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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성수에 대한 칼빈의 설교 1 (오디오 지원)

Sola. 2023. 6. 22. 12:38

[Osola 유튜브] (1)~(3)편까지입니다. '기독교 자료' 카페의 '오디오 칼럼' 게시판에 다른 자료들도 있습니다.

주일 성수에 대한 칼빈의 설교 1

존 칼빈 / 옮긴이: Jennifer [1549년 8월 5일 (월)]

 

 

(렘 17:19)“여호와께서 내게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는 가서 유다 왕들의 출입하는 평민의 문과 예루살렘 모든 문에 서서(20)무리에게 이르기를 이 문으로 들어오는 유다 왕들과 유다 모든 백성과 예루살렘 모든 거민 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찌어다(21)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스스로 삼가서 안식일에 짐을 지고 예루살렘 문으로 들어오지 말며(22)안식일에 너희 집에서 짐을 내지 말며 아무 일이든지 하지 말아서 내가 너희 열조에게 명함 같이 안식일을 거룩히 할찌어다(23)그들은 청종치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며 그 목을 곧게 하여 듣지 아니하며 교훈을 받지 아니하였느니라”

 

이 설교는 “그 말씀” 1999년 9월호 ‘칼빈의 예레미야 설교(19)’만 발췌하여 싣습니다. “주일성수”에 대한 칼빈의 입장을 듣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이 있으리라 생각하여서 싣습니다. 이미 읽어보신 분은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1. 사역자의 기도와 확신

 

우리는 어제 선지자가 드린 기도를 보았습니다. (그는 계속하여)말하기를 “주님 나를 놀라게 마시며 당황케 마시고, 내 원수들로 놀라고 당황케 하소서”라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종들도 때로 악인들이 그들을 대적하는 것을 보면서, 심지어 하나님께서 그 악인들을 지지하는 것을 보면서 놀라리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의 사역자들은 그들이 싸워야 할 것을 배우며 하나님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한, 패배하리라는 것을 배웁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진맥진하여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할 때, 기도와 간구로 간청합시다. 우리가 그런 지경에 이르러 너무도 괴롭게 될 때, 심지어 우리의 연약함으로 실패할 때에도, 유일한 방책은 기도에 의뢰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마땅히 강조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공격(coups)에 맞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충분히 준비를 해야 할 것이며, 일단 공격을 받으면 정신을 잃지 않는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공격(assaulx) 이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가 뽑혀든 칼이나 달궈진 화두를 보기 때문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사역자들이 자신들에게 펼쳐지는 흉계를 보면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어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이것은 내가 말했듯이 마땅히 주의해야 할 구절인데, 이는 아무도 그런 놀랄 일을 보면서도 놀라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사실 우리는 선지자 자신이 바로 그것을 매우 두려워했음을 봅니다. 게다가 그것은 하나님을 섬겼기 때문이었으며 우리가 놀랄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는 “주여, 나로 놀라지 말게 하옵소서, 당신은 재앙의 날에 나의 소망이시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나아가 이 교리는 기도를 위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선지자는 육체적 감각으로 충동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으로 충동받아 놀라지 않게 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우리가 그의 약속을 기다리는 한 하나님께서 모든 대립에 맞서 승리를 주실 것을 확신한다 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확신을 갖고 있는 선지자에게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패배하지 않도록 보호될 뿐만 아니라, 악인들은, 비록 아무도 그들을 쓰러뜨릴 자가 없어 보일지라도, 당황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내로 기다립시다. 결국 하나님은 악인들이 직분자들과 맞서 싸우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며, 그들에게 보복하실 것입니다. 이 확신은 직분자들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모든 신도들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강하게 하심으로 죽음에서 승리하게 하시며, 악인들은 하나님의 심판에 나아와, 그들이 지금 신자들로 견디게 하는 것과는 다른 고통을 견뎌야 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신자들이 하나님의 영광과 그들의 구원에 대해 갖는 확신을 위하여 참고 견딘다는 것을 안다는 점에서, 하나님은 신자들의 고통을 부드럽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악인들은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며, 아무도 나서지 못할 것이 분명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직분자들이 악인들에 맞서 어떤 확신으로 무장할 이유가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신자들도, 비록 그들이 저들의 수중에 있는 듯이 보일지라도, 종국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붙드시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늘에서 영광스런 면류관을 주리라고 약속하시며, 심지어 죽음 가운데서 우리가 넘어지지 않도록 강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실 때 1) , 이것이 충분한 위안이 아닙니까? 우리에겐 이 안에서 위로 받으며 안심하고 우리의 소명을 따를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2. 안식일 준수의 의미

 

이제 선지자는 자신의 원수들이 이방인들이거나 또는 하나님의 율법을 공공연히 거부하는 자들이 아니라, 자신이 선지자로 위임된 바로 그 백성임을 증거합니다. 그는 “그들을 훈계하기 위해 보냄 받았을 때 그들이 목을 굽히려 하지 않았고, 그들에게 증거하려 한 것에 대해 강퍅해질 2) ” 정도로 반역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선지자가 말하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선포가 장엄하도록, 유다의 왕들이 들어가는 가장 큰 문으로 하나님에 의해 보냄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는 아무도 몰랐다는 변명을 하지 않도록 이 문에서 저 문으로 다녀야 했습니다. 아무도 변명하지 못하도록 선지자는 이처럼 문에서 문으로 다니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는데, 이는 당시 공공의 행위가 성문에서 행해졌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그가 이 도시의 모든 문들에, 그리고 나서 몰라르(Mollard)와 퓌스트리(Fusterye) 3) 에 파송된 것과도 같습니다.

 

선지자는 백성에게만 아니라 왕들에게 말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문으로 들어오는 너희 유다 왕들과 너희 모든 예루살렘 거민들아,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스스로 삼가서 안식일에 짐을 지고 예루살렘 문으로 들어오지 말며, 안식일에 너희 집에서 짐을 내지 말며, 아무 일이든지 하지 말아서 내가 너희 열조에게 명함같이 안식일을 거룩히 하라 하셨느니라.” 4) 우리는 책망 받지 않는 자가 아무도 없어 마치 모두가 잘못을 저지른 것과도 같음을 봅니다.

 

 

(1) 성화의 표지 : 아담에게서 시작된 사단의 저주에서 벗어나 자녀로 거룩하게 됨

 

선지자가 그들을 책망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그들이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소한 것으로 보일지 모르나, 그들의 배은망덕이 크기 때문에 더욱 큰 일입니다. 만일 우리가 작은 것에서 하나님을 순종하지 않는다면, 결코 큰 것을 지키지 못할 것입니다. 원리는 안식일이라 불리는 제 7일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그 안에 상징화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점에 주의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을 명백히 이해하기 위해, 하나님이 무슨 목적으로 안식일을 명하셨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사실 그가 위반자들에 대해 하시는 위협은 엄중하며, 우리는 에스겔서에서 백성이 안식일을 지키지 않아 신랄하게 책망 받은 것을 압니다. 무슨 말입니까? 간음한 것보다 이 축일(祝日)에 일한 것이 더 큰 악이란 말입니까? 그런데 내가 말했듯이, 우리 주님은 의식에 관심을 갖지 않으시고 그것에 상징된 것을 중요시했습니다. 이는 그가 에스겔 5) 에서와 출애굽기 31장에서 6)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너희의 하나님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며 우리가 불신자들과 같이 결코 멸망하지 않는다고 선언하시는 것을 기억하는 것은 작은 일이 아닙니다. 이 성화(sanctification)의 표지를 갖는 것, 즉 저주가 아담의 모든 자손에게 있는 것 대신, 사탄이 모든 인류에게 자신의 표지를 갖는 것 대신,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 성화의 표지를 주신다는 것을 말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 표지를 거부한다면, 그것은 너무도 큰 배은망덕이 아닙니까? 이것이 그가 안식일을 명한 이유입니다. 그것을 어기는 것은 그의 은혜를 거부하면서 “우리는 더 이상 그의 자녀나 그의 교회에 속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확실한 것은 이것이 도둑이나 간음이나 다른 악덕보다 더 큰 악이라는 것입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더 이상 없을 때, 나머지 악들이 뒤따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시듯이, 모두가 피를 토해내고 도둑들이 한도 없었기에 “피는 피로 이어집니다.” 7) 그는 분명히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었다고 말합니다. 바로 이것이 모든 것이 여기에 기인하는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간음한 것 이상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하나님을 거부할 때, 바로 이 거부 속에 모든 악이 내포되기 때문입니다.

 

 

(2) 영적인 안식일 준수: 인간의 소욕 행하기를 그치고 하나님이 모든 것 다스리시게 하는 것.

 

이제 이 (성화라는) 말이 여전히 더욱 크게 선포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내가 말했듯이, 하나님은 그가 우리를 거룩하게 하실 때 우리를 다른 백성에게서 분리시킵니다. 그가 우리 다리를 질질 끄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그에게 결합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안식일이 의미하는 성화이며, 성경은 이 육체 죽이기를, 그리고 우리의 무질서한 욕망이 깨어져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는 것을 성화라고 부릅니다. 그가 우리를 그의 성령으로 개혁하고 우리로 그의 뜻 외에 다른 것을 원하지 않게 하기 때문에, 그가 우리 안에서 행하는 성화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요컨대 우리는 이 안식의 거룩케 함이 두 가지 것에 있음을 봅니다. 먼저는 우리의 악한 감정이 더 이상 지배하지 못하는 것이요, 다음으로는 우리가 소원하는 대신, 이제 그가 그의 성령이 우리 안에서 소원하고 우리가 마땅히 가야 할 곳으로 우리를 인도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안식일의 진리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너는 안식일에 무슨 일이든지 행하지 말라” 8) 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그래요! 성전에 나오는 것과 율법을 읽는 것도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일을 금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일을 금하십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날은 희생제사와 기도를 드리기 위해, 그리고 서로를 세우도록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베푸신 축복을 묵상하기 위해 명령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것들은 안식일의 거룩케 함을 방해하지 않는 하나님의 일들입니다.

 

사도는 “영적 안식이란 사람이 자신의 일을 삼가는 것이다” 9) 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일을 계속하셔야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일을 그쳐야 합니다. 우리가 이것이 진정한 안식의 표본임을 본다면, 이것이 과연 작은 위로일까요? 우리에게 이런 완성이 있음을 볼 때, 이것이 우리를 더욱 감동시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확실히 그렇습니다. 이런 이유에서 하나님은 제 7일에 안식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우리에게 이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라고 명하셨는데, 이것은 사람이 자신을 죽일 때, 그리고 사람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일을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것을 방해받지 않도록 행하려고 애쓸 때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불에 대한 물의 저항같은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사람이 자신의 일에 몰두한다면, 하나님은 거부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통치하시기를 바란다면, 인간은 무너져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안식의 준수, 즉 영적 준수가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봅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가 원하는 것을 행하는 자유에 빠지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지배하시도록 그의 편에 서는 것입니다. 이것이 안식일이라 불리는 날이 의미한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어째서 이 영적 안식을 매일 지켜져야 한다고 하지 않으시고 다만 제 7일을 거룩하게 하라고 명하셨을까요? 상징이 진리와 결코 동일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이 날에 우리에게 영원한 안식을 알려주기 원하셨습니다. 이는 마치 그가 “이 날에, 너희는 너희 자신의 일에 전념하지 말고 너희가 마땅한 길로 인도되도록 내가 너희를 성령으로 이끌어야 한다는 것을 알라”고 말씀하신 셈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 안식일을 통해 우리에게 알리고자 하신 내용입니다. 심지어 그는 우리가 이 삶에서 그의 일들을 내버려 두고 우리의 안식을 누리겠다고 해봐야 소용없음을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이런 안식은 완전하게 이뤄지지 않을 것입니다. 10) 비록 말이 달리기에 신속하고 박자에 민감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따금 모종의 반역을 보입니다. 우리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원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겐 모종의 저항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 영적 안식을 그에 합당하게 성취할 수 없음을 압시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어떤 한 날에 안식하라는 이 명령을 명심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3)구약 안식일 제정의 의미: 억지로라도 하나님을 배우며, 그분의 자유케 하심을 맛보게 하신 것.

 

물론 이 상징이, 성 바울이 골로새서와 로마서에서 밝히듯이, 11) 예수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폐기 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에 머물러 있는 것은 무지의 소산입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진리가 있기 때문에 그림자는 멈춘다고 골로새서에는 보다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가 이 그림자를 버려야 하며, 어린아이처럼 되어서는 안되며, 이 상징들이 우리를 신앙의 초보에 붙들어 두게 해서는 안된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안식일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이전처럼 그렇게 엄밀하게(estroictement) 명령되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에게도 안식의 하루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유대인들과는 같지 않습니다. 그 증거로 그들은 제7일인 토요일을 지켰습니다. 이제 우리가 일요일을 안식의 날로 지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얻어준 자유를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들의 무지로 인해 이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게다가 그들은(=유대인) 율법의 의식 때문이 아니라 정치 질서 때문에 휴식할 날을 가져야 했습니다. 사실 안식일이 유대인들에게 명령된 것은 그들에게 육체를 죽이는 법(mortification)을 가르치기 위해서일 뿐만 아니라, 정치 질서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이는 어쨌든 그들이 성전에 와서 하나님의 율법을 듣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사실 우리가 설교하듯이 매일 설교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하는 평일에 나오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또한 말을 듣지 않는 자들을 억지로 참석케 하기 위해, 모두가 마땅히 성전에 모일 정해진 날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 날을 당나귀의 날(le jour des asnes)이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억지로 하지 않고서는 나오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나아가 인간적 정치 질서가 있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너는 (애굽 땅에서) 종이었고 하나님이 너를 구하셨음을 기억하라” 12) 고 선포하시는 것처럼, 종들이 짐을 벗고 쉬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제 ‘너는 폭군이 되지 말라, 다시 말해 너는 네 신하되는 자들에게 잔인하게 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짐승들을 고려하시며 그들도 휴식하게 하도록 명하셨습니다. 13) 그가 짐승들도 이렇게 배려하셨다면, 하물며 자신의 모양으로 만들어진 사람들은 어떠할지 뻔합니다. 바로 이것이 유대인과 또한 우리에게 이 의식들이 명령된 이유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정치 체제(police)는 지속적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있어야 하는데, 이는 고집쟁이들이(asnes) 억지로라도 성전에 나와 훈계를 받되, 하나님이 그들에게 예속되어 있는 자들을 지나치게 억압하기를 원치 않음을 보면서, 이 날만이 아니라 매일, 그들을 부드럽게 다룰 것을 훈계 받도록 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명령된 목적은 또한 사람들이 방탕할 기회를 갖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휴식하기 위해 일요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매일을 일요일로 삼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다른 날들이 “일하는 날들”로 불려지고 있는데도, 그리고 그들과 그들의 가족을 위해 그럴 필요가 있는데도, 아무 일도 하지 않습니다. 하물며 일요일이 없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3. 안식일 준수를 어긴 유대인들

 

(1) 입법자이신 하나님을 거부함

 

이제 우리와 유대인들을 비교해봄으로써 이것들이 우리에게 속한 것인지를 알도록 합시다. 만일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다고 책망받았다면, 우리에게는 우리 각자가 마음대로 행할 자유가 주어질 때 정죄 당할 훨씬 많은 것들이 있으리라는 것을 주의합시다. 사실 유대인들은 그림자에 불과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의 전 생애에 있어야 할 성결의 날(jour de sanctification)을 더럽힌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를 거절하고 그가 우리를 다스리시는 것을 원치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를 거절하고 그가 우리를 다스리시는 것을 원치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우리 전 생애에 걸쳐 우리 육체의 정욕을(affection) 쉬게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한탄하기를 금하지 않으실 것이 확실하며, 판결이 이미 우리에게 내려져 있음을 주의합시다. 어떻게 하란 말인가요? 각자가 목을 굽혀 하나님께 복종하고, 그가 “들으라!”고 말씀하실 때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에 주의하고, 이 도리, 즉 우리 자신을 부인하는 것에 이르기 전까지는 우리에게 어떤 기독교성(crestiente)도 없음을 압시다. 어쨌든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계명들을 우리의 척도나 판단에 따라 측량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보기에 전혀 중요하지 않은 계명들도 하나님 앞에서는 큰 무게가 나가는 것을 봅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한 것처럼, 그것들을 우리의 생각대로 측량하지 맙시다. 이것은 우리가 습관적으로 해온 것인데, 우리는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명하셨다고 고백하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무언가를 행합니다. 복음에 기록되기를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가장 작은 것을 멸시하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하나님의 교회에서 가장 작은 자로 불리리라” 14) 고 되어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이렇게 행한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결코 소중히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을 멸시했을 때 그가 우리를 멸시하는 것은 매우 타당합니다.

 

 

(2) 거짓되이 하나님을 섬김

 

이제 유대인들은, 그들이 이 계명을 잊어버린 이상, 하나님을 잊어버린 것이 분명합니다. 실제로 우리가 성전에 나올 때 (이 계명에서) 면제된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실수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찬과 세례를 받은 것으로 충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럴 경우 그들은 분명 성찬을 (가룟) 유다처럼 받는 자들이며, 15) 그들에게 성찬이 무슨 유익을 가져다주겠습니까? 조금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또한 설교를 들으러 오는 것 자체가 꼭 중요치 않은 이유입니다. 그렇다고 설교에 나오지 않는 자들이 변명할 수 있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물론 내가 설교 들으러 가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설교 들으러 가는 자들이 어떻게 사는가”라고 합니다. 이런 이유로 그들은 그들의 변명이 유효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설교나 성찬에 참여하지 않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아무것도 아님을 보여주며, 이것은 징표의 멸시가 진리의 멸시를 증거하는 경우입니다. 따라서 선지자는 유대인들을 책망하면서 의식이 아닌 진리를 중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우리는 동일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성례의 사용이 멸시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래, 너희가 세례를 중요시하지 않느냐? 그것은 너희가 내 아들의 피를 중요시하지 않는다는 징표이다. 너희가 성찬을 중요시하지 않느냐? 그것은 너희가 너희에게 베풀어진 구원을 전혀 존중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안식일을 더럽혔을 뿐만 아니라 또한 성례를 존중하지 않았다고 책망 받지 않도록 주의합시다. 하나님께서 필요로 하시는 한, 이곳에 보다 큰 회중이 모이는 것을 그가 기뻐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세례를 베푸는 동안, 어떤 이들은 왔다 갔다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사업이야기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징표를 전혀 존중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징표의 진리를 믿지 않는다고 증거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구원을 전혀 존중하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어떤 이들은 그들의 모독행위나 방탕을 고치지 않은 채 성찬에 나아옵니다. 이렇게 그들이 징표를 멸시할 때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이신 진리를 전혀 존중하지 않음을 드러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성례를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중요시하지 않음으로 인해 책망을 받을 것입니다.

 

 

 

4. 모든 문에서 선포된 말씀 - 변명치 못하게 하심

 

나아가, 선지자가 모두에게 말해야 할 것을 증거하기 위해 “모든 문으로” 갔다고 기록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몰랐다고 핑계대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종이 울리는 것은 설교를 들으러 오는 것을 중요시하지 않는 자들을 정죄하기에 충분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려 하시나 우리가 한 발자국도 움직이길 원치 않는다고 충분히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책망 받으리라는 것을 의심해서는 안됩니다. 매일 동일시간과 동일 장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도록 법규가 만들어진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어째서냐고요? 모든 무지의 이유를 제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각자 이 말씀에서 유익을 얻는 법을 배워서 하나님이 우리에 대해 한탄하지 않으시도록 하며, 또한 우리가 순종하지 않음으로 그런 정죄에 합당케 되지 않도록 합시다.

 

이 거룩한 가르침을 따르면서 우리의 잘못을 인정하고 우리의 선하신 하나님의 면전에 부복하여, 그가 우리의 강퍅케 됨을 허용치 않으시고 오히려 우리의 목을 굽혀 그에게 순종하도록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우리는 그가 우리를 책망하지 않을 정도로 행할 수 없기 때문에, 더욱 그의 편이 되어 그에게 순종하는 법을 배웁시다. 그리하여 “당신의 나라가 임하시오며”라고 말하듯이, 우리 모두가 그에게 복종하기를 바라는 이 은총을 우리에게 베풀어달라고 합시다. 아멘

 

 

출처: https://cafe.daum.net/jrcalvin/LPZ2/105

출처: 개혁주의 마을 글쓴이: Jennif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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