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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Sola. 2024. 1. 6. 06:00

 

성경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조석만 목사

 

 

독서백편의통(讀書百遍意通)이란 말이 있다. 아무리 둔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글을 백번 쯤 읽으면 그 뜻이 통한다는 말이다. 그렇지만 성경은 무턱대고 백번 읽는다고 해서 될 일은 아니다. 반드시 바른 태도와 바른 방법에 익숙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게 되려면 많은 수련과 노력이 따라야 한다. 그리고 성경을 잘 이해하려면 여러가지 해석법을 적용하여야 한다.

 

성경의 해석법을 크게 나누어 보면 문법적 해석법, 역사적 해석법, 신학적 혹은 교리적 해석법이 있다. ‘문법적 해석법’에서는 언어의 분석과 문맥관계와 용어의 상징적 의미와 비유적 의미 등을 찾아보게 되며, ‘역사적 해석법’에서는 저자와 저작년대 혹은 그 시대적 배경을 살펴보게 되며, ‘신학적 교리적 해석법’에서는 성경의 통일성에 역점을 두고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진리가 무엇인가를 알아내려고 한다.

 

모든 성경해석법은 그 나름대로의 특색과 정당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신학적 교리적 이해이다. 우선 여러 가지 해석법을 개괄적으로 소개하고 그 다음으로 성경의 교리적 이해와 그 적용에 관한 문제를 다루어 보려고 한다.

 

 

A. 성경해석법의 개괄적 이해

 

1. 문법적 해석법

 

(1) 사용되는 낱말의 의미를 확실히 아는 일이 중요하다.

 

우선 낱말의 어원적 의미를 찾아 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어원적 연구에 너무 집착하게 되면 실직절으로 낱말이 쓰여진 의미를 도외시하는 경우가 생긴다. 예를들면 '덮는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카팔'(창6:14)이라는 말을 어근으로 하여 파생된 낱말에는 '코펠'(출21:30,30:12), '키프림'(출29:36, 민5:8), '카포레트'(출25:17-19)라는 낱말들이 있다. 이것들은 각각 "대속", "구원", "속죄", "속죄소" 등의 의미로 해석된다. 한편 '에클레시아'(행7:38, 19:32,39) 라는 말은 "…으로부터"라고 하는 '에크'라는 말과 "부르다"라는 의미를 가진 칼레인'이라는 말과 합쳐져서 생긴 말로서 "교회"라고 번역되었다. 대부분의 낱말은 문자의 의미와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외래어도 있고 문어체와 구어체도 있으며 어떤 낱말은 고전적 어원적 의미로만 해석되어서는 안되는 것도 많이 있다.

 

언어란 본래의 낱말이 사용되어 온 역사적 과정에서 낱말의 어원적 의미보다는 후대에 와서 새로운 의미로 사용된 것이 많이 있다. 이사야 53:3에서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하였는데 여기서 "질고를 아는자라"고 한 대목을 히브리어 원문에서 보면 '이두아 홀리' 즉 "그는 병을 알고 있다"인데 "그는 언제나 병을 앓고 있었다"(표준새번역)라고 번역되어 해석된다면 이는 중대한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루아하'는 본래 "호흡" 혹은 "바람"이라는 뜻을 가진 말이며 '네페쉬'는 "생기" 혹은 "호흡"이라는 뜻을 가진 말인데 둘다 "영혼"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2) 서로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낱말에 관한 올바른 이해가 있어야 한다.

 

모든 낱말은 동의어와 반의어가 있다. 동의어는 낱말이 서로 다르지만 뜻은 같은 것을 의미하며, 반의어는 낱말도 다르지만 뜻도 서로 반대되는 말을 의미한다. 이사야 53:2에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체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하였는데 여기 "모양"(토알)과 "풍태"(하달)와 "보기에"(말에흐)라는 말은 모두 외모로 보기에 보잘 것 없다는 의미로 사용된 말들이다. 요21:15-17에서 '아가파오'와 '필레오'라는 두 낱말은 '사랑한다'는 의미로 사용되기는 하였지만 전자의 경우는 존경하고 사랑하는 은인에게 대한 심정의 표현이며 후자는 선천적이며 본능적인 인간의 정서적 애정을 의미한다.

 

 

(3) 서로 관계된 낱말의 뜻과 문맥과 관계를 이해할 것.

 

하나의 낱말은 한 곳에서 한 가지 의미만을 나타낸다고 보아야 한다. 한 낱말의 의미가 다른 데에서도 언제나 똑같은 뜻으로 사용된다고 볼 수 는 없다. 실예를 들면 '살'이라는 낱말은 대체로 네 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① 사람의 몸의 '살'을 의미하는 경우(고전15:39, 눅24:39 등)와 ② 사람의 '몸'이라는 말과 같은 뜻으로 사용되는 경우(행2:26, 엡 2:15, 5:29 등)와 ③ 인간의 동물적 성품을 의미할 경우(요1:13, 롬 10:18 등)와 ④인간의 본성적 죄의 욕망의 핵심 부분을 의미할 경우(롬7:25, 8:4-9, 갈 5:16,17 등) 이다. 만일 요6:53의 "인자의 살"에다가 이 모든 의미를 모두 적용하게 되면 결국 그리스도를 정죄하는 해석이 되는 것이다. 성경은 어디까지나 그리스도의 무죄성을 확증하고 있다.

 

 

(4) 서로 관계된 문맥을 이해하며 그 기사의 초점을 이해할 것.

 

  사무엘하 18장에 다윗왕이 자기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도망할 때 요압장군을 압살롬과 싸우게 한 이야기가 있다. 그때에 다윗이 사람들이 모두 듣는데서 요압과 아비새와 잇대에게 명령하기를 "압살롬을 너그럽게 대접하라" 하였다.   이 말은 압사롬을 죽이지 말라는 뜻이다.   12절에 "누구든지 소년 압살롬을 해하지 말라 하셨나이다"라는 말과 대조할 때 그러하다.   그런데 요압은 압살롬을 죽이고 말았다.   이 소식을 아히마하스라는 신하가 왕에게 알리러 가기를 청하였을 때 요압은 그를 보내지 않고 구스 사람을 보냈다.    아히마하스는 다시 요압에게 자기도 구스 사람의 뒤를 따라가게 달라고 간청을 했다.    이에 요압은 하는 수 없이 그를 구스 사람의 뒤를 따르게 했다.   그는 그길로 달음질해서 구스 사람을 앞질러 먼저 다윗왕에게 도착하였다.   다윗왕은 자기에게 당도한 아히마하스에게 묻기를 "압살롬이 잘 있느냐" 하였다.    아히마하스는 말하기를 "요압이 왕의 종 나를 보낼 때에 크게 소동하는 것을 보았사오나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하였나이다." 하였다.    

 

이에 다윗은 아히마하스를 곁에 서 있게 하고 구스 사람이 당도하기를 기다렸다. 이 대목에서 아히마하스가 왕에게 "무슨 일인지 모른다"고 한 것은 어떤 의미에서 한 말인가 하는 것이다. 과연 몰라서 모른다고 하였을까 그렇지 않으면 그가 알고 있으면서도 왕에게 나쁜소식을 전하는 것이 두려워서였을까 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와같이 성경을 해석하고 이해한다는 것은 성경의 각 대목의 문장의 전후관계와 여러 가지 사정을 잘 알아서 그 뜻을 파악하는 일이며 이것이 성경을 이해하는 첫 거름이다.

 

이같은 이 해석법을 콘텍스트(con-text)에 의한 이해라 한다.   con은 '함께'라는 뜻을 가진 말이며 text는 '직물'이라는 뜻을 가진 말로서 '함께 짜 맞추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하여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고 한 본래의 의도가 어디에 있는가를 알아내야 한다.   그리고 그 대목의 전체의 구조를 알아보고 그 구절의 문장의 무엇을 의미하고 있나를 알아내야 한다.   또 하나의 실예로 요나서에서 하나님이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지 아니하고 다시스로 도망한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를 알아보는 일은 시간이 좀 걸린다. 욘1장에서 요나가 도망한 사실 (3절)은 확실 기록되어 있으나 도망한 이유에 대해서는 요나서의 맨 끝장인 4장에 가서야 알게 되어 있다.   요나의 말이 의미하고 있는 바는 "내가 니느웨로 가서 회개를 외치게 되면 니느웨가 회개하게 되겠고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니느웨를 용서하시게 됨으로 나는 처음부터 그 곳에 가기를 싫어했던 것이 아닙니까?“(2절)이다. 이와같이 성경의 어떤 문장의 의미가 분명히 밝혀져 있을 경우와 혹은 암시적으로 나타나 있는 경우가 있다.

 

 

(5) 비유적 또는 상징적 해석

 

성경에는 비유적이며 상징적인 표현이 많다. 그것은 대개 예화적으로, 풍경적으로, 은유적으로, 혹은 우화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① 예화(parable) 마 13장의 경우(씨 뿌리는 비유)의 경우와 같이 현실적인 이야기로서 그 당시의 풍습과 습관과 생활양식을 그대로 표현하였다. 그리고 예화는 예화를 말할 때의 그럴만한 사정이 있으며 표면적으로 들어내서 말하는 것과는 달리 별다른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예화의 핵심적 의미를 찾아내야 한다. (문제 : 눅15:1-7의 경우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② 풍유(諷諭, allegory)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가 아니라 다른 의미로 사용되는 것으로서 단락이 전 이야기체로 된 은유(隱喩, trope)이다. 이것은 혹은 우화라고 한다. 보통 은유는 사물을 비유하여 말할 때 본래의 뜻은 숨기고 비유하는 형상만 나타낸다. 예를들면 "나는 세상의 빛이니…"(요8:12)라든지,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요새시오 나를 건지시는 자시오 나의 구원의 부리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시18:2). "요셉을 양떼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여 귀를 기울이소서"(시80:1)라고 하는 표현에서 볼 수 있다. 그런데 풍유는 그 이야기 속에 나오는 말 모두가 은유이다. 예를들면 시80:8이하의 경우이다.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열방을 쫓아내시고 이를 심으셨나이다 주께서 그 앞서 준비하셨으므로 그 뿌리가 깊이 박혀서 땅에 편만하며 그 그늘이 산들을 가리우고 그 가지는 하나님의 백향목 같으며 그 가지가 바다까지 뻗고 넝쿨이 강까지 미쳤거늘 주께서 어찌하여 그 담을 헐으사 길에 지나는 모든 자로 따게 하셨나이까…"

 

③ 상징(symbol)은 어떤 개념이나 추상적인 것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기도 하며 또 어떤 사상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암시하며 연상케 하는 표현법이다. 예를들면 "네 본 것은 내 오른 손에 일곱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로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금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게1:20).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계5:8). 그리고 상징적인 것에는 예형적(豫型的)인 것이 있다. 예를 들면 히8:5 이하의 경우와 같은 것이다.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 하셨느니라 그러나 이제 그가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이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과 중보시라 저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 저희를 허물하여 일렀으되…"

 

 

 

2. 역사적 해석법

 

역사적 해석은 성경저자들이 처하였던 특수한 시대적 배경에서 언어를 사용하여 성경을 기록하였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문법적 해설과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다. 특히 성경의 역사적 해석은 성경의 구체적 자료에 근거하고 있다. 역사적 해석법에 있어서 기본적 전제는 ①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야 하며 ② 저자에 관한 바른 이해가 있어야 하며 ③ 관습과 도덕과 종교적 전승에 관한 올바른 이해가 있어야 한다.

 

 

(1) 역사적 배경과 종교적 저자에 관한 이해

 

요21:24에 "이 일을 증거하고 이 일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 증거가 참인줄 아노라"하는 말이 있다. 여기서 "이 사람"이 누구인가를 20절에서 이미 말하고 있다. 13:23과도 비교하여 볼 수 있다. 전해 내려오는 말에 의하면 사도요한을 일컫는다. 시편 74편의 표제에 '아삽의 마스길(능숙한 노래)'이라 하였다. 이 시를 이해하기 위하여는 우선 아삽이라고 하는 인물 즉 이시의 저자에 대하여 알아야 한다. 아삽이라는 이름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도 있었었다. 이삽과 아삽의 아들들은 아삽의 수하에 속하여 왕의 명령을 좇아 신령한 노래를 불렀다(대상25:1-2). 그리고 히스기야 왕의 사관(史官) 요아의 아버지의 이름이기도 하다(왕하18:18, 37).

 

또 바사왕 아닥사스다가 느헤미야에게 목재를 공급하라는 조서를 보낸 왕의 삼립 감독의 이름이기도 하다(느2:8). 또 성전 문지기 고라 자손 아삼도 있다(대상26:1). 그런데 시74:8-9를 읽어 보면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모든 회당을 불살랐나이다 우리의 표적이 보이지 아니하며 선지자도 다시 없으며 이런 일이 얼마나 오랠는지 우리 중에 아는 자도 없나이다"하였다. 여기서 "회당…" 과 "선지자도 다시 없으며…"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을 미루어 보면 이 시의 내용은 바벨론의 포로시대가 끝난 후 에스라와 느헤미야 등이 귀환한 후의 일이라 짐작된다. 그런데 시편50, 73-83편은 '아삽의 시' 혹은 '아삽의 마스길(교훈)'이라고 표제되어 있다. 어째서 그렇게 표제되어 있는가. 그 내용으로 보아서 아삽이라는 인물이 직접 기록한 것이 아닌 것도 있다. 그것은 아마도 아삽의 자손들이 성전 예배 때에 아삽이 지은 노래를 오랫동안 불러오던 과정에서 후대에 이르러 누군가가 자기들의 시대의 형편과 감정을 삽입하여 노래한 것을 함께 아삽의 성가집 안에 포함시킨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낳게도 한다.

 

 

(2) 저자가 누구이며 누가 말하는가?

예언서에서 보면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사1:2, 65:8, 66:1, 렘6:16),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렘 6:9, 16, 21, 7:3),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니라"(렘6:21) 등의 말씀으로 시작하는 구절들이 많이 있다. 이것은 분명히 예언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말씀임을 알 수 있다.

 

 

(3) 그 밖에 저자의 사상과 의도와 목적과 저작년대, 사회적, 환경, 지리적 정치적 종교적 환경 그리고 풍습이나 풍속 등에 관해서도 알아보아야 한다.

 

풍습과 풍속에 관한 실예를 한가지 들면 신 25:5-10의 경우이다. 10절에서 "그 이름을 신 벗기운 자의 집이라 칭할 것이니라"라고 한 것은 룻4:7 이하를 읽어 보면 후대에 풍습으로 이어진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3. 신학적 교리적 해석법

 

성경해석에 있어서 문법적 해석과 역사적 해석이 필요한 것은 물론이지만 또 하나 절실하게 필요한 해석은 교리적 해석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의 계시이다. 성경전체는 유기적으로 기록되었으며 구약과 신약은 모형과 예언, 예언과 성취, 처음과 나중의 관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성경을 교리적으로 해석함에 있어서 성경에 명백하게 언급되어 있는 것은 물론, 성경으로부터 필연적으로 결론지을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내용을 찾아내서 우리의 신앙과 생활의 규준을 삼아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 성경해석자는 우선 성경의 2대원리를 토대로 하여야 한다. 첫째, 형식원리이며, 둘째, 실질원리이다. 전자는 성경의 계시성(啓示性), 신빙성(信憑性), 영감성(靈感性), 무오성(無誤性), 충분성(充分性), 명료성(明瞭性), 통일성(統一性) 등의 교리를 의미하며, 후자는 하나님의 독점적 은총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어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이신득의 교리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독점적 은총에 관한 교리는 칼빈주의 5대강령(전적타락, 무조건 선택, 제한속죄, 불가항력적 은총, 성도의 궁극적 구원)에서 잘 표현되어 있다.

 

① 성경의 계시성이란 성경속에 하나님의 계시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 그 자체가 하나님의 계시임을 의미한다. 따라서 또 다른 계시나 전승적인 인간적 산물을 보충할 필요성이 없는 완결적인 하나님의 계시의 글이 성경이란 것을 의미한다.

 

② 신빙성이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의 권위를 신뢰하며 인정하며 그 권위에 복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③ 영감성이란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의 글이므로 성경의 각 권이 영감 되었으며 성경저자만이 영감받은 것이 아니라 문자에도 영감되어 있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성경은 가감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④ 무오성이란 성경의 창시 원전은 성령의 역사에 의하여 오류없이 기록되었으며 단순히 도덕이나 종교적 문제에 국한하여 무오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의 기록에 있어서도 오류가 없음을 의미한다.

 

⑤ 충분성이란 현재의 구약성경과 신약성경만으로 기독교의 진리는 충분히 이해가 되며 인간적 전승이나 교훈이나 교전등을 보충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하기에 충분하다는 것이다. 로마 카톨릭교회에서는 외경을 성경에 포함시키고 있으며 영국성공회에서는 구약외경을 속구약성경이라 일컬으며 준성경이라 하여 중요시 하고 있다.

 

⑥ 명료성이란 성경 그 자체가 기독교의 진리를 밝히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성경이 성경의 의미를 스스로 밝히고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어떤 사람의 자의적(自意的) 해석에 준할 필요가 없다.

 

⑦ 통일성이란 성경에는 모순이 없으며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통일적인 진리와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상에서 열거한 성경의 형식원리는 필연적으로 인간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계시의 내용(교리) 즉 성경의 실질원리를 입증하는 원리가 되는 것이다. 성경의 두 원리는 성경의 교리적 이해에 있어서 통일적으로 토대가 되는 것은 물론이며 정통적 기독교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근본적인 수단이 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성경해석법의 다양한 모습을 개괄하여 보았다. 그럼, 서두에서 언급한 대로 이제 성경의 교리적 해석(이해)과 교리적용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논해 보기로 하겠다.

 

 

B. 성경의 교리적 이해와 그 적용

 

1. 성경의 교리적 이해(해석)란?

 

신구약성경을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가르치고 있는바 진리 즉 기독교의 교리가 무엇인가를 찾아내는 일이 성경의 교리적 해석의 임무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 1장 2항에서 "성경은 우리의 신앙과 생활의 규준이다"하고 명시되어 있다. 이같은 성경을 이해함에 있어서 성경이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를 알아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결코 무의미한 일이 되고 말 것이다. 성경을 교리적으로 이해하는 일은 단순히 성경 몇장 몇절의 의미만을 알아내는 것이 아니라 성경 전체가 가르치고 있는 통일된 의미를 파악하는 일이다. 가령 창 1:28에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말씀이 오늘날 산하제한을 주장하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 무엇을 가르쳐주고 있는가를 알아보기로 한다. 이 말씀에 의하면 애기 낳는 일은 하나님의 뜻이며 산하제한은 당치도 않는 일이다. 그런데 이 말씀과는 반대로 창3:16에서 보면 죄를 범한 여자에게 하나님이 형벌을 가하신 장면에서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에서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에 의하면 여자가 임신하는 것은 형벌적 고통을 의미한다고 이해되어진다.

 

그러므로 성경을 이해함에 있어서 하나의 생활문제를 놓고 볼 때 어느 것이 성경적인가 하는 판단을 내려야할 경우에 성경의 어느 한 두군데의 문장이나 용어의 의미를 아는 것만으로는 결코 판단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성경의 어느 한군데의 성귀가 성경 전체에서 의미하고 있는 것과 일치하고 있는 의미를 찾아내야만 한다. 이와같이 어떤 특정한 성귀가 의미하고 있는 것만 아니라 성경 전체가 가르치고 있는 일치된 의미를 논리적으로 입증하여 필연적으로 결론을 내리게 되면 그것이 곧 성경의 교리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뜻을 역사적 과정을 통하여 순서적으로 계시하셨다. 죄가 없는 창조의 질서 속에서는 애기를 낳으면 번성하는 일은 축복이라 말씀하셨으나 죄를 범한 배교의 세계에서는 임신은 형벌이라는 것을 말씀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창3:15)이라는 말씀도 하셨다. 이 말씀은 여자의 후손이 임신하여 애기를 낳게 되므로써 메시야가 탄생하여 사탄의 세력을 이기게 되리라는 소망을 갖게 한다. 그러므로 임신으로 인한 고통은 저주스러운 일만 아니라 구세주의 탄생에 의하여 구원의 소망이 있다는 의미도 되는 것이다. (Sola 주: 여자의 후손은 집합 명사로써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게 아니라 택한 백성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2차적으로는 택한 백성의 머리이신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종말의 때에 여자의 후손인 택한 백성들이 예수님 안에서 사단을 정복한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창16:1-6에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생산치 못함을 불행한 일로 묘사하고 있다. 신약성경에서도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서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딤전2:15) 하였다. 이것은 여자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일이 구원과 관계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이같은 뜻을 논리적으로 정리하여 보면 임신은 창조의 질서에 있어서는 축복이며 죄의 형벌 아래에서는 저주이며 구원얻은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기쁨의 소망이 된다고 결론을 지을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신앙과 실제생활에 성경진리 즉 교리를 적용하는 일에 있어서 성경의 한 두군데의 성경의 의미를 직선적으로 이해하는 것으로 할 것이 아니라 성경 전체가 의미하는 것을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2. 信仰類比에(신앙류비) 의한 성경이해

 

오늘날 성경학가들의 신앙류비에 대한 정의를 보면 성경을 신앙류비에 의하여 이해한다는 것은 "성경기자들이 명백하게 말하고 있는 대목으로부터 체계가 세워진 기독교의 근본교리와 조화시켜서 해석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이 정의에서 우리는 "기독교의 근본교리"라는 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기독교의 근본교리란 구체적으로 말하면 삼위일체교리, 그리스도의 이성일인격교리, 이신득의교리 등과 같이 이것이 아니면 기독교가 아니라고 할 수 밖에 없는 확실한 교리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교파에 따라 주장하는 점이 다른 것도 있고 어떤 것은 어떤 의미에서 애매하고 불확실한 것으로서 지염적인 것도 있다. 이런 것은 기독교의 근본교리라고는 볼 수 없는 것이다.

 

신앙류비의 성경해석은 어디까지나 분명하고도 근본적인 교리에 류비시켜서 조화시켜야함을 의미한다. 근본교리란 그 누구에게나 어느 교파에서나 공통적으로 이해하는 명백한 교리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신앙류비의 해석이 어디까지나 모순되는 해석이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원칙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순되지는 않지만 "이렇게도 해석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 또한 신앙류비의 해석의 문제점이다. 그래서 신앙류비에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다. 따라서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옳고 그렇게 해석하는 것을 틀렸다고"하는 적극적이며 결정적인 판단과 충고는 있을 수 없다. 다만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과 조화하도록 성경을 해석해 나아가는 기본적인 마음의 자세를 확립하여야 한다는 원칙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물론 성경의 근본교리에 모순되는 해석이 있으면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사실 신앙류비의 해석법은 사도적 신앙의 전승이라는 점에서 과소평가해서는 안되는 것이기도 한다. 그러나 로마카톨릭교회의 경우 이 신앙류비의 방법을 사용함에 있어서 크게 오류를 범하고 있다. ((교리를 성경으로만 세우는 것이 아니라 성경과 사도의 전승과 교황의 어록 혹은 칙령들을 모두 하나님의 말씀과 동등시 하여 그 모두를 사용하여 교리를 세워 신학의 체계를 만들고 믿어 왔다.)) 예를 들면 마리아도 승천하였다고 하는 성경에도 없는 교리를 만들어 놓고 믿고 있다. 이같은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신앙류비의 성경해석법은 크게 역할을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신앙류비는 결국 성경류비의 해석에 의하여 결론이 내려져야만 한다.

 

 

3. 聖經類比(성경류비)에 의한 성경이해

 

성경류비란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성경만이 유일하고도 절대적으로 무오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라고 승인함과 동시에 신자의 신앙과 생활의 규준이라고 알고 성경의 가르침을 실제에 적용하려는 것이다.

 

 

(1) 성경류비의 원칙은 두 개의 교리로부터 나온 것으로 본다.

첫째는 성경의 계시성이다. 이것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께서 기록하신 글이라는 것이며, 둘째는 성경의 충분성인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알리시려고 하는 것은 모두 충분히 성경에 나타내셨다고 하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성경에는 모순이 되는 말씀은 없으며 모두 다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하나의 성귀의 의미가 불확실하다면 다른 성귀에서 그 확실한 의미를 찾아서 이해할 수 있게 되어 있다.

 

 

(2) 성경을 유비적으로 이해하는 데에는 몇가지 유의할 점이 있다.

자칫 사람의 주관적 상상과 추측으로 인하여 오해 함으로써 성경의 올바른 의미를 찾아내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이다.

 

① 성경의 병행기사에서 병행적 의미를 찾아내는 일이다.

사람들은 흔히 잘 알아보지도 않고 그저 ‘같은 것 같다’라는 느낌만으로 같은 의미일 것이라고 단정해 버리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창3:21과 히9:22의 경우이다. 얼핏보면 이 성귀는 병행기사로 보이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각각 문맥으로 보든지 전후관계의 의미를 찾아 볼 때 확실히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창세기의 경우 하나님이 아담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것을 아담의 속죄제사의 행위로 보고 아담이 구원을 얻었다고 결론을 내리는 사람들이 있다.

 

구원이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회개에 의하여 얻어지는 것이다. 성경에 아담이 회개했다는 기록은 단 한 군데도 없다. 아담은 어디까지나 옛 사람의 뿌리이며 대표자이다. 성경에서 아담을 흙에 속한 사람이라고 했다.(고전15:47). 또 "한 사람이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5:19) 하였다. 죄의 뿌리요 죽음을 가져온 장본인이 구원 얻은 자라 하게 되면 만인구원의 교리가 된다. 그러므로 이 두 기사는 병행으로 이해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창세기의 경우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일반은총의 배려이지 특별은총적 죄사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

 

② 성경속에 단 한 군데서만 언급되어 있는 것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도 하나님의 자기의 뜻을 나타내시려고 하시는 계시적 사실임에는 틀림없다. 이런 경우는 기독교의 근본교리로서는 약한 것이다. 이런 경우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을 수 있다. 예를 들면 벧전3:18-19의 경우이다.

 

1) 그리스도께서 노아의 홍수때에 죽임을 당한 자들의 영들에게 가서 말씀을 전파하셨다는 것은 사후의 복음전파를 의미한다는 견해(구로짜끼, 우찌무라). 이 경우는 고후5:10과 모순이다.

 

2) 노아의 홍수 때 죽은 자들의 영들 즉 "옥에 있는 영들"에게 대한 것으로서 앞 구절의 '육'과 '영'의 대비로 볼 때 그리스도께서 육신이 되시기 전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구약적으로 복음을 전파하신 것이 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Lightfoot). 구약시대의 예언자들도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미리 증거하였다"(벧전1:11)고 한 성귀가 있기 때문이다. 혹은 노아가 방주를 만들고 있으면서 "의를 전파한 것"(벧후2:5)도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전파하신 일인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 경우 "옥에 있는 영들"은 노아의 의의 복음을 거절하고 홍수에 멸망되어 옥에 갇히게 된 때의 영들을 의미하지만 그들의 복음을 접하게 된 때는 아직 살아있을 때였다는 것이다.

 

3)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라고 한 대목에는 "복음"(유앙겔리온 eujaggevlion)이라는 단어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가셨다고 보지만 복음을 전파하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승리를 선포하셨음을 의미한다고 본다. (Swlwyn, Walls, Stibbs) 이 밖에도 여러 가지 견해가 있지만 여기서 분명한 것은 홍수시대의 옛 사람들은 3:13의 "너희들"과는 다른 사람들이라고 하는 사실이다. 이와같이 애매한 성귀, 그나마 단 한 군데 밖에 없는 성귀에서 사람의 영원한 생명을 좌우하는 교리를 세운다는 그 자체가 옳지 않은 것이다. 이와같이 교리는 교리이지만 확실한 것과 불확실한 것이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③ 확실한 교리를 파악하는 일이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예정교리와 인간의 자유의지에 관한 교리이다. 이것은 신구약 어디서나 가르치고 있는 교리인데 때로는 납득이 어려운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이 둘 중의 어느 하나도 무시해서는 안된다. 이둘은 성경 어디서나 가르치고 있는 확실한 교리이다.

 

④ 성경의 해석자는 성경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의 유비적 해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명제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은 성경이 가는데까지 가고 성경이 멈추는 데에서 멈추어야 한다. 아무리 그 이상의 것을 알고 싶다 하여도 그 호기심을 버리지 아니하면 안된다. 가령 천지창조 전에 하나님이 무엇을 하고 계셨을까 하는 호기심으로 성경을 아무리 찾아보아도 거기에 관한 구체적인 기록이 없다. 또 하나님이 천지창조 6일 동안의 언제 천사를 만드셨는지에 관하여서도 성경은 아무런 언급이 없다. 그러므로 이와같은 문제에 대해서는 우리는 그저 "모른다"하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4. 성경의 가르침(교리)을 실제로 적용함에 있어서 유의할 점

 

① 역사적 기독교회의 기준문서들(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대소요리문답서, 하이델베르크신앙문답서, 제네바 교회신앙문답서 등) 의 내용을 잘 이해하여야 한다. 이 신앙고백서들은 모두 성경교리를 증명하는 성귀가 열거되어 있다. 그 모든 성귀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있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성경의 어느 성귀에서 어떤 교리가 서게 되었는지 알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어떤 것은 불확실한 것을 알게 된다.

 

② 설교할 때 특별히 유의할 일이다. 성경은 성경의 유비에 의하여 해석하고 밝히는 장소는 교회의 강단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전문교육을 받은 목사에게 설교권을 부여하는 것이다. 목사는 설교에 앞서서 성경본문의 가르침에 비추어서 우리가 어떻게 하면 그 말씀에 합당한 생활을 할 수 있는가를 잘 파악하여야 한다. 설교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며 증언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성경의 몇몇 단편적인 구절에 근거해서 자의적 해석을 하여 청중에게 말해서는 안된다. 성경전체에서 가르치고 있는 올바른 의미를 알아내서 그것을 우리의 신앙생활에 실제로 어떻게 적용하여 실천할 것인가를 파악하여 가르쳐야 한다. 그러므로 올바른 설교는 성경적이어야 한다. 성경적인 설교란 성경교리를 가르치며 신자를 올바로 가르치는 일이다. 설교를 잘 했느냐 잘 못했느냐 하는 판단은 어디까지나 설교자가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진리 즉 교리를 올바로 설명하고 이해시키는 데 충실하냐 못하느냐 그 기준을 두어야 한다. 성경적인 설교란 단순히 성경의 어느 한 구절을 올바로 강론하고 이해시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전체를 배경으로 하는 성경 전체의 빛에 비추어서 올바른 결론을 내려 청중에게 올바른 실천을 호소하는 일이다.

 

설교자에 따라서 설교의 형태는 다르겠지만 어디까지나 성경의 교리적 설교가 아니어서는 안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본문에 충실해야 한다. 그리고 성경의 가르침을 실제 신앙생활에 적용하도록 깨닫게 하며 감동케 하는 일이 중요하다. 어떤 설교자는 언어분석과 언어의 뜻을 풀이하며 주석이나 강해식의 설교를 하며 또 어떤 설교자는 처음부터 논리정연한 강연스타인의 설교를 하기도 한다. 혹은 흥미있는 이야기나 예화를 사용하기도 하는 설교도 있다. 어떻든 설교 스타일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문제는 그 설교에서 결론이 무엇이며 성경이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에 대해서 올바르게 증언하며 설명하였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 설교가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따라서 결론이 내려졌다면 그것은 성경적이며 교리적인 설교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완벽한 설교는 없다. 어디까지나 인간 설교자에게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설교자는 성경적이며 교리적인 설교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명심하여야 한다. 칼빈의 『신앙안내서』 안의 '신앙고백' 제 17항에서 말하기를 "인간의 양심을 속박하고 하나님의 교훈이 아닌 것으로 신자를 강해고 하고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과는 다른 예배를 드린다든지 기독교인의 자유를 파괴하는 방향에서 만들어낸 일체의 법과 제도를 우리는 사탄의 사악한 교리라고 선언한다(마15:9, 사29:13)" 하였으며 제 30항에서는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나서 자기의 생각이나 머리 속에서 꾸며낸 말을 하게 된다면 그는 이미 목사로서의 자격을 상실한 자이며 그러한 자를 교회가 받아들일 수 없다"라고 하였으며 또 제 31항에서는 "단순히 인간의 교훈에 지나지 않는 교리를 가르치는 그 곳에서는 하나님께 헛되이 예배하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할 일이다(마15:1-20)"라고 하였다.

 

 

결론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성경의 가르침 즉 교리를 올바로 이해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성경을 문법적으로 언어를 분석하고 문맥관계 등을 파악하고 역사적 배경과 저자의 사상과 저작년대를 밝히고 혹은 비유적 의미와 상징적 의미를 알아내는 일도 중요하지만 성경에 일관하고 있는 통일적이며 전체적인 의미를 알아내서 우리의 신앙생활에 실제적으로 적용하는 일은 그 무엇보다 귀중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일은 어떤 한 사람의 신학자가 그 시대를 따라서 자기 나름대로의 주관적 생각을 가지고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단편들을 뜯어 맞추는 식의 작업이 아니라 기독교회사를 통하여 역사적 기독교회가 공동으로 고백하여 온 신앙적 기초위에서 성경의 전체를 통일적으로 볼 수 있는 객관적이며 체계적인 관점에서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파악하여 성경을 우리의 신앙과 실생활의 규범으로 삼는 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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