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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자유의지 논쟁의 역사적 배경과 현재에도 만연한 위험요소들

Sola. 2025. 2. 13. 06:00

 

16세기 자유의지 논쟁의 역사적 배경과 현재에도 만연한 위험요소들

 

Sola (2021.6.20)

 

 

1. 자유의지의 역사적 배경

 

자유의지 논쟁은 고대교회 시대부터 어거스틴과 이단 펠라기우스의 논쟁으로부터 시작해 16세기 교회(종교)개혁 시대의 초창기부터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지속적으로 정통신학적 입장을 배격하는 무리들이 나오고 있는 중요한 주제다.

 

자유의지 논쟁이 있기 전에는 종교개혁과 인문주의가 관심에 있어서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였고 같은 목표들을 따랐으며 같은 학문적 방법론들을 사용했다. 그러나 루터와 에라스무스의 논쟁으로 종교개혁과 인문주의는 완전히 단절되었는데 두 사조가 서로 소원해진 것은 1521년 루터의 저작인 ‘교회의 바벨론 포로에 대하여’에서 이단 로마 카톨릭의 교리 기초를 공격하고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 했을 때부터였다.

 

그가 파문을 위협하는 교서와 당시의 부패한 로마교회, 즉 이단 카톨릭의 법을 1520년에 비텐베르크의 엘스터문 앞에서 불태우고, 교황의 교회와 단절을 시행한 것은 대체적으로 로마교를 신뢰하는 인문주의자들의 눈에 루터를 이단으로 낙인찍는 계기가 됐다. 이에 따라 불신자이자 로마 카톨릭 편에 있었던 에라스무스도 교황이 루터를 정죄한 것에 동조했다.

 

처음부터 에라스무스가 루터에 적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루터의 추방을 발표했던 보름스 회의에서의 칙령을 불행한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루터와의 논쟁으로 인해 루터와 거리가 멀어졌고 서로 다른 노선이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1521년 멜란히톤에 의해 “신학총론”이 쓰여졌고 후에 이 내용에 근거하여 루터의 “확증”이라는 책이 출판된다. 이 내용은 당시 카톨릭이 옳지 않은 거짓 교훈을 가르치고 있고 카톨릭으로부터 출교된 자신이 참된 교회의 교훈을 가르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단 로마 카톨릭 교회를 향해 “적그리스도”라 선언하기도 했다.

 

이 내용이 이단 에라스무스에게는 큰 자극이 되었다. 에라스무스는 카톨릭의 윤리적 폐해에 대하여 비판한다는 점에서 종교개혁과 일치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루터의 종교개혁에 에라스무스가 일정부분 책임이 있다는 이단 카톨릭의 비판에 에라스무스는 확실한 답을 주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래서 이단 에라스무스는 1524년 “자유의지론”을 주제로 한 책을 출판함으로 종교개혁에 분명한 자신의 노선을 긋고자 했다.

 

 

루터는 에라스무스가 기독교의 진리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다는 것을 명확히 알게 됐고, 에라스무스에게 직접 보낸 1524년 4월의 편지가 있었는데 이 편지가 출판을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출판되었다. 그리고 이 책은 인문주의자의 제후가 지금까지의 종교개혁에 대한 입장을 조금이나마 긍정적으로 풀어가려고 결정을 유보시킨 것을 포기하는 데에 영향을 미쳤다.

 

1524년 9월 초에는 에라스무스의 저작인 ‘자유 의지에 대한 대화 혹은 상의’가 발행 됐다. 이단 카톨릭의 칙령인 보름스 칙령에서는 루터가 자유의지를 부인하는 것을 이단성으로 간주했다. 카톨릭의 에라스무스는 그들의 편에 서서 1517년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어느 정도 있다는 가능성들을 주장함으로써 종교개혁의 기독교 편에서 비난을 받았다. 그의 저작인 ‘자유의지에 대하여’로 그는 더욱 더 정확하게 그의 이단적 입장을 표명했다.

 

루터는 에라스무스의 잘못된 주장에 대해 1525년 ‘노예의지론’을 출판했다. 에라스무스의 자유의지론을 하나씩 반박하는 형식의 이 책으로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 구원에 이를 수 없으며 인간의 의지는 죄를 향하여서만 가는 노예의지만 있다는 점을 성경적으로 분명히 밝혔다.

 

그리고 그 후 불과 11일만인 1526년에 에라스무스는 ‘방어’의 첫 부분을 출판했다. 에라스무스의 책은 루터의 방식대로 그의 논증을 하나하나 반박하는 형식이었지만 당연히 반성경적인 이단적 글이었다. 루터는 멜란히톤의 조언에 따라 더 이상 에라스무스와의 논쟁과 관련해 그의 글에 반박하는 책을 출판하지 않았다. 루터는 논쟁이 감정적으로 변질될 위험이 컸기 때문에 소모적 논쟁은 결코 좋은 것이 아니라고 판단했던 것이지만, 내 생각엔 기독교 입장에서의 바른 기준을 제시하기 위해 반박할 필요성이 있었다고 본다.

 

1521년 ‘신약총론’을 출판해서 이 모든 논쟁의 원인을 제공했던 멜란히톤이 루터와 에라스무스의 논쟁에 대한 입장을 드러내는 글을 쓴다. 멜란히톤은 자유의지 논쟁에 대한 직접적 주제가 아닌 성경을 해석해서 설명하는 방식으로 에라스무스에게 대응했다.

 

그의 “골로새서 주석”을 통해 자신이 루터와 같이 구원에 있어 어떤 인간의 의도 가능하지 않다는 신학을 가지고 있음을 분명히 하는 동시에 에라스무스가 이야기했던 사회적 윤리의 필요성에 대해서도 세련된 방식으로 균형있게 제시하며 에라스무스를 설득하려는 시도를 했다.

 

 

 

2. 루터와 에라스무스 자유의지 논쟁의 쟁점

 

여기서 루터와 에라스무스의 자유의지에 대한 주장을 짚고 넘어가야 할 필요가 있다. 이들의 논쟁은 과거의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의 논쟁과도 비슷한데 다만 에라스무스는 펠라기우수주의는 아니고 후에 이단 알미니안주의의 토대가 된 이단 세미 펠라기안주의자였다.

 

에라스무스의 핵심 오류를 잠깐 짚어 보겠다. 그는 주장하기를 '인간은 자유의지가 없어진 것이 아니며 약해진 것일 뿐이다.‘ 라고 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이 때문에 사람은 하나님의 역사에 협동하거나 반대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존재한다. 또한 사람은 이성이 완전히 부패한 것이 아니라 단지 손상되었을 뿐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의지의 능력이 완전히 소멸된 것이 아니고 구원과 관련해서도 효력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사상으로 인해 에라스무스는 예정 또한 부인했다. 이단 알미니안주의자들이 예정 자체는 인정하며 예지예정으로 잘못 풀이한 것에서 더 나아가 펠라기안주의와 같이 예정을 부인했다. 이것은 후에 선행은총을 주장함으로 인해 현재 감리교의 신학인 이단 웨슬리안주의 신학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에라스무스는 이단 신학인 세미펠라기안주의, 알미니안주의, 웨슬리안주의의 입장들을 골고루 취한다.

 

이에 대해 루터는 성경적 입장을 제시했다.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없고 오직 노예의지만 있는데 왜냐하면 그 어떤 의지라도 결국 죄의 영향에 의해서 압도되어 있기 때문이다‘ 라고 밝혔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로마서 3;23) 그는 또한 사람의 의지는 하나님에 대한 그의 태도와 관계에서 자유롭지 않으며 다만 세상의 것들과의 관계에서, 죄에 대해서는 결정의 자유가 있다고 밝혔다.

 

 

 

3. 현재의 우리에게 주는 신학적 영향과 여파

 

현재에도 에라스무스가 주장한 이단 신학은 계속 되고 있다. 작은 입장 차이들은 있지만 자유의지에 대한 이단 신학들은 대략 팔라기안주의-세미펠라기안주의-에라스무스의 주장-알미니안주의-웨슬리안주의로 명맥을 잇는다. 그리고 정통신학을 추구하는 즉, 개혁신앙을 따르는 교단들 안의 교회에도 이 잘못된 신학들은 만연해 있다.

 

루터와 에라스무스의 자유의지에서 이단 에라스무스의 입장을 따르는 현재의 사례는 대표적으로 ‘4영리’를 들 수 있다. 4영리 전체에 대해서 짚을 점이 많지만 자유의지와 관련해서만 짚으면 4원리 안에서 들 수 있다.

 

4원리에서는 주장하기를 ‘당신은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기도로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다’라고 말하면서 ‘이 기도가 당신의 마음에 드십니까?’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는 그가 약속하신 대로 당신 안에 들어오실 것입니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에라스무스 및 알미니안주의 등의 위의 자유의지에 대한 이단들의 입장과 같다. 불신자에게는 선을 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없다. 오직 자신이 기뻐하는 뜻대로 행하는 의지의 자유만 있을 뿐이다.(이러한 뜻의 전제 하에 쓰이는 ' 자유의지' 용어에 대해 정통신학은 인정해왔다.) 허물과 죄로 죽은 인간에게 어떻게 선을 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그 영접기도문이 마음에 든다고 해서 그 그림이 마음에 든다고 해서 기도를 따라 읽으면 구원받는다 하고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며 축하하는 것은 하나님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이며 그 불신자를 악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다. 거듭남은 인간의 노예의지 즉, 타락한 의지의 자유를 거듭나게 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로서만 가능하며 그것은 말씀을 통해서 가능하기 때문에 바른 교회로 인도하고 말씀을 전하는 자리와 그 사람이 나아가야 할 방향까지 제시해 주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다.

 

때문에 짧은 시간에 복음을 전할 때에는 4영리의 이단적 자유의지 및 위험한 신학을 버리고 참 복음을 전하고 바른 교회로 오게끔까지 하는 데에 집중함으로 현장에서 적용할 수 있다. 불신자인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남아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감리교, 성결교, 순복음 등 뿐 아니라 장로교 안에서의 보수적 교단 대부분의 교회들에서도 위 4영리를 사용하고 있는 것을 통해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 대한 대응은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 5개와 유럽 3대 신조로 불리는 벨직 신조 / 하이델베륵 교리문답, 도르트 신조에 대한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교리교육이 반드시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할 때에 지금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루터가 당시 주장한 자유의지에 대한 바른 이해가 점점 늘어날 것이고, 이단 에라스무스가 잘못 이해한 자유의지의 힘은 약해질 것이다. 그런 날을 세계의 유형 교회들에게 주시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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