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길레스피(George Gillespie, 1613-1648)의 소개
장대선 목사 (2020.10.16)
* 이 글은 James Reid의 『Memoirs of the Westminster Divines』2권에 소개된 조지 길레스피에 대한 소개를 주로 번역한 것이다.
조지 길레스피는 17세기의 스코틀랜드 에딘버러Edinburgh의 목회자로서, 웨스트민스터 총회 당시에 30대 초반의 상당히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스코틀랜드 교회의 위원commissioner으로서 영향력 있게 활약했던 인물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1613년에 스코틀랜드의 동부에 자리하고 있는 파이프세어Fifeshire의 한 상업 도시이자 왕실 자치구였던 키르칼디Kirkaldy의 복음적 목회자 존 길레스피John Gillespie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로 성장하면서 길레스피는 세인트 앤드류 대학교the University of St Andrew's에서 교육을 받았는데(1629년), 그 때의 나이가 16세였으며, 그 곳에서 그는 훌륭한 고전 교육을 받을 수 있었을 뿐 아니라 그의 연구에서 있어 필요한 기본적인 실력들을 키워나갈 수가 있었다. 이후에 그는 얼마동안 카실 백작earl of cassils의 가정에서 사목[가정목사]으로 있었고, 켄네디 경lord kennedy의 가정교사로도 섬기면서, 켄무어 자작viscount kenmure-그는 당시에 목회자가 되는 유일한 방법이었던 주교의 승인을 거치지 않고, 나중에 키르칼디의 노회the presbytery of kirkcaldy로부터 안수를 받고서, 웸즈Wemyss의 목회자로 임명되었다-의 사목으로 있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1638년의 국가 언약the National Covenant에 웸즈의 목회자로서 서명한 저명한 개혁자들 중 한 사람이었다.

조지 길레스피
베일리Robert Baillie, 1602–1662는 길레스피에 대해 “켄네디 경을 섬기던 젊은이,”라고 하면서, 이르기를 “세인트 엔드류 대학의 반대에 직면했음에도 불구하고, 노회에 의해 웸즈의 교회의 목회자로 받아들여졌다.”고 했다. 베일리는 또한 덧붙이기를, “이 청년은『잉글랜드의 교황주의적 의식들』English Popish Ceremonies, obtruded upon the Church of Scotland, 1637의 저자가 누구인지에 대해 알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참으로 경탄스럽게 알려졌다. 비록 논문을 얻었을 뿐이었지만 그 분야에 대한 최고의 도움을 받을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구성에 있어서는 그의 연배 이상의 것이었다. 그 책이 진실로 그가 쓴 것일진대, 나는 그 문제를 좋아하지 않음에도, 그것에 대해 감탄한다. 그렇다. 그는 이 섬에서 가장 훌륭하고 지혜로운 자 가운데 한 사람일 것”이라고 했다. 사실 베일리는 그 유명한 웨스트민스터의 총회에서의 길레스피의 능력과 학식을 나타내 보인 증인이다.
스티븐슨Stevenson은 말하기를, 길레스피가 위에서 언급한 익명의 작품 『잉글랜드의 교황주의적 의식들』의 저자라고 했다. 그리고 1637년의 선언에 의해 주교들bishops의 연약한 참을성을 너무 자극하는 성질의 것이라고 공표되었다. 그 책 속에는 주교단Episcopacy의 자의적 숭배will-worship가 드러나 있다. 길레스피는 시기적으로 매우 적절한 때에 장로교회의 대의명분을 변호하는 가장 능력 있고 열성적인 지지자들 중 한 사람으로서 두드러졌다. 그의 학문과 재능은 상당히 높았으며, 구속주의 왕국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키는 데에 부지런히 사용되었다. 그는 종교개혁의 일에 대해서 진정으로 지지하는 자였으며, 고위 성직자 제도Prelacy와 에라스투스주의Erastianism, 그리고 모든 부패에 대해 강력히 반대했다. 1638년에 글래스고Glasgow에서 소집된 유서 깊은 총회에서 그는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잠 21:1] 등의 말씀을 해설하면서 매우 학식 있고 분별력 있는 설교를 했는데, 그 때의 나이가 25세였다. 그러나 길레스피의 이 강론은 스코틀랜드 왕가의 비판을 피할 수 없었으니, 아가일 백작Earl of Argyle은 길레스피가 왕가의 특권을 너무 많이 침해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왕가가 좋은 역할을 한 모든 부분에 대한 권위를 인정하도록 총회에 엄중히 권고를 했으며, 총회의 의장moderator은 아가일이 말한 것을 가장 분별 있고 아름다운 말로써 매우 신중하게 지지했다.
한편 1641년에 에든버러Edinburgh에서 열렸던 총회에서 길레스피는 애버딘Aberdeen 시의 목회자로 부름을 받았으며, 이를 잘 수행하도록 웸즈의 최고위원the Lord Commissioner의 동의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1642년에 총회는 그를 에든버러Edinburgh 시로 보내는 데에 동의했다. 또한 그는 1643년에 스코틀랜드 교회로부터 유명한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위원Commissioners으로 파송된 네 명의 저명한 위원들[Robert Baillie, Alexander Henderson, Samuel Rutherford, 그리고 George Gillespie] 가운데 한 사람이었는데, 그 총회로 보내졌을 당시에 그는 서른 살의 젊은 청년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그곳에서 베테랑으로서의 모든 기술과 신중함으로 자신의 논리들을 전개해 나갔다. 그는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 총 167회에 걸쳐서 발언을 했는데, 그것은 다수의 발언을 한 루터포드Samuel Rutherford보다도 19회나 많은 빈도였다. 뿐만 아니라 그의 학식은 매우 예리하였으며, 말을 할 때에도 정중하도록 주의를 기울였다.
그는 에라스투스주의자들과의 논쟁에 있어, 당시에 이미 학문적으로 탁월하며 위대한 맹장들이었던 셀든John Selden, 1584-1654과 라이트풋John Lightfoot, 1602-1675과도 경쟁할 수 있을 정도였으며, 유대 고고학과 랍비들의 학문에 대한 특별한 지식들에 있어서도 정말로 탁월하여, 당시에 유명했던 반대자들에 대항해서 유대 사회에 두 법정courts[교회 법정과 세속 법정]이 있었음을 신 17:12절로부터 입증하는데 성공했다. 이와 관련해서는 한 법정으로부터 다른 한 법정으로 올라가는 것을 존중했으며, “사람이 만일 무법하게 행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서서 섬기는 제사장이나 재판장에게 듣지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죽이라”는 말씀으로 볼 때에, 이는 항소appeals가 가능했었던 것임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즉 제사장이 한 법정을, 재판장이 또 다른 한 법정을 관할하도록-논쟁의 현장에서 그러한 사람들과 확실하게 시시비비를 다투기 위해서는 상당한 정도의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했을 것이기 때문에-했다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참여했던 동료들 중 한 사람인 베일리Baillie는 길레스피의 재능과 학식에 대해 잘 알 수 있을만한 충분한 계기가 있었으며,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12회 혹은 13회의 회기에 걸쳐서 9시부터 2시까지 논의한 토의를 통해, 얼마나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었는지 모른다. 모든 회의에 있어서 길레스피 이상으로, 또한 적절하게 추론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행 14:23절에서 사도들이 임직의 권한을 지녔던 것을 입증하기 위한, 여러 토의 후에도, 논의가 이뤄졌는데, 베일리는 말하기를 “매우 학식이 있고 예리한 길레스피는 우리의 교회에 유일한 빛을 비춰주는 사람일뿐 아니라 총회 전체에서 누구보다 나은 의도로 말했으며, 감독주의 번역자들에 의해 뒤바뀌어 전해진 헬라어 낱말에 성도들에게 교회의 직원들을 뽑는 선거권이 있음을 내포하고 있음을 청중들 앞에서 잘 전달하여 천명했는데, 그로 말미암아 두 번의 전체 회기를 차지하는 어려운 논쟁이 야기되기도 했다. 그리고 헨더슨Alexander Henderson, 1583-1646의 제안으로 그러한 탄원이 끝을 맺었다.”고 했다. 그리고 다시 이르기를 “총회의 토론에서 워리스톤 경Lord Wariston의 훌륭한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도움이 고결한 청년 길레스피보다 나았던 것은 아니다. 나는 진심으로 그의 학문에 감탄하며 하나님의 축복을 바랄뿐 아니라, 나의 모든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전체 총회에서 그의 학문이야말로 단연 으뜸이었다.”고 했다.
또한 1644년 3월 26일에 로버트 블레어Robert Blair에게 보낸 편지에서 같은 작가는 말하기를, 조지 길레스피의 은사들에 좋은 견해를 가지고 있었으며 진실로 공적인 논쟁에 참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에, 그를 정말 존경했다고 말했다. 아울러서 그는 이미 우리의 총회에 다다른 모든 논점들을 정확히 연구했으며, 그는 너무나도 잘 준비가 되어 있었고, 매우 자신이 있었으며, 공적 토의에 충실했을 뿐 아니라, 총회에 참여한 사람들 가운데 아주 훌륭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또한 나의 판단에는 그 용기 있는 청년보다 이성적으로 요점을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고 말하면서, 그러므로 그가 참여하지 않은 경우에 우리는 모든 논의들에 있어 편견에 치우칠 수밖에 없었으며, 그러한 경우는 모든 논의들이 잘 진행되기를 바라는 모두에게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에 관해 이르기를, 한때 의회와 총회가 소집되고, 오랜 시간에 걸친 논의가 에라스투스주의에 유리하게 되며, 그에 대해 아무도 쉽게 답변을 할 수 없을 것처럼 보였을 때, 길레스피는 그의 동료들인 스코틀랜드 위원들의 요청에 따라, 모든 논거들의 본질을 재정립하고 논박하여 당시 참여했던 사람들에게 많은 찬사를 받았다고 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있어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회원들이 총회에서 말한 내용들 가운데 기억에 도움이 될 만한 것을 기록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음에도, 길레스피가 나타나서 나중에 질문들에 대해 답할 때에, 옆에 앉았던 사람들이 그의 책을 들여다보니, 그가 말한 어떤 것도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다만 다른 곳에 “주님, 주님의 빛-주님의 도움-을 비춰주소서, 주님, 당신의 뜻을 변호하소서.”라는 것이 기록되어 있을 뿐이었다고 한다.
나중에 런던에서 자신의 나라로 돌아온 후에, 그는 스코틀랜드 교회의 공식적인 업무들에 주로 전념했다. 또한, 웨스트민스터의 신성한 총회에서 진리의 대의에 대한 그의 학식과 열의에 따라 저명한 명성을 얻었으며, 1648년 7월 12일에 에든버러Edinburgh에서 소집된 스코틀랜드 교회 총회의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이 총회에서는, 종교개혁의 일에 대한 언약에 찬성하고 허가하는 몇몇 좋은 법령들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거기에서 길레스피는 잉글랜드 의회와 그들의 총회와 함께 신앙적 통일의 조약을 체결하기 위한 목사들 중 한 명으로 지명되었지만, 얼마 후에 그는 질병[결핵]에 걸리고 말았다. 루터포드Samuel Rutherford, 1600-1661는 1648년 9월 27일에 세인트 엔드류St Andrews에서 길레스피의 병상에 보낸 편지에서 말하기를 “나는 하나님의 섭리를 거슬러서 말할 자신은 없다. 다만 그의 뒤를 따르기를 바랄뿐이다.……당신에 대한 평가를 섣불리 내리지 않을 것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은 백 명의 노인들과 경건한 목사들보다도 많은 일을 했다. 믿음을 가지는 것이 지금 당신에게 있어서는 마지막 일일 것이다. 갈 2:20절의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는 말씀을 보라. 당신의 아내는 더 나은 남편이신 하나님을 택해야 하며, 아이들 또한 더 나은 아버지에게 맡겨야 할 것(중략)”이라고 했다.
길레스피는 종교개혁의 일들에 항상 굳건히 속해있었으며, 그것을 지지하는 신실한 증언을 남기고 떠났을 뿐 아니라, 당시대의 모든 악에 대항했었다. 그는 1648년 말에 이르러 사망했는데, 어떤 이들은 그 날이 12월 17일이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인생의 전성기를 아주 조금밖에는 통과하지 않았으니, 그의 죽음은 참으로 한탄할만한 일이었다. 또한 대중들은 그의 진정한 가치를 알고 있었었기에, 처음에는 재산 위원회가, 그리고 나중에는 의회에 의해 그의 과부와 자녀들에게 천 파운드의 화폐sterling를 주도록 했다. 그렇지만 이는 당시의 시대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실제로 지불되지는 못했다.
선천적이기도 할 뿐만 아니라 후천적이기도 한 길레스피의 능력들에 관해 말하자면, 우리는 가장 반박할 수 없는 증거들을 가지고 있으며, 그와 동시대의 사람들의 증언에서뿐 아니라 그가 남긴 훌륭한 저작들 가운데서 가장 확실하게 가지고 있다. 성경의 원어에 대해 친밀하며 정통했고, 고대에 대한 그의 지식 또한 박식하고 조애가 깊었으며, 그의 재능은 지상 논쟁written argument과 즉흥적인 토론extemporary debate에 있어서도 일반적으로 인정되었다. 사실 우리는 사실 그에게 진실로 큰 신세를 지고 있는데, 그의 놀라운 인내심과 더불어 연구에 있어서의 탁월한 재능으로서, 교회 정치church government라는 아주 흥미로운 주제에 대해 매우 위대한 빛을 비춰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수고들에 있어서, 그의 주제Hosts이신 주 하나님을 위해 진실로 적극적이고 열정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그의 열심은 지혜와 거룩의 영the spirit이에 의해 훌륭하게 지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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