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사는 지혜
김인석 목사 / 칼빈장로교회 (2010.11.2)
16세기 중반 하이델베르그가 제네바와 함께 개혁의 중심도시가 되었던 배경에는 프레데릭 3세의 지배 하에서 가능하게 되었다. 하이델베르그 대학은 1386년에 설립되었으나 1559년 44세의 나이로 프레데릭 3세가 즉위한 후 루터주의와 칼빈주의 사이에 논쟁이 일어났는데 프레데릭 3세가 칼빈주의에 손을 들어주었다.
그 후로 하이델베르그 대학에는 인근의 개혁자들이 속속 몰려들기 시작했다. 1561년 자카리아스 우루시누스가 교수로 부임했고, 같은 해 카스퍼 올레비아누스도 부임했다. 이 두 사람에 의해서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이 작성되었다. 우루시누스의 경우는 비텐베르그에서 공부하였고 거기서 칼빈, 부쩌, 블링거, 그리고 피터 마터 베르미글리우스와 교제 하였다. 올레비아누스의 경우도 피터 마터에게서 배웠고, 로잔에서는 베자에게서, 제네바에서는 칼빈에게서 강의를 들었던 인물이었다.
또한 제롬 잔키우스는 1568년에 교의학 교수 사역을 시작했다. 그는 이태리 출신의 피터 마터의 제자이기도 하다. 이렇게 당대의 개혁의 중심 인물들이 하이델베르그 대학에 모여서 대륙 개혁신학의 산실이 되었다. 그러나 이런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프레데릭 3세가 죽고 즉위한 선제후 Luwig 6세에 의해 중단되었다. 왜냐하면 그는 루터주의로 회기 했기 때문이었다. 프레데릭 3세가 죽은 후 14일만에 다니엘 토사누스는 개혁주의 반대진영이었던 Paul Schechsius에 의해서 축출되었고, 곧 이어 올레비아누스도 교수직을 잃었다. 그외에도 다른 개혁신학자들도 대거 교수직이 박탈되었다.
뿐만 아니라 1578년 봄까지 600명 이상의 칼빈주의 설교자들과 교수들이 쫓겨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피신자들에게 노이스타트라는 새로운 개혁도시가 기다리고 있었다
(김영규 교수, "17세기 개혁신학"중에서)
이처럼 16세기 대륙에서 개혁의 내용들은 그 진리를 품은 자들에 의해서 이리 저리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마치 나그네처럼. 진리를 외칠 수 있고, 듣는 자들이 있다면 어디든 그들에게 최고의 안식처가 되었다.
오늘의 우리도 어떤 곳, 어떤 환경에도 불구하고 진리가 있는 곳에 자리를 펴고 머무르는 이들이 얼마나 있는가?
지구 북반구의 차가운 동토의 여름은 짧다. 불과 수 주에 지나지 않지만, 그곳의 식물들은 그 짧은 기간 안에 싹을 틔우고 잎이 나며, 꽃을 피우다.. 이내 꽃씨를 날리다가 눈보라에 다시 묻힌다. 다른 지역에서 수 개월에 걸친 일들을 단 몇 주만에 해내는 것이다.
이는 진리의 파수를 위해서는 어떤 환경이나 능력의 문제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가 지키고자 하는 마음만 있다면 짧은 생을 살지라도 그 사는 동안 만큼의 흔적들은 남길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오늘 내가 진리를 위해서 살 수 없다면, 내일도 살 수 없다. 오늘 그럴 수 있다면, 내일도 그렇게 살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영원하신 그분을 영화롭게 하며 사는 도정(道程)이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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