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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칭의 (일부 번역)

Sola. 2023. 10. 25. 06:00

 

믿음과 칭의 (일부 번역)

 

Theodore Beza (1519-1605) / 신원균 목사 번역

 

 

THE CHRISTIAN FAITH by THEODORE BEZA, page 15

 

우리는 성령을 믿는다. 그분은 성부와 성자의 본질적인 능력이시다(창1:2). 성부와 성자 안에 거하시며 동시-영원적이시다. 신적 본질에 있어 성부와 성자와 동일하시며,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신다(요14:16,26; 16:7-15). 그분은 성부 성자와 함께 한 하나님이시며(롬8:9-11; 행5:3,4; 고전12:4-8; 3:16) 언제나 성부와 성자와 구별되시는 한 위격이시다(마28:19).

 

이러한 고백은 교회가 마케도니우스와 그와 유사한 다른 이단들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해 의해 바르게 정착된 내용이다. 그분의 무한한 능력과 권능이 태초부터 만물을 창조하시고 보존하심에서 드러난다(창1:2; 시104:29,30). 그러나 본 논문에서 우리는 특별히 그분께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낳으시는 그 효력에 대해 고찰할 것이다. 믿음을 따라, 그분이 어떻게 저들을 하나님의 은혜에로 이끌어 그 은혜의 효력과 능력에 대해 깨닫게 되는지(롬6:12-17; 고전2:11,12; 요일4:13), 즉 그분께서 저들을 세상의 기초가 세워지기 전에 예정되었던 그 목적지와 목표를 향하여 어떻게 이끄시는지를 생각해 볼 것이다(엡1:3-4).

 

 

 

THE CHRISTIAN FAITH by THEODORE BEZA, page 16

 

성령께서는 오직 믿음을 통하여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참여케 하신다.

 

그러므로 성령을 통하여, 성부께서 그분의 택자(擇者)들을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로 주시고 보존하시어, 결국 저들의 구원에 반드시 필요한 모든 은혜를 받도록 하신다. 하지만 가장 먼저, 성령께서 우리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데 적합하도록 준비시키는 것이 필연적이다. 이것이 그분께서 자신의 순전한 선하심과 신적인 자비로써 우리 안에서 창조하시는 것인데, 우리는 그것을 ‘믿음’이라고 부르니(엡1:17; 빌1:29),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어졌을 때, 그분을 영접하는 유일한 수단이요 그릇이다(요3:1-13, 33-36).

 

성령께서 우리 안에 믿음을 창조하시고 보전하시는 수단들

 

우리 안에 이러한 믿음의 수단을 창조하시기 위해, 그리고 그것을 자라게 하시고 더욱 더 강하게 하시기 위해 성령께서는 두 가지의 통상적인(그분의 능력과의 직접적인 교통함이 없이 다만 실행으로써) 수단들을 사용하시니 그 하나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설교요 나머지 하나가 성례이다(마29:19-20; 행6:4; 롬10:17; 약1:18; 벧전1:23-25). 나중에 우리는 이토록 귀중한 믿음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효력과 능력들이 무엇인지를 정의해야 하는 자리로 돌아올 것이다.

 

 

어떻게 믿음이 필연적이며, 믿음이란 무엇인가?

 

이 점에 있어 우리의 본성적 타락으로 인하여 우리는 자신의 구원에 있어서 원수이다(롬8:7; 고전2:14).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발견할 것이라고 단순하게 말씀하셨다면 우리는 그것을 조롱했을 것이며, 세상도 늘 그래왔고 마지막날까지 그러할 것이다(고전1:23-25; 요10:20; 행2:13; 눅23:35). 뿐만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가 영원한 죽음에 대한 교정의 효력을 경험하는 수단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 외에 아무 것도 부가하시지 않았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아무 유익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요3:5-6).

 

이 모든 것에 있어서 우리는 본성의 부패로 인하여 벙어리요(시51:15; 사6:5; 렘1:6), 귀머거리며(시40:6; 요8:47; 마13:13), 소경(요1:5; 3:3; 9:41)일 뿐이다. 믿기를 원하는 것보다 죽은 자가 공중을 나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요12:38,29; 6:44). 그러므로 이 모든 점에 있어서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를 택하신 선하신 아버지께서 그분의 원수들에게 자비를 더해주셔야 하는 것이 필연적이다.

 

 

 

THE CHRISTIAN FAITH by THEODORE BEZA, page 17

 

성부께서 독생자를 주시어 믿음으로 그분을 영접하는 자는 멸망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선포하셨을 때(요3:16), 우리에게서 요구하시는 이 믿음의 수단을 우리 안에 창조하신다. 이제 우리가 언급하고 있는 믿음이란 단지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다라는 것, 그리고 그분의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믿는 것에 있지 않다. 왜냐하면 귀신도 참으로 이것을 믿고 떠들기 때문이다(약2:19). 우리는 믿음을 오직 성령의 은혜와 선하심으로 하나님의 택자(擇者)들의(고전2:6-8) 마음에 새기신 어떤 지식이라고 부른다. 택자(擇者)들의 마음에 새겨진 이 지식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주어진 구원의 약속이 저들에게 소용되며 적용된다.

 

나는 믿음이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는 것뿐만 아니라 그분을 마음에 간직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하는 바이다(롬8:16,39; 히10:22,23; 요일4:13; 5:19 등). 오직 그분만을 참되게 믿고 신뢰하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되며 그것을 더 이상 의심하지 않는다(엡3:12). 이것이 바로 성 버나드(Bernard)가 다음과 같이 성경 전체 내용에 대해 확신 있게 말한 이유이다. “만약 그분을 향해 저질러진 당신의 죄가 그분 외에 다른 어느 누구에 의해서 씻기워질 수 없다는 것을 믿는다면, 그것은 잘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를 더 부가해야 할 것인데, 곧 당신의 죄가 그분으로 말미암아 용서받았음을 믿는 것이다. 그것이 성령께서 ‘너의 죄가 용서받았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우리 마음에 주시는 확증이다.”

 

 

참된 믿음의 대상과 그 능력

 

우리에게 제시된 하나님의 말씀에서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믿음의 대상이시기 때문에, 다음의 두 가지 점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이 여하간 사람의 말만이 있는 곳에는 믿음이 존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기만하는 꿈과 견해만이 있을 따름이다(롬10:2-4; 막16:15,16; 롬1:28; 갈1:8-9). 또 하나는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간직하고 소유하는데, 이는 믿는 조건 하에서 그분이 우리에게 주어졌기 때문이다(요17:20,21; 롬8:9). 이것은 둘 중 하나의 경우를 의미하는데,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다는 것, 또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 존재한다면 믿음으로 그분을 소유하는 자는 모든 것을 소유하는 것이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안에 없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신성 모독인데 이는 그분을 부분적인 구원자로 만들기 때문이다(마1:21). 따라서 곧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함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그분 안에서 얻게 된다(롬5:1)는 점이 남는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말한 내용이다. “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8:1).

 

 

THE CHRISTIAN FAITH by THEODORE BEZA, page 18

 

사도를 따라 “오직 믿음만으로 의롭게 된다”고 말할 때, 그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여기에 이신칭의(以信稱義)에 대한 설명이 있다.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 즉, 그분의 의로움, 말하자면, 모든 완전함(perfection)을 받아들이는 수단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을 따라(롬1: 17; 3:21-27; 4:3; 5:1; 9:30-33; 11:6; 갈 2:16-21; 3:9,10,18; 빌 3:9; 딤후1:9; 딛3:5; 히11:7) 오직 믿음만으로 의롭게 된다고 말할 때, 믿음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의롭게 만드는 미덕이라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우리의 온전하고 완전한 의로움이신 예수 그리스도 대신에 믿음을 두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사도가 말했던 것처럼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며, 우리를 의롭게 하사 우리와 연합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 속에 간직한다고 말한다. 그 때 우리는 그분과 함께 그분이 소유하신 유익들에 참여하게 된다. 우리에게 전가되었고 선물로 주어진 이 유익들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로움을 획득하고 그것을 소유하기에 충분함 그 이상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의 확신을 갖는 것은 오만이나 억측이 전혀 아니다.

 

믿음을 통해 구원의 확신을 갖는 다는 것은 오만이나 억측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그래서 자신의 모든 자랑을 벗어버리는 거룩한 수단이라는 것이 확립된다(롬8:16,38; 엡3:12; 히10:22,23; 요일4:13; 5:19; 롬3:27; 4:20; 고전4:4; 9:26,27). 오직 믿음만이 우리로 하여금 자신에게서 벗어나도록 가르치며, 우리 안에는 완전한 저주를 불러오는 원인 외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정직하게 인정하도록 복종시킨다. 따라서 믿음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이끌어 오직 그분의 의로우심을 통해서만 하나님 앞에서 구원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확신시킨다. 우리가 믿음으로 그분을 영접하게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것, 말하자면 그분의 모든 의로움과 완전함(그분에게는 어떠한 죄도 없으셨으며 뿐만 아니라 그분은 율법의 모든 의를 충족시키셨다)이 마치 우리의 것이었던 것처럼 선물로 주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이점이 바로 성 버나드(Bernard)가 다음과 같이 말한 이유이다. “우리의 양심의 확증은 우리의 영광이다. 그러나 양심의 주인을 속임으로써 마음을 기만하였던 확증은 바리새인들에게 헛된 영광을 주었으니(눅18:11,12), 이 확증은 참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의 영에게 주시는 확증은 참된 것이다”.

 

 

THE CHRISTIAN FAITH by THEODORE BEZA, page 19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에 필요한 모든 것을 발견한다.

 

이점은 상세하게 설명될 필요가 있으니,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2:4; 롬1:16,17; 갈3:11) 란 기록된 말씀처럼, 이는 오직 믿음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보증하기에 충분한 구제책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완전히 의로우시고 선하신 하나님과의 교제로부터 우리 자신을 방해하는 것에는 세 가지가 있다. 각각을 면밀히 검토함에 있어, 우리는 그 구제책이 우리 자신에게서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며, 우리가 연합되고 그분께 접붙임 바 되어 그분으로부터 모든 유익을 얻게 됨을 깨닫게 될 것이다(요17:9-11,20-26).

 

말하자면 이것이 바로 교회가 신자들의 공동체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불리는 이유이니(롬7:2-6; 8:35; 고후11:2; 엡5:31,32),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와 믿음으로 자신들을 그분께 위탁한 성도들 간에 존재하는 연합과 교제의 위대함을 보다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믿음을 통한 이러한 연합과 영적인 결혼의 아름다움으로 말미암아, 그분은 우리의 모든 불행을 없이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그분으로부터 그분의 모든 보화들을 받도록 하셨으니, 곧 그분의 순전하신 선하심과 자비하심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살피고 있는 내용이다.

 

첫 번째 시험-“우리 죄악의 많음(The multitude of our sins)”-의 첫 번째 공격에 대항하여 믿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하는 구제책: 성도들 또는 우리 자신들과 관련된 이 점에 대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확신.

 

그러므로 이제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어떻게 사탄의 모든 시험(temptation)과 우리 양심의 모든 난관들에 대한 확실한 구제책을 발견하게 되는 지를 살펴보자. 우리는 참으로 구원받을 만한 아무런 가치가 없으며 오히려 버림받아 마땅한 자인가를 보여주기 위해, 먼저 사탄은 완전하게 의로우시고 모든 죄악들에 대한 위대한 원수이며 복수자이신 하나님의 본성 앞에 우리의 양심을 세운다.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죄로 물들어 있음은 참되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죄의 대가인 영원한 죽음을 기다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뒤따른다(롬6:23).

 

양심에 대해 내려지는 사탄의 이러한 결론에 대해 인간이 무엇을 핑계할 수 있겠는가? 확실히 어떤 핑계도 소용없다. 왜냐하면 저들이 하나님의 공의를 망각한 채 하나님의 자비를 의지한다면, 자신을 기만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THE CHRISTIAN FAITH by THEODORE BEZA, page 20

 

하나님의 자비가 필요한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그분의 의로우심 또한 전적으로 인정되어야 한다. 이점은 우리가 이미 언급한 바이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죄악을 가리우기 위해 성인들의 공로에 의지하고자 한다면,

 

1. 우리는 저들에게 큰 잘못을 행하는 것이니, 왜냐하면 다윗 스스로도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치 마소서.”(시143:2)라고 하였으며, 다른 곳에서는 자신의 공로가 하나님께 상달될 수 없음을 고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룩한 사람이요 믿는 자들의 조상인 아브라함에 관해 사도 바울이 무엇이라고 말했는가? 그는 말하기를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롬4:2-3)고 하였다.

 

그리고 사도 자신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했는가? 그는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함을 얻지 못하노라”고 말하였다(고전4:4). 성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비에만 전적으로 의지하였던 자들이었는데,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죄를 속상하기 위해 저들의 공로에 의지할 수 있겠는가(빌3:8)?

 

2. 뿐만 아니라, 성자들이 자신들의 거룩한 삶을 통해 천국을 소유하게 되었다면(이는 있을 수 없으니, 저들은 그 반대의 내용을 확증한 자들이다), 저들은 저들의 공로에 대한 보상을 이미 받지 못했다는 것인가? 따라서 이러한 주장으로 우리가 또 한번 하나님 앞에서 저들을 의지할 수 있겠는가?

 

3. 저들이 우리를 위한 일말의 공로를 남겨두었을 만큼 커다란 공로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기록된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치는 내용에 대해 거짓말하는 것이다. 게다가 마치 저들이 그리스도와의 죽으심과는 전혀 상관이 없으며, 따라서 그분을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충분한 것들을 자신들 안에 소유하고 있다고 우리가 말하는 것처럼 되지 않겠는가?

 

4. 만약 저들이 여분의 공로를 가지고 있다면, 어떤 방식으로 그것이 우리의 것이 되는지 아는가?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인가 아니면 우리가 그것을 값을 치르고 샀기 때문인가? 하지만 사도 베드로는 이러한 거짓되고 저주받은 거래를 하고자 했던 마술사 시몬을 책망하고 있다.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가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행8:20).

 

우리가 성자들을 명예롭게 한다고 믿을 때, 실제로는 저들에게 불명예를 돌리는 것이다. 이제 성자들의 행위들이 이 부분에 있어 아무런 공로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한다면, 우리 안에서나 또 다른 살아있는 사람들에게서 사탄의 공격에 대해 우리를 충분하게 보호해 줄 그 무엇을 발견할 수 있겠는가?

 

이 모든 거짓된 상상들을 끊어내기 위해 다음의 것들을 고려하자. 첫째로, 자신이 값을 치루었거나 다른 이가 자신을 대신해 값을 치루었다고 상상하는 핑계로 채권자로부터 자유하다고 자신을 설득하는 자의 생각에 뭔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하신 속상에 동의하지 않을 때, 우리가 늘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방식이다.

 

 

 

THE CHRISTIAN FAITH by THEODORE BEZA, page 21

 

이는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하게 보이는 모든 것을 선한 것으로 발견해야 한다는 것처럼, 그 생각의 기초에 인간의 상상 외에는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대로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에 귀를 기울이자. “사람이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마15:9). 그리고 또 다른 곳에서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사1:12)고 하셨다. 둘째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자비만을 의지한다고 말하면서도 우리가 전체든 또는 부분적으로든 그 값을 치루었다고 상상하게 될 때, 이것이 그분의 자비를 모욕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롬4:4)?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만 의지하지 않고 그것에 다른 무언가를 덧붙이라고 하는 것은 마치 그리스도께서는 예수님, 즉 우리의 구원자가 아니거나 또는 부분적으로만 구원자시라고 말하는 것과 같지 않겠는가(갈2:21)? 넷째로, 다소간 선하다고 여김 받을 수 있는 인간의 행위에 대해 쏟아지는 그분의 진노를 감히 반대하는 것은 하나님에게서 그분의 의로우심(롬3:26)을 깎아 내리는 것이며 결과적으로 그분의 신성을 부인하는 것(이것은 우리에게 있을 수 없다)이 아니겠는가(눅17:10)? 다윗은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치 마소서.”(시143:2)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앞에서 언급했던 사탄의 주장에 대해 다른 방식으로 대답하는 것을 배워보자. ‘사탄아, 너는 하나님께서 완전히 의로우시고 모든 죄악들의 복수자라고 말한다. 나 역시 그렇게 고백한다. 그러나 나는 그분의 의로우심에 대해 네가 간과하였던 또 다른 특징을 부가한다. 그분은 의로우시기 때문에 일단 값이 치러진 것에 대해 만족해하신다는 것이다. 사탄아, 다음으로 너는 내가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고 말한다. 나 역시 그렇게 고백한다.

 

하지만 나는 네가 악의를 가지고 의도적으로 생략했던 것을 더 고백하는 바, 내 자리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담당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내 죄악들이 갚아지고 형벌을 당하셨다는 점이다(롬3:25; 벧전2:24). 이것이 내가 너와 다른 결론에 도달하는 이유이다. 하나님께서는 의로우시고(롬3:26) 두 번 그 죄에 대한 값을 요구하시지 않으시니, 이는 하나님이시오 사람이신(고후5:19)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한하신 순종으로(롬5:19; 빌2:8) 하나님의 무한하신 심판을 만족시키셨기 때문이다(롬8:33). 이로 인해 나의 죄악은 더 이상 나를 파멸로 이끌지 못하며(골2:14), 내가 받을 저주를 위해(갈3:13)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해 그 죄악들이 깨끗이 씻겼기 때문이다. 그분은 의로우신 분이시나 불의한 자들을 위해 죽으셨다(벧전2:24)’

 

그러므로 사탄은 우리의 눈 앞에 고통, 특별히 죽음(롬5:12)이 놓여져 있음을 잘 알고, 이러한 증거들이 하나님께서 결코 우리의 죄악을 용서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너무도 많은 증거들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고통들에 대해 우리는 다음과 같이 대답해야 한다. 비록 모든 고통과 죽음이 죄악으로 인해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지만, 그분께서 우리에게 고통을 주실 때 언제나 우리의 죄악을 고려하시지 않으신다. 우리는 욥과 그 밖의 전체 역사를 통하여 이 점을 확립한다(요9:3; 베던2:19; 3:14; 약1:2). 그러나 앞으로도 언급하겠지만, 그분은 자신의 영광과 우리의 유익이 되도록 하기 위한 여러 가지 다른 목적들을 가지고 계신다.

 

한편,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을 저들의 죄 때문에 고통스럽게 하실 때, 심지어 그분께서 저들을 죽음의 고통가운데 두실 때조차(욥13:15), 그분은 심판자로서 분노하시어 저들에게 저주를 쏟으시는 것이 아니라 그 백성들이 소멸되지 않도록 하기시 위함이거나(고후6:9; 히12:6; 삼하7:14) 다른 자녀들에게 예로 보여주시기 위해(삼하12:13,14) 단련시키시는 아버지로서 그리하시는 것이다.

 

 

 

THE CHRISTIAN FAITH by THEODORE BEZA, page 22

 

첫 번째 유혹의 두 번째 공격-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정당하게 요구하시는 의로움을 결핍한 자들이다”-에 대하여 믿음만이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하는 구제책

 

여기에 우리의 무가치함에 대해 가하는 사탄의 두 번째 공격이 있으니, 곧 죄를 가지고 있지 않거나 죄를 만족시키는 것으로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더욱 필요한 것은 인간이 모든 율법을 충족시켜야 한다는 것인데, 말하자면, 그가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자기 몸을 사랑함같이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신17:26; 갈3:10-12; 마22:37-40). 이러한 의로움을 빌미로 사탄은 우리의 나약한 양심에게 ‘너는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로부터 절대로 벗어날 수 없다’고 의기양양하여 말할 것이다.

 

이러한 사탄의 공격에 대항하여 우리가 오직 그리스도에게서 얻는 유익은 무엇인가? 이러한 물음의 이유는 그리스도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에게서도 발견될 수 없는 완벽한 순종에 대한 물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시 한번 믿음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보화, 즉 그분의 의로우심을 사용하는 방식을 배우도록 하자. 우리는 그분께서 모든 의로움을 충족시키신 분임을 알고 있다(마3;15; 빌2:8; 사53:11). 그분은 성부께 완벽한 순종과 사랑을 드리셨으며 저주를 받으시기까지 그분의 원수들을 완벽하게 사랑하셨으니(롬5:6-10) 이는 사도 바울이 말한 것과 같다. 즉, 저들을 위해 하나님의 저주의 심판을 당하시기까지 하셨다(골1:22; 고후5:210. 그러므로 믿음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그분의 완벽한 의를 옷 입음으로써, 마치 그것이 우리의 것인 것처럼(엡1:7-8), 우리는 하나님께 받아들여 질 수 있으니(요1:12; 롬8:17),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요 공동 상속자가 되었다.

 

이 점에 대해 사탄은 필연적으로 그 입을 다물어야 하니, 우리는 그분을 믿는 모든 자들과 교제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께서 소유하고 계신 모든 유익들을 받을 수 있는 믿음을 소유한 자들이기 때문이다(롬8:33).

 

 

 

THE CHRISTIAN FAITH by THEODORE BEZA, page 23

 

동일한 시험의 세 번째 공격-“본성적인 부패, 또는 원죄, 그것은 우리의 인격 안에 존재하고 있어 여전히 하나님께서 우리를 혐오하시도록 만든다.”

 

사탄은 여전히 우리의 불의에 대해 다음과 같은 시험으로 우리를 공격하고 있다. ‘비록 예수 그리스도의 안에서 너희 죄악에 대한 형벌이 만족되었고, 또한 믿음을 통하여 그분을 의를 입었다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의 본성은 부패한 채로 남아 있으니, 그 안에 여전히 모든 죄악의 뿌리가 있다(롬7:17,18). 그럴 때, 너는 감히 모든 부패의 복수자이시며(시5:5) 마음속을 살피시는(시44:21; 렘17:10) 하나님의 엄위로움 앞에 나설 수 있겠는가?’

 

이 부분에 대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새롭고 즉각적인 구제책을 발견한다. 우리는 그분만을 의지해야 한다. 참으로 우리는 죽을 육신을 취하고 있으며(롬7:24), 그로 인해 우리가 원하는 선을 행할 수 없으며, 여전히 우리 안에 거하는 죄와(롬7:21-23) 성령과 더불어 싸우는 육신을 느낀다(갈5:17). 이것이 우리 자신과 관련하여 육체와 영혼이 여전히 부패한 상태에 머물러 있는 이유이다(고전4:4; 빌3:9). 하지만 우리가 믿음을 소유하고 있는 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 연합되어 있으며(고전6:17), 그 분의 몸과 하나가 되었으며(엡4:16; 골2:19), 그분께 뿌리를 박았으며(골2:7), 그리고 접붙임바 되었다(롬6:5).

 

동정녀 마리아의 태 중에 잉태된 순간부터(마1:20; 눅1:3,5), 그분 안에서 우리의 본성은 아담이 창조되었을 때 보다 더욱 더 충분하게 회복되었으며 성화되었으니(히2:10,11), 이는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반면에(창1:27; 고전15:47),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의 능력으로 잉태되어 육신을 취하셨던 참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 본성의 성화는 믿음을 통하여 우리의 것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중생 후에도 여전히 우리 안에 있는 본성적 부패의 잔재들이 우리의 칭의에 개입될 수 없다. 우리의 무가치함은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하심으로 가리워지고 삼킨바 되었으니, 이는 본성적인 부패가 우리를 더럽히는 것보다 더욱 강한 능력으로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성화시키기 때문이다.

 

 

두 번째 시험-“우리는 과연 믿음을 소유하고 있는가, 아닌가?”-에 대한 구제책:

 

두 번째 시험에서 사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죄인들을 위해 죽지 않으셨으며 따라서 모든 자가 구원받지 못할 것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제 우리의 믿음에 의지하여 다음과 같이 진리로 저에게 대답하도록 하자. ‘오직 신자들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받으심과 만족시키심의 열매를 받을 것이다.’

 

 

 

THE CHRISTIAN FAITH by THEODORE BEZA, page 24

 

이 시험이 우리를 곤란케 하기보다는 우리에게 확신을 주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믿음을 가진 자임을 알기 때문이다(롬8:15; 고전2:12-16; 요일4:13). 이미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 죄악을 없이 하시기 위해 오셨다고 믿는 일반적이고 혼합된 믿음을 갖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오히려 믿음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에게 적용시키고 누리는 것이 필요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다음의 결론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나는 믿음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이것이 내가 멸망 받을 수 없는 이유이며 나의 구원을 확신하는 이유이다’(롬8:1,38,39; 고전2:16; 요일5:19,20).

 

따라서 이미 앞에 있었던 사탄의 첫 번째 시험의 세 가지 공격을 격퇴시켰음을 확언하며, 이 두 번째 시험에 맞서기 위하여 우리가 이러한 믿음을 소유한 자인지 아닌지를 알 필요가 있다. 그 방법은 그 믿음의 효력에서 그 원인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이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견고히 붙잡을 때 그분께서 우리 안에 일으키신 효력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성령께서 우리 영에게 주시는 확증으로 우리로 하여금 확신을 가지고 “아바, 아버지”(롬8:16; 갈4:6)라고 부를 수 있게 하신다는 것이다. 나머지 하나는 우리는 믿음으로써 우리 자신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적용할 때, 그것이 어리석고 헛된 망상이나 상상이 아니라, 실제로 그리고 영적으로(롬6:14; 요일1:6; 2:5; 3:7) 되어지는 것임을 이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영혼이 육체와 본성적으로 연합될 때 그 효력을 드러내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적인 방식으로 우리 안에 거하시게 될 때, 그곳에 그분의 능력이 나타나며 그분의 은혜들을 나타내신다. 성경에서 이것을 ‘중생’ 그리고 ‘성화’라는 용어로 기술하며, 우리가 갖게 되는 질적인 면과 관련하여 새로운 피조물로 만든다(요3:3; 엡4:21-24).

 

말하자면, 이 중생은 새로운 시작이요 새로운 창조인데, 세 부분으로 구분된다. 우리의 인격, 즉 영혼과 육신을 사로잡고 있는 본성적인 부패가 우리 안에 죄와 죽음을 낳는 것과 마찬가지로(롬7:13), 효력 있게 우리 안으로 들어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우리를 사로잡아 세 가지 효력을 낳는다. 죄 즉 성경이 ‘옛 사람’으로 표현한 본성적인 타락을 죽이고, 장사지내어, 새 사람으로 부활시킨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길고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롬6장, 벧전4:1-2 참조).

 

첫째로 부패, 또는 죄를 죽이는 것은 우리 안에서 행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효력이다. 점차적으로 그분은 이러한 저주받을 우리 본성의 부패를 깨뜨리시어 우리 안에서 그 효력, 즉 하나님의 뜻과 상반되는 행위, 내용, 그리고 그 밖의 영향들을 일으킬 수 없도록 약화시키신다. 둘째로 옛사람을 장사지내는 것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효력이다(롬6:4; 골2:12; 3:3-4). 그분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옛사람이 점차적으로 근절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간략히 말하자면, 우리의 몸이 땅에 묻혀 죽음으로 진행되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옛 사람을 장사지내는 것은 죽음으로 가는 과정이요 결과이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매일 우리를 찾아오시는 그리스도의 고난이 커다란 도움이 된다(고후4:16).

 

 

THE CHRISTIAN FAITH by THEODORE BEZA, page 25

 

그분께서는 성령에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반역을 더욱 더 죽이시기 위해 우리가 부지런히 사용해야 하는 영적이고 물질적인 시험을 가지고 오신다(고전9:27; 갈5:17). 결국, 모든 신자들에게 첫 번째 죽음은 이러한 죄의 죽음과 장사지냄의 완성인데, 이는 성령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전쟁을 종결시키기 때문이다(빌3:20,21).

 

마지막으로, 새 사람으로의 부활은 그 질과 기능에 있어 참으로 새로워지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세 번째 효력이다. 부패한 우리의 본성을 죽이심으로써, 그분은 우리에게 새로운 힘을 주시고 우리를 고치신다. 그러므로 성령의 순전한 은혜의 조명을 받으며(엡1:18)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부여받은 새 힘에 의해 다스림을 받는(롬8:14) 우리의 이해와 판단이 어떤 것이 저들에게 어리석은 것이며(고전2:14) 또한 미워해야 할 것인지를(롬8:7) 이해하고 인정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바로 그때 그 의지는 죄악을 미워하고 의로움을 간직할 수 있도록 교정된다(롬6:6). 결국 인간의 모든 기능들이 하나님이 금지하신 것을 피하고 명령하신 모든 것들을 순종하기 시작한다(롬7:22; 빌2:13).

 

바로 이것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효력이다. 우리가 그것들을 경험한다면 그 결론은 절대적으로 확실한 것이니, 곧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자이며, 결국 이미 언급했던 것처럼 영원토록 살아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신 것이다.

 

그러므로 각 신자들은 지속적인 간구로써 성령께서 그분의 백성들에게 주셨던 확증들을 유지하기 위해 위에서 언급한 모든 것들을 주의해야 함이 분명하다. 소명을 따라 지속적으로 선한 행실들을 함으로써 신자들은 받은 중생의 은혜를 또한 발달시켜야 한다(롬12:9-16).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않는다고 하였으니(요일5:18), 즉 그는 자신을 죄에 빠지지 않게 하며 더욱 더 그것에 저항하여 택함과 부르심을 더욱 굳게 한다(벧후1:10).

 

이러한 중생을 알기 때문에, 그 열매가 맺히는 것은 필연적이다. 따라서 이미 내가 언급했던 것처럼 죄의 속박, 즉 본성적 타락으로부터 자유한 자는 자신 안에 거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에 감사하여 선한 열매를 맺기 시작하는데, 그것을 우리는 “선행”이라고 부른다. 바로 이것이 빛이 없는 태양이나 열기가 없는 불보다 선행이 없는 믿음은 더욱 더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하는 훌륭한 이유이다(요일2:9,10; 약2:14-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