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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후퍼와 복장 논쟁

Sola. 2025. 5. 8. 07:00

 

존 후퍼(1495-1555) - 복장 논쟁

이진일 목사 (2016년경)

 

1) 시대적 상황

후퍼가 태어나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알아야 한다. 이 당시는 교황청이 개신교의 확산을 막기 위해서 평신도와 성직자들에게 우민화 정책을 펴고 있었다. 종교 개혁 운동이 한창 전개되던 16세기 중반의 영국교회는 흑암 가운데 있었다. 존 위클리프에 의하여 번역된 신약 성경이 존재하였으나, 성경을 접하지 못하는 일반 교인들은 성경의 내용을 알 수 없었다. 예배가 라틴어로 드려졌기 때문에 교인들은 설교나 기도의 내용을 알아들을 수 없었으며, 그나마 설교가 1년에 겨우 4번 정도 있을 뿐이었다.

또한 목회자들 역시 무지 가운데 있었다. 그들의 주된 사역이란 의식을 집전하는 것이 전부였기 때문에, 공부할 필요가 없었다. 후퍼가 1551년 주교로 부임한 글루스터 지역에는 311명의 사제가 있었는데,그 가운데 168명이 십계명을 암송할 줄 몰랐고 31명은 십계명을 어디서 찾아야 하는지도 몰랐다. 40여 명은 주기도문이 어느 성경에 있는지 알지 못하였고 31명은 주기도의 저자가 누군지 모를 정도로, 목회자의 무지는 극에 달하였다.

이러한 성직자의 무지는 성도들을 미신적인 신앙으로 이끌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제대로 알려질 수 없었다. 하나님은 죄인들을 용서하지 않는 진노하시는 분으로만 인식되었고, 진노의 하나님을 피하기 위해서는 혁혁한 공로를 쌓은 성자들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성자 순배가 만연해지면서 농사 짓는 사람들은 성 도로시아를 수호 성자로 섬겼고, 정육업자들은 성 바돌로매를, 광산업과 관련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성 안나를 찾는 등 직종에 따라 수호 성자가 달랐고, 성자 숭배 가운데 가장 보편적인 것이 마리아에 대한 숭배였다. 그리고 말씀에 대한 무지로 인하여 유물 숭배가 널리 퍼지면서 무지한 백성들은 성자들의 유품을 모아 섬기고, 성자들의 유해가 있는 곳을 찾아 순례하였다. 이와 함께 의식주의적인 예배가 보편화되고, 그리스도의 고난을 체험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거나 맹목적으로 금식하면서 고해 성사를 하거나 참회하며 사제에게 무조건 순종하는 일이 성행하였다.

2) 후퍼는 누구인가?

후퍼는 이처럼 무지와 미신에 극에 달하였던 시기인 1495년 영국의 소머셋에서 경건한 신앙의 가진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514년 옥스퍼드 대학에 진학하여 1518년 문학사 학위를 취득하였으며, 대학 졸업 후 진로에 대하여 고민하던 중 수도사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후퍼는 고행으로 유명한 시토 수도원에 들어가서 수도를 한다. 그는 금욕의 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구원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구원의 확신을 얻지 못하였고, 대신 영국 교회 지도자들의 부정과 부패에 대해 알게 되었다. 교회 지도자들은 위선을 일삼고, 성도들은 무지와 미신 가운데 처해 있으며, 영국인의 생활에서 비성경적인 관습이 만연한 것을 확인하였다.

후퍼가 이처럼 수도사 생활에 회의를 나타내기 시작하던 1534년 헨리8세는 수장령을 선포하면서 로마 카톨릭 교회로부터 정치적인 분리를 선언하고, 수도원 해체를 명하였고 수도사들은 교회나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후퍼도 1539년 수도원 생활을 정리한 후 런던으로 가서 그 당시 대륙에서 일어나고 있던 종교 개혁 운동에 대하여 듣고 그들의 책을 구하여 읽으면서 영국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러한 시기에 후퍼는 생계를 위하여 토마스 아룬덜 경의 집사이면서 가정 목사로 취직하였다.

아룬덜 경은 후퍼의 인물 됨됨이를 좋아하였지만, 후퍼의 개신교적 개혁 사상은 수용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룬덜 경은 후퍼를 윈체스터의 주교 가디너에게 고소하고, 가디너는 후퍼를 이단을 정죄하였고, 후퍼는 결국 1540년 영국을 떠나 프랑스 스트라스부르로 도망가게 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마틴 부쳐와 존 베일과 같은 개혁자들을 만나서 더욱 더 성경적인 개혁 사상을 정립하게 되고, 그리고 스위스의 취리히로 건너가 9년동안 머물면서 하인리히 불링거, 존 라아스키 등과 함께 성경중심적인 개혁운동을 전개하였다.

3) 후퍼의 업적 - 성경적인 예배관(청교도 운동의 확산)

당시에 개혁자들은 예배에 대해서 두 가지 사상으로 나뉘었다. 루터와 멜랑히톤은 예배를 비본질적인 것으로 보아 "성경에 금지된 것이 아니라면 얼마든지 새로운 예배를 계발할 수 있다"고 주장한 반면, 불링거, 마틴부쳐, 존 칼빈과 같은 개혁주의자들은 "성경이 명한 것이 아니면 하나님이 받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예배도 본질적인 것이기에 철저하게 성경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입장에 후퍼도 동의한다.

1547년 헨리 8세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에드워드 6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영국의 상황이 개신교에 우호적으로 변화하자 후퍼는 귀국하게 된다. 후퍼의 설교와 목회 사역에 온 국민들이 감동을 받게 되었고, 후퍼는 1550년 에드워드 6세 앞에서 설교를 할 정도로 유명해졌다.

그래서 교회 당국은 후퍼의 자질과 능력을 인정하고 글루스터의 주교로 임명하였지만, 후퍼는 주교 취임을 거부하였다. 그 이유는 주교 취임이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성자들의 이름으로 서약하며 성직자의 복장을 착용하는 것이 성경에 위배된다는 이유에서였다.

후퍼가 목회자의 복장 착용을 로마 카톨릭 교회의 잔재요 이교적이라고 비판한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목회자의 복장 착용은 초대 교회에는 없는 제도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은 설교할 때에 신자들과 구별된 옷을 입음으로써 자신을 차별하지 않았다.

둘째, 성직자의 복장 착용은 콘스탄틴 대제의 개종 이후 교회가 가장 타락한 시기에 생겨난 그릇된 제도이기 때문이다. 서구에서는 4세기에서 9세기 사이에 복장 제도가 크게 변하였는데, 일반인들은 로마인이 입던 긴 옷과 망토를 벗어 버렸지만, 보수적인 성향이 짙은 사제들은 가운과 망토 착용을 고수함으로써 사제의 복장이 생겨난 것이다. 후퍼는 성직자의 복장이 역사의 산물일 뿐, 성경의 가르침과는 무관하다고 주장하였다.

셋째, 목회자의 복장 착용은 미신이나 우상숭배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직자 복장이 신비한 효력을 발생한다는 미신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넷째, 목회자의 복장 착용은 성경의 가르침과는 무관하기 때문이다. 아론의 반차를 좇은 제사장들은 사역을 행할 때 복장을 입곤 했다. 왜냐하면 그들의 참 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서 아직 오시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희생 제물이 되어서 모든 옷이 벗김당하셨고 그렇게 그의 제사장 직이 수행됨을 보여 주셨다. 곧 그 분이 진리 자체이며, 더이상 어떤 베일이나 그림자도 필요없기 때문이다.

크랜머와 많은 목사들이 후퍼의 이러한 입장을 지지했지만, 소수의 주교들이 복장 착용은 교회의 좋은 전통이기 때문에 고수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 의견이 팽팽하게 맞서게 되었고, 에드워드 6세는 교회의 안정을 기하기 위해서 주교의 손을 들어 주게 된다.

마침내 후퍼는 런던의 감옥에 투옥되었으나, 왕과 대주교 크랜머의 도움으로 출옥하게 되고, 크랜머가 후퍼를 구출하기 위하여 타협안을 제시하게 된다. 성직자로 임직할 때나 왕 앞에서 설교할 때 교회당이나 공적인 장소에서의 복장 착용은 허용하되, 그 외에는 안 입어도 된다는 교회법을 마련하였다. 후퍼도 겨우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한 영국의 종교개혁이 복장 논쟁 때문에 타격받을 것을 두려워하여 타협안에 동의한 후 글루스터의 주교에 취임하였다.

후퍼는 글루스터의 주교 자리에 취임하여 교회 개혁에 박차를 가한다. 그러나 악재가 발생했다. 독실한 카톨릭 교도였던 피의 메리가 왕위에 오르면서 종교개혁자들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고, 후퍼는 성직자의 결혼을 주장하고, 화체설 교리를 부인한다는 죄목으로 다시 감옥에 투옥되고 엄청난 고문을 당하고 마침내 1555년 2월9일 60세의 일기로 화형을 당하여 생을 마감하였다.

후퍼에 의하여 일어난 복장 논쟁은 영국 종교 개혁에 있어 아주 중요한 사건으로 발전하였다. 많은 개혁자들이 후퍼의 주장을 지지함으로써 목회자의 복장 착용 반대 운동은 영국 개혁자들의 전통이 되었고, 정부의 복장 착용과 청교도의 복장 착용 반대 운동은 청교도의 우세로 기울고 이 사건은 청교도 운동이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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