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 56

칼뱅과 사돌레토 추기경 (칼뱅과 제네바교회 이야기 4)

칼뱅과 사돌레토 추기경 임종구 목사의 칼뱅과 제네바교회 이야기 (4) ​임종구 목사 / 푸른초장교회 (2017.2.2)​​개혁자 칼뱅이 제네바 1차 체류에서 베른식의 기독교를 전복시키기에는 기반이 약했다. 제네바인들은 구교의 관습을 떨치지 못했고 성경적 교회 건설의 열망도 없었다. 기초법령은 시의회에 의해 난도질을 당했고, 신앙고백서는 저항에 부딪혔다. 1년이 채 되지도 않아 피에르 카롤리에게 아리우스자라고 고발을 당하기까지 했다. 이제 칼뱅의 남은 선택은 자신이 현실에 순응할 것인가 아니면 이 도시 거부할 것인가였다.​그러나 이 신임 개혁자는 보름스의 개혁자처럼 대담하게도 부활절 성찬의 집례를 거부해버렸다. 시의회도 실력으로 나왔다. 결국 제네바 강단의 3총사는 추방을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들은 제..

칼뱅, 교회건설의 첫 삽을 뜨다 (칼뱅과 제네바교회 이야기 3)

칼뱅, 교회건설의 첫 삽을 뜨다   임종구 목사의 칼뱅과 제네바교회 이야기 (3)​임종구 목사/ 푸른초장 교회 (2017.1.19)​​개혁자의 용기가 남아있는가​전 세계가 2017년을 종교개혁 500주년으로 삼고 기념하지만, 유독 스위스는 2019년을 종교개혁 500주년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자신들의 개혁의 출발점을 츠빙글리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독일의 종교개혁이 루터교회로 귀결되고, 스위스의 종교개혁이 개혁교회를 태동시켰다는 점에서는 일리 있는 주장이라 생각된다. 이것은 제네바 교회건설의 초기에도 베른식 종교가 제네바에 일방적으로 강요되었다는 점에서 흐름을 같이 한다.​당시 스위스에는 제네바, 쿠어, 코스탄츠, 바젤, 로잔, 시옹 등 6개의 주교구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베른은 로잔교구를 흡수하고 제네바..

왜 프로테스탄트를 받아들였나 (칼뱅과 제네바교회 이야기 2)

왜 프로테스탄트를 받아들였나 임종구 목사의 칼뱅과 제네바교회 이야기 (2) ​임종구 목사 / 푸른초장교회 (2017.1.12)​​1536년은 칼뱅과 제네바에 있어 매우 중요한 해이다. 먼저 칼뱅이 바젤에서 초판을 출판했고, 제네바는 복음을 따라 살기로 모든 시민이 결정한 해이기 때문이다. 제네바는 스위스 도시들 가운데서 가장 마지막으로 복음을 받아들인 도시 중 하나이다. 스위스에서는 취리히(1524)가 가장 먼저 복음을 받아들였고, 이어서 베른(1528) 바젤(1529) 뇌샤텔(1530) 제네바(1536)로 이어진다.​중세시대에 야만족을 대상으로 선교할 때 한 도시, 한 민족이 돌아오는 집단적 회심이 일어났다. 종교개혁시대의 회심 역시 개인적이라기보다는 여전히 집단적, 제도적 회심이었다. 이것이 제국에..

칼뱅과 제네바 (칼뱅과 제네바교회 이야기 1)

칼뱅과 제네바 임종구 목사의 칼뱅과 제네바교회 이야기 (1)​임종구 목사 / 푸른초장교회 (2017.1.6)​​순종의 신앙 없으면 개혁은 멀다​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는 의미 깊은 해에 개혁신앙의 원천인 칼뱅이 목회했던 제네바교회와 특별히 칼뱅이 회장으로 활동했던 제네바 목사회(The Company of Pastors in Geneva)에 대해서 소개할 수 있게 되어 감사하게 생각한다.​존 녹스는 “제네바는 사도들의 시대 이후 가장 완벽한 그리스도의 학교다. 다른 지역들에게도 그리스도가 참되게 선포되지만, 이 도시처럼 생활과 신앙이 참되게 개혁된 곳을 나는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가 본 제네바는 1556년의 제네바였다. 1536년 칼뱅이 처음 도착했을 때의 제네바는 신생기독교도시에 불과했다..

제네바 교회와 신앙교육

제네바 교회와 신앙교육 칼뱅의 제1차, 제2차《신앙교육서》를 중심으로 안상혁 역사신학 조교수 / 정암 신학강좌 발표 (2014.11.11)  I. 서론  칼뱅은 《제네바 신앙교육서 (교리문답서) Catechismus Ecclesiae Genevensis》를 그의 제네바 종교개혁에 있어 중심적인 위치에 자리매김 하였다. 신앙교육서에 대한 칼뱅의 강조는 “하나님의 교회는 신앙교육서 없이는 결코 보존되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한 그의 진술 속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1541년, 칼뱅이 제네바로 돌아와 줄 것을 간청하는 시의회는 앞으로 신앙교육과 권징을 성실하게 실천할 것을 약속한 후에야 비로소 칼뱅의 허락을 얻어 낼 수 있었다. “과연 어떤 역사적 배경에서 칼뱅은 《신앙교육서》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그 목적은..

책 ‘칼뱅을 읽다’ 중 '타락과 그 결과를 중심'으로 살펴본 교회의 적용점

책 ‘칼뱅을 읽다’ 중 '타락과 그 결과를 중심'으로 살펴본 교회의 적용점​Sola (2021.6.12)​​서론​인간의 타락에 대한 교리는 많은 교인들이 받아들이면서도 상당수가 왜곡되게 받아들이는 주제다. 그리고 이것은 구원론에 있어서 그 출발점이 되며 그렇기에 타락에 대한 신학이 잘못 인식 돼 있으면 그 이후에 나타나는 구원론에 대해서, 심지어 예정을 다루는 신론 등 많은 성경의 각 부분에 대해 반성경적인 입장을 취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의 타락에 대한 개념을 다루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다. ​인간의 타락에 대해서 대부분의 교인들은 그것 자체를 부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들어갈 경우 타락에 대한 잘못된 견해를 가진 교인들은 성경에서 말하는 인간의 타락과 천지차이만큼의 인식을 함을 통..

십자가를 지는 것 (기독교 강요 요약)

십자가를 지는 것 존 칼빈 / 책: 쉽게 읽는 기독교 강요  마태복음 16장 24절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신다. 주님이 하신 이 말씀은 우리가 감당해야 할 짐과 역경과 수고와 환난이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그러한 어려움을 감당하셨듯 그리스도인 역시 그것들로 입증되고 훈련되어야 한다.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하나님은 고난당하는 우리와 함께하겠다고 약속하셨다. 따라서 그러한 고난을 당하는 자들은 그들과 함께하시는 주님을 증거한다. 이와 같이 우리가 감당하는 십자가는 우리로 하여금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법을 가르친다. 우리가 고난을 통해 배우는 가장 큰 교훈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이지만 다른 것들도 있다. 주님은 때..

시편 31편 5절 주석

시편 31편 5절 주석 존 칼빈 / 칼빈주석에서  "저희가 나를 위하여 비밀히 친 그물에서 빼어 내소서 주는 나의 산성이시니이다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구속하셨나이다" (시편 31:4,5)  (생략)결론적으로 자신의 생명을 그 신실하신 보호 아래 맡길 만큼 그렇게 하나님의 섭리에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직도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바로 깨닫지 못한 사람이다. 다른 한편 그의 생명의 보전을 하나님의 보호에 맡길 수 있는 사람은 심지어 죽음 가운데서도 그 생명의 안전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이 세상에서 안전하게 지켜주실 뿐만 아니라, 또한 그리스도 자신이 본으로 우리에게 가르쳐주듯이, 죽음 그 자체의 파멸로부터 우리의 생..

칼빈의 후기활동 (4-8)

제 4장. 칼빈과 제네바에서의 개혁운동  8. 칼빈의 후기활동 이상규, 교회개혁사, 성광문화사, 1997 / 개혁주의 학술원 (2007.8.31)   1541년 칼빈이 제네바로 귀환한 이후 전개된 일련의 개혁운동은 많은 반대와 저항에 부딪치기도 했으나 1555년에는 엄격한 치리와 질서가 확립되어 명실상부한 개혁이 이루어졌고 제네바는 개혁과 개혁교회의 중심지로 변화되었다.   개혁파교회의 형성 제네바는 특히 그 지리적 위치 때문에 개혁운동의 구심점이 될 수 있는 외적 요인들을 지니고 있었다. 인접해 있는 여러 나라에서 종교적 박해를 피해 온 피난민들이 모여들었고 복음적인 개혁신앙의 본거지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1540년부터 1564년까지 프랑스, 이탈리아, 화란 등지에서 거의 1천명이나 되는 이국인..

칼빈의 반대자들 (4-7)

제 4장. 칼빈과 제네바에서의 개혁운동  7. 칼빈의 반대자들 이상규, 교회개혁사, 성광문화사, 1997 / 개혁주의 학술원 (2007.8.31)   제네바교회를 성경적 원리에 따라 개혁하고 제네바시를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개혁하고자 하는 칼빈의 노력은 ‘교회규정’이라는 문서를 통해 표명되었다. 이 문서에서 칼빈은 교회가 바로 되기 위해서는 초대교회가 보여주는 확립된 직제와 치리제도를 갖추어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에 목사와 교사, 장로와 집사 등 네 직분을 두었는데 이것은 목회적인 의도와 신자의 삶 전체를 합당한 질서와 규율로 지도하기 위한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칼빈이 장로와 집사 등 초대 교회적 직분을 두게 한 일은 당시로 볼 때 대단한 개혁이었다. 왜냐하면 중세교회 이래로 장로와 집사직은 사실상 사라..

2차 제네바 개혁기(1541-1564) (4-6)

제 4장. 칼빈과 제네바에서의 개혁운동  6. 제 2차 제네바 개혁기(1541-1564) 이상규, 교회개혁사, 성광문화사, 1997 / 개혁주의 학술원 (2007.6.27)   칼빈이 제네바를 떠나 있는 3년간 제네바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시는 혼란과 무질서에 빠져 있었고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많은 문제가 제기되었다. 무엇보다도 이곳에서의 정치적인 변화는 칼빈의 생애에 또 하나의 전기를 마련하고 있었다. 칼빈과 파렐을 추방했던 이들은 실권을 하였고 종교적으로도 문제가 야기되었다.  이렇게 되자 칼빈의 제네바 귀환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게 되었다. 결국 1540년 9월 21일 제네바 시의회는 칼빈의 귀환을 공식적으로 요청하기로 하고 대표단을 파견하기로 결의하였다. 제네바시가 칼빈의 귀환을 요청..

스트라스부르크에서의 칼빈 (1538~1541) (4-5)

제 4장. 칼빈과 제네바에서의 개혁운동  5. 스트라스부르크에서의 칼빈 (1538~1541) 이상규, 교회개혁사, 성광문화사, 1997 / 개혁주의 학술원 (2007.5.25)  칼빈이 스트라스부르크에 도착했을 때는 1538년 9월이었다. 이때로부터 1541년 8월까지 만 3년간 칼빈은 스트라스부르크에서 활동하였다. 이 기간 동안의 칼빈의 삶과 목회, 연구와 저술은 그 자신의 생애에 실로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이 기간 동안의 목회와 연구는 성경에 대한 해박한 이해와 신학적 깊이를 더해주었고 신앙적 성숙과 더불어 보다 원숙한 지도자로 이끌어 갔다. 특히 스트라스부르크에서 부쩌 등 개혁자들과 접촉함으로써 그는 많은 것을 배웠는데, 특히 예배와 교회론의 영역에서 그러했다.  물론 이 3년간의 생활이 칼빈 생..

제네바에서의 개혁운동 (1536~1538) (4-4)

제 4장. 칼빈과 제네바에서의 개혁운동  4. 제네바에서의 개혁운동 (1536~1538) 이상규, 교회개혁사, 성광문화사, 1997 / 개혁주의 학술원 (2007.5.25)  제네바에서의 칼빈의 활동은 교회에서의 바울서신, 특히 로마서 강해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성직자로 안수 받지 않은 상태였으며1), 그때로부터 1여년 가까이 정규적인 설교자는 아니었다. 단지 그는 파렐을 보좌하는 위치에 있었다. 그래서 제네바 도착 이듬해인 1537년 2월까지는 시의회로부터 어떤 보수도 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점차 칼빈의 활동과 역할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곧 그의 뛰어난 신학적 통찰력, 법률가로서의 훈련, 그리고 교회개혁을 위한 불타는 정열은 칼빈을 제네바시 개혁운동의 중심부로 인도하고 있었던..

개혁의 도시 제네바 (4-3)

제 4장. 칼빈과 제네바에서의 개혁운동  3. 개혁의 도시 제네바  이상규, 교회개혁사, 성광문화사, 1997 / 개혁주의 학술원 (2007.5.7)  1536년 7월 칼빈의 제네바 도착은 프로테스탄트역사에 있어서 실로 커다란 발전의 시작이었다. 칼빈이 이곳 제네바에 도착했을 때 아무도 후일 칼빈이 이 도시의 개혁자로 생애를 바치며, 이 도시가 프로테스탄트 운동의 중심지가 될 것을 예견하지 못했다. 그러나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은 1536년 7월 이 날을 우연한 사건, 한 순례자의 의미 없는 행로(行路)로 남겨두지 않았다.   1536년 7월 11에는 북구 인문주의 운동의 왕자였던 에라스무스(Erasmus)가 스위스 바젤에서 숨을 거두고 같은 해 프랑스 인문주의 운동의 선구자 르페브르(Lefivre d..

칼빈의 회심과 개혁사상 (4-2)

제 4장. 칼빈과 제네바에서의 개혁운동  2. 칼빈의 회심과 개혁사상  이상규, 교회개혁사, 성광문화사, 1997 / 개혁주의 학술원 (2007.5.2)  칼빈의 생애에 있어서 하나의 결정적인 전환점이 된 사건은 그가 「세네카의 관용론 주석」을 출판한 후 약 18개월이 지난 1533년 10월에 일어났다. 즉 칼빈은 오르레앙 지방에 가서 일 년간 체류하였고 1533년 8월에는 그의 고향인 노용을 방문한 후 다시 파리로 돌아갔다. 이때가 1533년 10월이었다. 칼빈은 이곳에서 이전의 친구였던 니콜라스 콥과 교제하였고 1533년 10월 31일, 곧 ‘모든 성자의 날’(all Saints' day)에 니콜라스 콥은 파리대학 학장에 취임하게 되었다. 이때의 취임연설문은 칼빈의 영향 하에 작성된 것이었다. 혹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