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 이단 등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에 나타난 교회론과 가정 교회 비판

Sola. 2024. 10. 4. 06:00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에 나타난 교회론과 가정 교회 비판

 

글쓴이: 미상

 

 

Ⅰ. 서론

 

A.연구동기와 목적

 

한국 교회는 귀한 신학적 유산 위에 세워졌다. 개혁주의 신학을 바탕으로 하여 보수적 신앙을 유지하고 그 위에서 교회를 이루어 나갔다. 이런 모습은 교회와 교단이 개혁주의 신앙 고백문서들을 받고 이를 가르치고 배우며 실천해 나가는 모습을 통해 나타났다. 교회 역시 이를 바탕으로 세워져왔다.

 

그러나 지금의 현실은 매우 혼란스러운 양상이다. 개혁주의 교회관은 더 이상 소리를 내지 못하고 오직 양적인 성공만을 거둘 수 있는 여러 전략들과 프로그램들이 마치 참된 교회의 원리인양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이 논문은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의 정수인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에 나타난 교회론을 논하고 이를 바탕으로 “가정교회”를 비판하고자 한다.

 

 

 

B. 연구 방법과 범위

 

본 논문은 먼저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 25장에 나타나는 교회에 대한 가르침을 분석하고 이해하여 이를 통해 개혁주의 교회관을 정리하고자 한다. 이해를 위해 다른 고백문서들을 인용하도록 할 것이다. 이어서 가정교회를 비판하고자 한다. 먼저 가정교회가 무엇인가에 대한 설명을 하고, 뒤 이어 앞에서 정리된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에 나타난 교회론을 비추어 가정교회의 오류들을 지적하고자 한다.

 

본 논문은 Joel Beeke와 Sinclair B. Furguson이 편집한 “Reformed Confessions - Harmonized with an Annoted Bibliography of Reformed Doctrinal Works”에 나타난 분류에 의하여 각 고백문서들의 항목을 정했다. 이 책은 개혁주의 신앙고백서들을 신학적 주제별로 잘 정리하여 개혁교회의 신앙교육에 매우 큰 유익을 준다. 그리고 G.I 윌리암슨과 A.A.하지가 쓴 해설서들을 주 텍스트로 삼을 것이다.

 

그리고 가정교회에 대한 내용은 2007년 3월 20일~25일 열린문 교회에서 열린 “제36차 목회자초청 가정교회 세미나”자료집과 인터넷 사이트 휴스턴서울침례교회, 가정교회 사역원을 참고하였다. 원래는 『구역조직을 가정교회로 바꾸라』를 가정교회에 대한 텍스트로 삼으려 했으나 실제 가정 교회를 운영하는 지침서이자 가장 중요한 핵심들이 잘 정리된 자료집을 참고하였다.

 

 

 

Ⅱ. 본론

 

개혁교회는 종교개혁 당시에는 로마 카톨릭의 오류를 논박해야 했고 이후에도 다양한 신학적 공격에 대항해야 했다. 이를 위해 개혁교회는 외부적으로는 철저하게 성경을 중심으로 한 신학적 논증을 했고, 내부적으로는 신자들을 교육하는 데에 힘을 기울였다. 이러한 논증과 교육의 정수는 바로 신앙고백 문서들이다. 이 문서들을 통하여서 신자들은 자신들의 믿는 바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있었으며 교회들은 이를 따라 신자를 교육하고 교회를 이루어가며 개혁교회의 전통을 유지하였다.

한국의 장로교회는 이러한 신학적 바탕 위에 세워졌다.

 

 

A.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에 나타나는 교회론

 

가.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의 배경과 의의

 

웨스트민스터 회의는 1643년 영국에서 회집되었다. 151명의 총대(평신도 30명, 군주 10명, 하원의원 20명, 목사 121명-대부분은 장로교 소속)들이 1643년 7월 1일에 모여 1649년 2월 22일까지 약 5년 6개월에 걸쳐 1,163회의 정규 모임을 통해 신앙고백문서 및 요리문답을 작성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는 모두 33장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안에는 성경관, 신론과 기독론, 예정론, 인간론, 구원론, 교회론, 성례, 주일성수에 대하여 다루고 있다. 이는 조직신학의 각론을 모두 다루고 있으며 신앙의 실제에 대한 자세한 가르침이라 할 수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의 의의와 특징에 대하여 김영재 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신앙고백서는 시대마다 그리스도의 교회가 잘못된 가르침에 반대하여 성경의 진리를 변호하고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교 교회의 신앙을 가르치며, 교회가 당면하는 문제들이나 신자들이 생활하는 데서 부딪치는 문제들을 해결하며 지도해야 할 필요성에서 작성된 것이다. 1647년 영국서 만들어진 본 신앙고백서는 구원을 위한 기본 교리들에 관하여 그 어느 신앙고백서에서 보다 잘 설명하고 있음을 많은 사람들이 인정한다.

 

특히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는 성경에 가장 충실한 고백서라고 인정 받고 있다.

 

개혁주의 신앙 고백들이 예외 없이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으로 강조하고 있음을 보는데, 그 가운데서도 본 신앙고백서가 그 점을 가장 많이 강조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즉 성경에 관하여 신앙고백서의 서두인 제 1장에서 10개항에 걸쳐 진술하고 있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우리는 다만 성경에서 얻는다는 것과 성경만이 우리의 신앙과 생활의 규범이 된다는 견해를 우선적으로 밝히고 있다. 성경 말씀대로 철저하게 교회가 개혁되어야 함을 주장하고 성경 말씀을 따라 경건하게 살려고 노력한 청교도의 신앙이 그대로 반영되고 있음을 본다.

 

그러므로 개혁주의 신학의 전통을 따르는 장로교회는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를 가장 중요한 교리의 가르침이자 성경의 정확한 교훈으로 받고 이를 따르도록 요구 받는다.

 

우리 교단의 헌법에서도 이는 명확히 나타나고 있다. 대한예수교 장로회(합신) 헌법 제 1부 총론, Ⅱ. 선서. ‘2.하나님 앞에서의 선서’의 2항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2.우리는 성경의 무오를 기본교리로 가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그 대,소요리문답서 및 교회정치와 예배 모범을 성경적인 줄 알고 받아들이며, 또한 하이델베르그 신앙고백서를 성경적 고백서로 받고 .....

 

이는 선서만이 아닌 [Ⅳ.제1회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개혁) 선언문]에도 1항에서 명칭을 밝히고 이어 2항에서는 위와 동일한 내용을 선언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뿐만이 아니라 한국장로교회의 최초 신조인 12신조에서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성경을 밝히 해석한 책으로 교회와 신학교에서 가르쳐야 마땅하다고 선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개혁주의 교회를 지향하는 모든 장로교회는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를 배우고 따름이 마땅하다. 당연히 교회를 이루는 일 역시 본 고백서에서 말하는 바를 명확히 밝혀 교회의 기본 원리로 삼아야 하는 것 역시 당연한 일이다.

 

 

나.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에 나타나는 교회론

 

본 고백서 25장(25장. 교회에 관하여)은 교회에 관한 교훈을 나타내고 있다. 모두 6항으로 이뤄진 본 장은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에 대한 개신교회의 구분 방식이 명확하게 나타난다. 또 지상의 교회는 가장 순결한 상태라 할지라도 불완전한 교회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유일한 머리로서 그리스도께서 계심으로 보이지 않는 교회의 일부분이라고 설명한다.

 

1항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본 교회의 본질을 2항은 인간의 입장에서 본 교회의 본질을 가르쳐준다. 그렇다고 해서 별개의 다른 두 교회들인 유형교회와 무형교회가 있다는 것은 아니다.

 

 

a. 부름 받은 교회

 

영어의 “church”라는 말에 해당하는 말은 신약성경에서 에클레시아(εκκλεσια)이다. 이 말의 어원은 kalein(칼레인) 즉, “불러낸다.”며, 불러내서 한 독립단체를 만든다는 뜻이다. 곧 이 말은 성령의 효과적인 부르심을 가리키며 죽은 영혼들을 이 부르심으로 인해서 중생시키신다. 그러므로 교회라는 말은 한 집합 명사며, “부르심을 입은 자들”또는 “빼내심을 얻은 자들”또는 “신자들”을 총괄하는 단체이다.

 

즉, 교회란 신자,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의 모임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교회를 구성하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교회를 유지하게 하시는 분 역시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것이다.

 

곧 히12:23에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라는 말씀을 따라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머리 되시고 모든 세대의 모든 택한 받은 자들이 지체들로 구성되어 있는 몸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지체들 역시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예정을 입은”(엡1:11), “창세 전에 택하심을 입은”(엡1:4) 자들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공동체는 시간과 공간 양면에서 충만하여 보편성을 지닌다. 즉, 전 시간과 전 공간에 충만하신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전시공간에 존재하는 성도들의 모임을 교회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러한 보편적 교회를 고백서에서는 The catholic or universal Church라고 말한다.

 

이에 대하여 A.A.하지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카톨릭”(catholic)이라는 말은 보편적이라는 뜻이며, 여러 다른 곳과 다른 때에 존재하는 많은 성원들로 구성된 그리스도의 참 교회를 한 단체로 볼 때에, 보편교회라는 칭호는 합당하다. 따라서 부패하고 분파적인 저 로마 교회를 카톨릭이라고 부른 것은 심히 부당하다.

 

이러한 하지의 설명은 교회의 본질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신자들의 모임으로서 거짓된 교훈, 불신을 가진 자들은 들어 올 수 없음을 설명한다. 이는 교회의 보편성은 전시공간에 편재하신 하나님의 성품에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과 더불어 불신자, 배교자들이 교회에 들어 올 수 없고 현실에서는 어쩔 수 없이 그들이 들어와 있으나 그로 인해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가 변질되는 것은 아님을 설명한다.

 

 

b.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

 

거룩한 보편교회와 현재 나타나는 교회에는 분명히 차이가 존재한다. 전술한 바대로 하나님의 보편교회는 완전히 존재하나 이 땅 위의 보이는 교회들은 불완전한 요소들을 분명히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백서는 1항에서 교회의 대상과 본질에 대하여 설명하고 2항에서 비가시적 교회인 보편교회와 가시적 교회의 차이와 의미를 설명한다.

 

이에 대하여 김성봉 목사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25장에서는 보편적 교회로서 보이지 않는 교회와 보이는 교회에 대하여 비교적 자세하게 진술하고 있는데(1,2항),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의하면 전자는 1)택한 백성의 전체 수효이고, 2)그리스도를 그 머리로 모시고 그 아래에 하나로 모이는데 , 전에도 모였고 지금도 모이고 장차도 모일 것이며, 3)이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요, 그의 몸이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하시는 자의 충만이다. 이에 비하여 후자는 1)신약시대(복음시대)의 세계적 교회로서 어느 한 민족(예컨대, 구약시대에는 이스라엘)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2)전 세계에서 참 복음을 믿고 고백하는 모든 신자들과 그 자녀들로 구성되는데, 3)주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이요, 하나님의 가족이다.

 

보이지 않는 교회는 모든 민족과 모든 시대에 하나님에게서 선택된 모든 사람을 포함한다. 아담 이후로 모든 시대와 모든 민족 중에서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그의 구속의 능력을 체험한 사람들은 모두 구원을 받으며, 그리스도를 배척한 사람들은 모두 멸망하리라는 믿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 교회 전체가 이상적으로 완전해서 진정한 구성원 한 사람도 탈락되지 않으며, 거짓된 성원이 집단의 보존을 손상하지 않는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섭리하신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하나님의 예지와 예정 가운데서 분명한 확신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교회를 “보이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첫째로, 어느 한 곳이나 한 때에 눈에 보이는 부분들은 모든 민족과 시대의 성도들을 모두 합한 전체에 비하면 헤아릴 수 없이 작기 때문이다. 둘째로 우리가 볼 수 있는 부분들의 경우에도, 그 윤곽이 매우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즉, 교회의 일부인 듯한 사람들이지만 사실은 교회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 많으며 교회와의 결합이 분명하지는 않으나 실제로는 교회에 속한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에 보이는 이 교회를 통하여 참된 교회가 이 땅위에 보이게 된다. 하나님의 참 교회는 세상에서 살고 있는 자들을 통하여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그 자체를 드러내는 것이다. 전술한 바와 같은 여러 한계들로 인하여 제한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이 유형교회가 전세계에 걸쳐서 현재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인 성도들로 구성되기 때문에 보편적 교회로서의 특징을 함께 지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땅위의 보이는 교회들은 참 교회로서의 보편적 특징을 지니고 있으나 완전한 교회로서는 존재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완전한 교회를 실현하고자 하는 모든 시도는 결국 이 땅위에서는 실현될 수가 없다. 왜냐면 완전한 교회의 실현을 우리가 눈에 본다면 그 때는 이미 보이는 교회는 존재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땅위의 유형교회가 참되다라고 하는 것은 그것의 회원이 됨으로 해서 택함 받은 자로 동일시되기 때문이 아니라 그 교회가 참 신앙을 고백하고, 성경의 참된 교리와 성례들에 대한 가르침을 베풀고, 하나님의 율법에 의하여 요구되는 권징을 시행하기 때문이다. 말씀 전파와 성례와 권징을 충실히 행하는 곳에 참 유형교회가 존재하는 것이다. 이 땅위의 가시적 교회들이 참교회로서의 본질을 유지하는 것은 성경에서 요구하는 모든 사항들을 실행함으로서 증명되는 것이다. 곧 교회의 참됨은 구성원의 참됨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허락하시고 유지하게 하는 원리, 곧 하나님의 말씀과 섭리에 의하여 그 참됨이 증명되는 것이다.

 

사람을 교회의 중심 원리로 보는 것은 그러므로 옳지 않다. 만약 교회가 세상의 여타 단체들과 동일한 성격을 가진다고 하면 그 구성원에 의하여 그 모임의 본질과 정체성이 결정되는 것이 당연하다. 구성원들의 뜻과 의지, 혹은 구성원을 이끄는 리더에 의하여 그 단체가 운영되어야 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사람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단지 하나님께 택함 받은 백성이 모일 뿐이다. 교회를 결정하고 운영하며 이끌어가는 원리는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 밖에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에 의하여 고안되거나, 인간의 유익과 만족을 위하여 쓰이는 모든 원칙들은 하나님의 교회에서 없어져야 하며 오직 하나님의 말씀하심을 쫓아서 교회가 이뤄져야 하는 것이다.

 

참 교회가 가견적이 되는 것은 사람의 동일시(모두 택함 받은 자로 여기는 - 역자 주)의해서가 아니라 현존의 동일시에 의해서 말할 수가 있다. 그리스도의 참 교회(택함 받은 사람들로 구성된 그의 몸)는 어떤 사람들이 택함 받은 자들이라는 것을 드러냄으로 해서가 아니라 참 신자들이(비록 그들 가운데 위선자들이 섞여 있을지라도) 행하게 될 어떤 일들이 드러남으로 해서 자체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즉, 그들은 참 신앙을 고백하고, 참 유형교회에 요구하는 바의 말씀과 성례와 권징에 충실할 것이다. 택함 받은 자들의 이 같은 활동들이 현존함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몸이 가견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그러한 의미에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말씀과 성례와 권징”을(25장 3항) 보이는 교회의 가장 중요한 원리로 삼는 것이다.

 

 

 

c. 가시적 교회의 특징과 한계

 

본 고백서는 가시적 교회가 각 개 교회에 따라 가시적이 되는 정도에 차이가 있으며, 이는 각 개 교회가 “교리, 예배, 권징”에 의하여 판단해야 한다라고 설명한다.

 

3항에서는 유형교회의 의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3.이 보편적인 유형교회에게 세상 끝날가지 이 세상에서 성도들을 모으는 일과 온전케 하는 일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성직과 성경과 성례를 제정해 주셨다. 그리고 그의 약속을 따라 그 자신의 임재하심과 또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도들이 효과적으로 모아지며 온전케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보이는 보편교회에 구성요소를 명하셨다. 먼저는 구원 받은 성도들을 모으는 것이고 이들을 온전케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정확무오하며 절대적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주셨고 교회 안에 이를 실행할 성직과 성례를 두신 것이다. 참 진리 안에 있는 보편교회는 이 요소들이 모두 드러나야 하나 4항에서는 이를 실행하고 드러내 보이는 정도의 차이가 각 교회마다 있을 수 있다라고 가르친다. 즉, “복음의 교리를 가르치고 받는 정도, 이를 따라 성례를 행하는 정도, 공동예배를 순수하게 행하고 안 하고에 따른 더 순수함과 덜 순수함”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하지는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1) 교회들이 고백하는 교리의 순수성과 그 보존하는 예배의 순수성에 비례한다. (2) 교회들의 열성과 영적 성격과 힘에 비례한다. (3) 권징에 의해서 유지되는 성원들의 순결에 비례한다.

 

그러므로 교회의 건전함을 평가하는 요소는 복음과 성례와 권징 외에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즉, 말씀을 벗어나거나, 성례를 비성경적으로 행한다거나 권징을 제대로 실행하지 않는 교회는 보편적 참 교회의 형상을 이미 잃어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역사상 참 교회의 형상을 완전히 이룩한 교회가 존재했거나 존재할 가능성은 있는가? 이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다룬 바대로 참 교회의 형상은 이미 비가시적이기 때문에 이 땅 위에서 참 교회는 이뤄질 수 없다. 무엇보다도 그 구성원이 완전히 참 신자요 참 믿음을 지향하는 자들로 이뤄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 교회를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주장이다. 참 교회를 지향하는 교회는 있을 수 있다. 그 안에서도 좀 더 참 교회의 본질에 가까운 교회는 있을 수 있으나 참 교회 그 자체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자들은 초대교회를 가장 이상적이요 궁극적인 완전한 교회로 보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이는 틀린 관점이다.

 

유형 교회가 한때 완전한 순수성과 통일성을 지니고 있었던 것처럼 그 한 때 완전한 교회에 대해서 말하는 자들이 있으나 그들은 망상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초대교회의 경우,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얼마 못 가서,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그 매일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는 일이 있게 되었다.(행2:44, 6:1).

 

본 고백서 25장 5항은 “지상에서 아무리 순수한 교회들일지라도 혼잡함과 과오를 범한다.”라고 가르친다. 즉, 초대교회 역시도 혼잡함과 과오를 범할 수 밖에 없는 이 땅 위의 교회라는 것이다. 단지 그 내용에 있어서는 참 교회에 가까운 순수성을 지금보다는 더 많이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순수성 역시도 그들이 이루어 놓은 외적인 교회 구조, 형태 혹은 구성원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들 가운데 분명한 원리로 세워졌던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전파, 성례, 권징으로 이뤄지게 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 5항은 지상의 교회가 “극도로 타락하여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라 사탄의 공회당이 되기도 한다.”라고 설명한다. 즉, 이 땅 위의 교회의 불완전성은 전술했던 교회의 요소들을 굳건히 붙잡고 있을 경우에는 참 교회의 모습을 보이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교회로서의 본질은 물론이고 사탄의 모임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가리켜 윌리암슨은 “귀환 불능점”이라고 설명한다. 즉, 완전히 배교하여 더 이상 참 교회로 돌아올 가능성을 완전히 잃은 지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를 분간할 수 있는가? 어느 한 교회가 참된 교회인지 아니면 배교하여 사탄의 공회당으로 전락한 교회인지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이 무엇인가?

 

이에 대하여 『벨직 신앙 고백서』29항은 자세히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29장. 참 교회의 특징 및 거짓 교회와의 차이점

 

우리는 마땅히 성실하고 주의 깊게 참 하나님의 교회가 무엇인가를 말씀을 통해 알아야만 한다고 믿는데, 그 이유는 이 세상에 모든 이단도 스스로 교회라는 이름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 스스로 교회라고 부르는 온갖 이단들로부터 참 교회의 하나님이 반드시 구별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참 교회임을 알 수 있는 몇 가지 사실은 다음과 같다. 만일 복음의 순수한 교리가 전파되고, 그리스도에 의해 세워진 성례가 순수하게 이행되며, 교회의 가르침으로 인해 죄를 징벌하는 일이 일어난다면 이는 참 교회에 속하는 것이다. 요컨대 모든 일이 참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이뤄지며 동시에 말씀에 어긋나는 일이 제거될 때.....

 

거짓 교회란,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과 권위보다는 그들 스스로의 능력과 권위를 내세우면서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르고자 하지 않는 교회이다. 또한... 성례를 시행치 않고 그들 스스로의 생각에 맡긴 채 말씀에서 무언가를 더하는데,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보다는 사람들에게 더 의존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거룩하게 사는 자를 핍박하며 그들의 죄와 욕심과 우상숭배를 책망하는 자를 핍박하는 것이다.

 

 

벨직 고백서와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에서 공히 참된 교회와 거짓 교회를 나누는 기준으로 제시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말씀의 원리를 시행하는가이다. 바른 복음의 진리를 전파하고 지키며 말씀이 정하는 성례와 권징을 바르게 시행하는가가 바른 교회와 거짓 교회를 나누는 첫 번째 기준이다.

 

두 번째는 교회의 머리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따르는가이다. 벨직 고백서는 하나님의 말씀 보다, 혹은 그리스도의 가르침보다 인간의 능력과 사상을 더하거나 더 따르는 것을 거짓 교회의 기준으로 제시한다. 그래서 본 고백서 25장 6항에서는 로마 카톨릭이 교회의 머리가 되는 것을 거부하고 그가 적그리스도임을 분명히 한다.

 

본 고백서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교회의 본질은 말씀과 그리스도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 외의 것들이 교회 안에 들어오는 것을 거부하고 이미 들어와 있는 것들은 반드시 제거해야 함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가르침에 대하여 윌리암슨은 교회와 신자에게 있어서 교단 혹은 교회를 옮기는 문제에 대하여 심각하게 논한다. 만약 현재 자신의 교단 혹은 교회가 위에서 고백한 내용들로부터 심각하게 벗어나 “귀환 불능점”에 도달했다고 판단 될 경우에는 그 안에 머물지 말고 나와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특정한 교단을 떠나지 않고 그 안에 순종해야 할 이유도 있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 그 교단이 전체적으로 기초적인 순수성을 잃지 않고 참 신앙을 고백해야 하며,

 

2) 실재하는 그릇된 사상들을 대항하여 진리를 위해 싸우는 권한이 제한되어있지 않아야 하고

 

3) 진리를 옹호하고 교회의 순수성을 찾기 위한 적극적인 싸움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윌리암슨은 “보수적인 회중교회”, 혹은 “장로교회”라는 명칭에 의하여 교회의 본질을 여기지 말며 만약 그 안에 반진리적 요소들이 발견될 경우에는 더 순수한 교단, 교회로 옮기는 것이 합당하다고 말한다. 이는 종교개혁의 정신과 자유주의를 비롯한 여러 신학으로 인해 오염되었던 당시의 교회들과 교인들에 대한 권면이자 도전으로 받아들여진다.

 

 

d. 결론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는 당시에 일어나고 있던 합리주의와 인본주의 사상에 맞서서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를 대비시키면서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이 모든 것의 유일한 근거가 되어야 할 것을 강조하는데 역점을 두고 있다. 이는 본 고백서만이 아닌 종교개혁의 정신이었고 참된 신앙의 가르침으로 당연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 당연한 원리가 인간의 이성에 의하여 도전받던 시대였다.

 

본 고백서는 교회를 바라보는 관점에도 이와 동일한 자세를 유지한다. 교회를 인간의 모임이 아닌 철저히 하나님 중심에서 “부름 받은 신자의 모임”임을 강조한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은혜를 베풀지 않으시면 “교회”역시 이 땅 위에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이어서 전 시대와 공간, 민족에 걸쳐 존재하는 구원 받은 모든 성도의 모임인 보이지 않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의 반영으로 현재 이 땅 위의 교회들이 가지고 있는 보편성을 가지고 있으나 구성원과 운영의 한계를 지니고 있는 보이는 교회를 설명한다. 이 보이는 교회는 각 교회에 따라 정도의 차이를 가지는데 곧 그 안에서 선포되는 바른 말씀과 말씀이 명하는 성례의 실행과 이에 따른 권징의 정도에 의하여 결정된다. 이는 하지의 설명대로 “교회와 성도의 순수함의 척도”를 나타내는 것이다.

 

본 고백서는 교회를 향한 경고의 말씀을 빼지 않는다. 모든 교회가 불완전한 교회로서의 한계를 지니고 있는데 이것이 지나칠 경우 “거룩한 성도의 모임”이 아니라 “사탄의 공회”가 될 수 있음을 경고한다. 위에서 언급한 요소들을 소홀히 여기다가는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인간의 뜻과 창작물들이 교회를 장악하게 되고 이는 사탄에게 교회를 넘겨주고 마는 꼴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본 고백서는 매우 심각하게 우려를 표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 교회들에게 주어지는 강력한 경고이다. 많은 교회들이 본 고백서는 고사하고 성경의 가르침 조차 따르지 않는다. 오직 말씀에서 허락하는 것만을 실행한다라는 칼빈의 원칙은 개혁주의 교회의 가장 중요한 원리로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이는 또 성경의 가르침이기에 더욱 권위를 가지는 것이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만이 가능하다. 왜냐면 하나님은 자족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것이 하나님께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것으로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없다.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만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교회들은 이미 이 사실을 망각하고 바른 복음의 진리를 전달하는 일과 바르게 성례를 집행하는 일, 권징을 가볍게 여기고 있다. 더 나아가 모든 인간의 창작물과 사상을 허락하지 않는 고백서와는 반대로 “그들 스스로의 능력과 권위를 내세우면서” 교회를 점점 하나님의 말씀은 사라지고 인간의 것으로 채워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때에 본 고백서의 교회론은 우리를 매우 심각한 반성과 자성으로 인도한다.

 

본 고백서는 엄중한 경고와 함께 매우 희망적인 사실을 가르친다. 25장 5항은 이러한 극도의 타락과 불경건함 속에서도 “지상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에게 예배 드리는 교회가 있을 것이다.”라고 소망을 안겨준다. 이러한 교회를 찾아야 하고 또 이뤄가야 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의 소명이다.

 

 

 

B. 『가정교회』의 교회론과 문제점

 

가. [가정교회]의 배경과 원리

 

[가정교회]는 미국 휴스턴의 [휴스턴 한인 침례교회]의 최영기 목사가 1993년부터 구역조직을 가정교회로 전환하면서 양적인 성공을 이뤄낸 교회 프로그램이다. 이후에 한국에 소개되면서 최근에는 가장 각광 받는 교회 조직으로 많은 교회들에서 운영되고 있다. 실제로 많은 교회들은 이를 통하여 긍정적인 결과를 얻어내고 그로 인해 가정교회에 대한 이미지가 매우 호의적이다.

 

가정교회 사역을 총괄하고 있는 미국 [가정교회사역원]이 밝히는 [가정교회]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가정교회란

 

1.가정교회는 신약 교회의 회복을 목표로 한다.

 

2.가정교회는 예배 의식 중심의 수동적인 신앙생활과 가르쳐서만 제자를 만들려는 성경공부 중심의 제자 훈련에서 탈피하여 불신자에게 전도하여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케하고, 섬김의 삶을 보여줌으로서 제자를 만들어내어 '영혼 구원하여 제자 만드는'교회 본연의 목적에 충실한다.

 

3.가정교회는 목양자처럼 목양을 하는 평신도를 목자로 세워 6-12명이 가정에서 매주 모여 예배, 교육, 친교, 전도, 선교등의 지역교회 직능을 다하는 공동체이다.

 

4.가정교회는 성경적으로 교회 사역을 분담하여 담임목사는 교회 전체를 이끌어가는 리더십을 발휘하고 말씀과 기도에 전념하며 평신도들을 훈련시켜 이들로 하여금 전도, 심방, 상담을 비롯한 목양 사역을 감당케하고, 교회 봉사 활동을 통하여 교회를 세워가도록 한다.

 

5.평신도 사역자는 가정교회에서 섬김을 통해 목회자가 경험하는 사역의 열매와 어려움 등을 체험함으로써 목회자의 심정을 이해하는 진정한 동역자 의식을 갖게 된다.

 

6.솔직한 삶의 나눔을 통한 구체적인 기도응답을 통하여 하나님을 경험하고, 삶이 변화되어지며, 배우고 익힌 말씀을 실습할 수 있는 현장을 제공함으로써 신앙고백에 합당한 삶을 사는 확실한 제자를 만들어낸다.

 

위의 정의에서는 크게 세 가지 목표를 알 수 있는데 첫째는 신약교회로의 회복, 둘째는 기존교회의 한계 극복, 셋째는 평신도의 목회자화 이다. 초대교회의 주된 교회 형태였던 가정교회를 현재 가정교회의 성경적 근거로, 기존교회의 문제점을 제시하여 현재적 필요성과 당위성을, 평신도의 참여를 적극 권장하여 그 실천적 가능성과 목표를 제시하고 있다.

 

이를 위해 [가정교회]는 기존의 교회 체제와 명확한 구분을 주장한다. 특히 셀 교회, 구역모임, 제자훈련과의 차별성을 주장한다. 이를 정리하면 아래의 표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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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통해서 가정 교회의 몇 가지 원리를 알 수 있다.

 

첫째는 가정교회는 독립된 교회를 지향한다. 기존의 구역모임은 교회에 소속되어 일정 부분의 역할을 감당하나 본 교회의 지도와 지시에 순종해야 했으나, 가정 교회는 독립된 개체로서 지역 교회의 역할을 감당하고 더 나아가 기존의 전통적인 지역교회는 가정 교회들의 연합체로서 [연합교회]로 변화되는 것이다.

 

둘째는 전도 중심적 원리를 알 수 있다. 최대한 불신자들에게 교회의 문턱을 낮추어서 부담 없이 교회에 들어올 수 있도록 한다. 후에 “성경공부”에 대해서 다루겠지만 주 초점은 불신자를 초청하는 데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셋째는 성경 교육 보다는 삶의 실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지식의 전달로서의 성경공부를 지양하고 실제의 삶을 나누며 함께 하는 경험적 전달을 중점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정리하면 가정 교회는 기존의 교회 체계를 변화하여 평신도에게 목회자와 같은 권한과 책임을 부여하여 평신도 스스로에 의하여 작은 교회(가정교회)가 목양되고 이를 통해 전도하는 교회 체계이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가정교회의 지역교회화와 평신도의 목회자화라고 할 것이다.

 

휴스턴침례교회와 가정교회사역원에서 제기하는 가정 교회에 대한 목적과 정의와는 별도로 신약신학에서 가정교회에 대한 문제는 2차 세계대전 직전부터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데 그 관심의 목적은 현재 논하고 있는 가정교회의 주장과는 사뭇 다르다.

 

가정교회 문제는 2차 세계대전 직전부터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 전까지 신약신학은 이 문제를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오면서 두 가지의 이유로 많은 관심을 끌었다.

 

첫째,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현대화가 가속되고 이에 따라 문화가 고도화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불행하게도 가정의 분열 현상이었다. 이런 이유로 신약학회가 초대교회의 가정교회에 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들은 이를 통해 가정 파괴의 문제를 극복하려 하였다.

 

둘째는 고고학적 성과이다. 80년대 회당이나 가정교회로 추정되는 집터들이 발견되고 로마시대 가옥구조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면 초대교회 가정 교회에 관한 연구에 활기를 띄게 된 것이다.

 

특별히 이 주제가 현재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대부분의 이단들이 가정교회의 형태를 모방하여 형성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정교회의 본질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없으면 그들을 반박할 수 없으며, 또한 그들이 신약교회의 형태를 왜곡하는 것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실제 교회에서의 운영은 어떻든 간에 신학적 관점에서는 그 관심의 시작부터 지극히 인간의 현실문제에 기인한 것이고 특별히 이단에 의한 교회론의 혼란을 막기 위해 가정 교회의 연구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던 것이다.

 

 

나. [가정 교회]의 문제점

 

a. 명칭의 문제

 

무엇보다 먼저 [가정교회]라는 명칭의 정당성을 의심할 필요가 있다. [가정교회]는 이 명칭을 통하여 이 시스템이 초대교회의 [가정교회]와 동일함을 나타내고 동시에 [셀 교회]와의 차별성을 나타낸다.

 

자료를 살펴보면 초대교회는 [가정교회]였으며 이 가정교회의 형태는 현대의 필요를 채우고 지금의 [가정교회] 역시 초대교회와 동일하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는 몇 가지 오류와 억측이 있다.

 

먼저 초대교회 당시의 [가정교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실제로 초대교회는 가정교회의 형태였음은 분명하다. 초대 교회는 가정에서 모였고 성경의 여러 곳에서 이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초대교회 당시의 [가정교회]는 지금 [가정교회]의 논리와 마찬가지로 가장 궁극적으로 지향하던 교회의 형태는 아니었다.

 

초대교회 당시 가정 교회는 형태적으로 지역교회로 가기 이전의 단계였다. 즉, 당시의 사회적 배경상 가정에서 모였던 것이지 처음부터 가정 교회를 지향한 것은 아니었다. 초기의 기독교회는 가정교회, 가족교회, 그리고 지역교회가 병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A.D 3세기를 넘어서면서 핍박이 줄어들며 가정 교회가 점점 사라지고 지역교회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특별히 초대교회에서 가정교회가 주요한 형태로 나타난 것은 유대인들의 전통에 기인한다. 팔레스타인, 디아스포라 유대인, 개종한 이방인들은 이미 구약의 ‘쉐마’방식의 교육을 받았다. 이러한 교육은 주로 가정에서 이뤄졌다. 세례 요한의 부모와 디모데를 그 좋은 예로 들 수가 있다.

 

또, 초대교회의 가정교회는 핍박과 이단이라는 불안한 상황 속에서도 친밀감과 안정감을 주었다. 이는 초기 기독교에 대한 위험을 극복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정리하면 ‘가정교회’라는 형태가 궁극적인 교회의 지향점, 혹은 초대교회 본질적 요소라기 보다는 시대적, 역사적 배경에 의하여 생겨난 형태인 것이다. 그것을 마치 교회의 본질로 보는 것은 심각한 오해이다.

 

오히려 초대교회 당시 가정교회가 지니는 긍정적인 요소는 다른 곳에 있다. 외적으로 드러난 형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족, 가정에서 소규모 모임을 통해서 신앙고백의 일치와 바른 신앙 교육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즉, 초대교회의 본질을 회복한다는 것은 “교회가 집에서 모여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가 분명하고 정확한 신앙고백을 가지고 바른 말씀을 교육한다.”라는 의미인 것이다.

 

 

 

b.‘교회론’에 대한 혼란.

 

각각의 ‘가정교회’는 독립된 교회를 지향한다. 그래서 목회자의 역할을 각 목장의 목자가 담당하고 지역교회의 직능을 감당한다라고 설명한다. 여기서 말하는 지역교회의 직능은 “예배, 교육, 전도, 친교, 전도”이다.

 

이는 지극히 회중교회적 성격이다.

 

가정교회운동은 본래 회중교회에 들어맞는 운동이다. 개교회의 독립성과 완전성을 주장하는 회중교회는 주로 침례교 형태로 우리에게 소개되었다. 한국에 들어와 상황이 달라졌지만 알고보면 오순절교회도 회중교회 정치제도를 따르고 있었다. 회중교회는 장로제도가 없다. 대의정치가 직접민주정치제도를 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가정교회는 쉽게 접목될 수 있는 방법이다. 아니 회중교회가 좀 더 분화된 모습이 가정교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승구 교수의 지적대로 가정교회는 전형적인 회중교회이다. 교회조직을 최대한 간소화하거나 아예 없애고, 특히 목사와 장로의 모임인 당회를 전혀 불필요한 존재로 만들기 때문이다.

 

장로교의 교회는 회중교회와는 다른 성격을 가진다. 최소한 장로교의 신학 원리와 교회론을 받고 있는 장로교회는 가정교회의 성격이 맞지 않다는 것이다. 특별히 앞에서 살펴 보았던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의 교회론과는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와 제2스위스 신앙고백, 벨직 고백서,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에서 교회의 가장 중요한 표지로 “말씀, 성례, 권징”을 말한다. 그러나 ‘가정교회’의 원리들을 살펴 볼 때에 개혁주의 신앙 고백 문서들에서 나타나는 교회의 표지들은 정확히 나타나지 않거나 심각하게 왜곡된다.

 

먼저 “말씀”의 교육은 매우 축소되거나 심지어는 불필요한 것으로 취급되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목장을 목양하는 목자의 조건 중 하나는 “성경공부를 많이 하지 않아도 된다.”이다. 실제로 목자의 역할은 섬기는 역할이기에 그렇다라고 할 수 있는데 목장 모임 내에서의 성경공부가 차지 하는 역할은 매우 작다.

 

가정교회사역원에서 예시하는 전형적인 목장 모임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애찬

찬양 25분

광고 3분

성경공부 20분

나눔의 시간 1~3시간

중보기도 15분

선교와 전도 도전 15분

 

시간의 배분을 보더라도 성경공부는 이 모임의 중심에서 밀려나 있음을 볼 수 있다. 독립된 교회라고 하면서도 그 안에서 바른 말씀의 선포를 제한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고백과는 다르다. 특별히 목장에서 성경 공부를 인도하는 ‘목장 교사’의 역할에 대한 설명은 이를 더욱 분명히 나탄낸다. ‘목장교사’는 절대로 ‘목자’의 역할을 넘어서지 않게 한다. 물론 목장의 교인들을 돌아보고 리더하는 목자의 역할이 우선하는 것은 인정하나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일과 가르치는 일을 그저 여러 순서 중의 하나로 전락시켜 버린 것은 바른 교회의 표지와는 어긋나는 것이다.

 

실제로 초대교회의 가정 교회는 효과적인 성경 공부와 신앙훈련을 위한 모임의 성격이 더 강했다.

 

이러한 경향은 주일에 모이는 연합교회의 예배에 더욱 뚜렷이 나타난다. 주일 예배의 목적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라 “목장에서 맛볼 수 없는 은혜의 기회”를 제공하는데 있다. 이를 위해 여러 순서들이 없어지거나 추가된다. 교독문 읽는 순서가 없어지거나 찬양과 통성 기도 등이 추가된다. 가장 눈여겨 볼 것은 “가능하면 예배 시간에 간증을 넣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설교는 더욱 줄어들게 된다. 그리고 다른 공예배의 경우 더욱 심해져 아예 없어지거나 목자 모임, 목장 기도회등을 대체된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의 중심에서 밀려나고 목장의 유지와 관리, 만족을 위한 순서들로 채워지는 것이다.

 

성경공부에 대한 관점 역시 “말씀을 통한 신자의 훈련”이라기 보다는 새신자를 적응시키기 위한 도구로서의 관점이 강해 기존 신자의 훈련을 외면하는 경향이 강하다. 또, 바른 말씀의 전파 보다 목사의 신앙과 목회 철학을 전달하는데 목적을 두며 원할한 목장 운영을 위한 도구, 혹은 어떤 자격을 얻기 위한 코스 정도로 여기는 경향이 강하다.

 

둘째로 성례를 매우 가볍게 여긴다. 개혁주의 교회에서 성례는 매우 중요한 교회의 표지이다. 우르시누스는 “성례의 목적 중 하나는 바로 하나님의 참된 교회를 각종 분파와 이단들과 구별하는데 있다.”라고 설명했다. 그만큼 성례는 참된 교회에 있어서 결코 가볍게 여길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가정교회는 성례를 시행하지 않는다. 그런면에서 ‘가정교회’는 최소한 ‘교회’라는 이름을 사용해서는 안된다. 그냥 ‘가정모임’정도의 명칭만 사용해도 충분할 것이다. 만약 ‘가정교회’가 ‘지역교회의 직능을 지향한다.’라는 목적을 제시하지 않았다면 ‘성도의 모임’으로서의 ‘교회’라는 명칭이 어느 정도 가능하겠지만, 지역교회, 독립된 교회를 지향하면서 그 안에서 성례를 시행하지 않는 것은 교회에 대한 무지이자 욕심이다.

 

그런데 위의 순서에도 나타나듯이 “예찬식”이 목장 모임에 나타난다. 성찬을 시행하지 않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인지 반드시 예찬식을 갖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특별히 이 예찬식이 “성찬의 의미가 있다”라고 가르친다. “성찬의 의미가 있다.”라는 말과 “성찬이다.”라는 말 사이의 차이점을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성찬의 의미”자체가 가지는 성례적 성격에 의하면 이는 왜곡된 혹은 인간에 의하여 고안된 변형된 성찬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매우 심각한 교회의 표지의 훼손이다.

 

마지막으로 권징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실제 교회에서도 잘 드러나지 않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에 대한 이해도 전혀 나타나지 않는 것은 ‘가정교회’가 독립된 개체 교회로서의 정체성을 가질 수 없음을 반증하고 있다.

 

 

c. 교회 조직에 대한 잘못

 

가정 교회의 가장 중요한 원리는 평신도에게 목양을 맡긴다는 것이다. 즉, 목회자와 성도 사이의 역할 분담을 다시 조절한다. 가정교회 사명 선언문에서는 “목회자와 평신도 각자가 본연의 사역을 되찾도록 한다. 목회자는 성도를 온전케 하는 일과 (엡4:11~12상), 기도와 말씀선포(행6:2-4), 리더십 발휘에 집중한다. 성도들은 목양과 교회를 세우는 일을 한다.(엡4:12하)”라고 나타난다. 그러나 실제로는 성도들은 목양만이 아니라 성경을 가르치는 일과 성도들을 돌아보는 일까지 겸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이는 교회의 조직과 운영을 철저히 “회중교회의 시각”으로 본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교회의 조직과 직분은 이러한 관점과는 다르다. 성경은 가르치는 장로와 다스리는 장로를 통하여 교회의 말씀과 지도를 하도록 했고 집사들을 통하여서 과부와 고아를 돌아보는 일등을 위한 재정에 관련된 업무를 맡기도록 했다. 즉, 교회를 세우는 일은 ‘가정교회’의 사명 선언문처럼 평신도에 국한된 일이 아니라 모든 교회의 구성원들에게 주어진 일이었고 그 안에서 목양을 하거나 성경을 가르치는 일, 다스리는 일은 장로들에게 재정을 운영하고 구제하는 일은 집사들에게, 그 외의 교사와 여러 직분들을 통하여 교회를 섬기게 하셨다.

 

특별히 벨직 신앙고백서는 이에 대하여 명확한 교훈을 준다.

 

제30장 교회 행정과 직무

 

..참 교회가 주님께서 말씀 가운데에서 가르쳐주신 그 영적인 형태에 의해 다스려져야만 한다는 것을 믿는다..... 목사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이 강론되며 성례가 이뤄지고, 목사와 더불어 장로와 집사가 교회 회의를 구성하며....

 

 

제31장 목사, 장로 그리고 집사

 

..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 목사와 장로 그리고 집사가 주의 택함을 입어 하나님의 말씀이 지시해 주는 질서 속에서 ... 직무에 따라 뽑혀져야만 함을 믿는다. ....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목사는 그가 어떤 형편에 있든지 간에 유일한 목자요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섬기는 모든 목사들과 같이 동일한 힘과 능력을 가지는 것이다. ...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목사와 교회의 장로들을.. 존경할 자로 여기고.. 그들과 호평을 갖도록 해야 한다.

 

 

 

각 직분에 대한 뚜렷한 구분을 볼 수 있다.

 

더욱이 제2스위스 신앙고백에서는 이를 더욱 분명히 알 수 있다.

 

제18장. 교회의 사역자와 제도의 직분

 

하나님은 교인들을 자기에게로 모아 교회를 세우시고, 교회를 다스리실 때에 항상 사역자들을 사용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그러하시고 이 땅에 교회가 남아 있는 한 앞으로도 그러하실 것이다. 사역자를 처음 세우시고 그 제도와 직분을 마련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가장 먼저 하신 것이요, 사람에 의해서 새롭게 고안된 것이 아니다. ..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사역자로 세워서 사람들을 대신하신다.

 

...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라서 모든 교회들에 목사와 교사들을 세웠다. ... 그들을 통해서 오늘날까지 교회를 가르치시고 다스리고 계신다.

 

... 여기서 우리는 선택이나 파송이나 안수를 받지 않고 자기 스스로 행하는 모든 자들을 정죄한다. 또한 우리는 적합하지 않은 사역자들과 목사에게 요구되는 은사들을 지니지 못한 경우와 같은 자들을 사역자로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

 

 

 

교회의 조직은 세상의 단순한 조직과는 그 본질과 목적이 다르다. 세상의 조직은 조직의 유지와 성공을 위해 존재하지만 교회의 조직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 땅 위에 실현하기 위하여 존재한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하여 일하시는 일들을 이루기 위한 조직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모든 조직과 사역자들은 질서가 있고 각각의 역할이 구분되어 주어진다. 이는 어떤 자들을 교회에서 우대하고 어떤 자들은 차별하기 위함이 아니라 각자의 상황 가운데서 가장 잘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도록 하기 위한 조치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의 조직을 구성하는 원리와 이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도 하나님의 말씀이다. 목양은 단순히 성도들을 돌아보고 격려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적절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여 그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신자로 성숙해 나가도록 돕는 것이 목양이다. 그러므로 말씀의 중요성을 가볍게 여기거나 말씀 없이 목양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지 교회에 성실하거나 담임목사에게 충성된다는 이유하나만으로 목장을 세우고 그에게 목양을 맡긴다면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다스리는 신자가 아니라 목사 혹은 목자가 다스리는 신자를 만들 뿐이다.

 

교회의 조직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잘 전달하고 참 교회의 형상을 가장 잘 이루기 위해 하나님께서 만드신 원리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에 대해 성경은 우리에게 교훈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무시하고 전혀 다른 원리를 제시하는 것은 인간의 고안한 창작물로 하나님의 교훈을 대신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d. 결론

 

가정교회가 여러 가지 가시적 결과를 내놓음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를 따르고자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조금만 더 깊이 그 내용을 우리에게 있는 신학적 유산에 비추어 따져보면 이는 금방 그 오류가 드러나게 되어 있다. 최소한 개혁주의 신학과는 여러 면에서 차이가 남을 알 수 있다.

 

결정적으로 가정교회는 “인간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원리”이다. 지나간 시간 동안에 보여온 신실함과 지금 받는 훈련을 통해서 앞으로 기대되는 신실함에 의지하여 이뤄져 가는 것이 가정교회이다. 전적으로 인간의 신실함과 능력, 헌신에 의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한 본성이 그렇게 선한 결과만을 내놓지는 않는다. 즉,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한 반석위의 집이 아닌 인간의 너무나 쉽게 변하는 의지에 의존하는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은 교회인 것이다.

 

 

 

Ⅲ. 결론

 

한국 교회는 너무나도 자랑스럽고 소중한 신학적 바탕 위에 세워졌다. 초기 선교 때부터 하나님의 말씀 중심의 교회가 세워졌다. 선교사보다 성경이 먼저 번역되어 들어온 나라일 정도로 한국 교회는 말씀을 소중히 여겼다. 더욱이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와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을 일찍 받아들이고 그 교훈을 교회와 신학교에서 가르침으로 인하여 바른 신학적 유산들과 가르침을 유지할 수 있었다.

 

여러 혼란스러운 신학적 흐름에도 불구하고 건전한 신학을 그나마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신학이 교회의 주변부로 밀려난 상황에서 한국 교회는 교회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신학을 버리고 유행에 민감히 반응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개혁주의 신학은 그것이 가장 성경적이기에 가장 바른 신학이다. 그래서 우리는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을 견지하고 개혁주의 교회를 이 땅 위에 세우기 위하여 노력해 왔다. 그러나 그러한 신학적 노력은 이제 더 이상 환영 받지 못하고 오직 성공한 이론과 프로그램만이 교회의 주인되는 형국이 되고야 말았다.

 

오직 “말씀이 왕 노릇 하는 나라”를 소망한 청교도들의 신앙을 유산으로 물려 받았으나 이제는 그 마저 잃어버리고야 만 것이다.

 

‘가정교회’는 여러 가지 가시적 결과들과 장점들로 인하여 많은 관심과 환영을 받고 있지만 개혁주의 교회론과는 상당히 많은 차이점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별히 신앙과 교회의 실제를 다루는 고백 문서들과는 더욱 뚜렷한 차이가 나타난다.

 

바른 교회는 ‘형태’를 바꾸는 일로 이뤄지지 않고 ‘중심’을 바꾸는 일로 이뤄진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다시 교회에서 왕 노릇할 때에 비로서 교회가 참된 교회로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즉, 사람의 원리와 이론, 능력에 의지한 것이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 뜻을 이루는 교회가 바른 교회인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갱신은 말씀의 갱신이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우리는 다시 개혁주의 신앙 고백문서들에 귀를 기울이고 이를 연구하고 공부해야 할 것이다. 이를 근거로 우리 안에 있는 비진리적 요소들을 모두 제거하고, 참된 교회의 형상들을 이뤄가야 할 것이다.

 

본 논문에 있어서 아쉬운 점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웨스트민스터 고백서에 나타난 교회론을 좀 더 다루지 못한 것이다. 실제로는 그 외의 고백문서들에 나타난 교회론도 함께 다루고 싶었으나 하지 못하였다. 두 번째는 ‘가정교회’의 각론을 다루지 못한 것이다. 자료집을 통해서 발견한 다루어야 할 각론이 20여개가 넘는다. 그러나 본 논문에서는 총론적 성격만을 다루는데 만족하였다. 언제고 기회가 있다면 이 역시 자세히 다루기를 소망한다.

 

 

참고도서 목록

 

<동서>

 

개혁주의성경연구소.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와 한국 보수주의의 뿌리』.서울:개혁주의성경연구소, 1999

김영재. 『교회와 신앙고백』. 수원: 합동신학대학원출판부, 2002

박일민. 『개혁교회의 신조』. 서울: 성광문화사, 1998

김의환 엮음. 『개혁주의 신앙 고백집』. 서울: 생명의 말씀사, 2003. 2판

가정교회사역원. 『제36차 목회자초청 가정 교회 세미나』.서울:가정교회사역원, 2007

 

 

<역서>

 

윌리암슨, G.I.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 강해』나용화 역. 서울:개혁주의신행협회, 2003. 2판

하지, A.A.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 해설』 김종흡 역. 서울: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6

박윤선 역.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 서울:영음사, 1989

 

 

<양서>

 

Beeke, Joel R.; Ferguson, Sinclair B. ed. Reformed Confessions Harmonized. Grand Rapids:Baker Books, 1999

 

 

<강의록>

 

조병수. 『초대교회의 형성』수원:합동신학대학원 대학교, 2003년 2학기

 

 

<인터넷 사이트>

 

이성구. “이성구의 블로그”

가정교회사역원.

휴스턴서울침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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