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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 제 2 스위스 신앙고백서 (1566년)

Sola. 2023. 7. 21. 06:00

 

[전문]  제 2 스위스 신앙고백서 (1566년 The Second Helvetic Confession)

 

 

제 1 장 : 하나님의 참된 말씀인 성경에 관하여

 

정경(正經)

 

우리는 거룩한 예언자들과 사도들의 구약과 신약인 정경(the canonical Scriptures)이야말로 하나님의 참된 말씀이요, 이것은 결코 인간에 의하여 그 권위를 부여받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충분한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믿고 고백한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친히 족장들과 예언자들과 사도들에게 말씀하셨고, 오늘도 우리에게 이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보편적 교회는 구원에 이르는 신앙에 관련된 모든 것과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성화의 삶을 형성하는 데 관계된 모든 것에 대한 가장 완전한 해석이 이미 성경 안에 있음을 믿고 고백한다.

 

성경은 모든 경건을 충분히 가르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된 지혜와 경건, 교회들의 개혁과 행정이 성경에 근거해야 한다고 판단한다. 즉, 경건의 모든 의무에 관한 가르침과 교리들의 근거 및 모든 오류에 대한 반론, 특히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17)라고 하는 사도의 말씀에 따르는 모든 권유는 모두 성경에 있다. 또한 사도 바울은 “이것을 네게 쓰는 것은…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딤전 3:14,15)라고 디모데에게 말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또한 사도 바울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살전2:13)라고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말한다. 그도 그럴 것이 주님 자신이 복음서에서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마 10:20). 그러므로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눅 10:16, 요 13:20)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하나님의 말씀이 합법적으로 부름 받은 설교자들에 의해서 설교되어 질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선포된다는 사실과 이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믿는 자들에 의하여 받아들여진다는 사실을 믿는다. 우리는 이 말씀 이 외에 다른 말씀을 날조해 내거나 하늘로부터 내려올 것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설교된 하나님의 말씀 자체는 그것을 설교한 사람에 관계없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즉, 그 설교자가 악한 사람이요, 죄인이라 해도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참되고 선하다.

 

그러므로 참 종교에 대한 가르침과 배움이 성령의 내적 조명에 달렸다든가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렘 31:34)와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 3:7)고 기록되어 있다고 해서 우리의 외적 설교가 아무 소용없다고 우리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요6:44)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성령의 내적 조명을 받지 않은 사람은 결코 그리스도께로 올 수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필히 외적으로 설교되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진실로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의 교역 없이 성령에 의해서 혹은 천사의 사역에 의해서 고넬료를 가르치실 수 있었다(사도행전).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 고넬료를 베드로에게 보내사 “그가 네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가르쳐 주리라.”고 천사를 통하여 말씀하셨다.

 

내적 조명이 외적 설교를 배제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람들에게 성령을 주사 내적으로 조명시키는 바로 그분이 동시에 그의 제자들에게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 16:15)고 명령형식으로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바울은 빌립보에서 자주 장사인 루디아에게 말씀을 외적으로 설교하였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여자의 마음을 내적으로 열어 주셨다(행 16:14). 또한 동일한 바울은 그의 사상을 아름답게 전개한 다음 로마서 10:17에서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하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외적인 교역 없이도 그가 원하시는 자에게 그가 원하시는 때에 내적 조명을 일으키실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니께서 명령과 실례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계시해 주신대로 사람들을 가르칠 때 보통 방법대로 한다.

 

이단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이 성령에 기원했음을 부인하거나 성경의 어떤 부분은 받아들이지 않거나 성경의 일부를 왜곡시키거나 삽입시키는 아르테몬(Artemon), 마니교, 발렌티누스, 켈돈(Cerdon) 및 말시온 같은 모든 이단들을 배격한다.

 

외경(外經)

 

그러나 고대의 학자들이 구약의 어느 책들을 외경이라 부르기도 했다. 다른 이들은 교회문서(Ecclesiastical)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우리는 숨기지 않는다. 고대의 어떤 이들은 교회에서 그것을 읽게 하기는 했으나 신앙확립의 근거가 될 만큼 권위를 지닌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예컨대, 어거스틴의 그의 「신국론」제18권, 38장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열왕기 상하에서는 어떤 예언자들의 이름과 책이 인용되고 있으나”라고 하면서 “그러나 그것들이 정경에는 없다.”고 덧붙여 말했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러한 책들은 우리의 경건을 위해서 도움이 될 뿐이다.”라고 못박았다.

 

 

 

제 2 장 : 성경의 해석과 교부들, 공의회들 및 전통들에 관하여

 

성경의 참된 해석

 

사도 베드로는 성경을 사사로이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벧후 1:20). 이처럼 우리도 누구나 마음대로 성경을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우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받아들이도록 강요하는 로마 가톨릭의 성경해석을 참되고 순수한 해석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우리는 성경 전체에서 나온 성경해석이라야 정통적이요, 참되다(기록된 본문의 언어적 본성과 성경이 기록될 당시의 상황을 고려하여 해석해야 하고 비슷한 구절들과 단락들, 서로 다른 구절들이나 단락들, 많은 구절들과 단락들 및 보다 더 명백한 구절들과 단락들을 상호 비교하여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신앙과 사랑의 규범에 일치하며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구원에 크게 공헌하는 성경해석이라야 정통적이며 참되다고 주장한다.

 

교부들의 성경해석

 

우리는 희랍 교부들이나 라틴 교부들의 성경해석들이나 이들의 논쟁이나 논문들이 성경과 일치하는 한 무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만일 이들의 글이 성경과 일치하는 한 무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만일 이들의 글이 성경과 다르거나 정반대되는 것을 가르칠 때 우리는 정중하게 이들에게 이의를 제기한다. 이렇게 한다고 해서 우리가 이들에게 무슨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 아니다. 그도 그럴 것으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우리에게 자신들의 글이 얼마나 성경과 일치하며 일치하지 않는가를 증명하기를 명령하며, 일치하는 부분은 받아들이고 일치하지 않는 부분은 받아들이지 말라고 명령한다.

 

공의회(Councils)

 

교회 공의회들이 결정하여 선포한 교령(敎令)들, 교리들 및 교회법 역시 성경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 우리는 종교에 관한 논쟁이나 신앙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 다만 교부들의 의견이나 공의회의 결정사항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 하물며 관습에 의해서나 같은 의견을 가진 사람들의 많은 수나 오랫동안 기득권으로 인정된 진리에 의해서도 결코 우리는 종교와 신앙문제를 쉽게 결정해 버릴 수 없다. 판정자는 누구인가? 판정자는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성경에 의하여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이고, 우리가 무엇을 따라야 하고, 무엇을 피해야 하나를 선포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자신이시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영적인 사람들의 판단들에 동의한다. 사실 예레미야와 다른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법도에 어긋나는 제사장들의 회집을 맹렬히 정죄하면서 부지런히 우리에게 경고하기를, 조상들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지 말고 하나님의 법도를 떠나 마음대로 살아가는 저들의 뒤를 따르지 말라고 하였다.

 

인간의 전통

 

마찬가지로 우리는 인간의 전통을 배격한다. 비록 이 전통들이 사도들의 살아 있는 음성에 의하여 교회에게 주어진바 마치 신(神)적이고 사도적인 것처럼 허울 좋은 제목으로 장식되었고, 사도시대 사람들에 의하여 그 후계자인 감독들에게 전해졌다고 해도 성경에 어긋나는 한 이것들은 결코 사도적 전승이 아니라 인간들의 전통들이다. 왜냐하면 사도들이 교리에 있어서 자기 모순에 빠진 일이 없었던 것처럼 사도시대의 사람들은 사도들과 반대되는 것들을 가르치거나 기록하지 않았다. 사실은 그와 반대로 사도들이 살아 있는 음성으로 전한 것들이 그들의 기록된 문서들과 다르다고 주장하는 것은 악질적이기까지 한 것이다. 바울은 모든 교회에서 동일한 내용을 가르쳤다고 분명하게 주장한다(고전 4:17). 또한 그는 “오직 너희가 읽고 아는 것 외에 우리가 다른 것을 쓰지 아니하노니”(고후 1:13)라고 하였다. 또한 그의 서신 중 다른 곳에서 바울은 자신과 자신의 제자들, 즉 사도시대의 사람들은 모두 같은 삶을 살았고, 동일한 성령의 역사를 따라 모든 일을 해냈다(고후 2:18)고 증언한다. 이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 역시 일찍이 장로들의 전통을 가지고 있었는데, 주님께서는 이와 같은 전통들을 전적으로 배격하셨다. 즉, 주님은 저들이 이 전통을 지킴으로 하나님의 법도를 버렸고, 하나님을 헛되어 예배하였다고 말씀하였다(마 15:1 이하, 막 7:1 이하).

 

 

 

제 3 장 : 하나님, 그의 통일성과 삼위일체에 관하여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하나님은 본질이나 본성에 있어서 하나이시며, 스스로 존립하시고, 자족하시며, 눈에 보이지 아니하시고, 육체를 지니지 아니하시며, 공간을 초월하사 광대하시고, 시간을 초월하사 영원하시며,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의 창조자이시고, 최대의 선(善)이시며, 살아 계셔서 모든 것을 생동시키시고 보존하시며, 전능하시고 가장 지혜로우시며, 친절하시고 자비하시며, 의(義)로우시고 참되시다는 사실을 우리는 믿고 가르친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시니”(신 6:4),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라.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출 20:2-3),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나니 나밖에 신이 없느니라……. 나외에 다른 신이 없나니 나는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이라. 나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사 45:5, 21),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출 34:6) 등의 기록된 말씀 까닭에 우리는 다른 신들을 배격한다.

 

하나님은 삼위(三位)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광대불변하시고 하나이시며, 나뉠 수 없는 동일한 하나님께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구별되시지만, 이분의 삼위의 인격은 결코 분리되거나 혼동 될 수 없다는 것을 믿고 가르친다. 성부는 성자를 영원부터 낳으시고, 성자는 형언할 수 없는 출생방법에 의하여 낳으심을 받으셨으며, 성령은 진실로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출하시고, 이 성령 역시 영원부터 계시며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예배를 받으셔야 한다.

 

이렇게 해서 본질이 같으시고 영원성이 같으시며 피차 동등하신 삼 위격(Three Persons: 三位格)이 있는 것이지 세 하나님이 있는 것이 아니다. 위격에 있어서는 구별이 있으며, 순서에 있어서도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보다 먼저 올 수도 있으나 이 삼위는 서로 동등하다. 왜냐하면 이 삼위는 성자와 성령은 신성(神性)을 공유하고 계신다.

 

성경은 삼 위격의 분명한 구별을 계시했다. 예컨대, 천사는 동정녀 마리아에게 다른 말과 더불어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눅 1:35)고 말했고,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마 3:17)라고 하는 그리스도에 관한 소리가 하늘에서 들렸다. 성령은 또한 비둘기의 모양으로도 나타나셨다(요1:32). 또한 주님 자신이 사도들에게 세례를 베풀라고 명령하셨을 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마 28:19) 하도록 명령하셨다. 우리 주님은 복음서의 다른 곳에서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 하실 것이요.”(요 15:26)라고 말씀하셨다. 간단히 말하면 우리는 사도신경을 받아들인다. 그것이 우리에게 참 믿음의 내용을 전해 주기 때문이다.

 

이단들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하시고 예배 받으실 만한 삼위일체 하나님을 모독하는 유대인들과 회교도(이슬람교도 혹은 모하메드교도) 등 모든 이단자들을 정죄한다. 성자와 성령은 명목상으로만 하나님이시라든지, 삼위일체 안에는 피조된 그 무엇으로서 다른 위격의 수단에 불과하거나 다른 위격에 종속하는 그 무엇이 있다든가 그 안에 동등치 않은 무엇이 있으며, 대소(大小)가 있거나 육체적인 무엇이나 육체적으로 이해된 그 무엇이 있다던가, 의지에 관하여 피차 상이하다든지, 어느 하나가 동떨어져 나가든지 아니면 피차 혼동된다든지, 즉 마치 성자와 성령은 한 분 성부의 심정의 표출이요, 특성에 불과한 것처럼 생각하는 모든 이단자들을 정죄한다. 군주신론자, 노바티안, 프락세아스, 성부수난주의자들, 양태론자인 사벨리우스, 사모사타의 바울과 아에티우스, 마케도니우스, 신인동형론자들, 아리우스 등이 그렇게 생각했다.

 

 

 

제 4 장 : 하나님, 그리스도, 그리고 성자들의 우상들과 형상들에 관하여

 

 

하나님의 형상들

 

하나님은 영(靈)으로서 본질상 가시적(可示的)이 아니요, 광대불변하시기 때문에 예술이나 형상에 의하여 표현될 수 없다. 이러한 이유에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모든 형상들은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는 사실을 성경과 더불어 거침없이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방인들의 우상들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의 형상들까지 배격한다.

 

그리스도의 형상들

 

그리스도께서 성육신 하신 것이 사실이지만 조각가나 화가의 모델이 되시기 위하여 그렇게 인간의 형상을 입으신 것은 아니다. 그는 “율법과 선지자를 폐하려 온 것”(마 5:17)이 아니라고 하셨다. 그런데 율법과 선지자들(신 4:15, 사 44:9)은 형상들을 금지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육체적 임재가 교회에게 유익하다는 사실을 부인하시면서 성령을 통하여 영원히 우리에게 가까이 계실 것(요 16:7)을 약속하셨다. 그러므로 그의 육체의 모양들이 경건한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리라고 믿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고후 5:5)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성령에 의하여 우리 안에 거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이다(고전 3:16). 그런즉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고후 6:16)

 

성자들의 형상들

 

하늘에 있는 축복 받은 영들과 성자들은 지상에 사는 동안 자신들에 대해서 예배하거나 어떤 형상을 만들거나 하는 것을 배격했고 정죄했다. 그런데 이 하늘에 있는 성자들과 천사들, 그리고 사람들이 자신들의 형상 앞에서 무릎을 끊거나, 모자나 수건을 벗고 경배하는 것을 어찌 기뻐하라.

 

사실 주님은 복음설교(막 16:15)를 명령하사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관한 것과 이들의 구원에 관한 것을 생각나게 하며 종교를 교육하게 하셨다. 결코 주님께서는 그림을 그리거나 그림들을 수단으로 하여 평신도들을 가르치라고 명령하시지 않으셨다. 뿐만 아니라 주님은 세례와 성만찬이라고 하는 성례전을 제정하셨다. 그는 그 어디에서도 형상들을 만들어 세운 일이 없으시다.

 

평신도의 성경

 

우리가 어느 방향으로 눈을 돌리든 우리는 하나님의 살아 있고 참된 피조물들을 본다. 이 피조물들을 정당하게만 관찰한다면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 모든 형상들이나 허망되고 움직임이 없고 힘이 없고 죽은 그림들보다 이 피조물들이 보는 사람들에게 훨씬 더 생생한 인상을 줄 것이다. 이에 대하여 예언자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한다.”(시 115:5)고 하였다.

 

락탄티우스

 

그러므로 우리는 고대 작가인 락탄티우스의 다음과 같은 판단을 인정한다. 즉, “형상이 있는 곳에는 결코 종교가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에피화니우스와 제롬

 

에피화니우스 감독이 교회의 문에서 그리스도 혹은 성자 같은 그림이 그려져 있는 베조각을 발견하자 그것을 뜯어냈다. 이것은 성경의 권위에 위배되기 때문에 옳은 행동이었다고 우리는 또한 주장한다. 이때 이래로 그는 참 종교에 어긋나는 그러한 화폭들을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 걸지 못하게 하였고, 그리스도의 교회와 믿는 신도들에게 전혀 무가치한 그 문제의 형상들을 치워 버리게 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는 참 종교에 관한 어거스틴의 다음과 같은 의견에 동의한다. 즉, “사람들의 작품에 대한 예배를 우리의 종교로 삼지 말자. 예술작품보다 이것을 만든 예술가 자신들이 더 훌륭하지만, 우리는 예술작품도 예술가도 예배해서는 안 된다”(「참된 종교에 관하여」 제55장).

 

 

 

제 5 장 : 유일하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숭배와 예배와 기원(invocation)

 

하나님만이 숭배와 예배를 받으셔야 한다.

 

참 하나님만이 숭배를 받고 예배를 받아야 한다고 우리는 가르친다.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마 4:10)고 하신 주님의 명령대로 우리는 이 예배와 숭상을 그 어느 누구에게도 그 무엇에게도 돌리지 않는다. 진실로 모든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유일의 참 하나님을 떠나 이상한 신들을 숭상하고 예배할 때마다 이들을 엄히 꾸짖으셨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자신이 가르쳐 주신 대로 하나님을 숭배하고 예배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즉, “신령과 진정으로”(요 4:23 이하) 해야 하고 미신에 의해서 예배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그의 말씀에 따라 성실하고 진지하게 드리는 예배이다. 어느 때고 그가 우리에게 “누가 너희 손으로부터 이런 것들을 요구했는가?”(사 1:12, 렘 6:20)라는 말씀이 나오게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바울도 말하기를 “하나님은 무엇이 부족하신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행 17:25)라고 말한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보는 한 분 예수 그리스도뿐이시며, 우리는 이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부를 수 있고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 우리는 인생의 모든 위기들과 시련을 만날 때에 오직 우리의 유일하신 중보자이시오, 우리를 위해 중보의 기도를 올리시는(intercessor) 예수 그리스도를 명상함으로 하나님을 부르짖는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 50:14)라고 우리는 분명히 명령받았기 때문이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은혜로운 약속을 받았다. 즉,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요 16:23). 그리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또한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롬 10:14)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을 믿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만을 부르짖는데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그렇게 부른다. 그도 그럴 것이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 또한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고 사도는 말한다.

 

우리는 성자들(Saints)을 숭배하거나 예배하거나 기도를 위해서 부르짖어서도 안 된다.

 

이러한 이유에서 우리는 하늘에 있는 성자들이나 다른 신들을 숭배하거나 예배하거나 기도를 위해서 부르짖어서도 안 된다. 이들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 앞에서 결코 우리의 중보자가 될 수 없고, 우리를 위해서 중보의 기도를 올리는 자도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겐 하나님과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사 42:8)고 하는 이사야의 분명한 말씀과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게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고 하는 베드로의 말씀이 있으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그의 아들에게만 마땅히 돌려야 할 영예를 다른 것들에게 드리지 않는다.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동의한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로서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추구하지 않는다.

 

 

성자들에게 돌려야 할 존경

 

동시에 우리는 성자들을 멸시하거나 천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들은 그리스도의 살아 있는 지체요, 육체와 이 세상을 영광스럽게 극복한 하나님의 친구들이라고 우리가 인정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이들을 형제로서 사랑하고, 또한 이들을 존경하되 예배하는 것은 결코 아니며, 다만 이들을 존경하고 칭찬할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들을 모방한다. 우리는 이들의 믿음과 덕행을 열렬히 모방하기를 열망하고 영원한 구원을 이들과 나누어 가지며, 하나님의 존전에서 이들과 함께 영원히 거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이들과 함께 영원토록 즐거워하기를 갈망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어거스틴이 그의 저서 「참 종교에 관하여」(De vera Religione)에서 주장한 다음의 의견을 인정한다. 즉, “우리의 종교가 죽은 자들의 예배(cult)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비록 이들이 거룩한 삶을 영위했다고 해도 이들 자신은 그와 같은 영예를 추구했다고 여겨질 수는 없다. 오히려 이와는 반대로 이들은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예배하기를 바라며, 이 그리스도의 조명에 의하여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공로에 함께 동참하고 있는 종들이라는 사실을 이들은 기뻐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우리의 모방에 의해서 영예를 받아야 하지 종교적인 방법으로 영예를 받아서는 안 된다.”

 

성자의 유해

 

성자들의 유물이 숭배 받고 존경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더더욱 믿지 않는다. 고대의 성도들은 죽은 자들의 영혼이 높이 올라간 후에 이들의 유물을 땅에 정중히 묻어 두는 것으로 이 죽은 자들을 충분히 존경했다고 생각한 것 같다. 이 고대의 성도들은 자기들의 조상의 가장 고귀한 유물이란 이들의 덕목, 신학, 그리고 이들의 신앙이라고 생각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이 고대의 신도들은 죽은 자들을 칭찬하면서 이들의 ‘유물’을 칭찬하고 천거함으로 이들은 이 땅 위에서 사는 날 동안 이 ‘유물’(덕목, 신학, 신앙)을 모방하려고 애쓴다.

 

하나님 이름으로만의 맹세

 

이 고대의 기독교인들은 성경이 명하는 대로 유일하신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으로만 맹세했다.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은 금지되었기 때문에(출 23:13, 신 10:20) 우리는 성자들을 향하여 맹세해서는 안 된다. 이 맹세는 성경이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모든 일에 있어서 하늘에 있는 성자들에게 너무 과다한 것을 돌리는 교리를 배격한다.

 

 

 

제 6 장 하나님의 섭리에 관하여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통치되고 있다.

 

우리는 하늘과 땅 위에 있는 모든 것과 모든 피조물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이 지혜롭고 영원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보존되고 통치되고 있음을 믿는다. “여호와는 모든 나라 위에 높으시며 그 영광은 하늘 위에 높으시도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과 같은 자 누구리요? 높은 위에 앉으셨으나…천지를 살피시는 이는 누구리요?”(시 113:4 이하) 또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시 139:3 이하)라고 다윗이 증거하여 말했기 때문이요, 또한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행 17:28).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롬11:36) ”고 바울도 증거하여 선포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이 그의 저서 「그리스도의 투쟁에 관하여」(De Agone Christi, 8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은 진리요, 성경적 근거를 갖는다. “주의 말씀에 의하여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마 10:29).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함으로 인간이 보기에 전혀 가치 없어 보이는 것일지라도 하나님의 전능에 의해서 통치를 받는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자 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진리이신 그리스도께서 공중의 새도 하나님에 의하여 양육 받으며 들의 백합화도 하나님에 의하여 옷 입혀진다고 말씀하셨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헤아릴 수 있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마 6:26 이하)

 

에피큐리안 학파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부인하는 에피큐리안 학파 사람들을 정죄하며, 하나님은 하늘의 일에만 바쁘시고 우리와 우리의 일은 전혀 아랑곳 하시지도 않는다고 불경스럽게 주장하는 모든 사람들을 정죄한다. 궁정 예언자 다윗은 이렇게 정죄 하였다. “여호와여, 악인이 언제까지 개가를 부르리이까?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가 보지 못하며, 야곱의 하나님이 생각지 못하리라 하나이다. 백성 중 우준한 자들아, 너희는 생각하라. 무지한 자들아, 너희가 언제나 지혜로울꼬, 귀를 지으신 자가 듣지 아니 하시랴, 눈을 만드신 자가 보지 아니하시랴” (시 94:3, 7-9).

 

무시되어서는 안 될 수단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가 이루어지는 수단을 불필요한 것으로 생각한 나머지 그것들을 일축해 버려서는 안 된다. 우리는 오히려 이 수단들에게 우리 자신을 적응시켜야 할 것을 가르친다. 그러므로 우리는 만사가 하나님의 섭리에 의존함으로 우리의 노력과 정진은 전혀 헛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의 경솔하고 무모한 말을 인정치 않는다.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섭리의 주관에 맡기고, 우리는 그 무엇에 대하여도 근심과 걱정을 할 필요가 없으며, 그 무슨 행동도 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저들의 주장은 경솔하고 무모하다고 말한다. 비록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행 23:11)고 말씀하셨고, “너희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머리터럭 하나라도 잃을 자가 없느니라.”(행 27:22, 34)고 덧붙여 약속하신 하나님의 섭리 하에 바울은 백부장과 선원들에게 “이 사람들이 배에 있지 아니하면 너희가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행 27:31)고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모든 것의 목적을 설정하신 하나님께서는 시작을 정하셨을 뿐만 아니라 목적에 이르는 수단들을 정하셨기 때문이다. 이교도들은 모든 일이 맹목적인 행운과 불확실한 우연에 의하여 일어난다고 본다. 그러나 성 야고보는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년을 유하여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고 말하기를 원치 아니하고, 덧붙여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을 하리라.”(약 4:13,15)고 말하였다. 어거스틴은 그래서 “허망된 사람에게는 본성상 우연히 일어나는 것 같은 모든 일이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일어난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만 일어나기 때문이다.”(시편강해 148)고 말하였다. 사울이 그의 아버지의 나귀를 찾다가 예기치 않게 예언자 사무엘을 만난 것은 단순히 우연한 일인 것처럼 보이나, 주님께서는 이 예언자에게 미리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즉, “내일 이맘때에 내가 베냐민 땅에서 한 사람을 보내리라”(삼상 9:16).

 

 

 

제7장 만물의 창조, 즉 천사와 마귀와 사람의 창조에 관하여

 

하나님은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

 

이 선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영원하신 말씀에 의하여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또한 하나님과 말씀과 더불어 영원하신 성령에 의하여 그 모든 피조물을 보존하신다. 다윗은 이 사실을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기운으로 이루었도다”(시33:6)라는 말로 증거 하였다. 성경에 의한, 즉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은 무엇이든지 다 선하며, 사람들의 유익과 이용을 위해서 지음 받았다. 이제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한 시작에서 나왔다고 주장한다.

 

 

마니교 사람들과 말시온주의자들

 

우리는 마니교 사람들과 말시온주의자들을 정죄한다. 왜냐하면 이들은 두 실체와 두 본성이 있다고 하는 불경스러운 상상을 가지고 하나는 선하고 다른 하나는 악하다고 보며, 두 시작과 두 신이 서로 대결하고 있다고 하는 상상을 가지고 하나는 선하고 다른 하나는 악하다고 하기 때문이다.

 

천사와 마귀에 대하여

 

피조물들 가운데 천사와 사람이 가장 탁월하다. 성경은 천사에 관하여 “바람으로 자기 사자를 삼으시며 화염으로 자기 사역자를 삼으시며”(시104:4)라고 했으며,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히1:14)라고 했다. 마귀에 관하여 주 예수님 자신이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요8:44)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가르친다. 즉, 어떤 천사는 끝까지 순종함으로 하나님과 인간을 섬기는 신실한 종의 임무를 위임받으나, 다른 천사들은 자신들의 자유의지의 남용으로 타락하여 멸망에 떨어져 모든 선하고 신실한 사람들의 원수가 되고 말았다.

 

인간에 관하여

 

사람에 관하여 성경은 태초에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에 따라 선하게 창조되었고, 하나님이 그를 낙원 안에 두셨고, 만물을 이 사람에게 복종시켰다(창2)고 말한다. 이 내용은 다윗이 시편 8에서 훌륭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과 같다. 그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그에게 아내를 주어서 그를 축복하셨다. 우리 역시 인간의 한 인격 안에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실체가 있음을 주장한다. 즉, 하나는 불멸의 영으로서 육신으로부터 분리될 경우 자지도 않고 죽지도 않으며, 다른 하나는 죽어야 할 육체로서 최후심판 때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할 것이니 살아 있는 때이든 죽어서든 간에 전인(全人)이 영원히 보존되는 것이다.

 

이단들

 

우리는 영혼의 불멸성을 비웃거나 교묘한 이론에 의하여 이것을 의심하는 사람들과 육체가 죽은 후 영혼은 잠을 자고 있다든지 영혼은 하나님의 한 부분이라고 말하는 모든 사람들을 정죄한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아무리 많은 사람들의 의견이라도 그것이 창조와 천사와 마귀와 사람에 관하여 그리스도의 사도적 교회의 성경이 우리에게 전해 준 진리와 어긋나는 것이라면 그러한 모든 의견을 정죄 한다.

 

 

 

8장. 인간의 타락과 죄와 죄의 원인에 관하여

 

인간의 타락

 

태초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은 의롭고, 참으로 거룩하고, 선하고 정직했다. 그러나 인간이 뱀의 유혹과 본인의 잘못으로 선과 의를 버렸을 때 그는 죄와 죽음과 온갖 참화에 종노릇하게 되었다. 따라서 아담의 모든 후손도 아담처럼 죄와 죽음과 온갖 참화에 종노릇하게 되었다.

 

 

죄란 인간의 내적인 부패이다. 이것은 우리 인류의 처음 부모에게서 기원하여 우리 안에 확산되어 있는 것으로, 우리는 이 내적인 부패로 말미암아 사악한 욕망에 빠져 있고 선을 싫어하고 모든 악의 성향을 갖는다. 우리는 온갖 사악과 하나님에 대한 불신과 경멸과 증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그 어떤 선행도 할 수 없으며, 선에 대하여 스스로 생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가 나이를 먹어 감에 따라 마치 못된 나무가 썩은 열매를 맺듯이 우리는 하나님의 법도에 어긋나는 우리 자신의 악한 언행심사에 의하여 썩은 열매를 맺을 뿐이다(마12:33). 이런 까닭에 우리는 마땅히 우리 자신의 과오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으며 하나님의 의로운 형벌을 받는다. 그 결과 구원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시지 않으셨다면 우리 모두는 하나님에 의하여 버림을 받았을 것이다.

 

죽음

 

죽음이란 우리 모두가 죄 때문에 한 번은 당하고야 말 육체의 죽음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죄와 부패로 말미암는 영원한 형벌이다. 왜냐하면 사도바울이 다음과 같이 말했기 때문이다. 즉,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엡2:1-5),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5:12).

 

원죄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인간 안에는 원죄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자범죄(실제죄)

 

우리는 원죄로부터 나오는 모든 다른 죄들도 참으로 죄임을 인정한다. 이 죄들이 어떤 이름에 의하여 일컬어진다 해도, 가령 죽을 죄이든, 용서받을 수 있는 가벼운 죄이든, 용서받을 길 없는 성령 거역죄이든 간에(막3:29, 요일5:16) 이 모든 죄들은 죄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부패와 불신앙이라고 하는 동일한 원천에서 이 죄들이 나왔으나 이 죄들은 모두 동일하지 않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분명히 더 심각한 죄들과 덜 심각한 죄들이 있다. 주님의 말씀에 의하면 소돔이 복음을 거역한 도시보다 더 견디기 쉬웠다고 하는 사실이다.(마10:14, 11:20)

 

이단들

 

우리는 위의 사실과 어긋나게 가르치는 모든 사람들을 정죄한다. 특히, 펠라기우스와 모든 펠라기우스주의자들 및 스토아학파 사람들과 더불어 모든 죄를 동일시하는 요비니우스주의자들(Yovinians)을 우리는 정죄한다. 이 모든 일에 있어서 우리는 성경에서 모든 근거를 찾으며 성경에 입각하여 그의 견해를 변호하는 어거스틴의 견해에 동의한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는 이레니우스의 논적이었던 플로리누스(Florinus)와 불라스투스(Blastus)를 정죄하며, 하나님이 죄의 원인이라고 가르치는 모든 사람들을 정죄한다.

 

하나님은 죄의 저작자가 아니다. 하나님은 어느 정도까지 인간을 강퍅하게 하신다고 우리는 말해야 하나?

 

성경은 “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유하지 못하며”(시5:4)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또한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요8:44)라고도 말씀하셨다. 그 뿐만 아니라 이미 우리 속에 죄성과 부패가 충분히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 속에 더 큰 사악함과 완고함을 다시 넣으실 필요가 없으시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강팍케 하고, 눈멀게 하고, 버림받은 마음 그대로 내버려 두신다고 할 때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심판자와 복수자로서 그것을 의로운 심판에 의해서 그렇게 하시는 것이다.

 

끝으로 성경에서 종종 하나님께서 악한 일을 행하신다고 말해지거나 그렇게 보일 때가 있는데, 그것은 인간이 악을 행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의 의로운 심판에 따라 그렇게 하도록 허락하시든가 그렇게 하는 것을 막지 아니하신다는 말이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원하실 경우, 그것을 막으실 수도 있으며, 요셉의 형제들의 죄의 경우에서처럼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악을 선으로 바꾸어 놓으시기도 하시고, 죄가 적정선 이상으로 폭발하거나 광분할 것을 우려하여 죄를 제거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죄를 허용도 하시고 미리 방지도 하시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그의 저서 [입문서:Enchiridion]에서 “하나님의 뜻에 반대하여 일어나는 모든 일도 놀랍고도 형언할 수 없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일어나는 것이다.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는 일은 일어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마지못해서 허락하시는 것이 아니라 쾌히 허락하신다.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악이 저질러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실 것이다. 필경 하나님은 전능하신 까닭에 악으로부터 선을 만드실 수 있기에 악을 허용하시는 것이다”라고 이야기한다

 

이상한 질문들

 

하나님께서 아담이 타락하기를 원하셨는지, 아담이 타락하도록 자극하셨는지, 왜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타락을 미리 막지 않으셨는지 등의 질문들은 호기심에서 나온 질문들이다. 그 이유는 이단과 심술궂은 사람들이 이 질문들의 해답을 말씀 밖에서 구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호기심은 주님께서 금단의 열매를 먹지 말도록 금하시고 이것을 범한 사람을 형벌하셨다는 사실에서 온 것이다. 우리는 무슨 일이든지 일단 일어난 것은 하나님의 섭리와 뜻과 능력의 관점에서는 악한 것이 아닌데, 오직 하나님의 뜻에 반대되는 사단과 우리의 뜻의 관점에서 악한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

 

 

 

9장. 자유의지와 인간의 능력

 

이 문제는 교회역사를 통하여 많은 논란을 야기시켜 왔는데, 우리는 여기에서 인간의 상태를 삼중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타락 전의 인간

 

인간에게는 탁락 전의 상태가 있었다. 이 상태에서 인간은 옳고 자유하였다. 그래서 그는 계속 선에 머물러 있을 수도 있었고 악으로 기울어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인간은 악을 선택하여 악으로 넘어갔으며, 이미 지적한 대로 그 사람 자신뿐만 아니라 전 인류가 죄와 죽음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타락 이후의 인간

 

그래서 우리는 타락 후의 인간의 모습에 대하여 생각해야 한다. 인간은 타락으로 이성과 의지를 결코 상실하지 않았다. 인간은 결코 목석이 아니다. 그러나 인간은 너무나도 크게 변했고 약화되어서 타락 이전에 할 수 있었던 것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이성은 어두워졌고, 의지는 노예의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이성과 의지는 죄를 섬기되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한다. 분명히 죄를 짓는 것은 의지이다. 이것은 의지 아닌 그 무엇도 아니다.

 

인간은 자신의 자유의지에 의하여 악을 행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악이나 죄에 관하여 하나님이나 마귀에 의하여 강요당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자유의지에 의하여 악을 행하고 범죄한다. 이 점에서 인간은 전적인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하나님께서 인간의 악질적인 범행과 계획을 좌절시키시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악행에로의 자유의지를 인간에게서 박탈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자유의지에 의하여 계획한 것을 미리 막아 버리시는 것이다. 예컨대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을 없애버리려고 결심하였으나 그것을 실천할 수 없었다. 하나님의 선한 계획이 따로 있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다.

 

인간은 선(善) 자체를 할 수 없다.

 

인간의 이성은 구원과 하나님의 요구에 관하여 스스로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없다. 복음서들과 사도들의 글들은 누구든지 구원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중생해야 할 것을 요구한다. 따라서 타락 이후의 인간은 자신의 구원에 아무것도 공헌할 수 없다. 바울은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2:14)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다른 곳에서 우리 스스로가 어떤 선한 것을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한다(고후3:5).

 

이제 지성(知性)이 의지(意志)의 인도자인데, 이 인도자가 장님일 때 의지가 얼마나 걸어갈 것인가가 분명하게 된다. 그러므로 아직 중생하지 않은 사람은 선을 의지(意志)할 수도 없고 선을 실천해 낼 힘은 더더욱 없다. 주님은 복음서에서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요8:34)고 말씀하셨고, 사도 바울은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8:7)고 했다. 그러나 이 세상의 일들에 관하여는 타락한 인간이라도 이성의 능력을 결핍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학문들에 대한 이해력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비에 의하여 사람 안에 비록 타락 전에 있던 것과는 다르나 지성의 힘이 남아 있도록 허락하셨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가 타고난 자연적 재능을 배양하라고 명령하실 뿐만 아니라 선물과 성공을 첨가해 주신다. 하나님의 축복이 없이는 모든 학문의 발전이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어떤 경우에도 성경은 모든 학문의 기원과 발전이 하나님으로 말미암는다고 가르치며, 심지어 이교도들까지도 학문의 기원을 이 학문을 창조한 신들에게서 찾는다.

 

중생한 사람의 능력은 어떠한 것이며, 중생한 사람의 의지는 어떤 모양으로 자유로운가?

 

끝으로 우리는 중생한 사람들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면 어느 정도로 가지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중생에 있어서 이성은 성령에 의하여 조명 받아 하나님의 신비들과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있다. 이 중생에 있어서 또한 의지 자체가 성령에 의하여 변화받을뿐만 아니라 스스로 선을 의지하며 선을 실천하기까지 할 수 있는 능력으로 무장되기도 한다. 만약 우리가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기독교적 자유를 부인하게 되며 율법의 멍에를 다시 불러들이는 것이다. 하나님은 예언자들을 통하여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리라”고 말씀하셨고, 주님은 복음서에서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요8:36)라고 말씀하셨다.

 

바울 역시 빌립보 교인들에게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빌1:29)고 편지하였다. 또한 여기에서 바울은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1:6)고 하였고, 나아가서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2:13)라고 말했다.

 

중생한 사람들은 수동적으로 뿐만 아니라 능동적으로 일한다.

 

이 주제에 관하여 우리는 두 가지를 유의해야 한다. 첫째로 중생한 사람들은 선을 택하고, 선을 행할 때에 수동적으로만 아니라 능동적으로 그렇게 한다. 왜냐하면 이들은 스스로 행할 수 있기 위하여 하나님에 의하여 움직여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돕는 분이시다”라고 하는 말을 어거스틴은 옳게 인용하였다. 그러나 아무도 스스로 무엇을 하지 않는다면 도움을 받을 수 없다. 마니교 사람들은 인간으로부터 모든 능동성을 빼앗아 버림으로 인간을 돌이나 한 조각의 나무로 만들었다.

 

중생한 사람의 자유의지는 약하다

 

둘째로 중생한 사람 안에는 약한 성향이 아직 남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안에 죄가 도사리고 있으며 중생한 자의 육(肉)이 죽을 때까지 영과 싸우기 때문에 이 중생한 우리는 매사를 원하고 계획한 대로 쉽게 실천할 수 없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로마서 7장과 갈라디아서 5장에서 확증하였다. 따라서 우리의 자유의지는 옛 아담의 잔재와 우리의 생명이 끝날 때까지 우리 안에 머물러 있을 우리의 내적 부패 때문에 늘 약하다. 그런데 육체의 힘과 옛 사람의 잔재가 성령의 역사를 소멸할 만큼 효과적이지 않기 때문에 신자들은 자유하다고 말해질 수 있으나 항상 자신의 연약성을 인정하면서 자유의지를 자랑해서는 안 될 것이다.

 

믿는 사람들은 어거스틴이 사도의 말을 빌려 여러 번 타일러 준 말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즉,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뇨”(고전4:7)라는 말이다. 여기에 첨가하여 그는 우리가 계획한 것이 즉시 실현되는 것은 아니라 하였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장중에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바울은 그의 여행이 소득이 있는 것이 되게 해 달라고 주님께 기도하였다. 이것은 또한 자유의지가 약해서 그랬던 것이기도 하였다.

 

이 세상의 일들에 있어서는 자유가 있다.

 

이 세상의 일들에 있어서는 중생한 사람들이나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이 모두 자유의지를 향유하고 있다. 이 사실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인간은 무엇을 원하기도 하고 원치 않기도 하는 본성을 갖고 있다. 다른 생물들도 이와 비슷한 본성을 지녔는데, 인간은 단연 이들보다 우월하다. 예컨대 인간은 말을 할 수도 있고 침묵을 지킬 수도 있으며, 집으로부터 나갈 수도 있고 집에 머물러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하나님의 힘이 관여한다. 예컨대 발람이 자기는 더 가기를 원했으나 하나님의 간섭으로 갈 수 없었고, 스가랴가 성전에서 돌아와 말하기를 원했으나 하나님의 간섭으로 말할 수 없었다.

 

이단들

 

이 문제에 관련하여 우리는 마니교 사람들을 정죄한다. 왜냐하면 이들은 악의 기원이 창조된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사실을 부인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또한 악한 인간이 하나님이 명하신 선을 행할 만한 충분한 자유의지력을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을 정죄한다. 성경은 이 두 가지 입장을 모두 거부한다. 성경은 전자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곧게 창조하셨다”고 말하고 후자에게는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요8:36) 고 한다.

 

 

 

제10장. 하나님의 예정과 믿는 성도들의 선택에 관하여

 

하나님은 우리를 은혜로 선택하셨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그의 자유의지에 의하여, 그리고 순수한 은혜로 또한 사람의 그 무엇을 조건으로 삼지 아니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시기로 의지하셔서 성도들을 예정 혹은 선택하셨다. 사도 바울은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1:4) 라고 하였고,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1:9) 고 하였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되었거나 선택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신 것은 우리의 공로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 때문에 택하시는 것이지 우리의 공로 때문에 택하시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하신 목적은 이제 신앙으로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는 사람들이 택함을 받은 사람인 것을 확증하기 위해서이다. 사도 바울이 “(고후13:5)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 말했기 때문에 그리스도 밖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버림받은 자들이다.

 

우리는 확실한 목적을 위하여 선택받았다.

 

결국 믿는 성도들은 확실한 목적을 위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았다. 사도 바울은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엡1:4-6)고 하였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에 대하여 좋은 소망을 품어야 한다.

 

하나님은 누가 자기의 자녀인지, 그리고 성경은 여기저기에서 소수의 선택자를 언급하고 있으나 우리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것을 소망해야 하고, 어떤 사람의 버림받은 자라고 성급하게 판단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바울은 빌립보 사람들에게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1:3-6)고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수의 사람들만이 선택되었나에 대하여

 

주님께서 구원받아야 할 사람은 소수에 지나지 않느냐라는 질문을 받으셨을 때 그는 얼마나 적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아야 하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멸망을 받아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말씀하시지 않고, 모든 사람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눅13:24)고 권고하셨다. 여기에서 주님은 너희가 이 일에 관하여 호기심을 가지고 꼬치꼬치 캐물을 것이 아니라, 곧은 길을 택하여 하늘에 들어가기 위하여 노력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 일에 있어서 정죄받아 마땅한 일

 

그러므로 우리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택함을 받았고, 나는 이 소수에 포함되었기 때문에 나는 생을 마음대로 즐기겠다”라고 불경건하게 말하는 이들의 말을 인정하지 않으며, 또다른 이들이 다음과 같이 말할 때에도 우리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즉, “만약 내가 하나님에 의하여 예정되었고 선택되었다면 나를 구원에서 떠나게 할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구원은 예정과 선택에 의하여 확보되었으니 나는 아무 짓이나 해도 좋다. 다른 한편 만약 내가 버림받은 자의 수에 포함된다면 하나님의 불변하는 작정 때문에 나의 신앙이나 회개는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말은 이런 종류의 사람들의 주장과 배치된다. 즉, “(딤후2:24-26) 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저희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바 되어 그 뜻을 좇게 하실까 함이라”.

 

구원의 선택으로 말미암는다고 해서 훈계나 권고가 불필요하고 헛된 것은 아니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자유로운 선택과 예정, 그리고 건전한 훈계들과 교리들은 모두 설교되어야 한다고 보았다(견인의 선물에 관하여/제14장 이하)

 

우리는 택함을 받은 사람들인가에 대하여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선택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에 대하여 묻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과연 하나님이 이들에 관하여 영원 전부터 작정하신 바가 무엇일까? 사실은 복음 설교가 이해되고 수용되어 신앙되고,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이 틀림없이 믿어질 경우, 우리는 택함을 받은 것이 확실하다. 방금 디모데후서 1:9-10에 있는 사도 바울의 글에서 보여 준바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이 예정의 영원하신 목적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계시해 주셨다. 이런 까닭에 무엇보다도 우리가 가르쳐야 하고 생각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우리를 향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이다.

 

우리는 주님 자신이 복음서에서 매일 우리에게 무엇을 설교하고 계신가를 알아야 한다. 주님께서는 “(마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마18:14)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고 설교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안경이 되게 하자. 우리는 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의 예정을 명상하자. 만약에 우리들이 그리스도와 사귐을 가지며 참 신앙 안에서 그분이 나의 것이요, 내가 그분의 것이 된다면 이는 우리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었다는 분명하고도 확실한 증거이다.

 

예정에 관련된 시험(훈련)

 

예정에 관련된 시험보다 더 위험한 것은 없다. 우리는 이 시험에서 하나님의 약속들이 모든 신자에게 적용된다고 하는 사실에 직면한다. 왜냐하면 “(눅11:9)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주께서 말씀하셨고, 우리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마6:9)라고 하나님의 전교회와 더불어 기도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렇게 하는 이유는 두 가지인바 하나는 우리가 세례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임을 받았기 때문이요,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서 영생에 이르기 위하여 그의 살과 피로 빈번히 양육 받기 때문이다. 이것에 의하여 강건케 된 우리는 바울의 명령대로 두려움과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힘쓰도록 명령을 받았다.

 

 

 

11장. 예수 그리스도, 곧 참 하나님과 참 인간이시오, 이 세상의 유일한 구주에 관하여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 전에 아버지 하나님에 의하여 이 세상의 구주가 되시도록 미리 작정되셨고 예정되셨다는 사실을 믿고 가르친다. 예수님의 탄생은 단순히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취하시는 순간부터가 아니며 단순히 세상의 기초가 놓여지기 전도 아니다. 그는 표현할 길 없는 방법으로 영원 전에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낳음을 받으셨다. 우리는 이것을 믿는다. 이사야는 “(사53:8) 그 세대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라고 말했고, 미가는 “(미5:2)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고 말했으며, 요한복음에서는 “(요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아들은 그의 신성에 관하여 아버지 하나님과 동등하시고 동일본체이시다. 이 아들은 명목상으로나 양자됨에 의해서나 공로에 의해서가 아니라 본체와 본성에 있어서 참 하나님이시다(빌2:11).

 

요한은 “(요일5:20)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오 영생이시라”고 했고, 바울은 “(히1:2)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고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주님이 요한복음에서 “(요17:5)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말씀하셨고, 또한 동일 복음서의 다른 곳에 보면 “(요5:18)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고 했다.

 

이단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의 아들됨을 반대하는 아리우스와 아리우스주의자들의 불경건한 교리를 싫어한다. 특히 스페인 사람 미카엘 세르베투스와 그의 모든 추종자들의 신성모독, 즉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아들됨을 거부하는 것을 반대한다. 사단은 이들을 통하여 이러한 이단 사설을 지옥으로부터 끌어내어 아주 뻔뻔스럽고 불경스럽게 이 세상에 확산시켰다.

 

그리스도는 참 육체를 소유하신 참 인간이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씨에서 인자(人子)가 되셨다. 에비온파가 말하는 식으로 그는 인간의 성적 관계에서 나신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의하여 가장 순결하게 잉태되셨고,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 이에 관하여 복음서의 역사는 우리에게 주의 깊게 설명한다.(마1장). 바울 역시 “그는 천사의 본체를 취하신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씨를 취하셨다”고 말했고, 사도 요한도 말하기를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가 육체를 취하셨다는 것을 믿지 않으면 하나님으로부터 온 자가 아니라”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육체를 공상적인 것이요, 하늘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주장하는 발렌티누스와 말시온의 생각은 전혀 잘못된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성적 영혼

 

뿐만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아폴리나리스가 생각했던 것처럼 감성과 이성을 결핍한 영혼을 가지신 것이 아니요, 유노미우스가 가르친바 영혼 없는 육체만을 지니신 것도 아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이성이 있는 영혼과 감성이 있는 육체를 지니셨다. 그래서 그가 고난을 당할 때 “(마26:38)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와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다”(요12:27)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두 본성

 

그러므로 우리는 한 분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 안에 두 본성 혹은 두 본질, 즉 신성과 인성이 있음을 인정한다(히2장). 그리고 이 두 본성은 서로 묶여 있고 연합되어 있는데, 한 본성이 다른 본성에 흡수되지도 않고, 혼돈되거나 혼합되지도 않는다. 이 두 본성은 한 위격 안에 연합되고 결합되어 있다. 그러나 두 본성이 지닌 각각의 고유한 특성들은 손상을 받지 아니하고 영속한다.

 

두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 그리스도

 

우리는 두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 그리스도 주님을 예배한다. 반복하면 이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과 참 인간으로서 한 분이시다. 그의 신성에 관하여는 아버지 하나님과 동일본질이시고 그의 인성에 관하여는 우리 인간과 동일본질이시다. 그의 인간성은 죄만 빼놓고 모든 점에서 우리와 같으신 분이다(히4:15).

 

이단들

 

우리는 한 그리스도를 둘로 만들어 그의 위격의 통일성을 분해시켜 버리는 네스토리우스주의자들을 싫어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인간이 지닌 고유한 특성을 파괴하는 유티케스의 광기와 단의론자들(Monothelites), 혹은 단성론자(Monophysites)자들의 광기를 정죄한다.

 

그리스도의 신성은 고난을 받을 수 없고 그의 인성은 이 세상 도처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성이 수난을 받았다거나, 그리스도의 인성이 아직도 이 세상 도처에 계신다고(편재) 결코 가르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 영화롭게 되신 후에는 참 몸이기를 그만두셨다든가 신화한 나머지 몸과 영혼의 특징들을 상실하고 완전히 신성으로 변화했고, 단순히 하나의 본질이 되기 시작했다고 생각하거나 가르치지 않는다.

 

이단들

 

이 때문에 우리는 슈벵크펠트(Schwenkfeld)와 이와 비슷한 궤변학자들의 자가당착적인 주장이 내포하고 있는 빗나가고 혼돈을 불러일으키며 애매 모호한 미묘함을 결코 인정하지 않으며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우리는 슈벵크펠트를 정죄한다.

 

우리 주님은 진실로 고난을 당하셨다.

 

베드로가 말했듯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육체로 참 고난을 받으셨고 죽으셨음을 우리는 믿는다. 우리는 주님의 고난을 몹시 시리아의 단성론자들인 야고보파 사람들(Jacobiter)이나 터키 사람들의 불경스러운 광기를 정죄한다. 동시에 바울의 말과 같이 영광의 주님께서 우리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음을 우리는 부인하지 않는다.

 

신성과 인성의 상호 교류

 

우리는 성경에 근거했고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성경구절들을 설명하며 조화시키는 데에 고대 교부들에 의하여 사용되어 온 두 본성의 상호 교류를 경건한 존경심을 가지고 받아들인다.

 

그리스도는 죽은 자들 가운데 참으로 부활하셨다.

 

참 육체로 십자가에 달리셨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육체로 부활하셨으니, 이 부활한 육체는 매장되었던 바로 그 육체 이외에 다른 육체가 아니고, 육체 대신에 영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그는 그의 참된 육체를 그대로 계속 소유하고 계심을 우리는 믿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의 영을 보았다고 생각했으나 주님은 그들에게 못자국과 상처가 난 손과 발을 보여 주셨다. 그리고 주님은 “(눅24:39)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는 참으로 승천하셨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동일한 육체를 가지고 모든 가시적인 하늘 위에 있는 높은 하늘로 올라가셨으니, 하나님과 축복 받은 성도들의 거처인 하나님 우편으로 올라가셨다. 우리는 이것을 믿는다. 이것은 주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과 위엄에 동참하는 것을 뜻하며 나아가서 그것은 복음서에서 주님이 “(요14: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라고 말씀하신 대로 일종의 장소를 가리키기도 한다. 베드로 사도는 “(행3:21)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여 말씀하신바 만유를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두리라”고 말했다.

 

이 세상의 죄악이 극에 달하고, 적그리스도가 참 종교를 부패시킨 다음, 모든 미신과 불경건으로 이 세상을 충만케 하고 유혈과 불로(단11장)써 교회를 잔인하게 진멸할 때 동일한 그리스도께서 심판하기 위하여 재림하실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재림하셔서 그의 백성을 확보하실 것이고 적그리스도를 파괴할 것이고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것이다. 죽은 자들은 부활할 것인데 그날에 살아 있을 사람들은 눈 깜빡할 사이에 변화될 것이며, 모든 신자들은 하늘로 올리움을 받아 공중에서 재림하시는 그리스도를 만나 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원토록 살 수 있는 복된 거처로 들어갈 것이다. 그러나 불신자들과 불경건한 사람들은 마귀들과 더불어 지옥으로 내려가 영원히 타오르는 불구덩이에 들어갈 것이며, 이 영벌에서 결코 구속받지 못할 것이다.

 

이단들

 

그러므로 우리는 참 부활을 부인하는 사람들을 정죄한다. 그리고 우리는 예루살렘 요한처럼 육체의 영화에 대한 올바른 견해를 갖지 못한 모든 사람을 정죄한다. 우리는 또한 악마와 모든 불신자들도 동시에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형벌의 영원함을 부인하는 모든 사람들을 정죄한다. 그도 그럴 것이 주님께서는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리라”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최후 심판의 날 이전에 이 지상에 천국이 이루어질 것이고, 경건한 자들이 결국엔 모든 불신의 원수들을 굴복시킨 다음, 이 땅의 모든 나라들을 소유할 것이라고 하는 유대교적 꿈을 정죄 한다. 왜냐하면 마태복음 24장과 25장, 눅가복음 18장에 있는 복음의 진리와 데살로니가 후서 2장과 디모데 후서 3-4장에 있는 사도적 가르침은 상당히 다르게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열매

 

그 뿐만 아니라 우리 주님께서는 모든 신자들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화해시키고, 우리의 죄를 속죄시키고, 죽음을 무력하게 하시고, 저주와 지옥을 극복하시기 위하여 육신으로 오셔서 고난과 죽음을 당하셨으며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모든 것을 성취하셨고 감수하셨다. 그리고 그는 그의 죽은 자들로부터의 부활을 통하여 생명과 영생을 회복하셨다. 그는 우리의 의와 생명과 부활이시다. 그는 한마디로 말해서 모든 신자의 충만과 완성과 구원과 모든 충족이시다. 사도도 “(골1:19)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라고 하였고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의 유일한 구주요, 참으로 대망되셨던 메시야이시다.

 

이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이 인류와 전 세계의 유일하고 영원한 구주시며, 이분 안에서 율법 이전의 모든 사람들과, 율법 하의 모든 사람들과 복음하의 모든 사람들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가르치고 믿는다. 그도 그럴 것이 주님 자신이 복음서에서 “(요10: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요10: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셨고, 같은 복음서의 다른 곳에서 “(요8: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사도 베드로도 “(행4:12)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조상들의 경우처럼, 우리 역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믿는다. 왜냐하면 바울은 또다시 “(고전10:3-4)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 하였고, 요한은 “(계13:8)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례 요한 역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로다”(요1:29)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의 유일한 구속자요, 구원자시며, 왕과 대제사장이시오, 고대했던 참 메시야임을 공적으로 고백하고 설교한다. 그리고 우리는 모든 유형의 율법들과 예언자들의 모든 예언들이 이 예수 그리스도를 예시하였고 약속했음을 고백하고 설교하며, 하나님께서는 이 분을 미리 택하셔서 이 세상에 보내어 주심으로 이제는 우리가 다른 누구도 찾을 필요가 없음을 고백하고 설교한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단 한가지의 일은 그리스도에게 모든 영광을 드리고, 그를 믿고, 그의 안에서만 쉼을 얻고,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에 다른 모든 도움을 경멸하고 물리치는 일이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이외의 다른 곳에서 구원을 찾을지라도 그것은 이미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진 것이요, 그리스도께서 자신들의 구원을 위해 아무 쓸데없는 분이 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대의 에큐메니칼 교회공의회가 결정한 신조들을 받아들임

 

많은 내용을 몇 마디 말로 표현해 보자.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신비에 관하여 성경이 정의하는 모든 것과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에베소, 칼케돈에서 열린 가장 탁월한 처음 네 에큐메니칼 공의회의 신조들과 결정들에 내포된 것은 무엇이든지 진지한 심정으로 믿고 입을 열어 자유롭게 고백한다. 그리고 아타나시우스 신조와 이와 비슷한 신조들을 역시 귀히 여긴다. 따라서 우리는 이와 같은 것들에 반대되는 모든 것을 정죄 한다.

 

이단들

 

이런 방법으로 우리는 기독교적 신앙, 정통 신앙, 그리고 보편적 신앙을 손상됨이 없이 온전히 보유하고 있다. 상기한 신조들 안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합치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과 믿음을 신실하게 해설하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기 때문이다.

 

 

12장. 하나님의 율법에 관하여

 

하나님의 뜻은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의 율법 안에 설명되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하나님의 율법 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설명되었다고 가르친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무엇하기를 원하시고 무엇을 하지 않기를 원하시며, 무엇이 선하고 의로우며, 무엇이 악하고 불의한가를 율법은 설명한다. 그러므로 율법이란 선하고 거룩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고백한다.

 

자연법

 

한때 하나님은 이 법을 인간의 마음비에 그의 손가락으로 기록하셨었다. 우리는 이것을 자연법이라 부른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타락 후 이 법을 모세의 두 돌비에 그의 손가락으로 기록하셨고, 이 법에 관하여 모세의 책들을 통하여 유창하게 해설하셨다. 좀더 분명히 율법에 대하여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십계명 혹은 두 돌비에 내포되었고 모세의 글들에 잘 해설된 도덕법과 하나님의 예배와 의식을 결정하는 의식법과 정치적인 일들과 가정의 일들을 규정하는 재판법을 확연히 구별한다.

 

율법은 완결되었고 완전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뜻과 삶의 모든 영역을 위해서 꼭 필요한 도덕적 명령들을 바로 이 율법이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을 믿는다. 그도 그럴 것이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주님께서 이 율법에 무엇을 첨가하거나 삭제하는 것을 금하지 않으셨을 것이며, 이 법 앞에서 곧은 길을 걸을 것이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침으로 이 율법에서 벗어나지 말라고 말씀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율법이 주어진 이유

 

우리는 이 율법이 주어진 목적이 우리가 그것을 지킴으로 의롭게 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 율법이 가르치는 바로부터 우리의 연약성과 죄와 정죄를 알며, 우리 자신의 능력에 대하여 절망한 후 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 회심케 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가르친다. 그도 그럴 것이 사도 바울이 “(롬4:15)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롬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고 말했기 때문이요, “(갈3:21)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리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갈3: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갈3: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도 말한 까닭이다.

 

육신은 율법을 성취할 수 없다.

 

죽을 때까지 우리 안에 끈질기게 붙어 있는 육에의 연약성 까닭에 어떤 육체도 하나님의 법을 만족시킬 수 없고 성취할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사도는 “(롬8: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율법의 완성이시오, 우리를 위한 율법의 성취이시다. 그리스도는 율법의 저주를 없애기 위하여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으셨다. 그래서 그는 신앙을 통하여 그의 율법의 완성을 우리의 것이 되게 하셨고 그가 성취하신 의와 순종을 우리에게 전가하셨다.

 

율법은 어느 정도 폐기되었는가?

 

그러므로 하나님의 율법은 더 이상 우리를 정죄하지 않으며 우리 속에 진노를 일으키지 않을 정도로 폐기되었다. 우리는 율법 밑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은혜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리스도는 율법의 모든 표상들을 성취하셨다. 그리하여 우리는 실체의 도래와 더불어 그림자가 없어졌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와 모든 충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이유 때문에 율법을 경멸적으로 배격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마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고 하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율법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덕목과 악덕의 모형들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안다. 그리고 우리는 율법을 복음에 의하여 설명할 때 그것이 교회를 위해서 유익하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율법을 교회에서 읽어야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모세의 얼굴이 수건으로 가리워 있었으나 그리스도께서 이 수건을 걷어치우셨다고 사도는 말한다.

 

이단들

 

우리는 옛 이단들이나 오늘의 이단들이나를 막론하고 이들이 율법에 반대하여 가르치는 모든 것을 정죄한다.

 

 

 

13장.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약속들과 성령과 문자에 관하여

 

구약에도 복음적인 약속들이 있다.

 

물론 복음은 율법에 반대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율법은 진노를 불러일으키고 저주를 선포하나 복음은 은혜와 축복을 설교하기 때문이다. “(요1: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고 요한은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 이전에는 율법 아래 있던 사람들이라고 해서 모두 복음을 가지지 않았다고 할 수 없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저들은 다음과 같은 훌륭한 복음적 약속들을 가지고 있었다. 즉, “(창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창22:18)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창49:10)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신18: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지니라”.

 

이중적인 약속

 

우리는 우리들에게와 마찬가지로 족장들에게도 이중적인 약속이 계시되었음을 인정한다. 즉, 가나안 땅의 약속이나 승리에 대한 약속, 그리고 일용할 양식에 대한 약속과 같이 현재적이고 지상적인 약속들이 있는가 하면, 그 때나 지금이나 본질적이고 영원한 것에 대한 약속들, 예컨대 하나님의 은혜, 죄들의 속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으로 말미암는 영생 등이다.

 

구약의 옛 신앙의 조상들도 단순히 육신적 약속만이 아니고 영적인 약속도 가지고 있었다.

 

구약의 하나님의 백성 역시 단순히 외적이고 지상적인 약속만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적이고 본질적인 약속들을 가지고 있었다. 베드로는 “(벧전1:10)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라고 말했고, 사도 바울은 “(롬1:2)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을 볼 때 옛날 구약의 사람들도 복음을 전혀 가지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이 분명하다.

 

그러면 복음이란 과연 무엇일까?

 

구약의 우리의 조상들은 예언자들의 글 속에 이런 식으로 복음을 소유했으며, 이들 역시 신앙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았다. 그러나 더 분명하게는 복음이란 세례 요한, 그리스도 주님 자신, 사도들 및 사도들의 후계자들이 이 세상에 있는 우리에게 설교한 기쁘고 즐거운 소식인데, 그 내용인즉 하나님께서는 세상이 있기 시작할 때부터 약속하신 것을 지금 실현하셨고, 더욱이 그의 독특한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사 이 아들 안에서 아버지 하나님과의 화해를 이룩하셨고, 죄들의 속죄, 모든 충만함과 영생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따라서 복음이란 4복음서가 묘사하고 있는 역사로서 그리스도께서 이와 같은 일들을 어떻게 이룩하셨고 성취하셨으며, 그리스께서 무엇을 가르치셨고 무슨 행동을 하셨고, 그를 믿는 사람들이 충만함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선포하는 것이다.

 

사도들의 설교와 글들 역시 복음적인 교리라고 불러야 옳다. 이렇게 부름으로 오늘에 있어서도 그것이 성실하게 설교된다면 그것이 지닌 명칭의 가치를 발휘할 것이다. 사도들은 바로 이 설교와 글들을 통하여 아버지 하나님이 어떻게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셨고, 또한 이 아들 안에서 생명과 구원에 관한 모든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영과 문자에 관하여

 

사도 바울은 복음의 동일한 설교를 ‘영’과 ‘영의 사역’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복음이란 성령의 조명을 통하여 믿는 자들의 마음속에서 신앙으로 말미암아 인식되며 효과를 일으킨다. 문자란 성령에 반대되는 것으로 모든 외적인 것, 즉 성령과 신앙이 없이는 모든 불신자들의 마음 속에 진노만을 일으키며 죄를 촉발하는 바 율법의 교리이다. 이런 이유에서 사도는 그것을 ‘죽음의 사역’이라고 부른다. 이 점에 있어서 “의문은 죽이는 것이나 영은 생명을 준다”라고 한 사도의 말씀은 적절하다. 거짓 사도들은 썩은 복음을 전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복음을 율법과 뒤섞음으로 마치 그리스도께서 율법 없이는 우리를 구원하실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이단들

 

이 계통의 이단자들 중에는 에비온의 후예들인 에비온주의자들과 한때 미네안스(Mineans)라 불리웠던 나사렛주의자들이 있다. 우리는 이단자들을 정죄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믿는 자들이 율법에 의한 칭의가 아니라 복음에 의한 칭의를 받는다고 하는 순수한 복음을 설교하기 때문이다. 이 주제에 관한 보다 상세한 설명은 ‘칭의’라고 하는 제목을 논할 때 나올 것이다.

 

복음의 가르침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가장 오래된 교리이다.

 

율법에 관한 바리새인들의 가르침에 비교하면 그리스도께서 처음 설교하신 복음은 전적으로 새로운 가르침인 것처럼 생각된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로 오래된 가르침이요(심지어 오늘날에도 교황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전해 받은 교리전통에 비교하여 우리가 전하는 복음을 새로운 것이라고 하지만), 이 세상에서 그 무엇보다도 더 오래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이 세상을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하시려고 예정하셨고, 복음을 통하여 이러한 그의 예정과 영원한 뜻을 이 세상에 나타내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복음의 종교와 가르침은 과거나 현재나 미래의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의 종교와 가르침이 불과 30년밖에 되지 않는 최근에 일어난 하나의 신앙이라고 말하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을 창피할 정도로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에겐 예언자 이사야의 말이 적용된다. 즉 “(사5:20)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그들은 화 있을진저”.

 

 

 

14장. 회개와 회심에 관하여

 

회개의 교리는 복음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주님은 복음서에서 “(눅24:47)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라고 말씀하셨다.

 

회개란 무엇인가?

 

회개란 ① 죄인이 복음말씀과 성령에 의하여 각성됨으로 신앙으로 말미암아 올바른 마음을 회복하는 것인데, 이 때에 죄인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정죄됨으로 그의 모든 내적 부패와 모든 죄를 즉시 인정하고, ② 자신의 죄를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슬퍼하며 비탄할 뿐만 아니라 부끄러운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솔직히 고백하고, ③ 분개하여 이 죄악을 혐오하고, ④ 이제는 자신의 삶을 철저히 고쳐 살면서 나머지 생애를 통하여 깨끗함과 덕스러움을 추구하는 것이다.

 

참 회개란 하나님에게로의 회심이다.

 

이것이 참 회개이다. 즉, 하나님과 모든 선으로의 전향 그것이요, 마귀와 모든 악으로부터의 돌아섬 그것이다. ① 회개란 하나님의 선물이다. 이 회개란 우리의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순수한 선물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딤후2:25)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라고 말하면서 진리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부지런히 가르치라고 그의 신실한 교역자에게 권고했다. ② 범죄에 대한 통회, 눈물로써 주님의 발을 씻은 범죄한 여인과 주님을 부인한 일에 대하여 뼈아프게 통회하는 베드로를 볼 때 우리는 참회자의 마음은 자신이 범한 죄악을 심히 통회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③ 하나님께 대한 죄의 고백, 뿐만 아니라 복음서에 나오는 탕자와 세리를 바리새인과 비교해 보면 우리는 우리의 죄를 어떻게 하나님께 고백해야 하는가를 알 수 있다. 이 탕자와 세리는 우리에게 적절한 모범이다. 탕자는 “(눅15: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라고 하였고, 세리는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되 “(눅18: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라고 하였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들을 은혜로 용납하셨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사도 요한은 “(요일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1:10)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라고 말하였다.

 

사제(신부) 앞에서의 고백과 사면

 

이것이 하나님과 죄인 사이에 은밀하게 이루어지든지 교회 안에서 공적으로 일어나든지 간에 우리는 하나님에게만 우리의 죄를 진지하게 고백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믿는다. 우리는 죄의 용서를 받기 위하여 신부의 귓속에 속삭임으로 신부에게 죄를 고백하고, 그 대가로 신부의 안수를 통하여 사죄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성경은 이것을 명령하지도 않고 이에 대한 예도 보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윗은 “(시32:5)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셀라)”라고 증언한다.

 

또한 우리에게 기도하는 것과 동시에 죄의 고백을 가르쳐 주신 주님은 “(마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가르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죄를 하나님 아버지에게만 고백해야 하며 우리가 우리의 이웃을 해롭게 한 일이 있으면 그 사람과 더불어 화해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고백에 관하여 사도 야고보는 “(약5:16)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라고 하였다. 그러나 만약 어떤 사람이 그 죄의 짐과 괴로운 시험에 압도되어 교회의 목사나 하나님의 법도를 아는 형제로부터 은밀하게 의논을 청하고 배우고 위로를 받으려고 할 경우, 우리는 그것을 반대하지 않는다. 이미 우리가 위에서 지적했듯이 성경에 합치되는 한 우리는 또한 보통 교회 안에서나 예배모임들에서 행해지는 일반적이고 공적인 죄의 고백을 인정한다.

 

하늘나라의 열쇠에 관하여

 

주님께서 사도들에게 주신 하나님 나라의 열쇠에 관하여 많은 사람들이 많은 놀라운 말들을 한다. 즉, 이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가지고 칼과 창과 왕권과 왕관을 안출해 내고 가장 위대한 왕국들, 즉 영혼들과 육체들을 완전히 장악한다. 우리들이 주님의 말씀에 따라 판단할 때 모든 정식으로 부름 받아 안수 받은 목사들이 복음을 설교하고, 자기들에게 위탁된 양무리를 가르치고 권고하고 위로하고 견책하며 권징할 때 바로 이 목사들이 하나님 나라의 열쇠를 소유한 것이요, 이 열쇠를 행사하고 있는 것이라고 우리는 말한다.

 

하늘나라를 열기도 하고 닫기도 하는 일

 

이와 같은 방법으로 저들은 순종하는 자에게는 하늘나라의 문을 열어 주고 불순종하는 자에게는 그 문을 닫는다. 마태복음 16장에서 주님은 사도들에게 이 열쇠를 약속하셨고, 요한복음 20장, 마태복음 16장, 그리고 누가복음 24장에 보면 주님께서 사도들을 파송하시어 온 천하에 다니면서 복음을 설교하고 죄를 용서하라고 명령하셨을 때 이 열쇠를 저들에게 주셨다.

 

화해의 사역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주님께서는 화해의 사역을 그의 교역자들에게 주신다고 말했다. 그리고 바울은 이것이 바로 화해의 설교요, 화해의 가르침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바울은 그의 말을 좀더 분명하게 설명하면서 덧붙여 말하기를, 그리스도의 교역자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대사의 직분을 수행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는 마치 하나님 자신이 그의 교역자들을 통하여 하나님과 신앙과 순종으로 화해하도록 사람들을 권고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따라서 이 교역자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믿고 회개하라고 권고하는 것이 다름 아닌 열쇠의 사용인 것이다. 이처럼 그들은 사람들을 하나님께 화목시킨다.

 

교역자들은 죄를 사해 준다.

 

이처럼 사죄를 통하여 교역자는 하늘나라의 문을 열고 믿는 자들을 그곳으로 인도한다. 이 교역자들은 복음서에 나오는 바리새파 사람들과는 전혀 다르다. “(눅11:52)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시니라”

 

어떻게 교역자가 죄를 사면하는가?

 

그러므로 교역자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설교하고 이로써 사죄를 믿는 사람 각각에게 약속할 때 죄의 사면을 옳게 하고 있으며 효과적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각 사람이 세례를 받을 때 이것이 일어나며, 특히 믿음을 갖는 각 사람에게 이것이 일어난다고 교역자들은 증거한다. 어떤 사람의 귓속에다가 중얼거린다든지 어떤 사람의 머리 위에다 속삭여 준다고 해서 이 죄의 사면이 더 효과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오히려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는 사죄를 부지런히 선포해야 하고, 이 사죄의 복음을 믿는 각 사람에게 사죄가 해당된다는 사실을 각 사람에게 알려야 한다.

 

삶의 갱신을 위한 정진

 

그러나 복음서에 나타난 예들을 읽어보면 회개한 사람이 회개한 후에 삶의 변화을 위해서, 그리고 옛 사람을 죽이고 새 사람을 살리는 일을 위해서 얼마나 정신차려 부지런히 정진해야 하는가를 우리는 알 수 있다. 주님은 자기가 고쳐 주신 중풍병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요5:14)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 그리고 주님은 자신이 자유케 하신 간음한 여인에게도 이와 비슷하게 말씀하셨다. 즉 “(요8: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확실히 이러한 말씀들의 뜻은 우리들이 육신을 입고 있는 동안에는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요, 따라서 주님은 우리들에게 근면과 조심스러운 헌신을 명하고 계신다.

 

따라서 우리는 이미 우리가 빠져 나온 죄에 다시 빠지거나 육과 세상과 악마에 의하여 다시 사로잡히지 않기 위하여 기도로써 하나님게 간구하면서 힘써야 할 것이다. 주님이 호의로 용납을 받은 세리 삭개오는 복음서에서 “(눅19: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라고 외쳤다. 그러므로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진심으로 회개한 사람은 반드시 갱신되어야 하고 이웃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고 설교하며, 사도의 말을 가지고 모든 곳에 있는 모든 사람을 권고하고자 한다. 즉, “(롬6:12)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 하지 못하게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롬6: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이단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의 설교를 잘못 사용하면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일을 쉽게 생각하는 어떤 사람들의 불경스러운 주장들을 정죄한다. 그리스도는 모든 죄를 속죄하셨기 때문에 죄의 용서란 쉬운 일이라고 저들은 주장한다. 그래서 저들은 죄짓는 것이 왜 나쁘냐고 반문한다. 그리고 저들은 회개 등에 크게 관심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께 이르는 길이 모든 죄인들에게 열려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거스리는 죄만을 제외하고 모든 죄를 용서하여 주신다고 항상 가르친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구 노바티안주의자들과 카타리주의자들을 정죄한다.

 

교황의 면죄부

 

우리는 특히 교황이 돈벌이하는 고해성사 교리를 정죄한다. 우리는 시몬에 대한 베드로의 판단에 근거하여 성직매매와 성직매매적 면죄부를 거부한다. “(행8:20) 베드로가 가로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행8:21)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

 

만족

 

우리는 또한 자신들이 하나님을 만족시키는 행위를 함으로 자신들이 범한 죄를 고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그리스도만이 그의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에 의하여 모든 죄에 대한 만족과 속죄를 성취하셨다는 사실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지적했듯이 우리는 육체의 소욕을 계속 죽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다음과 같이 덧붙여 말한다. 즉, 우리는 육체의 소욕을 죽임으로 죄에 대한 만족을 하나님께 교만되이 강요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하나님의 자녀의 본성에 맞게 이것을 겸손히 수행해야 한다. 이 육체의 소욕을 죽이는 행위는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과 만족에 의해서 성취된 구원과 충만한 만족에 대한 감사에서 우러나오는 새로운 순종이어야 한다.

 

 

 

15장. 신자의 참된 칭의에 관하여

 

칭의란 무엇인가?

 

사도 바울의 칭의론에 의한즉, ‘칭의한다’(to justify)는 것은 속죄를 뜻하고, 죄책과 형벌로부터의 사면을 뜻하고, 은총에 의한 용납함을 뜻하고, 이 사람을 의인이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롬8:33)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고 하였다. 칭의와 정죄는 서로 반대되는 개념이다. 그리고 사도는 사도행전에서 “(행13:38)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행13:39)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율법과 예언자들의 글에 “(신25:1) 사람과 사람 사이에 시비가 생겨서 재판을 청하거든 재판장은 그들을 재판하여 의인은 의롭다 하고 악인은 정죄할 것이며”고 기록되었고, 이사야 5장에는 “(사5:22) 포도주를 마시기에 용감하며 독주를 빚기에 유력한 그들은 화 있을진저(사5:23) 그들은 뇌물로 인하여 악인을 의롭다 하고 의인에게서 그 의를 빼앗는도다”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

 

우리 모두는 본성상 죄인이요, 불경건하고 하나님의 심판의 보좌 앞에서 불신자로 판결을 받아 죽어 마땅하나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에 의해서(우리의 공로나 우리에 대한 어떤 고려 때문이 아니라) 칭의를 받았다는 사실, 즉 심판자 되시는 하나님에 의하여 죄와 죽음으로부터 풀려났다고 하는 사실은 명백하다. 그 이유는 “(롬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고 바울이 말한 것보다 더 분명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전가(옮겨진)된 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죄를 스스로 걸머지셨고 감당하심으로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키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오직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 때문에 우리의 죄를 대속 시키시사 이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하사 이 의를 우리의 것이 되게 하신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죄의 씻음을 받아 깨끗하고 거룩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를 허락 받았고 죄와 죽음과 저주로부터 풀려나 결국 의롭게 될 것이고 영생을 유업으로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만이 우리를 칭의 하실 수 있는바 그리스도 까닭에 우리를 칭의 하시며 죄를 우리에게 전가시키시지 않고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켜 주신다.

 

우리는 믿음에 의해서만 칭의를 얻는다.

 

그러나 우리가 이 칭의를 얻는 것은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죄인이 칭의를 얻는 것은 결코 율법이나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에 의한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사도와 더불어 우리는 가르치며 믿는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은 “(롬3: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줄 우리가 인정하노라”고 하였고, “(롬4: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롬4: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라 하였고, 또한 “(엡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우리의 의로 받아들이고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로 돌린다. 바로 이 까닭에 칭의란 우리의 행위 때문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 까닭에 신앙으로 우리의 것이 되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믿음에 의해서 그리스도를 받아들인다.

 

그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는 요한복음 6장에서 음식을 먹는 것과 믿는 것, 그리고 믿는 것과 먹는 것을 비유하심으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보여 주신다. 왜냐하면 우리는 먹음으로 음식을 받는 것처럼 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 참여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칭의를 얻는 것은 부분적으로는 그리스도나 신앙으로 말미암으며, 부분적으로는 우리의 행위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칭의를 얻는 것은 부분적으로는 하나님 혹은 그리스도의 은혜 까닭이요, 부분적으로 우리들 자신, 우리의 사랑, 우리의 행위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전적으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로 돌린다. 왜냐하면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의 사랑과 행위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거나 그 어떤 선행을 행하기 전에 의롭다 칭함을 반드시 받아야 한다. 이미 우리가 언급했듯이 우리는 순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에 의해서 참으로 칭의를 얻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돌리시지 아니하시고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하신다. 그는 우리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의로 여기신다. “(딤전1:5) 경계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거늘”고 하는 사도의 말은 사랑을 신앙에서 이끌어 내고 있다.

 

야고보와 바울의 비교

 

그러므로 우리는 이 문제에 있어서 허구적이고 공허하고 게으르고 죽은 믿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생동적 신앙을 말하는 것이다. 이 믿음이 살아 있고 살아 있다고 일컬어지는 이유는 그것이 살아 계시고 살게 하시는 그리스도를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요, 살아 있는 행위에 의해서 살아 있음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야고보서는 우리의 이신칭의 교리와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야고보는 신앙으로 살아 있는 그리스도를 그들의 마음 속에 갖지 아니하고 자랑만을 일삼는 어떤 사람들의 공허하고 죽은 믿음에 대해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야고보는 행위가 우리를 의롭게 한다고 말하나 바울과 모순됨이 없이(바울과 모순된다면 물론 야고보서의 내용은 인정받을 수 없다) 아브라함은 그의 칭의 받은 신앙을 그의 행위에 의하여 증명했다고 말했다.

 

참으로 믿는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을 행하면서도 자신들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만을 신뢰한다. 그도 그럴 것이 사도는 다시 다음과 같이 말하기 때문이다.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16장. 믿음과 선행, 선행에 따르는 보상, 그리고 공로에 대하여

 

믿음이란?

 

기독교 신앙이란 사람의 의견이나 인간적인 확신이나 신념이 아니라 확고부동한 신뢰와 분명하고 일관된 마음의 수긍이요, 성경과 사도신경에 제시된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가장 확실한 이해와 깨달음이요, 가장 위대한 지고(至高)의 선이신 하나님 자신과 특히 하나님의 약속과 모든 약속의 성취이신 그리스도 자신에 대한 이해와 파악이다.

 

신앙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런데 이 믿음은 하나님의 순수한 선물이다. 하나님께서만이 이 선물을 그의 은총으로 그의 택함받은 선민에게, 그가 원하실 때 그가 원하는 사람에게, 그가 원하시는 분량대로 나누어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복음 설교와 끊임없는 기도라고 하는 은혜의 수단을 통하여 성령으로 이 일을 하신다.

 

신앙의 자라남

 

이 믿음은 자라난다. 이 신앙이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다면 사도들은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눅17:5)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지금까지 우리가 믿음에 관하여 말한 모든 것은 이미 우리보다 앞서 사도들이 가르친 바이다. 바울은 “(히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했고, 또한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예’가 되며,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멘’이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그들에게 선물로 주어졌다고 하였다.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각각 다른 믿음의 분량을 주셨다. “(살후3:1) 종말로 형제들아 너희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달음질하여 영광스럽게 되고(롬10:16) 그러나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가로되 주여 우리의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또한 “모든 사람이 다 믿음을 가진 것도 아니요”라고 말하고 있다.. 누가도 증거하여 말하되 “(행13:48)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라고 하였다. 따라서 바울은 믿음을 “(딛1:1)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 곧 나의 사도 된 것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라고 했으며, “(롬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하였다. 바울은 또한 다른 곳에서 믿음을 얻기 위하여 기도하라고 명령한다.

 

효과적이고 활동적인 믿음

 

동일한 사도는 신앙이란 사랑을 통해서 효과적이 되고 활동적이 된다고 말한다. 신앙은 또한 양심의 평온을 가져오며 하나님께 자유로이 접근할 수 있게 하므로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 갈 수 있고 필요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얻는다. 우리는 또한 이 믿음 때문에 하나님과 이웃에게 빚진 봉사를 계속할 수 있고, 역경 중에 인내로 참아내고, 한마디로 말하면 온갖 종류의 선한 열매와 선행들을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선행에 관하여

 

참으로 훌륭한 선행이란 성령으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신앙에서 나오고 하나님의 말씀의 뜻과 주장을 따라 믿는 신자들에 의하여 성취된다. 이제 사도 베드로는 “(벧후1:5)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벧후1:7) 경건에 형제 우애를,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위에서 하나님의 뜻인 하나님의 율법이 선행의 모형을 우리들에게 제시해 준다고 말했다(삶의 규범으로 율법). 사도 바울은 “(살전4: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살전4:6)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고 증거한 것과 같이 이 모든 일에 주께서 신원하여 주심이니라”고 하였다.

 

인간의 마음대로 선택한 행위들

 

제멋대로 택하는 행위와 예배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는다. 바울은 이것을 ‘자의적 숭배’라고 부른다. 이에 대하여 주님은 복음서에서 “(마15:9)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고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러한 행위를 인정하지 않는 동시에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이 위임하신 것을 행하는 사람들을 인정하고 격려한다.

 

선행의 목적

 

사도가 말했듯이 영생이란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선행에 의하여 영생을 얻으려고 선행을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의 소명을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기 위해서, 그리고 이웃의 유익을 위해서 이 선행을 행해야 한다. 주님은 우리가 이 선행을 자랑삼아 하지 말라고 하셨고, 무슨 이득을 위해서도 하지 말라고 하셨다. 우리 주님은 또한 복음서에서 “(마5: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신다. 사도 바울은 “(엡4: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골3: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 “(빌2:4)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딛3:14) 또 우리 사람들도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을 예비하는 좋은 일에 힘쓰기를 배우게 하라”.

 

선행은 부인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와 더불어 그 어떤 선행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칭의를 얻는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우리는 선행이 무가치하다고 생각하거나 이 선행을 정죄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사람이 게으르기 위하여 창조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선하고 필요한 일들을 수행하기 위하여 창조되었고 믿음으로 중생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복음서에서 주님은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으며, 누구든지 자기 안에 머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신다. 사도는 “(엡2:10) 우리는 그의 만드신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며, “(딛2: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행을 경멸하고 쓸데없는 것이라 하고, 이 선행에 유의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모든 사람들을 정죄한다.

 

우리는 선행에 의해서 구원 얻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위에서 지적했듯이 우리는 우리가 선행에 의하여 구원 얻는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이 선행 없이는 아무도 구원 얻을 수 없을 정도로 이 선행이 구원을 위하여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은혜에 의해서, 즉 오직 그리스도의 은총에 의해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행위는 반드시 믿음에서 나온다. 구원을 행위에 돌리는 것은 옳지 못하다. 구원은 은혜에 의한 것이라고 해야 옳다. 사도의 다음 글은 잘 알려져 있다. 즉 “(롬11:6)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

 

선행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이제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는 행위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하나님에 의하여 인정을 받는다.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으로 말미암아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선행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기쁘게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베드로는 “(행10:35) 각 나라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줄 깨달았도다”라고 하기 때문이요, 바울 역시 “(골1:9)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골1:10)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라고 한다.

 

우리는 참된 선행을 가르친다. 우리는 거짓되고 철학적인 덕행은 가르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거짓된 선행이나 철학적인 선행이 아니라 참된 선행과 신자의 옳은 삶에 대하여 부지런히 가르친다. 우리는 복음을 입술로만 찬양하고 고백하면서 그것을 부끄러운 삶에 의하여 욕되게 하는 태만하고 위선적인 사람들을 책망하는 한편, 될 수 있는 한 우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부지런히, 그리고 열심히 이 선행을 권하는 바이다. 이 일에 관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의 위협을 저들에게 제시한 다음, 하나님의 풍요로운 약속과 관대한 보상을 보여 준다. 우리는 저들에게 권고하시고 위로하시고 질책하시는 하나님의 행동을 보여 주어야 한다.

 

하나님은 선행에 대하여 보상하신다.

 

“(렘31:16)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네 소리를 금하여 울지 말며 네 눈을 금하여 눈물을 흘리지 말라 네 일에 갚음을 받을 것인즉 그들이 그 대적의 땅에서 돌아오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예언자가 말한 바에 의한즉 하나님은 선행을 행한 사람들에게 후히 보응하신다. 주님도 복음서에서 “(마5: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마10:42)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이 베풀어주시는 이 상을 받는 사람의 공로에 돌리지 않고 그것을 약속하시고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선하심과 관대하심과 진실하심에 돌린다. 주님은 그 누구에게도 아무것도 빚진 바 없으나 자기를 예배하는 신자들에게 이 보상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게 하시기 위하여 이러한 보상을 주시는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믿는 성도들의 행위라도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치 않은 것이 많이 있으며 불완전한 것이 많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저들을 은총으로 용납하시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선행을 행하는 사람들을 용납하시기 때문에 저들에게 약속된 보상을 주시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하나님의 은총이 없으면 우리의 의는 더러운 옷에 불과하다. 주님은 복음서에서 “(눅17:10)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것뿐이라 할지니라”고 말씀하셨다.

 

인간의 공로는 없다.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의 선행을 보상하신다. 그러나 어거스틴과 더불어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 자신의 선물을 칭찬하시는 것이지 우리의 공로를 칭찬하시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친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보상을 받든지 그것은 은혜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행하는 선행은 우리 스스로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바울도 “(고전4:7)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뇨”고 하였고, 축복 받은 순교자 키프리안은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무엇에 영광을 돌리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 안에 우리 자신의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무가치하게 만드는 식으로 인간의 공로를 변호하는 사람들을 정죄한다”고 하였다.

 

 

 

17장. 하나님의 보편적이고 거룩한 교회와 교회의 유일하신 머리에 관하여

 

교회는 항상 존재해 왔고, 앞으로도 늘 존재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태초부터 인간이 구원받고 진리를 인식하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하나의 교회가 반드시 계속 존재해 왔고, 지금도 있으며, 미래에도 있다.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란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혹은 부름 받은 신자들의 모임, 즉 모든 택하신 성도들이다. 교회란 말씀과 성령으로 구주이신 그리스도 안에 계신된 참 하나님을 참으로 인식하고, 옳게 예배하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냥 제공된 모든 은혜에 신앙으로 동참하는 사람들의 교제이다.

 

한 나라의 시민

 

이 성도들은 같은 주님 밑에서 같은 하나님의 뜻을 좇아 모든 은사들을 함께 나누면서 사는 한 도성의 시민들이다. 그도 그럴 것이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의 보혈에 의하여 거룩하게 되는 이 땅위의 성도들을 가르켜 ‘성도’라 불렀고, 이들을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사도신경의 한 신앙항목인 ‘거룩한 교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내가 믿사오며’는 지금 우리가 말하고 있는 성도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모든 시대를 위한 단 하나의 교회

 

항상 한 하나님이 계시고, 이 하나님과 인류 사이에 오직 한 중보자만 계시는데 이분이 바로 메시야이신 예수요, 온 양무리의 목자이시오, 이 몸된 교회의 머리이시다. 결국 한 성령, 한 구원, 한 신앙, 한 계약이 있는 것이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오직 하나의 교회가 있을 뿐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보편적(카톨릭)교회

 

그러므로 우리는 이 교회를 보편적이라 일컫는다. 그 이유는 이 교회가 세상의 도처에 확산되어 있으며 모든 시대에 걸쳐 있으며 시간과 장소에 제약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를 아프리카의 어느 지역에 국한시키려 했던 도나티스트파를 정죄한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는 최근 로마 교회만이 보편적이라고 하는 로마 카톨릭 성직자들의 주장을 거부한다.

 

교회의 부분 혹은 형식들

 

교회가 상이한 부분과 형태로 나뉘는 이유는 교회 자체내에 분열이 있기 때문이 아니요, 이 교회의 성도들의 다양성 때문이다. 하나는 전투적 교회요, 다른 하나는 승리적 교회이다. 전자는 지상에서 육과 세상과 이 세상의 주관자인 악마에 대항하여 전투하고 죄와 죽음에 대항하여 싸운다. 그러나 후자는 이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 받았고, 이 모든 것을 극복한 후 하늘에서 승리의 노래를 부르면서 주님 앞에서 기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양자는 서로 교제하며 일치를 갖는다.

 

개교회

 

그 뿐만 아니라 이 땅위에 있는 전투적인 교회는 많은 개 교회들이다. 그러나 이 모든 개 교회들은 보편적 교회를 구축함으로 결국 하나의 통일성 있는 보편적 교회에 속한다. 이 전투적 교회는 율법이 있기 이전인 족장시대와 모세에 의해서 주어진 율법시대와 복음을 통한 그리스도의 시대에 있어서 각각 다른 모양으로 존재하였다.

 

두 종류의 백성들

 

보통 두 백성이란 이스라엘 백성과 이방 사람들을 말하는 것인데, 더 자세히 말하면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중에서 부름 받아 모여진 사람들이다. 그리고 또한 두 언약이 있다. 즉, 옛 언약과 새 언약이 그것이다. 옛 사람과 새사람을 위해서 하나의 동일한 교회가 있을 따름이다. 옛 사람에게나 새 사람에게나 하나의 메시야 안에서 하나의 교제와 하나의 구원이 있을 뿐이요, 모든 성도들은 하나의 머리 밑에 있는 한 몸의 지체로서 이 메시야 안에서 동일한 영적 음식과 음료에 참여하면서 같은 신앙으로 통일을 지향한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시대의 상이성과 약속된 그리스도의 표징과 이미 오신 그리스도의 표징의 상이성을 인정하며, 그리스도께 오신 이후에는 구약의 의식은 폐지되었고, 빛은 구약시대에서보다 더 밝히 우리에게 비추었고 더 풍성한 축복이 주어졌으며, 더 충만한 자유가 베풀어졌음을 우리는 인정한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으로서의 교회

 

이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불리운다. 이 성전은 견고한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워졌고 살아 있는 영적 돌들로 건축되었다. 이 초석은 인간에 의해서 놓여진 것이 아니다. 이런 근거에서 이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딤전3:15)라고 불리어진다. 교회는 과오를 범하지 않는다. 교회가 반석이신 그리스도 위에 기초되어져 있고 예언자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진 한 과오를 범할 수 없다. 그래서 홀로 진리되시는 그리스도를 저버릴 때마다 과오를 범하는 바 이는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교회는 신부요, 처녀이다. 이 교회는 또한 처녀라고도 불리우며 그리스도의 신부라고도 불리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유일한 애인이기도 하다. 사도가 “(고후11:2) 내가 하나님의 열심이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양무리이다. 에스겔 34장과 요한복음 10장에 의하면 교회란 한 목자이신 그리스도의 인도를 받는 하나의 양무리라고 불리어진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왜냐하면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살아 있는 지체들로서 머리되시는 그리스도 밑에 있기 때문이다.

 

교회의 유일한 머리이신 그리스도

 

사람의 몸에 있어서 특출난 부분이 머리이다. 몸 전체가 이 머리로부터 생명을 얻고 몸의 모든 다른 부분들은 이 머리의 정신에 의하여 지배를 받는다. 그리고 또한 몸은 그것으로부터 힘을 얻어 성장한다. 한 몸에 하나의 머리가 있으니 이는 몸에 적합한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리스도 이외에 그 어떤 다른 머리도 소유할 수 없다. 교회는 영적 몸이기 때문에 이것에 걸맞게 하나의 영적 머리를 가져야 한다.

 

교회란 그리스도의 영 이외에 다른 영에 의하여 지배될 수 없다. 그래서 바울은 “(골1: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라고 한다. 또한 다른 곳에서 바울은 “(엡5:23)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고 하고, “(엡1:22)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고 한다. 그 뿐만 아니라 “(엡4: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로마의 교황을 이 지상에 있는 전투적 교회의 보편적 목자요, 최고의 머리요, 교회 안에서 최고의 권세와 주권을 장악한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 자신이라고 고집하는 로마 카톨릭의 교리를 거부한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유일하신 목자이시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만이 유일한 보편적 목자이시고,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최고의 교황이시고, 이 그리스도 자신이 교회 안에서 세상 끝날까지 감독 혹은 목사의 모든 의무를 수행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가르친다.

 

따라서 우리는 이 그리스도의 대리자를 교회 안에 세울 필요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그리스도가 그의 교회와 계시고 이 교회에게 생명력을 공급하시는 머리이시기 때문이다. 교회 안에는 최고의 자리가 있을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사도들이나 이 사도들의 계승자들이 교회 안에서 최고의 자리를 가지고 군림하는 것을 엄격히 금하셨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명백한 진리와 충돌을 일으키든지 반대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예언한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이 아니겠는가?

 

교회내에는 무질서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로마의 교황과 관계를 끊었다고 해서 교회내에 어떤 혼돈과 무질서가 초래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사도들이 물려준 교회의 기본 질서는 교회를 올바른 질서 가운데 유지시키기에 충분하였다고 우리는 가르치기 때문이다. 초대교회와 고대교회가 지금의 교황체제를 전혀 갖고 있지 않았으나 결코 교회가 무질서와 혼돈에 빠지지 않았다. 사실 로마의 교황은 교회내에 도입된 독재와 부패를 계속 보존해 왔고, 그의 모든 힘을 동원하여 교회의 올바른 개혁을 방해하고, 반대하고, 중단시켰다.

 

교회 안에 있는 분쟁과 다툼

 

우리 개신교가 로마 교회로부터 분리된 이후, 여러 모양의 분쟁과 다툼을 거듭해 왔다. 그래서 우리는 참 교회가 될 수 없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마치 로마 교회내에는 어떤 분파도 생기지 않았고 종교에 관한 그 어떤 논쟁과 싸움도 없었던 것처럼, 기껏해야 교회의 강단에서가 아니라 학교내에서 이 논쟁과 싸움이 있었던 것처럼, 물론 우리는 “(고전14:33)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오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고전3:3)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라고 하는 사도 바울의 말을 확실히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사도들의 교회 안에 비록 다툼과 분쟁이 있었으나 하나님께서 이 사도들의 교회 안에 계셨고 이 사도들의 교회가 참 교회였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으셨다.

 

사도 바울은 같은 사도인 베드로를 꾸짖었고 바나바는 바울에게서 떠났다. 누가가 사도행전 15장에서 기록하고 있듯이 동일한 그리스도를 설교한 안디옥 교회내에 큰 다툼이 있었다. 교회의 역사를 통하여 늘 다툼이 있어 왔고 교회의 위대한 신학자들 상호간에 중요한 문제에 관하여 의견충돌이 있어 왔으나 그렇다고 이 다툼 때문에 교회가 교회되기를 그만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분쟁을 그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시고 그의 진리를 증명하고 나아가서 올바른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을 드러내시기 위하여 사용하시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참 교회의 표시

 

그 뿐만 아니라 우리는 그리스도 이외에 그 누구도 교회의 머리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인간을 교회의 머리라고 허풍떠는 모든 교회는 참 교회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참 교회의 표시를 가진 교회만이 참 교회라고 가르친다. 이 표시 가운데 특히 예언자와 사도들의 책이 우리에게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합법적이고 신실한 설교가 가장 중요한 바 이 기록된 말씀과 설교 말씀은 모두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한다. 그래서 복음서는 “(요10: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요10:28)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요10:5)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라고 했다.

 

또한 교회 안에 있는 이러한 사람들은 하나의 신앙과 한 성령을 가졌고, 따라서 한 하나님만을 예배하되 이 한 분만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고 온 마음과 모든 힘을 다하여 이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유일한 중보자시오, 대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만 기도한다. 그리고 이들은 그리스도와 이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떠나서 의와 생명을 추구하지 않는다. 이들은 교회의 유일한 머리와 초석이 그리스도라고 믿으며, 이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매일매일 회개로써 성화되고 자신들에게 부과된 십자가를 인내로써 감당하기 때문이다.

 

그 뿐만 아니라 이들은 거짓 없는 사랑으로 그리스도의 모든 다른 지체들과 연결됨으로 평화와 거룩한 일치의 결속 가운데에 끝까지 견디어 나가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동시에 이들은 그리스도에 의하여 제정되었고 사도들에 의해서 우리에게 전승된 성례전(세례와 성찬)에 참여하는 바 주님께로부터 받은 그대로 사용한다. 사도 바울의 “(고전11:23)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라고 하는 말은 잘 알려져 있다. 그래서 우리는 로마 카톨릭교회가 신부들의 사도적 전승과 교회의 통일과 오랜 전통을 아무리 자랑하여도 우리가 이미 언급한 참 교회의 표시를 갖고 있지 않는 한 그것은 참 교회가 아니라고 정죄한다. 더군다나 우리는 “(고전10:14) 그런즉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라는 것과 ‘바벨론에서 나와’ 이 바벨론과 관계를 끊음으로 하나님의 모든 재앙을 이들과 함께 받지 말라고 하는 그리스도의 사도들의 명령을 받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참 교회와의 교제를 높이 평가하기 때문에 이 참 교회와의 교제를 이탈하여 이 참 교회로부터 분리해 나가고도 하나님 존전에서 살 수 있다고 하는 것을 부인한다. 그도 그럴 것이 홍수로 온 세상이 파멸되는 상황에서 노아의 방주밖에는 구원이 없었던 것처럼 우리는 그리스도밖에는 결코 확실한 구원이 있을 수 없다고 믿는 바, 이 그리스도는 교회 안에 있는 그의 택함을 받은 사람들이 향유하도록 자신을 내어주셨다. 따라서 우리는 살기를 소원하는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참 교회에서 떠나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

 

교회는 그것의 표시에 얽매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위에서 언급한 참 교회의 표시에 의해서 교회를 좁게 제약하지 않는다. 즉, 적어도 스스로 원해서든지 경멸적 태도 때문이 아니라 필연성에 의하여 억지로 성례전에 참여하지 못하든가 본의 아니게 이 성례전을 받지 못하고 박탈당했을 경우, 이러한 사람들이 결코 교회 밖에 있다고 할 수 없다. 그리고 신앙의 실패로 신앙이 꺼져 가고 전적으로 오류 가운데로 빠져 들어간다고 해서 이런 사람들이 결코 참 교회 밖에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나라 밖에 있는 세상 속에서도 얼마 정도의 친구들을 가지셨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70년 동안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자신들의 모든 제사 행위를 박탈당했던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주님을 부인한 베드로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으며, 길을 잃고 나약해진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에게 매일 무슨 일이 일어나곤 했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는 사도 바울이 그렇게나 많은 심각한 허물을 발견했으나 그리스도의 거룩한 교회들이라고 부른 사도시대의 갈라디아의 고린도에 있는 교회들이 어떠한 교회들인가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때론 교회가 소멸된 것 같다.

 

그렇다 종종 이런 일이 일어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의로운 심판으로 그의 말씀의 진리와 보편적 신앙과 하나님에 대한 바른 예배를 그렇게도 흐리게 하시고 뒤엎어놓으시기 때문에 교회가 거의 소멸된 것 같고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우리는 이 일이 엘리야 시대와 다른 시대에도 일어난 것을 알고 있다. 한편 하나님은 이 세상과 이 어둠 속에서도 그이 참된 예배자들을 갖고 계신다. 이들의 수는 적은 것이 아니었다. 칠천이나 되었고 그 이상도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도 바울은 “(딤후2:19)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하였느니라”고 외쳤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교회는 불가시적이라고 일컬어진다. 하지만 교회를 불가시적이라고 하는 이유는 교회에 모인 구성원들이 불가시적이란 뜻이 아니요, 참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사람들을 아는 것은 하나님이시오, 이 하나님만이 이들을 올바로 판단하시고 이들이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으며 인간의 판단을 피하기 때문이다.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모두 교회는 아니다.

 

다시 말하거니와 교회의 회원으로 계산된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가 성도이거나 교회의 살아 있는 참 구성원이 아니다. 왜냐하면 비록 외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성례전을 공적으로 받고 그리스도만을 통해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처럼 보이고 그리스도를 자신들의 유일하신 의(義)로 고백하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잠시 동안 불행 중 인내로써 견디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 가운데에 많은 위선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내면에 있어서 성령의 인도하심(조명)과 신앙과 마음의 신실함과 끝까지 견디는 하나님의 붙들어주심을(견인) 결핍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의 본성은 결국 거의 전부가 노출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사도 요한은 “(요일2:19)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경건의 모양은 갖고 있으나 교회에 속한 사람들은 아니다. 그런데 한 국가 안에서 반역자들이 발각되기 전까지는 이 국가의 시민에 속해 있듯이 저들은 교회 안에서 회원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마치 이는 알곡 중에 쭉정이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요, 건강한 몸에 종기가 난 것과 같다. 이 후자의 경우 그것은 몸의 참 지체라기보다 병이요, 불구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교회는 온갖 종류의 물고기를 잡은 그물과 같고 알곡과 쭉정이를 모두 갖고 있는 밭과 같다.

 

우리는 성급히 혹은 미숙하게 판단해서는 안된다.

 

이런 까닭에 우리는 때가 이르기도 전에 판단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고, 주님께서 제외시키시거나 버리시기를 원치 않는 사람들을 제외시키거나 버리거나 잘라 내려고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우리가 이들을 제거한다면 교회는 손상을 입을 것이다. 다른 한편 경건한 자들이 코를 골고 자는 동안 사악한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교회를 해롭게 하지 않도록 우리는 깨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교회의 일치는 외적인 의식에 달린 것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교회 안에서 분열을 촉발시키고 조장하지 말도록 교회의 진리와 일치가 주로 무엇에 달려 있는가를 주의해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가르친다. 일치란 외적인 의식과 예식에 달린 것이 아니라 보편적(카톨릭)신앙의 진리와 일치에 달린 것이다. 보편적 신앙이란 인간의 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경에 의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데, 이것의 요약은 사도신경이다. 우리는 고대 교부들의 글에서 다양한 의식이 있으며 이 의식은 자유로이 사용되었고 아무도 이 의식의 다양성 때문에 교회의 일치가 깨어졌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읽는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의 참 조화란 교리에 있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참되고 조화 있게 설교하는 데 있으며, 주님께서 분명히 우리에게 전해 주신 의식에(성례전) 달렸다고 가르친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도의 말씀을 강조한다. “(빌3:15)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무슨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18장 교회의 교역자들, 이들의 제정 및 이들의 의무에 관하여

 

하나님은 교회를 세우는 일을 위하여 교역자들을 사용하신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교역자들을 사용하시어 자신을 위한 교회를 모으시기도 하시고 세우시기도 하시고 통치하시기도 하시고 보존하시기도 하셨다. 교회가 이 지상에 있는 한 하나님은 현재와 미래에 있어서 이처럼 교역자들을 사용하신다. 그러므로 교역자들이 처음 생겼고 제도화되었고 그 직무수행이 진행된 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지 인간이 한 것이 아니다. 그러면 이 교역자의 제정과 기원은 어떠한가?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고 직접 그의 능력으로 세상 중에서 교회를 자신과 연합시키실 수 있으나 인간의 교역을 통해서 인간과 관계 맺는 것을 더 좋아하신다. 그러므로 교역자들이란 자기 자신들에 의해서 교역자로 간주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들을 통하여 인간의 구원을 일으키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교역자들로 간주되어야 하는 것이다.

 

교역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이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회심과 교육에 관한 일을 성령의 은밀한 사역으로 돌리면서 교회적 교역을 헛된 것으로 만들지 않는 방법으로 그렇게 해야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항상 다음과 같은 사도의 말을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이다. “(롬10:14)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그리고 주님이 복음서에서 말씀하신 것도 우리는 기억하는 것이 좋다. “(요13: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의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마찬가지로 바울이 아시아에 있을 동안 환상 중에 나타난 마게도냐 사람도 은밀히 바울에게 충고하기를 “(행16:9)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고 했다. 또한 동일한 사도가 다른 곳에서 “(고전3:9)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고 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우리는 너무 많은 부분을 교역자들과 교역에 돌리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복음서에 나타난 주님의 말씀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요6: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사도의 말도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다. “(고전3:5)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고전3: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으로 우리를 가르치시는데, 외적으로는 그의 교역자들을 통하여 내적으로는 성령에 의하여 그의 택하신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하시고 조명시키시사(이끄심) 신앙에 이르게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모든 은혜에 대하여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야 한다. 그런데 이 문제에 관하여는 본 신앙고백서의 제 1장에서 논했다.

 

교역자들이란 누구며 하나님은 어떤 종류의 교역자들을 이 세상에 주셨나?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이 시작될 때부터 가장 뛰어난 사람들을 온 세상을 위해서 사용하셨다(이들 중 많은 사람들은 세상적 지혜와 철학에 있어서는 단순하였으나 참 신학에 있어서는 뛰어났다). 이들은 바로 족장들이었는데,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통하여 이들과 말씀하셨다. 족장들이란 자기들의 시대의 예언자들이요, 교사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이유에서 이들이 여러 세기를 살기를 원하셨으니, 그 목적은 이들이 사실상 세상의 조상과 빛이 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들을 계승한 이들은 모세와 온 세상이 알고 있는 유명한 예언자들이다.

 

교사이신 그리스도

 

위의 교역자들을 보내신 후 하늘의 아버지는 세상의 가장 완전하신 교사이신 그의 독생자를 보내셨으니, 이분 안에 하나님의 지혜가 감추어져 있고, 이 지혜는 가장 거룩하고 단순하고 가장 완전한 교리를 통하여 우리에게 전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자신을 위하여 제자를 선택하시어 그의 사도들로 삼으셨기 때문이다. 이 사도들은 세상 속으로 들어갔고, 복음 설교를 통하여 도처에 교회들을 세웠고, 그리스도의 명성을 따라 지중해 연안에 있는 모든 교회에 목사 혹은 교사를 임명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들의 계승자를 통하여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교회를 다스리시고 가르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백성들을 위하여 족장들과 모세와 예언자들을 주신 것같이 신약의 백성들에겐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과 교회의 교사들을 주셨다.

 

신약 성경의 교역자들

 

신약에서의 교역자들은 여러 가지 이름으로 일컬어진다. 이들은 사도들, 예언자들, 복음전도자들, 감독들, 장로들, 목사들, 교사들이라고 일컬어졌다. 사도들은 한 지역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고 지중해 연안을 두루다니면서 여러 교회를 세웠다. 일단 사도들이 교회를 세우면 이들의 임무는 끝났다. 목사들이 교회들을 각각 맡았다. 예언자들이란 옛날에 미래를 꿰뚫어보는 자였고, 성경을 해석하는 자이기도 했다.

 

복음서를 기록한 사람들은 복음 전도자라 불리어졌는데 그리스도의 복음의 전령자이기도 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딤후4:5)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고 권고하였다. 감독이란 교회를 돌보는 자요, 감독하는 자요, 교회의 식량과 모든 삶의 필요를 맡아본다. 장로들은 연장자라고 불리워지기도 했는데 사실상 교회의 성도들의 대표들이요, 아버지들로서 교회를 건전한 충고와 지혜로써 다스린다. 목사들은 주님의 양무리를 지키고 양떼들의 필요를 공급한다. 교사들은 참 믿음과 경건을 가르친다. 그러므로 교회의 교역자란 감독, 장로, 목사 및 교사라 불리어진다.

 

교황의 성직체제

 

그후 하나님의 교회 안에는 여러 가지 종류의 교역자들이 생겼다. 어떤 교회는 사교(司敎:patriarchs)를 택하였고, 다른 교회는 대주교(archbishops)와 부감독을 두었고, 또한 대감독(metropolitans), 주제(主祭:archdeacons), 부제(副祭:deacons), 부조제(副助祭), 시제(acolytes), 귀신을 쫓아내는 기도사, 성가대의 선창가(cantors), 수문(doorkeepers), 그리고 이외에 어떤 성직이 또 있는지 우리로서는 알 수 없으나 추기경(cardinals), 사제장(provosts), 그리고 상급 신부와 하급 신부 및 소수도원의 원장 등이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교직이 전에는 어떠했고 지금은 어떠한가에 대하여 더 이상 논의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교역자들에 대한 사도들의 교리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수도승에 관하여

 

수도승이나 수도 승단들이나 분파가 그리스도나 사도들에 의하여 제정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확실히 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것들이 하나님의 교회에 유익이 되기는커녕 해롭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가르친다. 그도 그럴 것이 옛날에는 이들이 용납될 수도 있었으나(이들이 은둔자들로서 자신들의 손으로 생계를 해결했고, 그 누구에게도 부담을 주지 않았고, 일반성도처럼 도처에 흩어져 있으면서 교회의 목사에게 순종했을 경우) 지금에 와서는 온 세상 사람들이 이들이 어떻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우리가 알 수 없는 수도원 입원을 위한 서약을 한다. 그러나 그들의 삶은 이 서약과 다르게 영위되고 있다. 따라서 이들 중 최선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라도 사도가 비판한 유의 사람과 같다. “(살후3:11)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규모 없이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만 만드는 자들이 있다 하니”.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교회들 안에 그러한 사람들이 있어서도 안되고 있을 필요도 없다고 가르친다.

 

교역자들은 부름 받아야 하고 택함을 받아야 한다.

 

아무도 교역자들의 영예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 즉 그 누구도 그것을 뇌물이나 어떤 사기에 의하여 취해서도 안 되고 자율적인 자유선택에 의해서 택해서도 안 된다. 반드시 교회의 교역자들은 합법적인 교회의 선거에 의하여 부름 받아 선출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교회 혹은 무슨 소란이나 분쟁이나 경쟁이 없이 질서 있게 선출하기 위하여 뽑혀진 교회의 대표들이 이 교역자들을 조심성 있게 선출해야 한다. 아무나 선출되어서는 안된다. 충분히 헌신된 학식, 경건한 웅변, 간교함이 없는 지혜, 끝으로 절제와 좋은 평판에 있어서 뛰어난 유능한 사람들을 선출해야 한다. 즉, 우리는 사도 바울이 디모데 전서 3장과 디도서 1장에서 제시한 사도적 규범을 따라야 한다.

 

안수

 

선출된 사람들은 장로들에 의하여 안수를 받는데, 공중기도와 손을 얹어놓음으로 행해진다. 우리는 여기에서 선출 받은 바도 없고 파송 받은 바도 없으며 안수 받은 바도 없으나 자기들 마음대로 교역에 임하는 사람들을 정죄 한다. 또한 우리는 부적합한 교역자들과 목사가 갖추어야 될 꼭 필요한 은사들을 소유하고 있지 않은 사람들을 정죄 한다. 하지만 우리는 초대교회의 어떤 목사들의 해없는 어떤 단순성이 어떤이들의 다방면적이고 세련되고 까다롭고 약간은 비밀스러운 학식보다 교회를 위해서 더 유익하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이런 까닭에 우리는 오늘날에도 어떤 이들의 정직한 단순성을 거부하지 않는다. 물론 무식해도 괜찮다는 말은 아니다.

 

만인제사장직

 

확실히 그리스도의 사도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을 제사장이라 일컫는다. 그러나 제사장이라고 하는 직책을 받아서 그렇게 부른 것이 아니라 모든 신자들은 이미 왕과 제사장이 되었으므로 신자들인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적 제사들을 드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제사장직과 교역자직은 크게 다르다. 방금 지적한 대로 제사장직은 모든 크리스챤들이 공유하고 있으나 교역자직은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교황의 제사장직을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제거시켰다고 해서 교회의 교역자직을 폐지시킨 것은 아니다.

 

제사장들과 제사장직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새 언약에 있어서는 구약시대에 있었던 제사장직이 없어졌다. 이 구약은 제사장직에 관련하여 외적인 기름부음, 거룩한 외투 및 여러 가지 의식을 말하고 있는데, 이미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나타내기 위한 의식들을 그의 오심과 그의 성취에 의하여 폐기하셨다. 그러나 그리스도 자신은 영원히 유일한 제사장으로 남으신다. 따라서 만일 어떤 목사에게 이 제사장의 이름을 부여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위신을 떨어뜨리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주님 자신은 신약의 교회를 위하여 어떤 제사장도 결코 세운 적이 없으시기 때문이다. 주님은 말씀을 설교하고 성례전을 베풀 교역자들을 세우신 것이지 부감독으로부터 권위를 위탁받아 주님의 참 살과 피를 산 자와 죽은 자를 위하여 희생제물로 매일 제사하는 제사장을 세우신 것이 아니다.

 

신약이 말하는 교역자들의 본성

 

바울은 신약성경 혹은 기독교회의 교역자들에 관하여 간단명료하게 언급한다. “(고전4:1)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래서 사도는 우리들이 교역자를 교역자로 생각하기를 바란다. 그러므로 사도는 교역자를 ‘노젓는 사람’이라 부르면서 이 노젓는 사람은 그의 눈을 키잡이에 고정시켜야 한다고 하고, 이 교역자란 자신들을 위해서 혹은 자기들의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 것이라 하였다. 즉, 이 교역자들은 전적으로 주님의 명령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교회의 모든 교역자는 그들의 모든 의무수행에 있어서 자신의 뜻대로가 아니라 주님께로부터 받은 명령을 수행하도록 명령받은 것이다. 이 경우 주님이란 그리스도이신바 교역자들은 교역하는 모든 일에 있어서 이 그리스도에게 복종해야 한다.

 

하나님의 비밀은 맡은 청지기로서 교역자들

 

그 뿐만 아니라 사도는 교역자직을 더 충분히 설명하기 위해서 교회의 교역자들이란 하나님의 신비를 관리하고 보존하고 베풀어주는 청지기들이라고 덧붙였다. 바울은 여러 군데에서 이 하나님의 비밀을 가리켜 그리스도의 복음이라 하는데 에베소서 3장이 특히 두드러진다. 그래서 교부들은 그리스도의 성례들을 신비라 일컬었다. 이 목적을 위해서 교회의 교역자들은 부름을 받았다. 즉,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자들에게 설교하고 성례전을 베풀기 위하여 부름을 받았다. 복음서에서 우리는 “(눅12:42) 주께서 가라사대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라고 하는 말씀을 발견한다. 복음서의 또 다른 곳에 보면 한 사람이 외국으로 여행가는데 그의 집과 재산과 그것을 다스릴 권한을 그의 종들에게 주었고 각각에게 할 일을 맡기셨다고 한다.

 

교역자의 권한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교역자들의 권한과 의무에 대해서 몇 가지 언급해야 할 줄 안다. 어떤 이들은 이 권한에 관하여 열심히 주장하면서 이 지상 최고의 것들까지 이 권한에 복종시킨다. 이것은 주님의 명령과 정반대되는 것이다. 우리 주님은 제자들에게 군림하는 자세를 금하시고 겸손을 천거하셨다. 교직의 권한은 순수하고 절대적인 바 “의의 권한”이라 불리운다. 이 권한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모든 것의 주님이신 그리스도에게 복종시킨다. 주님 자신의 증거를 들어 보자.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다”, “(계1:18)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찌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계3:7)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

 

참 권한은 주님의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 교역의 권한을 소유하고 계신다. 주님은 그의 교역자들이 교역하는 동안 구경꾼으로 빈둥빈둥 지내시기 위하여 이 교역을 인간들에게 넘기신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사야가 “(사22:22) 내가 또 다윗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리니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 자가 없으리라”, “(사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평강의 왕이라 할것임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주님은 다스리는 일을 다른 사람들의 어깨에 메어 두지 않고 스스로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데 있어서 그의 권세를 보존하시고 사용하신다.

 

교역자직의 권한

 

교역직의 또 하나의 권한이 있는데, 이것은 완전하고 절대적 권한을 가지신 주님에 의하여 제약을 받는다. 이 권한은 군림이 아니라 섬김이다. 이는 열쇠의 권한이다. 주인은 그의 권한을 청지기에게 전적으로 일임하였기에 그에게 열쇠를 주어 그로 하여금 그의 주인의 뜻대로 들여보낼 자를 들여보내고 제외시킬 자를 제외시키게 하는 것이다. 교역자는 이 권한에 의하여 직책수행상 주님께서 명령하신 바를 행하는 것인데, 주님은 그의 교역자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를 확인하고 이 교역자가 행한 바를 마치 자신이 행하신 것으로 간주해 주시고 인정해 주시는 것이다. 의심의 여지없이 복음서의 말씀들은 바로 이러한 내용을 말하고 있다. “(마16: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요20:23)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그러나 만약에 교역자가 주께서 명령하신 대로 모든 것을 행하지 않을 경우, 주님은 그가 행한 것을 무효화할 것이 확실하다. 그러므로 교역자가 주께로부터 부여받은 교회적 권한은 그것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다스리는 기능을 발휘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역자들은 주께서 그이 말씀에 규정해 주신대로 교회의 모든 일을 수행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행할 때 신자들은 마치 주님 자신이 행하시는 것으로 여긴다. 우리는 위에서 이미 열쇠의 권한에 대하여 언급했다.

 

교역자들의 권한은 하나며 동일하며 동등하다.

 

교회 안에 있는 모든 교역자들은 동일하고 동등한 권한 혹은 기능을 부여받았다. 확실히 고대 교회에서는 감독들이나 장로들이 교회를 함께 다스렸다. 이 시대에는 아무도 다른 사람보다 높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 어느 감독이나 장로도 다른 동료 감독이나 장로보다 더 큰 권한이나 권위를 행사하지 않았다. 주님의 말씀에 “(눅22:26)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두목은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를 기억하기 때문에 저들은 계속 겸손을 유지했으며, 교회를 다스리거나 보존하는 일에 있어서 상호 봉사로서 서로 도와 주었다.

 

질서는 보존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질서의 보존을 위하여 교역자들 가운데 어느 한 사람이 회중을 소집하여 문제들을 이 회중 앞에 내어놓고 모든 사람들의 의견을 수렴했다. 간단히 말하면 어떤 무질서가 일어나지 않도록 그들은 그들의 최선을 다했다. 우리가 사도행전에서 읽는 대로 베드로는 비록 그의 그와 같은 지도적 위치와 행위 때문에 예수님의 총애를 다른 제자들보다 더 받은 것도 아니었고 다른 제자들보다 결코 더 큰 권위를 부여받은 것이 아니었으나 그렇게 행동하였다. 그는 다른 제자들과 동등하면서 의장직을 맡아 행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순교자 키프리안이 그의 저서 <교역자들의 단순성에 대하여>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 것은 옳다. “다른 사도들도 베드로와 꼭 같은 영예와 권한을 부여받은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베드로의 의장권(수위권)은 교회의 일치(질서)를 이룩하기 위한 통일성의 원리에 입각한 것이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는 경우와 그 양상

 

제롬 역시 바울의 디도서를 주석하면서 위와 같은 사실과 어긋나지 않는 말을 했다. 즉, “장로들의 협의와 합의에 의하여 교회들은 다스려져 왔었다. 종교에 있어서 어느 특정 개인들에게 집착하는 것은 마귀의 짓이다. 그런데 각 사람이 자신이 세례 준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가 아니라 자신의 소유로 생각한 이후 장로들 가운데 어느 한 사람을 선출하여 다른 사람들보다 위에 있게 하였고, 이 한 장로에게 교회 전체의 돌봄을 맡겨야 했고 모든 분열의 씨앗을 제거하는 제도가 나왔다”.

 

그러나 제롬은 이 규정을 신적인 것으로 보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즉시 다음과 같이 덧붙여 말하기 때문이다. “장로들은 교회의 관례로부터 자신들이 자신들 위에 세워진 장로에게 순복할 것을 알았듯이 감독들은 자신들이 장로들 위에 있다고 하는 사실을 주님이 정해 주신 진리로부터라기보다도 교회의 관례로부터 알았다. 그렇기 때문에 관례보다는 진리에 입각해서 감독들은 장로들과 더불어 교회를 다스려야 할 것이다”. 제롬이 말한 것은 이 정도였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가 지녔던 고대 헌장으로 돌아가야 하고 인간의 관습이 생기기 이전의 내용에 호소하고 의존해야 한다.

 

교역자들의 의무들

 

교역자들의 의무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러나 대체로 두 가지에 국한하는데 이 두 가지 속에 나머지가 포함되어 있다. 그 두 가지란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르치는 것과 성례전(세례와 성만찬)을 집행하는 일이다. 그도 그럴 것이 예배를 위하여 회중을 모으고 여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풀이하고, 이 말씀의 모든 가르침을 교회를 돌보며 교회를 유익하게 하는 일에 적용함으로 선포된 말씀이 듣는 자들에게 유익을 주게 하고 믿는 자들을 세우는 것이 바로 교역자들이 해야 할 의무이기 때문이다. 또한 교역자는 복음과 성경에 무식한 사람을 가르쳐야 하고 권고해야 하고, 게으른 자들과 망설이는 자들로 하여금 주님의 길을 계속 따르도록 강권해야 한다. 우리 생각엔 이것 역시 교역자의 의무라고 말하고 싶다.

 

그 뿐만 아니라 교역자들은 마음이 약한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해야 하고, 사탄의 여러 가지 시험에 넘어가지 않도록 이들을 무장시켜야 하고, 범법자들을 견책하고, 과오에 빠져 있는 자들을 올바른 길로 불러내고, 넘어진 자들을 일으켜 주고, 주님의 양무리로부터 이리를 쫓아내도록 힘쓰고, 사악과 사악한 자들을 지혜롭고도 엄격하게 질책해야 하고, 큰 사악에게 눈짓을 해서도 안 되고 이 큰 사악을 묵과해서도 안 된다. 이것 이외에도 그들은 성례전을 베풀어야 하고 이 성례전을 옳게 사용하도록 가르쳐야 하고 건전한 가르침에 의하여 준비시킴으로 이 성례전을 받게 해야 하고, 신자들의 거룩한 일치를 보존해야 하고 분열을 막아야 하고 복음과 성경에 무식한 사람들을 가르쳐야 하고, 교회의 가난한 사람들을 돌봐야 하고 병든 자들과 여러 가지 시험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심방하고 가르치고 생명의 길로 계속 인도해야 한다. 이것에 이어 교역자들은 어려운 일에 처할 때마다 공동체적 금식을 실천하면서 공동체적 기도모임에 참여하고, 교회들의 안정과 평화와 번영을 위해서 부지런히 정진해야 한다.

 

그러나 교역자가 이 모든 일들을 더 잘 수행하고 더 쉽게 수행하기 위하여 그는 하나님을 경외해야 하고 쉬지 않고 기도해야 하고 영적 서적을 열심히 읽어야 하고 모든 일에 있어서, 그리고 항상 정신차려야 하고 순결한 삶을 삶으로 모든 사람들 앞에 빛을 비추어야 한다.

 

치리(권징)

 

치리(治理)란 교회 안에 꼭 있어야 한다. 교부들의 시대에도 파문(출교)이 실천된 적이 있다. 그리고 교회적인 심판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적용되곤 하였다. 이 경우 지혜롭고 경건한 사람들이 치리를 행사하였다. 이런 이유 때문에 교역자들은 상황(시대성, 사회성, 필요성)에 따라 교회의 건덕을 위한 치리를 행사해야 한다.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적절히 행하고 영예롭게 행하되 억압과 다툼은 피해야 한다는 법칙을 우리는 지켜야 한다.

 

왜냐하면 사도의 증언에 의한즉 주님께서 자기에게 교회의 권위를 주신 목적은 교회를 세우기 위함이지 교회를 파괴하기 위함은 아니기 때문이며, 또한 그 이유는 가라지를 뽑다가 알곡까지 뽑아 버릴까 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사악한 교역자의 말까지도 들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도나티스트주의자들의 오류를 몹시 싫어한다. 왜냐하면 이들은 성례전에 대한 가르침과 집례가 교역자들의 삶의 좋고 나쁨에 따라 효력이 있기도 하고 효력이 없기도 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마23:3)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고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음성이 사악한 교역자들이 입을 통해서 나오더라도 그것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을 안다. 성례전이란 그리스도의 제정의 말씀에 의하여 성화되기 때문에 비록 합당치 못한 교역자들이 그것을 베풀더라도 믿는 성도들에게 효력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 문제에 관하여는 하나님의 축복 받은 종 어거스틴이 성경에 근거하여 여러 차례 도나티스트들을 반박하였다.

 

노회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역자들을 위해서도 적절한 치리가 있어야 한다. 노회들은 교역자들의 가르침과 삶을 주의 깊게 검토해야 한다. 교정될 만한 범법자들은 장로들에 의하여 견책 받아야 하고 올바른 길로 인도되어야 한다. 만약 교정이 불가능한 사람들은 추방되어야 한다. 마치 참 목자들이 주님의 양무리로부터 이리들을 추방하듯이, 왜냐하면 이들이 거짓 선생들일 경우 결코 용납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 이런 일들을 위해서 세계 교회의 모든 교회들의 회의들이 사도들의 모범을 따라 교회의 파괴가 아니라 교회의 번영을 위해서 회집한다면 우리는 이 종교회의들을 인정해야 한다.

 

일꾼은 일의 대가를 지불 받아야 한다.

 

모든 신실한 교역자들은 선한 일꾼들로서 자신들의 일의 대가를 받아 마땅하다. 교역자들이 봉급 혹은 자신들과 자신들의 가족을 위해서 필요한 모든 것을 받는 것은 죄악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9장과 디모데 전서 5장과 그 외의 다른 곳에서 이와 같은 것을 교회가 주고 교역자가 받는 것은 올바른 일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재세례파 사람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짓을 했다. 왜냐하면 이들은 교역활동을 통해서 먹고 사는 교역자들을 정죄하였고 비방하였기 때문이다.

 

 

 

19장. 그리스도의 교회의 성례전들에 관하여

 

말씀에 첨가물이 성례전인바 그것의 본질은 무엇인가?

 

처음부터 하나님께서는 교회 안에서 말씀의 설교에 성례전들(세례/성만찬)과 성례전적 징표들을 첨가하셨다. 이것은 성경 전체에 잘 증거되어 있다. 성례전들이란 신비적인 상징들, 거룩한 의식, 혹은 신성한 행동인데 이것은 하나님 자신에 의하여 제정된 것으로 그 구성요소는 그의 말씀과 징표들, 그리고 이 징표의 대상들이다. 하나님은 이미 그가 인간에게 계시해 주신 엄청난 은혜들을 이 교회 안에서 성례전에 의하여 기억나게 하시고 그의 약속들을 인치시고 그가 우리를 위하여 내적으로 수행하시는 일들을 외적으로 표현하고 우리가 볼 수 있도록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이 성례전들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성령역사를 일으킴으로 우리의 신앙을 자라가게(강화) 하신다. 끝으로 하나님은 이 성례에 의하여 우리들을 모든 다른 사람들과 다른 종교들로부터 구별하고 우리들을 전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헌신하게 하시고 결속하게 하시고 그의 요구를 우리에게 제시하신다.

 

구약의 예식도 있고 신약의 예식도 있다.

 

어떤 성례전은 구약백성에게 해당되고 어떤 성례전은 신약백성에게 속한다. 즉 할례와 제물을 바쳐지는 유월절 양은 구약의 성례전이다. 이 때문에 이것은 세상 처음부터 실시되어 온 희생제물에 관한 것이다.

 

오늘날 백성의 성례전의 수

 

오늘날 성례전은 세례와 성만찬이다. 어떤 이들은 새 백성의 성례전이 일곱 가지라고 주장한다.(로마 카톨릭) 이들 중에서 우리는 회개와 교역자의 안수와 결혼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유익한 것인 줄 인정하나 결코 이것들이 성례전은 아니라는 것이다. 견신례(confirmation)와 종유(extreme unction)는 인간적인 날조로서 이것을 제거해 버려도 교회는 손상을 입지 않는다. 사실 역사적 장로교회들은 이런 것들을 지니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우리가 결코 인정할 수 없는 어떤 것들을 포함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교황주의자들이 성례전을 베풀 때에 시행하는 모든 상행위(商行爲)를 싫어한다.

 

성례전의 창지자

 

성례전들의 창시자는 어떤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다. 사람들은 성례전들을 제정할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그것은 하나님 예배에 관한 것이요, 이 하나님 예배는 인간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것을 인간이 수용하여 보존할 뿐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상징들은 하나님의 약속들을 동반하는 바 이 약속들은 신앙을 요구한다. 그리고 신앙이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의존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서류나 편지와도 같고 성례전들은 도장과도 같아서 하나님께서는 서류나 편지에 도장을 찍으신다.

 

그리스도는 아직도 성례전을 통하여 역사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성례전의 창시자이기 때문에 이 성례전이 올바르게 집례되는 교회 안에서 계속 역사하신다. 따라서 신도들은 이 성례전을 교역자들로부터 받을 때 하나님께서 이 제도 가운데에 계속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안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이 성례를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직접 받는 것이다. 이 경우 교역자의 허물이 있다 해도(그것이 대단히 큰 허물이라도) 그것은 결코 성례전의 효력을 막을 수 없다. 왜냐하면 성도들은 이 성례전의 온전성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제정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성례전의 창시자와 성례전을 집례하는 교역자는 서로 구별되어야 한다.

 

이 때문에 성도들은 성례전의 집례에 참여 할 때 주님 자신과 주님의 교역자들을 분명히 구별하면서 주님의 교역자들에게서는 외적인 표징을 받고 주님께로부터는 성례전의 본질을 받는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성례전의 본질 혹은 알맹이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든 성례전을 통하여 약속하시는 바 알맹이는 그리스도 구주이시다. 이것은 모든 세대를 통하여 모든 신자들의 주된 관심사인데 어떤 이들은 이것을 성례전의 본질이라 부르고, 어떤 이들은 이것을 성례전의 알맹이라 부른다. 그런데 이 구주이신 그리스도는 유일무이한 희생제물로서 세상의 기초가 놓이기 시작할 때부터 죽임을 당한 하나님의 어린양이요, 우리의 선조들이 그것으로부터 생수를 마셨던 반석이요, 모든 선민이 이분에 의하여 성령을 통하여 손 없이 할례를 받았고 모든 죄에서 씻김을 받았고 그의 참 몸과 피에 의하여 양육을 받아 영생에 이른다.

 

옛 백성과 새 백성의 성례전의 차이점

 

성례전의 주된 알맹이 혹은 그 본질에 관하여는 두 백성의 성례전들이 동등하다. 왜냐하면 신자들의 유일한 중보자요 구주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두 백성의 성례전의 주된 알맹이요,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하나님이 두 백성의 성례전의 창시자이기 때문이다. 이 두 백성에게 주어진 성례전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와 약속을 인치기 위한 표시와 징표의 역할을 한다. 이 성례전은 하나님의 엄청난 은혜를 생각나게 하며 이 은혜에 대한 기억을 새롭게 하고 신자들을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종교로부터 구별한다.

 

끝으로 우리는 이 성례전을 신앙에 의하여 영적으로 받아들여야 하고, 이것을 받는 우리는 교회의 결속되고 이것에 의하여 우리는 우리의 의무를 명령받는다. 이런 점에서 그리고 이와 비슷한 점에서 두 백성의 성례전은 외향적인 표시와 표징에 있어서는 차이점이 있으나 그 본질에 있어서는 동일한 것이다.

 

이제 우리는 표시에 있어서는 구별해야 한다. 우리의 것은 더 견고하고 더 지속적이기 때문이다. 세상 끝날까지 그것들은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의 것은 본질과 약속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고 완성되었음을 증거하기 때문이다. 전자는 성취될 것을 가르쳤다. 이제 우리의 것이 더 간단하고 덜 복잡하고 덜 사치스럽고 덜 의식에 치우쳐 있다. 또한 우리의 것은 더 많은 사람들, 즉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그리스도인에게 속한다. 우리의 것이 보다 더 탁월하다. 그것은 성령에 의하여 더 큰 신앙을 불붙인다. 따라서 성령의 더 큰 풍요가 있다.

 

우리의 성례전은 폐기된 구약의 것을 잇고 있다.

 

참 메시야인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에게 나타나셨고 풍성한 은혜가 신약의 백성들에게 부은바 되었기 때문에 옛 백성의 성례전은 폐기되었고 중단되었다. 그 대신 신약의 상징들이 주어진 것이다. 즉, 할례 대신에 세례가, 그리고 유월절 양과 희생제사들 대신에 주의 성만찬이 주어졌다.

 

성례전의 구성요소

 

성례전의 구성요소는 구약에 있어서나 신약에 있어서나 3가지이다. 즉, 말씀과 표징과 표징의 대상이다. 전에는 성례전이 아니었던 것을 성례전 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례전의 봉헌(하나님께 드려짐)

 

성례전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드려진다. 여기에서 이 성례전을 제정하신 분이 그것을 거룩하게 하신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 무엇을 성화시켜 하나님께 봉헌한다고 하는 것은 그것을 일상적인 사용에서 구별하여 거룩한 사용을 위하여 정해 놓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상 성례전을 위해서 사용되는 표징들은 일상적인 것 혹은 외적이고 가시적인 것으로 되어 있다. 세례에 있어서 표징은 물이다. 교역자는 이 물을 가지고 가시적 씻음을 표시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이 표징이 가리키는 대상 혹은 내용이란 중생(거듭남)이요, 죄로부터 씻음이다.

 

마찬가지로 성만찬에 있어서 외적인 표징은 떡과 포도주이다. 이 떡과 포도주는 일상적으로 우리가 먹고 마시는 것으로부터 취해진 것이다. 그러나 이 표징이 가리키는 대상 혹은 내용은 우리를 위해서 찢겨진 그리스도의 몸이요, 우리를 위하여 흘려진 그리스도의 피이다. 이는 주님의 몸과 피를 실제로 우리가 함께 나누는 것(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물과 떡과 포도주는 전적으로 일상적인 것인데, 하나님의 제정과 봉헌에 의해서 성례전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교역자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 성례전에 첨가할 때 처음 있었던 주님의 제정하심과 봉헌하심이 다시 새롭게 재현되면서 이 표징들이 봉헌되고 그리스도에 의해서 성화되는 것이 증명된다.

 

그도 그럴 것이 성례전을 처음 제정하셨고 처음 봉헌하신 이 주님의 성례전은 하나님의 교회에서 항상 효과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이 결과 주님께서 최초로 제정하신 방법 이외에 다른 방법으로 성례전을 집례하지 않는 사람들은 오늘도 바로 저 최초의 봉헌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성례전을 베풀 때에 그리스도의 말씀 자체가 반복되는 것이다.

 

 

성례전의 연합

 

표징들이 대상 혹은 내용의 이름을 갖게 되는 이유는 이 표징들이 거룩한 대상 혹은 내용의 신비스러운 표징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여기에서 표징들이 대상과 연합하는 것은 신비적인 의미 때문이요, 성례전을 제정하신 분의 목적과 뜻 때문이다. 물과 떡과 포도주는 보통의 표징들이 아니라 거룩한 표징들인 것이다. 세례를 위해서 물을 제정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성도들이 세례 받을 때 단순히 물 뿌림을 받아야 하는 뜻과 의도에서 제정하신 것이 아니다. 그리고 성만찬에서 떡을 먹고 포도주를 먹고 마시라고 하신 것도 단순히 집에서 먹는 떡과 포도주처럼 먹고 마시라고 하신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신비로움이 있다. 즉 신자들은 표징이 가리키는 대상, 혹은 내용에 영적으로 참여하게 되고, 신앙에 의해서 죄 씻음을 받게 되고, 그리스도와 실제적으로 연합하게 된다.

 

이단들

 

그러므로 성례전을 거룩하게 하는 일이 어떤 특성들과 공식에 의한 것이라고 하든가, 거룩케 되었거나 거룩케 하려는 사람에 능력에 의한 것이라고 하든가, 그리스도나 사도들의 말씀과 모범으로 우리에게 전해 준 것이 아닌 그 어떤 우연한 것에 의한 것이라고 가르치는 사람들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는다. 또한 우리는 성례전을 성화되었고 효과적이라고 하지 않고 일상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교회를 거부한다. 그리고 우리는 불가시적인 것 때문에 성례전의 가시적인 측면을 경멸하거나 징표들을 전혀 무시하고 대상이나 내용을 소유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인정하지 않는다. 즉 멧살리아주의자들을 말한다.

 

표징이 가리키는 대상 혹은 내용은 결코 성례전 안에 갇혀 있거나 성례전에 속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은혜와 표징의 대상이 표징에 그렇게나 긴밀히 속박되어 있고 내포되어 있기 때문에 이 표징들에 외적으로 참여하는 사람은 누구나 이들이 어떤 사람들인가에 관계없이 이들은 은혜와 표징의 대상에 내적으로 참여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교리를 우리는 거부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성례전의 가치가 교역자의 가치와 무가치에 의하여 결정되지 않는다고 보는 것처럼 우리는 이 성례전의 가치가 전적으로 신앙과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순수한 좋으심에 달렸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설교될 경우 단순히 내실 없는 말들이 반복되는 것이 아니요, 말들이 가리키는 대상 혹은 내용이 하나님에 의하여 제공된다면 비록 불신자들이 이 말들만 듣고 이해하되, 그 대상을 신앙으로 받아들일 수 없고 누릴 수 없다 해도 하나님의 말씀은 전혀 손상을 입지 않고 그냥 하나님의 참 말씀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성례전도 마찬가지이다. 비록 불신자들이 이 성례전에서 표징의 대상 혹은 내용을 수용하지 않는다 해도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표징과 표징의 대상으로 구성된 성례전이야말로 거록한 대상 혹은 내용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힘을 빌려 표징의 내용을 제공하는 참되고 침해받을 수 없는 성례전으로 남는다. 잘못이 이 성례를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앙도 없이 불법적으로 이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불신앙 때문에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결코 무효화될 수 없다.

 

성례전의 제정의 목적

 

성례전의 제정의 목적에 관하여는 이미 본 신앙고백서의 처음에서 성례전이란 무엇인가를 설명할 때 언급했으므로 여기서는 또다시 언급하는 일은 번거러운 일이다. 우리는 이제 논리적으로 볼 때 새 백성의 성례전을 하나하나 논하기로 하자.

 

 

 

20장. 거룩한 세례에 관하여

 

세례의 제정

 

하나님께서 세례를 제정하셨고 성별하셨다. 처음 세례를 베푼 사람은 요한인데 그는 그리스도를 요단 강물로 적셨다. 그 다음 물로 세례를 베푼 사람들은 사도들이었다. 주님은 사도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마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세례를 베풀라고 분명히 명령하셨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라고 묻는 유대인들에게 “(행2:38)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고 대답하였다. 세례에 의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 드려지기 때문에 세례란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는 입문의 표징이라고도 불리운다.

 

한 세례

 

하나님의 교회 안에는 한번의 세례밖에 없다. 한번 세례받아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으로 족하다. 한번 받은 세례는 평생토록 그 효력을 지속하는 바 이 세례는 우리의 양자됨을 항상 증거한다.

 

세례받는다고 하는 것의 의미

 

이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언약과 하나님의 가족에로 등록되고 받아들여지고, 수용되는 것이요, 하나님의 자녀의 유업을 받는 것이다. 즉 세례는 이 세상에 있을 동안에 하나님의 이름을 좇아 부름을 받아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요, 죄의 오염에서 깨끗함을 받는 것이요,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받아 그 결과 허물없는 새 삶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례란 하나님께서 죽을 인류에게 보여주신 엄청난 은혜를 생각나게 하고 이를 새롭게 재현시키는 것이다.

 

우리 인생들은 날 때부터 죄로 오염되어 있고 진노의 자녀들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비가 넘치시기 때문에 그의 아들의 피로써 우리의 죄들로부터 우리를 그냥 깨끗게 하시고, 이 아들 안에서 우리를 양자되게 하시고, 거룩한 언약에 의하여 우리를 자신에게 연합시키시고 우리를 각양 은혜로 풍요케 하심으로 그 결과 우리는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세례에 의하여 확인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에 의하여 내면적으로 중생하고 순결해지고 거듭나게 되고 외면적으로 물로써 엄청난 선물을 확인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물은 엄청난 은혜를 대표하고 사실상 우리 눈앞에 이 은혜를 보도록 제시한다.

 

우리는 물로써 세례를 받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이는 물로써 씻음을 받고 뿌림을 받는다. 그도 그럴 것이 물은 더러운 것을 씻어 내고 뜨겁고 피곤한 육신을 시원케 하고 소생시키기 때문이다. 우리의 영혼을 위해서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인데, 이는 보여지지 않는 방식으로 혹은 영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세례의 의무

 

그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이 세례의 상징을 통해서 모든 낯선 종교들과 모든 불신자들로부터 우리를 구별하시어 자신의 소유로 우리를 구별하셨다. 따라서 우리는 세례시에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고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복종시키고, 육신을 죽이고, 새로운 삶을 영위해야 할 의무를 명령받는다. 이런 까닭에 우리는 평생토록 세상과 사탄과 우리 자신의 육신에 대항하여 싸우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거룩한 병사들로 등록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세례에 의하여 교회의 한몸에 참여케 되므로 우리는 교회의 모든 회원과 더불어 동일한 종교와 상호 봉사를 아름답게 일치시켜 나갈 수 있다.

 

세례의 형식

 

가장 완전한 세례의 형식이란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받은 형식이라고 우리는 믿는다. 따라서 우리는 이 완전한 세례의 형식에 그 후에 첨가된 그 무엇도 우리는 인정하지 않는다. 귀신 쫓아내는 일, 타오르는 등불의 사용, 기름과 소금, 그리고 침의 사용, 복잡한 의식으로 일년에 두 번씩 베풀어지는 세례식 같은 것들이 바로 이런 종류에 속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교회의 한 세례가 하나님의 최초의 제정에 의하여 성별되었고, 오늘날에도 말씀에 의하여 성별되고 저 하나님의 첫 번째 축복에 의하여 효과를 나타내는 것이다.

 

세례 베푸는 교역자

 

교회 안에서 세례가 베풀어질 때 여자들과 산파들에 의해서 베풀어져서는 안 된다고 우리는 가르친다. 바울이 여자들에게는 교회의 의무를 맡기지 말라고 했는데, 바로 세례는 이 의무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재세례파 이단

 

우리는 재세례파를 정죄한다. 왜냐하면 이들은 성도들의 유아들에게 세례 베푸는 것을 부인하기 때문이다. 복음서의 가르침에 의한즉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어린이들의 것이요, 이 어린이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언약 안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언약의 표징을 이들에게 주어서는 안 될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께 속한 자요, 하나님의 교회 안에 있는 자가 거룩한 세례에 의해서 하나님과 교회와 관계 맺기 시작하는 것이 왜 안 될 일인가? 우리는 재세례파의 다른 교리들도 정죄한다. 그것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재세례파 사람들이 아니요, 이들과 전혀 공통점을 갖고 있지 않다.

 

 

 

21장. 주님의 거룩한 성찬

 

주님의 성만찬

 

주님의 만찬은 보통 만찬(주님의 식탁)이라고 불리어진다. 왜냐하면 주님이 그의 최후의 저녁식사 때에 이것을 제정하셨고, 아직도 이것은 그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요, 성도들이 이 만찬을 통하여 영적으로 먹고 마시기 때문이다.

 

성만찬의 창시자와 봉헌자

 

주님의 만찬의 창시자는 천사나 사람이 아니라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신 하나님의 아들 자신인바 이분이 최초로 이 만찬을 교회를 위하여 구별하셨다. 동일한 구별 혹은 축복이 주님께서 제정하신 만찬 이외에 그 어떤 것도 베풀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 오늘날까지 유효하다. 즉 오늘날 성만찬을 베푸는 사람들은 이 성만찬에서 주님의 만찬의 말씀을 반복하면서 그 무엇보다도 한 그리스도를 참 믿음으로 바라보고 성도들은 교회의 교역자들의 사역을 통하여 받되 사실상 주님의 손으로부터 직접 받는 것처럼 받는다.

 

하나님의 은혜의 기념

 

주님께서는 이 거룩한 의식에 의하여 그가 죽을 인류에게 보여 주신 엄청난 은혜를 항상 다시 회상시키시기를 원하신다. 즉, 주님께서 그의 몸을 내어주시고 피를 흘리시므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고, 영원한 죽음과 악마의 권세에서 우리를 구속하셨고, 지금은 그의 살로 우리를 먹이시고 그의 피를 우리에게 주사 마시게 하시는바 우리는 참 믿음으로 이를 받아 영생을 위한 양육을 받는 것이다. 주님의 성만찬이 베풀어질 때마다 이 엄청난 은혜는 항상 다시 새롭게 나타난다. 왜냐하면 주님은 “나를 기념하여 이것을 행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이 성만찬은 또한 주님의 참 몸이 우리를 위하여 찢겨졌고 그의 참 피가 우리의 죄의 속죄를 위하여 흘려졌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확인시키는 것이다. 즉 우리의 신앙이 흔들리지 않도록 하신다.

 

표징과 표징의 대상

 

이것은 교역자들을 통해 이 성만찬에 의하여 가시적으로 표현된다. 사실상 이것은 우리의 눈에 보이도록 우리 앞에 제시되나 성령에 의하여 우리의 영혼 속에서 불가시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교역자가 떡을 외적으로 제공하나 “받아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라”, “떼어서 나우어 먹으라. 그것을 마시라. 한 사람도 빠짐없이. 이것은 내 피니라”고 하는 주님의 말씀이 들린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주님의 교역자들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을 받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들은 주님의 떡을 먹는 것이요, 주님의 잔을 마시는 것이다. 동시에 이들은 성령을 통한 그리스도의 사역에 의하여 주님의 살과 피를 내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요, 이 양육에 의하여 영생에 이르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살과 피는 영생에 이르는 참 음식이요, 그리스도 자신이 이 성만찬의 중심 내용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무엇도 이 그리스도를 대신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어떻게 신자들의 음식과 음료가 되며 신자들에 의하여 영생에 이르는 음식과 음료로 받아들여지는지를 더 분명하게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를 더 언급하고자 한다. 먹는다고 하는 것은 여러 의미를 갖는다. 첫째로 음식을 입에 넣고 이로 씹어서 위 속으로 삼켜들이는 물질적 먹음이 있다. 언젠가 과거에 가버나움 사람들 중에는 주님의 살을 이런 식으로 먹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는 요한복음6장에 어긋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살을 물질적으로 먹으면 그것은 추하고 야만스러운 행동이기에 그것은 결코 위를 위한 음식이 아니다. 모든 사람들은 이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에고 베렝가리우스’(봉헌에 관하여/의 2부)라고 하는 교황의 칙령에 들어 있는 법조항을 인정하지 않는다. 옛 성도들이든 오늘 우리들이든 간에 그리스도의 몸을 육체적인 입으로 물질적으로 먹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

 

 

주님을 영적으로 먹는다는 것

 

다음으로는 그리스도의 몸을 영적으로 먹는다고 하는 먹음도 있다. 그런데 이것은 음식 자체가 영으로 변화하는 그런 영적 먹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주님의 몸과 피는 그것의 본질과 특성에 있어서 그대로 남아 있으되, 성령에 의하여 물질적인 방법으로가 아니라 영적인 방법으로 우리에게 전달되는바, 여기에서 성령은 십자가상에서 희생된 주님의 몸과 피의 제사에 의하여 우리를 위하여 준비해 주신 그러한 은혜를 우리에게 적용하시고 베풀어 주신다. 이것은 다름 아닌 죄의 속죄요, 해방이요, 영생인데, 이것의 결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살게 되고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게 하심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한 영적 음식과 음료, 곧 우리의 생명이 되게 하신다.

 

우리의 음식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생명을 지탱시키신다.

 

물질적인 음식과 음료가 우리의 몸에 생기를 공급하고 힘을 주고 계속 살게 하는 것처럼 우리을 위해서 찢기신 그리스도의 살과 우리를 위해서 흘려진 그의 피는 우리의 영혼에 생기를 공급하고 힘을 주고 계속 살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육체적으로 먹고 마실 때가 아니라, 성령을 통해서 영적으로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참여할 때 일어나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을 들어 보자. “(요6:51)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요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들임

 

우리가 음식을 먹을 때 그것이 우리의 체내에 들어와 작용하고 어떤 효력을 일으키는 것처럼 이 음식이 우리 몸 밖에 있는 한 그것은 아무 소용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들여 그분이 우리의 것이 되게 해야 하고, 그분이 우리 안에 우리가 그분 안에 살아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요6:3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6: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요6:57)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영적음식

 

이런한 모든 것을 미루어 볼 때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의미하는 영적음식이란 결코 상상적인 음식이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주어진 주님의 참 몸이라는(실제적인 몸)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성도들은 이 몸을 신앙에 의하여 영적으로 받는다. 결코 육체적으로 받는 것이 아니다. 이 문제에 관하여 우리는 구주 자신의 가르침을 따른다. 즉, 주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요한복음 6장에서 가르치신 가르침이다.

 

구원을 위해서 꼭 필요한 먹음

 

이처럼 주님의 살을 먹고 그의 피를 마시는 일은 구원을 위해서 꼭 필요하다. 이 일 없이는 아무도 구원을 얻을 수 없다. 그러나 이 영적 먹음과 마심은 주님의 성만찬을 떠나서도 일어난다. 즉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을 때마다 이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왜 너희들은 너희의 이와 위를 위하여 준비하느냐? 오히려 믿어라! 그러면 너희는 이미 먹은 것이다”라고 하는 어거스틴의 말이 여기에 적용된다.

 

주님을 성례전으로 먹는다는 것

 

고차원적인(신비한) 영적 먹음 이외에 주님의 몸을 성례전적으로 먹는다는 것이 있다. 성도는 이 성례전적 먹음에 의하여 영적으로, 그리고 내면적으로 주님의 실제적인 몸과 피에 참여할 뿐만 아니라 주님의 식탁으로 나옴으로 주님의 몸과 피의 가시적 성례전을 외면적으로 받는 것이다. 신자가 믿었을 때 그는 이미 생명을 주는 음식을 받았고 지금 그것을 누리고 있다. 그러나 그가 성만찬을 받을 때 아무것도 받지 않은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계속해서 주님의 몸과 피에 참여하기 때문이요, 그의 신앙이 불붙으며 점점 더 성장하고 영적 음식에 의하여 생기를 얻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신앙은 계속해서 자라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만찬을 참 믿음으로 외적으로 받는 사람은 표징을 받을 뿐만 아니라 이 표징이 가리키는 대상 혹은 내용 자체를(그리스도) 받는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그는 주님의 제정과 계명에 순종하고 자신의 구속과 인류의 구속에 대하여 기쁜 마음으로 감사드리고, 주님의 죽으심을 신실하게 기억하고, 그가 한 지체인 교회 앞에서 증거하는 것이다. 주님의 몸이 주어졌고 그의 피가 흘려진 것이 단순히 모든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라 특히 각각의 수찬 자격자를 위한 것이라고 하는 확신이 성찬을 받는 사람들에게 주어진다. 이 수찬 자격자에게 이 성찬은 영생에 이르는 음식이요, 음료이다.

 

불신자들이 성찬을 받을 때 자신들의 심판을 자초하는 것이다.

 

그러나 믿음이 없이 주님의 식탁에 나오는 사람은 떡과 포도주에는 참여하되 본질적인 생명과 구원의 근원인 성찬의 본질은 받지 못한다. 이런 사람들은 주님의 식탁에서 합당치 못하게 먹고 마시는 것이다. 누구든지 주님의 떡과 잔을 합당치 않게 취하는 사람들은 주님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를 범하는 것이요, 심판을 먹고 마시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이 참 신앙으로 접근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의 죽음을 모독하는 것이요, 따라서 자신들에 대한 저주를 먹고 마시는 것이 된다.

 

성만찬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임재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몸과 피를 떡과 포도주에 긴밀히 연결시킨 나머지 떡 자체가 성례전적 방법 이외의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몸 자체라고 하거나, 그리스도의 몸이 물질적으로 떡 속에 숨겨져 있으므로 떡의 형태로 그것이 예배되어야 한다거나 이 성찬의 표징을 받는 사람은 누구나 그 대상 혹은 내용을 받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몸은 하늘에 하나님 아버지 우편에 계시므로 우리의 마음은 빵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저 높은 하늘을 향하여 올리워져야 하고 주님은 결코 떡 속에 갇혀진 체 예배되어질 수 없다. 그러나 교회가 성만찬을 베풀 때 주님께서는 그의 교회로부터 부재하는(계시지 않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있는 태양은 우리를 떠나 있으나 우리들 속에 효과적으로 임재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의의 태양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실제적으로 임재하고 계신 것인다. 즉 그리스도는 그의 몸으로는 우리를 떠나 하늘에 계시지만 그의 생명 주시는 역사에 의하여 물질적으로가 아니라 영적으로 우리에게 임재하신다. 주님은 그의 최후의 만찬에서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 없는 성만찬을 받는 것이 아니요, 동시에 교부시대 사람들은 누구나 알고 있었던 피흘림이 없는 신비적 성만찬을 받는 것이다.

 

성만찬의 다른 목적들

 

그 뿐만 아니라 우리는 성만찬에 참여할 때마다 우리가 누구의 지체인가를 생각하고, 다른 지체들과 더불어 한마음을 품고 거룩한 삶을 영위하고 사악함과 이상한 종교에 의하여 우리 자신을 더럽히지 말고, 우리의 생이 끝날 때까지 참 믿음을 견지하면서 거룩한 삶을 탁월하게 살려고 애써야 할 것이다.

 

성만찬을 위한 준비

 

우리들이 성만찬에 동참하기를 원할 때에는 사도의 명령을 따라 다음과 같은 측면들에 관하여 자신들을 검토하는 일이 적합하다. 즉, 우리들 자신이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고자 오셨고, 이 죄인들을 불러 회개케 하시기 위하여 오셨음을 믿고 있는지, 또는 우리 각자는 자신이 그리스도에 의하여 해방 받아 구원받은 사람들의 수에 속해 있는지, 또는 각자는 자신의 악한 삶을 변경시키고 거룩한 삶을 영위하고 주님의 도움으로 참된 종교 안에서 계속 견디어 나가고 형제들과 조화를 이루고 하나님의 해방에 대하여 합당한 감사를 드리기로 결심하였는지를 살펴야 한다.

 

떡과 포도주 모두를 사용하는 성만찬

 

우리는 성만찬의 의식과 방법과 형식이 주님께서 처음 제정하셨고 사도들의 가르침이 말하는 바에 가장 가까운바 단순하고 가장 탁월한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성만찬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 경건하게 기도하는 것, 주님 자신의 행동, 그리고 이 행동의 반복, 주님의 몸을 먹는 것과, 그의 피를 마시는 것, 주님의 죽음을 적합하게 기억하는 일, 신실하게 감사를 올리는 일, 거룩한 사귐으로 교회의 몸과 일치하는 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자들에게 주님의 잔을 주지 않는 것을 거부한다. 이는 주님의 제정을 어기는 일이다. 주님은 “이것을 다 마시라”고 하셨는데 떡에 대하여는 이렇게 분명히 말씀하시지는 않았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그것을 용납하든가 말든가는 논하지 말고 교부시대에 어떤 종류의 성찬이 있었는지 논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것만은 분명히 말해 두자. 즉, 현재 로마 카톨릭교회가 사용하고 있는 미사는 여러 가지 타당한 이유 때문에 우리 교회에서 거부하고 있다. 건전한 행동을 공허한 구경거리로 만들고 공로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만들고 어떤 보수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만드는 것을 우리는 결코 인정할 수 없다. 사제가 미사에서 주님의 참 몸을 만들어 그것을 산 자들과 죽은 자들의 속죄를 위하여, 그리고 이어서 하늘에 있는 성도들의 영예와 존경과 기억을 위하여 제물로 바친다고 하는데 우리는 이것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다.

 

 

 

22장. 교회의 집회에 관하여

 

예배를 위한 모임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나?

 

누구나가 집에서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을 수 있고 피차간에 교훈을 통해서 참된 종교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 그러나 교회에 모이는 일이나 종교적 집회가 꼭 필요한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 적절히 설교되어야 하고, 기도와 간구가 공적으로 이루어져야 하고, 성례전이 옳게 베풀어져야 하고, 가난한 자들과 교회의 경비를 위해서 헌금이 모아져야 하고, 사회적 사귐이 일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사도시대의 초대교회에서는 그와 같은 모임이 모든 경건한 사람들에 의하여 부단히 회집되었다는 것이 확실하다.

 

예배를 위한 모임들을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된다.

 

그와 같은 모임들을 무시해 버리고 그와 같은 모임을 멀리하는 사람은 참 종교를 경멸하는 사람들이다. 목사들과 신앙이 있는 관원들은 이들을 권고하여 그와 같은 모임에 참석하도록 권고해야 할 것이다.

 

모임들은 공적이다.

 

교회의 모임들은 비밀리에 회집되거나 은밀히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의 원수들과 교회의 원수들이 박해하는 이유로 교회의 모임들이 공적이 되지 못한 것을 예외로 한다면 교회의 모임들은 항상 공개적이 되어야 하고 어떤 사람들이라도 출석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로마제국의 황제의 폭군정치 치하에서 초대교회의 집회가 어떻게 비밀한 장소에서 일어났는가를 알고 있다.

 

품위 있는 집회장소

 

뿐만 아니라 성도들이 모이는 장소는 품위가 있어야 하고 모든 점에서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적합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넓은 건물이나 장소를 택하되 교회를 위해서 적합지 않은 것은 무엇이든지 제거해야 할 것이다. 교회의 모든 내부장치는 단정하고 품위 있게 배열되어야 하고 꼭 필요한 것을 적합한 장소에 놓아야 한다. 예배와 교회의 꼭 필요한 기능을 위해서 요구되는 것이 꼭 있게 해야 한다.

 

교회의 모임들에서 우리는 정숙해야 하고 겸손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손으로 만들어진 건물 안에 거하시지 아니하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믿는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예배를 위해서 헌납된 장소들이 속된 것이 아니요, 거룩한 것으로 인정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 때문이요, 그 장소들이 거룩하게 사용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장소 안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현존과 그의 거룩한 천사들의 현존과 더불어 거룩한 장소에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면서 점잖고 정숙하게 행동해야 할 것이다.

 

교회당 본당이 갖춰야 할 참된 장식들

 

따라서 우리는 교회의 본당과 그리스도인들의 기도하는 장소로부터 모든 사치스러운 치장들과 모든 교만과 기독교적 겸손과 훈련과 절제에 적합지 않은 것을 제거해야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교회의 참된 장식은 상아나 금.은 보석으로 꾸며지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의 검소함과 경건함과 덕망으로 꾸며지는 것이다. 교회의 모든 일들은 적절하고 정중하게, 그리고 질서 있게 처리되어야 하며 모든 일들이 건설적인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일상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예배

 

그러므로 예배를 위한 집회에서 우리는 이상한 방언들을 하게 해서는 안 된다. 예배시의 모든 일은 이 모임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수행되어야 한다.

 

 

 

23장. 교회의 기도와 찬송과 교회 법적으로 정해진 시간에 관하여

 

기도

 

성도들의 모든 기도는 신앙과 사랑으로부터 오직 하나님께만 드려져야 하는데 오직 그리스도를 중보로 해야 한다. 즉 주님이 제사장직을 갖는 것이 참 종교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늘에 있는 성자(聖者)에 대한 기도나 이들을 중보자로 생각하는 것을 금한다. 우리는 국가의 공직자들과 왕들, 그리고 권위의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과 교회의 교역자들과 교회들의 모든 필요를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을 때, 특히 교회의 어려운 문제들을 위하여 우리는 사적으로나 공적으로 끊임없이 기도해야 할 것이다.

 

자유로운 기도

 

그 뿐만 아니라 우리는 억지로 기도하거나 보상을 위해서 기도할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기도해야 할 것이다. 어느 한 장소에서만 기도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미신적이라서 합당치 않다. 마치 교회의 본당만이 기도의 처소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런데 공중기도의 경우, 그것의 형식과 시간에 관하여 모든 교회들에 있어서 꼭 같을 필요는 없다. 각 교회는 이에 관하여 자유롭다.

 

공중기도에서 사용되어야 할 방법

 

다른 일들에 있어서도 그렇지만 공중기도에 있어서도 그것이 쓸데없이 길어지거나 지루해지지 않도록 어떤 표준이 있어야 한다. 예배를 위한 집회의 보다 큰 부분을 우리는 복음 설교를 위해서 할애해야 하고, 누가 기도를 너무 길게 함으로 설교말씀을 들을 즈음에는 지루해서 회중을 떠나 설교말씀과 관계가 없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우리는 유의해야 한다. 이처럼 기도가 길어질 경우, 짧은 설교말씀도 길고 지루한 설교말씀처럼 들린다. 이런 이유에서 설교자는 일정한 표준을 가져야 한다.

 

찬송

 

예배를 위한 집회에서 찬송을 부를 때에도 공중기도 때나 마찬가지로 절제가 필요하다. 로마 카톨릭이 사용하는 그레고리안 찬트에는 여러 가지 어리석은 것들이 들어 있다. 이 때문에 많은 개신교들이 이것을 거절하는데, 이것은 옳은 일이다. 어떤 교회들이 참되고 정당한 설교는 갖고 있으나 찬송은 갖고 있지 않을 때, 우리는 이러한 교회들을 정죄 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모든 교회들이 찬송할 수 있는 조건을 구비하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찬송의 역사는 교부들의 증거에 의하면 찬송의 관습이 동방 교회에서 먼저 행했고, 서방 교회에서는 후에 행한 것을 알 수 있다.

 

교회법에 의한 시간

 

교부시대에는 교회법에 의한 기도 시간이 없었다. 하루 중 일정한 시간들을 정해 놓고 기도한다든지, 교황주의자들처럼 기도를 노래로 올리거나 암송으로 올리는 일이 교부시대에는 없었다. 우리는 교황주의자들의 성무일과서(聖務日課書)나 여러 다른 문서들을 통해서 이와 같은 사실을 증명할 수 있다. 이들이 지닌 모순들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교회가 그와 같은 것을 제거시킨 것은 옳은 일이다. 교회는 이러한 것들 대신에 하나님의 전교회에 유익한 것들로 대치시켰다.

 

 

 

24장. 거룩한 날들과 금식들과 음식들의 선택에 관하여

 

예배를 위해서 꼭 필요한 시간

 

종교는 시간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러나 종교를 배양시키고 종교생활을 영위할 수 있으려면 시간의 적절한 배열과 조정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각 교회는 공중기도와 복음의 설교와 성례전의 집례를 위해서 적당한 시간을 선택한다. 아무도 교회가 정한 시간들을 마음대로 변경할 수 없다. 종교생활을 위해서 시간과 힘을 할애하지 못할 경우, 우리는 틀림없이 종교로부터 거리가 멀어지고 자신의 일에 몰두하고 말 것이다.

 

주일

 

고대 교회는 교회의 집회를 위하여 주 중 일정한 시간들을 정해 놓았을 뿐만 아니라 사도시대 이래 주일이 교회의 집회일로 확정되었으니, 이 주일은 거룩한 안식을 위한 것으로 예배와 사랑을 위하여 오늘날까지 옳게 보존된 교회의 실천적 관습이다.

 

미신

 

이에 관련하여 우리는 유대인들의 종교적 관습과 미신을 인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느 한 날이 다른 날보다 더 거룩하다고 믿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생각에는 나머지 날들도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날들이기 때문이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가 지키는 것은 유대교의 안식일이 아니라 주일인 것이다.

 

그리스도와 성자(聖者)들의 절기들

 

만약 교회들이 기독교적 자유 안에서 주님의 탄생과 할례와 고난과 부활과 그 승천과 그의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 주신 일을 기억함으로 축하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인정하고도 남음이 있다. 즉 교리의 바른 내용을 이해하고 깨닫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지만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절기로 표현하거나 또는 사람들과 성자들을 숭상하기 위한 절기들은 인정하지 않는다. 거룩한 날들은 십계명의 첫 번째 돌판에 관계된 것으로 오직 하나님을 위한 날들인 것이다. 결국 절기와 성자들을 위해서 제정된 날들을 우리는 이미 없애버렸는바 이날들은 모순투성이요, 아무 쓸데없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도저히 용인할 수 없다. 한편 우리는 적당한 시간과 장소에서 설교를 통하여 성자(선조들)의 회상을 사람들에게 권하는 것이 유익하고, 이 성자들의 모범된 삶을 모든 사람에게 권하는 것이 좋다고 고백한다.

 

금식

 

그리스도의 교회는 포식과 술취함과 모든 종류의 탐욕과 무절제를 심하게 정죄하느니만큼 기독교적 금식을 우리 믿는 자들에게 강하게 권유한다. 그도 그럴 것이 금식이란 경건한 신앙인들의 금욕과 절제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요, 우리 육신의 돌봄과 징벌로서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꼭 필요한 일이다.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지며 육체는 그 연료를 빼앗기므로 더 자발적이고도 쉽게 성령께 순종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일에 관심하지 않는 사람들은 금식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은 하루에 한 번 정도 위장을 채우고 일정한 시간에 음식을 멀리하는 것으로 금식한다고 생각하고 이로써 하나님을 기쁘게 하며 선한 일을 성취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믿는 성도들은 금식함으로 기도를 더 잘 할 수 있고 덕목을 잘 실천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언서들에서 우리가 읽을 수 있듯이 음식은 멀리하나 악행을 멀리하지 않았던 유대인들의 금식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했음을 기억해야 한다.

 

공적인 금식과 개인적인 금식

 

금식에는 공적인 것이 있고 사적인 것이 있다. 교회가 박해와 환난과 역경 속에 있었던 고대 기독교 역사에는 공적인 금식들이 있었다. 이들은 함께 모여 새벽부터 저녁까지 금시하되 이 시간동안에 기도에 몰두하며, 하나님을 예배하고 회개에 힘쓴다. 이것은 애통함이나 다름없다. 이에 관하여 예언자들, 특히 요엘(2장)이 자주 언급하곤 하였다. 이와 같은 금식은 교회가 곤궁에 처할 경우, 오늘날에도 행해져야 한다. 한편 우리 각자는 성령으로부터 거리가 멀어졌다고 느껴질 때마다 개인적인 금식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렇게 할 때 우리 각자는 육체로부터 그 연료를 제거시키기 때문이다.

 

금식의 특징들

 

모든 금식은 자유롭고 자원하는 마음에서 행해져야 하고 겸허한 마음으로 행해져야 한다. 사람들의 칭찬과 호의를 얻기 위해서 금식이 행해져서는 안 되고, 금식함으로 의를 세우려는 의도는 더더욱 금물이다. 육체로부터 연료를 제거함으로 보다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고 기도에 전념하려는 것이 금식의 목적이어야 한다.

 

사순절(四旬節)

 

사순절 때의 금식에 관하여는 고대 교부들의 글들이 증언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금식을 성도들에게 강요할 필요가 없고 그럴 수도 없다. 이미 초기에도 변질된 금식의 여러 형태와 관습이 있었다. 이 때문에 초기 교부인 이레니우스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어떤 이는 하루만 금식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어떤 이들은 이틀을, 어떤 이는 그 이상 혹은 40일간을 금식하라고 말한다. 금식에 대한 이러한 다양성은 우리 시대에 생긴 것이 아니라 벌써 우리 시대 이전에 생겼다. 내(이레니우스) 추측으로는 이것이(사순절 금식) 사도시대로부터 전승된 것(금식)을 무시하고 또한 소홀히 여기거나 무식함 때문에 다른 습관에 빠진 사람들에 의해서 시작되었다”<(단편집) 3, Ⅰ, 824이하>.

 

음식의 선택

 

음식의 선택에 관하여 알아보자. 육체의 욕정을 불러일으키거나 육체를 무모하게 하거나 육체를 즐겁게 하는 음식은 무엇이나 삼가야 한다(술, 담배, 마약 등). 그것이 고기든지 양념이든지 훌륭한 포도주이든지 간에 우리는 삼가 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을 사용할 수 있고 인간의 유익을 위하여 이용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이 좋은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절제하는 가운데에 이 모든 것을 사용할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도 바울 역시 “(딛1:15)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저희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고 하며, “(고전10:25)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고도 한다.

 

또한 사도는 고기를 먹지 말라고 가르치는 사람들의 가르침을 가리켜 ‘악마의 가르침’이라 하였다. 왜냐하면 “(딤전4:3)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할터이나 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딤전4:4)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라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사도는 골로새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지나친 금욕으로 거룩하다는 평을 얻으려는 사람들을 꾸짖고 있다.

 

이단들

 

그러므로 우리는 타티안주의자들과 엔크라티스주의자들, 유스타티우스주의자들을 모두 정죄한다. 강그리아 종교회의가 열린 것은 이들의 가르침을 반대하기 위해서 였다.

 

 

 

25장. 세례받을 사람의 교육과 환자의 위로와 심방에 관하여

 

청소년들을 경건으로 교육시켜야 한다.

 

청소년교육은 유아교육에 이르기까지 최대의 관심을 쏟아야 한다고 주님은 그의 옛 백성에게 명령하셨다. 뿐만 아니라 주님은 구약에서 청소년 교육을 교육해야 하고 성례전의 의미를 설명해야 한다고 명령하셨다. 복음서와 사도들의 글에 보아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새 백성의 청소년에 대해서 큰 관심을 갖고 계신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막10:14) 예수께서 보시고 분히 여겨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고 하는 말씀의 증언을 통해 알 수 있다.

 

교회의 목사들이 현명하게 목회를 하려면 청소년교육을 일찍이 시작해야 한다. 즉, 목사들은 십계명, 사도신경, 주기도문, 성례전에 대한 교리 등을 해석해 줌으로 신앙의 기초를 마련해 주어야 하고 기독교 종교의 기본을 가르쳐야 하는 것이다. 교회는 믿는 성도들의 자녀들을 교육하는 일에 신실함과 근면함을 보여야 하고 자녀교육을 열망할 뿐만 아니라 기뻐해야 할 것이다.

 

병든자의 심방

 

사람이 허약함에 시달리고 병들고 영과 육의 병으로 쇠약해질 때 극심한 시험에 떨어진다. 그러므로 교회의 목사들은 교인들이 허약해지고 병들어 누어 있는 상태에 있기 전에 그의 양떼들의 건강을 잘 돌보는 것이 마땅하다. 따라서 사정이 허락하는 한 목사들은 환자들을 속히 심방해야 하고 적절한 때에 환자의 심방을 요구받아야 한다. 목사들은 환자들이 참된 신앙을 계속 유지하도록 위로해야 하고 확신시켜야 한다.

 

그리고 사탄의 위험한 흉계에 넘어가지 못하게 해야 한다. 목사들은 필요할 경우, 자신의 집에서도 환자를 위해서 기도해야 하고 교회의 공적인 집회에서도 환자를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목사들은 중환자의 경우, 이 세상을 떠날 때 기쁨으로 떠나게 해야 한다. 우리는 이미 교황주의자들이 환자를 방문하여 베푸는 종유성사(終油聖事)를 인정하지 않는다. 성경이 이를 결코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26장. 믿는 자의 매장과 죽은 자들에 대한 배려와 연옥과 영들의 현현에 대하여

 

시신의 매장

 

성도의 몸은 성령의 전이다. 그래서 우리는 성도의 시신이 최후의 날에 부활할 것을 믿는다. 성경의 명령에 의한즉 성도의 시신들은 존중하는 마음으로 땅에 묻되 미신적으로 해서는 안 된다. 즉 미망인과 이미 잠든 성도들을 우리는 존중히 여겨야 하고, 유가족들인 미망인과 고아를 위해서 가정적인 모든 경건의 의무들을 보여 주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물론 죽은 자들을 위한 특별한 배려를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은 자들의 시신을 무시하거나 부주의하고, 경멸적으로 그것을 땅 속에 묻어 버릴 뿐만 아니라 죽은 자들에 관하여 좋은 말이라고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그들의 유족들에 대하여 조금도 관심하지 않는 냉소학파(the Cynics)를 결코 인정하지 않는다.

 

죽은 자들에 대한 관심

 

죽은 자들에 대하여 지나치게, 그리고 터무니없이 관심을 쏟는 사람들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은 이방 사람들처럼 죽은 자를 위하여 슬퍼하고 통곡하며, 죽은 자들을 위하여 미사(예배)를 올리고 삯을 받고 기도문을 중얼거림으로 사랑하는 죽은 영혼들을 연옥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몸을 떠난 영혼의 상태

 

우리는 성도들이 육체적인 죽음 직후에 직접 그리스도에게로 간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산 자들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찬양과 기도와 예배를 올릴 필요가 없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불신자들은 직접 지옥으로 던지움을 받아 살아 있는 사람들이 이들을 위하여 어떠한 예배를 올려도 이들은 이 지옥으로부터 나올 수 없다.

 

연옥

 

연옥에 관한 로마 카톨릭의 교리는 기독교 신앙에 위배된다. 즉, ‘죄의 용서와 영생을 내가 믿습니다’와 그리스도를 통한 완전한 씻음과 “(요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3:10)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라는 말씀에 위배된다.

 

영들의 나타남

 

죽은 사람들의 영 혹은 정신이 살아 있는 사람에게 나타나서 어떤 의무 수행을 요구함으로 이 의무수행에 의하여 자신들이 해방될 수 있다는 것은 웃기는 일이요, 악마의 속임수와 술책에 불과한 것이다. 악마는 자신을 빛의 천사로 둔갑시킴으로 참 신앙을 뒤집어엎거나 회의로 바꾸어 놓으려고 애쓰고 있다. 구약에서 주님은 죽은 자들로부터 진리를 찾지 말라고 하셨고, 죽은 자들의 영과 어떤 교제도 해서는 안된다고 하셨다. 복음서의 진리가 선포하듯이 지옥에 있는 부자는 결코 그이 형제에게로 갈 수 없다.

 

 

 

27장. 의식들과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들에 관하여

 

의식

 

한때 구약 백성에게는 의식법이 주어졌었다. 이는 율법하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일종의 교육으로서 몽학선생 밑에서의 상황과 같았다. 그러나 구원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에 이 법은 폐지되었다. 우리 믿는 자들은 더 이상 이 율법 밑에 있는 것이 아니다.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 이 의식법을 계속 사용하기를 원하지 않으며 이것을 회복시키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이들은 이 의식법으로 교회를 짐스럽게 하지 않기를 원한다. 그러므로 만약에 우리가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 고대 교회의 관습 중 유대교적 의식을 증가시키려고 한다면 우리는 유대교를 교회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여러 가지 의식으로 제약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우리는 이 의견을 결코 인정할 수 없다.

 

사도들이 신자들에게 의식법을 강요하지 않는데 도대체 바른 마음을 지닌 사람이라면 누가 인간들에 의하여 고안된 것들을 그들에게 강요할 수 있겠는가? 의식의 양이 교회 안에서도 증가하면 할수록 교회는 기독교적 자유로부터 이탈되는 것은 물론, 교회가 믿음으로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찾아야 할 진리들을 의식에서 찾으려고 하는 한 그리스도와 이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에서 이탈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지 않는 몇 개의 간단하고 단순한 의식만으로 충분하다.

 

의식의 다양성

 

교회들이 여러 가지 의식을 사용한다고 해서 이런 이유 때문에 논란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오늘날 우리는 성만찬과 다른 일에 있어서 의식을 다르게 하고 있으나 교리와 신앙에 있어서는 결코 의견을 달리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의식의 상이성으로 말미암아 우리 교회들 상호간의 일치와 사귐이 결코 파괴되지 않는다. 교회는 지금까지 의식 사용에 있어서 자유를 누려왔다. 교회는 이것을 무관심거리로 여겨 왔다. 오늘의 우리도 꼭 같이 생각한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무관심거리가 아닌 것을 무관심거리로 여기지 않도록 사람들에게 충고한다. 즉 예배 대신에 미사를 드린다든가 성상(聖像)을 사용하는 것은 무관심거리가 아니다. 그것들은 큰 잘못이다. 그러나 “선하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은 것은 자유에 맡겨진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그것을 행하든 행치 않든 우리는 의롭지도 않고 불의하지도 않은 것이다”라고 제롬은 어거스틴에게 썼다. 그러므로 자유에 맡겨진 것을 신앙고백에 억지로 연결시킬 경우 우리는 자유를 상실하게 된다. 바울이 말한 대로 사람이 우상에게 제물로 받쳤던 고기를 먹을 경우, 누가 이 사실을 알려 주지 않았다면 괜찮을 것이다. 그러나 누가 그것이 우상에게 드려진 제물이라는 사실을 알렸는데도 그것을 먹으면 그것은 합당치 못하다. 그 이유는 그렇게 고기를 먹음으로써 그는 우상숭배를 인정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28장. 교회의 소유물에 관하여

 

교회의 소유물과 그것의 적절한 사용

 

그리스도의 교회는 왕들의 희사와 성도들의 헌금과 헌물을 통해서 재산을 소유하고 있다. 왜냐하면 교회는 그와 같은 자원을 필요로 하며 옛날부터 교회 유지를 위해서 꼭 필요한 자원을 소유하고 있다. 교회의 재산은 모든 예배와 다른 의식, 그리고 교회 건물을 유지하며 학교와 교회적인 집회에서 가르치는 일을 위하여 사용되는 것이 옳으며, 나아가서 선생과 학자와 목사를 지원하고, 특히 가난한 자를 돕는 일에 사용되어야 하고 꼭 필요한 다른 일들을 위하여 사용되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지혜로운 자로서 집안 일들의 경영관리를 잘할 줄 아는 사람들을 선택하여 교회의 재산을 적절히 경영, 관리하게 해야 한다.

 

교회 재산의 남용

 

만약 어떤 개인들의 불상사나 파렴치한 행위나 무지나 탐욕에 의하여 교회의 재산이 남용될 경우, 경건하고 지혜있는 사람들은 거룩한 목적을 위하여 이를 원상대로 회복시켜야 한다. 재산의 남용이란 끔찍한 신성모독이기 때문에 우리는 결코 이러한 짓을 시도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와 예배와 도덕에 있어서 부패한 학교나 기타 기관들은 마땅히 개혁되어야 하고, 가난한 사람들의 구제는 의무적이고 지혜롭게, 그리고 신실한 마음으로 추진되어야 한다.

 

 

 

29장. 독신과 결혼과 가정문제의 경영관리

 

독신자

 

하늘로부터 독신의 은사를 받았으므로 마음과 온 영혼이 청결하고 절제하고 정욕으로 불타오르지 않는 사람은 은사를 부여받았다고 느끼는 한 그 하나님의 부르심 안에서 주님을 섬기게 해야 한다. 이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보다 높다고 생각하지 말고 오히려 단순함과 겸손함으로 끊임없이 주님을 섬기게 해야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러한 사람들이야말로 사사로운 가사에 의해서 마음이 산만하게 되는 사람들보다 하나님의 일에 더 잘 주의를 기울일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이 은사를 상실하여 계속해서 정욕에 불타오를 경우, 바울의 말을 기억해야 한다. 즉 “(고전7:9)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혼인하라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 혼인하는 것이 나으니라”.

 

결혼

 

결혼이란 주 하나님 자신에 의하여 제정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결혼을 풍성히 축복하셨고, 남자와 여자가 하나로 결합하여 온전한 사랑과 일치 가운데 함께 살아가기를 원하셨다. 이 일에 대하여 사도는 “(히13:4)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고전7:28) 그러나 장가 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요 처녀가 시집 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로되 이런 이들은 육신에 고난이 있으리니 나는 너희를 아끼노라”라고 말한다. 따라서 우리는 일부다처를 주장하거나 결혼을 다시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을 정죄한다.

 

결혼은 어떻게 성립되는가?

 

결혼이란 주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에 합법적으로 맺어져야 한다. 근친상간을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혈족혼인을 반대하는 법을 어겨서는 안 된다. 결혼은 부모 혹은 부모를 대신할 만한 사람의 승낙에 의하여 이루어져야 하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제정하신 결혼의 목적에 부합되어야 한다. 그 뿐만 아니라 결합된 부부는 최대한의 신실함과 경건과 사랑과 순결로써 이 결혼을 거룩케 해야 한다. 따라서 논쟁이나 파쟁이나 정욕이나 간음은 절대 금물이다.

 

결혼 재판소

 

교회 안에 합법적인 재판소를 설치하고 결혼문제를 취급할 재판관을 두어 모든 부정과 수치스러운 일들을 억제하고 결혼에 관한 논쟁을 해결하게 해야 한다.

 

자녀들의 양육

 

부모들은 주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자녀들을 양육해야 한다. “(딤전5:8)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라고 하는 사도의 말을 기억하면서 부모들은 자녀양육에 힘써야 할 것이다. 특히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정직한 상거래나 직업을 가르쳐 줌으로 생계를 유지하게 해야 한다. 부모는 자녀들이 게으리지 않게 해야 하고, 이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에 대한 참 신앙을 그들에게 교육시켜야 한다. 그래야 자녀들이 확신의 결핍이나 지나친 안일함이나 추잡한 욕심에 의하여 방탕하고 실패하고 마는 일을 우리는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부모들이 참된 신앙으로 가정적인 의무들에 의해서 집안의 일들을 경영함으로 성취하는 일들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선한 일들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가사는 기도나 금식이나 구제만큼이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사도 바울이 그의 서한들, 특히 디모데서와 디도서에서 이렇게 가르치기 때문이다. 결혼이 마치 거룩하지도 않고 순결하지도 않듯이 결혼을 금지하거나 공공연히 결혼을 혹평하거나 간접적으로 결혼을 불신하는 사람들의 교리를 우리는 사도 바울과 더불어 마귀들의 교리로 간주한다.

 

우리는 또한 불결한 독신생활을 싫어한다. 우리는 숨겨진 욕정이나 공공연한 욕정 모두를 싫어하고 모든 사람들 중에 가장 무절제 하면서도 절제하는 체하는 위선자들의 음행을 싫어한다.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심판하실 것이다. 우리는 어떤 부자가 경건하고 자신들의 부를 잘 사용할 경우, 이 부와 이 부자들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을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사도적 청빙주의자들”(Apostolicals/ 13세기 사도적 청빈을 회복하려는 열광주의자인 Gherardo Segareli의 추종자들) 등의 이단들을 배격한다.

 

 

 

30장. 국가의 공직에 관하여

 

국가의 공직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다.

 

모든 종류의 국가공직이란 인류의 평화와 안정을 위하여 하나님 자신에 의하여 세워진 제도이다. 따라서 그것은 이 세상에서 중요한 위치에 놓여 있다. 공직자가 교회를 반대할 경우 교회를 저해하고 소란케 할 수 있으나 교회의 친구요, 교회의 구성원이 될 경우 그는 교회의 가장 유용하고 탁월한 구성원으로 교회를 크게 유익케 하고 가장 잘 도울 것이다.

 

공직자의 의무

 

공직자의 주된 의무는 국가의 평화와 안정을 확보하고 보존하는 것이다. 공직자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종교적인 생활을 할 때 그는 가장 성공적으로 공직을 수행할 수 있다. 이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다시말하면 공직자가 주님의 백성의 거룩한 왕들과 방백들의 모범을 따라 진리의 선포와 신실한 믿음을 증진시키고 모든 거짓과 미신을 뿌리채 뽑아 버리고 모든 불경건과 미신을 척결하고, 나아가서 하나님의 교회를 옹호할 때 그는 가장 성공적으로 공직을 수행하는 것이다. 교회를 돌보는 일은 거룩한 공직에 속하는 것이라고 우리는 확실히 가르친다.

 

그러므로 국가의 공직자는 그의 손에 하나님의 말씀을 가져야 하고 그 누구도 이 말씀에 위배되는 것을 가르치지 말게 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공직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겨 주신 백성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제정된 좋은 법으로 다스려야 하고 이 백성을 계속 훈련시켜야 하고 의무와 순종을 다하게 해야 한다. 공직자는 공정한 재판에 의해서 일을 처리해야 한다. 공직자는 어떤 개인을 봐 주거나 뇌물을 받아서는 안 된다. 공직자는 과부와 고아와 괴로움을 당하는 사람들을 보호해야 한다. 공직자는 큰 범죄자와 협잡꾼과 야만인들을 징벌하고 추방해야 한다. 공직자가 칼을 가진 것은 이런 목적을 위한 것이다.

 

공직자는 모든 행악자들, 치안 방해자들, 도적들, 살인자들, 억압하는 자들, 신성모독자들, 거짓말쟁이 및 하나님께서 형벌하고 처형하라고 명령하신 모든 사람을 향하여 칼을 뽑아야 한다. 공직자는 고집 센 이단자들, 즉 하나님의 존엄을 쉼 없이 모독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어지럽히고 심지어는 파괴하는 이단자들을 진압해야 한다.

 

전쟁

 

만약 전쟁에 의해서 백성의 안전을 보존하는 것이 꼭 필요한 경우, 공직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전쟁을 집행해야 한다. 그러나 공직자는 전쟁을 선포하기 전에 가능한 모든 방법에 의하여 평화를 추구했어야 하고, 전쟁 이외에는 그의 백성을 도저히 구할 수 없다고 생각될 때 전쟁을 선포하는 것이다. 공직자가 이러한 일들을 신앙으로 해낼 때 그는 참된 선한 일로 하나님을 봉사하므로 주님으로부터 축복을 받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재세례파를 정죄한다. 왜냐하면 이들은 기독교인이 국가공직자가 되는 것을 거부하고, 공직자의 사형집행권을 거부하고, 공직자의 전쟁선포권을 부인하고, 왕 등의 공직자에 대한 서약을 부인하기 때문이다.

 

백성들의 의무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의 안전을 공직자를 통하여 효과 있게 하신다. 하나님은 사실상 공직자를 백성의 아버지로 주셨다. 따라서 모든 백성은 이와 같은 공직자를 통한 하나님의 호의를 인정하도록 명령받는다. 이런 이유 때문에 백성은 공직자를 하나님의 일꾼으로 존경해야 하고 사랑해야 하고, 호의로 대하고 아버지로 여겨 그에게 간구해야 하고 그의 정의롭고 공평한 모든 명령들을 순종해야 한다. 결국 백성들은 모든 관세와 세금을 바쳐야 하고 기타 모든 다른 의무들을 신실하고 기쁜 마음으로 수행해야 한다. 만약 나라의 안전과 정의를 위해서 전쟁을 해야 한다면 백성은 자신들의 생명까지도 내놓아야 하고, 이 나라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백성은 물론 공직자들도 피를 흘려야 한다. 이런 일을 할 때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되 자발적으로, 용맹스럽게, 그리고 기백 있게 해야 한다. 공직자에게 불순종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를 자극시키는 것이다.

 

분파주의와 치안 방해자

 

그러므로 우리는 공직자를 경멸하는 모든 사람들을 정죄한다. 예컨대 반역자들, 국가의 적들, 치안을 방해하는 악한들, 끝으로 자신들의 의무를 공공연히 혹은 교묘하게 수행하지 않으려는 모든 사람들을 우리는 정죄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유일한 주님이시오,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공직자들과 온 백성을 축복하실 것을 우리의 가장 자비로우신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께 간구한다. 감사와 찬송과 영광이 하나님께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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