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오 칼럼

주일 성수에 대한 칼빈의 설교 2 (오디오 지원)

Sola. 2023. 7. 27. 07:00

[Osola 유튜브] (4)~(6)편까지입니다. '기독교 자료' 카페의 '오디오 칼럼' 게시판에 다른 자료들도 있습니다.

주일 성수에 대한 칼빈의 설교 2

존 칼빈 / 옮긴이: Jennifer [1549년 8월 5일 (월)]

 

 

(렘 17:24-27)“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가 만일 삼가 나를 청종하여 안식일에 짐을 지고 이 성문으로 들어오지 아니하며 안식일을 거룩히 하여 아무 일이든지 하지 아니하면(25)다윗의 위에 앉는 왕들과 방백들이 병거와 말을 타고 이 성문으로 들어오되 그들과 유다 모든 백성과 예루살렘 거민들이 함께 그리할 것이요 이 성은 영영히 있을 것이며(26)사람들이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에 둘린 곳들과 베냐민 땅과 평지와 산지와 남방에서 이르러서 번제와 희생과 소제와 유향과 감사의 희생을 가지고 여호와의 집으로 오려니와(27)너희가 나를 청종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거룩케 아니하여 안식일에 짐을 지고 예루살렘 문으로 들어오면 내가 성문에 불을 놓아 예루살렘 궁전을 삼키게 하리니 그 불이 꺼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다 할찌니라”

 

이 설교는 “그 말씀” 1999년 10월호 ‘칼빈의 예레미야 설교(20)’의 내용을 그대로 실었습니다. 이미 읽어보신 분은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앞서 우리 주님이 어째서 안식일을 그토록 천거하셨는지를 밝히고, 이 의식이 율법 시대에 무엇을 의미했는지를 말했습니다. 그것은 출애굽기와 에스겔서에 기록된 것처럼 1) , 하나님께서 이 안식일을 통해 그가 유대인들을 거룩하게 하여 자기 백성이 되게 했음을 선포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다른 민족에게서 분리되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또한 그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어야 하며, 우리 영에 지배받지 않고 오직 그분께 복종하여 그분이 우리를 평생 다스리시게 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안식일이라는 의식은 율법시대의 커다란 징표였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하나님은 이 의식이 더럽혀지고 위반될 때 그토록 한탄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그분께 복종하며 살기를 원치 않았다는 징표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에 대해 우리가 밝힌 것은 어떤 영적 의미를 가져다 주는 성례들을 우리가 경멸할 때, 그때 우리는 그것들을 제정하신 하나님을 염두에 두지 않음을 입증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세례를 멸시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중요시하지 않으며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른다는 것을 드러내게 됩니다. 성찬이 우리에게서 그 진실된 용도로 지켜지지 않을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게 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죽음에 유죄하며, 그의 명예에 먹칠하는 죄를 짓게 됩니다 2) .

 

비록 그럴 능력이 우리에게 있지 않다 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에 대해 책망을 받을 것입니다. 물론 지금은 안식일이 율법에서처럼 3) 그렇게 엄밀하게 명령되지는 않지만, 그래도 우리는 그것이 상징하는 진리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다스리시도록, 우리의 의지와 우리의 모든 감정들을 길들이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이렇게 되기까지 그의 지지와 보호를 기다립시다. 그리하면 그가 그의 손으로 우리를 붙드실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반대로 우리가 반항아가 되어 우리의 육욕을 추구하려 한다면, 분명 그는 우리를 벌하실 것이며 우리는 우리가 섬기게 될 주인, 즉 사탄과 더불어 대가를 지불할 것입니다.

 

 

 

1. 일요일에 쉬는 까닭

 

나아가, 설령 우리가 안식일(sabat ; 토요일)을 지켜서는 안된다 하더라도, 그래도 우리에겐 지키도록 명령된 ‘휴식의 날 일요일’이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모든 노동을 특히 휴일에 중단해야 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강제로 하지 않으면 결코 성전에 나오지 않는 많은 미지근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일을 쉬고 자신을 섬기는 일에 종사할 날이 있도록 하셨습니다. 우리의 게으름으로 하나님을 섬긴다는 말이 아니라, 다만 한 날을 정해 우리가 기도와 간구에 전념할 시간을 갖기를 원하셨고, 우리 모두 함께 우리 신앙을 고백할 수 있는 장소에 있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이 휴식의 날이 제정된 목적은 바로 이것인데, 즉 우리가 육체적 일들에 종사하지 않고 성전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이 질서가 지켜지지 않는다면, 확실히 우리 자신은 하나님을 마음에 두고 있지 않았음을 입증하게 될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주간 내내 즐길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일요일에 멋대로 야외에 나갑니다. 그리하여 마치 휴일은 그들이 오락을 즐기도록 정해진 것처럼 보일 정도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축일을 거룩하게 지내는 문제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처럼 휴일을 가볍게 여긴다면, 이것은 우리에게 매우 나쁜 표징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제 칠일에 쉬셨습니다. 사실 그가 제 칠일에 일하기를 그치셨다는 것은 그가 지쳤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로 그의 본을 따르게 하기 위함입니다. 사실 그가 6일 안에 모든 것을 만드신 것처럼, 또한 그는 매일 온 세상을 유지하고 다스리기를 그치지 않습니다. 마치 우리 주님이 그의 아버지 하나님과 그가 세상을 유지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4) . 그러므로 그가 제 칠일에 일을 그친 것은 지쳤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에게 본을 보이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빛을 주고 땅에 열기를 주어 생산케 하는 하늘을 볼 때, 우리가 우리를 양육하기 위해 열매를 생산하는 땅을 볼 때,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배려하실 뿐만 아니라 하늘의 새와 땅의 짐승들을 배려하시는 것을 볼 때, 그가 우리에게 대해 갖는 배려와 사랑을 보면서, 우리는 그를 찬양하도록 크게 자극을 받아야 합니다. 바로 이런 방식으로 그의 선하심과 그의 지혜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 ‘깨달음’ 위에, 우리는 보다 크고 나은 감정으로 그를 경외하고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 주님이 그의 일을 쉬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를 자극하여 그를 바라보게 하기 위합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고 더욱더 그를 사랑하는 방향으로 이끌려야 합니다.

 

이제 만일 우리가 이런 모든 것에 대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와 축복을 응시하는 대신 안식일에 심심풀이와 오락과 방탕한 행위를 하러 간다면, 그는 확실히 보복하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본문의 기록이 바로 그렇습니다. “너희가 만일 삼가 나를 청종하여 안식일에 짐을 지고 이 성문으로 들어오지 아니하며 안식일을 거룩히 하여 아무 일이든지 하지 아니하면 다윗의 위에 앉는 왕들과 방백들이 병거와 말을 타고 이 성문으로 들어오되 그들과 유다 모든 백성과 예루살렘 거민들이 함께 그리할 것이요 이 성은 영영히 있을 것이며.”(24절)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주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이 약속을 하시는 것을 볼 때, 비록 우리에게 안식일이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진리는 있으며, 만일 우리가 휴식의 날을 지킨다면 우리 주님은 그 은혜가 우리에게 증가되게 하시지만, 반대로 우리가 그의 규례를 뒤엎는다면, 그는 우리를 살라버릴 불을 지펴서 꺼지지 않게 하실 것이라고 위협하신다. 이제 우리가 우리 일을 멈추는 법을 배웠으므로 또한 우리가 질서를 지킨다는 사실, 즉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고 섬김을 받으신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한 회중 ‘예배’에 자주 참석하는 법을 배워야 하며, 신도들 사이에서 행해지는 ‘기도회’에 나오는 법을 배워야 하며, 하나님의 멍에에 우리를 굴복시키는 이 규례를 지키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할 때, 이전에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던 것처럼, 이후에도 더욱더 그 은혜를 느끼리라는 것을 의심하지 맙시다.

 

 

 

2. 안식일을 지킬 때 주시는 복

 

나아가, “왕들이 다윗의 위에 앉을 것이라”고 기록된 말씀에서, 그리고 사람들이 유다의 성읍들과 주변의 모든 나라들에서 제사를 드리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오리라고 덧붙여진 말씀에서, 우리 주님은 이 죽을 인생을 위해 중요한 것 두 가지를 강조하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의지에 따라 위정자를 갖게 되었다는 것과 다음으로 우리에게 교회 질서가 있어 만사에 그에게 복종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바라야 할 두 가지 주된 축복이며 선지자도 여기에 그것을 언급했습니다.

 

 

(1) 선한 위정자를 주심

 

그가 “왕들이 다윗의 위에 앉으리라”고 말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아는 대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다른 고려사항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이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예루살렘 왕국이 유다의 자손 가운데 항상 있을 것이다” 5) 라고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유다는 야곱의 장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에게 이런 축복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그쳐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천사는 동정녀 마리아에게 그녀가 낳을 자가 다윗의 위에 오르리라고 말합니다 6) . 그러므로 선지자는 왕들이 예루살렘의 문들로 들어와 다윗의 위에 앉으리라고 말하는 것을 봅니다. 이는 마치 그가 다음과 같이 말한 셈입니다. “만일 너희가 안식일을 지키며 그것을 거룩하게 하면, 우리 주님께서 너희에게 유다 집의 왕들을 계속 있게 하시리라고 하신 약속을 확고히 하실 것이며, 너희의 권세를 찬탈하러 오는 폭군들이 없을 것이고, 오히려 하나님이 택하신 왕들이 있어서 너희를 다스리고 원수들로부터 너희를 지키고 보호하며 모두에 대해 방패가 되리라.”

 

이 구절을 이해하기 위해 주의해야 할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다스리기 위해 다윗의 집을 택하신 것처럼 그가 선한 위정자들을 택하지 않으시면,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가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왕, 군주, 위정자들을 통해 수많은 악이 침투해 들어온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택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이 그들을 ‘위정자’로 받아들이지 않았을진대, 그들이 이 신분에 이른 것이 주님께로 말미암은 것이 아님을 깨닫도록, 사람들을 잔인하게 대합니다.

 

둘째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한 위정자를 주실 때 이것이 작은 은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백성에게 자주 이런 위정자가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들에게 합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괴롭히기를 좋아하고 온전히 파멸시키기만을 구하는 독재자들을 가지는 게 마땅합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안식을 지키는 의무를 행한다면, 그는 우리에게 선한 군주들과 선한 위정자들을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너무도 사악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의 사악함을 보시고 자신의 직무를 잔인하게 남용하는 위정자들을 우리에게 허용하십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우리가 그의 은혜를 남용할 때 우리를 유지해야 할 자들에 의해 처벌되는 것이 하나님의 정당한 보복이기 때문입니다. 왜냐고요? 만일 그가 오늘 우리에게 축복을 베푸셨다면 내일 다른 축복을 베풀 준비가 될 것이지만, 만일 우리가 이처럼 그 축복을 남용한다면 그때 그는 마땅히 그의 손을 거두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더 부지런히 그의 은혜를 깨닫고 그의 뜻을 따라 다스림 받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복을 누릴 때,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헤아릴 수 없는 보화임을 배웁시다. 그러므로 그에게 감사하는 법을 배웁시다. 그럴 때 우리는 그가 우리에게 더욱 복을 베푸실 근거를 그에게 줄 것입니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라면, 그분께 배은망덕으로 갚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유의해야 할 것입니다. 실제로 설령 하나님이 우리가 바라는 것을 모두 들어주신다 하더라도, 그가 우리에게 건강 이외에 토지, 부, 보화, 그리고 모든 축복을 가득 주신다 하더라도, 만일 통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각자가 ‘폭력으로’ 가질 수 있는 것을 갈취하고, 또 그런 죄가 전혀 처벌되지 않는다면, 도대체 어떤 꼴이 되겠습니까? 아마도 우리는 단숨에 죽어 버리는 게 더 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를 선한 질서로 유지시키기 위한 선한 위정자들이 없다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축복이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하리라는 것에 주의합시다. 이 점에서 우리는 선지자가 우리 주님께서 이 백성에게 유다 자손의 왕들을 주시면서 축복을 내리시리라고 말하는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음을 봅니다. 이것은 유다가 자기 원하는 대로 자신의 직무를 사용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이 정의를 집행하고 만사를 선한 질서로 지킬 목적으로 하나님에게서 부름 받았음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고위 권세가 세워진 이유입니다. 그리고 왕이나 군주가 아닌 자들은 하나님이 왕과 군주들을 그렇게 부르셨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명령이 모든 백성에게서 지켜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2) 영적인 정치체제 수립

 

참된 희생(찬양의 제사)을 드림

 

이제 선지자가 “온 나라에서 사람들이 성전에 희생을 드리러 오리라”고 덧붙이는 말씀으로 가봅시다. 내가 말했듯이, 이 말을 통해 선지자가 의미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에게는 우리를 선한 질서로 유지하기 위한 지상의 정치체제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우리에게 또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며 공동의 기도가 행해지도록 영적 정치체제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가 의미하고자 하는 것은 비록 우리가 모든 것을 원하는 대로 갖는다 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자신의 예배를 세우시기 전까지는 우리가 불행하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성 바울이 디모데 전서 2장에서 위정자들을 위해 기도하되 우리가 그들에 의해 유지되도록 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모든 거룩함과 예절 가운데서 평온하고 조용한 삶을 영위하도록”하기 위해 그렇게 하라고 권면하는 것을 봅니다 7) . 여기에 우리가 위정자들을 통해서 가져야 할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즉 그들은 우리 각자가 하나님의 명령에 따르도록 도와야 한다는 것과, 그들은 모든 추문들을 징벌하고 모든 사람들 사이에서 공평이 지켜지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가 “온 나라에서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희생을 드리러 오리라”고 한 말씀으로 돌아갑시다. 그런데 우리는 사람들이 희생으로 짐승을 드리지만 이 희생의 진리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그렇다면 이 진리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선지자가 바로 덧붙이는 내용입니다. 그들이 주님의 집에 찬양의 제물을 가져오리라. 그러므로 사람들이 행하는 짐승의 희생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의 핵심이 아닙니다. 이는 시편 50편에 기록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너는 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염소의 피를 마신다고 생각하느냐? 찬양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 8)

 

이렇듯 하나님은 자신에게 짐승들을 드려야 할 만큼 배고프지 않으시며 다만 모든 것이 우리가 그를 영화롭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입니다. 성전에 모였던 것은 백성을 함께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함이며,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고 그에게로 백성을 인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진리를 갖고 있는 이상,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서 영광과 찬양을 받으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그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희생제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섬김 받기를 원하신다는 것’이야말로 그가 우리에게 베푸시는 특별한 축복입니다. 그런데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됩니까? 그것은 우리가 성례를 사용할 때 그렇게 될 것인데, 이는 기도와 나머지 것 즉 우리가 하나님이 온 세상으로부터 찬양을 받으시는 것만을 애쓰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뒤따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만일 우리가 세속 정치 질서를 멸시할 정도로 배은망덕하다면, 더욱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경멸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그와 하나가 됨을 보이기 위해 신앙고백을 갖는 노력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가 공동 기도를 하라는 교회의 이 명령을 얼마나 존중해야 합니까? 이 모든 것이 폐기 되기를 원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설교에 대해 그 모든 것이 없어지기를 원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다음으로 성례문제에 있어서, 세례를 시행할 때 어떤 이들은 왔다갔다하며, 또 어떤 이들은 사람들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문에서 기다립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은 영광을 받지 못하십니다. ‘이들은’ 설교 시작 때 ‘교회’ 문까지 왔다가 설교가 끝나기 전에 ‘문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충분한 듯합니다. 실제로 그들의 의도는 이렇습니다. “우리가 문까지 왔으니 충분하지 않은가? 우리가 여기서 기다리는 짓을 무엇 때문에 해야하는가? 우리는 설교가 끝날 때 다시 오겠다.” 이것이 우리가 행하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우리처럼 복음을 영접한 자들에게 어떤 일이 생겨났으며 그들이 이 은혜를 9) 어떤 식으로 평가했는지를 살펴봅시다. …이것은 그들에게 아무래도 좋은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매매를 하고 사방에서 ‘긁어모으는 데에만 관심이 있는’ 한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그들에게서 그의 은혜를 빼앗으시고 그들이 사탄에게 굴종하는 데로 돌아가도록 허용하셨음을 봅니다.

 

만일 하나님이 여기에 동일한 시험을 하신다면, 분명 그는 그 이상의 불경건을 발견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이런 축복을 빼앗으실 위험이 있는데, 우리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소중히 여기시는 복임을 보면서 이것을 빼앗기는 것을 마땅히 두려워해야 합니다. 우리가 보듯이 선지자는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축복을 선포하기를 원하면서 이 두 가지를 말합니다. 이는 우리가 그 축복을 빼앗길 때, 우리 교만을 알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우리 조상 아담에게 일어난 것과 같은 것으로,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빼앗기고 난 후 “아, 슬프다!”라고 외치면서 그 은혜를 묵상할 시간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렇게 될 것이 틀림없습니다. 즉 우리가 그의 은혜를 빼앗기고 터키인과 적그리스도의 수중에 떨어질 때 “슬프다”라고 외칠 짬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온갖 외침이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이제 이것이 기록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그의 영적 안식이 잘 지켜져서 그의 이름이 영화롭게 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미리 발견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의 말씀이 습관적인 것 이상으로 잘 받아들여지되, 우리가 설교에 나오는 것이 “내가 거기에 있었다!”라고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집에 돌아가 우리가 들은 말씀을 묵상하기 위함임을 발견합시다. 그리고 그가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인하여 그에게 감사하는 법을 발견합시다. 그가 우리에게 그 은혜를 더욱더 계속 베풀어주실 근거를 갖도록 말입니다.

 

 

 

3. 위협하시는 하나님

 

(1) 안식일을 더럽히는 무지한 사람들

 

이제 그가 하시는 위협으로 가봅시다. “내가 그 문에 불을 놓을 것이며 그 불은 예루살렘 궁전들을 태우며 꺼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 주님께서 우리가 그에게로 오는 데 지체하지 않도록 할 수 있는 모든 방식으로 우리를 권면하시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그가 “내게 오라. 그러면 모든 선을 느낄 것이다. 나는 너희가 선을 행하는 것만을 요구한다” 라고 말씀하시면서 하신 약속을 보았습니다 10) . 무슨 말이냐구요? 사실 우리는 그 ‘약속들을’ 중요시하지 않으며 그것이 우리에게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가 그의 약속들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을 때 엄격한 위협을 사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그가 우리에 대하여 갖는 배려를 살펴야 합니다. 그는 우리가 그의 사랑을 더욱 잘 이해하도록, 말하자면, 변모하여,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우리를 가르칩니다.

 

한편으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버지와 같이 우리를 부드럽게 불러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유모가 젖을 먹이는 어린 아이에게 말하듯이 하심을 보면서, 우리의 무지에 대해 경고를 받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토록 부드럽게 부르신 뒤 우리를 위협하셔야 하는 것을 볼 때, 이 점에서 우리는 우리의 무지를 봅니다. 하나님이 그의 입을 열어 우리에게 ‘부드럽게’ 말씀하시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가 망치로 내리치셔야 한다고 말합니다. 온순한 머리라면 망치로 때릴 필요가 있을까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하나님은 부드러움이나 위협으로도 우리를 자신에게로 이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철침보다도 더 단단함에 틀림없습니다.

 

이런 이유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그토록 자주 우리를 위협하시는 것을 이상하게 여겨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열이 높은 환자와도 같습니다. 이 환자는 자신을 매우 건강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병을 아는 의사는 그에게 약을 복용하라고 명할 것입니다. 환자는 그 약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을 성가시게 여길 것입니다. 우리의 영적인 의사이신 주님은 우리의 병을 아시며, 설령 우리가 스스로를 매우 건강하게 여긴다 하더라도, 그는 우리에게 죽음이 임박함을 알고 계십니다. 따라서 그는 우리를 자신에게로 이끌기 위해 적절한 처방을 사용하시며, 우리는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불평하고 그가 너무 거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우리보다 우리 자신의 상태를 더 명백하게 보시기 때문에, 처방 곧 그의 위협을 사용하여 우리를 자신에게로 이끄십니다.

 

이제 이 위협이 우리와 관계가 있는지 없는지, 즉 우리에게 말해지는가 그렇지 않은가를 살펴봅시다. 그것은 분명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유대인들이 어째서 선지자에게 책망을 받았는지를 고려한다면, 그것은 그들의 탐욕 때문임이 확실합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일을 하기 위한 시간이 결코 오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당연히 그들의 유익을 얻으려고 열심을 내며 하나님을 섬길 기회를 찾지 않기 때문에 주일에 하나님을 섬기러 성전에 가는 대신, 어떤 이는 밀을 운반하고, 또 어떤 이는 건초를 실어 나릅니다.

 

그렇게 하는 사이 하나님은 뒷전에 팽개쳐집니다. 이것이 더럽혀진 안식일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행합니까? 주간 내내 우리 일을 한 후 ‘일요일에’ 성전으로 우리를 부를 경우, 우리는 우리가 크게 잘못되는 것으로 여기며, 일요일은 다만 우리가 산책할 여가를 갖기 위해 정해진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유대인과 동일한 악에 굴복되어 있음을 보면서, 동일한 처벌을 받을까 두려워합시다. 이제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휴일이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 이 보화를 거절하지 않도록 조심합시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의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신 이 보복을 행하시지 않게 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우리가 유대인들보다 더 귀하지 않으며 제네바가 예루살렘보다 더 특권이 있지 않다는 것을 생각합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예루살렘에 대해서 “이곳이 내 보좌요 내 쉴 곳이라” 11) 고 말씀하셨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모든 궁전이 불로 태워질 것이라”는 위협을 듣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사람들은 자기 자신들과 그들의 집을 세우는 것만을 생각했고, 그렇게 하는 동안 하나님의 집은 멸시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교만은 꺾일 것이요 그들의 집은 폐허가 되리라는 것입니다. 이제 이것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인지 살핍시다.

 

 

(2) 온몸과 삶으로 드리는 찬양

 

한편 선지자는 이 설교를 행한 뒤 그들이 강퍅해졌다고 덧붙입니다. 우리가 이 백성에게 있는 이런 반역을 볼 때, 우리는 그들을 정죄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목을 굽히기는 커녕 절대로 고치지 않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입니다 12) . 우리가 이것을 들을 때, 왕의 눈이 뽑히고 포로로 잡혀가는 이런 고통이 예루살렘에 닥친 것은 당연했다고 말할 필요가 있으며, 설령 보복이 엄했다 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백성의 고집을 볼 때 그렇게 가혹한 것 같지 않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들을 정죄할 줄 안다면, 우리를 살펴봅시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는 그 자신이 우리의 제단이시며 우리에게 영적 제사만을 요구하십니다. 즉 성 바울이 말하듯이 우리는 모든 거룩함 가운데서 그를 섬기고 그리고 그를 부르며 그가 모든 선의 장본인임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모든 것을 할 때, 유대인들보다 더 하나님을 섬긴다는 주장을 하지 않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보복을 예견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 방법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선지자가 말한 방법, 즉 하나님 찬양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결코 입으로 찬양되지 않음을 주의합시다. 우리가 그에 대한 찬양을 설교하고 모두가 “아멘” 한다고 해서 13)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를 손으로 찬양하고 발로 찬양해야 하며, 인간의 모든 부위가 사용되어야 합니다. 그러는 동안 혀도 놀지 않고 그를 찬양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지금까지 이 일에 게을렀다면, 선지자가 제시하는 처방이 있습니다. 즉 우리를 강퍅하게 하지 않고 겸손해지는 것입니다. 그가 우리에게 준 훈계를 받아들입시다. 우리가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이 우리를 자비로 받아들이실 것이 분명하며, 우리는 우리가 배은망덕함으로 그를 방해하지 않는 한 그의 선하심이 측량할 수 없음을 느낄 것입니다.

 

이 거룩한 가르침을 따르면서 우리의 잘못을 인정하고 우리의 선하신 하나님의 면전에 부복하여, 우리가 가지지 못한 가장 좋은 것을 우리에게 달라고 기도합시다. 그리고 우리가 위선으로 품위를 손상 당하지 않고 오히려 그가 우리를 벌하시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을 알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또한 우리가 그의 은혜를 아는 법을 배워 일주일에 하루만이 아니라 우리의 전생애에 그를 찬양하게 해 달라고 기도합시다. 그가 이 은총을 우리에게 뿐만 아니라 땅의 모든 백성과 민족에게 베푸시기를 기도합시다.

 

* 이 설교는 1549년 8월 5일 (월)에 행해진 것이다

 

 

출처: https://cafe.daum.net/jrcalvin/LPZ2/105

출처: 개혁주의 마을 글쓴이: Jennif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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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칼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