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한 사람도 구원받는가?
이상원 교수 - 빛과 소금 2003년 9월호
총신대 신학대학원 기독교윤리학 교수
자살한 사람은 모양만 신자일 뿐 진정으로 거듭나지 않은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우리에겐 그런 판단을 할 자격도 능력도 없다. 사회는 삶의 의미와 가치를 눈에 보이는 물질 세계에 두는 유물 철학의 지배를 받고 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물질 세계에서 성공을 거두지 못한 사람들이 삶에 대한 의욕을 상실한 채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태가 연이어 발생하고 있다. 기업 운영과 방북 사업의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한 대기업 총수가 자살하더니, 그의 자살로 인해 방북 사업이 난관에 봉착할 것을 염려한 노인이 뒤이어 자살했다.
군 생활에서 찾아오는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한 사병들의 자살도 잇따르고 있다. 가난과 카드빚 독촉에 시달려 온 어느 주부가 인생을 비관한 나머지 어린 아이들과 함께 동반 투신 자살하는가 하면, 어느 여인은 달리는 전동차에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성적이 오르지 않는 것을 비관한 아들이 자살하자, 아들을 그리워하던 아버지가 뒤따라 자살했다.
특히 아들을 따라 자살한 아버지는 교인이었는데, 그것도 주일 예배에 참석한 후 집으로 돌아와 자살했다는 점에서 큰 충격을 안겨 주고 있다. 이처럼 주일 예배 직후에 자신의 목숨을 끊을 수 있는가? 기독교인들 중에 자살한 사람들이 심심찮게 많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 되었다. 이제 자살 문제에 대해 신학적인 입장을 밝힐 필요가 있다고 본다.
자살과 순교의 차이
필자는 두 가지 사실에 초점을 맞춰 서술한다. 하나는 자살에 대해 성경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기독교인이 자살했을 때 지옥에 떨어지는가 하는 것이다.
성경은 자살에 대해 특별한 언명을 하지 않고 있다. 그것은 자살이 죄가 아니라는 뜻이 아니다. 타인의 목숨을 빼앗든지 자신의 목숨을 빼앗든지,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행위 자체는 “살인하지 말라”는 십계명의 제6계명을 자명하게 어기는 범주에 포함될 수 있어, 자살에 대해 별도로 언명하지 않을 뿐이다.
성경에 언급된 자살의 사례는 아히도벨, 시므리, 가룟 유다 등이 있다. 압살롬의 모사(謀士)였던 아히도벨은 자신이 압살롬에게 건의한 전략이 채택되지 않고 다윗이 심어놓은 첩자 후새의 전략이 채택되자, 집으로 돌아와 목매어 죽는다(삼하 17:23). 이스라엘 왕 엘라에 대항한 시므리는 반역에 실패하자 왕궁에 불을 놓고 자살해 버린다(왕상 16:18).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한 후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러나 성경은 사례를 기록할 때마다 자살이라는 행동에 대해 특별한 언명을 하지 않고 있다. 사울 왕은 이방인에게 찔림과 모욕당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삼상 31:3∼4, 대상 10:3∼4). 이 경우는 사울이 여호와께 범죄한 것에 대한 형벌로서 죽음이 찾아 온 것임을 분명히 할 뿐(대상 10:13∼14) 그의 죽음 자체에 대해 평가하지 않고 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대의가 있으면 사람을 죽이는 일이 허용되듯,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는 경우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대의가 있으면 허용이 된다. 예컨대 삼손이 자신의 목숨을 죽음에 내준 사건(삿 16:23∼31)은 제6계명을 어긴 통상적 범죄 행위로 취급하지 않는다. 하나님께 기도한 후에 삼손은 자신의 목숨을 잃게 되는 것이 충분히 예상되는 상황에서 다곤 신당을 무너뜨리는 행동을 결행한다. 하나님께서 삼손의 기도를 들으셨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믿음의 행위로 인정하셨다(히 11:32). 삼손의 행동은 조국을 위해 장렬하게 싸우다가 전사한 행위이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친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는(요 15:13) 행위로 간주할 수 있다.
자신을 희생시켜 부하들의 생명을 구한 강재구 소령이나 타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지하철에 뛰어든 청년의 죽음은 범죄 행위가 아니라 이웃 사랑의 표현이다. 그러나 타인의 생명을 구하려는 의도가 분명한 경우가 아니라면, 자신의 목숨을 끊는 행위를 허용해선 안 된다. 예컨대 어떤 처녀가 순결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끊는다면, 그 여인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나 생명의 존엄성이 순결의 가치보다 월등히 높은 것임을 잊어선 안 된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건이나 믿음을 지키다가 순교하는 것을 자살로 분류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큰 오해다. 우선 예수님께서 스스로 생명을 끊으신 게 아니라, 타살 당하신 것으로 봐야 한다. 예수님께서 다가오는 죽음을 예상하시고 피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예수님의 죽음은 수많은 생명들을 살리기 위한 ‘희생’이었다. 순교자의 죽음은 명백히 타살이다. 순교자는 하나님께 향한 신앙이라는 중요한 가치 때문에 타살이 예상되는 길을 피하지 않은 것 뿐이다.
자살의 충동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기독교인이 자살을 결행했을 경우에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고 세례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지옥에 들어가는가? 이 질문과 관련해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첫째, 기독교인이라 할지라도 죄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는 점이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후 속사람이 중생해 새사람이 되었으나,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겉사람까지 성화되는 것은 아니다. 때문에 기독교인은 끊임없이 죄의 세력에 위협을 받으며 그 세력과의 싸움에서 때로 승리할 때도 있고, 때로 실패할 때도 있게 마련이다.
사람을 죽이는 일과 간음을 범하는 일은 기독교인의 신분에 어울리지 않고 마땅히 피해야 할 죄인 것처럼, 자살도 기독교인에게 어울리지 않는 죄인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기독교인도 믿음이 약해지고 시험에 들게 되면 자살의 충동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둘째, 마지막 날에 최종으로 구원을 받는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순간에 우리에게 전가된 그리스도의 의로움뿐이라는 사실이다. 기독교인이 된 후에 살아낸 성화의 삶의 궤적이 마지막 날에 천국행과 지옥행을 결정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자살도 예외가 아니다.
혹자는 다른 죄들은 죽기 전에 회개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통과할 수 있지만, 자살한 사람은 자신의 죄를 회개할 기회가 없어 하나님의 심판을 통과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교통 사고나 비행기 사고 등으로 급사하는 경우와 심장마비나 익사 사고로 돌연사한 믿음의 사람들도 자신들의 죄를 마지막까지 회개하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서야 한다는 말이 된다. 많은 사람들은 회개할 기회가 있어도 회개하지 못하고 죽고 만다. 또 전에 지은 죄목들이 생각나지 않아 회개하지 못하거나 끝까지 죄인 줄 모른 채 죽는 성도들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있다. 마지막 날의 구원은 기독교인이 된 후에 우리가 입을 열어서 모든 죄를 고백했는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 날의 영화로운 축복도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주어질 뿐이다.
구원의 논의에서 제외되는 죄 ‘자살’
물론 마지막 날에 자살을 택한 사람은 하나님에게 엄중한 문책을 받게 될 것이다. 어떤 형태의 문책이 있을지 알 수 없으나, 그것이 기독교인의 천국행과 지옥행을 결정하는 조건은 아닐 것이다. 물론 자살한 사람은 모양만 신자일 뿐 진정으로 거듭나지 않은 사람일 가능성이 많은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에겐 그런 판단을 할 자격도 능력도 없다. 우리는 자살이 심각한 죄임을 강조해야 하지만, 자살한 사람의 구원 문제는 하나님께 맡기고 경솔하게 말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경제적 곤경, 실연, 사회적 부적응 등과 같은 외적 요인들과 고독, 우울증 등과 같은 내적 요인들은 기독교인들까지 자살 충동을 느끼게 하는 원인이 된다. 따라서 교회와 기독교인들은 복음의 선포, 긴밀한 교제, 상담 등을 통해 이런 원인으로 성도들이 자살하지 않도록 기도하고 노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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