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룡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이상웅 교수 / 대신대학교 조직신학 (2010.4)
개혁신학회 학술대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재조명’
1. 들어가는 말
1643년에 회집된 웨스트민스터회의에서 만들어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1647년 2월 상원에서 통과되고 같은 해 8월 27일에 스코틀랜드 교회의 신앙고백서로 먼저 채택되었고, 1648년 6월 28일에 영국 하원에서도 통과되었다. 1) 왕정복고로 인하여 본 신앙고백이 영국교회의 신앙고백서로 채택되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었지만, 미국 장로교회에서 표준문서로 받아들여졌고, 1729년에 채택된 법안에 의해서 목회자들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기본적이며 필수적인 신조 가운데 하나로서 건전한 말씀과 기독교적 교리의 체계의 좋은 형태로 인정한다.”라고 서명하게 하였다. 2)
우리나라 장로교회도 예외가 아니었다. 1907년 9월 17일 평양에서 만들어진 장로교독노회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내용을 축소한 12신조와 소요리 문답서를 채택하여 장로교의 근본적인 신앙을 수용”한 이래로, 3) 현재까지 목사, 장로, 집사 장립과 강도사 인허 및 서리집사 임명 시에 “본 장로회 신조와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 및 대소요리문답은 신구약 성경의 교훈한 도리를 총괄한 것으로 알고 성실한 마음으로 받아 믿고 따르겠습니까?”라는 질문에 ‘예’라고 대답하며 서약을 하게 한다. 4)
그러나 문제는 과연 장로교회들 가운데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및 대소요리 문답을 제대로 읽거나 가르치는 교회가 얼마나 될까하는 것이다. 평신도들 뿐 아니라 목사들 가운데도 표준문서들을 전혀 읽지 않는 이들이 있을 뿐 아니라 그 표준성에 대해서 공공연히 이의를 제기하는 이들이 있을 정도이다. 5) “칼빈파 교의를 가장 명백하고 강하게 또 논리적으로 표명”한 신앙고백서라고 불리며, “성경을 밝히 해석한 책으로 인정”하여 장로교회와 신학교에서 마땅히 가르쳐야 할 것으로 공인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대한 무지와 홀대는 결국 장로교 내에 많은 신학적인 혼란상을 가지고 온 원인중 하나라고 사료된다. 6)
이와 같은 시점에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재조명해 보고자 하는 신학적인 노력은 참으로 중차대하고 시기적절한 것이라고 판단된다. 본인은 한국 장로교 신학의 골격을 세운 지도적 신학자인 박형룡(1897~1978) 박사의 저술들 속에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가 어떻게 평가되며 사용되고 있는지를 본 논문에서 규명해 보고자 한다. 7) 박형룡의 신학은 최근까지만 해도 반대진영에 의해서 맹목적인 비판의 대상이 되어 왔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그의 신학적인 영향 하에 있는 교단 내에서도 비판의 대상이 되어왔다. 8) 이런 관점에서 박형룡의 신학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관계에 대해서도 악평을 받은 것은 의외의 일이 아닐 것이다. 9) 본인은 이 논문을 통하여 박형룡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어떻게 평가했는지, 얼마만큼 중요하게 생각했는지를 그의 저술들 분석을 통해서 확인해 보려고 한다.
박형룡은 어떤 면에서는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에 대한 비판 가능성을 열어놓는 듯한데 과연 실제로 그의 저술들 속에서는 어떻게 드러나고 있을까에 대해서도 살펴보려고 한다. 우리는 먼저 박형룡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전수받게 된 역사적인 배경을 살펴 본 후에, 초기 저술들 속에 나타나는 논의들을 확인해 볼 것이며, 그러고 나서 그의 주저라고 할 수 있는『교의신학』(전7권 1964~1973) 전권 속에서 언급되고 사용되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관련된 내용들을 논구해 보려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박형룡이 후기에 쓴 글들 가운데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하고 어떻게 활용하고자 하는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2. 역사적인 배경
1) 초기 선교사들이 전해준 신학전통
박형룡은 소열도(Stanley Soltau) 선교사를 비롯한 선교사들이 가르치고 있던 선천 신성중학교(1913~1916)와 미국 선교사들이 세운 평양의 숭실전문을 졸업하였다(1916~1920). 박형룡이 숭실에 재학 중일 때의 교장은 마포삼열 선교사였다. 留學을 떠나기 전의 박형룡의 초기 생애는 평양 대부흥의 여파와 여러 미국 선교사들의 영향력 하에 자라고 형성되어졌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마포삼열 선교사를 비롯하여 한국에 와서 선교했던 초기 장로교 선교사들은 교리적으로는 아주 보수적인 구파(old school)에 속했으면서도 10) 19세기말 미국 복음주의적 부흥운동의 영향을 받은 이들이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11) 박형룡의 생애와 저작들을 살펴보면 우리는 초기 선교사들이 전해준 여러 가지 영향들을 확인할 수 있는데, 성경의 영감과 절대무오에 대한 확신, 청교도적인 삶, 건전한 부흥운동과 성령 체험 인정, 역사적 전천년설 등을 지적할 수 있다. 12)
그리고 박형룡이 속했던 한국장로교회와 평양신학교는 초기부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 문답을 표준문서로 받아들였다. 박형룡에 의하면 1907년에 평양에서 새로 조직된 총노회에서 임시 채용되고, 1908년에 서울에서 열렸던 총노회에서 완전히 채용한 신경서문에는 “웨스트민스터 신경과 성경 요리 문답 대소 책자는 성경을 명해(明解)한 책인즉 우리교회와 신학교에서 의당히 교수할 것으로 알며 그 중에 성경 요리 문답 소책을 더욱 교회 문답으로 삼느리라.”고 기록하고 있다. 13) 박형룡의 은사이기도 했던 마포삼열 선교사는 1937년에 간행하기 시작한 『표준 성경주석』 시리즈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그리고 본주석의 집필자들은 성경전부가 만서지중에 최대서요, 신의 참된 말씀임을 믿을 뿐 아니라, 또한 성경에 교시된 진리의 체계가 장로교회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요리문답에 선히 개괄되어 있다고 믿는다. 웨스트민스터 교리적표준은 한국 장로교회의 신조를 구성하는 바, 본주석의 집필자들이 이 신조를 믿음은 이것이 신의 말씀에 교훈되었음을 믿는 때문이다. 집필자들은 성경이 이 신조의 제개조를 완전히 지지한다고 믿는다. 성경에는 어떤 일부분을 단독으로 취출하여 고찰할 때에 이 교리체계의 어떤 부분들에 모순 하는 듯이 보이는 구절들이 있으나, 그런 구절들은 항상 해석에 의하여 성경의 다른 교훈과 조화되며 우리 웨스트민스터 교리표준을 지원하는 것임이 발견된다.” 14)
2) 구 프린스턴 신학 전통
박형룡은 1923년 9월에 프린스턴 신학교에 입학하여 1926년 5월까지 만 3년 동안에 신학사와 신학석사(Th. B., Th. M.) 과정을 모두 마치게 된다. 15) 그는 프린스턴의 신학사 과정이 요구하는 신학 전 분야의 수업들을 들었을 뿐 만 아니라, 학칙에 의거하여 신학 석사 과정을 동시에 이수를 하였다. 그는 존 그래스햄 메이천(1881~1937)의 신약 수업과 게할더스 보스(1862~1949) 교수의 성경신학 수업도 들었다. 16) 조직신학은 벤자민 B. 워필드(1851~1921)의 뒤를 이은 캐스퍼 위스타 하지 2세(1870~1937)에게서 배우고, 자신의 전공 분야로 택한 변증학에서는 윌리엄 B. 그린(William B. Greene Jr., 1854~1928)교수의 수업을 들었다. 17) 그러나 박형룡은 특히 근대주의 내지는 자유주의에 대항하여 구 프린스턴의 정통주의 기독교를 변호하기에 맹활약을 하고 있던 메이천 교수에게 많은 영향을 받는다. 박형룡이 프린스턴으로 간 첫 해(1923년)는 메이천의 유명한 저서『기독교와 자유주의』(Christianity and Liberalism)가 처음으로 간행되던 해이기도 하였다.
박형룡의 신학 형성 과정과 신학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소위 ‘구 프린스턴 신학 전통’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구 프린스턴 신학 전통이란 설립 교수인 아치발드 알렉산더(Archibald Alexander, 1772~1851)로부터 시작하여 찰스 하지(Charles Hodge, 1797~1878), A. A. 하지(A. A. Hodge, 1823~86), 그리고 B. B. 워필드(B. B. Warfield, 1851~1921) 등이 계승하고 발전시킨 장로교 신학 전통을 가리킨다. 김길성에 의하면 구 프린스턴 신학 전통은 “스코틀랜드의 상식철학의 도움을 받아, 성경의 영감과 무오, 그리고 그 권위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동시에 장로교 표준문서인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와 대소요리문답에 구현된 성경의 근본 교리들에 대한 입장을 일관되게 변호”했다. 18) 그리고 미국의 교회사가인 마크 놀은 구 프린스턴 전통의 특징으로서 “성경에 대한 헌신, 종교적 체험에 대한 관심, 미국적 경험에 대한 민감성, 장로교 신앙고백의 완전 수용, 17세기 개혁신학적 특징들, 그리고 스코틀랜드 상실철학” 등을 꼽고 있다. 19)
이와 같은 구 프린스턴의 신학적인 특징들은 박형룡이 이미 한국에 있을 때에 장로교 선교사들을 통해서 전수받았던 것들이었다. 20) 박형룡은 남침례교신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그 신학에 있어서는 구 프린스턴적이었다. 21) 박형룡이 박사과정을 이수하던 시기의 남침례교 신학교 학장은 E. Y. 멀린스(E. Y. Mullins, 1860~1928)였다. 22) 그는 신학적인 신앙 고백을 신뢰하지 않았으며, ‘신조가 아닌 성경, 대의가 아닌 그리스도’라는 구호 아래 결속을 추구했다. 이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기초한 남침례교의 ‘원리 초록’(Abstract of Principles)을 도외시하고, 개인주의를 조장하여 결국 남침례교의 일체성을 훼손하고 말았다. 23) 박형룡은 이와 같은 멀린스의 강의를 들었고, 감사하는 마음을 박사논문에서 표하기는 했지만, 그의 신학은 구 프린스턴의 신학에서 이탈하지 아니하였다. 24)
1931년에 제출한 그의 학위논문에서 박형룡은 두 차례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으로부터 인용을 하고 있다. 첫째는 성경의 신적인 저작성과 무오성에 대해서 말하는 중에 성경은 기독교 신앙과 실천의 ‘유일한 법칙’(the only rule)이라고 주장하는 대목이다. 25) 두 번째는 성경에 대해 반대하는 반기독교적인 자연과학적 추론들에 대해서 논박하는 논문의 제2장 말미에서 인용한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3문의 경우이다: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신앙과 순종의 유일한 법칙이다.” 26)
3. 초기 저술들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박형룡의 초기 저술들이라고 함은 그가 귀국하여 평양신학교에서 변증학을 가르치기 시작한 시점부터 그의 주저인『교의신학』이 본격적으로 간행되기 시작한 1964년 이전에 간행된 저술들을 말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 그의 글들은 대부분『신학지남』에 발표된 논문들이다.
1) 평양신학교 재직시절
앞서 박형룡의 학위논문(1931년 완성)에 나타나는 웨스트민스터 대소요리문답을 살펴 보았다. 두 경우 다 성경의 권위에 대한 내용이었다. 박형룡은 1933년에 내촌 감삼의 무교회주의에 대해서 반박하는 논문인 “유형교회의 합리성”을 발표했다. 27) 그는 “유형무형을 구별하여 유형교회의 지위에 대한 의문을 용납할 여지가 없이 하였다”라고 하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25장 1, 2항을 인용하였다. 28) 그리고 박형룡은 1934년에 “칼빈의 예정론”이라는 논문을 『신학지남』에 기고했는데, “칼빈주의 예정론의 간명한 진술은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에서 발견된다”라고 하면서 제7문답을 인용했다. 29)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3장이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에 대해서 더 원만하게 진술한다고 하면서 8개 항목을 요약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30)
박형룡은 1935년 11월에 이르러 한글로 된 최초의 저작인 『(基督敎近代)神學難題選評: 學派篇』을 평양에서 출간하였다. 총 847면에 달하는 이 저서는 총 18장으로 구성이 되어 있다. 마포삼열 선교사는 “금일에 허다한 이단이 교수되며 교회 안에라도 僞敎理와 반기독이론을 가르치는 인물들”이 있는 때에, “박형룡 박사는 본서로써 교회 일반과 특별히 목사, 선생 제위에게 위대한 봉사를 하시는 것이다” 고 추천의 말을 썼다. 31) 박형룡은 자유주의신학을 개관하고 비판하는 중에 자유주의자들의 신조 비평론을 다루었다. 박형룡에 의하면 자유주의자들은 “웨스트민스터 신학자들의 신조를 배격하면서 성경의 교리를 무시함이 아니요, 16, 17세기의 신학에 반항하는 것뿐이니 무관하지 않느냐”고 말한다라고 소개한 후에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반박을 했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의 신조는 성경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고 어느 시대나 지방의 사상을 반영하는 무엇이 될 수 없는 것을 역설해 마지않는다. 만일 어느 신조에 비성경적 사상이 섞여 있다면 그것을 단연 배제하여 순성경화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신조를 공격함은 후대인의 신학에 반항함이 아니요, 바로 성경 진리에 반항하는 것이다.” 32)
박형룡은 1938년에 이르러 “신경소고”라는 비중 있는 논문들을 네 차례에 걸쳐서 『신학지남』에 발표하였다. 33) 그는 신경 혹은 신앙고백이란 동의어로서 “공중을 위하여 제정된 신앙의 고백”이라고 정의내리고, “신경은 반드시 이것을 신종하는 교회 지도 단체의 제정 혹은 승인을 받아 교권을 가진 것임을 요(要)한다”라고 부언한다. 34) 박형룡은 고대의 신경으로부터 시작해서 종교개혁 시기의 신경들에 대해서 간략하게 소개를 하고, 웨스트민스터 회의가 산출한 표준문서들에 대해서 역사적인 배경과 그 의의를 설명했다. 35) 웨스트민스터 회의의 진행 과정에 대해서 설명을 길게 해 주고 나서 박형룡은 “웨스트민스터 회의의 사업은 그 출생지에서 실패하였다”라고 일침을 가하고 “그러나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는 소국(=즉 스코틀랜드를 말한다:논자)에서만 아니라 전 세계 장로교회의 헌법으로 신봉되고 있다.”라고 소개했다. 36) 그는 소요리문답에 대해서는 “청교도 경험과 신학 사상의 최고 성숙한 산물로 간주된다”라고 평가하였고, 신앙고백서에 대해서는 “최명확, 최강, 최논리적, 최정밀한 신앙고백, 39개조에 비하면 엄격하고 철학적인 형의 신경적 진술이다.”라고 논평하였다. 37)
한편 1941년 3월에 간행한『믿음을 지키라』는 설교집에 실린 “정통교리와 이단비판”이라는 설교 중에 박형룡은 “기독교 모든 교파 중에 가장 정통적인 교파의 신조 교리가 어느 것이냐고 물으면 장로교 신조 교리라고 답할 것”이며, 그 이유는 “이것이 가장 충분하게 성경을 해석하고 또 거기에 부합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38) 그리고 이어서 그는 상당히 개인적인 형태로 장로교 표준문서들과 성경의 일치성에 대해서 고백하듯이 예찬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나는 장로교인이요 장로교 신조 교리를 가장 정통적이라고 믿는 사람이지만 다른 여러 교파나 학파를 비평하여 논함에는 장로교 헌법을 표준할 것이 아니라 직접 성경에 호소하여 참과 거짓 그리고 우열을 판단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장로교 신조 교리가 성경에 표함된 것인 이상 성경에 호소함이 즉 장로교 신조 교리를 제외하는 것은 아닙니다. 보십시오. 장로교 12신조와 요리 107문답을 볼 때 그 중에 성경에서 가르치지 않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39)
2) 고신, 장신, 그리고 총신 재직시절
만주에서 신학교수를 하고 있던 박형룡은 고려파의 요청으로 귀국하여 1947년 10월 14일에 고려신학교 교장으로 취임하게 되는데, 그는 “사도적 신학 소론”이라는 제목으로 취임 강연을 했다. 40) 그가 말하는 사도적 신학이란 “바울주의 사도 신학, 또는 칼빈주의 정통신학”을 의미했다. 41) 그리고 그러한 칼빈주의 신학을 “가장 순수하고 완전하게 표현한 표준문서”는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이다. 42) 그에 의하면 한국장로교회는 창립시부터 이 표준문서를 “신앙과 예배의 모범으로 삼고 칼빈주의 정통 신학을 배운 선교사와 목사의 지도아래 신앙생활로 살아왔다.”고 한다. 43) 이제 새로이 교장으로 취임하는 박형룡은 자신이 책임지게 된 신학교 교육의 방침은 “1938년까지의 재 평양 조선 예수교 장로회 신학교의 교육 방침을 본받고자 한다. 우리 신학교의 전학과의 근본적 기초는 성경전서와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의 등본(謄本)인 조선 예수교 장로회 헌법이다”라고 밝힌다.
아직도 전란 중이던 1953년 1월 『신학정론』에 기고한 “성령과 성경”이라는 논문의 첫 항목에서 박형룡은 “성령은 성경의 저작자이시다.”는 점을 여러 가지로 논증하는 중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1장에 있는 바 “성경은 전부 신앙과 생활의 법칙이 되게 하려고 하나님의 영감에 의하여서 주어진 것이라”는 구절을 인조하고 있다. 44) 1955년에 쓴 “신학과 교의와 신조”라는 논문 속에서 박형룡은 신학의 내용을 공급하는 세 요인이 있다고 하면서 성경, 신도게요, 그리스도인 의식 등을 거론했다. 그에 의하면 신학의 유일 원천은 성경이며, 신조 혹은 신도게요를 표준삼고 신학연구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45) 신학자들은 또한 교회의 교의 신경에 입각하여 신학을 가르쳐야 하는데, 이는 “그의 사상의 자유를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는 이미 그 교회의 일원으로서 그 교회의 교의와 신경을 수납한 자이기 때문이다.”라고 지적한다. 46) 특히 ‘청교도 개혁신학자들의 회의’인 웨스트민스터회의에서 만들어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칼빈의 교의를 가장 명백하게 강하게 또 논리적으로 표명하였다.”라고 논평하였고, 47)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은 “성경을 밝히 해석한 책으로 인정한 것인즉 우리 교회와 신학교에서 마땅히 가르칠 것”으로 규정하는 12신조 서언을 인조한다. 48)
1963년 12월『신학지남』에 기고한 “성경 영감의 교회적 교리”속에서 박형룡은 성경 영감의 교리가 최근에 만들어진 교리라고 주장하는 견해들에 대해 반론을 제기한다. C. A. 브릭스는 성경의 문자적 영감과 무오(inerrancy)의 이론은 종교개혁자들이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의해서 주장되지 않았다라고 주장했는데, 이에 대해서 박형룡은 B. B. 워필드의 글을 힘입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inerrant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영적 진리의 확실성을 밝히는 무오(infallible)’란 용어를 사용했다라고 반박했다. 49)
4.『교의신학』속에 드러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평가
변증학자였던 박형룡이 조직신학을 가르치게 된 것은 1942년 9월 만주 봉천 신학원에서 부터이다. 50) 박형룡은 1947년 고신측의 초대로 귀국하기까지 5년간 봉천신학원(후에는 동북신학원이라고 개명됨)에서 조직신학 교수로 시무하였다. 51) 그리고 그는 1947년에 귀국하여 부산 고려신학교를 거쳐서 1948년에 설립된 장로회 신학교 교수로 취임한 이래 1972년에 총신 교수직에서 은퇴하기까지 약 30년간을 교의신학 7론을 혼자서 다 가르치게 된다. 52) 박형룡은 봉천신학원에 교의신학 강의를 시작하면서 벌코프의 조직신학을 번역하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학서적들(하지 부자, 워필드, A. H. 스트롱, 제임스 오르 등)에서 필요한 자료를 보충하여 강의안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귀국한 이후에도 그는 꾸준히 강의안을 증보해 나갔고 처음에는 등사본으로 만들어 사용했고, 1964~1973년에 이르러는 7권의『교의신학』전집을 출간하게 되었다. 53)
박형룡은『교의신학』서문 속에서 자신의 저술들이 어떤 취지를 가지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밝혔다.
“이 책은 다른 사람들의 화원에서 꺽어 모은 꽃다발에 지나지 못한다. 이것은 물론 필자의 아는 것이 적은 탓이지만 또한 본의에 맞는 일이기도 하다. 필자의 본의는 칼빈주의 개혁파 정통 신학을 그대로 받아서 전달하는 데 있고, 감히 무엇을 창작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옛 사람의 술이부작(述而不作)의 태도라 할 것이다. 팔십 년 전 이 땅에 서양 선교사들이 와서 전하여 준 그대로의 바른 신학을 새 세대에게 전달하는 것이 이 필자의 염원이기 때문이다.” 54)
박형룡이 공언하는 신학 정체성과 술이부작의 자세 때문에 그의 주저는 많은 비평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종성은 “가령 그 내용이 너무나 진부하고, 벌코프~핫지~보스~워필드~메이첸 등의 사상을 충분히 소화하지 못한 대로 건거로 삼거나, 어떤 문제 이해에 있어서 철두철미 수구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라고 비평했고, 55) 최덕성은 한걸음 더 나아가서 “한국교회는 이제 박형룡의 작품의 표절성에 대한 논의가 가능할 만큼 성장했다”라고 혹평했다. 56)
그러나 박형룡 신학의 긍정적인 기여에 대해서 높이 평가하는 학자들도 있다. 한숭홍은 박형룡이 “보수신학이란 화원에서 벌코프, 핫지, 워필드, 답프네, 쉐드, 스미스, 카이퍼, 바빙크, 보스라는 꽃들을 비롯하여 스트롱, 메이첸이라는 꽃도 꺾어 그 자신의 ‘박형룡 신학’이라는 꽃다발을 엮은 것이다.”라고 평가하였고, 57) 서철원은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박형룡 박사는 벌코프의 조직신학을 번역하여 교과서로 쓰면서 꾸준한 연구를 계속하여, 신학 각 부분에 새로운 추가를 하여 자기대로의 체계를 세웠다. 기본 틀은 벌코프의 조직신학이어도, 자기 연구들로 채우므로 자기 신학 체계 라고 할 수 있게 되었다. …어떤 형태로든지 우리는 박형룡 박사의 손에서 처음으로 우리의 조직신학을 갖게 되었다. …박형룡 박사는 완성된 하나의 조직 신학 체계를 세움으로 신학자로 호칭되기에 족하다. 58)
본 논문은 박형룡의 교의신학을 신학적으로 평가하는 것을 본무로 삼지 않고 있기 때문에 이정도로 멈추려고 한다. 다만 이제부터 그의 교의신학 속에 드러나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대한 평가들을 논구해 보려고 한다.
1) 교의신학 서론(1964년)
먼저『교의신학~서론』에 드러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대한 언급을 논구해 보겠다. 박형룡은 교의신학의 원천을 다루면서, 교회의 신경 혹은 신도게요의 중요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논평을 하고 있다.
“교회의 신경 혹 신도게요들은 성경으로부터 계시 진리들을 수정하고 해석하는 신학적 활동에 주요한 지로자가 될 것이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계시된 절대적 진리에 관한 교회의 증언을 포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성원인 신학자들은 신경의 승인으로써 교회의 고백한대로의 하나님 말씀의 진리에 귀의한 것이니 그들이 교회원으로 있는 동안 그 신경들을 준수하며 신학의 연구에 그것들의 지로를 받음은 당연하다.” 59)
비록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대한 언급이 없다라고 하더라도 이 논평은 박형룡이 속한 장로교회의 표준문서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도 적용된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박형룡은 신앙고백서의 중요성에 대해서 인정을 하면서도 신학의 유일 원천인 성경에 비할 때에 한계가 있음을 지적하는 일도 잊지 않는다:
“그러나 신경들과 신도게요들이 성경과 같은 신학 원천으로는 인정되지 못할 것이다. 성경은 독특한 원천이니 신경들이 성경의 광명에 비치어 해석될 것이요. 성경이 신경들의 광명에 비치어 해석될 것 아니다.” 60)
박형룡의『교의신학~서론』에는 H. 바빙크와 L. 벌코프의 저서에서처럼 교의학의 역사를 다루는 장이 있다. 그는 잉글랜드에 대해서 “신조 작성기에 있어서는 칼빈주의 청교도 운동의 무대였고 장로교회의 교리적 기초인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의 제정지였다.”라고 소개하고 있고, 61) 구 프린스턴 신학전통에 대해서 소개하는 중에 “특히 프린스톤 학파는 똘트 대회와 웨스트민스터회의의 역사적 칼빈주의를 모든 경쟁하는 사상 전형들에 대항하여 견실하게 변호하였다”라고 논평하였다. 62)
박형룡은『교의신학~서론』제2편에서 교의신학의 인식론이라는 제하에서 교의학의 내적, 외적 원리들에 대해서 다룬다. 특히 그는 성경론에 대한 해석과 변호를 길게 다루면서 구 프린스턴 신학자들을 많이 원용하고 있고,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에서 여러 차례 원용하여 자기 입장을 지지하고 있다. 그는 아포크리파(=외경)의 비정경성을 밝히고 있는 신앙고백서 1장 3절을 인용하는가 하면, 63)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신앙의 법칙은 오직 “신구약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점을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도 동일하게 가르치고 있음을 논급한다. 64) 성경이 신앙의 법칙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신구약 성경 66권이 다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때문이라는 점을 신앙고백서 1장 2절을 인용하여 설명하였다. 65)
박형룡은 “교회의 신경들에 적립”되어 있는 “교회의 과거 여러 시대 동안에 얻은 대통찰을 무시”하는 사람들은 성경의 명백성 교리를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비평하기도 한다. 66) 박형룡은 성경의 무오성의 교리를 다루면서 신앙고백서에 대해 제기된 반론들을 소개하고 논박을 한다. 우선 성경이 신앙과 행위의 사건들에 국한된다는 소시너스파의 의견과 신앙고백서 1장 2절(“이 모든 것들은 신앙과 생활의 법칙이 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영감으로 말미암아 주어졌다”)의 내용이 유사하다고 주장하는 점에 대해서 “신도게요서에 주어진 것은 영감의 정의로서가 아니라 도리어 성경의 정의의 부분으로서이다.”라고 논박한다. 67)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성경의 축자 영감과 무오를 가르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브릭스의 반론에 대해서 다루면서 박형룡은 워필드의 반박글을 전적으로 수용한다. 그는 워필드가 “그 표준 문서의 입장이 축자무오라는 것을 명백히 하였다.”고 말해준다. 68)
2) 교의신학 신론(1967년)
박형룡의 방대한 신론은 L. 벌코프의 저서를 따라 하나님의 실유(존재)와 하나님의 사역 두 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신론 속에서도 박형룡은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을 많이 원용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69) 성자의 영원발생을 설명하는 초두에 박형룡은 “성자는 성부로부터 영원히 나시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영원히 발출하신다.”라고 하는 신앙고백서 2장 3절을 원용하여 논의를 시작한다. 70) 박형룡은 어려운 신학적 주제일수록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이 내린 정의들을 원용하여 논증하기를 좋아했다. 71) 그는 작정에 대한 정의를 내리기 위해서 소요리문답 7문과 신앙고백서 3장 1, 2절을 인용했다. 72) 그리고 선택에 대해서 다루면서도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은 선택에 대해서 명확히 진술한다”라고 하면서 소요리문답 20번과 신앙고백서 3장을 인용했다. 73)
박형룡은 선택의 불가항력적임을 설명하기 위해서 효과적 은혜에 대해서 말하는 신앙고백서 10장 1절을 인용한다:
“전능하신 힘으로 저희(피택자)를 세워 모든 착한 일을 하시며 확실히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가게까지 하시나니라. 그러나 이 사람들도 은혜를 힘입어 감심으로 자유롭게 나오나니라.” 74)
그는 또한 유기에 대해서 다루는 중에 “개혁파 신경들은 선택을 말할뿐 아니라, 또한 유기를 말하며 이것을 예정의 근본적인 부분으로 말한다”라고 하면서 신앙고백서 3장 7절을 특별히 인용한다. 75) 박형룡은 유기 자체가 어려운 교리이기 때문에 배척을 당하기도 하고, 혹은 신앙고백서가 제시하는 유기의 두 요소인 간과와 정죄 중에 어떤 개혁파 신학자들은 두번째 요소를 삭제하려고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도르트 교헌이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두 가지 요소를 다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입장도 동일하다고 밝힌다. 76)
또한 전택설과 후택설에 대한 논의를 마무리 지으면서 그는 웨스트민스터 회의를 주재했던 트윗시는 “열렬한 전택설자” 였으나 회의의 신조들은 “후택설적 견해를 함의하나 전택설적 이론을 채택한 자들에게 노엽게 하는 것을 피하도록 작성되었다”라고 하는 찰스 하지의 논평을 인용한다. 77)
박형룡은 섭리론을 개진하는 중에 신도게요들이 “하나님의 이의할 수 없는 실재성을 가장 강조적으로 또는 적극적으로 말하여” 왔으며, 또한 “신도게요서들은 역사에나 우리의 개인생활에나 놀랄만한 일 혹은 불의의 사변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역설한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비록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26, 28문을 언급하고 있지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5장에 개진된 섭리론을 염두에 두었을 것으로 보인다. 78)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섭리가 죄를 허용하는 작정의 실행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을 입증하기 위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5장 4절을 인용하였다. 79)
3) 교의신학~인죄론(1968)
박형룡의 인간론은 L. 벌코프나 다른 조직신학자들의 저서들과 달리 인죄론(人罪論)이라는 독특한 제목을 가지고 있다. 그는 자신의 인죄론을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전개한다: 원인(原人), 죄인, 언약인. 하나님의 형상론을 다루면서 그는 소요리문답 10문을 두 차례 비중있게 원용한다. 80) 그리고 박형룡은 자유의지의 가능성의 철학적 문제를 다루는 중에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13문과 신앙고백서 9장과 3장 1절 등이 긍정적으로 답변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81)
특히 박형룡에 의하면 “신앙고백서 9장은 기초적으로 사람의 자유 의지를 취급하나 기원적 창조에 의지의 자유의
가능성만 아니라 현실성이 있은 것을 치중적으로 가정한다.”라고 말한다. 82) 박형룡은 죄의 전가 교리를 다루면서 실재론과 언약론을 자세하게 소개한다. 그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언약론의 입장을 지지하고 있음을 밝힌다. 그는 신앙고백서 6장 3절과 7장 2절을 인용할 뿐 아니라, 대요리문답 22문과 소요리문답 16문 등이 “명확한 언약론을 공포한다”라고 지적한다. 83) 그리고 박형룡은 아담으로부터 후손에게 전가된 죄는 무엇인가에 대한 정답은 “죄책과 패괴를 둘 다 내포한다”는 것이라고 밝힌 후에, 일찍이 “우리가 가장 두터운 신임을 가지는 정통 신학자” 84) 라고 명명했던 적이 있는 찰스 하지가 죄책만이 후손에게 전가되었다라고 주장하는 듯이 보이자 다른 구절들을 인용하여 하지 역시도 죄책과 패괴의 전가를 말했다라고 변호했다. 그렇게 변호하기를 마치면서 박형룡은 “그는 본래 우리의 표준문서에 배치하는 입장을 취할 인물이 아니었다.”라고 논평하였다. 85)
그는 또한 전적 패괴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적극적인 패괴라는 말을 “영혼과 신체의 모든 기능과 부분이 전적으로 더럽게 되었다.”라고 정의내리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6장 2절을 인용했다. 86) 그리고 본죄(本罪, actual sin)가 무엇이냐를 정의내리기 위해서 신앙고백서 6장 6절을 인용하는가 하면, 원죄와 본죄의 관계를 밝히기 위해서는 신앙고백서 6장 4절을 인용한다. 87)
박형룡은 죄의 형벌을 다루면서 인간의 죽음이 죄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주장하는 자들에 대항하여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가 육체적 사망을 죄의 형벌로 확신한 것은 물론이요(신도게요 6장 6단, 대요리문답 28, 소요리문답 19), 다른 모든 역사적 신경들이 다 그러한 것이다”라고 논박했다. 88) 박형룡에 의하면 “성경에서 죄의 형벌 전부를 지시하는 한 말은 사망”이며, “신체와 영혼의 분리는 죄의 형벌의 한 부분”이다. 89)
박형룡의『인죄론』제2편 제6장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해서 논구하고 있다. 90) 논의를 시작하면서 그는 율법을 구원론의 성화 다음에 배치하는 입장과 죄론에서 죄의 논의에 연접하여 거론하는 두 입장이 있음을 밝힌다. 그에 의하면 전자는 웨스트민스터 표준 문서들과 찰스 하지가 취한 입장이고, 후자는 칼빈과 남장로교 신학자 D. L. 댑니가 표방한 입장이다. 그런데 그렇게 본질적인 문제는 아니지만 박형룡은 전자 보다는 후자의 입장을 취한다는 것이다. 이는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와 다른 입장을 취한다는 뜻이다. 그는 그렇게 하는 이유는 “죄와의 관련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고찰하는 것이 필요함은 죄의 율법의 위범이기 때문이다”고 밝히고 있다. 91) 그러나 십계명을 다룰 때에는 소요리문답과 구례인 선교사의 해설을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음을 밝히기도 한다. 92)
박형룡은『인죄론』제3편에서 언약인에 대해서 다룬다. 그는 언약에 대해서 개관하는 중에 “구원 계획의 언약성”에 대해서 설술한다. 그는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은 성경에 계시된 이 영원계의 비밀을 우리에게 조직적으로 알려준다.”라고 말한 후에 신앙고백서 7장 3절, 대요리 문답 31문, 소요리 문답 20문을 인용한다. 특히 그가 인용한 신앙고백서 7장 3절은 다음과 같이 고백 진술하고 있다:
“사람이 타락하여 자신을 그 언약 (행위언약)에 의하여 생명 얻을 재량을 없게 만든즉 주께서는 보통으로 은혜언약이라 칭하는 제2의 언약을 세우시기를 기뻐하셨으니 그것에서 그는 죄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생명과 구원을 무상으로 제공하시되 그들이 그(리스도)를 믿을 것을 요구하며 그들로 하여금 구원 얻게 하시며 생명에 향하여 정명된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을 주어 그들로 하여금 믿기를 의욕하며 가능케 할 것을 약속하셨느니라.”
4) 교의신학~기독론(1970년)
박형룡은 1957년에『기독론』을 인쇄본으로 첫 간행한 후에 1970년에 이르러 개정 증보판을 출간하기에 이른다. 그 사이에 박형룡은 G. C. Berkouwer의 기독론을 읽으면서 내용상 많은 증보를 하게 된다. 93) 그의 기독론은 크게 3편으로 나누어져 있다: 그리스도의 품위, 그리스도의 신분, 중보의 3직, 그리스도의 속죄.
박형룡의 기독론에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원용되고 있는 부분들을 살펴 보면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다루는 부분에서 첫 인용이 발견된다. 박형룡은 “주께서 그의 인성을 하늘로부터 가져 오셨고 마리아는 그것이 통과하여 온 운하 혹 도관뿐이었다”라고 주장했던 재세례파에 반하여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모친의 실질로부터 인성을 취해 입으셨다”는 것을 긍정했다고 하면서 8장 2절을 지목한다. 94) 또한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에 대해서 부인하는 현대적 조류에 반대하면서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은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권능으로 처녀 마리아의 복중에 잉태되셨다는 것을 긍정한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95)
박형룡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에 크게 의지하여 결론을 내리는 대목은 신학적 난제중의 하나인 예수 그리스도의 음부 강하설에 대한 부분이다. 96) 그는 음부 강하의 성경적인 근거 구절들과 신경들 속에 나타나는 다양한 해석들을 소개한 후에 개혁파의 해석을 소개했다. 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 당하신 지옥고와 같은 고초”를 가리킨다고 해석한 칼빈의 견해와 소요리문답 27문, 대요리문답 50문, 신앙고백서 8장 4절(“장사되어 사망의 권세 아래 머물러 계셨으나 썩음을 보지 않으셨다.”) 등을 근거로 하여 지옥에 내려가심이란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상태의 가장 깊은 비하에 들어가 그 권세 아래 거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결론내린다. 97)
박형룡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서 다루는 중에 “사도신경과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는 그리스도의 귀환을 그의 승귀의 최종 계단으로 삼았다.”라고 언급하였다. 98) 박형룡은 표준문서의 구체적인 전거를 밝히지 않는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8장 4절 끝부분을 염두에 둔 것 같다. 99) 그리고 그가 신앙고백서를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있는 부분은 제한속죄를 다루는 부분에서이다. 그는 제한속죄 교리를 진술하면서 “그리스도는 충족적으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으나 효과적으로 피택자들만을 위하여 죽으셨다.”라고 하는 칼빈의 해석을 인용한 후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9장 5절과 3장 6절을 참고 자료로 제시한다. 9장 5절에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사역이 “성부께서 그에게 주신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임을 밝히고 있고, 3장 6절에는 하나님의 선택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부분이다. 100)
박형룡의 『교의신학~기독론』에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활용이나 원용이 두드러지지 않는다. 앞에서 다루지 않은 대소요리 문답에서의 인용 몇 개가 눈에 뜨일 뿐이다. 101) 이렇게 장로교 표준문서들의 인용이나 활용이 적은 이유는 박형룡이 벌코프나 G. C. 베르까워 같은 화란 계열의 신학자들의 저술들에 많이 의존하게 되는 경우이다. 벌코프나 베르까워는 화란 개혁주의에 속하기 때문에 그들의 저서 속에서-때때로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The Westminster Standards)에서 인용을 하는 때도 있기는 하지만-주로 네덜란드 신앙고백서(Confessio Belgica, 1561),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Heidelberger Katechismus, 1563)과 도르트 교헌(Canons of Dort, 1618~9) 등을 즐겨 인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102)
5) 교의신학~구원론(1972년)
박형룡의 구원론은 크게 구은(救恩)의 총론과 각론 부분이다. 박형룡은 구원의 각론에서 특히 9단계의 구원서정론(ordo salutis)을 제시한다. 베르까워의 삼부작 103) 에서의 직간접적인 인용이 많은 구원론이긴 하지만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에서 언급하는 부분도 수다한 것이 그의 구원론이다.
① 구은의 총론
구은의 총론에 보면 박형룡은 “개혁파 신학은 하나님을 우리 구원의 유일 조성자로 높인다. 이 신학은 구속의 적용을 하나님의 주권적이며 은혜로운 의지에 추적하여 돌아간다. 사람이 구원의 참례자가 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 역사의 나가는 길에 유효적으로 실현하시는 선택의 영원한 작정에 의지한다”라고 하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3장 6조도 그런 진리를 선언하고 있다고 말한다. 104) 박형룡은 보통 은혜(=일반은혜)를 다루면서 보통이라는 말은 비상적 초자연적인 공작들과 대조되는 “자연적 혹 통상적 공작들”을 가리킨다고 하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0장 4조와 대요리문답 60문을 언급한다. 105) 또한 보편은혜의 공작 방편 중 중요한 방편인 정부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 신앙고백서 23장 1조를 인용하기도 하고, 106) 보통 은혜의 열매중 하나인 외면적 선에 영적인 품질이 없음을 지적하는 신앙고백서 16장 7조를 부분 인용하기도 한다. 107)
② 구은의 각론
구원의 서정에 대한 각론에 들어가 보면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의 활용도는 더 많아진다. 소명을 다루면서 박형룡은 중생과 회심에 앞서 복음의 전도가 선행한다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은 외적 소명에 언급하지 않고 유효적(내적) 소명만을 거론하며 그것이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에 기구적이라는 것을 강조하였다”라고 하면서 소요리문답 31문을 지적한다. 108) 그러나 이 문제에 관해서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0장 1절에서도 보다 더 풍성하게 고백 진술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09) 박형룡은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이 유효적 소명과 중생을 동일시 한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신앙고백서 10장 2절을 길게 인용한다. 110) 또한 도덕적 의식기 이전에 죽은 영아의 구원 문제에 관련하여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는 이 해답을 유효 소명의 진술에 포함시켰다”라고 말하는데, 이는 10장 3조에 대한 언급이다. 111) 아울러서 박형룡은 교회와 은혜의 방편이 없는 영아의 구원은 불신 이교도의 구원 가능성을 추론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이 문제에 대한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은 부정적으로 답변한다는 하는 것을 밝히면서 신앙고백서 10장 4조와 대요리문답 60문을 인용하였다. 112) 그리고 박형룡의 결론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내려진다:
“복음 이외에도 구원이 있다고 상상한 것이 츠빙글리의 언론에 나타났다하나 장로교회의 표준문서와 대표적 신학자의 이같이 강력한 반대의 진술은 이 문제에 대한 개혁파의 일반적 입장이 부정적임을 밝혀준다.” 113)
박형룡은 또한 “회개가 사죄 받을 공로를 구성하는 것은 아니나 그것을 받음에 필요한 도덕적 적당성을 준비함은 사실이다.”고 말하면서 신앙고백서 10장 3절을 인용한다. 114)
그리고 박형룡은 구약과 신약의 믿음의 대상이 같은 구속주 그리스도이시라고 하는 점을 주장하면서 신앙고백서 11장 6절을 참조하라고 말한다. 115) 그리고 ‘신앙적 지식의 확실성’을 논의하면서 그는 “이 믿음에 의해 그리스도인은 말씀 가운데 계시된 것은 어떠한 것이든지 간에 참되다고 믿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권위가 그것에서 말씀하기 때문이다”고 진술하는 신앙고백서 14장 2절을 인용하고 있다. 116) 박형룡이 신앙의 확신을 다루고 있는 부분을 보면 벌코프나 그가 속한 화란 전통이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와 다를 경우에는 전자를 과감히 비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박형룡은 주관적 확신이 신앙의 본질에 속한다고 주장하는 카이퍼, 바빙크, 벌코프의 견해를 언급한 후에, 이와는 대조적으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나 하지 부자, 그리고 댑니 등의 미장로교 신학 전통에서는 신앙의 과실설(果實說)을 주장한다고 하면서 전자보다는 후자를 자신의 입장으로 취한다. 117) 그가 그와 같은 입장을 취하는 결정적인 요인은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가 이 방향을 지시한다는 것은 우리의 결론의 중대한 원인”이기 때문이고 말한다. 118)
박형룡은 중요한 신학적인 주제에 대한 정의를 내릴 때에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로부터 인용하기를 좋아하는 편인데, 칭의의 정의를 내릴 때에도 그는 소요리문답 33문과 신앙고백서 11장 1절을 그대로 인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119) 그는 또한 “하나님은 영원부터 모든 택함받은 자들을 칭의하기를 작정하셨고”라고 하는 신앙고백서 11장 4절의 진술이 영원 칭의를 가르친다라고 인용하는 헤르만 훅스마(Herman Hoeksema)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그러나 이것은 택한 백성의 칭의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 들어 있다는 의미의 말이요, 그들이 영원에서 실제로 칭의되었다 함은 아니다. 이 조문의 하반은 ‘그러나 성령이 적당한 때에 실제로 그리스도를 그들에게 적용하시기까지는 그들은 칭의되지 않는다’라고 말하여 영원에서 실제적 칭의가 없었다는 것을 밝혀준다.” 120)
박형룡은 신앙과 칭의의 관계를 다루는 중에 “개혁파 신학은 신앙을 사람편의 칭의 받는 기구로 치중한다”는 주장을 귀결시키 위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1장 2절을 인용하기도 했다. 121)
박형룡은 성도의 견인 교리를 칼빈주의 개혁파 교회들에서만 “절대적 확신을 산출할 형식으로 주장되었다”라고 논평한 후에 여러 신경들을 예로 들었으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대해서는 “도르트 교헌 제5조와 눈부시는 유사를 가지고 있어 견인을 하나님 아버지의 불변하는 사랑에서 흘러 나오는 선택의 작정의 불변성에 근거시켰다(17장 2절).”라고 주장하였다. 122) 그리고 그는 개혁파가 배타적으로 구원의 방식의 연역적 견해에 빠졌다라고 비판하는 자들에 대하여 그런 비판은 신도게요의 내용과 충돌한다라고 반박하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7장의 내용을 간략하게 줄여서 소개한다. 123) 또한 박형룡은 신자의 속에서 성령은 말씀을 방편으로 하여 움직인다고 하는 것을 “신도게요(17장 2절)에서 ‘그들 안에 성령과 하나님의 씨의 거주’라 한 것은 성령의 영주(요 14:16, 17; 요일 2:27)와 성령에 의해 우리 안에 새생명의 씨로, 성화의 방편으로 공작하는 산 말씀의 계속 역사를 가리킴이다.”라고 풀어서 설명해 주고 있다. 124) 그리고 신자도 일시적으로 타락할 수 있다고 하는 점을 신앙고백서 17장 3절을 인용하여 설명해주기도 한다. 125)
6) 교의신학~교회론(1973)
박형룡의『교회론』은 L. 벌코프의『조직신학』의 분류를 따라서 교회와 은혜의 방편 등 두 편으로 구성되어 있다.『교회론』안에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원용하는 곳이 많음을 확인해 볼 수 있다.
① 교회
박형룡은 교회의 본질을 다루는 중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25장 1절을 인용하면서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서는 선택의 관점에서 교회를 정의”내린다고 논평한다. 126) 무형교회와 유형교회에 관계에 대해서 논의하는 곳에서는 신앙고백서 25장은 둘을 갈라서 진술하나 “둘의 구성에는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말한다.”라고 지적한다. 127) 박형룡은 교회가 본질상 은혜의 조직체라고 주장하는 루터파에 대하여 개혁파는 그리스도의 몸,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자의 몸”이라고 주장하면서 신앙고백서 25장 1절을 언급하였다. 128)
그는 또한 교회의 공동성(catholicity)에 대해서 다루면서 “개혁교회들이 역사적으로 가지고 오는 교회관은 가톨릭이라는 말에 참된 의미를 준다.”라고 하면서 신앙고백서 25장 2절에 있는 바 “유형교회는 역시 공동적 혹 보편적인 것으로서…전 세계에서 참 종교를 신앙하는 모든 사람들과 그들의 자녀들로 구성된다”를 인용했다. 129) 그리고 교회와 국가 간의 관계에 대해서 다루면서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22장을 장황하게 인용한다. 그는 세속관장들의 의무(3절), 국민으로서의 의무에 대해서(4절) 진술하는 바를 긍정적으로 인용하였고, 그리스도인이 공직에 부름 받았을 때는 받아들여 행할 것과 전쟁에도 참여할 것에 대해서 말하는 2절도 인용했다. 130)
그리고 박형룡은 교회가 가지는 3중 권세중 교리권(The Potestas Dogmatica or Docendi)을 다루는 중에 신경과 신앙고백은 “계시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계시된 진리에 대한 교회의 반성의 과실이다”라고 해명해 준다. 131) 그리고 그는 칼빈주의 종교 개혁의 특징이 많은 신앙고백서를 발표한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그런 고백서들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비교 설술했다:
“그 전수가 신학적 내용에 있어서는 동의하였고 다만 그 길이와 상세에서만 차이가 있었던 것이 그 후 가장 새롭고, 길고, 정밀한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에 완전히 합일되었다. 그 신도게요서들은 다 고대신경들의 요소들을 구체화한것이다. 132)
박형룡은 교회의 중요 목적을 다루면서 “유형교회가 교역자를 두고 성경을 가르치며 규율을 세우고 권징을 행하는 것은 교회원들의 건덕을 중요한 목적으로 한 일이다”라고 주장한 후에, 그 근거로서 신앙고백서 25장 3절을 인용하고 나서, “이 고백은 사도 바울의 교훈에 기초한 것”이라고 하면서 에베소서 4장 11~13절을 인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133)
② 은혜의 방편
박형룡은 은혜의 방편을 다루는 후반부에서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많이 활용하여 자신의 견해를 뒷받침해 나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우선 은혜의 방편이 몇 개나 되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 박형룡은 말씀과 성례 두 가지를 주장하는 L. 벌코프와 달리 제3의 방편인 기도를 포함시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가 기도를 제3의 방편으로 추가하는 이유를 찰스 하지의 말을 인용해서 설명해준다: “은혜의 방편들은 우리 교회의 표준문서들에 의하면 말씀, 성례, 기도라.” 134)
박형룡은 말씀과 성령의 관계를 다루는 중에 구속의 실시에 있어서 사람의 마음을 감동하는 일이 “성경 말씀에 성령의 주권적인 공작이 수반함”에 의한다는 것이 성경적인 견해이며 유신앙론은 비성경적이라고 하는 입장을 주장하였고,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은 이 견해를 역설함에 매우 명확하다.”라고 말하였다. 135) 박형룡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9장이 “하나님의 율법에 대해서 7단의 장문으로 상론하면서 율법의 삼중 용도를 설명하되 신자, 중생자를 위한 용도에 더욱 상설을 붙였다”라고 논평하는가 하면, 7절이 율법의 용도를 강조하여 잘 진술한 후에 결론적으로 “위에 진술한 율법의 용도는 복음의 은혜에 배치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잘 적응한다”라고 언급했다. 136)
박형룡은 성례의 유효성에 대해서 다루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27장 3절에 근거하여 성례의 유효성은 집례하는 자의 경건이나 의도에 의뢰하지 않으며 오직 성령의 사역과 말씀의 효능에 의뢰한다는 점을 천명한다. 137) 그는 세례를 다루는 중에 성례에 사용되는 “외면적 요품은 물이다”고 말하는 신경 28장 2절을 인용했고, 침례가 아니라 “물을 붓거나 뿌림으로 정당히 거행된다”라고 말하는 28장 3절을 인용하고, 세례 집례자는 “합법적으로 부름 받은 복음의 사역자”여야 한다고 규정한 28장 2절를 인용한다. 138) 또한 세례의 정당한 수령자에 대해서 논의하면서도 표준문서들을 근거로 그리스도를 믿고 신앙 고백하고 그에 복종하는데 까지 이른 불신자나 입교한 자의 자녀에게 해당한다라고 밝힌다. 139) 세례는 또한 “유형 교회에 가입하는 표와 인”이라고 하는 28장 1절을 인용하기도 했다. 140) 박형룡은 신앙고백서 28장 5, 6절에 근거하여 세례 중생론을 거부한다. 141)
박형룡은 성찬에 대해 설명함에 있어서도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를 긍정적으로 사용한다. 142) 성찬식에 사용하는 떡과 포도즙이 주님의 몸과 피의 상징이 되기는 오직 그 목적을 위해서 성별기도를 드릴 때에라고 주장하면서 표준문서들에 호소한다. 143) 박형룡은 주님께서 성찬을 제정해 주신목적이 “그의 속죄적 죽음과 그것에 관계된 영적 은혜들을 표시(signify)할 뿐 아니라, 또한 인쳐 보증하기로 의도된 것”이라는 주장을 하면서 신앙고백서 29장 1절을 인용한다. 144) 이미 앞서 살펴본 대로 박형룡은 벌코프와 달리 은혜의 방편을 말씀, 성례, 그리고 기도 등 세 가지로 보았다. 그가 그렇게 기도를 방편으로 보는 이유는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의 교훈” 때문이라고 밝힌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기도론을 전개함에 있어 주로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찰스 하지의 해설을 기초로 삼는다. 145)
7) 교의신학~내세론(1973)
박형룡은 『내세론』을 L. 벌코프의 분류를 따라 개인적 내세론과 일반적 내세론으로 양분하여 다루었다. 그러나 주의해서 보면 그는 벌코프와 달리 종말론이라는 제목 대신에 내세론이라고 하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 눈에 두드러진다.146) 박형룡은 내세론에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직접적으로 많이 원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박형룡은 성경적인 중간기에 대한 해설을 위해서 신앙고백서 32장 1절을 인용한다. 147) 표준문서에 의하면 의인은 천국에서 영광을 누리게 되고 악인은 사후에 지옥으로 가서 고통을 당한다고 한다. 148) 표준문서에 근거하여 신자들은 죽는 때에 “그 영혼이 완전히 거룩하여짐을 말하고 중간기 상태에서 진보 발전이 있다는 것을 표시하지 않는다”라고 박형룡은 주장한다. 149) 로마 가톨릭의 조선림보(The Limbus Patrum)설이 그들의 성례관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점을 설명한 후에, 박형룡은 “구약과 신약의 성례들은 본질적으로 일치하나 구원의 근거는 아니라고 믿으며, 구원의 유일 방도는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그리스도를 믿어 신앙으로 칭의됨이라고 믿는다”라고 하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1장 6절을 언급한다. 150)
박형룡은 주님의 재림 시기를 알려 주시지 않으신 이유에 대해서 설명할 때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33장 3절을 긍정적으로 인용한다: “그는 그 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실 것이니 그들은 어느 시간에 주께서 오실는지 알지 못하므로 모든 육체적 안심을 떨어 버리고 항상 ‘오시옵소서. 아멘 주 예수여 속히 오시옵소서’라고 기도하도록 준비되어 있게 된 것이다.” 151) 그리고 “역사적 전천년설”의 강력한 대변자였던 박형룡은 시대론(=세대주의)이 지상 교회를 왕국으로 보기를 거부하는 것에 대해서 “웨스트민스터 표준 문서의 교회관 신국관과 정면충돌을 면하지 못한다. 신도게요(25장 2절)와 소요리문답(26문)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왕국으로 말한다”라고 반박했다. 152)
5. 후기의 논문들에 나타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평가
박형룡이 후기에 쓴 글들 가운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관련하여 주목해야 할 글들이 몇 편이 있다. 이 글들 속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관련해서 논급한 내용들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1) “신구신도게요의 대상이(大相異)”(1967년)
이 글은 박형룡이 1967년 8월에 전국 교역자 수양회에서 강연한 후에『신학지남』9월호에 바로 게재한 글이다. 미국 연합 장로교회가 교회 연합 운동에 방해가 되는 신앙고백을 수정하여 새로운 신앙고백서를 만든지 얼마 되지도 않은 때였다. 153)
새로운 신앙고백서 작성에 큰 기여를 한 에드워드 다위는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에 대해서 “웨스트민스터는 후기-종교개혁 선언으로서 결코 근대적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스콜라 신학 시대에 기초된 권위와 법률로부터 파생되었으며, 교권적이며 정치적인 절대주의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다”라고 비평했다. 154) 박형룡은 새로운 신앙고백서를 검토한 후에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게 되었고, 한국장로교회에 신구신앙고백서의 대상이(大相異)를 알려야 하겠다고 사명감을 느끼게 되었다.
박형룡이 지적하는 대상이의 내용들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새로운 신앙고백서는 ①기독교를 인조 종교로 보며 ②기독교의 독일성을 무시하고 범종교 운동에 지향하며 ③성경의 영감을 부인하고 ④인류의 타락과 원죄를 말하지 않으며 ⑤그리스도의 인성에 치중하고 ⑥속죄의 교리를 부인하고 ⑦화목을 오용하며 ⑧교회의 본무가 아닌 사회복음에 치중하고 ⑨그리스도의 재림을 부인하면서 ⑩내세천국의 소망을 명시하지 않고 있고 ⑪국제문제에 위협한 길을 열어 놓고 있으며 ⑫상대주의에 입각하여 진리의 영구성을 부정한다는 것이다. 155) 박형룡은 이와 같은 요목들을 가지고 새로운 신앙고백서의 내용을 비평적으로 소개한 후에 “1967년 신앙고백은 성경에 기초한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에 충돌하며 반대 된다는 것이 이상 12개 요점의 대조만으로도 예증된다. 오히려 전자를 후자의 보충이라고 또는 우리 한국 교회와 무관하다고 변명하겠는가?”라고 질문을 제기한다. 156) 이에 대한 박형룡의 대답은 부정적이었다. 미국 교회의 선교사들의 지도와 보호를 받는 한국 장로교회가 몇 해 지나지 않으면 새로운 신앙고백서를 “공공연히 받아들여 신앙상 손해를 자취하게 될 것은 뻔히 내다보이는 일”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157)
2) “한국교회의 진로”(1968년)
박형룡은 목사 장로 기도회에서 전한 이 강연문 속에서 한국교회의 교회의 진로에 관한 견해를 밝히고자 했다. 그의 견해는 자신이 초안을 만들고 1958년 총회에서 제정한 “대한예수교장로회 교시(敎是) 9개조”에 대한 것이다. 박형룡은 첫 번째 항목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 신조와 헌법에 규정된 현존 신앙과 질서를 확집한다.”라고 말한다. 158) 그는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의 그와 같은 신앙과 질서의 기준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아마 성경의 진리들의 신경적 형식에서 가장 뛰어난 표현이다. …그 신도게요와 요리문답들은 많은 교회에 의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버금가는 그들의 교리적 표준들로 사용된다”라고 하는 정통장로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서언을 인용했다. 159)
9개의 교시를 다 해설하고 나서 박형룡은 10번째 항목을 스스로 제시한다. 그것은 “국가 사회와의 정당한 관계 문제가 있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렇게 제시한 후에 “이것은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에 규정되어 있으나 신시대에 교회 내에서 사회 복음 운동이 대두하는 이 때인 만큼 이 문제에 대해서 고찰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160) 그가 명시적으로 지적하지는 않았으나 그가 말하는 부분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23장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료된다. 그리고 박형룡은 “네덜란드 개혁교회 안에 다양다태의 기독교인 단체 조직들이 정치적, 사회경제적, 자선적, 과학적, 문화적, 스포오츠, 메스컴, 학생 생활 등의 여러 분야에 있어서 활동한다”라고 소개한 후에, “이 기독교인 단체조직들은 모두 국가, 사회 생활 각 분야에서 진정한 기독교적이요 성경적인 원리를 지켜 나가기 위함이라”이라고 밝힌다. 박형룡은 이와 같은 문제에 대해서 지도하기 위해서 신학교가 사회 윤리를 연구하고 교수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161)
3) “신학지남의 한국신학적 의의”(1975년)
박형룡은 이 논문을 통해 『신학지남』이 가지는 의의를 “장로교회의 신학사상의 발전과정을 표시함으로 한국교회의 신학사적 의의를 가진다”라고 주장한다. 162) 박형룡은 본지의 창간부터 시작해서 자신이 글을 쓰는 시점까지의 장로교회 신학사상의 역사적 과정을 개관해준다. 박형룡은 한국 초대 선교사들의 신학사상이 철저한 보수주의였다고 말하고, “이 성경적 보수주의 신학은 그 내용 성질에 있어서 칼빈 개혁주의 정통신학”이었다고 규정한다. 그는 “웨스터민스터 신도게요를 교리적 표준으로 신봉하는 한국 초대 장로회 선교사들의 신학은 청교도적인 동시에 개혁주의적이라는 것”을 증명하는데 관심을 기울인다. 그는 제임스 패커의 글 가운데서 “청교도 신학은 특성적으로 개혁주의적이며 언약론적 기질을 가진 것이니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가 그 증거이다.”는 구절을 자신의 주장의 근거로 인용한다. 163)
4)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적 전통”(1976)
박형룡은 자신의 인생의 반세기에 가까운 세월동안 밀접한 관련을 맺었던『신학지남』 1976년 가을호에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적 전통”이라는 마지막 글을 기고했다. 164) 그가 소천하기 1년 전에 기고한 글이며, 그의 신학적 생애의 “백조의 노래”라고 평할 수 있다. 이 마지막 글을 통해서 박형룡은 그가 한평생 동안 연구하고 가르치고 보존하려고 했던 자신의 신학의 정체성이 무엇이며, 그가 규정하는바 한국 장로교 신학 전통의 특성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밝혔다. 165)
그렇다면 79세의 노신학자가 정의내린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적 전통”이란 무엇인가? 박형룡은 다음과 같이 분명한 어조로 그 전통의 실체를 밝힌다:
“대한 예수교 장로회는 청교도적인 영미 장로교회 선교사들의 선교를 받아 출발하고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을 교의와 규례의 표준으로 채용하여 수행함으로 한국에서의 청교도 개혁주의 신학의 교회가 된 것이다. …이러므로 대한 예수교 장로회의 신학적 전통은 청교도적 개혁주의 장로교회의 그것이다. 그것은 구주 대륙의 칼빈 개혁주의 신학에 영미의 청교도적 특징을 가미한 장로교회의 신학적 전통이다.” 166)
우리는 이상의 정의에서 우선 지적할 수 있는 것은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적 전통이란 청교도적인 영미 장로교회 선교사들이 전해준 신학이며,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에 의거하는 신학이라고 하는 것이다. 박형룡은 이 신학을 “청교도 개혁주의 신학”이라는 신조어로 호칭하였다. 그는 이 신학을 두 전통의 종합이라고 파악한다. 즉 “구주 대륙의 칼빈 개혁주의 신학이란 도르트 총회에서 결정된 TULIP을 5대 요령으로 하여 전개된 칼빈 개혁주의 신학”과 그것이 영국으로 건너가서 열렬하고 심각한 경건으로 받아들인 이들인 청교도들의 신학 전통이 그것이라는 것이다. 167)
박형룡은 초기 선교사들로부터 평양신학교를 거쳐 총신에 이르기까지 전수된 “청교도 개혁주의 신학”의 특징은 ①성경의 신성한 권위를 믿는 신념 ②하나님의 주권에의 확신 ③안식일의 성수와 경건생활에 치중 ④성실한 실천(직접 전도주의 실행, 주초금지 등)과 ⑤천년기전 재림론이라고 소개하였다. 이러한 다섯 가지의 특징들은 구 프린스턴 전통과도 네덜란드의 신칼빈주의와도 엄밀하게 일치하지를 않는다. 그래서 최덕성 교수의 표현대로 “한국형 개혁주의 정통신학”(Korean Reformed Orthodoxy)이라고 표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168) 그리고 박형룡은 신복음주의와 같은 새로운 신학 사조에 대항하여 바로 이와 같은 “우리의 고유의 신학적 전통을 버리고 다른 사상을 따르는 일은 결단코 하지 않기로 하나님 앞에 서약해야 할 것이다”라고 호소한다. 169)
심지어는 1970년대에 네덜란드 개혁주의를 직접적으로 가르치기 시작한 젊은 신학자들을 염두에 두고 “유럽 대륙의 개혁주의의…직접적 수입을 수요하지 않는다.”라고까지 말했다. 170) 박형룡은 소천하기 한 달 전에도 유사한 내용으로 신길동 순장로교 신학교에서 특강을 했는데, 이 마지막 특강 강의안에서는 앞의 논문보다도 더 노골적으로 표현을 하고 있음을 본다. 171) 박형룡은 구주 대륙의 개혁주의를 “불충분한 개혁주의”라고 하면서 개혁교회와 영미 장로교회를 구분하지 않은 것은 불찰이었다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교단 내에 구주 “대륙의 개혁주의로 다시 떨어지려고 하는 위험”이 있다고 까지 경고의 말을 한다. 172) 그는 특강의 끝부분에 가서 다시 한 번 더 한국 장로교의 신학적 전통의 사수를 호소하였다:
“그리고 장로교회를 순결하게 지켜 보존하는 것은 청교도 개혁주의 신앙을 웨스트민스터 표준 문서에 진술된 신학교리 규례를 그대로 믿고 수행하여 후세에 전하는 것이니 금일순 장로회 신학교 학도들의 의무입니다.”173)
6. 나가는 말
이상에서 우리는 한국 장로교의 지로적인 신학자인 박형룡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관계를 논구해 보았다. 이 논문에서 취한 방법은 박형룡이 평생 동안 저술한 저작들을 토대로 그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활용하고 있는지를 밝히는 것이었다. 먼저는 박형룡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수용하게 되는 역사적인 배경을 논구해 보았다. 박형룡은 한국 장로교 초기 선교사들의 영향으로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이 신구약 성경의 진리들을 가장 명해한 문서들이므로 신앙과 실천에 있어서 표준삼아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고, 구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신학 수업을 받음을 통해서 이러한 확신을 강화되었다. 그리고 귀국한 후에 반 세기 동안 신학 교수로 사역하고, 많은 교회 분쟁들을 통과하면서,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에 구현된 신학만이 성경적이고 정통적이라는 것을 초지일관 강조하였다. 장동민은 박형룡의 신학적 생애에 있어서 어떠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지를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교회사적으로 보더라도 박형룡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최고의 신앙고백이라고 믿음으로 해서 자유주의자들이나 바르트주의자들에 대해서는 ‘이단’으로, 고려파와 같은 사람들은 ‘분파’로, 그리고 감리교와 같은 교단의 정통주의자들을 ‘이설’이라고 규명하기도 했다.” 174)
특히 주저라고 할 수 있는『교의신학』은 네덜란드 신칼빈주의 신학파에 속하는 루이스 벌코프의『조직신학』을 번안하여 근간으로 삼고 있고, 수많은 네덜란드 신학자들(특히 G. C. 베르까워)의 저술들로부터 자료 보충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박형룡은 한국 장로교의 표준문서로 채택된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서와 대소요리 문답을 중시하여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이 인용한다는 점을 논구해 보았다. 그래서 그는 벌코프가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의 항목만 언급하고 지나가는 곳에서는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인용하기도 하고, 175) 혹은 벌코프가 네덜란드 신앙고백서를 인용한 부분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인용으로 대체하기도 하였다. 176) 그리고 박형룡은 벌코프와의 관련을 떠나서 중요한 신학적 결정을 내릴 때 마다 빈번히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을 인용하고 있다는 점도 살펴보았다. 이는 박형룡은 청교도적인 영미 장로교회 선교사들이 전하여 주고 구 프린스턴 신학파가 견지했던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이야 말로 교의와 규례의 표준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177)
물론 신앙고백서가 성경 위에 있는 것이 아니기에 성경으로부터 비판을 받아야 한다라고 하는 여지를 열어 두기도 했지만, 실제에 있어서 박형룡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조금도 수정할 필요가 없는 신앙고백서라고 확고하게 믿었다. 178) 박형룡은 생애 만년에 쓴 글들에서도 이 신학전통을 보수해야 한다라고 후학들과 성도들에게 호소했다.
논문을 마무리 하면서 본 논문의 한계를 분명히 지적한다. 논자는 박형룡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어떻게 평가하고 어떻게 활용하고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그의 수많은 저술들을 분석하는 작업을 하다 보니 그가 신앙고백서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인용하거나 언급하고 있는 경우들만 논의의 내용으로 삼았다. 사실 좀 더 신학적으로 깊이 있는 연구를 하려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견지하고 있는 신학사상과 박형룡의 신학 사상을 각각 연구하여 둘 사이를 비교 연구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라고 사료된다. 그러나 짧은 논문의 한계 상 그렇게 깊이 있는 연구가 되지 못하고 현상적인 연구로 그치고 말았음을 솔직하게 인정하면서, 기회가 닿는 대로 더욱더 깊은 연구를 수행해 볼 수 있기를 염원한다.
< 각주>
1) 웨스트민스터 회의의 진행, 신앙고백서의 작성 과정, 신앙고백서의 출판 문제, 신앙고백서가 담고 있는 성경관에 대해 쓰여진 권위있는 문헌은 B. B. Warfield, The Westminster Assembly and Its Work, The Works of Benjamin B. Warfield VI (Grand Rapids: Baker, 2003)이다. A. A. Hodge, The Confession of Faith, 김종흡 역,『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해설』(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8), 21-34와 박상경,『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해설』(서울: 예루살렘, 2004), 35-75도 보라.
2) Jack Rogers, Presbyterian Creeds, 차종순 역,『장로교 신조- 신앙고백 안내서』(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1995), 159; 홍철,『미국 장로교회의 역사와 신학』(서울: CLC, 2005), 28-31.3) 오덕교,『장로교회사』(서울: 합동신학대학원출판부, 2006), 359; 한국기독교사연구회,『한국기독교의 역사 I』(서울: 기독교문사, 1994), 284-85.
4) 『표준예식서(개정판)』(서울: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1997), 53, 59, 64, 68, 72.5) 본인이 담임목사로 사역한 바 있는 박사교회(경북 경산시 와촌면소재)의 선임목사였던 이근호씨의 경우는 소속노회에 의해서 목사면직을 당했는데 그 사유중 하나는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6) 박형룡, “신학과 교의와 신조,” 『신학논문(상)』(서울: 한국기독교교육연구원, 1981), 165.7) 박형룡은 해방 이전의 저작에서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혹은 “웨스트민스터 신경”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반면에(박형룡, “신경소론,” 『신학논문(상)』, 205, 206), 해방 이후의 저작들에서는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라는 명칭을 상용하고 있다(박형룡, “신구신도게요의 대상이,” 『신학논문(상)』, 208, 209, 210 등과 주저인『교의신학』전질 등을 보라). 이는 그가 속한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예장) 헌법책에서 동일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헌법』[서울: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2000], 269-343에 수록된 신도게요 참고). 이 논문에서는 이 두 용어를 혼용해서 사용하려고 한다.
8) 2004년 이전까지의 박형룡 연구에 대한 개관은 이상웅, “박형룡과 화란개혁주의신학의 관계연구” (신학석사논문, 총신대학교, 2004), 4-8을 보라.
9) 이종성, “박형룡과 한국장로교회,” 『신학과 신학자들』(서울: 양서각, 1987): 185-207.
10) 초기 장로교 선교사들은 대부분 시카고 맥코믹 신학교, 프린스턴 신학교 또는 버지니아주 리치먼드 소재 유니온 신학교 출신이었고, 신학적 경향이 아주 보수적이었다. 성경의 영감과 무오를 철저하게 신봉했으며,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을 신실하게 의종하였다(Yong Gyu Park, "Korean Presbyterianism and Biblical Authority" [Ph. D. dissertation,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 1991], 39-72).
11) 박응규,『한부선 평전』(서울: 그리심, 2004), 148-65; 박용규,『한국기독교회사1』(서울: 생명의말씀사, 2004), 460-76.
12) 이상웅, “박형룡과 화란개혁주의 신학과의 관계 연구,” 26-30.
13) 박형룡, “신경 소론,”『신학논문(상)』, 206(이 논문은 1938년 『신학지남』에 기고했던 글이다.) 박형룡이 1975년에 쓴 “신학지남의 한국신학사적 의의”에 의하면 신앙고백서와 대요리문답서는 1963년 합동측 총회에 의해서 교리적 표준으로 정식 채용되었다(박형룡,『신학논문(하)』, 345).
14) 간하배, 『한국 장로교 신학사상』(서울: 실로암, 1991), 15에서 재인용.
15) 박형룡 저작전집 매권 말미에 첨부된 그의 약력 참조(장동민,『박형룡 신학 연구』, 61이하). 박형룡이 아르바이트를 해가면서 단 3년 만에 신학사와 신학석사를 마쳤다고 하는 것은 그가 부지런하고 명민한 학생이었음을 입증해 주는 증거이다. 소열도 선교사의 회상에 이런 사실에 대한 회고가 기록되어있다. “나중에 그레샴 메이천에게 들은 말인데, 헨리 박은 그때까지 그 아래서 공부한 동양인들중 가장 명석한 학생이었으며 메이천 자신이 그의 학업 자질에 대해 매우 기쁘게 생각했다고 한다”(소열도, “성자다운 학자 박형룡,”『죽산 박형룡 박사의 생애와 사상』[서울: 총신대학교출판부, 1996], 172).
16) 장동민,『박형룡 신학 연구』, 62.
17) David Calhoun, Princeton Seminary, 2 vols. (Ediburgh: Banner of Truth, 1996), 2:441-42.
18) 김길성,『개혁신앙과 교회』(서울: 총신대학교출판부, 2001), 13.
19) Mark A. Noll(ed.), The Princeton Theology, 1821-1921 (Grand Rapids:Baker, 1983), 13, 25-34.
20) 이상웅, “박형룡과 화란개혁주의신학의 관계 연구,” 25-33.
21) 그가 쓴 박사논문에 담긴 변증학은 구 프린스턴의 변증학과 동일한 것이었다. 장동민,『박형룡의 신학 연구』, 111-16; 이상웅, “박형룡의 ‘자연과학으로부터의 반기독교적 추론’에 대한 분석,”『신앙과 학문』, 14/3 (2009. 12), 245-46.
22) 멀린스에 대해서는 장동민, 『박형룡의 신학 연구』, 92-94을 보라.
23) Colin Hansen, Young, Restless, Reformed, 조현학 역, 『현대 미국 개혁주의 부활』(서울: 부흥과개혁사, 2010), 103-40에는 뮬린스의 원리초록의 도외시가 나은 결과와 최근 앨버트 몰러 총장에 의해서 다시금 강화된 신앙고백주의가 어떤 결과를 낳고 있는지에 대해서 잘 설명해 주고 있다.
24) 박형룡,『학위논문』(서울: 한국기독교교육연구원, 1988), 16. “Anti-Christian Inferences from Natural Science"라고 제목이 붙혀진 이 박사논문은 아직 번역된 적이 없다. 이 책에 대한 분석과 내용 소개는 이상웅, “박형룡의 ‘자연과학으로부터의 반기독교적 추론’에 대한 분석,” 207-49를 보라.
25) 박형룡,『학위논문』, 54, 96쪽 각주 7.
26) 박형룡,『학위논문』, 95, 101쪽 각주 113.
27) 박형룡,『신학논문(하)』(서울: 한국기독교육연구원, 1981), 93-112.
28) 박형룡,『신학논문(하)』, 95.
29) 박형룡,『신학논문(상)』, 340,
30) 박형룡,『신학논문(상)』, 340-41,
31) 박형룡,『현대신학비평(상)』(서울: 한국기독교교육연구원, 연대미상), 序文.
32) 박형룡,『현대신학비평(상)』, 44.
33) 『신학지남』, 20/2, 4, 5, 6(1938년 3, 7, 9, 11월)에 게재된 논문들은 박형룡,『신학논문(상)』, 167-206에 함께 수록되어 있다.
34) 박형룡,『신학논문(상)』, 168
35) 웨스트민스터 표준문헌들에 대해서는『신학논문(상)』, 201-206에 걸쳐 소개하고 있다.
36) 박형룡,『신학논문(상)』, 205.
37) 박형룡,『신학논문(상)』, 205-206. 그는 제2 헬베틱 신앙고백은 “그 논리적 명백성과 정확성에서는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라고 비교 논평하기도 했다(『신학논문(상)』, 196쪽).
38) 박형룡,『신학논문(하)』, 165-66.
39) 박형룡,『신학논문(하)』, 166.
40) 그의 강연 원고는 박형룡,『신학논문(상)』, 216-231에 수록되어 있다. 또한 그의 귀국과 교장 취임에 관련된 설명은 장동민,『박형룡의 신학 연구』, 344-347을 보라.
41) 박형룡,『신학논문(상)』, 223.
42) 박형룡,『신학논문(상)』, 222.
43) 박형룡,『신학논문(상)』, 227.
44) 박형룡,『신학논문(상)』, 118.
45) 박형룡,『신학논문(상)』, 161.
46) 박형룡,『신학논문(상)』, 164.
47) 박형룡,『신학논문(상)』, 165.
48) 박형룡,『신학논문(상)』, 164-65. 박형룡은 12신조는 “영미 장로교회의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의 축소라고 할 것이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49) 박형룡,『신학논문(상)』, 125-126. 박형룡은 B. B. Warfield, The Westminster Assembly and Its Work, 1931, 261-333을 자료로 삼고 있다.
50) 박아론, “죽산 박형룡 박사의 생애와 신학,”『죽산 박형룡 박사의 생애와 사상』, 144: “그가 만주로 가서 망명생활을 할 때에 비로서 ‘조직신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후 변증학과 아울러 조직신학 과목을 계속 가르치면서 조직신학적 연구를 깊히 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박형룡 박사는 ‘변증학자로 시작하여 조직신학자 된 분’이라 하겠다.”
51) 서영일, 『박윤선의 개혁신학 연구』, 장동민 역 (서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0); 장동민, 『박형룡의 신학 연구』, 271, 298.
52) 박용규,『한국교회인물사(4)』(서울:복음문서선교회출판부, 1975, 125; 한병기, “탁월한 개혁주의 신학자,”『죽산 박형룡 박사의 생애와 사상』, 18453) 박형룡,『교의신학』, 전7권 (서울: 백합출판사, 1964-1973). 이 교본은 1977년에 간행하기 시작한 『박형 룡 박사 저작전집』, 1-7권으로 출간되었다. 서문을 바꾼 것 외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기 때문에 이 논문에서는 후자의 판본에서 인용을 했다.
54) 박형룡,『교의신학-인죄론』(서울: 백합출판사, 1968), 머리말. 박형룡은 다음과 같이 고백하기도 한다: “이 책의 기초가 된 벌ㅤㅋㅗㅍ씨의 『조직신학』은 오늘날 보수신학계에서 널리 애독되고 있다. 1955년 이른 봄 여행 중에 그 저자를 방문하여 그의 저서에 크게 所負있음을 말하니 그는 웃으며 대답하되 「우리 두 사람은 도립을 함께 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 책의 배경에는 또한 하지, 월필드, 땝네, 쉐드, 스믿, 카이퍼, 빠빙크, 보스(Hodge, Warfield, Dabney, Shedd, Smith, Kuyper, Bavinck, Vos)등 많은 개혁파 대표적 신학자들의 정통적인 신앙 사조가 움직이고 있다. 그 선진 권위자들을 통하여 전해진 개혁파 신학의 정통을 되도록 정확히 소개하는 것이 이 책의 사명이다. 이것이야말로 그 선진 권위자들로 더불어 도립을 함께 하게 되는 태세다. 그리고 이 책이 이 같은 태세를 취함은 선진 권위자들은 신학 입장에서 성경을 하나님의 무오한 말씀으로 믿고 성경으로 더불어 도립을 함께하려 하였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55) 이종성, “박형룡과 한국 장로교회,” 201.
56) 최덕성, “박형룡 신학 전통,” 『고신의 인물과 신학 사상』(서울: 영문, 1996), 78.
57) 한숭홍, 『한국 신학 사상의 흐름(하)』(서울: 장신대학교출판부, 1996), 109.
58) 서철원, “박형룡 박사의 조직신학,” 『죽산 박형룡 박사의 생애와 사상』, 445, 450.
59) 박형룡,『교의신학-서론』(서울: 한국기독교교육연구원, 1988), 85.
60) 박형룡,『교의신학-서론』, 85. 성경과 신도게요의 관계에 대한 이러한 박형룡의 사고는 교의신학 방법론을 논의하는 중에도 드러난다: “교의학자는 자기 교회의 신도게요에 입각하나, 오히려 자기의 사상 체계의 구성은 성경에 나타난 논거 위에서 추진하는 것이다.”(박형룡, 『교의신학-서론』, 103).
61) 박형룡,『교의신학-서론』, 139.
62) 박형룡,『교의신학-서론』, 142.
63) 박형룡,『교의신학-서론』, 274.
64) 박형룡,『교의신학-서론』, 277.
65) 박형룡,『교의신학-서론』, 279.
66) 박형룡,『교의신학-서론』, 286.
67) 박형룡,『교의신학-서론』, 345.
68) 박형룡,『교의신학-서론』, 345-46. 브릭스-워필드 논쟁은 박형룡이 1년 전에『신학지남』
에 기고한 “성경 영감의 교회적 교리”에서도 이미 소개한 바 있다( 박형룡,『신학논문(상)』, 125-126).
69)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을 원용하는 곳은 다음과 같다: 박형룡,『교의신학-신론』(서울:한국기독교교육연구원, 1988), 78, 142, 198, 199, 429,
70) 박형룡,『교의신학-신론』, 220.
71) 박형룡은 하나님을 하나님되게 하는바 종적인 특이성을 설명하기 위해서 소요리문답 4문을 인용하며(박형룡,『교의신학-신론』, 78), 삼위일체 교리의 간명한 정의를 내리기 위해서 소요리문답 6문을 인용한다(박형룡,『교의신학-신론』, 198).
72) 박형룡,『교의신학-신론』, 251.
73) 박형룡,『교의신학-신론』, 285-86.
74) 박형룡,『교의신학-신론』, 290-91.
75) 박형룡,『교의신학-신론』, 298-99.
76) 박형룡,『교의신학-신론』, 299, 301.
77) 박형룡,『교의신학-신론』, 316. Charles Hodge, Systematic Theology, vol. 1 (New York: Scribners, 1872), 317.
78) 박형룡,『교의신학-신론』, 427. 박형룡이 이 부분에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만을 언급하는 이유는 그가 섭리론 부분을 증보할 때에 G. C. Berkouwer, The Providence of God, trans. Lewis B. Smedes (Grand Rapids: Eerdmans, 1952)를 많이 참조하였기 때문이다.
79) 박형룡,『교의신학-신론』, 433. 그는 “웨스터민스터 신도게요는 죄의 허용에 제한이 결부되어 있다는 것과 죄악성은 피조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강조한다.”라고 논평한 후에 5장 4절을 인용한다.
80) 박형룡,『교의신학-인죄론』(서울: 한국기독교교육연구원, 1983), 56, 96. 소요리문답 10문은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정의내리고 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남녀로 지으시되 자기의 형상대로 지식과 공의와 거룩함이 있게 지으사 모든 생물을 주관하게 하셨다
(창 1:27, 골 3:10, 엡 4;24, 창 1:8)”(『헌법』, 31).
81) 박형룡,『교의신학-인죄론』, 171.
82) 박형룡,『교의신학-인죄론』, 171.
83) 박형룡,『교의신학-인죄론』, 208-209.
84) 박형룡,『현대신학비평(하)』, 382.
85) 박형룡,『교의신학-인죄론』, 216-17.
86) 박형룡,『교의신학-인죄론』, 265.
87) 박형룡,『교의신학-인죄론』, 276-77.
88) 박형룡,『교의신학-인죄론』, 295.
89) 박형룡,『교의신학-인죄론』, 294.
90) 박형룡,『교의신학-인죄론』, 303-25.
91) 박형룡,『교의신학-인죄론』, 303.
92) 박형룡,『교의신학-인죄론』, 313-14.
93) 박형룡이『교의신학』최종 준비하는 과정에서 네덜란드의 개혁신학자 G. C. Berkouwer(1903-96)의 Studies in Dogmatics (총 14권) 시리즈를 얼마나 어떤 형태로 참고했는지에 대한 분석은 이상웅, “박형룡과 화란개혁주의 신학과의 관계 연구,” 66-126을 보라.
94) 박형룡,『교의신학-기독론』(서울: 한국기독교교육연구원, 1988), 144.
95) 박형룡,『교의신학-기독론』, 145.
96) 박형룡,『교의신학-기독론』, 177-185.
97) 박형룡,『교의신학-기독론』, 184-85.
98) 박형룡,『교의신학-기독론』, 224. 박형룡은 표준문서의 구체적인 전거를 밝히지 않는데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8장 4절 끝부분을 염두에 둔 것 같다.
99)『헌법』, 294(“세상 끝에 천사들을 심판하러 오실 것이다.”).
100)『헌법』, 294, 281-82.
101) 박형룡,『교의신학-기독론』, 71, 132, 146, 166, 188, 213,102) 네덜란드에서는 이상의 삼대 신앙고백서를 ‘일체성을 위한 3대 신조(De drie formulieren der eenheid)"라 고 부른다. 이 신앙고백서는 분열이 아니라 일치의 도구라는 뜻이 담겨진 표현이다(유해무,『헤르만 바빙크』 [파주: 살림, 2004], 19).
103) 베르까워의 3부작이란 Faith and Justification (Grand Rapids: Eerdmans, 1954), Faith and Sanctification (Grand Rapids: Eerdmans, 1952), Faith and Perseverance (Grand Rapids: Eerdmans, 1958)을 가리킨다. 이 세 저서들로부터 박형룡이 직간접적으로 30-1, (41-44), (156), (286), 289-290, (352-5), 357, (364-6), (375-7), 376, (377-384), 384, (386-391), (397-401), (401-7), (407-410) 등이다. ( )에 있는 쪽수는 박형룡이 간접적으로 베르까워의 저술을 사용한 경우를 논자가 대조해서 발견해낸 것들이다.
104) 박형룡,『교의신학-구원론』(서울: 한국기독교교육연구원, 1988), 31-32.
105) 박형룡,『교의신학-구원론』, 73.
106) 박형룡,『교의신학-구원론』, 82.
107) 박형룡,『교의신학-구원론』, 85.
108) 박형룡,『교의신학-구원론』, 119.
109) 『헌법』, 297. 박형룡은『교의신학-구원론』, 132에서 유효적 소명의 정의내리기 위해서 소요리문답 31문을 인용하고 있고, 아울러서 신앙고백서 10장 1, 2절도 언급한다. 그리고 177쪽에서는 다시 한 번 신앙고백서 10장 2절이 중생을 유효적 소명에 포함시켜 묘사한다고 하면서 인용한다.
110) 박형룡,『교의신학-구원론』, 139.
111) 박형룡,『교의신학-구원론』, 143. 박형룡은 146쪽에서는 10장 3절을 인용하기도 했고, 영아와 저능자의 중생 문제를 다루면서 동일한 부분을 인용하기도 했다(박형룡,『교의신학-구원론』, 182-83쪽).
112) 박형룡,『교의신학-구원론』, 150.
113) 박형룡,『교의신학-구원론』, 151.
114) 박형룡,『교의신학-구원론』, 223-24.
115) 박형룡,『교의신학-구원론』, 232. 11장 6절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구약 아래서 신자들의 칭의는 이 모든 점에서 신약아래 신자들의 칭의와 동일하였다.”(『헌법』, 301).
116) 박형룡,『교의신학-구원론』, 251.
117) Berkhof, Systematic Theology, 508; 박형룡,『교의신학-구원론』, 264-65.
118) 박형룡,『교의신학-구원론』, 265.
119) 박형룡,『교의신학-구원론』, 274-75. 박형룡은 성화의 정의를 내리기 위해서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3장 1절과 소요리문답 35문을 인용하고 “대요리문답(75)은 이 소요리문답의 진술을 부연한 것 뿐이라”고 평한다(박형룡,『교의신학-구원론』, 241).
120) 박형룡,『교의신학-구원론』, 287.
121) 박형룡,『교의신학-구원론』, 297.
122) 박형룡,『교의신학-구원론』, 385-86.
123) 박형룡,『교의신학-구원론』, 389: “예증하면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17장)은 견인이 하나님의 선택의 작정의 불변성에 의뢰함을 첫째로 말하나 이것은 또한 그리스도의 공로와 대언의 효력, 신자들 안에 성령과 하나님의 씨의 거주, 은혜 언약의 성질 등 여러가지에 의뢰함을 지적하였다.”
124) 박형룡,『교의신학-구원론』, 395.
125) 박형룡,『교의신학-구원론』, 396.
126) 박형룡,『교의신학-교회론』(서울: 한국기독교교육연구원, 1988), 35.
127) 박형룡,『교의신학-교회론』, 42-43. 박형룡은 신앙고백서 25장에서 무형교회와 유형교회의 좋은 정의를 볼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박형룡,『교의신학-교회론』, 46).
128) 박형룡,『교의신학-교회론』, 48.
129) 박형룡,『교의신학-교회론』, 66.
130) 박형룡,『교의신학-교회론』, 120-21.
131) 박형룡,『교의신학-교회론』, 164.
132) 박형룡,『교의신학-교회론』, 165.
133) 박형룡,『교의신학-교회론』, 186.
134) 박형룡,『교의신학-교회론』, 206.
135) 박형룡,『교의신학-교회론』, 226.
136) 박형룡,『교의신학-교회론』, 235, 228.
137) 박형룡,『교의신학-교회론』, 258-260. 그러나 박형룡은 웨스트민스터 신경조문은 “그 유효성이 성령의 사역과 말씀의 감화에 의뢰한다는 것을 강조함이요, 결코 집례자의 신앙적 준비의 가치를 부정함은 아닐 것이다”라고 해명하기도 한다(박형룡,『교의신학-교회론』, 258).
138) 박형룡,『교의신학-교회론』, 281, 290, 296.
139) 박형룡,『교의신학-교회론』, 297. 특히 신앙고백서 28장 4절에 의하면 “믿는 일친이나 양친의 영아들도 세례를 받을 것이다”라고 진술하고 있다(박형룡,『교의신학-교회론』, 306). 그리고 영아세례 후의 은혜 강화에 대해서 설술하고 있는 28장 6절을 그는 긍정적으로 인용 하기도 했다(박형룡,『교의신학-교회론』, 310).
140) 박형룡,『교의신학-교회론』, 301.
141) 박형룡,『교의신학-교회론』, 320, 327.
142) 박형룡은 성찬의 의미와 내포에 대해서 소요리문답 96문과 대요리문답 168문을 인용하여 정의내린다(박형룡,『교의신학-교회론』, 338).
143) 박형룡,『교의신학-교회론』, 343.
144) 박형룡,『교의신학-교회론』, 348.
145) 박형룡,『교의신학-교회론』, 367,
146) 김길성에 의하면 이러한 제목의 차이는 박형룡이 벌코프를 맹종하지 않았다고 하는 증거가 될 수 있다(김길성, “박형룡 박사의 내세론 연구,”『죽산 박형룡 박사의 생애와 사상』, 455이하).
147) 박형룡,『교의신학-내세론』(서울: 한국기독교교육연구원, 1981), 123.
148) 박형룡,『교의신학-내세론』, 125, 126. 박형룡은 대요리문답 86문도 인용한다.
149) 박형룡,『교의신학-내세론』, 129. 신앙고백서 32장 1절, 대요리문답 36문, 소요리문답 37문을 지시한다.
150) 박형룡,『교의신학-내세론』, 147.
151) 박형룡,『교의신학-내세론』, 178.
152) 박형룡,『교의신학-내세론』, 262.
153) 1967년 신앙고백서의 작성 배경과 그 신학적 내용의 분석에 대해서는 오덕교,『장로교회사』, 341-43과 Jack Rogers, Presbyterian Creeds, 차종순 역,『장로교 신조』, 223-51을 보라. 전자는 비평적 입장에서, 후자는 찬동하는 입장에서 쓰여진 글이다.
154) Jack Rogers, Presbyterian Creeds, 차종순 역,『장로교 신조』, 232에서 재인용.
155) 박형룡,『신학논문(상)』, 207-14.
156) 박형룡,『신학논문(상)』, 214.
157) 박형룡,『신학논문(상)』, 215.
158) 박형룡,『신학논문(하)』, 402.
159) 박형룡,『신학논문(하)』, 403.
160) 박형룡,『신학논문(하)』, 409.
161) 박형룡,『신학논문(하)』, 409.
162) 박형룡,『신학논문(하)』, 342.
163) 박형룡,『신학논문(하)』, 344.
164) 이 글은 박형룡,『신학논문(하)』, 389-402에 수록되어 있다.
165) 이 글에 대한 분석은 이상웅, “박형룡과 화란개혁주의 신학과의 관계 연구,” 120-25를 보라.
166) 박형룡,『신학논문 (하)』, 394, 398.
167) 박형룡,『신학논문 (하)』, 390.
168) 최덕성, “박형룡 신학 전통,” 76.
169) 박형룡,『신학논문 (하)』, 402
170) 박형룡,『신학논문 (하)』, 398-99.
171) 박형룡,『설교(3)』(서울: 한국기독교교육연구원, 1988), 345-52. 박형룡이 서거하기 43일 전인 1978년 9월 12일에 행한 특강 제목은 "정결한 교회“ 였다.
172) 박형룡,『설교(3)』, 352.
173) 박형룡,『설교(3)』, 352.
174) 장동민,『박형룡의 신학 연구』, 217.
175) Berkhof, Systematic Theology, Edinburgh: Banner of Truth Trust, 1988, 470; 박형룡,『교의신학-구원론』, 139(웨스트민스터 신앙게요서 X. 2); Berkhof, Systematic Theology, 508; 박형룡, 『교의신학-구원론』, 262(웨스트민스터 신앙게요서 XVIII).
176) Berkhof, Systematic Theology, 441에서 네덜란드 신앙고백서 제35조를 인용하고 있는데 반하여, 박형룡, 『교의신학-구원론』, 82에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게요서 XXIII.1을 대체 인용한다. 그리고 벌코프가 직접적 중생(immediate regeneration)을 논의하면서 CRC 교단이 수용한 Conclusions of Utrecht을 인용하고 있는데 반하여(Systematic Theology, 476), 박형룡은 웨스트민스터신도게요서 X.2.3을 대체 인용한다(『교의신학-구원론』, 177).
177) 박형룡,『신학논문 (하)』, 394, 398.
178) 박형룡,『현대신학비평(상)』, 44: “그러므로 교회의 신조를 공격함은 후대인의 신학에 반항함이 아니요, 바로 성경 진리에 반항하는 것이다.”
http://www.amen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0270
https://cafe.naver.com/data24 기독교 자료 (네이버 카페)
<박윤선(좌)과 박형룡(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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