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찬송

예배 찬송을 규정하는 원리

Sola. 2023. 4. 18. 16:26

 

예배 찬송을 규정하는 원리

(시 69:30, 31 엡 5:19 골 3:16 히 13:15)

칼빈 아카데미

 

 

최근 들어 한국 교회에는 ‘찬양과 경배’ 혹은 ‘열린 예배’라는 명분 하에,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온갖 악기를 동원하여 거의 오락에 가까운 노래를 찬송이라고 부르는 것이 마치 유행병처럼 번지고 있는 듯 합니다. 이러한 때에 개혁파 교회 성도로서 우리는, 역사적 개혁파 교회가 가르쳐 나온 올바른 찬송, 곧 성경이 가르치는 찬송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제대로 배워서,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찬송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려야 하겠습니다. 이제 1부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개괄적으로 살펴보면서 한국 교계 앞에 공개적으로 비판문을 게재한 한 뜻 있는 목사의 글도 살펴보기로 하고, 2부에서는 이에 대한 대안으로 교회가 이해해야 할 예배 찬송의 바른 의미를 적절하게 연구한 미국 개혁 교단(PRC)의 코터링(J. Kortering) 목사의 “Psalm Singing: A Reformed Heritage”를 번역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찬송의 혼란 시대

 

예수님은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갖추어야 자세로서 '신령과 진정’에 대해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찬송 역시 예배라고 볼 때 마찬가지로 ‘신령과 진정’으로서 노래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특별히 찬송은 곡 그 체에서는 무슨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이름을 다루고 있는 대로 그렇게 가사의 정신이 잘 드러나야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과거 로마 교회는 음악 그 자체에 치중함으로 성가대를 만들게 되었고, 그래고리안 성가 같은 어려운 곡을 부르고 연주하면서 종교적인 감동을 돋우는 데 치중함으로 예배를 타락시켰습니다.

 

그리고 중세기 찬송의 또 다른 혼란은, 오늘날도 그렇듯이 당시 사람들이 너도 나도 나서서 자의적으로 찬송을 지어 보급시킨 일입니다. 오늘날 감수성이 예민한 청년들에 의해서 이런 일이 대대적으로 번져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 안타까운 마음 금할 길 없습니다. 사람이 청년의 때에 들어서면, 당 세대에 때묻지 않는 청순성과 진리를 위하여 생명까지 내던지는 용기가 가장 충만하게 됩니다. 이러한 청년들이 비록 주님을 찬양한다고 하는 아름다운 명분을 내세우고는 있으나, 역사 신학에 대한 이해가 거의 없고, 성경 진리를 체계적으로 공부하는 과정을 거치지 못한 상태에서 열심을 내다 보니, 본의 아니게(?)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을 섬기는 삶이란 것이, 그렇게 무아지경의 상태, 혹은 개인적인 감정에 푹 빠져서 노래 몇 곡 불러대는 것으로서 다 표현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청년다운 그 아름다운 기상이 어디 가버렸는지, 더 중요하고 더 요긴하며 더 필요한 것들을 다 제쳐놓은 체, 정작 없어도 되고, 오히려 혼란만 가중시키는 일에만 매달리는 것을 볼 때 정말 안타깝습니다.

 

원래 찬송을 바르게 하면, 그 찬송의 정신이 우리 안에서 살아나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엄위하심의 정서를 누리게 됩니다. 이렇게 되려면 찬송다운 찬송, 곧 곡의 가사가 우리의 의식을 경건한 신지식, 곧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이끌어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찬송을 잘 부르려면, 무엇보다도 찬송의 가사의 뜻을 잘 알아야 하고, 노래하는 동안 내내 하나님을 높이는 정서를 실제로 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경박스럽게 종교 감정주의에 빠진다거나 곡의 장중함에 사로잡혀서 음악 자체의 감흥에 빠지게 되면, 그것은 바른 찬송이 되지 않습니다.i)

 

 

그러면 찬송이란 무엇입니까? 예배 때 반드시 등장하는 요소가 찬송입니다. 물론 찬송은 성도들이 모여서 예배할 때만 드리는 것은 아니고, 일상 생활 속에서도 찬송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예배할 때에 찬송은 과연 어떤 역할을 합니까? 사실 예배 속에서 찬송이 차지하는 위치가 대단합니다. 예배를 할 때에 찬송으로 시작하고, 그리고 찬송으로 진행을 하다가, 찬송으로 마칠 정도로 찬송의 위치는 두드러집니다. 그런데 이렇게 찬송을 드릴 때에, 예배가 진행되는 순서를 따라서, 사이사이마다 찬송을 적절하게 배열합니다. 이는 그만큼 우리의 공적 예배에서 찬송의 위치와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짐작케 합니다. 이 찬송은 기본적으로 세상의 음악적인 요소를 담고 있긴 하지만, 그러나 일반 노래와는 전혀 다른 특성을 가졌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음악을 제대로 하려면, 그 음악에 대해서 잘 연구해야만 합니다. 연구가 없이는, 그것이 담고 있는 예술적인 표현을 바르게 해낼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음악을 하는 분들은, 거기에 일생을 드려서 연구하고 전공함으로 어떤 하나의 음악적인 예술 작품을 완성시키고 그것을 아름답게 표현하곤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찬송을 하나님께 드림에 있어서는 반드시 이렇게 연구를 하고 전문적인 지식을 가져야 만이, 합당한 찬송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전문적인 연구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노래를 못 부르는 것은 아닙니다. 전혀 음악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없어도 마음 자세가 합당하면 노래는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문적이거나 좀더 깊은 지식이 없는 까닭에 그 노래가 담고 있는 참 가치를 제대로 드러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전문적인 지식이 없다고 해서 찬송을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 앞에서 예배하는 자로서 이제 보다 더 합당한 찬송을 드리려면, 각 찬송들이 나타내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잘 배우고 깨달아서, 하나님께서 받으심직하게 합당히 드리는 일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요 필요한 일입니다. 참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찬송이, 찬송으로서 합당하게 드려질 수 있으려면, 먼저 찬송이 무엇인가에 대한 의미를 잘 배워야 할 것이고, 그런 다음 그 배운 바의 원리에 따라서 찬송을 합당하게 드려야 하며, 기타 찬송하는 방법들까지도 주의 깊게 관심을 가지고 배워서 그러한 터 위에서 찬송해야 할 것입니다.ii)

 

사실 올바른 찬송의 문제는 교회가 무엇인가를 바르게 아는 일이 전제되지 아니하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차원의 것입니다. 본래 하나님께서 세상에 교회를 세우신 의도 중의 하나가 하나님의 나라(천국)를 증시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까닭에 교회는 천국의 대사관이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볼 때에 필히 천국을 볼 수 있도록 교회는 천국의 모습을 잘 갖출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16장에서 당시 베드로 신앙고백을 보시고 말씀하시기를, 그러한 신앙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셨고, 세상의 어떤 권세가 넘보지 못할 것이며, 심지어 땅에서 교회가 행사하는 권세는 그대로 천국에서 일어난 일인 것처럼 재가해 주시겠다고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한편 ‘천국의 대사관’이랄 수도 있습니다. 교회는 천국을 대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교회가 이러한 실질을 갖추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만일 항간에 유행하는 소위 큰 교회들(?)이 사용하는 이런 저런 프로그램들을 도입하여 뒤따라가는 방식이라면 이는 절대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교회가 교회답게 서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말씀을 잘 해석하고 가르치는 일입니다. 진리의 말씀을 제대로 해석하고 잘 배우게 되면 여기에는 성령께서 함께 하시는 은혜가 나타나게 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바르게 깨달은 말씀을 쓰셔서 어떤 결과를 내실 것인데, 이때 어떤 사람의 경우 자신의 전 인생을 걸고 교회를 잘 이루어 나가겠다고 하는 데까지 깨닫는 아주 바람직한 결과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말씀을 잘 깨닫고 그 깨달은 결과로 이루어 가는 교회가 진정한 교회요,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나아가는 교회입니다. 물론 이런 모습은, 우선 보기에 더디고 힘들어 보이긴 할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은 맞지만 그렇게 하면 교회 운영이 안 된다’는 식으로 반론하기도 합니다. ‘헌금 생활도 적절히 가르치고, 직분도 마구 주어서 붙들어 매야, 교회를 유지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단은 바로 그런 식의 사고방식을 써서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원수가 집 안, 곧 교회 안에도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한시라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중간한 지식으로서 교회를 주장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오늘날 현대 교회 안에서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찬송이 딴 따라 무당 놀이와도 같이 타락해 버린 것도 다 이런 풍조 때문인 것입니다.

 

 

 

카타르시스 효과

 

그런데 찬송의 의미를 제대로 깨달으려면 우선 일반적으로 음악이 우리 생활에 끼치는 영향이 대단히 크고, 음악은 기본적으로 묘한 영향력을 사람들에게서 일으킨다는 것을 충분히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사람이 사는 곳에는 반드시 음악이 있습니다. 만일 일상 생활 속에서 전혀 음악이 없는 삶을 산다면 어떻겠는가 한번 생각해 본다면, 그러한 삶이란 얼마나 건조하며, 얼마나 매 마른 삶이 될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인간 사회에는 어디를 가든지 노래라는 것이, 음악이라는 것이 필수적으로 따라붙고 있습니다. 이때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음악과 노래가 일으키는 묘한 영향을 이용(?)하게 됩니다.

 

가령 국가가 형성되면 그 나라 국민이 부르는 노래가 있습니다. 보통 애국가라고 합니다. 즉 국가가 국민들의 애국심을 고조시키려 할 때에 쓰는 효과적인 방법으로 애국가를 부르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애국심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이런 저런 말로써 웅변하고, 설명을 듣게 하는 것보다는, 보다 효과적인 것이 애국가 같은 노래를 만들어서 부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애국가를 부를 때에, 그 사람의 마음에 애국하려는 감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또 군대에서 군가를 부르면 군인들의 사기가 오릅니다. 사기가 올라서 나라를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버리겠다고 하는 충성심이 마음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요즈음 회사에서는 사가(社歌)라고 해서, 회사를 드높이는 노래를 사원들로 하여금 부르게 하는 모습을 봅니다. 사가를 만들어서 회사를 사랑하게 하는 애사심을 갖게 하고, 사원들의 마음을 모으는 데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학교에서는 교가가 있습니다. 이렇게 어느 단체나, 어느 사회나, 이러한 노래가 없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근래에 와서는 불교와 같은 종교 단체에서도 노래를 부르고, 기타 일반 종교들도 노래를 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잘 아는 사실입니다. 원불교와 같은 경우는 이미 오래 전부터 자기들 방식대로의 성가대가 조직이 되어서 음악을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 모든 사실들은 음악이 우리 일상 생활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 생활의 요소라는 것을 보여주는데, 왜 그런가 하면 음악은 그것만이 가지고 있는 특수한 성격이 있기 때문입니다. 음악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영향력, 혹은 마력이라는 것이 대단하다는 말입니다. 노래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묘하게 만드는 마력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철학자는 그의 유명한 ‘시학’에서 ‘카타르시스’라는 이론을 폈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음악을 활용하면, 과잉된 것을 배출하게 할 수 있고, 신진대사를 원활하게 해줌으로써 몸과 마음의 건강을 유지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새 사람들을 보면, 스트레스가 쌓일 때에 이를 푸는 방법들이 여러 가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음악을 통해서 푸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소위 요새는 음악 요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음악을 들으면서 병을 고치는 요법이 생긴 것입니다. 요즈음 태교 음악도 유행하고 있습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무엇을 말해 주는가 하면, 인간의 일상 생활에 있어서 음악이 끼치는 영향이 대단하다는 데 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점에 있어서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에도 적용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함에 있어서도 찬송을 하기 때문에, 음악이 끼치는 영향력이란 것이 여기서도 나타나기 마련인 것입니다. 찬송을 하게 되면, 음악이 자체적으로 갖고 있는 묘한 힘에 의하여 노래하는 사람들의 마음에서 어떤 효과가 일어납니다. 그런데 요즈음 이 효과를 인위적으로 개발하고 증대시키는 기법들이 기독교 안에서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소위 ‘열린 예배’니, ‘찬양과 경배’니 하는 등등의 현상들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단계에서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배에서 찬송은, 그것을 통해서 어떤 효과를 이끌어내는 것을 1차적인 목적으로 삼아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예배시에 찬송을 하면, 그것이 가진 음악적인 특성 때문에 부득불 어떤 효과가 나타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찬송이 갖고 있는 음악적인 특성 때문에 자동적으로 나타나는 것일 뿐이지, 그러한 효과를 내려는 것 자체를 목적으로 삼고 찬송을 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오히려 찬송은 부득불 그렇게 2차적인 효과를 낸다는 사실 때문에, 그것이 예배와 배치되는 부정적인 효과를 내지 않도록 더더욱 조심하면서 찬송의 본래 목적을 잘 살려내는 데 집중해야 합니다. 사실 예배할 때에 찬송을 드리게 되면 어떤 2차적인 효과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켜 하나님을 향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보통 예배를 시작할 때에 전주가 시작됩니다. 전주를 하게 되면 사람의 마음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그런 감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하지만 전주는 예배를 돕는 보조 역할을 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예배 자체라는 사실에 주의해야 합니다. 그래서 전주를 통해서 우리의 마음이 모아져서 하나님 앞으로 인도되는 효과가 나타나기는 하지만, 그러나 이 효과는 2차적인 것이고, 1차적으로는 전주도 예배인 것입니다.

 

예배가 진행되면서 오늘날 한국 교회의 경우 찬양대가 특별히 찬양을 합니다. 그런데 이 찬양대가 중세기 로마 교회에 의해서 생긴 것 자체부터가 교회의 타락인 것이요, 실제로 중세기 교회의 성가대는 타락할 대로 타락해져 버렸습니다. 음악의 질이 낮아져서 타락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음악의 질은 대단히 높습니다. 그러나 그야말로 인간의 노래 자랑이요, 솜씨 자랑이었지, 하나님을 예배하는 실질이 없었습니다. 인간이 보기에 아름답게 목소리만 뽑아냈지, 하나님을 예배하는 실질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겉으로 볼 때에는 얼마나 화려했는지 모릅니다. 온갖 울긋불긋한 가운들을 입고 겉 모습을 화려하게 꾸몄습니다. 목소리를 가꾸는 일에 온갖 기교를 부렸습니다. 그래서 종교 개혁기에 개혁자들은 이렇게 타락의 온상인 성가대를 아예 없애 버렸습니다.

 

사실 찬양을 찬양답게 할 진실한 실력이 없는 한, 차라리 없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예배의 기본 정신에 비추어 볼 때, 찬양대가 따로 찬양을 하기보다는, 전체 회중이 함께 찬양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렇지만 현대 교회들의 모습을 보면, 중세기 로마 교회의 타락한 성가대의 모습을 그대로 다시 재현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런 것이 다 교회가 무엇인가 하는 데 대한 이해가 부족한 데서 초래되는 현상입니다. iii)

 

 

 

찬송에 대한 정의

 

그러면 찬송에 대해서 좀더 깊게 들어가 보겠습니다. 찬송이란 무엇이냐고 할 때, 낱말을 그대로 풀이를 한다면 기릴 찬(讚), 기릴 송(頌)으로, 음악적인 요소를 담아서 시적인 표현으로서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기리는 것이 바로 찬송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원리는, 찬송은 인간이 스스로 거기에 도취된다거나 혹은 사람들 듣기에 좋으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정서가 발휘되어야 한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성경이 명확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시편 69편 30‐31절에 있는 말씀을 보면,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광대하시다 하리니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찬송이 누구를 기쁘시게 하는 일이라고 했는가 하면,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찬송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이와 같은 자세로 찬송을 해야 하며, 그럴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현대 교회 안에서 보면, 전혀 이런 의식을 갖지 않는 상태로 찬송을 부르는 경우가 일반화되어 있는 것을 봅니다. 즉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해서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순서 해치우듯이 한다거나 자신들의 음악성에 치중하여 부르는 경우들이 많이 있다는 말입니다. 찬송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조차도 제대로 파악을 못한 채로, 단순히 종교적인 음악의 관점에서 찬송 아닌 찬송을 하는 경우들을 많이 봅니다.

 

이것이 너무도 일반화되어 있는 까닭에 아예 틀렸을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이렇게 잘못된 모습이 얼마나 큰 세력이 되어 교회 안에서 유행하고 있습니까? 그래서 요즘 소위 ‘복음 성가’는 물론이요, CCM 같은 것들이 교회 안으로 물밀듯이 밀려들어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찬송은 결코 우리의 감정 순화나 우리의 기분을 좋게 하기 위해서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는 우리가 은혜 받기 위한 수단으로 찬송을 부르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보통 ‘준비 찬송합시다’라고 하는 말을 하는 것을 보는데, 이것도 사실은 잘못된 것입니다. 찬송은 절대적으로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기 위해서 부르는 것입니다. 찬송을 바르게 하면 하나님께 얼마나 큰 기쁨이 되는가 할 때, 지금 시편 기자는 말하기를, ‘뿔이 나고 굽이 갈라진 큰 소를 잡아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보다도 더 큰 기쁨을 드릴 수 있다’고 했습니다.

 

구약 시대 때 제사는 양이나 소를 잡아서 드리는데 형편이 안 되는 가난한 사람들은 비둘기를 바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할 수만 있으면 가급적이면 가치 있는 제물을 드리게 됩니다. 따라서 지금 여기서 양이나 비둘기로 표현하지 않고, 소로 표현한 것은, 그마만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찬송의 가치를 더욱 돋보이게 하려고 그런 것입니다. 제대로 가치를 발휘하는 찬송은 제사와 방불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드높인 결과를 내지 못한 경우, 그것은 결코 찬송이 되지 못합니다.

 

성도는 찬송을 찬송답게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실질, 바로 이 실질이 없게 되면, 그것은 찬송을 드린 것이 아닙니다. 그냥 기독교 풍의 냄새가 나는 종교적인 노래를 한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은 ‘참된 찬송’과 ‘기독교 풍의 노래’간의 차이를 잘 모르고 있습니다. 본디 성도들은 세상 사람들처럼 유행가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성도도 노래를 부르긴 해도, 세상 사람들처럼 저속한 유행가를 부르지는 않습니다. 가령 집, 일터, 학교 등등 어디서든지, 혼자 부르거나 혹은 몇 사람이 어울려서 찬송 형식을 띈 노래를 부르게 됩니다. 이때 자기 자신의 마음에 기쁨이 생기거나, 또는 실제로 마음에 어떤 감동을 받아 노래를 부르게도 됩니다. 또 그렇게 노래를 부를 때에 나름대로 은혜를 유지하는 효과를 얻게 될 수도 있습니다.

 

 

 

찬송이 아닌 가짜 찬송들

 

참으로 오늘날 교회에 번지는 찬송의 변질과 온갖 악기가 동원되는 현상에 대해서 깊은 우려를 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어떤 교회들은 아예 예배시간에 복음송을 부르기까지 하고, 걸핏하면 경배와 찬양이라는 명분으로 예배 아닌 종교 오락에 빠져듭니다. 두말할 필요 없이 복음송은 찬송가와는 다른 개념입니다. 사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가지고 있는 찬송가 중에는 진정한 의미에서 ‘찬송’이라 할 수 없는 곡들이 많이 있습니다. 물론 우리 찬송가에 있는 곡들 가운데는 훌륭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령을 통해 검증이 된 것이냐 하는 관점에서 보면 문제가 많습니다. 그래서 가사의 내용이 좋다 할지라도 여전히 ‘찬송’이라 할 수 없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일하러 가세’, ‘나 어느날 꿈 속을 헤맬 때’ 등등 기타 많은 곡들이 있습니다.

 

찬송의 문제를 짚어보려 할 때에 역시 종교개혁의 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는 한국 교회는 중세기 종교개혁의 위대한 뿌리로부터 계승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한국 교회는 당연히 종교개혁의 정신을 구현해야 합니다. 이 점은 찬송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찬송에 있어서 참으로 많이 고민했고, 성경을 연구했으며, 결국 최종적으로 결론 내리기를, 예배에서 찬송할 때에는 반드시 시편을 찬송하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여기 ‘반드시’라는 말을 쓴 것을 유념해야 합니다. 성경의 시편들은 성령으로서 완벽하게 검증된 시입니다. 그러므로 칼빈 같은 사람은 하나님을 노래하며 찬송할 때에 성경의 시편을 사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교회가 연약한 시대나 잘못된 기독교가 활개를 치는 시대에는 항상 음악(music)이 가사(song)를 갉아먹는 경향이 나타났습니다. 사실 가사가 붙는 음악의 경우, 곡조는 그 가사를 위한 보조입니다. 즉 가사의 의미를 잘 드러내기 위해 가락이 붙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찬송의 경우 음악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가사가 잘 드러나게 하는 수단이나 기능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요즈음처럼 음악이 가사의 의미를 혼탁하게 만들거나 도리어 그 의미를 감추게 만드는 현상은 심히 잘못되었습니다.

 

어느 시대에나 신앙이 어린 사람들은 노래말에는 별 관심이 없고, 음악에만 관심을 가지는 모습을 드러내게 됩니다. 즉 그들은 가사를 통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현란한 음악을 통하여 스스로를 즐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기독교적인 색깔을 잔뜩 칠해놓은 종교 음악을 즐기는 것이, 어떻게 노래말로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과 다른가를 분별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기독교를 빙자하여 찬송한다 하지만 사실은 음악을 즐기는 것이며, 스스로 신이 나서 좋아하며 감격하면서 종교 삼매경에 빠져서 은혜를 받았다느니, 찬송을 했다느니 하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날처럼 기독교 음악 자체를 개발하려 하는 것이나 기독교적 음악을 특별히 발전시킴으로써 기독교 문화를 전개해 나가려고 하는 운동들이 빠져버린 역기능의 문제는 여간 심각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악기 사용 문제도 심각하다 아니할 수 없습니다. 어떤 교회들은 온갖 전자 악기들을 동원합니다. 기타와 드럼, 각양 전자 기기 등등. 완전히 밴드부 분위기입니다. 이는 순전하게 노래하는 경우까지도 화음을 사용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강조했던 종교 개혁의 원리에 비추어 본다면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가령 칼빈은 교회에서 소프라노, 알토, 테너, 베이스 등으로 4부합창을 하는 것을 가리켜 ‘사탄의 휘파람 소리’라고까지 비난했습니다. (편집자 sola 주: '사탄의 휘파람 소리' 이 부분은 미국 교단과 관련 자료들을 확인해본 결과 출처를 찾을 수 없는 내용입니다. 한국에서 어떤 분이 최초에 썼던 위 내용이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혹시라도 사탄의 휘파람 소리와 관련된 1차 출처 글을 찾게 되는 분은 메일이나 댓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다만, 칼빈이 화성으로 나눠서 부르는 것을 반대한 것은 맞습니다. 화성으로 부르는 것을 지양해야 할 것입니다.)

 

더욱이 쯔빙글리 같은 종교 개혁자는 아예 교회당 내에서 피아노를 파괴해버렸습니다. 과연 저 위대한 개혁자들이 왜 그렇게까지 하였겠습니까?

 

찬송을 결정짓는 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순수하게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음악에 도취되어 그것을 즐긴다거나 혹은 특정인을 청중 앞에 세워서 노래하게 하여 음악성을 발휘하게 한다거나 하는 등등의 행위들은 결코 찬송이라 할 수 없습니다. 또한 찬송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말씀의 우위성을 잠식해 나가는 현상도 크게 우려해야 합니다. 물론 열린 예배를 주장하는 목사들이 말씀을 아예 배제하지는 않습니다. 적어도 겉으로는 말씀이 은혜의 수단이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결국 전체적인 내용을 놓고 보면, 음악이 말씀보다 앞서고 있는 현실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만일 교회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보다 음악이 더 앞서고 있다면 이는 이미 사단의 미혹에 빠져버린 결과임을 인정하고 속히 시정해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매력적인 것으로 나타나는 어떠한 것들도 우상에 해당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중세기 종교 개혁자들은 교회 내에서 음악의 우상화에 대해 정말 예민하게 경계했습니다. 진정 한국 교회가 개혁 교회라면, 오늘날 음악이 서서히 우상화 되고 있는 현상을 직시해야 합니다. 중세기 종교개혁은 예배의 개혁이었음을 다시 한 번 깨달아야 할 때입니다.

 

한 의식 있는 목사의 공개 도전 이쯤에서 잠깐 이 찬송 문제를 교계 앞에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나선 한 뜻 있는 목사의 글을 보겠습니다. 다음은 고려신학대학원 교수 이광호 목사(Ph. D)가 ‘한국의 보수주의/개혁주의 신학교과 신학자들에게 보는 글’이 라는 제목으로, 최근 일고 있는 한국 교회의 ‘열린 예배’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공개적으로 제기한 글 전문입니다.

 

 

 

‘열린 예배 - 온누리교회’는 건전한 교회인가?' (이광호 목사)

 

'필자가 이 글을 쓰는 동기부터 우선 밝히고자 합니다. 이미 다수의 교인들이 필자가 하는 이야기를 별스럽게 생각할 것입니다. 한국에 ‘열린 예배’라는 것이 들어왔으나 지금껏 보수주의 신학교와 신학자들이 침묵해 옴으로써, 연약한 성도들이 신앙적 판단을 할 명확한 기회를 제공하지 못했습니다. 필자가 이 글을 쓰는 것은 열린 예배를 추진하고 있는 교회들을 비난하고자 함이 일차적 목적이 아닙니다. 도리어 이 글을 통해 다수의 순박한 성도들이 올바른 예배에 대해 다시금 주님의 가르침을 잘 생각해 보는 기회를 가지고 잘못된 세속적 유혹에 넘어가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작금의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시대에 편승해가는 안타까움에 처해 있습니다. 인간은 원래 죄인이며 인간의 모든 경험은 성경에 의해 검증되어야 합니다. 교회 역시 그 모든 활동은 성경의 검증을 받아가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세속화를 피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최근 들어 미국에서 소위 ‘열린 예배’라는 말과 함께 예배 중에 쇼를 하는듯한 이상한 내용과 형태들이 교회에 침투해 들어오더니 지금은 우리 한국교회에 급속도로 보편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해와 참된 신학이 약한 한국교회의 많은 목회자들은 성경을 통한 비판력을 상실한 상태로 무분별하게 그것을 교회에 도입하고 있습니다. 열린 예배를 도입하게 되면 교인 수가 많아지고 교인들이 재미있어 한다는 지극히 세속적인 생각에 미혹되어 불명확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이들도 많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신학자들 마저 신학적 명확한 답변을 제시하기 보다,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토론하는 형식으로 변해 가고 있는 것이 우리의 실정입니다. 결국 토론의 경중을 따져 수용여부를 결정지으려는 아주 모호한 자세인 것입니다. 그러나 성숙한 개혁주의 신학자들이라면 토론이 아니라 말씀을 통한 답을 제시해야만 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그것은 우리의 토론 대상이 되지못합니다. 오히려 명확한 신학적 입장을 밝힘으로써 세속적 불건전한 형태들이 건전한 교회에 침투해 들어오지 못하도록 대비해야 합니다.

 

한국교회들 가운데 열린 예배를 가장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있는 교회 중 하나는 서울의 ‘온누리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그 교회는 그런 비정상적인 예배(?) 형태를 전개하는 것에 대해, 마치 시대를 앞서가는 교회인 양 스스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듯합니다. 나아가 다수의 어린 성도들도 이제는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온누리 교회에서는 열린 예배를 통해 별별 기상천외한 발상들을 다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발상을 계속하는 온누리 교회는 과연 건전한 교회인지 검증해 보아야 합니다. 만일 그 교회가 건전한 교회라면 성경의 가르침을 다시 한 번 확인하여 지금의 잘못된 행위들을 그만 두어야 할 것입니다. 건전한 교회는 항상 인본주의화 된 세속주의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추구함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향한 예배일 따름입니다. 거기에는 열린 예배라든지 닫힌 예배라든지 하는 말이 없습니다. 그냥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예배일 따름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말씀이 중심이어야 하며 예배에 참여한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만 합니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신앙의 기준은 ‘쉐마 이스라엘’, 즉 ‘이스라엘아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라는 메시지였습니다. 오늘 우리시대의 하나님에 대한 예배의 본질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함에 있습니다. 인간의 기호나 취미, 판단에 좌우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참된 예배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여 경배하는 것입니다.

 

신문에 의하면, 온누리 교회에서는 예배시간에 패션쇼에서 발레 댄스까지 곁들이고 있습니다. 지난 1월 30일 오후 예배에서는 디자인을 전공한 신도들이 직접 옷을 만들고 청년신도들이 모델로 나서 강단을 누볐습니다(동아일보, 2000년 2월 2일자 A13, 참조). 뿐만 아니라 또한 예배시간에 클래식 연주, 밴드오케스트라 연주, 워십 댄스, 국악 공연을 선보이기도 했습니다. 그 교회는 그러한 것을 통해 복음과 연결 지어 그러한 쇼를 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성경이 요구하고 있는 바가 전혀 아닙니다.

 

오는 5월 27일에는 온누리 교회 대학부 주최로 ‘제1회 전국 대학생 워십 댄스 페스티벌’을 개최한다고 합니다(기독교 신문, 2000년 4월 30일자 p.13, 광고란, 참조). 타이틀에는 <Worship Dance -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라고 되어 있습니다. 거기에 참가하기 위해서는 참가비 5만원을 내어야 하며 입상자들에게는 대학생들에게는 거액인 액수가 상금으로 걸려 있습니다. (Miracle 2000상: 150만원, Miracle Worship상: 100만원, Miracle Warrior상: 50만원).

 

하나님을 경배하는 예배에 참가비를 낸다거나 입상자에게 상금을 주는 그런 예배는 어떠한 경우에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 예는 교회 역사상 있지 않았으며, 과거에는 상상도 못했던 일들이 우리 가운데 예배라는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과연 성경의 가르침을 검토한 발상이라 할 수 있을까요? 그런 것을 예배라 한다면 도리어 하나님을 욕되게 할 따름입니다.

 

만일 온누리 교회가 ‘열린예배’라는 이름으로 이러한 일을 계속한다면 우리는 그 교회를 더 이상 건전한 교회로 인정할 수 없으며, 성경의 가르침을 벗어난 불건전한 이단이라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한국의 건전한 신학자들은 필자의 견해에 응답해 주기를 바랍니다. 필자의 견해가 지나치다면 ‘지나치다’고 해야 할 것이며, 온누리 교회가 건전하지 못하다면 ‘건전하지 못하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보수주의를 지향하며 개혁주의 신학자임을 주장하는 신학교와 신학자들은 이에 대한 신학적 입장을 명확히 해 주기를 기대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현재 신학교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이 혼란에 빠지지 않을 것이며 다수의 목회자들이 그러한 잘못에 현혹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참된 예배의 보존 및 회복을 기대하며 이 글을 마칩니다.'

(2000. 5. 8. 이광호 목사)

 

 

세대가 타락하면서 어제의 죄가 오늘에 와서는 상식이 되곤 합니다. 처음에 복음 성가가 시작될 때만해도, 복음 성가를 예배 때 부른다는 것은 너무도 경망스러운 일로 대부분의 성도들에게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최근에 와서는 예배 때 복음 성가를 부르는 것은 상식이 되어버렸고, 심지어 더 이상한 노래들까지도 예배의 찬양곡으로 버젓이 들어와 있습니다. 시대의 특성이 이렇다는 것을 너무도 뚜렷하게 기억하는 우리는 이제 개혁파 교회 성도들로서, 이 어지러운 예배 풍토를 개선하는 일에 각별한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개혁자들이 교회를 개혁할 때 이 부분, 곧 인본주의로 타락해 버린 찬송을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시키는 일에 얼마나 신경을 많이 썼는지 모릅니다. iv)

 

 

 

찬송의 목적에 대한 각성

 

두말할 것도 없이 당연한 말이지만, 찬송은 오직 하나님만을 기리는 것이어야 됩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하러 나와서 부르는 찬송은, 오직 하나님께만 드리는, 하나님만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노래라는 것을 분명하게 명심해야 합니다. 그런데 예배시에 이렇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해서 부르는 찬송이라면, 무엇보다도 가사부터가 하나님께 예배하는 내용다워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 때에 부르는 찬송의 가사는, 직접 하나님을 높이는 내용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고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들을 감사한다거나, 자신에게 있는 어떤 소원을 받아 주십시오 하고 기도를 하는 그런 식의 찬송 가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로지 하나님은 높은 어른이시니까, 하나님의 높으심, 하나님의 거룩하심, 하나님의 의로우심,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긍휼, 하나님의 자비 등등 이런 하나님의 속성을 찬양하는 찬송의 시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어디든지 계시는 분이시고, 무엇이든지 다 아시는 분이고, 하나님은 모르는 것이 없는 분이시며, 못하시는 일이 없으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고려하여,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 영원하심, 광대하심 등등의 속성들을 높이 기려서 찬양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찬송이 담고 있는 기본 성격이 이렇습니다.

 

교회가 제대로 개혁되어 있는 모습일 때에는,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찬송을 바르게 하는 곡들이 많이 나오지만, 반대로 교회가 타락해 가면 인간 중심, 인간본위의 곡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물론 찬송은 가사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곡조도 중요합니다. 찬송의 가사가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을 기리는 시인만큼, 거기에 따르는 곡도 거기에 부합한 곡으로 합당하게 지어져야 합니다. 이는 지극히 상식적인 이야기입니다. 음악 중에는 소위 클래식이라는 것이 있고, 팝송이라는 음악이 있습니다. 또는 고전 음악 혹은 현대 음악 등으로 구별을 하는데, 하나님을 찬양하는 곡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사람의 감정을 경망스럽게 하는 재즈 음악이나 팝송 같은 곡조들은 합당치 않게 됩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높은 보좌에 좌정해 계시는 크신 어른이시고, 따라서 그러한 거룩하심을 실제로 찬양하려 한다면, 당연히 박자와 리듬 같은 것도 크게 신경을 써야 합니다. 이렇게 생각하게 되면, 오늘날 교회 안에서 불려지고 있는 노래들이 얼마나 합당치 못한 경우들이 많은가를 분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것에 대해 감사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감사하는 노래를 부르는 것은 좋습니다. 또 하나님 앞에 어떤 안타까운 사정이 있어서, 그런 사정을 하나님 앞에 노래로 담아서 호소하는 일도 필요합니다. 이런 경우를 곡 달린 기도라고 하는 표현을 씁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감사할 때, 얼마든지 그 감사한 마음을 노래로 담아서 표현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런 곡들은 예배 때에, 찬송을 하는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결코 적합하지 않습니다. 거듭 반복하지만 찬송은 하나님의 높으심, 그 하나님의 은혜로우심, 하나님의 사랑하심, 이런 것들을 직접 기리는 내용들이 담겨져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찬송에 대한 충분한 지식과 거기에다 음악적인 요소를 잘 담아서 노래를 한다면 좋겠지만, 일반적으로 그렇지 못한 현실입니다.

 

그래서 어떤 교회에서는 찬송이 합당한 것이 되게 하기 위해서, 전체 교인들이 모여서 30분 혹은 좀 더 긴 경우 한 시간여 동안 먼저 찬송 공부와 연습을 충분히 한 다음, 그 다음에 예배에 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드리는 찬송이니만큼, 미리 곡도 충분히 익혀야 할 것이고, 곡의 가사 내용도 충분히 익혀서, 그렇게 해서 마음의 정서를 잘 추스른 상태에서 하나님 앞에 찬송을 드리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 아닌가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가대의 문제점

 

여기서 앞에서 잠깐 언급한 성가대의 문제를 다시 한 번 짚어봅시다. 사실 다수 청중들은 일반적으로 음악적인 지식과 실력을 다 갖추지 못하여서, 특별히 이런 음악적인 지식을 가진 분들을 뽑아 가지고 조직을 한 것이 성가대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특별히 찬양대를 조직하여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려 하는 순간부터 교회는 타락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로마 교회가 이런 정신으로 성가대를 시작했지만, 좀 더 깊은 부분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에는 타락하고 만 것입니다. 한 가지를 세운답시고 요란을 떨지만, 그것 때문에 실상은 더 중요한 것이 무너지는 경우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보면, 교회의 소위 성가대들이 하나님 앞에 찬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청중들이 들으라고 합창을 하는 경우들이 적지 않습니다. 가령 서울에 한국 교회를 대표한다는 어떤 교회에서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인데도 많은 돈을 주고 사서 찬양대 지휘자로 세웠습니다. 그 지휘자가 세상적으로 뛰어난 음악박사요, 동시에 사회적으로도 유명한 분이어서, 그런 분을 초빙하여 성가대를 지휘를 하게 하고, 노래를 부르게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고, 거듭나지도 않은 사람을 찬양대 지휘자로 세워서 음악성이 뛰어난 찬송을 했다고 하면, 그것이 어떻게 하나님을 찬양한 것이 되겠습니까? 그냥 단순하게 음악적으로 훌륭한 노래는 되었을 것입니다. 음악 박사가 지휘할 정도로 실력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이룬 성가대니까, 훌륭한 합창대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음악적으로는 훌륭한 음악인지 몰라도 하나님을 높이는 찬양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극단적인 경우는 아니라 할지라도 오늘날 하나님께 찬양 드린다고 하지만, 실상은 찬양이 아니라, 순전히 자기 감정에 사로잡히는 것으로 끝난다거나 혹은 사람들이 듣게 하기 위해서 찬양 아닌 찬양을 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찬양을 들은 후 “참 은혜스러웠다, 은혜를 받았다” 하는 등의 소리를 하는가 하면, 심지어는 찬양대나 혹은 솔로로 독창을 한 사람을 향하여 박수까지 쳐주곤 하는데, 이런 모습들은 사실을 알고 보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모릅니다.

 

종교 개혁기에 청교도들에게 있어서 찬송을 이런 차원에서 생각한다는 것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런 까닭에 요즈음 잘 알려진 헨델의 메시아 같은 곡도 사실 당시 청교도들은 지극히 망령된 행위로 보았습니다. 청교도들이 볼 때에 하나님을 찬송하는 일을, 일반 극장에서 돈을 받고, 일반 사람들을 대상으로 연주한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특별히 Amazing Grace(4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로 유명한 죤 뉴톤(J. Newton) 같은 청교도들이 얼마나 크게 반대를 했던지, 헨델이 처음에 이 곡을 발표할 당시에는 지금처럼 메시아라는 이름을 못 썼습니다. 그냥 ‘거룩한 오라토리오’라고 했습니다. (물론 당시 죤 뉴톤의 예배 음악에 대한 이해가 이랬기 때문에 그가 당시 청교도들이 고수하던 시편 찬송을 벗어나 예배용으로 사적인 찬송을 지은 것으로는 보이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개인적으로 부르기 위하여 지은 노래를 후대 사람들이 찬송곡을 선정한 것으로 보입니다. 마치 한국 교회가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일하러 가세’ 같은 등등의 노래들을 모아서 버젓이 찬송가라고 만든 것처럼.)

 

찬송이란 이렇게 비상한 차원에서 다루어져야 할 성격의 것입니다. 마치 사람들 앞에서 발표하듯이 한다거나 혹은 은혜를 받기 위한 수단 등등으로 할 때는 감히 찬송이라고 부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찬송은 그 자체가 예배요, 곧 하나님을 높이는 행위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누누이 반복하지만 찬송은 우리가 은혜 받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찬송뿐만 아니라 예배 자체가 그런 것입니다. 예배 자체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지, 우리 자신이 은혜를 받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께 예배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이 사실입니다. 예배를 드릴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 예배를 받으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은혜를 내려 주십니다. 우리는 이런 은혜를 계속 되풀이해서 입어야만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가 있는데, 은혜를 입는 방편 중에서 가장 현저하고 뛰어난 방편이 예배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만일 예배를 드려도 은혜를 받지 못한다면, 그 이유는 우리가 예배를 바른 자세로서 드리지 못하기 때문일 뿐입니다.

 

 

 

제사의 정신과 연결되어 있는 찬미

 

하지만 이때 찬송의 1차적인 목적은 우리가 은혜 받기 위해서 드리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항상 유념해야 합니다. 찬송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요, 참된 찬송을 했다면, 반드시 하나님을 드높인 감정이 나타나야 하고, 논리적으로도 충분히 깨달아져야 합니다. 이 사실을 신약 성경에서도 선포해 놓았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서는 찬미를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라고 말씀했습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 13:15). 여기에 보면, ‘찬미의 제사’라고 했습니다. 이는 ‘찬송’과 ‘제사’ 두 개념을 연결시킨 것입니다. 구약에서 제사는 제물을 제단 위에 불살라서 하나님 앞에 온전히 드리는 구약적 방식의 예배였습니다. 이 제사의 원리를 잘 생각해 보면, 찬미 혹은 찬송에 대한 이해를 바르게 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구약 시대의 제사를 보면, 첫째로 드리는 제사가 속죄제 혹은 속건제입니다.

구약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 맨 먼저 필요한 것이 죄를 위해서 하나님 앞에 속죄제를 드리는 일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 앞에 나올 때마다, 이런 원리에 따라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올만한 의로움이나 거룩함이 없는 자들이어서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의지함으로 속죄 받는 의미를 항상 마음에 품어야 합니다.

 

이런 까닭에 예배를 드릴 때에 기도할 때마다 우리의 죄에 대해서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빼놓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그 보배로운 피로서 씻어 주신 사실을 고백하고, 계속 씻어 주시기를 갈망하면서, 비록 우리에게 여전히 허물과 부족함이 있을지라도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공로로서 다 사해주심으로 우리를 받아 주십사고 그렇게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찬송을 부를 때에도, 바로 이와 같은 제사의 정신 혹은 의미를 담아야 합니다. 그래서 찬송하는 사람의 마음에는 속죄제의 정서가 품어져 있어야 합니다.

 

속죄제를 드린 다음에는 번제를 드렸습니다.

번제는 속죄에 기초하여, 즉 속죄의 사실을 바탕으로 자기 자신을 전부 하나님께 바친다는 정신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번제의 경우, 제물의 털 끝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태워서 하나님 앞에 드렸습니다. 이렇게 해서 제사자는 자신의 모든 생명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에 바쳐진 존재라는 사실을 드러냈습니다. 찬송을 할 때 이런 정신이 나타나야 합니다. 구원받기 전까지 우리는 우리의 욕심을 따라서 살았고, 이에 따라 순전히 자기 자신의 뜻대로만 살았지만, 구원을 받고 보니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죄인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삶을 철저하게 회개하면서 이제부터는 오로지 하나님만을 위해서 살겠다고 헌신하는 것이 번제의 의미입니다. 바로 이런 의미가 찬송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다음에 세 번째로 소제가 있습니다.

소제는 일반 양식인 가루를 제물 삼아서 드리는 제사입니다. 즉 빵을 구워 먹는 가루를 하나님 앞에 드리는데, 이렇게 할 때의 의미는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날마다 하루 세끼씩 식사를 위하여 빵을 쪄 먹는데, 이제 그 재료인 가루를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을 통하여 우리의 일상생활 전부가 하나님 앞에서 예배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라고 하는 의미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구약 제사에는 화목제가 있습니다(레 7:11‐21).

이 화목제는 하나님께 제물을 드린 후 드린 제물 중의 일부를 제사자가 먹는 제사라는 데서 앞서의 경우들과 구별되는 별다른 특징이 있습니다. 화목제 제물을 드리면, 제물 전부를 다 태우지 않고, 일부를 제사자에게 나누어주어 먹게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그것을 받으셨다는 것을 표시하는 바, ‘응식’의 의미로 제물의 일부를 제사자에게 나누어주어 먹게 합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과 화목된 사실을 맛보고 누리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찬송에는 이런 의미도 담아내야 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속죄함을 받아, 이제는 하나님 앞에서 화평을 누리는 자가 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마음 가득히 품는 정서의 실질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정리와 결론

 

지금까지의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찬송은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 곧 제사인 까닭에, 첫째, 찬송의 가사 내용이 예배에 합당한 내용의 시여야 하고, 둘째, 곡조도 찬송으로 합당한 그런 곡으로 불려져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일각에서 유행하고 있는 식의 찬양과 경배 혹은 열린 예배라는 명분 하에 행해지고 있는 찬송 아닌 찬송 행위들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찬양이 되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큰 결례가 되는가를 잘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칼빈은 쯔빙글리(Zwingli)의 경우처럼 찬송을 폐지하고 성경낭독으로 대치하는 극단적인 입장은 취하지 않았지만, 대신 심령의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노래여야 한다는 사실을 힘주어 강조합니다((기독교 강요-편집자 주) Ⅲ.20.32): “그러나 우리는 곡조에 더욱 귀를 기울이고 가사의 영적 의미에는 마음을 덜 기울이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야 한다. 어거스틴(Augustine)도 이 위험성을 많이 염려해서 어떤 때는 아타나시우스(Athanasius)가 지킨 관례가 확립되기를 원했노라고 고백했다. 아타나시우스는 음성에 억양을 적게 붙여서, 노래를 한다고 보기 보다는 말하는 것같이 들리도록 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노래에서 받는 유익이 많은 것을 생각하고 어거스틴은 반대 방향으로 기울어졌다. 그러므로 이렇게 적당한 정도를 지킨다면 노래를 부르는 것은 확실히 대단히 거룩하고 유익한 일이다. 그러나 감미로운 느낌과 귀의 즐거움만을 목적으로 작곡한 노래는 교회의 존엄성에 합당치 못할 것이며, 반드시 하나님을 극히 기분 상하게 할 것이다(be most displeasing to God).”

 

‘혀는 말과 노래로서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이 혀의 용도에 대한 칼빈의 해석입니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서 하나님을 찬미’(골 3:16)하는 것은 신자의 권리입니다. 하지만 ‘영과 마음으로 하는 찬미’(고전 14:15)여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날 반쪽짜리 칼빈주의자들, 곧 칼빈의 명성만 도적질할 뿐이고, 정작 그의 주의와 경고를 아랑곳하지 않는 현대 교회의 찬송에 대한 행습을 볼 때, 아타나시우스나 쯔빙글리의 입장은 다시 한 번 긍정적으로 검토될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종교개혁기에 영국의 청교도들은 이런 정신을 계승했습니다. 확실히 권리가 있지만, 그것을 빙자하여 방종으로 간다면, 차라리 절제를 택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보다 더 진실하고 책임 있는 신앙의 자세일 것입니다.

 

방언과 노래에 대한 칼빈의 신학체계와 실질의 신앙을 계승한 역사적 개혁교회의 입장은 다음과 같이 정리되었습니다.

 

명확한 방언 금지:

“감사함으로 드리는 기도는, 종교적 예배의 한 특별한 요소로서,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요구하신다. 기도가 열납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성자의 이름으로,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사려분별과 경외심과 겸손과 열심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를 가지고 하되, 만일 소리를 내어 하는 경우에는 알 수 있는 말로 해야 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1장 3절).

 

 

시편으로 찬송:

“경건한 경외심을 가지고 성경을 읽어야 한다. 건전한 설교와 이해 및 신앙과 존경심을 가지고 하나님께 순종할 마음으로 말씀을 경청하는 것과 마음에 감사함으로 시편을 노래하는 것과 또한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성례를 바로 거행하며 합당하게 받는 것은 모두 하나님께 드리는 일반적 예배의 부분이다. 이 외에 종교적 맹세와 서원과 엄숙한 금식과 특별한 때를 따라 드리는 감사 등이 있으니, 이것은 여러 때와 절기에 따라 거룩하고 신령한 태도로 해야 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1장 5절).

 

 

예배 모범의 규정:

“하나님을 공적으로 찬송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의무이다. 회중에서 함께, 또 개인적으로 가정에서 시편을 찬송할 것이다. 시편을 찬송하는 데 있어서 목소리는 곡조에 맞게 엄숙하게 낼 것이다. 그러나 제일 조심할 것은 이해를 가지고 마음에 은혜를 가지고 주님께 노래를 해야 하는 것이다. 온 회중이 다 함께 불러야 하므로 읽을 수 있는 자는 다 시편 책을 가질 것이요 다른 사람들도 나이나 다른 조건으로 불능이 되지 않는 한 읽는 법을 배우라고 권면할 것이다. 그러나 현재로는 회중의 많은 사람들이 읽지 못하므로 목사나 또는 다른 당회원이 임명한 적합한 사람이 시편을 한 줄 한 줄 노래하기 전에 읽어 줄 것이다”(웨스트민스터 예배 모범).

 

참으로 개혁교회 신자들은 종교 개혁자들의 정신으로 돌아가서 시편으로서 찬송해야 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2부에서 이미 충분하고 훌륭하게 논증을 전개한 코터링 목사의 글을 통해서 이해해볼 것입니다.

 

 

 

<각주> (편집자 주)

 

i)

종교 개혁에 대해 생각할 때,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관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개혁자들에게 있어서 교회의 개혁은 예배의 개혁과 맥락을 같이 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예배의 개혁’이라는 명분 아래 ‘찬양과 경배’,‘열린 예배’,‘드라마 예배’ 등등의 이상한 현상들이 나타나, 오히려 제도권 안에서 ‘예배의 타락’이 합법적으로 자행되는 것을 보면서 과연 사단의 미혹이란 얼마나 간교하고 무서운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됩니다.

 

 

ii)

개혁교회의 특징 중에 중요한 것 한 가지로, 예배시에 성경의 거룩한 시편으로서 찬송한다는 사실을 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거의 대부분의 교회들이, 종교 개혁을 요구했던 저 난잡한 중세기의 찬송 형태들을 답습함으로 말미암아 시편 찬송을 내던져버렸습니다. 복음성가가 버젓이 예배 시간에 불려지는가 하면,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는 젊은이들이 기독교적인 풍의 노래들을 지어서 부르면서 그것이 마치 하나님을 찬송하는 정당한 행위인 양 보급시키고 있습니다.

 

스스로 자기 감정에 사로잡혀서 기독교 풍의 노래를 한 곡 부르고 난 후, 의례껏 ‘은혜받았다’는 말을 공식처럼 해댑니다. 이는 개혁파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만을 유일한 은혜의 수단으로 규정한 신앙 원리를 크게 벗어나는 행동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모습은 교회 타락이 절정에 달했던 중세기에 이미 나타났던 현상의 반복에 불과한 것이고, 사실 그러한 자의적인 신앙 형태들 때문에 중세기 교회는 더 한층 타락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들이 이를 깨닫기는 커녕 도리어 앞장서서 이런 방향으로 나가고 있는 것을 볼 때 심히 안타깝습니다.

 

 

iii)

보통 교회를 생각할 때 자신이 지금까지 경험해 온 것을 가지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과거 종교 개혁기에 마틴 루터는 바로 이런 생각 때문에 교회 개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한탄했지만, 이런 생각은 현대에 와서 더 깊어진 것 같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이야기 할 때에, 교회의 운영은 어떻게 하고, 조직은 어떻게 정비를 하고, 예산은 어떻게 해야 한다고 하는 등등의 주변적인 이야기에 초점을 맞춥니다. 사실 흔히 교회를 생각하면, 건물이라고 생각하거나 - 그래서 성전이라는 말을 예배당에 붙이기도 합니다 - 아니면 목사, 장로, 성가대, 주일학교 등등의 어떤 조직들을 얼른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교회를 말할 때는, 항상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그리스도를 주라고 고백하는 자들이 함께 지체로서 연합을 이룬 유기체라는 측면에 주안점을 둡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우리의 몸에 비교하여 교회를 가르치는데, 교회는 머리이신 그리스도가 있고 몸에는 각 지체가 있어서 서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하나의 몸을 잘 형성해 가는 데서 성립된다고 했습니다. 각 지체가 다양하게 있지만, 이들이 따로따로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몸을 세워나가기 위해서 존재하는 데서 비로소 교회가 성립된다는 것입니다. 이때 교회는 분명한 방향과 목표를 갖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 속에서 각 지체가 서로를 섬기는 정신으로 진리의 말씀에 입각하여 상호 협력하며 봉사하는 데서 교회의 모습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신앙생활은 교회가 드러나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지, 행여라도 자기 자신이 드러나게 되면 옳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지만 오늘날 교회 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오히려 자아가 더 강해지는 사람이 많은 것을 볼 때 참으로 씁쓸한 마음 금할 길 없습니다. 천박한 이야기일지 모르겠으나, 세상에서는 제대로 얘기도 못하는 사람이 교회로만 모이면 큰소리치고 자기주장을 고집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태도는 교회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데서 나오는 무지입니다. 교회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하여, 교회의 가장 중요한 속성 중의 하나인 거룩성을 더불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거룩성은 일차적으로 세상으로부터의 분리에서 찾아지는 개념이지만, 동시에 윤리적인 특성도 포함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세상과 분리되어 별다른 통치를 받는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구성원들 속에서 세상 사람들만도 못한 인격이나 사상의 지배를 받는 모습을 드러낸다면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겠습니다.

 

 

iv)

칼빈이 제네바에서 교회개혁을 주도해 나가면서 여러 가지로 신경을 썼는데, 특별히 찬송 음악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찬송의 곡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인도받는 예배의 정신이 실려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당시 로마 교회는, 성당 안에 거대한 오르간을 들여놓고 그것을 연주하여 종교적인 분위기를 돋우는 데 집중하였습니다.

 

따라서 칼빈은 찬송에 대한 개혁의 필요성을 절실히 깨닫고, 찬송 음악의 선정 원리로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생각했습니다.“첫째, 곡은 반드시 가사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면서 가사의 정신을 잘 나타내 주어야 하니, 따라서 곡은 경박하지 않고 장중한 것이 되어야 한다. 둘째, 음악성이 없는 일반인들도 쉽게 불러야 하고, 사람의 주관적인 감정을 끌어내는 것을 배제하고, 교회 안에서 지속적으로 부를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원리에 따라 칼빈은 시편에 곡을 부쳐 찬송가로 쓸 것으로 최종 결정하고, 끌레망 마로와 데오도르 베자 등의 협조를 얻어 최종적으로 로마 카톨릭의 극렬한 반대를 극복하고 시편 전체에 곡을 부친 찬송가를 1562년 봄에 출간하게 됩니다. 사실 음악이란 무엇입니까? 음악이란 가사를 표현하는 보조 수단이요, 성악은 모든 음악의 기본입니다. 따라서 음악이 찬송을 주도해서는 안되고 단지 가사를 표현하는 보조 수단으로 그쳐야 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찬양과 경배 혹은 열린 예배라는 명분 하에 인간을 인위적인 종교적 감흥으로 몰아가는 바, 찬송 아닌 찬송이 얼마나 많이 난무하는지 모릅니다. 요즈음 찬송이라는 명분 하에 실상은 오락을 하듯이 하는 음악 축제들이 온 사방의 교회에서 난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곡이 아무리 좋아도 가사가 바르지 못하면 찬송으로 적합하지 않습니다. 종교 개혁기에 오죽했으면 화란 교회는 아예 오르간을 교회당에서 퇴출시키기로 결정하고 반주 없이 육성으로만 찬송하기로 결의를 했겠습니까? 찬양과 경배라는 명분 아래 아무 곡이나 마구 불러대는 세태가 심히 안타까운 이 시대에 깊은 생각을 하게 해줍니다.

 

 

(첨부파일에 원본 파일을 올려놨습니다.)

예배 찬송을 규정하는 원리 (5강-칼빈아카데미).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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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찬송 86편 악보 (160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