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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목사의 삶을 사는 다키우라

Sola. 2025. 3. 31. 07:00

 

참 목사의 삶을 사는 다키우라

정정숙 박사 (2012.12.8)

● 철저한 개혁주의 신앙 파수에 헌신

● 고난 속에서도 신행일치의 삶의 모습

태풍 15호가 한반도를 강타한다는 뉴스가 우리를 위협할 때 일본 고베신학교 교장 다키우라 시게류 박사가 한국에 왔다. 토요일 밤늦게 도착한 그는 겉으로 보기에도 몹시 피곤해 보였다. 한주간 동안 한국에 머물면서 앉으면 졸고, 누우면 일어나지 못하는 극도의 피곤 속에 있었다.

평소에도 교회 일과 학교 일로 그의 활동이 많지만, 그의 부인 마사꼬 사모가 암으로 오사카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오카모토에서 고베로, 고베에서 오사카까지 매일 편도 한 시간 거리의 병원을 한차례 혹은 두 차례씩 왕복하며 여러 달 동안 간호를 해왔고, 그러한 극진한 간호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치유되지 못하고 한 달 전에 하늘나라로 갔기 때문이다. 장례식 날 아침에 국제전화로 마사꼬 여사의 죽음을 우리에게 알려왔고, 장례예배를 자신이 인도하려고 하는데 우리 부부의 의견은 어떠냐고 물어왔다. 그래서 우리는 '당신은 마사꼬의 남편인 동시에 그녀의 목사였고, 평생의 동역자요 친구였으니 당신이 집례를 하면 마사꼬 여사도 좋아할 것이라'고 조언을 해 주었다.

장례식이 끝난 며칠 후에 그에게 문안 전화를 하면서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한국에 와서 한 주간 쉬어가면 어떻겠냐고 물었다. 가난한 그의 형편을 알고 있기 때문에 숙식은 우리 집에서 하고 비행기 값은 우리가 담당할 것이니 올 수 있으면 오라고 청하여 그가 한국에 오게 된 것이다.

 

< 다키우라 시게류 목사>

다키우라와의 첫 만남

1970년대 중반에 필자는 미국 미시시피 주 잭슨 시에 소재하고 있는 리폼드신학대학원(Reformed Theological Seminary)에 유학을 갔다. 동양 학생들이 거의 없는 실정이었는데 일본에서 두 명, 홍콩에서 한 명, 인도에서 한 명, 인도네시아에서 한 명의 유학생들이 와 있었다. 일본에서 온 유학생으로는 신학 석사 과정에 다키우라 목사와 야에가시( Yaegashi) 목사(현재 일본 센다이 지역에서 학원 사역을 하고 있다)가 있었다. 홍콩과 인도에서 온 학생은 미혼이었고, 인도네시아에서 온 유학생과 야에가시 목사는 가족이 함께 와서 공부를 하고 있었고, 다키우라 목사는 가족을 두고 혼자 와서 유학을 하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필자는 학교와 가정에서 고취된 애국심으로 인하여 반일감정이 강한 편이어서 일본 유학생들과 캠퍼스에서 오며 가며 얼굴을 마주치면 인사만 할 뿐 친밀한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주 재미있는 일을 준비하고 계셨다. 필자가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학교 당국에서는 미국의 백인 여학생들이 거주하고 있는 기숙사로 안내를 해주는 것이 아니라 2-3일 동안 문화적 차이에 적응할 수 있도록 학교 안에 있는 야에가시 목사네 아파트에 머물도록 배려를 해주었다. 야에가시 목사의 부인은 친절한 백인 여성이었고 두 아이의 어머니였다. 그런데 얼굴이 낯설지 않아서 어디서 본 것 같다고 하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녀는 바로 바로 필자가 10여년 전에 OPC 선교부에 소속된 간하배 선교사의 비서로 근무하면서 한 달 동안 한국어를 가르쳤던 케티(Katie)였다. 그때 그녀는 꿈 많던 아름다운 백인 아가씨로 대학을 졸업한 후 일본에서 선교하는 정통장로교(OPC) 선교사인 오빠를 찾아 왔던 길에 한국을 방문하여 서울의 간하배(Harvie Conn) 선교사댁에 한 달 동안 머물며 한국어를 배웠었다.

이렇게 하여 그녀와 필자는 친구가 되었고 그의 남편인 야에가시 목사뿐만 아니라 다키우라 목사와도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몇 달 후 다키우라 목사의 부인인 마사꼬 여사가 어린 아들 덴빼이를 안고 유학 중인 남편을 만나러 잭슨을 방문하였다(그 아들은 지금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고, 교회를 개척하려고 준비 중에 있다).

이렇게 시작된 사귐이 거의 40여년 동안 이어지고, 서로 방문하여 강의를 돕고 사역을 함께 하는 자리에 이르렀다. 이 긴 세월 동안 동역을 하면서 느낀 점은 필자가 만나본 수많은 그리스도인들과 목사들 중에 다키우라 목사 같은 '참 목사', '진국 목사'는 만나보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고베 출신의 성경주의자

다키우라 박사는 고베 출신이고 이곳에서 한 평생 사역하고 있는 고베인이다. 그는 고베에서 고등학교까지 졸업했고 교토에 있는 도시샤(同志社)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그는 우리가 도시샤대학의 자유주의 신학사상을 농담으로 언급하면 그는 '나는 영문과 출신이어서 거기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하면서 웃는다. 그는 대학을 졸업한 후 고베개혁파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다. 개혁파신학교는 일본의 보수적 신학교의 대표이며 많은 인재들을 배출하였다.

그는 또한 미국 리폼드신학대학원을 졸업하였고, 제네바대학에서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여기서 다키우라의 신앙적 배경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다키우라는 현재 북미개혁장로교단(RPCNA)에 소속되어 있다. 작은 교단이지만 개혁장로교신학교(RPTS)와 제네바 대학을 운영하고 있다. 이 교단은 스코틀랜드 언약파(Covenanter)의 후예로서 예배시간에 「시편찬송」만 부르고 악기를 사용하지 않는 '무악기파'이다. 비록 몇 교회 되지 않는 일본의 작은 교단이지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발버둥치는 살아있는 교회들이다.

다키우라의 경우를 보면 일본의 왕을 '천왕'이라고 부르지 않고 '일왕'이라고 부른다. 그 이유는 '천왕'즉 '하늘의 임금'은 하나님 한 분뿐이기에 그렇게 불러야 한다는 것이다. 자녀들이 소풍을 갈 때도 신사의 경내에는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 그것은 우상을 섬기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자녀의 신앙 교육을 위해 식사시간, 매일 저녁의 가정예배를 철저하게 활용한다. 그는 주일 저녁에는 온 가족이 모여서 주일날 예배시간의 설교와 성경공부를 하면서 무엇을 배우고 느꼈는가를 함께 묻고 대답하고 설명하며 나눈다. 그는 또한 매일 저녁마다 가정예배를 드리면서 말씀을 가르치고 함께 찬양하고 기도하는 시간을 갖는다. 뿐만 아니라 식사시간에도 시편찬송을 4절까지(경우에 따라서는 7절까지) 모두 부르고 아버지가 대표기도 하고 식사를 한다. 아직 너무 어려서 발음도 정확하지 않은 2-3세의 자녀들까지도 식사시간과 가정예배 시간에 기쁘게 열심히 시편찬송을 부르는 모습을 보고 감명을 받은 바 있으며, 그 아이들을 위해 땀을 흘리면서 시청각적으로 가정예배 설교를 하는 모습을 보고 크게 은혜받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첫 한국 방문

다키우라 가정에는 6명의 자녀가 있다. 아들 셋, 딸 셋인 이 가정에는 늘 아이들로 북적인다. 80년대 초반에 이들 8식구가 여름방학 동안에 휴가차 한국 방문을 하였다. 그때 우리는 총신대학교 밑에 있는 영아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32평의 아파트에 우리 식구 4명과 일본에서 온 다키우라의 8식구가 한 주간 동안 함께 머물게 되었다.

방 2개와 거실 및 화장실이 하나뿐인 좁은 아파트에 12명이 기거를 하는데 그것도 여름 날씨였으니 독자 여러분은 그 모습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당시에 우리 가족은 일본말을 모르고 그 아이들은 한국 말을 모르니 서로 손짓 발짓으로 의사소통을 하면서 서로의 부대낌과 의사소통 속에서 정이 쌓여갔다. 만나고 같이 밥을 먹고, 대화를 하면서 우리 두 가정의 친교와 사랑은 깊어갔다. 사용 언어는 한국어, 일본어로 각기 달랐지만 영어라는 공통어로 의사소통을 하고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각기 자기의 자녀들에게 한국어로, 일본어로 통역을 하였다. 그렇게 한 주간 동안 매일 3개 국어로 함께 가정예배를 드리고, 함께 밥을 먹고, 함께 줄을 서서 화장실 사용과 샤워를 하고 봉고차를 빌려서 한국의 명소를 안내하면서 보냈다. 이것이 두 가족의 본격적인 만남과 친교의 시작이었다.

다키우라식 샤브샤브

다키우라 목사의 가족들과 더욱 가까워진 것은 1996년에 일본 개혁장로교단에서 <고베신학교>를 새로 세우고 필자와 남편이 그 학교의 '초빙교수'가 되어 매년 몇 차례씩 방문을 하여 집중강의를 하게 되면서 만남의 기회가 많아졌다.

고베신학교는 산노미야(三宮) 전철역에서 5분 정도의 거리에 위치하고 있는 카버난트 빌딩에 자리잡고 있다. 1층은 그 교단에서 경영하는 카바난트 서점이 있고, 2층은 강의실, 3층은 도서관과 게스트 룸이다. 우리가 이 학교에 강의를 하러 가면, 3층의 게스트 룸에 묵으며 자취를 해야 한다. 산노미야 전철역에 있는 식료품 상점인 이케야에 가서 장을 보고 게스트 룸에서 음식을 만들어 먹는다.

그 학교의 교장인 다키우라 목사의 식구들은 우리가 강의를 가면 우리를 초대하여 식사 대접을 하고 싶어 한다. 다키우라 목사의 집은 JR 오카모토(岡本)역에서 10분 정도 걸어가면 되는 언덕 위 주택가에 위치하고 있다. 1층은 예배당이고 2층은 사택이다. 좁은 사택에 8명의 식구가 살고 있으며, 다키우라 목사의 서재는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칸을 막아 아이들의 공부 공간을 만들어주면서 점점 좁아지고 나중에는 몸을 돌릴 수도 없을 정도의 형편이 되었다.

그의 자녀들이 어렸을 때는 사택에서 식사를 했지만 그들이 성장해 가면서 예배당 뒤쪽이 임시식당으로 변했다. 갈 때마다 식사 메뉴는 항상 동일했다. 이른바 '다키우라식 샤브샤브'이다. 고기와 야채와 두부를 재료로 만든 담백한 메뉴로 온 식구가 총동원되어 준비를 하는 것이 특징이다. 오래 사용하여 약간은 찌그러진 큰 냄비에 물을 붓고 끓이다가 약간의 돼지고기를 넣고 두부와 야채를 듬뿍 넣은 건강에 아주 좋은 담백한 샤브샤브이다. 큰 식탁을 중심으로 식탁 위에 큰 냄비가 놓여 있고 다키우라 목사의 가족 8명과 우리 내외를 포함한 10명이 둘러 앉아 시편찬송을 4절까지 하고 음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한 후 각자의 접시에 음식을 받아서 식사를 한다. 반찬이라고는 간장과 한국 김치밖에 없지만, 그곳에는 감사와 찬양과 사랑의 대화가 있는 성찬이다. 갈 때마다 느낀 것은 자녀들이 불평하지 않고 늘 감사하며 밝게 자라는 것이 필자의 마음을 따뜻하게 했으며 또한 감사했다.

그들의 가정예배

이미 앞에서 그가 철저한 성경주의자라는 것을 언급하면서 소개한 바와 같이, 이 가정은 매일 저녁마다 가정예배를 드린다. 우리도 몇 번 그 가정예배에 함께 동참한 적이 있는데, 온 식구들이 둘러앉아 시편찬송을 부르고 성경을 교독한 후 아버지가 성경을 해설한다. 그 후에 성경 내용과 해설에 대한 질의 응답이 오가고 그 날 있었던 일을 말하며 그 일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발견하고 아버지의 기도로 마친다.

이것이 이 가정을 지탱하는 힘이며 가난하지만 하나가 되는 단결의 고리이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말로만의 신앙이 아니라 신앙과 삶의 일치를 배울 수 있었다.

처음 이 가정을 방문하였을 때 가난한 목사의 가정에 6명의 자녀가 있는 것을 보고 안타까움이 있었다. 그런데 여러 해가 지난 어느 날 보니 이 6명이 모두 그 교회의 주일학교 교사가 되어 있어서 모두 '다키우라 선생'이 되어 있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축복이 아닐까?

다키우라의 사역

다키우라 시게류 목사의 사역을 다음과 같은 몇 가지로 분류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목회 사역이다. 그는 고베 오카모도 계약교회 담임목사로 사역하고 있다. 고베 항구가 바라보이는 산중턱 주택가 한가운데 있는 교회당은 예배당이라기보다는 2층 가정주택과 비슷하다. 몇 십년째 이 교회를 섬기고 있는데 교인 수는 40명 정도이다. 외형적으로는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고 변한 것이라고는 어린아이가 자라 청년이 되고, 어른들이 노인이 되었다는 것뿐이다. 물론 신앙적으로는 더욱 성숙해지고 아름다운 신앙생활을 하고 말씀대로 살아가는 성도로 잘 키워왔을 것이다. 외형적으로만 보면 양적 성장이 별로 없어서 답답해 보일 수도 있지만 이것이 대부분의 일본 교회의 현실이니 무엇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이 교회는 󰡐무악기파󰡑이고 찬송도 시편송만 부르니 일반 교인들은 적응하기 어렵다. 필자는 이들을 '일본재건교회'라고 부르고 싶다. 한국의 재건교회처럼 말씀중심으로 살기를 원하지만 금지하는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성숙한 교인들은 감사하며 살아가지만 신앙이 미숙한 성도들은 적응이 어렵기 마련이다.

다키우라는 혼자서 교회를 돌본다. 혼자서 목사의 역할도 하고 전도사의 역할도 하고 사찰의 역할도 하고 운전기사의 역할도 한다. 그러다 보니 가족 모두가 아버지를 돕는 목회를 하는 형편이다. 이렇게 그는 작은 교회의 목사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묵묵하게, 성실하게 감당하고 있다.

둘째, 신학교육 사역이다. 그는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후 고베개혁파신학교에서 강의하다가 개혁파신학교가 신학적으로 좌경화되며 폭넓은 방향으로 나가자 1996년에 일본개혁장로교회에서 고베신학교를 세우게 되었고 그 후 교장으로 사역하고 있다.

말이 교장이지 그는 교수, 사무원, 운전기사 등의 모든 일을 한다. 특별히 월급을 받는 것도 아니고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으로 알고 이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다행인 것은 이 교단에 속한 목사 4명이 모두 미국 유학을 마친 분들이어서 작지만 규모있는 학교로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

셋째, 저술 활동이다. 다키우라 박사는 조용한 저술 활동을 하고 있다. 주로 일본의 천왕제에 대한 비판, 개혁주의 신학의 특성 등을 탐구한다. 요즘은 일본성서공회가 추진하는 성경새번역위원으로 신약의 바울서신 일부를 새롭게 번역하고 있다.

이렇게 그는 목회, 신학교육, 저술을 통하여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가난하지만 부족함이 없고, 겸손하지만 남보다 뛰어난 모습으로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남은 세월을 그리며

한 평생의 반려자인 마사꼬 여사가 하나님 앞으로 먼저 간 것은 그에게 큰 충격이었다. 마지막 두 달은 그에게 참으로 힘든 시기였다. 마사꼬 여사가 오사카 병원에 입원해 있었기에 매일 한 시간 혹은 한 시간 반이 걸리는 거리를 왕복하고, 어떤 날은 하루에 세 번씩 왕복을 하면서 간호를 했다고 한다. 그후 아내의 장례를 치르고 뒷처리가 끝났을 때는 완전히 탈진상태가 되었다고 했다. 그는 또한 '고베 시청에 가서 아내의 사망신고를 하고 나니 내게 6명의 자녀와 6명의 손주들이 있지만 나홀로 남은 것 같았다'고 그의 심정을 토로했다.

한국에 온 그는 식사 시간 외는 앉아서도 졸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잠을 자고 또 잤다. 그래서 남편과 함께 온양 온천에 가서 쉬고 출생 후 처음으로 때밀이로부터 때도 밀어 보았다고 좋아했다. 그는 또한 남편과 함께 KTX로 목포에 가서 태풍치는 서해바다를 바라보며 마사꼬 여사를 떠나보내고 자신의 앞날을 생각하는 듯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며 앉아있기도 했다.

이렇게 한국에서의 한 주간을 보내고 피로가 어느 정도 회복되어 일본으로 돌아갔다. 이제 6명의 자녀 중 4명은 결혼하였고, 아직 결혼 하지 않은 아들과 딸이 아버지를 모시고 있다. 특별히 감사한 것은 딸 메구미가 어머니의 병간호를 위해 학교의 교사직을 사직했는데 지금은 혼자된 아버지를 돌보며 곁에서 가정 관리를 하고 있다.

한 평생을 함께한 배우자가 자기의 곁을 떠나 하늘나라로 먼저 갔을 때 남은 자의 삶이 어떠할지를 다키우라 목사를 통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순수한 사람이고 진정으로 참 목사의 삶을 사는 사람이니 남은 여생도 먼저 떠난 아내 마사꼬 여사를 그리워하며 주님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할 것이다.

일본과 한국의 가교되어

다키우라 박사는 지금 한글을 배우고 있다. 한글을 배워서 성경을 한국어로 읽고싶어 한글을 배운다고 하기에 한글성경을 한권 사 주었다. 그는 몇 년 전에 재건교회 목회자 수양회가 지리산에서 모였을 때 우리 부부와 함께 강사로 섬긴 바 있다. 그 집회를 통해서 한국에 대한 깊은 이해를 하고 있으며 일본과 한국의 연대를 꿈꾸고 있다.

하고 싶어 하는 일은 많은데 그에게는 경제적 여유가 없다. 그는 박봉으로 6자녀를 키우면서 옷 한 벌 제대로 사 입지 못했지만 그의 마음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항상 풍요롭다. 필자는 그를 볼 때마다 그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감사의 진폭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일 년에 한 두 주간 같이 강의사역을 하는 형편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참으로 형제라는 느낌을 주고 받는다. 그래서 그가 한국을 다녀갈 때면 빈손으로 보내지를 못한다. 그의 손주들과 며느리들에게 작은 사랑의 표시라도 해야 마음이 편하다.

안주인 마사꼬 여사의 손때가 묻어 있는 오카모도 언덕에 있는 예배당 2층의 사택에는 다키우라 목사와 결혼하지 않은 아들과 딸 이렇게 세 식구가 살면서 지나온 삶을 반추하며 오늘도 목사의 참 모습을 보여주며 성실하게 살고 있을 것이다.

필자는 지금까지 수많은 목사들을 만났으나 진정으로 하나님만 의지하며 배운대로 실천하고, 믿는 대로 생활하는 그를 보면서 '저것이 바로 참 목자상이로구나'라고 생각한다. 그의 일본과 미국에서의 공부, 그의 저술, 그의 사역, 이 모든 것이 귀하지만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좋은 남편, 좋은 아버지, 좋은 목사, 좋은 교수로 진실하게 살려는 그 모습이 더욱 소중하다고 본다. 바다 건너에 살고 있는 진실한 친구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살아있는 동안 잘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스스로에게 하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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