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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악한 중세 지나면서도 굳건히 개혁신앙 지켰다 (왈도파)

Sola. 2025. 2. 26. 07:00

 

험악한 중세 지나면서도 굳건히 개혁신앙 지켰다

 

라은성 교수 / 총신대학교 (2017.07.03)

 

 

[종교개혁 500주년 특별기획] 다시 세우는 2017 한국교회 신앙고백2- ① 1000년 동안 핍박당한 진리

 

종교개혁 500주년 특별기획 제1장 5편의 글을 통해 개혁의 여명기부터 20세기 개혁신학의 흐름을 개괄했다. 또한 주요 종교개혁자들의 사역을 살펴보고, 그 사역들이 교회는 물론 사회 각 분야에 영향을 미쳤고 세계사를 변화시켰음을 확인했다.

 

특히 1장에서 역사는 루터의 <95개조 논제>를 종교개혁의 시작점으로 보고 있지만, 진리를 추구했던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의 흐름은 ‘한 지점과 한 인물’을 넘어선다는 것도 확인했다. 종교개혁 특별기획 제2장은 종교개혁자들이 외친 ‘진리’의 내용에 대해 고찰한다.

총 10편의 글을 총신대학교 라은성 교수(역사신학)와 문병호 교수(조직신학)가 기고한다. 1~2편은 라은성 교수가 1517년 이전 개혁신앙이 어떻게 명맥을 이어왔는지 설명한다. 3~10편은 문병호 교수가 2000년 동안 맑은 샘물처럼 흘러온 ‘진리’의 내용을 설명한다. <편집자 주>

 

 

 

정통과 이단이 뒤바뀐 시대 … 개혁신학 바탕 ‘왈도파’, ‘가톨릭은 거짓’ 클라우디오 이단으로 정죄당해

 

종교개혁 500년주년을 맞이하면서 슬픈 것은 개혁신앙인(장로교인) 조차도 루터파 종교개혁과 개혁파 종교개혁을 헷갈리고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 종교개혁 답사를 하더라도 독일 지역에만 치중하고 프랑스와 스위스는 대강 훑어보는 정도이다. 루터의 종교개혁과 개혁파 종교개혁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

 

두 종교개혁은 신학의 측면뿐 아니라 역사에서도 분명한 차이를 나타낸다. 단적으로 취리히의 종교개혁자 츠빙글리가 성찬론에 대해 ‘기념설’ 또는 ‘상징설’을 주장할 때 어디서 그 사상을 가져왔을까? 칼빈에게 제네바에서 함께 목회하자고 제안한 기욤 파렐(Guillaume Farel, 1489~1565)은 어떻게 개혁신학을 가지게 되었을까? 1535년 6월 3일 프랑스어 성경 <올리베땅 성경>(Olivétan Bible)을 번역한 올리베땅(Pierre Robert Olivétan, 약 1506~1538)은 어떤 사상으로, 어디에서 목회했는가? 독일어 신약성경을 번역하기 전에 루터는 독일어로 된 을 사용했는데, 이 성경은 누가 번역해서 사용했을까?

 

그리고 보다 더 중요한 질문이 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기독교가 공인됐고, 이후 로마 가톨릭교회가 태동했다. 그렇다면 1517년까지 무려 12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순전하게 정통신앙을 지키며 살았던 자들은 누구이며 어떻게 진리를 수호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매우 중요하다. 종교개혁을 ‘교회의 분열’로 여기는 가톨릭의 생각과 달리, 진리는 역사와 별개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 루터는 <95개조 논제>를 발표한 후 보름스 제국회의에 소환돼 자신의 사상을 변호했다. 그 역사의 현장인 보름스에 루터광장이 조성됐고, 루터를 중심으로 4명의 종교개혁자들의 동상을 세워놓았다.

 

 

 

개혁신학의 계승자, 왈도파

 

앞의 질문들에 대한 답변, 곧 루터의 종교개혁과 차이를 가진 개혁파 종교개혁은 그 바탕이 ‘왈도파‘이다. 칼빈주의는 아우구스티누스에게까지 이르지만, 그 중간 과정에 왈도파가 있다.

 

스위스에서 개혁신학을 한 자들은 대체적으로 왈도파에 속했다. 칼빈에게 영향을 준 사촌 올리베땅이나 파렐도 왈도파 소속 목회자였다. 이들이 번역한 프랑스어 성경을 프랑스만 아니라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스위스 종교개혁자들도 사용했다. <올리베땅 성경>은 루터에게 신약성경 번역에 큰 도전을 주었다. 심지어 츠빙글리의 성찬론 역시 왈도파가 고수한 기념설을 빼놓고 이야기 할 수 없다. 칼빈의 후계자인 베자는 왈도파에 대한 상당한 식견을 갖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들의 만남에 참석하기도 했다. 개혁신학의 뿌리를 논할 때 왈도파를 빼놓을 수 없다.

 

로마 가톨릭은 왈도파를 이단으로 정죄했다. 오늘날 왈도파의 존재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로마 가톨릭이 왈도파를 종교재판소에 회부하였기 때문이다. 그 이단 판결문 속에서 왈도파의 존재와 정체가 드러났다. 그들이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역사의 문헌은 항상 힘 있는 자들에 의해 기록되기 때문이다. 왈도파는 험악한 중세시대를 지나면서도 굳건하게 개혁신앙을 지켰다. 만약 왈도파가 갑자기 생겨난 자들이라면, 로마 가톨릭의 주장처럼 이단으로 규정될 가능성이 높다. 왈도파 이전에 개혁신학의 뿌리를 누구일까? 8세기 로마 가톨릭교회가 만들어지기 전, 순전하게 신앙을 지켜온 자들이 있었다.

 

▲ 그들은 체코의 얀 후스, 이탈리아의 사보나롤라, 영국의 위클리프 그리고 프랑스의 왈도파 창시자 페트뤼스 발데스 다. 발데스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개혁주의 신학 특히 장로교회에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기독교는 로마 황제 네로가 64년부터 기독교인들을 사자의 먹이가 되게 하고 화형을 시킨 이래 250년 동안 핍박과 순교를 당했다. 312년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공인하면서 핍박이 그쳤고 종교의 자유를 얻었다.

 

 

 

정통과 이단이 뒤바뀐 시대

 

하지만 정통신앙에 대한 핍박은 훨씬 오래 지속됐다. 325년 제1차 범종교회의를 니케아에서 개최했음에도 불구하고 콘스탄티누스는 정통신앙을 배제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 세 명과 사생아들이 제국을 4등분하여 다스릴 때, 이단 사상인 아리오스주의가 정통 니케아신앙보다 훨씬 세력을 얻었다. 그의 아들 중 콘스탄티우스 2세(350~361년)가 제국을 통일하고 그의 조카인 배교자 율리아누스(361~363년)에게 제국을 넘겨줄 때도 역시 반삼위일체론인 아리오스주의를 여전히 지지하고 따랐다. 그 이후 황제가 된 요비아누스(363~364년)와 발렌티니아누스 1세(364~375년) 역시 아리오스주의자였다. 이후 황제가 된 테오도시우스 1세(379~392년; 392~395년)에 이르러 381년 2차 범종교회의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개최되면서 마침내 정통 니케아신앙이 재확언되었다.

 

바른 신앙은 여전히 핍박을 받았다. 반삼위일체론자인 아리오스파는 제국을 등에 업고 여전히 정통신앙인들을 핍박했다. 이 핍박을 피할 수 있는 첫 번째 방법은 은자생활을 하는 길이었고, 두 번째는 로마 제국의 세력이 미치지 않는 장소에서 신앙을 지키는 것이었다.

 

 

 

클라우디오 “가톨릭은 거짓교회”

 

이탈리아 북서쪽 알프스 산맥에 위치한 피에몬테(Piemonte)에서 정통신앙을 고수한 이들이 있다. 사람들을 이끌었던 지도자는 클라우디오 데 토리노(Caludio I de Torino, 약 871년 사망)이다. 그는 스페인 출신으로 프랑스 아끼뗀느 왕 루이(778~840년)의 궁정 신부며 성경학교 교사였다. 황제 샤를마뉴가 814년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 루이가 황제로 있을 당시 816년 창세기, 마태복음,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및 빌립보서 주석을 썼다.

 

클라우디오는 817년 토리노에 감독으로 임명받아 로마를 방문했을 때, 타락해 가는 로마 가톨릭교회를 신랄하게 비판하기 시작했다. 말씀 중심보다는 미신에 사로잡히고, 복음과는 상관없는 우상들을 섬기고, 스스로 베드로 후계자라고 억지 주장하는 것을 비판했다. “로마 가톨릭교회를 거짓교회”라고 맹공격했다. 클라우디오는 <변증서>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그들(로마 가톨릭교회)은 진리에서 떠났으며, 허무한 것을 찾으며, 그리고 무의미한 것에 안주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금 십자가에 못 박고 있으며 그분을 다시 욕보이고 있다. 그들은 사탄의 협력자들로 영혼들을 훔치고 있다. 불경건한 모양들에서부터 멀리 하지 않으면 창조주에게 버림을 받을 것이고 영원한 저주를 직면할 것이다.”

 

 

결국 로마 가톨릭교회는 클라우디오를 이단자로 정죄했다. 그러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어떤 종파를 전파한 것이 아니고 교회의 단일성을 고수하고 진실성을 설명했을 뿐이다. 나는 종파와 분파를 제거하고 이단들과 미신들을 진멸하려고 했다. 나는 그것들과 싸웠을 뿐만 아니라 전투를 벌였다…왜 당신은 스스로 굴복하여 어리석은 형상들 앞에 엎드리는가? 지상의 헛된 모양들과 형상들 앞에 노예처럼 몸을 숙이는가? 얼굴을 들어 하나님께 향하시기 바란다. 그분을 찾으면 아래 것에 대한 미련을 잊을 것이다.”

 

클라우디오를 보면서 개혁신학의 뿌리가 얼마나 고상하고 외롭고 힘들었는지 상상된다.

 

 

 

[종교개혁 500주년 특별기획] 다시 세우는 2017 한국교회 신앙고백2- ② 진리를 향한 끝없는 저항

‘무명의 개혁파’로 불린 이들, ‘오직 성경’을 지키며 진리 위한 저항과 개혁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

 

지난 기고에서 개혁파의 뿌리는 16세기가 아니라 초대교회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개혁신앙의 중심에 있던 왈도파를 언급했다. 16세기 개혁신학을 이끌었던 대부분의 초기 선배들은 잠정적으로 왈도파이든지 아니면 그와 유사한 신앙을 고수하고 있었다.

 

 

 

개혁의 징검다리, 왈도파

 

‘왈도파’라고 불리는 이들은 무명의 개혁파로 활동하고 있다가 피에르 왈도가 등장하면서 편의상 왈도파로 불렸다. 피에르 왈도는 프랑스 리옹 출신으로 피에르 부드(Pierre Vaudès, 약 1140~약 1206년) 또는 피에르 봘도, 즉 왈도라 불린다. 그를 추종하는 이들을 왈도파(Waldensians)라고 부른다.

 

그가 부유한 장사꾼 출신으로 사악한 방법으로 재산을 가졌다고 전하지만, 구체적으로 그의 삶에 대해 알려진 것이 전혀 없다. 왈도는 복음서에 나오는 부자 청년처럼 아내에게 부동산을 준 후 나머지 재산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줬다. 그리고 거지처럼 방황하면서 주위 사람들을 다방면으로 도와줬다. 후에 왈도의 영향을 받아 프란체스코(1182~1226년)도 동일한 삶을 모방하게 된다.

 

왈도의 청순한 삶을 보면서 사람들이 모이게 되었고 그를 추종하는 자들을 가리켜 ‘리옹의 가난한 자들’이라 불렀다. 또 왈도는 원어 성경을 읽고 싶어 사제들에게 복음서와 시편만 아니라 교부들의 책을 라틴어에서 프랑스어로 번역해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그의 제자들이 프랑크푸르트와 뉘른베르크를 비롯하여 독일 전역과 이탈리아로 뻗어 나갔다. 왈도의 죽음과 상관없이 왈도파는 꾸준히 성장했고 그의 가르침을 본받아 유럽 여러 곳을 다니면서 자국어로 복음을 읽고 선포했다는 것이다.

 

1179년 왈도파는 3차 라테란 종교회의에 참석하여 자신들의 프랑스어 역 성경을 로마 교황에게 헌정했지만 그들을 꾸짖고 그냥 돌려보냈다. 하지만 1184년 베르노 종교회의에서 왈도파를 ‘휴밀리아티’(Humiliati) 또는 ‘리옹의 가난한 자들’이라 부르면서 이단으로 정죄하였다. 이후 유럽 전역에서 왈도파는 핍박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결국 이들은 13세기 알비파 십자군운동(Albigensian Crusade, 1209~1229년)으로 인해 진짜 이단 카타르파와 함께 수많은 자들이 학살을 당한다. 생존한 자들은 피에몬테의 깊은 골짜기로 숨어 들어갔다.

 

 

 

1000년 동안 ‘오직 성경’을 지키다

 

하지만 왈도와 왈도파에 대해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이 많다. 왈도파가 왈도를 따랐다면 그가 남긴 사상이 나타나야 하지만 그렇지 못하다. 또 왈도를 따르는 자를 ‘리옹의 가난한 자들’이라 불렀지만, 무명의 개혁파는 이탈리아 피에몬테라는 골짜기 사람들이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교회 내에 우상화가 심해질 때, 교회의 타락을 안타까워하던 이들이 피에몬테의 알프스 산 깊은 골짜기로 모여들었다. 여기에 있던 일부가 왈도와 관련을 맺으면서 왈도파로 가톨릭에 의해 불린 것이다.

 

왈도파로 불린 무명인의 개혁파 또는 개혁신앙인은 이미 왈도 이전에 알프산 깊은 골짜기에 살면서 부패한 교회, 즉 로마 가톨릭교회에 속하지 않으면서 신앙을 지켜 나갔다. 피에르 왈도가 전한 신앙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왈도파 신앙은 우리에게도 전해진 것이다.

 

피에르 왈도가 사제에게 부탁한 프랑스어 역 성경 이전에 왈도파는 이미 프랑스어 역 두 권의 성경을 지니고 있었다. <숭고한 교훈>이라는 시를 보면, “사도들 이후부터 어떤 교사들이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구세주의 도를 계속해서 가르치고 왔다. 지금까지도 그런 가르침을 계속하여 가르치는 교사들이 있는데 그 중에 한 명이 보도와(Vaudois)”라고 했다.

 

그들은 로마 가톨릭주의가 아니라 하나님께 더 순종하고, 성경 말씀을 신앙의 근원으로 여겼다. 그리고 복음 선포에 중요성을 뒀다. 로마 가톨릭교회의 무서운 칼날 앞에서도 성경의 권위를 두었다는 것은 개혁신앙의 기준이 되었다. 왈도가 태어나기 전부터 무명의 개혁파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연옥, 미사, 면죄부, 성자의 기도, 성상 등을 완강하게 거부했다. 이것을 <왈도파 신앙고백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 왈도파는 피에르 왈도의 이름에서 유래했지만 그 이전부터 ‘무명의 개혁파’로서 성경의 진리를 지킨 신앙인들이었다. 지금 왈도파로 통칭하는 이들은 1517년 종교개혁보다 무려 400년 이전에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상숭배와 미사를 거부하고, 오직 성경 말씀에 입각한 진리를 지켜나갔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은 이들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500년 동안 핍박하며 죽였다. 사진은 왈도파의 예배 장소가 습격당하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

 

 

 

진리를 위한 저항 그리고 개혁

 

피에르 왈도가 태어나기도 전 무명의 개혁파들의 신앙고백서가 1120년에 작성되었다. 현재 <왈도파 신앙고백서>로 불리는 이 신앙고백서의 신학이 개혁신학에 입각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은 그 신앙 때문에 누구보다 처절한 핍박과 순교의 길을 걸었다.

 

1487년 약 1만8000명의 십자군들은 왈도파가 거하고 있던 피에몬테 골짜기를 공격하여 무참히 그들을 학살했다. 1530년 왈도파 지도자 모렐과 피터 마손은 스트라스부르의 종교개혁자 오콜람파디우스를 비롯한 개혁파 종교개혁자들을 만나 신앙의 지도를 부탁한 후 돌아오는 길에 검거되어 참수형을 당했다. 이 일이 있은 후 왈도파는 개혁신앙에 입각한 종교개혁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1532년 샹포랑 종교회의에 왈도파는 참석하여 개혁교회에 동참하고 그 지침에 따라 목회자를 선출하고 교회 조직을 만들었다.

 

 

로마 가톨릭교회의 반종교개혁(Counter-Reformation)이 일어나자 프로방스 지역의 왈도파가 거의 죽임을 당하고, 이탈리아 남부에 있던 왈도파도 대학살을 당했다. 1655년 피에몬테 부활절에 수백 명의 왈도파가 죽임을 당했다. 핍박과 순교의 역사 속에서도 그들은 신앙을 지키면서 현재까지도 제네바 범종교회의와 개혁교회들의 세계연맹 정식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왈도파는 개혁신학을 고수한 개혁신앙인 또는 개혁파로서 개혁신앙에 입각한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부터 그들은 개혁신학을 고수하고 있었다. 이들은 칼빈 이전에 개혁신학을 이끌었던 오콜람파디우스, 기욤 파렐, 티어도르 드 베자, 올리베땅, 마틴 부처와 같은 개혁신학자들과 교제를 가지면서 어두운 중세 1000년 동안 성경적 개혁신앙을 고수한 개혁신앙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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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왈도파 신앙고백서> (1120년 작성)

 

1. 우리는 ‘사도신경’이라 불리는 12항목이 포함된 모든 것을 믿고 주장하며 12항목과 모순되는 것을 이단성 있다고 여긴다.

 

2. 우리는 한 분 하나님을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을- 믿는다.

 

3. 성경책들을 거룩한 정경이라 인정한다.

 

4. 성경책들은 우리에게 한 분 하나님, 전능하시고, 지혜가 한이 없으시고, 무한히 선하시며, 선하심으로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분임을 가르친다. 자신의 형상과 모양으로 아담을 창조하셨다. 하지만 사탄의 적개심과 불순종으로 인해 아담은 타락하게 되고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아담 안에서 우리는 범죄자가 되었다.

 

5. 율법을 받은 조상들에게 그리스도를 약속하셨다. 율법, 불의와 결점으로 인해 죄를 알고 있었던 그들은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렸고 그는 오셔서 율법을 완성하셨다.

 

6. 성부의 정하신 때가 되자 그리스도는 태어나셨고, 우리들에게 어떠한 선이라도 없다는 것과 죄인임을 명시하셨다. 진실하신 그는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우리들에게 나타내 보이셨다.

 

7. 그리스도는 우리의 생명, 진리, 평화, 그리고 의이시다. 우리의 목자, 변호자, 희생, 제사장으로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죽으셨고 의를 위해 부활하셨다.

 

8. 예수 그리스도 외에 우리와 성부 하나님과의 사이에 어떤 중보자나 변호자도 없음을 확실히 믿는다. 동정녀 마리아는 거룩하고, 겸손하고, 그리고 은혜로 가득 차 있었다. 모든 성자들, 즉 심판 날에 그들의 육체의 부활을 위해 하늘에서 그들이 기다리고 있음을 믿는다.

 

9. 이생이 끝난 후, 두 장소가 있는데 하나는 구원을 받는 자들을 위한 곳이고 다른 한 곳은 멸망 받는 자들을 위한 장소가 있음을 믿는다. 전자를 낙원이고 후자를 지옥이라 부른다. 적그리스도가 가공해낸, 진리와 반대되는 연옥을 부인한다.

 

10. 무엇보다도 ‘종교적 목적으로’ 인간이 만든 모든 가공물들을 하나님 앞에 언급조차 할 수 없는 혐오스러운 것들로 여긴다. 축일, 축일 전야, 성수, 특정한 날에 육체 학대와 같은 것들과 미사를 혐오한다.

 

11. 적그리스도로부터 나온 모든 인간적 가공물들을 -가톨릭들이 자발적으로 행하는 고해나 회오를- 증오하며 인간의 마음을 빼앗는다고 여긴다.

 

12. 성례를 거룩한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불가시적 축복의 전형으로 여긴다. 신자들에게 이런 상징들이나 형식들이 필요하다고 여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은 이런 상징들을 간직하지 않거나 없어도 구원을 받는다.

 

13. 세례와 성찬 외에는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성례가 아니다.

 

14. 복종, 순종, 엄수, 그리고 납부와 같은 세속적 권력을 존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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