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파의 성경 번역
고경태 목사 (2018.10.18)
성경번역은 382년 교황 다마소 1세(라, Damasus I)가 제롬(라: Eusebius Sophronius Hieronymus, 영 Jerome, 348-420)에게 명령해서, 베들레헴에서 384년에 복음서를 386년에 신약전체 그리고 구약성경을 405년에 번역을 끝냈다. 70인경과 히브리어 구약에서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신약성경을 라틴어(Vulgate, 서민, 대중적인)로 번역했다. 불가타에는 구약성경 46권과 신약성경 27권 모두 76권의 책이 들어있다. 제롬의 라틴어 번역 성경 출판에 대해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제국 교회의 분열을 우려하기도 했다. 8세기에 제롬의 번역은 Vulgate(대중적인)역본으로 자리를 잡았다. 중세 로마 교회는 라틴어 역본을 권위본으로 확정하고 다른 번역을 정죄했다. 1546년 4월 8일,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권위본으로 승인되었다. 1592년 교황 클레멘스 8세는 보완된 라틴어 성경을 발간했다.
종교개혁의 새벽별(The Morning Star of the Reformation)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1320-1384)
존 위클리피는 종교개혁 전 개혁자로 가장 유력한 인물이다. 영국 사람이지만 그로 말미암아 존 후스(Jan Hus, 1372-1415)가 변화되었고, 후스는 화형을 당하면서 100년 뒤에 나올 백조, 마틴 루터를 예언하기도 했다. 후스가 죽으면서 “너희는 지금 거위 한 마리를 불태워 죽인다. 그러나 100년 후에는 태울 수도 없고, 삶을 수도 없는 백조가 나타날 것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후스의 체코어는 거위이고, 거위가 백조가 될 시대는 102년 뒤 1517년 독일에서 나왔다. 1520년 루터가 후스의 저술을 읽으면서 “모르든 알든 우리는 모두 후스파다”라고 했다고 한다.
위클리프는 1372년에 옥스퍼드에서 신학박사를 취득했다. 위클리프는 1377년 에드워드 왕이 교황청에 세금을 내야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한 나라에 두 군주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선택을 해야 한다. 우리는 영국의 에드워드를 왕으로 받고, 우르반 교황을 거부한다고 주장했다. 1378년 교황 그레고리 6세로부터 5차례나 경고를 받았다.(김재성, <개혁신학의 정수>, 78-80).
위클리프 시대는 영국과 프랑스는 100년 전쟁(1337-1453)을 진행하고 있었고, 로마 교황청이 프랑스 아비뇽과 로마 두 개로 나뉘어 신음하던 시대였고, 1409년 아비뇽과 로마의 추기경들이 교회 분열을 종식해야 한다고 결의하며 이탈리아 피사(Pisa)에서 한 명을 더 세워, 교황이 세 명이 존재하던 시대였다.
위클리프는 당시 교권의 치열한 쟁투에서 복음으로 교회 사역자들이 청빈하게 살아야 할 것을 주장했다. 위클리프 시대는 교황이 두 명이 있었다. 위클리프는 1379년 교황은 인간이 세운 제도이고 하나님께서 세운 직분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위클리프는 성례보다 복음선포를 중요하게 주장했다. 교회가 구원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선포(설교)에 의해서 운영되어야 함을 주장했다. 교황의 권위로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기 때문에 인준되는 구조이다. 그리고 위클리프는 라틴어를 알지 못하는 영국에 영어로 성경을 번역해서 모두가 성경본문을 읽을 수 있음을 주장해서 번역을 시도했다. 위클리프의 운동은 1382년에 정죄되었고, “로라드파(Lollardy, Lollardry, Lollardism)”로 위클리프의 운동은 진행되었다. 롤라드 파는 성경을 보급하면서 복음 운동을 전개했다. 1401년 로마교회는 롤라드 파를 정죄하고 “이단자 화형법”을 만들었다. 후스는 “교회는 교황이 아닌 그리스도가 머리 되시는 택자들의 모임”라는 위클리프의 글에 감동했고, 후스는 대중 설교를 통해서 프라하에서 종교개혁을 주도했다. 결국 1415년에 화형되었고, 후스의 화형에는 위클리프 성경이 넣어 불을 태웠다고 한다.
영국은 위클리프 뒤에 윌리엄 틴데일(William Tyndale, 1494-1536)이 성경을 번역(모세오경, 여호수아, 요나서)하다가 교황청의 지시로 1536년에 화형당했다. 그리고 1535년에 마일스 코버데일(Miles Coverdale)이 라틴어 성경을 중심으로 위대한 성경(Great Bible)이란 이름으로 독일에서 출판했다. 1568년 성공회 성경으로 주교 성경(the Bishops Bible)이 간행되었다(김재성, 81).
루터의 성경 번역
루터는 1517년 95개조 반박문을 게시한 뒤에 칼 5세의 체포령을 피해 은닉했다. 루터는 성경에 합당하지 않으면 어떤 공회의의 결정도 받지 않겠다고 단호한 자세를 폈다. 그리고 그는 튀링엔 주 슈타인바흐에 은둔했다.
루터의 가장 위대한 업적인 독일어 성경 번역은 동료 멜란히톤의 권고에 의해 시작됐다. 1521년 가을부터 1522년 3월 1일까지 11주 동안 루터는 신약성경을 번역했다. 그때 루터가 독일어 번역에 사용한 성경 텍스트는 에라스무스의 ‘헬라어성경’과 , 중세 표준 성경인 ‘불가타 성경’이었다. 1522년 9월 처음으로 독일어 ‘9월 성경’이 출간됐으며, 1523년 구약 일부가 세상에 나왔다. 1525년까지 구약과 신약이 함께 나온 판이 22개였고, 이를 다시 찍어낸 횟수는 100회였다. 루터가 번역한 성경이 독일어 성경 번역의 표준 되었다. 1534년에 이르러서야 여러 종교개혁자들과 동료 교수들의 힘을 합쳐 완역한 독일어 신, 구약전서 ‘루터 성경’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구텐베르그(1396~1468)가 인쇄술로 출판되었다. 당시 성경전서의 가격은 소 5 마리에 해당했다(약 1300만원). 1456년에는 성경이 소 14마리 가격이었다.
칼빈의 성경 번역
개혁파의 전통은 모국어로 성경을 번역하는 것이다. 칼빈은 프랑스어, 라틴어 실력이 매우 탁월했다. 칼빈의 프랑스어 실력은 라틴어 <기독교강요>를 프랑스어 <기독교강요>로 번역했는데, 그의 문장은 매우 정선된 문장이었다. 그럼에도 프랑스어로 성경 번역을 하지 않았다. 그것은 사역의 효율성 때문이었다. 그리고 카스텔레옹이 프랑스어로 성경을 번역하려고 했을 때에는 반대해서 갈등을 갖기도 했다. 칼빈의 사촌 올리베땅이 1535년에 성경을 프랑스어로 번역했고, 칼빈이 1560년에 올리베땅의 번역을 교정했다. 베자가 1588년에 두 번째 교정을 했다. 결국 프랑스어 성경은 19세기에 현재형을 갖게 되었다(김성규, 프랑스 성경 번역 역사). 프랑스어 성경 번역은 24회가 시도되었고, 절반 이상이 스위스 사람이었다. 이것은 위그노들이 스위스로 이주해서 진행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칼빈의 제네바에서는 영어로 성경을 번역하기도 했다. 그것이 제네바 성경(1560년)이다. 1533년 정권을 장악한 메리 여왕의 박해를 피해 존 낙스, 윌리엄 윗팅햄이 제네바에 영국인 난민 교회를 설립했고, 성경 번역을 착수했다. 1557년에 신약성경이 인쇄되었다(헬라어 성경을 기본 텍스트). 이 때 딘테일이 1534년 번역한 것을 참조해서 완성시킨 것이다. 헬라어 사본은 베자 사본과 대조하며 진행했다. 메리의 박해를 피해 다수의 영국 사역자들이 제네바로 피신했고, 당시 윗팅햄이 탁월한 헬라어 능력을 갖고 있었고, 길베이와 굳윈은 히브리어에 정통했다. 세 사람이 주도적으로 성경 번역을 진행했다. 제네바 성경은 1560년 존 낙스, 존 칼빈의 지원에서 번역되었다. 1560년 신약성경은 1557년에 윗팅햄의 번역본과 차이가 있었다. 제네바 성경은 1558년에 즉위한 엘리자베스 1세에게 헌정되었다. 제네바 성경은 1575년에 영국에서 인쇄되어 출판되었고, 청교도에게 열렬하게 환영받았다. 제네바 성경은 1599년 한 해에 10판이 출판되었고, 1560년에서 1644년 사이에 140판이 인쇄되었다. 제네바 성경은 칼빈의 영향이 크게 작용했다.
제네바 성경은 당시 영국의 비숍 성경을 능가하게 보급되고 있었다. 제임스1세는 새로운 성경 번역을 필요하게 생각했고, 킹제임스번역(KJV)을 기획해서 출판했다. 제네바 성경은 세익스피어가 읽었고, 하버드 대학을 설립한 뉴잉글랜드 청교도의 성경이었다. 제네바 성경은 킹제임스번역이 나온 뒤에도 제네바 성경은 꾸준하게 사랑을 받았다. 크롬웰도 제네바 성경을 소지하고 있었다. 제임스 왕은 통치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 제네바 성경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영국에서 더 이상 제네바 성경 인쇄를 금지시켰다. 제네바 성경은 제임스 왕과 외부의 로마 카톨릭에 의해서 공격을 받았다.
제네바 성경은 부끄러운 모습을 깨우쳐 준다는 뜻에서 치마 성경(the Breeches Bible)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제네바 성경은 가장 영어다운 영어로 번역된 최초의 영어 성경 번역이다.(김재성, <개혁신학의 정수> 80-101). 대한민국에서 킹제임스번역 무오류를 주장하면서 제네바성경에 대해서 침묵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1560년에 번역된 <제네바 성경>과 1604-1611년에 번역된 <킹제임스번역>의 번역 차이를 보라. 거의 차이가 없을 정도로 유사하다. 위키백과에서는 틴데일의 번역이 70%가 KJV에 있다고 하는데, 당시 영국에는 <제네바 성경>이 완전히 보급된 상태였다.(참고, 권동우, <킹제임스성경 유일주의의 망상>, CLC)
종교개혁파는 성경 번역을 중요 과제로 수행했고 완료했다. 성경 번역은 자국어 문학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것은 우리나라에서도 동일하다. 한국어가 자리를 잡게 된 중요한 원인은 기독교 경전이 국문으로 번역했기 때문이다. 당시 존 로스(John Ross) 선교사가 번역하여 1883년에 출판한 신약성경이 있었지만, 평안어(평안 방언) 번역문을 포기하고 새롭게 경기어(경기 방언) 중심으로 번역한 것이다. 로마 카톨릭도 1962년 2차 바티칸 회의 이후로 자국어 성경 번역을 용인했다. 우리나라에서는 1977년 신,구교가 함께 시도한 <공동번역>을 했지만, 구교의 성경이 되었다.
성경번역 사업은 선교 분야에서도 중요한 과제이다. 성경번역선교회(GBT)가 있다. 현재 7099 언어 중, 673개 언어로 성경전서가 번역되어 있다고 보고했다. 효과적인 성경 번역을 위해서 바른 신학, 탁월한 이중 혹은 다중 언어 능력, 데이터 수집 및 분석 능력(수학 능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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