼은 하나님께서 창조 가운데 부여하신 질서와 원리에 따른 것이다. 곧 하나님의 창조질서 가운데서 피조물로서 필연적으로 지니게 되는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는 ‘의무’의 성격으로 시작된 것이 결혼이다.​따라서 결혼 예식에서는 반드시 ‘서약’이 있기 마련이다. 이는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창조주이신 하나님 앞에서 갖는 ‘맹세’에서 시작되었다. 곧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라고 하신..

이찬수 목사의 발언과 장로교/ 개혁교회의 표지와 대형교회

이찬수 목사의 발언과 장로교/ 개혁교회의 표지와 대형교회​양남식 목사 (2012.7.14)​​이찬수 목사의 발언과 장로교​분당우리교회의 이찬수 목사의 발언이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다. 필요한 이야기임이 분명하고, 그간 이찬수 목사님이 보여준 성품과 진실됨을 직,간접적으로 들어왔기에 그 분의 의도와 진심에 대하여는 특별히 논할 바가 없다. 기독교내의 많은 이들이, 심지어는 세상의 매스컴까지도 그의 의지에 놀라움과 동시에 여러 이야기들을 쏟아내고 있다. 하지만, 한 가지 거론되지 않는 점, 그럼에도 가장 기본적으로 던질 수 있는 질문을 있으니...바로 장로교의 정치체제에 대한 것이다.​분당우리교회는 분명 장로교단에 소속되어 있는 교회이고, 교회내의 장로들이 있고, 그들로 구성되어진 당회(Session)이 있..

참 목사의 삶을 사는 다키우라

참 목사의 삶을 사는 다키우라​정정숙 박사 (2012.12.8)​​● 철저한 개혁주의 신앙 파수에 헌신● 고난 속에서도 신행일치의 삶의 모습​태풍 15호가 한반도를 강타한다는 뉴스가 우리를 위협할 때 일본 고베신학교 교장 다키우라 시게류 박사가 한국에 왔다. 토요일 밤늦게 도착한 그는 겉으로 보기에도 몹시 피곤해 보였다. 한주간 동안 한국에 머물면서 앉으면 졸고, 누우면 일어나지 못하는 극도의 피곤 속에 있었다.​평소에도 교회 일과 학교 일로 그의 활동이 많지만, 그의 부인 마사꼬 사모가 암으로 오사카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오카모토에서 고베로, 고베에서 오사카까지 매일 편도 한 시간 거리의 병원을 한차례 혹은 두 차례씩 왕복하며 여러 달 동안 간호를 해왔고, 그러한 극진한 간호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