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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에 처한 기독교

Sola. 2025. 3. 27. 07:00

 

위기에 처한 기독교

김명도 교수 / 튤립 신학 연구원 (2008년 추정)

서론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의 기독교 교계는 놀라울 정도로 변질되어 가고 있다. 기독교의 진리 자체는 변함이 없지만 교회 지도자들의 기독교에 대한 이해가 변해 간다는 말이다. 요즘 들어 본 튤립 교육 선교회에는 교회를 이적하고 싶은데 좋은 교회를 소개해 달라는 주문이 부쩍 늘어가지만 안심하고 소개할 교회가 없다. 영어권이면 미국의 정통장로교단 (OPC) 의 교회를 즉시 소개할 수 있지만 한국어권이면 아심하고 소개할 교회가 없다. 모두 오락위주의 예배나 신비주의나 기복신앙의 설교일색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기독교 교계가 어떻게 변질되어 가는지 그 실상을 같이 생각해 보고 저 한다. 세 가지로 생각해 보자, 즉, 1 변질되어 가는 기독교의 모습; 2 변질되어 가는 이유, 그리고 3 바로 잡기 위한 대책 이런 순서로 연구하자.

기독교의 믿는 도리는 주일마다 예배 시에 외우는 사도신경 속에 모두 들어 있는데. 사도 신경 은 사도들이 직접 쓴 것이 아니고 사도들의 가르침을 후세 사람들이 요약한 신앙고백서이다. 보통 기원 6세기에 완성되었다고 믿는다 (Philip Schaff 저 Creeds of Christendom, 3 vols 참고). 믿는 도리는 사도신경 만 아니라 다른 역사적인 신앙고백서, 이를테면, 기원 325년의 Nicea 신경, 350년의 아다나시우스 신경, 381년의 콘스탄티노풀 신경, 451년의 갈게돈 신경, 1561년의 베르기 신앙고백서, 1563년의 Heidelberg 요리문답, 1566년의 제2 스위스 신앙고백서, 1599년의 프랑스 신앙고백서, 1619년의 도르트신경, 1647년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996년의 Cambridge선언문 (혹은 이를 “ACE 신앙고백서” 라고 도 함) 등에도 같은 내용이 잘 나타나며 성경을 바로 믿는 개혁주의 성도가 안심하고 받아 드릴 신앙고배서 들이다.

I. 변질되어 가는 오늘의 기독교의 모습

위에 열거한 정통적인 기독교의 신앙고백서의 교리와는 달리 근자에는 기독교의 진리가 많이 왜곡되어 간다. 며칠 전 IVP 출판사에서 편집을 맡고 있는 Hsu 라는 분 (아마 중국계인 듯) 이 Christianity Today 잡지에 기고한 글에서, “예수를 믿는 것은 어떻게 믿어도 상관이 없다”는 말을 하여 “한 때 보수였던 IVP 출판사도 요즘 많이 변했구나“ 하고 한탄해 본 적이 있다. 옛날 나의 친구 James Sire 가 편집장으로 있을 때 같으면 어림도 없을 일이다. 정말 아무렇게 믿어도 구원은 보장되는가? 마태복음 7:22 이하에서 주님에게 책망을 받는 사람들도 이 땅에 사는 동안 제 나름대로 목사, 부흥사, 신학교 교수로 주님의 일을 했던 사람들인데 “너희를 내가 도모지 안 적이 없으니 불법을 행한 자들아 내게서 물러가라” 라고 주님으로부터 엄한 책망을 받을 뿐만 아니라 구원도 얻지 못했다. 아무렇게 믿어도 구원이 보장되는가? 아니다. 기독교에는 믿는 도리가 따로 있다. 아무렇게 믿어도 구원이 보장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늘의 기독교 교계에는 이런 사상이 풍미하고 있다. 그리고 한 때 개혁주의를 신봉하던 목사, 학자들이 근자에 대거 성경을 이탈하는데. 많은 사람들은 이것이 재림의 징조라고 믿고 있으면 필자의 생각도 그러하다.

첫째, 지옥이 없다고 가르치는 신학자가 늘어나고 있다.

영국의 유명한 신학자이며 많은 보수주의 책을 쓴 John R. Stott 는 요즘 새로운 주장을 펴고 있어서 기독교계의 정통신학자들에게 빈축을 사고 있다. 그는 David Edwards 와 공저한 책, Evangelical Essentials (IVP, 1998) 이란 책에서 하나님은 사랑인데 어찌 사람을 지옥으로 보내겠는가 하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London의 의 목사였던 그도 변했다. 지옥이 있다해도 무의식중에 시간을 보내는 곳이라고 한다. 지옥은 불신으로 인하여 영영 형벌을 받는 곳인데 무의식 중에 어찌 고통을 느낄 수 있으며 의식이 없다면 형벌이 무슨 의미를 가지는가? 이런 학설은 전에는 상상도 못하던 것인데 근자에 와서 이렇게 가르치면서 성도들을 미혹하는 사람들이 대거 등장한다. 속임수 이다.

둘째, 하나님은 미래를 모른다는 분들이 늘고 있다.

“미래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으니 어찌 하나님인들 미래를 알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 이들의 주장인데 새로운 신학이다. 물론 18세기 독일의 합리주의자들이 이렇게 주장한 것은 별로 놀랄 것이 없지만 오늘 소위 복음주의자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에게서 이런 주장이 나오는 것은 참으로 놀랍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Michigan 주 Bethel 신학교의 교수로 있는 Gregory Boyd 이다. 그는 그의 저서 God of the Possible: A Biblical Introduction to the Open View of God (Baker, 2000)에서 그렇게 주장하고 그의 수많은 학생들에게

그렇게 가르치면서 왕성하게 그런 책들을 펴내고 있다.

또한 Clark Pinnock 도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 놀라운 사실은 이들은 불과 20년 전 까지만 해도 정통적인 신학자들이었다. 필자가 신학교 시절에 Pinnock 이 쓴 The Infallibility of Scripture 라는 책을 가지고 공부했었다. <하나님은 미래를 알 수 없다> 는 사상은 요즘 미국에 있는 대학 교수들 간에 큰 인기를 얻고 있는데 이와 같은 신학을 이라고 하며 "미래불가지론” 이라고 한다 이들은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하는 사도신경을 외우지만 믿지는 않는다. Florida 에 있는 RTS 교수인 John Frame 은 Boyd 에 반박하여 No Other God (P&R, 2006) 이란 책을 펴내서 반박한 바 있다. 요즘 이런 사기꾼 신학자들을 조심해야한다. 속임수 이다.

셋째로, 어느 종교를 믿어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신학사조가 풍미한다.

“모든 종교는 대등하기 때문에 사람이 선행만 하면 어느 종교를 믿어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신학자나 목사들이 늘어간다. 대표적인 사람들은 1948년에 조직된 WCC (World Council of Churches) 와 그 산하 NCC 에 속한 기독교 지도자들이지만 우리의 눈길을 끄는 사람은 유명한 전도자 Billy Graham (86세) 목사다.. 그는 1997년 5월 Garden Grove 소재 수정교회 담임인 Robert Schuller 목사가 진행하는 TV 프로그램 Hour of Power (권능의 시간) 에 출연하여 하는 말이 "선행을 하면, 어느 종교도 구원이 있다“ 고 말하여 파문을 던진바 있다. 이런 사상은 요즘 소위 ”종교다원주의" 라는 이름으로 목사들 중에 상당히 많이 파급되어 있고 이런 교리를 가르치는 교회도 상당한 수에 달한다. 세계에서 가장 크다는 서울의 모 대형교회 C 목사는 심지어 불교계 D 대학교에서 특강하면서 “기독교와 불교는 아무 차이가 없으니 어느 것을 믿어도 된다” 라는 망언을 했다. 이런 사람도 기독교의 목사인가? 큰 교회를 목회했다고해서 반드시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것이 아니다. 사데교회 (계3장) 은 “죽은 교회)라고 주님이 책망하지 않았던가? 대형교회 목사 일수록 실수가 많은 오늘의 교계이다.

종교다원주의를 주장하는 사람은 비단 빌리 그래함 (86세) 만 아니다. 한국에서 제일 숫자가 많이 모인다는 교희의 조용기목사도 2004년 5월 12일 불교계 동국대학교에서 특강을 하며 불교와 기독교를 같은 차원에서 생각하며 가족 중에 불교 믿는 사람이 있는데 그는 불교적 구원을 믿고 자기는 목사이니 기독교적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을 서슴없이 했다. 그의 말은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를 믿던 불교를 믿던 종교는 모두 같기 때문에 각각 구원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그의 신학이다. 이것이 과연 성경적인 가르침인가? 잘못된 교리, 비셩경적인 교리는 비판해야하는 것이 주님의 가르침이다. 그러나 종교다원주의 일변도로 흘러가는 한국의 교계에서는 아무도 비판하는 목소리가 없다. 한국의 교회들도 진리를 떠난다는 신호이다. 불의한 것을 보고 의분을 느끼지 못하면 벌써 성경을 떠난 증거이다. 무서운 속임수가 성도들을 속이고 있다.

넷째, 개신교 목사들이 천주교를 따라가는 경향

Canada, Vancouver 의 유명한 개신교 신학자인 James Packer 는 본의이건 타의이건 간에 1995년에 조직된 이른바 ECT 즉 “Evangelicals and Catholics Together” 라는 단체에 가입하여 서명했다. 1996년 가을에 필자가 서한으로 Packer 교수에게 자초지종을 문의했더니 Packer 교수는 자기의 이름이 들어 가 있지만 그 주동은 Charles Colson 이었다고 발뺌했지만 그 문헌에 개신교 측 대표자의 한 사람으로 Packer 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John Ankerberg 와 John Weldon 두 분이 공저한 Evangelicals and Catholics Together (Eugene, Ore.: Harvest House, 1998) 라는 책을 참고하기 바란다. 천주교의 구원의 교리와 개혁주의 구원의 교리와는 타협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런 운동은 요즘 개신교 목사들 중에 상당한 호응을 얻고 있다. ECT 가 처음 창립될 때 멋모르고 서명했던 개신교의 White 박사는 후에 회개하고 나왔다. CCC 운동의 Bill Bright 도, Billy Graham 도 John Paul II 이 살아 있을 때 Poland에서 천주교의 선교사업에 동조한 적도 있다고 Christianity Today 지는 보도한 적이 있다. 어떻게 천주교와 개신교가

같이 일을 할 수 있는가? 두 교파는 전혀 다른 구원관을 갖고 있다.

2003년 2월 19일자 중앙일보 E.-22 면에는 <장로교 합동 보수파> 소속 목사들과 여자 전도사 몇 명이 충북 옥천(沃川)에서 보은 (報恩)으로 가는 길가에 “나실 수도원” 을 만들어 세상을 등지고 천주교식 예복을 입고 천주교식 수도에 몰두하는 기사가 실렸다. 필자는 믿을수 없어서 확인하기 위하여 그 기사를 작성한 중앙일보 담당 기자에게 전자우편으로 경위를 문의했는데 친절하게 대답해 주는 그 기자는. "이것이 정통 장로 교단에서 생긴 일이기 때문에 기사화한 것이지 만일 이단 집단의 사람들이라면 기사화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라고 말했다. 맞는 말이다. 나는 할말을 잊었다.

이런 일은 미국에 있는 교회에서는 하등 문제가 되지 않는다. 미국에서는 너무도 보편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가령, 예를 들면, New York의 이라는 성공회 교회에서는 천주교 신부, 기독교의 목사, 이슬람교의 Imam (이슬람교 지도자), 힌두교의 구루 (Guru 힌두교의 지도자), 불교의 중, 일본 신토교 (神道敎, Shintoism)의 사제(司祭) 등이 한 자리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또한 부활절에는 각종 동물들을 본당에 들여 넣고 축복해준다. Samantha Smith. The Trojan Horse (Fafaytte ,La.: Huntington House, 2001) 란 책을 참고하라. 이유는 모든 종교는 하나이고 지구는 “어머니 신(神)” 이기 때문에 지구가 낳은 모든 짐승은 형제자매이므로 공경해야 한다는 논리아닌 억지 논리이다. 이런 뉴에이지 운동가들은 1971년 “Earth Day, 지구의 날” 을 제정하여 지구를 “Gaia" 로 섬긴다.

인간의식 (人間意識) 의 진화를 외치다가 타계한 프랑스의 천주교 신부 Pierre Teilhard de Chardin (“삐에르 타이할 드 샤르뎅“ 이라고 발음함) 의 가르침을 교회에 도입하여 실천하는 현장이다. 이 교회의 목사였던 James Morton 은 이 교회에 화재가 발생한 후에 교회를 사임하고 지금은 New York에서 보다 차원이 높은 Interfaith Movement (종교간 통일 운동)을 맡고 있는데 Scotland 의 Inverness 라는 마을 옆에 있는 Findhorn 이라는 New Age 운동본부의 소장이었던 David Spangler 박사의 도움을 받으면서 Morton 목사는 그의 종교간 통일 운동에 몰두한다. 종교간 통일 운동은 요즘 Alpha Course 나 Contemplative Formation 운동을 벌리고 있는 얼빠진 목회자들이 벌이고 있는 세계 단일 종교 운동이다. 이들은 기독교의 독특성을 말살하려고 한다. 큰 속임수 이다.

다섯째, 남의 종교를 비판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

“절대적인 가치란 존재하지 않는다” 는 주장으로 나의 주장만이 절대적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의 주장도 내가 주장하는 주장과 같은 비중의 진리가 있기 때문에 나의 주장을 다른 사람에게 수용하도록 강요해서는 안 되며 남의 주장을 수용할 필요도 없으며 모든 사람의 주장은 대등하기 때문에 남의 종교를 비판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이다. 그러므로 기독교만이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기 때문에 “전도” 라는 방편을 통해서 “기독교만 진리의 종교이다” 라고 전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오늘 미국의 문화를 타락시키는 근간인 Michel Foucault 나 Richard Rotty, Jacques Derrida 의 Postmodernism (후기 근대주의) 의 기본적인 철학이다. Foucault 가 AIDS 에 걸려 죽기 직전에 쓴 320 면 짜리 방대한 Madness and Civilization: A History of Insanity in the Age of Reason (N.Y.: Vintage Press, 1988) 을 읽어보라. 이런 범신론적 사상이 어떻게 기독교 교회에 여과 없이 스며들도록 교회 지도자들이 방치해 두었을까? 오늘 기독교를 파괴하는 가장 무서운 독소 (毒素, venom)중의 한 가지 이다. 과연 교회의 지도자인 목사들은 하나님의 종인가? 아니면 흑암의 종인가? 양같은 평신도는 분별없는 대형교회 목사들에게 수백만, 수천만명씩 매일 속아 넘어가고 있다. 독약에 영적으로 살해당하고 있다. 그래도 아무도 말하는 목회자가 없다. 속지 말자.

여섯째, 사랑과 화해를 중요시해야 한다는 주장

교리의 진위(眞僞) 논쟁보다도, 진리탐구보다도, 사람이 “서로 사이좋게 지나는 것” 이 더욱 생산적이라는 견해이다. 이런 사고방식은 오늘 어디를 가도 기독교 전반에 크게 물들어있다. 사람들을 상담하다 보면, 놀라울 정도로 이런 사고방식에 성도들이 깊이 물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아연실색할 때가 있다. 이런 분들의 말을 들어보면 어떤 종교이건 종교의 차이는 없고, 누가 무엇을 믿건 서로 사랑하고 서로 인정하고 화해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며 남을 고쳐 주려고 해서도 안 되며 남을 어떤 이유로든 대적해서도 안 되고 모든 종교와 모든 다른 의견들을 최대한으로 수렴하며 서로 서로 “화목”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새로운 신학용어(神學用語)를 만들어 냈는데 프랑스어로 "Rapprochement" “라프로쉬망” 이라는 단어이다. 다른 종교를 비판하면 내 종교도 비판을 받게 되고 그러면 결국은 화해보다 싸움이 일어나므로 사랑이 희생된다는 논리이다. 이런 생각이야 말로 지금 제일 교회를 타락시키는 가장 비성경적인 사고방식이다. 우리들 주위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생각에 젖어 있는가?

이 단어에 담긴 사상은 1967년에 채택된 미합중국 연합장로교단 (UPCUSA)의 새 신앙고백서 (The Confession of 1967) 의 골자인데 새 신앙고백서 에는 "지옥과 천당," "삼위일체," "속죄" 등의 말은 들어 있지 않고 오로지 인간과의 "화해"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다. 그래서 이 신앙고백서를 일명 “화해의 신앙고백서” 라고도 한다. 이와 같은 화해의 신학은 요즘 이상하게도 널리 보편화되어 있다. 지상의 교회를 전투적인 교회(Church Militant) 라고 하는데 교회는 점점 이단과 싸우는 힘은 약해지고 교회가 점점 여성화(feminization) 되어가고 있다. 이들의 말을 들으면, 남을 이단으로 정죄하지도 말고, 설혹 이단으로 판명되어도 비평하거나 고쳐 주려고 하면서 얼굴을 붉히지 말고 서로 감싸주고 서로 사랑하고 서로 이해하고 서로 눈감아 주라는 것이다. 이것이 과연 십자가의 군사로 마귀와 싸우면서 “악을 대적하라”(엡6:10이하) 는 성경말씀에 부합하는 신앙태도 일까?

속임수 이다. 사람들은 목사들에게 속고 있다.

일곱째, 성경위주보다 경험위주로 믿는 신앙풍토가 표준화되어간다

성경의 가르침보다는 개인의 경험이나 이성으로 신앙생활을 영위한다. 고로 교회 예배도 하나님 중심의 “진정과 신령으로 예배하는” 것 보다 소위 “Seekers' Service, 열린 예배" 라고 하여 예배하는 사람들의 기분을 살려주는 이른바 감정위주의 예배를 드린다. 그러므로 자연히 예배가 말씀 중심이 아니고 오락중심이 되어 간다. Rick Warren 목사가 그 대표자 이다. ”졸리고 진부한 찬송가보다는 신나게 박자가 빠는 세상 방속국에서 홀러나오는 pop music 으로 예배음악을 교체하자는 주장이다 (Purpose-Driven Church, p.255). 이들이말로 레위기 10장을 주의 깊게 읽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배워야하다. 하나님은 절대 거룩하시고 전제주권을 가지고 계시다. 하나님은 인간이 제멋대로 고안해서 드리는 예배를 가증한 것으로 여기며 받지 않으신다.

교회마다 유명한 영화배우의 간증집회에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도 말씀중심의 집회는 인기가 없다. 요컨대 진리의 말씀에서 귀를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좋아한다는 말인데 디모데 후서 4:1-8 말씀이 오늘 교회에서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다. 요즘은 <경험주의>와 <신비주의> 가 혼합하는 경향이 많다. Richard Foster 는 그 대표자이다. 그의 책 Celebration of Discipline 을 읽어보라 불교식의 명상과 다를 바가 없다. 성도가 엎드려 기도할 때 손바닥을 위로해야한다는 가르침은 어디서 왔는가? (ibid. pp.30-31). Contemplative Prayer (Soaking Prayer) 등이 유행한다. 이것은 나중에 설명할 Brian McLaren 이나 Tony Jones 의 Emergent Church Movement 의 사상이다. 무서운 속임수가 횡횡한다.

여덟째, 직통 계시를 중요시 하는 풍토

안식교의 Ellen G. White 라는 여자 분은 평생에 200 번의 환상과 계시를 보고 안식교 교리를 만들었고, 모르몬교의 Joseph Smith도, 통일교의 문선명도 그러하다. 오늘의 빗나가는 신앙은 예외 없이 모두 하나같이 계시나 환상으로 시작한다. 그래서 환상을 보았다는 사람이나 계시를 보았다는 사람을 조심하라고 신명기 13장과 18장에 두 번 하나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세를 통하여 마지막으로 당부했다. 신명기 (Deuteronomy)라는 말은 헬라어로 “두번 째 율법” 이라는 의미인데 신명기에서 하나님은 환상을 보는 사람을 경계하라고 말씀하시고 심지어 죽이라고 까지 말한다 (신 13:5).

또한 성경은 계시록 22:18, 히 1:1, 또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1에 계시의 종결을 분명하게 가르쳐 준다. 그러나 오늘의 기독교에는 계시의 운동이 너무도 많은 성도들을 미혹한다. 하늘에 올라가서 하나님을 만나고 왔다고 하는 분, 내가 육신을 떠나서 수술대에 누어있는 내 몸을 보았다는 말 (이런 것을 요즘 뉴에이지 운동에서는 OBE 라고 하는데 Out-of-Body Experience)의 약칭이다. 연구할 분은 Shirley MacLaine 의 Out on a Limb 이라는 그의 자서전과 그의 Dancing in the Light 이라는 밀교적 서적 (密敎的書籍, occult books)을 참고 하기 바란다. 이를 명쾌하게 반박한 이는 Malibu에 있는 Pepperdine 대학교의 F.LaGard Smith 박사인데 그는 형법학 교수로 학생들을 지도하면서 이런 밀교에 젖은 학생들을 카운슬링하는 일을 맡고 있었는데 근자에는 은퇴하고 영국에 건너가서 저작에만 몰두하고 있는 분이다. 그가 남긴 명저 Out on a Broken Limb 은 바로 MacLaine 이 쓴 뉴에이지의 환상과 계시를 공격한 명저중의 명저로 이름이 나 있다 (Harvest House 1989 간행). 속임수에 속지 말라,

아홉 번 째, 번영 신학에 젖어 드는 이들이 늘어만 간다

예수를 믿으면 무엇이든 얻을 수 있다는 가르침으로. Schuller 의 적극적 사고방식이나 조용기 목사의 제4차원의 영적세계 같은 책들이 그렇게 주장한다. Kenneth Copeland, Charles Cabbs, Napoleon Hill, Robert Schuller, Norman Vincent Peale Joel Osteen 등도 같은 생각이다. 육신의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세 번이나 기도한 바울의 경우를 보라 (고린도후서 12장).

근자에는 번영신학이 TV 설교가의 80 퍼센트를 넘는다고 한다. 예수를 믿어도 암으로 고생할 수 있고, 교통사고를 당할 수 있고, 남이 당하는 고통을 당할 수 있다. Shamanism 적으로 믿는 성도들이 너무도 늘어만 간다는 사실 앞에 아연실색(啞然失色) 하지 않을 수 없다. John Calvin 은 55세에 몸에 27까지 병을 가지고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Robert Murray McCheyne 목사는 26에 목사가 되고 29살에 세상을 떠났다.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있을 때 그의 오른 팔 격인 드로비모는 밀레도에 병들어 누어 었었던 일을 기억하는가?

하나님은 전제주권으로 인간을 다스린다. 몸에 병이 나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병이 나는 것도 하나님이 아시는 가운데 일어난다. 낫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고 죽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다. 신자에게 죽음은 손해가 아니다. 하나님에게 우리의 생사가 달려 있다. 반드시 오래 사는 것이 축복은 아니다. 하루를 살아도 주님을 바로 믿고 사는 것이 중요하다. 칼빈선생의 믿음이 우리 보다 못해서 그리도 가난하게 살다가 그리도 일찍 세상을 떠났는가? 변영신학은 가장 비성경적이지만 사람들이 좋아하다. 교인들의 귓맛을 좋게해주는 목회자는 번영신학을 성경의 가르침인양 거짓으로 가르친다. 속지 말자.

열번째, 뉴에이지 운동의 교회 침투가 활발하다

TV 인기 프로를 담당하고 있는 Oprah Winfrey 가 2008년 3월부터 교회를 시작했다.

그가 가르치는 내용을 보면, 1. 천당은 장소가 아니고 나의 의식구조이다. 2. 나의 심성은 하나님의 일부이다. 3. 나는 나의 거룩함으로 구원을 얻는다. 4. 구원은 나에게서 오는 것이다 5. 죄란 존재하지 않는다. 6. 십자가에 매달리며 울부짖지 말라, 7. 십자가의 멧세지는 우리가 십자가를 피할 수 있다는 교훈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8. 구원에 이르는 길은 예수만이 아니고 수없이 많다. 그러므로 예수만이 구원의 유일한 길이라는 말은 거짓이다. 이것이 자칭 침례교 신자인 Oprah 가 가르치는 교리이다. 그는 철저한 뉴에이지 운동의 전도사가 되었다. 사람들은 이런 거짓가르침을 검증도 않고 묵묵히 따르는데 이는 이 세상의 신이 저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기 때문이다 (고후4:4). 속임수 이다.

오늘 도처에서 이유 없이 부활하는 옛 영지주의를 통해서 뉴에이지는 힌두교 불고 같은 동양종교를 통해서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고 아주 자연스럽게 활발하게 주님의 교회에 침투하고 있다. 예배 형식, 설교내용, 교회 행정, 특히 교회 음악 등에 상당한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John Armstrong 박사가 쓴 The Coming Evangelical Crisis (P&R, 1997)) 라는 책이나. Hank Hanegraaf 의 Christianity in Crisis (Eugene, Ore.: Harvest House, 1999), 혹은 Michael Horton 가 편집한 The Agony of Deceit (Eugene, Ore.: Harvest House, 1998) 라는 책, 또는 Herbert Pollitt 박사가 쓴 Interfaith Movement; Invasion of New Age into the Church (Edinburgh, UK.: Banner of Truth Trust, 2000) 라는 책들을 참고하기 바란다.

II. 변질되어 가는 이유

첫째, 성경의 예언대로

눅 18:8에 보면 “인자가 다시 올 때,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라고 주님이 말씀하셨는데 그 예언의 말씀이 그대로 우리 눈앞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성경 헬라어 원문에서는 <믿음>이라는 말 앞에 정관사 (he) 가 붙어 있으니 그저 아무런 믿음을 말함이 아니고 “하나뿐인 믿음”, 즉 “성경적인 믿음“을 말함이 분명하다. 오늘 ”믿음“ 이라는 이름은 많지만 따지고 보면 성경적인 믿음은 찾아보기 어렵다. <성경적인 믿음> 이란 바로 ”하나님의 전제주권“과 ”성경의 절대적 권위“, 그리고 ”성경의 생활화“를 믿고 실천하는 개혁주의 신앙 (The Reformed faith)를 말한다. 입으로 큰 소리로 ”개혁주의“를 열심히 말한다고해서 모두가 개혁주의자가 아니다.

개혁주의 신앙은 교리와 실천이 항상 병행하고 일치한다. 이것이 개혁주의 이다. 종교개혁 당시 Scotland 의 연약파 (the Covenanters) 나 화란의 신학자들은 모두 그렇게 바른 교리를 믿고 바른 교리대로 살았다. 청교도들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오늘에 와서 개혁주의는 그 본래의 의미를 상실한 채 빛좋은 유행어로 전락했다.

둘째, 영지주의 의 부활

영지주의(靈知主義, Gnosticism)는 기원 1-2세기에 풍미 했던 반 기독교적인 <헬라의 이원론적 이교도 철학 사상> 으로 이단이다. Valentus나 Mani, 또는 Cerintus 같은 사람들이 대표적 인물들인데 요한 일서는 영지주의와의 싸움을 기록한 책이다. 초대교회 에서는 영지주의가 만연하여 교리가 흔들려 교회에 큰 혼란을 빚어냈다. 이들은 헬라의 신비종교의 이원론 (二元論, dichotomy) 을 도입하여 물질은 악하고 영은 선하다고 가르쳤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과 예수님의 인성을 부인했다. Cerinthus 라는 사람은 예수님은 세례 시 그리스도가 예수님에게 임했다가 십자가에서 <그리스도> 는 죽을 수 없으므로 그리스도가 떠났다고 가르쳤다. 유두고 (Eutychus) 는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 문제를 논하면서 예수님은 인성도 아니고 신성도 아니고 혼합한 성품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하다가 파문당했다. 예수님은 신성과 인성을 가지신 분이며 그 두 성품은 혼합한 것도, 분리한 것도 아니다. 이것이 갈게돈 공희 (AD 451) 의 결의이다. Nestorius 같은 이는 신성을 가진 예수와 인성을 가진 예수가 있다고 주장하다가 이단으로 파문당했다. 당시는 이단에 대한 태도가 단호했다. 오늘처럼 모호하지 않았다. 오늘의 사정은 이단인 것을 알면서도 그 세력에 위압당하여 할말을 못하는 비겁한 기독교 교계가 되어 버렸다. 그러는 동안, 얼마나 많은 순진한 성도들이 “양의 옷을 입은 이리“ 들에게 독약을 먹고 죽어 가는가? 하나님 앞에 가서 반드시 그 책임을 저야 한다.

영지주의는 또한 금욕을 장려했는데 사람은 은둔한 금욕생활을 통해서 새로운 특별한 계시를 받아야 구원을 얻는다고 신비적인 계시를 받으라고 가르쳤다. 우리의 영혼은 육신이라는 감옥에 갇혀있는데 예수님은 이를 해방시키려 왔다고도 가르쳤다. 이 세상에는 선한 신과 악한 신이 있는데 선한 신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신을 나타내 주고, 악한 신은 그 이름을 라고 하는데 그가 우주를 창조하였기에 마땅히 우주만물은 악할 수밖에 없고, 구약도 악한 신인 Demiurge 가 기록하게 했으므로 구약은 믿을 것이 없으리만큼 악하며 따라서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Marcion (c AD 150) 같은 사람은 구약은 도모지 인정치 않고, 신약 중에서도 가장 <비유대교주의적> 인 누가 복음 중에서도 예수님의 탄생기록을 제외하고 눅 4-24장만을 인정하고 이방인의 사도인 바울의 열 세개의 편지 중에서 목회서신 3개를 제외한 10개의 서신만을 인정하여 그의 정경은 눅 4-24장과 바울의 10개의 편지 (목회서신 제외) 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을 “마르시온의 정경” 이라고 한다. 초대교회 사도들과 속사도(續使徒) 그리고 교부들은 이런 이단적인 영지주의와 싸워야 했다.

또한 이들 영지주의자들의 가르침에 따르면, 에덴동산에서 뱀과 여자는 “현명한 지도자” 였고, 하나님과 아담은 “어리석은 자”로 묘사한다. 왜냐 하면, 뱀이 지혜를 여자에게 가르쳐 주었고 여자가 후에 아담에게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영지주의는 뱀을 숭상하고 여자를 숭상한다. 뱀은 사탄의 상징인데 여기서 사탄숭배가 나오고 여성숭배가 나오게 된다. 여성숭배는 이윽고 지구 숭배 (worshiping the Goddess of the Earth, or Gaia) 로 비약하는데, <하늘은 하나님 아버지> 이고 <땅은 하나님 어머니> 라는 것이다. 그래서 환경보호론 자 들이 나오게 되고 그래서 지구에서 난 것은 모두 신성하므로 짐승들도 숭상되어야 하고 인간과 짐승이 다를 것이 없다는 진화론을 지지하게 된다.

Charles Darwin 의 진화론의 철학은 비단 생물학계에서 하등동물로부터 고등동물로 발달하고 자연도태라는 방식으로 생명이 이어가는 것만 말하지 않는다. 그 영향은 경제, 정치 문화, 교육, 심지어 종교에까지 미친다. 그래서 19세기에 “문서설” 같은 가장 비성경적인 고등비평이 등장하는 것이다. 독일의 Julius Wellhausen 이나 Herman Gunkel, Sigmund Mowinckel, Martin Dibelius 같은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다. 이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넌 것이 아니라 “갈대늪” 을 건넜다고 가르친다. 깊이가 1 미터도 안 되는 갈대 늪에 그 수많은 애급의 군사들이 모두 물에 빠져 죽었겠는가? 이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마땅한 “적그리스도” 들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은둔의 생활을 좋아하는데 이유는 특별한 지식이나 계시를 받기 위해서이다. 이런 계 시는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니고 특별한 사람만 받는다고 저들은 주장했다. 그러므로, 중세의 수도사들이 이를 본받아 수도원에서 많은 세월을 보냈다. 성경은 세상으로 나가서 복음을 전하고 봉사하라고 가르치는데 영지주의자들은 은둔한 생활을 강조하며 금욕을 강조했다. 육신은 악하기 때문에 육신의 정욕을 죽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금식 중에서 건전하지 못한 금식행위가 성행 (盛行)하게 되는 것은 이런 영지주의에 기인한다.

이와 같은 사실을 볼 때, 오늘의 기독교의 타락상이 어쩌면 그렇게도 옛날의 영지주의와 같은가 하고 탄복하게 되는데 과연 마지막 때에 옛 영지주의가 다시 되 살아나서 교회에 파고들어서 기독교를 파괴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므로 성도들의 영적 경계가 필요하다. 이는 영지주의가 <뉴 에이지> 라는 사탄의 운동을 통해서 세상의 문화는 물론이려니와 기독교 문화를 타락시켜 교회를 여유 있게 파괴하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 사탄의 단말마적(斷末魔的)인 공격에 기인한다

살후 2장에 보면 <불법의 사람> 이 나오는데 이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적 그리스도이다. 사람마다 이 <적 그리스도> 가 과연 누구인가? 하고 생각하지만 문맥을 보아서 사탄임이 분명하다. 마지막에 사단이 놓여나서 만국을 미혹하는 가운데 (계 20장) 성도들을 미혹하여 어느 것이 <진정한 복음>이고 어느 것이 <거짓 복음> 인지 분간하기 어렵도록 역사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오늘 가장 큰 문제이다. <성도들을 미혹한다> 는 말은 성경에도 마태복음 24장에 기록되어 있지만 이는 교회를 파괴한다는 말이다. 사단의 목적은 성도들이 하나님으로부터 그리고 말씀으로부터 떠나게 하려는 것이다. <어느 것이 진리인지 분간하지 못하도록 하자> 는 것이 사탄의 전술이다.. 오늘의 교회에서 그런 사탄의 활동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음을 신앙의 식견이 있는 분들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하게 볼 수 있을 것이다. 눈을 떠야 한다. Kurt Koch 의 “Occult ABC' 라는 책 (한국어 번역판: 코흐 박사 저, 사탄의 전술 전략- 이중호 목사 역, 서울 예루살렘 출판사 간행) 을 반드시 사서 바로,

III. 대책

어떤 대책이 필요한가? 몇 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첫째 시대를 분별하자.

마태복음 18:1에 천기는 분별하면서 시대는 분별하지 못하는가? 라고 주님이 책망하신다. 영적 무장이 필요한 때아다. 사람들은 오늘의 교계 현실을 외면하려고 한다. 때가 악하다. 슬기로운 삶이 필요한 때이다. 복음이 만방에 전파된다고 하지만 진리의 복음보다 사람이 만든 가짜 복음이 퍼져나가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설교를 들은 다음 사도행전 17장에 나오는 뵈레아 사람들처럼 “그것이 절말 그러한가?" 하면서 성경과 설교내용을 대조해 연구해 보라. 얼마나 잘 못된 교리들이 여과 없이 그냥 그대로 설교로 흘러나오고 많은 순진한 성도들이 속아 넘어가는가를 보라.

둘째, 성경 공부를 체계 있게 하자

그릇된 스승에게 배우면 잘못되기 일 수이다. 이름뿐인 엉터리 신학교가 너무 많고 미 자격 교수 밑에서 공부하면서, 읽어야 할 만큼 책을 읽지 않고 졸업한 후, 안수 받고 남을 가르치게 되므로 필연코 이상한 교리를 가르치게 되어 많은 이단이 출현하게 된다. 오늘의 교계의 대부분의 문제는 목사들의 자격 미달에 있다. 하나님의 전제주권과, 성경의 절대권위와 성경의 생활화를 그대로 믿고 가르치는 신학교는 찾아보기 어렵다. 좋지 못한 신학교에 들어가면 좋지 못한 신학을 배우게 되고 바른 신학이 아니면 설교를 듣는 사람을 독살하는 결과가 된다. 나쁜 공장에서는 나쁜 제품만이 범남 할 뿐이다. 나쁜 제품을 쓰레기 통에 버려야 한다.

그리고 신학을 공부하는 것도 중요하다. 신학을 공부하려면 사명감 있는 사람만 신학교에 들어와야 하며, 부흥회에 가서 은혜 받고 즉흥적인 흥분에 신학 이라는 어려운 학문에 뛰어 들면 반드시 나중에 후회한다. 신학은 “모든 학문의 여왕” 이라고 한다 (The Queen of Sciences). 그만큼 어렵다는 말이다.. . 신학생은 책을 읽어야 한다. 필자는 신학교에서 오랜 세월을 공부하면서 점심값을 절약하여 그 돈으로 책을 사서 탐독했던 일을 기억한다.

신학생은 재학 3년 내지 4년 ( 미국의 정통 신학생은 보통 M.Div 를 4년 내지 5년에 졸업함) 공부하는 동안 서적을 2천, 혹은 3천권을 마련하고 졸업 후에는 일만 권 가까이 구입하여 읽어야한다. 자꾸 읽어야한다. 필자를 가르친 변증학 교수 Van Til 박사는 “If you don't like reading, get yourself out of my sight" 라고 강의실에서 늘 입버릇처럼 말씀하던 일을 기억한다. 일반 성도는 내 영혼을 누구에게 맡길 것인가를 잘 생각해야한다. "양의 옷을 입은 이리" 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청교도들은 "좋은 목사" 를 만나는 것을 제일 축복으로 여겼는데 이유는 자격 없는 목사를 만나면 영혼이 파멸되기 때문이었다. 좋은 목사 밑에서 성경을 바로 배울 수 있는 사람은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셋쩨. 깨어서 기도해야 합니다.

바른 말씀과 기도에 항상 깨어 있어야한다. 깨어 있으면 세간을 늑탈 당할 염려가 없지만 잠들거나 방심하면 세간을 도둑에게 늑탈당하고 생명까지 위해를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항상 깨어서 “오늘이 나의 인생의 마지막 날” 인 것처럼 근신하며 살아가자. “우리의 원수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두루 찾고 있기” 때문이다. 천로역정에 보면 기독도가 전도자의 손에 이끌려 어떤 곳에 가보니 불이 타오르는데 한 사람이 아무리 물을 부어도 불은 계속 타오른다. 나중에 뒤에 가서 보니 사탄이 기름을 계속 붓고 있어서 불을 끌 수 없었던 것이다. 이 말의 뜻이 무엇인지 아는가? John Bunyan 의 Pilgrim's Progress (천로역정) 을 읽으라,

넷째, 종말을 대비하자

이 세상에는 언젠가 종말이 온다. 기독교의 종말관은 희랍철학 사상이나 Arnold Toynbee 의 말대로 반복되는 것이 아니고(cyclical) 수직적으로 (vertically) 일직선으로 종말을 향해 달린다. 종말에는 일반 종말이 있고 개인종말이 있다. 주님의 재림을 맞는 일반 종말과 나 자신이 이 세상을 떠나는 개인 종말을 모두 준비하면서 살아야한다. 일반 종말의 징조는 “사람들이 믿음을 버리고 배교한다는 것“ 이 가장 뚜럿한 주 재림의 징조이고 개인 종말의 징조는 하나님 만이 아신다. 누구나 인생대학을 졸업하면 천국 소환장이 날아오게 마련인데 어떤 분은 아주 젊은 나이에, 어떤 분은 중년에, 또 어떤 분들은 노년에 찾아오기도 하지만 문제는 아무도 자기가 생을 마감하는 날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언제나 주님을 얼굴과 얼굴로 만날 그 날을 준비하며 바른 신앙으로 살아가는 일이 중요하다. 인생엔 연습이 없다. 한번 살면 그뿐이다 (히 9:27).

다섯째, 영적 완전 무장의 긴요성

지금은 교파나 교회에 의존하지 말고 각자 개인이 스스로 믿음을 지켜 나가야 할 때이다. 교파나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교회 헌법도 준수하지 않으므로 교회나 교단에 의존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이 말은 교회에 출석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교회는 세상 끝 날 까지 존속해야 하며 성도는 “그 날이 가까울수록 더욱 모이기에 힘쓰라” 고 히브리서 10:25에 말한다. 그러므로 교회에 출석하여 예배를 드려야 하지만 교회에서 말씀이 바로 선포되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는 말이다. 말씀이 바로 선포되지 않으면 바른 교회로 이전해야한다. Family Radio 에서는 교회에 나가지 말라고 까지 공공연하게 방송한다. 말씀을 바로 전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Polycarp 의 제자였던 Irenaeus 는 기원 2세기에 Adversus Haereses (Against Heresies)

라는 책을 써서 영지주의를 배격했는데 그 책에서 말하기를 “이단자는 절대로 벌고 벗고 나오는 법이 없고 반드시 정통기독교의 옷을 입고 나온다” 라고 했다. 오늘의 그릇된 교리를 전파는 “거짓 선지자” 들은 모두 정통기독교의 교리를 가지고 나온다. 그러나 그들이 사용하는 단어의 의미가 다르다. 십자가를 말하나 십자가는 고통을 감수하자는 수식어로, 천당과 지옥을 말하나 권선징악 (勸善懲惡) 으로, 그리스도를 말하나 도덕적 스승으로, 혹은 self-realization (자기 성취) 한 명칭으로 사용한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이런 단어들을 설교시간에 언급 한다고해서 반드시 그 교회가 바른 교회라고 보장할 수 없다. 또 책을 읽을 때도 이런 단어가 나오니 좋은 책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이단들의 책은 모두 위장이다

결론

오늘의 기독교는 문자 그대로 위기를 맞고 있다. 교회의 숫자가 늘어나고 성도의 수는 늘어가지만 진리의 복음은 위축되어간다. 주님이 원하시는 <참 복음> 은 들어보기 어려운 때에 살고 있다. 우리 모두 경성해서 영적인 무장을 통해서 잘 못된 교리들을 분별하고(discernment) 유다서 3절대로 <우리에게 단번에 전해 준 믿음의 도>를 순수하게 지켜나가야 할 것이다. 이 시대의 신앙풍토를 바로 잡는 일에 동참해야할 개혁주의 성도와 개혁주의 목회자들의 책임이 막중하다.

다음은 개혁주의를 방해하는 인물들의 명단으로 "번영신학", "뉴에이지 운동", "Emergent Church 운동", "명상영성(contemplative spirituality)", "바울신학 재해석", "제3의 물결 신학", "불건전한 신비주의", "동양신비주의“, ”이교도신학“ ”비성경적 방송전도“, ”성경의 심리학적 해석“ 등을 추구하는 인물들인데 이들의 책들은 분별해서 읽어야한다. 매우 위험한 인물들이다.

아래 적은 인물들은 대표적인 사람들인데 이 밖에도 많이 있다. 이들 중 이미 작고한 분들도 있지만 그들이 남긴 저서들은 그들을 추종하는 출판사들을 통해서 계속 교회에 흘러 들어오고 있다. 다음 인물들의 책은 매우 분별력 있는 사람만 읽어야 한다. 쉽게 함정에 빠지기 쉽기 때문이다.

Chuck Pierce, Rick Warren, Joel Osteen, C. Peter Wagner, Paul Crouch, Kenneth Copeland, Benny Hinn, Napoleon Hill, Robert Schuller, 조용기, 이동원(관상기도에 관한 분야), Bill Hybels,, Brian McLaren, N.T.Wright, Gregory Boyd, Clark Pinnock, Doug Pagitt, John Wimber, Richard Foster, Marylin Ferguson, Pierre Teilhard de Chardin, Richard Rippert, Deepak Choprah, Rick Joyner, T.D.Jakes, Gerald Jampolsky, Jack Canfield, David Spangler, Benjamin Creme, Abraham Maslow, Helen Schucman, Matthew Fox, Alfred Whitehead, Todd Bentley, etc.

http://cafe.daum.net/phjusarangchurch/IUE/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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