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론
김명도 박사 (최소 2011년 이하)
서론
모든 비성경적인 이단들은 주로 기독론과 성령론에서 실수를 한다. 기독론을 바로 알고 성령론을 바로 알면 일단 무서운 이단 사상은 피할수 있다. 이단에 대처하기 위해서, 그리고 내 생명의 구주이신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아는 것은 성도로서 매우 중요하다. 이단에 빠지는 이유는 기성교회 교인들이 신학이 약해서다. 요리문답 공부를 하지 않고, 성경을 모르니 누가 이단 사설을 가지고 와도 비판할 능력이 없게 되어 어떤 경우에는 진리를 떠나 이단에 빠지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기독론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 그의 인격과 사역을 공부하는 학문이다. 예수님은 삼위일체중의 제2위이신 분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I. 그리스도의 이름
그리스도를 호칭할 때 여러 가지 이름이 있다. 대략 5가지이다. 그 이름들을 보자:
1. 예수: 히브리말의 여호수아 히브리발음은 <야솨> 이다. 구약의 여호수아가 예수이다. 하나님이 구원하신다. <야웨> 라고도 한다,
2. 그리스도: 구약성경에서 <메시야> 라는 말을 헬라어로 번역하면 <그리스도>가 되는데 <기름 부움받은 자> 란 의미이다. 구약성경을 보면 사무엘상 10:1에 이스라엘의 왕을 기름을 부어 세웠고, 왕상 19:16에 보면 선지자를 기름을 부어 세웠고, 출 29:7을 보면 제사장을 기름을 부어 세웠다. 오늘에는 교회에서 목사, 장로, 집사에게 손을 얹어 안수로 대신하다. 당시 기름을 부어서 직책을 맡기는 것은 기름은 귀하고, 빨리 없어지지 않는 성질 때문에, 또 이와 같이 기름을 붓는 것은 성령을 상징하는 의미로, 안수 받는 그 직책의 고귀함과 그리고 그 귀한 직책을 감당하도록 특별히 성별되었으며 그 직책에 자격을 부여한다는 등 여러 가지 의미를 가졌다. 오늘에도 안수하는 것은 마친 가지 의미를 갖는다. 안수는 그 사람의 구원과는 무관하다. 그리스도는 왕, 제사장, 선지자의 3중직을 모두 감당하기 위하여 성별된 분으로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으신 분이다. 그의 기름 부움은 요단강에서 그가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그의 머리 위에 임함으로 되어 졌다.
3. 인자: 그리스도를 “인자” 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말은 단 7:13에서 나온 말인데 사람들이 쓰는 말이 아니고, 예수님이 자신을 지칭하여 사용한 말이다. 그가 고난의 종임을, 즉 그의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자기 생명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위한 것이 그의 사명임을 나타내 주는 말이다.
4.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마태 11:27 대로 성 삼위 하나님의 제2위인 고로 본체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또한 마태 24:36 말씀대로 구세주이기 때문이며, 눅 1:35 대로, 성령의 특별한 사역으로 인간의 몸을 입은 탓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운다.
5.주님: 보통 우리는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한다. 특히 그가 부활한 후에 주님이라는 말을 많이 쓰게 되는데 계시록 1:10에 보면 <주의 날> 이라는 말이 새로 생겨났다. “주님”이란 그가 교회의 머리이시고 주인이시며 우주의 주인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따라서 피조물에게 절대적인 순종을 요구하는 왕권을 의미하기도 한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하면, 그에게 나의 모든 것을 바치고 그에게 전폭적으로 순종할 것을 다짐하는 것이다. 오늘의 성도들에게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대하는 태도가 미약하다.
II. 그리스도의 성격
그리스도의 성격에 대해서는 초대교회 때부터 많은 신학적 논난이 있어 왔다. 교회의 역사를 더듬어 보면, 초대교회의 이른바 공회(公會, council), 혹은 종교회의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성격 문제 때문에 소집된 회의들이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인가? 인간인가? 혹은 실은 하나님인데 인간처럼 보인 것인가? 만일 예수님이 인간이며 동시에 하나님이라면 어떻게 양성이 한 몸에 있을 수가 있는가? 이런 것들이 논쟁거리였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딤전 3:16에 가르치기를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가 인간의 형상을 입고 오셔서 우리들 가운데 임하신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예수님은 구약에서 신인 현현 (anthropomorphism) 으로 인간의 모습으로 자주 나타났다. 물론 성경이 완성되기 전의 일이다. 그리스도는 분명히 신성과 인성을 겸하신 분이다. 한 몸에 인성과 신성을 겸한 이 사실을 설명할 도리는 없다. 이유는 우리 인간의 제한된 두뇌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우리 인간의 지적 영역 밖의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경이 그렇게 가르치기 때문에 그대로 믿는 것뿐이다. 마치 삼위일체 하나님을 좁은 인간의 두뇌로 모두 이해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성경대로 믿는가 아니면 성경을 비판하여 취사선택하는가 하는데 따라서 성경 적인 보수주의 신앙과 하나님의 계시보다 인간의 이성을 중요시하는 자유주의 신앙으로 분리되고, 성경의 내용을 믿지만 그것이 어디서 오든지 간에 성경 이외의 계시를 믿는 것이 신비주의자들이다. 신비주의자들은 성경의 충족성을 믿지 않는다. 성경은 우리를 구원하는데 필요한 모든 정보가 다 들어 있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하신 전부라는 진리를 믿지 않는다. 그러므로 신비주의도 엄밀한 의미에서 자유주의에 속한다. 성경대로 믿지 않는 모든 가르침은 아무리 요란스러워도 자유주의 범주에 속한다.
초대교회 즉 기원 2세기, 3세기, 4세기에는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을 둘러싸고 많은 이단들이 나왔다. 대표적인 사건들을 예를 들자면,
Cerinthus 라는 사람은 영지주의자 였는데 예수님은 인간이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인데,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 받을 때 그리스도가 임했다가 예수님이 사역을 마치고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 그리스도가 떠났으며 “운명한 것은 인간 예수이다“ 라고 주장했고,
Apollinarius 라는 사람은 “예수님은 하나님이지 사람이 아니다” 라고 말했고
Arius 는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 아니고 피조물중에 맨 먼저 지음 받은 분이라고 하였다. 지금의 여호와의 증인과 같은 주장을 했다. 따지고 보면 오늘의 이단들은 모두 새로 나온 것이 아니고 이전에 있던 이단들이 이 마지막 때에 다시 출현하여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는 것이다.
Nestorius 라는 사람은 그리스도안에는 두 예수님이 계시는데 인성을 가진 예수와 신성을 가진 예수님이라고 하여 두 성격의 통일성을 부인하여 이단이 되었다.
Euteches 라는 사람은 예수님의 인성은 신성에 흡수되었으므로 신성과 인성을 구별할 수 없고, 한 성격만 지니고 있다고 하여 이단으로 낙인 되었다.
Ebion 학파는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했다.
그러면 성경 적인 가르침은 무엇인가?
성경은 예수님이 신성과 인성을 지니고 있음을 가르친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사람의 형상을 취해서 인성을 지녔다고 가르친다. 예수님은 성 삼위 하나님의 제2위이심으로 창세전부터 선재 (先在, preexist) 하는 하나님 바로 그 분으로 신성을 갖고 계시고 갈라디아 4:4 말씀대로 “때가차매 하나님이 여인에게서 그를 인간의 몸을 입고 오게 하셔서 성육신하신 분이다. 그는 우리와 같은 성정 (性情)을 갖고 있지만 죄는 없으신 분이시다.
그의 신성은 구약에서 사 9:6, 렘 23:6, 미가 5:2, 말라기 3:1, 등이 말하고 있고,
신약에서는 마태 11:27, 마태 16:16, 마태 26:63,-64, 요한복음 1:1, 로마서 9:5, 고전 2:8, 히 1:1-3, 계 19:16 등에 말하고 있다. 이 같은 엄연한 성경구절이 예수님의 신성을 입증해도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예수님의 신성을 인정하지 않고, <예수님은 위대한 인간이며 하나의 선생> 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 오늘 많은 자유주의 교계의 지도자들이다.
그의 인성은 요한 8:40, 행 2:22, 롬 5:15, 고전 15:21등에서 읽어 보듯, 그는 인간이 갖는 육신과 영혼을 가졌다 또한 마태 26:26, 38, 눅 24:39, 히 2:14 등을 보라, 예수님은 인간처럼 성장했고 (눅 2:40), 인간의 간고를 경험하신 (마태 4:2, 마태 8:24, 눅 22:44, 요한 4:6, 요한 11:35, 요한 12:27, 히 2:10.) 참 인간이지만 죄가 없는 분이다 (요한 8:46, 고후 5:21, 히 4:15, 벧전 2:22, 요일 3:5).
그리스도가 인성과 신성이 필요한 이유: 그가 인간이기 때문에 그가 우리의 대속물이 될 수 있고 고난받 고 죽을수 있다. 죄가 없는 분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죄를 짊어질 수 있다. 그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의 희생이 무한한 가치가 있어 하나님의 진노를 참으시고 다른 사람을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할 수 있다. (시 40:7-10, 시 130:3 참고).
그의 두 성품이 통일되어 있다.
그리스도는 인성을 갖고 있으나 인간만이 아니다. 중보자 예수는 언제나 변함없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성육신 할 때 예수님은 마치 하나님이시기를 포기하고 사람으로 변한 것이 아니다. 그는 언제나 하나님으로 신성을 지니고 있으며 성육신 때는 그의 신성에 인간의 성품을 지닌 것뿐이다. 그는 신성과 인성의 모든 특성을 모두 지니고 있는데 예수님이 인간의 자격으로 말하건, 하나님의 자격으로 말하건, 항상 한 분 그리스도가 말씀하시는 것이다. (요한 10:30, 요한 17:5,) 많은 이단들은 그리스도의 성격의 통일에 대해 다르게 가르친다. 가령 종교개혁기의 Socinus 라는 사람은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했다. 마치 초대교회에 Sabelius가 삼위일체 교리를 오해하여 말하기를 “하나님은 3위로 계시는 것이 아니고 1위로 계시는데 어떤 때는 성부로, 어떤 때는 성자로, 어떤 때는 성령으로 나타난다” 라고 가르쳤다. 즉 창조 때는 아버지로, 십자가에서는 아들로, 구속 사역에서는 성령으로 나타난다고 가르쳤다. 이런 사상을 신학적으로 양태론 (樣態論, modalism) 이라고 한다. 이런 사상이 초대교회 에서 많은 성도들을 오도하여 큰 물의를 빚었고 초대교회의 지도자들은 이런 이단과 싸워야 했다.
III 그리스도의 상태
그리스도에게는 두 가지 상태가 있다. 비하(卑下, humiliation) 와 승귀(昇貴, exaltation)이다. 그리스도에게는 이 두 가지 상태가 모두 필요했다. 그가 비하 상태로 있었다는 말은 그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지만 율법아래에 있어서 율법을 지켜야 하는 상태였고, 승귀의 상태에서는 그는 승리의 주님으로 따라서 율법 위에 계셨다. 그러면, 이 두 가지 상태를 좀 더 자세히 설명해 보도록 하자.
A. 그리스도의 비하 (卑下, humiliation)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인간의 형상을 입으신 분. 말씀 자체이신 그리스도가 율법아래 놓였다는 사실 등이다 (마태 3:15, 갈 3:13, 갈 4:4, 빌 2:6-8,) 그의 비하에서는 그의 성육신, 고난, 죽음, 장사됨을 포함한다.
1. 예수님의 성육신을 보자.
성육신도 그리스도의 비하 상태에서 행하신 사역이다. 요한복음 1:14 이나 요일4:2, 이사야 7:14, 마태 1:20, 눅 1;34에 언급한대로 그는 동정녀의 몸에 탄생했다.
2, 그리스도의 고난
예수님의 고난은 비단 십자가에 국한되지 않고 그의 전 생애가 고난의 생애였다. 죄 없는 하나님이 죄로 인하여 저주받은 세상에 오셔서 평생을 “고난의 종 (Suffering Servant)”로 살았다. 사단이 그를 공격했고, 사람들이 그를 멸시 천대했고 그의 원수들이 그를 핍박했다. 그의 영혼의 고통은 그의 육신의 고통보다 더 하였다.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시고, 악인으로 둘러싸인 가운데 고난 받으며, 하나님의 백성의 죄를 혼자 짊어지는 고통이 얼마나 컸겠는가? 그러므로 요즘 한창 떠들썩하는 이른바 The Passion of the Christ 라는 영화는 촛접을 이탈했다. 예수님은 빌라도 법정에서 예수를 알지 못하는 로마 병정에게 (영화에서는 12분간 계속) 매를 맞아서 우리의 죄를 없이 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죄가 매를 심하게 맞는다고 해결될 문제이가? Mel Gibson 은 배우이고 영화 제작자 이지만 그는 천주교의 신자이다. 천주교에서는 고행을 가르친다. 육신에 고통을 가하면 하나님에게 더 가까이 나가며 은혜를 받는다 는 교리이다. 성경 어디에 그런 교리가 있는가? 우리의 죄를 용서 받은 것은 목요일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피방울처럼 되어 <할수만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떠나게 하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오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신 말씀에서 보듯,
하나님이 그의 아들 예수님에게 퍼부었던 진노때문이다. 우리의 죄는 매를 몇 대 맞는다고해서 해결될 만큼 가벼운 벌로 해결될 성질이 아니다. 모두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모르고 하는 말들이다.
3. 그리스도의 죽음
예수님은 사고나 병으로 돌아가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대로 죄인의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의 진노를 한 몸에 받으시며 돌아 가셨다. 로마제국의 시형법 (死刑法) 에 따라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인하여 그는 저주받은 죽음을 죽으셨다. 그 저주는 예수님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 받아야 할 죄를 그가 대신 짊어진데서 오는 저주였다. (갈라디아 3:13을 보라, 신명기 21장23절을 보라)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를 그 (예수) 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사야 53), 신 21:23에 보면 나무에 달린자마다 저주를 받은자인데 갈라디아 3:13에서 바울은 예수님은 나무(십자가)에 달려 저주를 받아 (우리의 저주) 돌아 가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4. 그리스도의 장사됨
죽음은 그리스도의 고난의 마지막 단계가 아니다. 인간이 흙으로 돌아가는 것은 죄 때문이다 (창 3:19). 시편 16:10, 행 2:27, 31, 행 13:34 등을 읽어보면 그의 장사됨은 역시 그의 비하상태 즉 그의 낮아지심에 속하는 일이었다.
5. 영문 사도신경에 “He descended into hell" 즉 ”그가 지옥에 내려가서” 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 지옥에 내려갔다는 말이 아니라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고통과 십자가의 고통이 지옥의 형벌과 맞먹는 고통이란 점에서 상징적으로 사용한 표현이다. 물론, 천주교에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직후 Limbus Patrum 이라는 곳, 즉 구약시대 성도들이 갇혀 있는 곳에 내려가서 그들을 모두 석방했다고 가르치는가 하면, Luther파는 예수님이 지옥에 내려가서 어둠의 권세를 이기고 승리한 예수님의 승리를 자축했다고 가르치지만 성경은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정한 것이요 그 뒤에는 심판이 있다“ 라고 히브리 9:27에 가르치는 점으로 보아서 천주교나 루터파의 견해를 평가해야 한다.
B. 그리스도의 승귀 (昇貴, exaltation)
그리스도의 비하가 있는가 하면, 그리스도의 승귀가 있다. 그의 높아지심이다. 그리스도는 비하상태에서 율법아래서 수난의 종으로 사역하였으나 이제 사역을 마치고 율법위에 군임하는 승귀상태에 들어가셨다. 다음과 같은 4 가지 면에서 승귀를 설명한다.
1. 부활
예수님이 단지 죽음에서 살아나셨다는 객관적인 사실만 아니라 예수님의 인성의 육신과 영혼이 같이 본래의 모습으로 되살아나서 보다 높아지셨다는 것이다. 그는 육신적으로 부활하셨다. 그의 부활한 몸은 영적인 육신(spiritual body) 이다. 이 말은 여호와의 증인이 주장하는 바, 예수님은 육신적으로 부활한 것이 아니라 영혼으로 보이지 않게 부활했다고 가르는 것과 아주 다르다. “영의 몸” 이란 “신령한 몸”으로 <다시 죽음이 없고, 썩지 않는 몸> 을 말한다. 고린도전서 15: 35절 이하를 참고할 것.
그리스도는 육적으로 부활하여 잠자는 자의 첫 열매가 되었다 (고전 15:20). 그리스도의 부활은 적어도 세 가지 면에서 깊은 의의가 있다. 1) 그리스도가 모든 율법의 요구사항을 모두 완전히 지켰다고 하는 하나님의 선언이며 (빌2:9), 2) 성도들의 칭의, 중생, 그리고 부활을 상징한다 (롬 4:25, 롬 5:10, 엡 1:20, 빌 3:10, 벧전 1:3 등).
2. 승천
물론 승천은 부활의 연속으로 마지막 귀착지(歸着地) 이지만, 그러나, 그 나름대로 승천도 신학적인 의의를 갖는다. 승천이란 주님께서 지구에서 하늘로 그의 주거를 옮긴 일. 또한 그의 인성이 영광을 받은 일등을 볼 수 있는데. 물론 다른 교파는 다르게 가르친다. 가령 루터교는 가르치기를 예수님의 승천은 그가 인성을 버리고 영원한 신성을 유지하며 영원히 무소부재의 경지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가르친다. 그래서 루터파는 성찬식때 무소부재하는 그리스도가 성찬식때 떡과 포도주 아래, 옆에, 옆에 (마치 스론지 처럼) 임재한다고 하는 이른바 공존설 (consubstantiation)을 가르친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원 전부터 신성을 가지고 계시는 하나님의 제2위 바로 그 분이 신데 다시 신성을 입을 필요가 있는가 하는 질문에는 대답을 못한다.
승천의 신학적 의의는 1) 우리의 대제사장으로서의 그리스도는 그의 승천 시 성부에게 그의 희생의 공로를 바치며 보좌에 앉아 성도들을 위해서 간구하기 시작 한다 (롬 8:34, 히 4:14, 히 6:20, 히 9:24). 2) 그는 또한 승천하여 우리를 위한 처소를 예비하신다. (요 14:1-3) 그러므로 성도는 그의 승천으로 인하여 우리가 거할 처소가 예비 된 것이다 (엡 2:6, 요 17:24)
3. 보좌에 앉으심
승천하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오른편 보좌에 앉으셨다 (엡 1:20, 히 10:12, 벧전 3:22).. “오른편” 이란 말은 문자 그대로 해석하기보다는 “권세”와 “영광”을 상징하는 말로 해석함이 옳다. 보좌에 앉아서 세상을 통치하며 그의 백성을 위해 간구하고 보호하신다. 성경에서는 “오른편” 이 권세를 상징하며 또 “능력” 과 “영광” 등을 상징한다. 프랑스 말에서 오른편을 droit 라고하는데 이 역시 “권리,” “권세” “정의” 란 말을 내포한다. 마찬가지로 라틴어에서도 오른편을 dexter 라고하는데 이 말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진다. "손재주가 좋다는 말“ 도 되고 ”통치“ 의 말도 된다. 그러므로 종교개혁가들은 사도신경의 이 말을 문자 그대로 주님이 가만히 앉아 계시는 정적인 상태를 말함이 아니고 세상을 통치하시며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시고 성령을 통해서 말씀으로 구원 할자를 구원하시는 의미로 해석한다.
4. 재림
그의 승귀의 절정은 그의 영광중의 재림이다. 이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 그는 다시 오신다.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려 오신다. (사도행전 1:11, 계 1:7). 그가 재림할 때 심판주로 오신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성경구절은 요한복음 5:22, 27, 행 10:42, 롬 2:16, 고후 5:10 딤후 4:1. 등이다. 예수님께서 오실 때는 구원이 완성되는 날이며 세상 종말일이다. 고전 4:5, 빌 3:20, 골 3:4 살전 4:13-17, 살후 1:7-10, 살후 2:1-12, 딛 2;13, 계 1;7 등을 보라,
IV. 그리스도의 사역
지금까지 그리스도의 인격을 공부했다. 이제부터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공부하자.
그리스도는 세 가지 직분을 담당하셨다. 그 세 가지 직분이란 선지자의 직분, 제사장의 직분, 그리고 왕의 직분을 말한다. 이와 같은 직분은 차원이 다르긴 하지만 성도들에게도 있다.
A. 선지자 직분
구약에 보면 선지자가 올 것을 예언했고 (신 18:15), 예수님은 자신을 선지자 라고 말씀했다 (누가 13:33). 또한 그가 전하는 말씀이 성부에게서 온다고 했다 (요한 8:26-28, 요 12:49-50). 예수님은 미래를 예언했고 (마태 24:3-35. 눅 19:41-44.),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를 선지자로 인정했다 (마태 21:11, 46, 눅 7:16, 눅 24:19, 요한 6:14, 요한 7:40, 요한 9:17 등을 참고할 것.
“선지자”란 하나님으로부터 꿈이나 환상이나 말씀을 받아서 남에게 전하는 직분을 말한다. 그의 직분 중 주요한 것은 율법을 백성들에게 풀어 설명하는 일이었다. 그리스도는 구약에서도 성육신하기 전에 말씀을 전했고, 신약에서도 이 땅에서 말씀을 전했고, 승천한 후에도 성령으로 사도들을 통해서 계속 말씀을 전했다 (요한복음 14:26, 요한 14:26, 요 16:12-14, 행 1:1). 현재도 그는 성령으로 모든 신실한 주의 종들을 통해서, 새로운 계시가 아닌, 이미 주신 말씀으로 역사한다. 오늘의 문제는 새로운 계시를 말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날로 증가하고 있어서 성경의 충족성을 믿지 않는다는데 있다.
B. 제사장으로서의 직분
1. 구약은 메시야가 영원한 제사장이 될 것을 예언했다 (시 110:4 스가랴 6:13, 이사야 53장). 신약에서 그를 "제사장" 이라고 호칭하는 책은 히브리서 뿐이다. 히브리서에서는 그리스도가 제사장인 것을 여러 번 반복해서 말하고 있다 가령, 3:1, 4:14, 5:5 6:20, 7:26, 8:1 등. 그러나 다른 신약성경에서도 그가 제사장 된 것을 암시하고 있음이 사실이다. (마가 10:45, 요한 1;29, 롬 3:24-25, 고전 5:7 요일 2:2 벧전 2:24, 벧전 3:18. 등이다. 선지자가 백성 앞에서 하나님을 대표하듯, 제사장은 하나님 앞에서 백성을 대표한다. 두 직분이 모두 가르치는 직분이다. 선지자는 주로 도덕을 가르치고, 제사장은 의식법을 가르친다. 제사장은 하나님에게 가까이 갈 수 있었으며 백성의 소원을 하나님에게 아뢰었다. 히 5:1-3에 의하면 제사장은 하나님 앞에 백성의 죄를 고하며 희생의 제물을 바치고 백성들을 위해 기도해 주었다.
2. 또한 그리스도의 희생의 사역에 대해 언급할 필요가 있다. 구약의 의식법은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다. 히 9:23-24, 히 10:1, 히 13:11-12등을 읽어보면 알수 있다. 모두 장래 일의 모형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어린양” 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요 1:29), 또 우리의 유월절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고전 5:7). 신약성경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제사장인 것을 여러 군데에서 밝히 혹은 암시하고 있는데 가령 마가 10:45, 요한 1:29, 롬 3:24-25, 롬 5:6-8, 고전 5:7, 고전 15:3 갈 1:4, 엡 5:2, 벧전 2:24, 벧전 3:18, 요일 2:2 요일 4:10, 계 5:12 같은 성경구절에 나타난다. 물론 가장 분명히 그리고 가장 많이 등장하는 성경은 신약에서는 히브리서 이다. 가령 5:1-10, 7:1-28, 9:11-15, 24-28, 10:11-14, 19-22, 12:24, 13:12 등을 보라,
3. 그리스도는 우리의 희생의 제물만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시는 분이다. 그는 승천후 하늘보좌에 앉으시어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신다. 그는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시는 중보자이다. (롬 8:34, 히 7:25, 히 9:24, d일 2:1) 그의 중보 기도는 그의 희생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는 성부에게 그의 희생을 바치고 그의 백성을 보호하시며 성령을 통해서 그의 뜻을 펴나가신다. 그의 기도는 현재 믿고 있는 사람들과 지금은 아직 믿지 않지만 앞으로 믿을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 장차 믿을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다. (요한복음 17:9,20).
C. 왕의 직분
그리스도의 3중직의 세 번째는 왕의 직분이다. 그의 왕권은 두 가지이다. 성도 즉 교회를 지배하는 영적인 왕권이 있고, 세상을 지배하는 왕권이 있다.
1. 영적왕권
그리스도가 그의 백성을 다스리는 권세를 말 한다 영적이라고 하는 이유는 성도의 영적유익을 위함이기 때문이며 성도의 마음과 생활에서 이뤄지기 때문인데 영적인 목적 즉 죄인의 구원을 목표로 하고 있는데 이를 행하시는 방법은 두 가지, 즉, 말씀과 성령이다. 이런 사역과 그 영역을 신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나라“ 혹은 ”천국“ 이라고 부른다. 마태복음에서는 4군데 ”하나님의 나라“ 란 말이 나오고 나머지는 모두 ”천국“으로 표현했는데 이는 유대인들이 ”하나님“ 이라는 단어에 송구감을 느껴 사용을 기피하는 현상 때문이며 다른 복음서에서는 모두 ”하나님의 나라, he baseleia tou theou“ 로 표기되어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영적인 세계이며 복음전하여 구원을 이루는 일을 내포한다. 예수를 믿으면 부자가 된다는 가르침은 거짓이며 오늘 번영신학을 가르치는 이들이 만들어 낸 비성경적인 이단적 교리이다. 천국에는 희생이 따른다. 이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은 진실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이며 또한 무형교회 (Church Invisible) 의 회원전부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두 가지 면이 있는데 성도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의미에서 이미 이뤄졌고 (마태 12:28, 눅 17:21, 골 1:13,) 또한 하나님의 나라는 미래적인데 그리스도의 재림할 때 완전히 이뤄진다.(마태 7:21, 눅 22:29, 고전 15:50, 딤후 4:18).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이뤄졌고, 한편 미래적이다“ The Kingdom of God is already here but not yet. (Herman Ridderbos 의 The Coming of the Kingdom 책을 꼭 참고할 것).
미래에 다가올 천국은 현재의 천국과 본질적으로 같아서 사람들의 마음에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때에는 천국이 보이는 천국이요 완성된 천국이라는 점이다 (Consummated reality of the Kingdom of God)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때에는 보인다.
2. 그리스도의 일반적 왕권
앞서 성도들의 영혼을 관할하는 그리스도의 영적인 왕권을 보았다. 이제는 주님의 일반적인 왕권을 보자. 부활하신 주님은 마태 28:18에,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라고 했다. 같은 말이 고전 15:27, 엡 1:20-22 등에서 메아리친다. 성부가 성자에게 주어진 세상을 통치하는 왕권을 말함이다. 중보자로 그리스도는 세상 나라와 각개인의 운명을 결정하며, 세상을 주관하며 그의 구속의 목적을 위해서 세상을 복종시키며 그의 교회를 위험에서 보호하신다. 이런 왕권은 하나님의 나라의 원수들이 모두 진멸될 때까지 계속되며 이런 목적이 완성되면 성부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바친다. (고전 15:24-28).
V. 그리스도를 통한 대속
예수님의 세 가지 직분 중에 제사장의 직분이 있는데 그 제사장 직분 중에서 한 가지 중요한 국면이 있다. 그것은 대속의 교리이다.
A. 대속의 필요성
대속의 개념이 어떻게 이뤄진 것인가? 어떤 이들은 <죄를 범한 인간을 향하여 하나님이 진노하여 내려다보시는데 사랑 많으신 그리스도께서 뛰어 들어 우리를 구원 했다> 라고 가르친다. 그럴듯하지만, 비성경적이다. 그렇게 되면 그리스도가 홀로 모든 영광을 받고 성부는 모든 영광을 빼았기게 된다. 그러나 성경은 이사야 53:10, 눅 2:14 엡 1;6-9, 골 1:19-20 등에서 말하기를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대속이 시작되었다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대속은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하여 죄인들에게 멸망으로부터 피할 길을 열어 주었고, 하나님의 공의로 인하여 율법의 요구사항을 만족하도록 했다 (요 3:16, 롬 3:24-26.)
어떤 이들은 <하나님은 그런 희생을 치루지 않고서도 죄인을 용서할 수 있었다> 라고 말하지만 거룩하고 의로운 하나님은 죄를 그냥 묵과할 수 없다 (출 20:5, 23:7, 시 5:5 느 1:2, 롬 1:18, 32). 하나님은 죄를 지으면 죽으리라고 했다 (창 3:3, 롬 6:23). 죄의 값은 사망이고 (롬 6:23) 하나님은 반드시 만족할만한 죄의 댓가를 받아야 한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그 죄의 댓가를 지불하시어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 시켰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라는 말은 헬라어에서 tetelestai 라는 말이다. teleo 의 완료형이다. 영어로 말한다면 <has been paid in full> 의 의미이다. 그리스도의 공로이다.
B. 대속의 성격
1.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함.
죄의 값은 사망이다 (롬 6:23).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했다.
2. 대신 죽으신 희생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대신하여 그들의 죄를 짊어지고 그들의 저주를 모두 혼자 짊어지고 생명을 주셨다. 그러므로 그의 죽으심은 그의 백성을 대신하여 죽이신 대속의 죽으심이다. 사람이 남에게 잘못을 저질르면, 남에게 가해한 사람이 사죄하고 화평의 선물을 보내는 것이 상식이지만 그리스도의 대속의 경우는 가해자인 인간에게 피해를 본 하나님이 나서서 화해를 청하는 특별한 경우이다. 이것이 은혜이다. 구약에서 의식법은 모두 이런 대신 죽으실 그리스도의 죽음을 상징적으로 예표 (豫表) 로 말해 주고 있다. 가령 레위기 1:4, 4:20, 31, 35, 레이기 5:10, 16, 레위기 6;7, 레위기 17:11 등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우리무리의 죄를 하나님은 그리스도에게 담당시키셨다 (이사야 53:6). 그는 죄인의 죄를 위해 대신 돌아 가셨다 (마가 10:45, 갈 1:4, 벧전 3:18 등).
3.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이 포함된다.
그가 율법의 모든 요구를 순종하여 이룩한 능동적 순종이 있고, 고난을 마다하지 않고 순종한 수동적 순종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Active Obedience)과 수동적 순종(Passive Obedience) 을 엄격히 분리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율법을 지킨데도 수동적인 의미가 들어있고, 또한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신 일에도 능동적인 순종이 의미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사야 53:8, 롬 4:25, 갈 3:13, 벧전 2:24, 롬 8:4, 롬 10:4 벧전 2:24, 고후 5:21 갈 4:4-7 등이 이를 입증한다.
C. 대속의 범위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은 온 세상을 위함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사람들만을 위함인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천주교나 루터파 그리고 아르미니안 주의자들은 모두 말하기를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은 온 인류를 위한 것“ 이라고 가르친다.
그들은 말하기를, “그리스도는 십자가위에서 구원의 길을 열어 놓았는데 누구나 믿고 싶으면 믿는 것 이라고 가르친다. 이 말은 모든 사람을 구원한다는 말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구원의 길을 그리스도가 얼어 놓았을 뿐 실제로 그리스도가 구원하고 구원을 완성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게게 달려 있다고 한다.
이에 반해 개혁주의자는 그리스도는 요한복음 17:9 에서 말하는 대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에게 주신 자, 즉 택함 받은 사람들만을 위해서 죽었다고 하며 또한 그들의 구원의 길을 열어 놓은 것 만 아니라 구원을 완성했다고 가르친다. 눅 19:10, 롬 5:10, 고후 5:21, 갈 1:4, 뎁 1:7 등을 보라. 그리스도는 그의 목숨을 그의 백성을 위해 내어 버렸다. (마 1:21) 또한 그의 양을 위해서(요 10:11, 15), 교회를 위해서 (행 20:28), 그의 택함을 받은 자들을 위해서 (롬 8:32-35).
성경에서 가끔 “그리스도가 온 세상을 위해서 돌아가셨다” 는 말이 나오면 (가령 요한복음 1:29, 요일 2:2, 요일 4:14,등에서 보듯), 또한 “모든 사람을 위해 죽었다” 는 말 (이를테면, 딤전 2;6, 딛 2:11 등) 이 나오면 그리스도가 모든 민족의 차별 없이 성별이나 직업의 차별 없이 죽었다는 의미일 뿐 모든 사람을 위해 돌아가셨다는 말이 아님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아는가?
-기독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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