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설교관
(박건택 교수의 '칼빈과 설교' 참조)
임진남 목사 / 한국개혁주의 신학연구원 (2014.10.10)
1. 서 론
루터는 “마귀는 우리를 그리스도가 없는 성경으로 인도하고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가 계시는 성경으로 인도 한다”고 말한다. 루터의 말처럼 수많은 사람들은 성경을 읽고 들을 때 그리스도가 없는 성경을 읽고 듣고 있다. 목사로 부름 받은 우리들이 강단에서 복음의 진리를 전하고 있는지 날마다 우리는 자신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종교개혁은 신학의 개혁이다. 인간의 공로와 하나님의 은혜, 인간의 전통과 하나님의 말씀, 인간의 권위와 하나님 말씀의 권위, 인간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투쟁이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이 모든 외침은 성도의 구원과 관련된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구원은 자신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 역사한다. 이것을 모든 선지자들과 사도와 교부들과 개혁자들이 함께 말하는 공통분모이다.
여기에 칼빈은 강단에서 목사들이 선포하고 가르쳐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고 확실하게 보여준다. 칼빈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강단에서 올바르게 선포되어지지 않는다면 종교개혁의 취지는 없다고 보았다. 그래서 모든 설교자들의 입은 하나님의 입이 되며 그들의 입술은 하나님의 도구가 된다고 본다. 바른 설교가 바른 신학을 세우고 바른 신학이 바른 설교를 낳게 한다.
우리는 모든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무엇을 말하였는지 알 수 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메시야의 모형을 언급하였다. 여기에 불순종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고 회개하고 돌아오라고 촉구한다. 신약의 사도들 또한 오신 메시야를 선포하고 가르쳤다. 이제 영적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령으로 새겨주신 새 언약을 기억하고 살아가라고 촉구한다. 그렇다면 오늘날 선지자와 사도들의 터 위에 세우신 교회는 그들이 전하고 가르쳤던 그리스도를 선포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교회의 존재 목적이 되는 것이다. 교회를 세워 사회봉사와 가난한 이웃을 돕는 것은 2차 목적이다. 그렇다면 가장 중요한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하나님은 어느 시대를 불문하고 자신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을 부르시고 사용하신다. 모든 사람들이 다 선지자, 그리스도, 사도가 아닌 것처럼 목사들도 다 바른 설교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자들만이 참 목사이며 바른 설교자들이다. 이러한 인식이 있어야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알고 연구하며 증거할 수 있다. 칼빈은 성경이 바로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하는 것을 알았고 그래서 그는 설교를 할 때 성경의 말씀만을 전했고 오직 그리스도를 증거 했다.
2. 본론
설교에 대한 칼빈의 사상
1.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대리자 역할을 한다.
“복음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포될 때, 그것은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이 말을 통해보면 칼빈은 설교할 때 스스로를 하나님의 대사로 여겼다. 그러므로 설교는 단순히 예배의 요소들 가운데 하나라든가 교회의 임무들 가운데 하나 정도가 아니라, 그것은 일종의 하나님의 현현이다. 설교를 통해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에게 직접 말씀하신다. 이것은 설교자가 어떤 자세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선포해야 하는지를 확연히 보여준다.
그리고 그는 부언하여 말하기를 “말은 내가 하지만 교육은 하나님의 영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나도 내가하는 말을 들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내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 만일 저 높은 곳으로 부터 내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면, 다른 모든 사람들 (복음을 듣고도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지 않는 이들)에게와 마찬가지로 나를 유익되게 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목소리는 허공에 사라지는 소리에 불과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모든 믿는 자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칼빈은 성경66권이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며 사람을 통해 선포되어지고 가르쳐진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직접 천둥 같은 소리로 하늘에서 말씀하시지 아니하시고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셨다는 사실에 주목하였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하나님께서 말씀 하실 때는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셨으며, 하나님께서는 선지자의 말은 하나님 자신의 말씀임을 말씀하심으로써 그의 말씀을 드러내셨고 이로써, 인간의 입에서 나온 말이 그것을 듣고자 하는 자들에게 전파됨으로써, 마침내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느 의미에서 보면, 하나님의 입으로 부터 나온 말씀은 인간의 입을 통하여 나온 말과 동일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하늘로부터 직접 말씀을 선포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그 도구로써 사용하시기 때문이다.” (이사야 주석 55:11).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이 그의 말씀 안에서 빛나고 하나님이 그의 종들을 통하여 말씀하실 때마다 하나님과 가까이 마주 대한 것처럼, 말씀으로 무한한 감화를 받아야 한다고 결론지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의 거룩성과 권위를 주장한다.
성경 기록에 대하여 칼빈의 독특한 표현은 “성령에 의해 구술되었다”(성경무오에 대한 직접적인 주장은 없으나, 주석과 강요 등 다른 글들에서 성경의 영감과 무오를 유추할 수 있다.) 모든 구약의 성경은 성령의 구술아래 다 저술되었다.
칼빈은 자신이 전하는 성경의 말씀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확신하며 자신을 비방하는 자들의 소리에 민감하지 않고 계속 성경의 말씀을 전하는 일에 전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성경의 말씀을 올바로 전하는 자들을 비방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설교자의 인격을 가지고 비방한다. 이사야, 예레미야, 다니엘, 에스겔, 사도들의 강력한 메시지는 일반백성들보다는 지도자들에게 상당한 거부감을 주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심판만 선포하는 사랑이 없는 거짓 선지자라고 매도하였다.
칼빈은 자신을 가혹하다고 비난 하는 자들을 향해 그는 이렇게 선언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완전히 자유롭게 활동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자신에게 던져지는 훈계의 말씀을 거역하여 일어나는 모든 자들, 그들은 하나님께 맞서 그에게 반역하는 자들입니다. 내 혀가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한다 해서 내 혀를 탓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날 사용하셔서 당신의 말씀을 전달하시고자 할 때 사람들이 내 인격에 맞서서는 안됩니다. 만일 내게 맞선다면 악인들은 하나님이 이 문제에 대해 보증이 되시리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1549년 8월 16일에 행한 예레미야 강해 설교 제 25번째)
“만약 내가 예레미야 선지자가 아니라고 그들이 주장한다면,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할지라도 나는 그가 선포한 것과 동일한 말씀을 전달하고 있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그의 영으로 내게 주신 분량에 따라 그를 신실하게 섬겼음을 그 분 앞에서 주장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헐뜯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대항하여 불경한 짓을 하는 자들은 자기들이 하고 싶은 말들을 할 것이지만 그래도 하나님이 드러내시고자 하는 그것은 드러나고야 말 것입니다.” (다니엘서 21번째 설교)
“오늘날 다음과 같이 말하고자 하는 자들이 더러 있습니다. 우리들 중에 선지자라고 자처하는 저 칼빈을 보라! 그는 스스로 그것을 원한다. 그러면 그가 선지자 인가?’ 그러나 내가 선포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교설인 까닭에 나는 이런 어투로 말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여기 에스겔에서 우리가 듣고 있는 이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인 까닭에 나는 이 선지자가 말한 것을 변형시키고 싶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이 선포되었을 때 그것이 자기 자신을 위해 선포되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들을 위해 선포되기도 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에스겔서 5번째 설교)
칼빈이 이렇게 대적 자들을 향해 비판하는 것은 그들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란 단지 사람의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칼빈은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이 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던 것은 오직 성경이 말씀하고자 하는 바를 그대로 설교자가 전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설교를 통해서 선포되어지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성경에 기록된 대로만 선포되어진다면 하나님의 메시지라고 역설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설교자가 성경이외에 어떤 직접적인 메시지를 받았느냐가 아니라 그 말씀이 원래 나타내려고 하는 대로 충실하게 청중들에게 전달되느냐의 여부라고 보았다. 그래서 설교나 모든 가르침은 성경 본문 속에만 들어 있는 것이어야 하며, 오직 본문만을 자세하게 설명해야 한다고 확신하고 설교자가 성경본문말씀 이외 다른 것을 더한다면,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 설교는 타락한 것임에 틀림이 없다고 여긴다.
(구약시대에 주어졌던 율법이 계속 강조되었다고해서 율법이 약화된 것이 아닌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계속 반복해서 가르쳐진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성경의 말씀의 권위와 능력이 약하게 되거나 무력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단지 말씀을 듣는 청중들이 반복되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존귀하게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칼빈은 자신의 사명의 중대성을 확신하고 또 자신이 전하는 메시지가 하나님으로부터 기인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믿었다.
이러한 칼빈에게 있어서 그의 사역을 수행케 했던 제일 주된 확신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에 대한 확신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 바로 그것이었다.
“나는 하나님께서 취하신 방법에 맞춰 본문의 진정한 흐름을 그대로 따르려 할 것입니다. 나는 권면을 지루하게 고집하지 않고 다만 다윗의 시를 사람들이 소화할 수 있도록 설명해 주는 것으로 만족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각 8절을 한편의 설교로 완성시킬 생각을 했었고, 또 가장 배우지 못한 자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다만 본문의 단순한 핵심을 밝히는 것으로 그치려 했습니다.”(칼빈 시편 119편 설교)
칼빈에게 있어서 구. 신약 성경은 주님이 자신의 뜻을 표명하고 계시기 때문에 그는 그의 설교를 이용해 자기 고유의 사상을 표현할 권리란 없다는 것을 믿었다.
칼빈은 그의 설교집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적으로 말하였다.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도록 하자. 즉 경솔하게 그 자신을 신뢰하거나 자기 자신의 업적을 미봉책으로 적당히 얼버무리지 말고 순수하게 하나님의 진리에 붙들리도록 하라. 그는 마땅히 그의 교리들을 사람들에게 가르치도록 하라.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도록 하라.”고 하였다. 그는 설교자는 그의 설교에 있어서 성경본문의 지배를 받아야 된다는 것이었다.
칼빈은 말하기를 “성경을 읽는 사람이나 설교를 듣는 사람들은 그들이 어떤 어리석은 사색을 구한다든지 그들이 자기 힘으로 스스로 개조해 보려고 교회로 나온다면 그들은 복음을 더럽히는 꼴이 될 것이다”. 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성경 본문 해석에는 언제나 인간을 통하여 그 자신을 나타내신 하나님을 절대로 피할 수 없었다. 성경을 읽고 말씀을 들을 때 자신에게 깨달아지고 다가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성경 그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여긴다.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배제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만을 전해야 하고 가르쳐야 한다. 선지자와 사도들은 첫 번째 계시의 수납자들이다. 그 후로부터는 (목사나 설교자들)단지 2차적인 수납자들에 불과하다고 보고 있다. 오직 말씀을 전하는 도구에 불과하다.
2.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듣는 것이다.(그리스도의 임재로서의 설교)
칼빈은 설교에 대하여 항상 중요하게 여긴 신학적인 사상이 있었다. 그중에 “그리스도에게서 듣는다” 라는 확신이었다. 이러한 확신은 모든 설교자는 그리스도의 사신이라는 것을 말한다. 강요 4권8장 1절-3절에서 하나님은 오직 교회에 유일한 선생으로 그리스도를 임명하셨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모든 교회의 회원들은 그리스도를 통해 배우고 자라가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변화산에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의 말을 들으라고 하신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이제부터는 아들을 통해 말씀하시고 아들이 모든 것을 가르친다. 모든 구약의 족장들이나 선지자들은 자신들의 것을 가지고 나눠주고 가르친 것이 아니라 오직 그들이 맡은 임무만을 행하였다. 가나안 땅의 분배마저도 그것은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나눠준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들은 사신이다. 즉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사신이다. 그들이 누구에게서 말씀을 전하는 것을 배워야 하는가? 먼저 그리스도에게서 들어야 한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는 자는 그리스도를 만나야 한다. 이것이 칼빈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기초적인 성경교리에 대한 사상이었다. (강요4권 8장)
이러한 신학사상을 기초로 하여 본다면 칼빈은 설교란 듣는 청중들이 그리스도에게서 직접 들어야하는 말씀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다시 말해 설교는 그리스도의 임재를 의미하는 것이다. 성만찬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그곳에 계시며, 우리의 영혼의 양식이 되어주신다고 하는 것처럼, 설교도 이와 같다.
칼빈은 설교자의 입을 주저함 없이 “하나님의 입” (벧전1:25 주석, 그들의 입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의 입이다.)이라는 칭호로 불렀는데 이것은“사자” 라는 칭호보다 더 우월한 것이다. 이는 설교자가 강단에 섰을 때 바로 하나님 자신이 자기 백성에게 말씀하시는 것과 같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칼빈의 설교에 대한 인식에서 설교란 신적행위인 것이었다. “설교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시며”, “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찾으시고 가까이 오신다.” “우리에게 선포되는 말씀을 우리가 소유함과 동시에 하나님은 우리와 일반적이고도 평범한 방법으로 대화하신다... 이렇게 복음의 설교는 하나님께서 하강하셔서 우리를 찾아오시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주어진 성경이 설교자에 의해 설교 되어질 때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의 표징이 되며 하나님을 만나는 도구가 된다는 것이다. 칼빈의 눈에 비친 설교란 그야말로 그리스도의 현현, 혹은 하나님의 현현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었다. 목사가 복음을 전파할 때 하나님은 실재로 임하시고, 임재 하시되 성례식에서와 마찬가지로 임재 하신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그의 설교에서 먼저 구원의 필요성에 대해서 바른 지식을 주고 그 후에 그 교훈이 사람의 심령에 생생하게 접촉하도록 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설교자는 셩령이 그 설교자 자신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성령의 도구가 되도록 기도로 준비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칼빈은 인간은 말씀 안에서 하나님과 대면할 수 있다고 명백히 가르쳤던 것이다.
3. 설교는 그리스도의 통치 수단이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다는 것은 곧 그곳에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통치가 임한다고 하는 것을 의미한다. 믿음의 족장들과 모세와 그리고 하나님이 부르신 모든 종들은 하나님의 임재 앞에 죽은 듯 엎드려 오직 순종하였다. 하나님은 자신을 다양하게 나타내시고 자신의 종들을 통해 자기 백성들을 통치하셨다. 비록 외형적으로는 같은 사람의 모습이고 연약함도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통치하는 수단으로 종을 불러 사용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다. 이와 동일하게 설교도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통치하는 수단이다. 왜냐하면 이미 설교를 통해 그리스도가 임재하시고 있기 때문이다. 칼빈은 설교자가 설교 할 때는, 비록 그가 우리와 동일하게 보이고, 대단한 존경을 받거나 그런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는 여전히 설교가 행해지는 곳에 계시고 그의 왕적 보좌를 그 곳에 둔다고 말한다.
복음은 우리를 사탄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바꾸어 놓았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죄와 죽음의 지배를 받는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다 무너뜨리시고 해결하신 분이 우리 주 그리스도이시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시민이고 그 분께만 순종하는 백성들이 되었다. 이것은 복음의 능력으로 된다. 그러므로 복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가능한 것이다. 썩어지지 아니하는 씨앗,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난 것이다. 그렇다면 설교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므로 설교가 하나님의 통치의 수단이 된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이라 불려 질 수 있다. 그러므로 어느 나라에서 복음이 설교 되든지 그것은 모든 땅위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주되심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할 때 그리스도의 통치라는 의미를 알고 자신이 하는 말에 대하여 주의를 요구한다. 특히 성경에 주어진 내용을 설교할 때 단순하고 간결하게 그리고 용감하게 전달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여기에서 단순하게라는 의미는 “청중들의 이해력에 부응하여” 각 신자가 그 설교에서 “자신의 몫과 분깃을” 얻을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고 했으며 하나님께서 성경을 단순 명료하게 쓰셨기에 성경을 해석할 때도 단순하게 해야 한다. 또한 간결하게는 “평범한 간결성과 결코 애매모호함이 없도록 하여 저자의 의도를 드러내야 한다” 는 의미다. 그리고 용기 있게는 하나님께 반항하는 악한 인간성에 대해 공격해야 한다. 말씀의 사역자는 “우물우물” 말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주님께서 그의 교회가 알기를 원하는 모든 것을 가차 없이 혹은 꾸밈없이” 제시해야하는 것이다. 이러한 설교자의 자세는 말씀의 선포를 통해 통치하시는 그리스도의 뜻을 확실히 전하는데 있다. 그러므로 종교개혁 당시에 설교는 번창할 수 있었다.
칼빈에게 있어서 설교가 그리스도의 통치라는 개념은 자신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고한 신념에서 일어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만이 악한 인간을 하나님의 통치에 굴복시킬 수가 있는 유일한 방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권위에 순종해야 한다.
4. 설교는 은혜의 방편이다.
“ 시대마다 사단은 교회의 두 표지를 제거하고 말살하려고 최대의 음모를 꾸미고, 또는 이 표지들을 대대적으로 멸시함으로써 목회직을 전복시키려고 애를 쓴다. 그러므로 교회의 시금석은 바로 이 표지들이다.” (강요4.1.11)
칼빈은 디모데전서 2장 3-5절에 관련된 설교에서 “인간은 이런 신앙을 가질 수 있는 어떤 지식이 있는가? 복음에 포함되어 있는 놀라운 지식을 갖고 있는가? 인간은 천사와 같이 그 자신을 나타낼 수 있는가? 먼저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을 주의 깊게 생각해보자 그가 우리의 눈을 뜨게 할 것이며, 그 자신이 우리의 귀를 열어 주실 것이다. 왜냐하면 자연인은 하나님의 오묘한 비밀의 어느 부분이라도 깨달을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하나님의 오묘한 비밀을 알게 하시는 이는 성령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영혼의 눈을 뜨게 하시기까지는 부패한 성품으로 말미암아 여전히 우리는 소경과 같다. 그러한 사실을 일깨워 주는 성경을 발견하지 않고서는 단지 성경의 몇몇 구절을 가지고 운운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인간은 성령께서 일깨워 주고 이끌기까지는 하나님께 올 수 있는 어떤 지혜도 없다.” 고 하였다.
물론 이것은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은 택한 백성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축복을 뜻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능력에 맞추어서 그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셔서”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의 수단으로서의 설교에 대해 “그리스도는 말씀 전파자를 통하여 인간의 마음을 비추고 그들의 정신을 새롭게 하며, 즉시 그들을 온전히 거듭나게 하신다.” 하나님의 음성은 ... 살아 있는 것이며 바로 효력과 연결 된 것이로되; “권능과 통하는 강력한 도구이니; ” 주님의 신성한 입에서 나온 모든 말씀이 온전히 효력을 발휘하리로다.”
“복음은 단지 들려주기 위해 전파되는 것이 아니라, 영생을 위한 씨앗으로써 우리를 거듭나게 하려 함이며, 우리를 향한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이 끊임없이 증거되게 하기 위하여 전파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마음의 안식을 얻고 구원을 확신함으로써 진정한 기쁨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고 하여 설교는 하나님의 은혜의 수단임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설교에 대한 이해는 하나님의 선물로서의 성경, 특히 인간의 구원을 위해 주신 은총의 선물로서의 성경관과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5. 설교는 구원과 심판의 양면적인 효력을 발생시킨다.
칼빈은 목사에게는 두 가지 목소리가 있어야 하는데 “첫째는 사람을 격려하고 위로하고 바른 길로 인도하는 온유한 음성이고, 둘째는 이리와 도둑을 쫓는 노성이라는 것이다.”(디도서 주석)
칼빈은 말하기를, “지금 우리가 사람을 만족시키려고 성경을 자세히 설명한다면 무익하게 된다... 만족할 만한 복음 설교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 하셨다. 라는 말만이 필요하다. 선하고 진실한 목자는 성경을 간신히 해설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과 덕을 주기 위하여 진지하고 분명하게 사용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목회자는 어려움이 많아도 진실해야 됨을 가르친다. 무엇이 선인가를 사람들에게 보일 뿐 아니라, 그들을 책망하기 위해서도 진실해야 된다.” 한 것이다.
“성경은 목자에게 양떼를 모으고, 또 도적떼와 늑대를 쫓기 위한 두 목소리를 제공한다.” 는 칼빈의 주장은 그의 성경권위에 대한 믿음과 결코 분리되어 생각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경의 절대 권위를 갖고 선포되는 말씀은 구원과 심판의 양면적 효력을 지닌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을 그의 면전에서 거부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칼빈은 교리의 대적자나 복음을 듣고도 배척하는 자들에 대해 “그러므로 오늘날 하나님의 진리를 알고 난 후에도 금수와 같이 되어 모든 이성을 상실하는 자들을 보거든, 하나님이 그렇게 해서 당신의 말씀을 높이시고 우리로 하여금 그 위대함을 깨닫도록 하시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말씀에 대해 모독하는 자들을 악마에게 내어 주시어 그의 지배를 받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너무도 중요한 것이기에 사람들이 그것을 오용하거나 망령되이 대하거나, 위장하거나, 속되게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결코 허용치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
“...게다가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말씀을 제공하여 주셨지만 그들은 그것을 수락하지 않을 만큼 그릇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불신자들과 반역자들은 마치 그들은 하나님과 무관한 것처럼 그(하나님)의 이름을 경거망동하게 모욕하는 그들의 입을 막지 않고 있음이 그 증거인 것입니다. 그러나 신실한 자들은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에 대해 겸손하게 그에게 영광을 돌립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왜 그가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부르는지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부르고 계시는데 그들은 오기를 거절하는 커다란 배은망덕 때문에 죄 값을 치르게 되어있다”는 말을 통해 볼 때 칼빈은 설교가 하나님의 권능임을 확실히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거슬러 행하려는 자신들 속에 존재하는 본성을 교화시키도록 스스로 힘써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오는 이 권능은 또한 하나님의 자녀의 마음속에서도 악을 죽이고 굴복시키며 쫓아 낼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은 모든 조소를 기록할 자를 두셨다... 우리의 교훈으로 이 말씀이 주어졌으니, 우리는 자신을 겸손히 함을 배우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순종하자. 그는 천사의 왕으로 천사도 그에게 복종하니까” 라고 했던 것이다.
또한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주 예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기를 배웠다. 비록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눈으로 보이는 방법으로 말하지 않을지라도, 복음은 그리스도의 권위로 말미암아 설교되어 진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 말을 듣는 자가 곧 내말을 듣는 자라고 말하셨다.
그러나 “설교 듣기를 멀리하는 자들은 마치 고의적으로 하나님의 힘을 거절하고 또한 자기들을 구원하기 위해 펴시는 하나님의 능력의 손을 멀리 뿌리치고 있는 사람들인 것이다.” “ 그러므로 설교를 들으러 가기를 거부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행동에서 벗어나는 것이요, 그의 구속적 간섭을 거절하는 것이며, 결국 자신을 구원으로부터 제외시키는 것이다.”
성경을 들고 강해하며 설교하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앞의 청중은 하나님의 면전에서 그의 말씀을 듣는 것이요, 하나님은 그 설교되는 말씀을 통해 권능을 행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복음을 듣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셈인데 여기에는 두 가지 다른 의미가 있다.
메시지를 반항하고 거역하는 사람들은 가혹한 형벌을 가중시킬 뿐이다. 반면 하나님의 은밀하신 능력에 이끌림을 받은 피 선택 자들은 성령이 말씀 안에서 그들의 구원을 위해 강력하게 역사하신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말씀이 신자들을 구원하는 데에 효과적인 것이라면 이와 마찬가지로 그것은 사악한 무리들을 심판하는데도 충분한 효과를 지니고 있다” (이사야 주석 55:11).
하나님이 우리를 이끄시지 않으면 우리는 그에게 갈 수 없기 때문에 진리를 깨닫는 자마다 구원을 얻으리라는 하나님과 약속을 굳게 잡아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러한 선포에 덧붙여 그들로 하여금 그에게 올 수 있는 비밀의 능력을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주 받은 사람들은 이러한 은사가 부족하기 때문에 변명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칼빈은 이러한 심판의 부정적인 면은 “복음의 본성이 아닌 우발적인 것들” 이라고 덧붙인다. “복음의 본성을 떠난 인간의 과오로 부터 발생되는 것” 이라는 것이다. 복음을 듣지 못하는 죄인들에게 하나님의 책임은 없다. 또한 복음을 듣고도 회개하지 않는 자들에게도 하나님의 책임은 없다.
그러므로 복음의 제시는 꾸밈없이 용기 있게 제시 되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과 전쟁하지 않고서는 진리를 왜곡시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꾸짖어야 할 내가 악을 허용하고자 한다면 뭐가 되겠습니까? 그 같은 일이 정당하게 되거나 또는 우리가 이런 것을 구실로 이용하게 된다면 우리는 아무리 이것저것 갖다 붙여보아도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며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을 대항하여 싸우는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양심은 우리를 매우 꾸짖게 됩니다.”
또한 그는 사도행전 20장 18절 이하를 설교하면서 “... 나는 이처럼 내가 내 양심에 따라 해야 할 바를 수행하도록 사람들이 허락지 않던 또는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내게는 전혀 합법적이지 않는 일을 하라고 사람들이 날 강요하든 간에 나는 내가 해야 할 일 이외의 것을 넘어서 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자유로이 설교하고 또 여러분에게 봉사할 수 있는 한 나는 하나님의 이름을 두고 이 일을 할 것입니다.”
이러한 칼빈의 신념은 복음 선포의 이중적 효과를 아는 자로서의 고백인 것 같다. 그는 “타락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거슬러 자칭 심장에 강철을 두르고 있지만 결국 자신의 죄로 인해 사슬에 묶이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진정한 웃음을 삼킨 채 냉소를 짓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내면적으로는 그들도 사함을 받을 것이라고 느끼기 때문에 온갖 방법으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나오지 않으려하나 그들이 조소했던 그 말씀에 의해 주님의 심판대 앞에 이끌려 나오게 된다. 이는 마치 쇠사슬에 묶인 개들이 그곳에서 헤어나려고 물고 찢고 하는 격렬한 모습과도 흡사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말씀 증거의 역할은 죄인들에게 반발심을 일으키고, 심지어는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에게 까지 반발심을 일으키게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설교는 구원과 심판의 양면적 효과를 나타내는 권능이 있기 때문이다.
6. 성령의 능력의 현현으로서의 설교
칼빈은 성경 66권 전체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이유는 성경의 저자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오묘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말하거나 역사함이 없이는 또는 믿음으로 오지 않는다면 인간의 목소리를 듣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딤후 1장 9, 10절) 이 설교에서 성령의 역사와 조명 없이 아무리 성실한 설교일지라도 듣는 청중들에게 유익이 못된다고 여긴다. 이것은 설교자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철저히 자신을 부인하는 것이며, 아무리 자신이 훌륭한 메시지를 전했다고 할지라도 그 내용의 주인은 그리스도이시므로 자신의 것이 없고 오직 도구에 불과하다는 겸손한 모습으로 말씀을 전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또한 모든 설교는 성령의 권능으로써만 능력을 부여 받을 수 있을 뿐이며, 외적인 말 그 자체로서는 어떠한 효력도 청중에게 미칠 수 없다” 는 것이다. 목회자들의 능력이 말씀 중에 있다 할지라도 항상 주이시고 구주이신 분은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먼저 설교에 앞서 기도로써 준비하여 말씀을 전달하는 그 자신이 성령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칼빈의 설교관의 가장 중요한 교리는 ‘성령의 내적 증거에 대한 교리’ 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자연인은 하나님의 오묘한 비밀의 어느 부분이라도 깨달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오묘한 비밀을 알게 하시는 이는 성령이시기 때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성도에게 나타나는 회심과 구속과 영생의 기쁨은 설교자의 설교자체의 능력이 아니라 그 말씀을 그의 도구로 사용하시는 성령의 권능의 결과인 것이다. 칼빈은 설교가 그 자체로서는 듣는 이들을 변화시킬 아무런 힘도 없음을 인식했다. 인간에 입에서 나오는 그 어떤 말은 인간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없다. 오로지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하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을 곡해해서는 안 된다. 그만큼 성령의 역사만이 인간을 구원하고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설교를 통하여 선포될 때에 그 말씀 선포의 효력은 청중의 수용능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요, 또한 설교자 자신의 능력이나 재능에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설교를 하는 목사들이 무기력해지면 안 된다. 자신이 전하는 설교에 하나님이 축복해주시기를 바라고 준비해야 한다.
그리고 그는 계속하여, 사역자의 역할은 밭을 가꾸고 씨를 뿌린 후 기도로 하나님께 자신의 노력을 축복해 달라고 비는 경작자의 역할에 비할 수 있다고 하며 “사역자들은 일을 하고 씨를 심는 노동자들과도 같다” 고 하였다.
“또한 사역자들은 일꾼들이 땅에 씨를 뿌린 후, 그 씨가 배태한 것을 생산해 낼 때까지 할 수 있는 대로 땅을 도우는 책임상 그와 동일한 일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노동에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은 확실히 하나님의 은혜의 기적이지 인간 근면의 결과가 아니다” 고 하여 오직 하나님의 기적만이 인간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이 되게 할 수 있다고 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회직에 성실히 임하는 자는 누구나 그 만큼의 성과를 원한다.” 는 사실을 인식하는 칼빈은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노력만큼의 결실을 맺지 못했을 때는 한없이 애석해 하던 경험들을 가지고 있으리라 본다” 고 하며, 그 저조한 결실의 책임의 일부는 우리에게 있음을 피력하였다.
그러나 그는 계속하여 말하기를 “진리란 설령 그것을 들어 주는 이가 없어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한다 할지라도, 우리의 입술로써 끊임없이 들려주어야 하는 것이니, 우리는 다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명을 다함에 족할 뿐이다.” 라고 하였다.
설교는 성경해석에서 출발한다. 그러므로 설교는 성경을 자세히 설명하지 못할 때 그 기능을 상실하는 것이다. 설교에서 나타나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 기록된 성경의 말씀이어야 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너희로 하여금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게 하려 함이라” (고전4:6)고 성도들을 깨우치고 있다.
그러므로 설교자 자신이 가진 신학의 입장과 성경관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설교자 자신의 신학적 입장과 성경관에 따라 설교의 방법과 방향은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학과 설교는 무관하지가 않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과 만나신다. 예배를 통해 자신의 백성들에게 임재 하신다. 물론 매일 매일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과 함께 하신다. 하지만 공적으로 자기 백성들과 만나는 시기는 예배 때이며 그 가운데서 기록된 성경의 말씀이 선포될 때 그의 백성과 만나신다. 그때는 인간의 말로서 만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의 백성을 깨우치며 만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성령 안에서 되는 것이며 이때의 설교자는 오직 말씀 증거의 도구에 불과한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영의 나타남과 능력만이 그의 설교를 통해 역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성령의 능력만이 주님의 교회를 세우고 자라게 하신다.
3. 결 론
오늘날 교회 강단에서 성경의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는 일에 수고하는 주의 종들이 과연 얼마나 많이 있는가? 라는 질문에 우리가 보고, 각각의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신앙의 양태를 본다면 그에 대한 대답은 회의적이다. 강단에서 간증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난무하며,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켜야 한다는 치유신학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또한 복음 선포보다는 상담이 인기를 모으고 있다. 이러한 결과는 하나님의 말씀, 즉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말씀하신다고 하는 사상이 전무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칼빈의 성경관, 또는 설교에 대한 견해를 통해 그가 얼마나 성경중심적인 목회를 했는지 알 수 있다. 설교자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고 그 말씀 앞에 자신이 먼저 두려워하며 떨어야 한다. 설교라는 것은 단순히 인간이 말을 함으로써 강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한 결 같이 증거 하였던 것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었다면 오늘날 목사들은 더더욱 이 일에 집중해야 한다.
부 록. 칼빈의 성경해석 실제 및 적용
1. 갈3:19-20
“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천사들을 통하여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그 중보자는 한편만 위한 자가 아니나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해석: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수여하신 이유는 죄의 확신을 막기 위해 더하여 주신 것이다. 이 율법은 천사를 통해 중보자인 모세에게 주었다. 그런데 이 율법은 약속의 자손인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 몽학선생으로 역할을 한다. 결국 이 율법은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 있는 것이므로 율법의 역할도 그리스도에게 우리를 이끈다. 그런데 20절의 중보자는 한편만 위한 자가 아니라고 할 때 모세를 말하고 있다. 하지만 모세는 그리스도의 모형이고 중보의 실체는 오직 그리스도 예수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한편만 위한 분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문맥을 통해 바울이 주장하려고하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는 유대인들만 위한 것이 아니고 이방인들도 위한 것이라고 하는 말씀이다. 그래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도 하나님은 한 분이라고 하는 것을 바울이 주장하고 있다.
적용:
오직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주어진다. 유대인의 율법에 의해 할례를 받아야지만 온전한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가르쳤던 거짓 교사들의 복음은 다른 복음이었다, 다른 복음은 가르치는 자나 받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 하나님의 나라의 유업은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에게 주어진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자신들에게 주신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바울은 무할례자들도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유업을 얻고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증거한다. 우리는 비록 무할례 자들이지만 마음으로 할례를 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하나님의 유업을 이을 자가 된 것이다. 이러한 구원의 은혜를 감사히 여겨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았고, 그리스도로 옷을 입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신 그 말씀이 오늘 우리들에게 요구하시는 명령이다.
2. 요20:22-23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해석:
인간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 한마디 내 뱉을 수 없다. 특히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서도 담대하게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지 못한다. 성령의 충만하신 그리스도는 자신에게서 성령을 충분히 베풀어 주신다. 그리스도는 사도들에게 이런 외형적인 숨을 내쉬는 상징을 통해 성령의 능력을 불어 넣고 계신다. 오순절 성령 강림을 통해 결국 이 일이 이루어졌다. 이것은 아들에게서 성령이 나온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는 하늘로 올라가셔서 천상 통치를 하실 것이다. 이것을 위해 성령을 주신다고 하는 상징으로 숨을 내쉰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에게만 속하는 영예를 카톨릭의 신성모독은 가증스럽다. 그들은 주교들이 제사직을 맡은 사제들에게 트림을 하면서 그들에게 성령을 불어 넣어 주고 있다. 그리스도는 목회직을 맡은 자신의 종들에게 빈손으로 일을 시키지 않으신다.
그들이 목회직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자신의 영이신 성령을 두셔서 감당하게 하신다. 사도들에게 사죄의 권한을 준 것처럼 보이는 말씀은 그들이 죄를 용서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이 죄를 용서하시는 것을 통해 죄인들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일을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사도들에게 죄를 용서하시는 권한을 양도하신 것이 아니다. 죄를 용서하시는 것은 그리스도에게만 속하는 권한이다.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한다. 그래서 죄인들이 그리스도에게서 용서를 받는다. 사도들을 통해 죄를 용서하시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이시다. 복음이 증거될 때 복음을 받고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죄가 용서되지만 그렇지 않는 자들은 죄가 그대로 있고 심판을 받는다. 결국 모든 죄의 용서와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가 하시는 것이다. 단지 사도들은 이 일을 위해 특별히 선택받은 영예를 가지는 것이다.
적용: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신다. 결국 제자들은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으로 주의 복음을 담대하게 전한다. 그들이 전한 복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죄를 용서하시고 죄인들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다고 하는 복음이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면서 성령을 주시고 계신다. 오늘날 성령을 받기를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특징은 자신들의 노력을 통해 성령을 받는 일을 한다. 그리고 성령의 충만한 목사가 성도들에 머리에 손을 올리거나 아니면, 방언이 터지고, 입신이라는 것을 통해 성령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계시는 성령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이것은 복음을 위해 성령 받는 것이 아니다. 자신들의 탐심을 위해, 마치 무당이 뛰어난 신기를 받기 위해 하는 모습과 같다. 그리스도가 주시는 성령은 천상의 계신 그리스도의 사역을 지상에서 이루어 가시는 분이시다. 죄인을 구원하시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는 복음으로 기쁨과 평안이 임한다. 이것을 위해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임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 받은 성도는 다른 이들의 죄를 위해 복음을 전한다. 죄인들이 그리스도를 믿고 죄 용서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일을 당연히 한다. 교회가 복음을 전하는 것은 전도 훈련을 통해 캠페인을 하는 것처럼 하지 않는다. 모든 성도들에게 복음의 진리를 바로 전하고 가르치면 성도들은 복음을 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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