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에 유익한 글

어거스틴의 '삼위일체' 책 요약

Sola. 2023. 4. 28. 07:00

 

어거스틴의 '삼위일체' 책 요약

요약자: 미상

 

제1권

 

이 책을 쓰는 목적은 이성을 오용해서 삼위일체 신앙을 공격하는 궤변가들을 반박하려는 것이다. 그들은 믿음으로 출발하는 것은 체면 손상으로 여기며 이성을 도착적으로 사랑한다. 그들의 오류는 3가지이다. 성경은 이러한 오류를 제거하면서 점진적으로 신적 사물로 우리를 인도한다. 진정한 불사는 무엇인가? 우리가 신적 사물을 이해하도록 신앙이 우리를 양육한다. 이 글은 삼위일체에 관하여 논할 때 주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삼위일체는 유일 진정한 한 분 하나님이시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동일한 본질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다는 것을 설명하겠다.

 

독자들이 이 글을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이는 저자의 잘못이 아니다. 정통신학에서 삼위일체에 관하여,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동일한 본질의 통일을 이루며 나눌수 없는 동등성을 이룬다고 가르친다.세 하나님이 계신 것이 아니라 한 하나님이며 성부가 성자를 낳으셨고, 성부는 성자가 아니시며, 성자는 성부에게 났으므로 성부가 아니시며 성령은 성부와 성자의 영이며 성부,성자 성령이 동등하며 삼위일체의 통일성에 속한다. 이 교리에서 어려운 점은 어떻게 세 분이 한 하나님이시며 불가분적으로 역사하는 분들이 어떻게 어떤 일은 각각 따로 하시는가 하는 점이다.

 

어떤 이는 성부만이 불사하신다 하였다. 또 그는 변하므로 참으로 불사하는 것이 아니라 한다. 그러나 성자는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동일 본질이시라 한다. 성자는 성부와 동일한 본질이시며 참 하나님이시다. 성부뿐 아니라 삼위일체가 불사하신다. 만물이 성부에게서 뿐만 아니라 성자에게서도 나온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 동등하시며, 참 하나님이시다. 사도 바울이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다고 할 때에는 삼위일체 신에 대하여 쓴 것이다. 성자는 하나님의 지혜신데, 나 홀로 하늘을 두루 다녔다고 했을 때에 성부와 자기를 분리하신 것이 아니다. 성자 자신은 창조되지 않았고, 성부와 함께 지어진 만물을 지으셨다. 성령도 하나님 자신이며, 피조물이 아니다.

 

그런데 성자는 어떻게 성부보다 작으며, 자기보다 작으신가? (요14:28) 종의 형체를 취했다고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체를 잃으신 것이 아니고 성자는 성부와 같은 형체였다. 하나님의 형체로는 자신보다 크시며, 종의 형체로는 자신보다 작으시다. 하나님의 아들은 아버지와 본성이 동등하지만 그 모양은 성부보다 작으시다. 하나님이 종의 형체를 취했으므로 둘이 다 하나님이며, 다 사람이다. 취하는 일 때문에 한쪽이 다른 쪽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다. 성자를 성부에게 복종시킨다는 말씀이 오해를 받았으므로 그에 대한 성경의 본문을 설명한다. 그리스도가 나라를 아버지께 바치리라는 것은 나라를 그에게서 빼앗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뵙게되는 것이다.

 

이것이 모든 행동의 약속된 목적이다. 성령은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성부와 동등하게 충분하시다. 어떤 때는 한 위격으로 모든 분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께 나라를 바치시되 충실한 자들을 인도하여 하나님을 뵙게 하시는데 이 때 자신이나 성령을 그 나라에서 제외시 하지 않을 것이다. 성경은 성자가 하나님의 본체로 계셔서 성부와 동등하시고, 종의 형체를 취하여 성부보다 작으신 것을 구분할 수 있다. 성부가 아시는 날과 시간을 성자는 왜 모르시는가? 이런 표현은 아브라함에게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신다고 했을 때와 같다. 하나님의 본체인 그리스도에 대해서 혹은 종의 형체인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한다. 어떻게 그리스도가 나라를 주시며, 혹은 그렇지 않은가. 그리스도는 심판을 하시며, 하지 않으신다. 그리스도가 주의를 성부에게로 돌리실 때 자신을 성부에게서 분리시켜 말씀한다. 한 위격으로 그리스도의 본성이 여러가지 이므로 그에 대해서 여러가지 말을 한다. 무슨 까닭에 아버지가 심판하시지 않고 심판을 아들에게 맡기셨는가. 이것은 인간의 권능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의 권능으로 심판하시고, 성부와 동등한 그 본체로 나타나신다.

 

제2권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데에는 두가지 원칙이 있다.성자가 취하신 피조물 때문에 성부보다도 작으시다는 원칙과 성자는 성부와 동등하시면서도 성부에게서 나셨다고 계시된 원칙이다. 또한 성경에는 세가지 양식이 있다. 그런데 성자에 대한 어떤 표현 양식은 어느 쪽 원칙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성령에 관한 어떤 일들은 한가지 원칙으로만 해석해야 한다. 성부가 성자를 영화롭게 하신다는 것은 불평등을 증명하지 않는다. 성자가 성령이 파견되신다고 해서 작으신 것이 아니다. 성자는 성령의 파견에 의해서 자기를 파견하신다.

 

성자의 파견은 곧 성육신과 처녀탄생이라고 해석하는 입장에서 보면 이 일들도 성부와 성자와 분리할 수 없는 단일 행동으로 이루어졌으며, 성령도 확실히 이 일에서 배제되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성부께서 보이지 않는 성자와 함께 성자를 보이게 함으로써 보내셨다고 한다. 만일 성자가 본성이 변하여 보이게 되었다면 성자는 파견되었을 뿐 보내시지 않은 것이다. 성령이 피조물을 취하신 것은 말씀이 육신을 취하신 것과 같지 않다. 육신 안에 있는 말씀과 육신이된 말씀은 다르다. 일시적으로 존재하면서 인간의 감각에 맞는 방법으로 성령의 임재를 알리며 성령을 상징한 물질적 형태들 때문에 성령이 파견되신다고 한다. 그러나 성령이 하나님 보다 작다고 하지 않는다. 성자는 취하신 종의 형체로 인하여 작다고 한다. 그런데 떨기나무의 불같은 물체적 형태로는 파견되었다 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 때에 적절하신 방법으로 사람의 눈에 계시되기 위해서만 피조물이 지어진 때문이다. 성부만이 영생하시며, 보이지 않으신다고 믿는 사람들은 잘못이다. 성자는 그의 취하신 육신 때문에 죽을 운명이 되신 것이 아니다. 인간은 몸과 함께 영혼이 죽는 것이 아니다. 성령께서는 육신을 취하지 아니하시므로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다는 것은 성부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조상들에게 나타나셨을 때에 위격의 구별이 없었는가. 아니면 어느 한 위격만 나타났는가. 아담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사람의 형상을 지니고 있었다.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니라 거니셨다고 한다.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을 때에도 삼위 중 어느 격이 나타났는지 명확하지가 않다. 날이 저물매 롯에게 나타났다. 여기서는 성자와 성령일 가능성이 크다. 모세를 파견하실 때 떨기나무 가운데서 나타나셨다. 여기서 처음에는 주의 사자라고 부르고 나중에는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성부는 아니라고 할 수 없다. 목전의 사명을 위해 피조물의 형체를 취했고 사람의 눈에 보이는 것을 하나님의 사자라고 부른다면 그 하나님은 성부가 아니라 성자나 성령으로 해석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을 떠날 때에 하나님이 피조물의 형체로 나타나셨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나타나신 것이다. 시내산에서도 나타나셨는데 삼위일체가 말씀하셨는가. 또는 어느 한 위격이 말씀하셨는가. 연기와 불과 구름과 암흑은 하나님 말씀과 지혜 즉 그리스도나 성령의 본질이라 할 수 없다.

 

만일 하나님의 지혜이신 그리스도 뿐 아니라 사람의 지혜까지도 육안으로 볼 수 있다면 모세가 그리스도를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삼위 중 성령께서 나타나신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그가 두 돌판을 손가락으로 쓰셨으며, 복음서 (눅11:20)에도 성령을 이 이름으로 불렀기 때문이다. 모세는 하나님과 대면하여 이야기 하였는데 원컨대 주의 영광을 보여달라고 한다. 따라서 죽을 인간의 눈에 나타난 것을 하나님의 본체가 아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등이 보였는가.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믿음, 하나님의 등을 보는 망대는 정통 교회 뿐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등을 보았다. 조상들은 성부만은 볼 수 없었다고 하는 것은 경솔한 생각이다.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다니엘에게 나타나신 것은 성부가 나타나신 것으로 믿어도 된다.

 

 

 

제3권

 

앞권에서 이야기한 성자의 출현을 논한다. 그때그때 적합하다고 인정된 방법으로 사람들의 눈에 하나님을 나타내 보이기 위해서 피조물이 만들어졌을 뿐인가. 그렇지 않으면 이미 있었던 천사들을 보내서 하나님을 대변하게 하셨는가. 그렇게 했을 경우에 창조주가 천사들에게 권한을 주어 피조물의 형태를 취하든지 또는 자기의 몸을 적당하게 변하게 하셨는가. 그리고 하나님의 본질은 결코 나타나지 않았는가. 삼분법의 둘째 문제에 대하여. 하나님이 사람들의 눈에 계시되었을 때 적당하다고 여겨서 취하신 피조물의 형태는 그 일을 위해서만 지으신 것인가. 성자와 성령이 이전에도 보내심을 받았는가. 하나님의 뜻이 모든 물체적 변화의 더 높은 원인이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을 뜻대로 쓰시며, 자기를 나타내기 위해서 보이는 것들을 만드신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임재를 알리며 자기를 계시하기 위해서 적당한 방법으로 하늘과 바다와 따에 있는 피조물에게 감각할 수 있고 눈에 보이는 결과를 나타내시는 것은 노라운 일인가. 하나님은 실지 본질을 그대로 나타내지 않는다. 그것은 와전히 변함이 없으시며 그가 지으신 모든 영들보다도 더 내면적이며 더 신비로우며 숭고하시다. 모든 영적익 물질적인 피조물들을 주관적인 하나님의 권능에 의해서 매년 바닷물이 일정한 날에 모아지고 땅 위에 부어진다. 그러나 그가 같은 원료를 모세의 지팡이로부터 뱀의 살로 즉각적으로 바꾸신 것은 기적이었다. 애굽 술객들에게 이 능력을 주신 것은 속이는 자들을 속이기 위해서이다. 마술에 의해 변하는 것은 하나님 만이 창조하신다. 야곱이 얼룩 양을 생산케 했는데, 양을 낳게 한 것은 나뭇가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였다.

 

따라서 모든 것은 그 제1원인이 하나님에게 있다. 맨 처음에 모든 존재의 분량과 수와 무게를 그 수중에 쥐고 계신 분이 아니면 아무도 이 일을 할 수 없다.피조물은 몇가지 표적으로 볼 수 있는가. 성찬에 대하여. 하나님의 본질 자체가 나타난 일은 없다. 하나님이 나타나신 것은 천사들의 섬김으로써 된 것이다. 화법의 온 반대론을 제거한다. 아브라함과 모세에게 나타나신 것과 모세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모두 천사들의 봉사로 된 일이다. 중보의 출생은 제약된 것이 아니라 권능이 있었다. 그러나 다른 곳을 보면 사도는 어느 천사를 중보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낮추어 사람이 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의미한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때에는 하나님을 위격의 구분없이 비유적으로 말하되 눈에 보이며 감각할 수 있도록 그러나 하나님의 본질이 아니라 피조물로 나타나셔서 눈으로 보며 귀로듣는 모든 일을 통해서 사람들의 마음이 청결하게되어 하나님을 뵐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제4권

 

무슨 까닭에 하나님의 아들이 파견 되셨는가를 설명한다. 즉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죽으심을 통하여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며 그가 사랑하신 우리는 어떤 사람들인가를 확신하게 만드시려는 것이었다. 말씀이 육신으로 오신 목적은 우리가 깨끗하게 되어 하나님을 뵈며, 하나님께 밀착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가 단번에 죽으심으로써 우리의 2중적인 죽음이 제거 되었다. 여기서 구원을 위해서 구주의 한번이 우리의 두번과 조화됨을 논하며 6이라는 수가 완전함을 깊게 논한다. 하나와 둘의 비례는 6이라는 수에 귀착한다. 생명의 중보 한분에 의해서 즉 그리스도에 의해서 많은 사람이 하나로 집결되며, 그로 말미암아 영혼이 참으로 정결하게 된다.

 

또 하나님의 아들은 종의 형상을 입고 파견되셨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의 형상으로는 성부보다 작은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에 의해서 파견되셨기 때문이다. 성령이 파견되신 데 대해서도 같은 이유를 인정해야 한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하나님으로부터 구해야 한다. 하나님의 독특한 본질에는 영원성과 진리와 의지의 면에서 변함이 없다. 거기서는 진리가 영원하며 사랑이 영원하기 때문이며 사라이 참되며 영원성이 참되기 때문이며, 영원성이 사랑을 받으며, 진리가 사랑을 받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무력함을 인정함으로써 완전하게 된다. 성육하신 말씀이 우리의 암흑을 흩어버리신다.

 

우리는 성육신하신 말씀으로 말미암아 진리를 깨닫기에 적합하게 된다. 우리는 본성이 하나님이 아니라 본성으로는 사람이며 죄 때문에 의롭지 않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의로운 사람이 되셔서 죄인인 사람을 하나님 앞에서 중재하셨다. 죄인은 의로운 자와 상합하지 않으나 사람과 사람은 상합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몸이 한번 죽었다가 부활하신 것은 영혼이 이중으로 죽었다가 부활하는 것과 조화되며, 그 결과는 구원이다. 그리스도의 한번 죽으심을 어떻게 우리의 두번 죽는데 주셨는가. 우리 구주의 한 죽음은 우리의 두 죽음에 대해서 구구언의 원인이 되었고 주의 한 부활은 우리의 두 부활을 가져다 주었다. 그의 몸은 죽음과 부활의 양쪽에서 우리에게 일종의치료약이 되었다. 그것은 속사람의 신비와 겉사람의 예표가 되기에 충분한 치료제였다. 하나와 둘의비율은 여섯이란 수가 완전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여섯의 완전함을 자주 말한다. 일년에도 여섯이 많이 나온다. 여섯이라는 수는 그리스도의 몸과 예루살렘 성전 건축에서도 나타나셨다. 부화까지의 사흘에서도 하나와 둘의 비율이 나타나 있다.

 

우리는 어떻게 한 중보로 말미암아 많은 자가 하나로 집결되는가.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이 그 안에서 하나가 되기를 원하시는가. 그리스도가 생명의 중보이신 것같이 마귀는 죽음의 중보이다. 귀신들의 기적은 멸시해야 한다. 마귀는 죽음의 중보요 그리스도는 생명의 중보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진해서 죽으셨다. 생명의 중보는 어떻게 사망의 중보를 극복하셨는가.마귀는 그 추종자들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경멸하게 만든다. 우리의 허물을 가장 깨끗이 씻는 가장 완전한 희생은 그리스도이시다. 희생에 대해서는 네가지 점을 생각해야 한다. 누가 드리는가.누가 받는가. 무엇이 드려지는가. 누가 제사의 덕을 볼 것인가 하는 점이다. 자기의 의로 정화되어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믿는 자들은 교만하다. 부활과 장래의 일에 대해서는 옛 철학자들에게 묻지 말라.

 

미래사를 아는 방법은 몇가지인가. 철학자들이나 탁월한 고대인들에게 죽은자의 부활을 물어선 안된다. 하나님의 아들이 성육신하신 목적은 우리가 믿음으로 깨끗이 되며 들어올림을 받아 변함이 없는 진리에 도달하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성자는 어떻게 파견되며 미리 선포되셨는가. 그는 어떻게 육신의 탄생으로 파견되어 작게 되면서 성부와의 동등성에는 상함이 없으셨는가. 보내는 이와 보냄을 받는 이가 동등이시다. 무슨 까닭에 성부가 성자를 보내셨다고 하는가? 성령의 파견은 누가 어떻게 보내셨는가. 성부는 신성 전체의 처음이시다. 성령이 감각에 나타나심과 삼위일체 신의 공동 영원하시므로 창조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삼위일체 신으로 분리할 수 없이 일하신다. 성부가 성자를 보냈다고 해서 성자가 더 작은 것이 아니며 성부와 성자가 성령을 보냈다고 해서 성령이 더 작은 것이 아니다.

 

 

 

제5권

 

성경을 근거로 삼지 않고 자기의 이성을 근거로 삼아서 이단자들이 주장하는 이론을 반박한다. 성부와 성자의 본질이 같지 않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하나님에 대한 말은 모두 그의 본질에 대한 말이라기 때문이라고 한다. 따라서 낳는다와 난다 또는 난다와 나지 않는다는 서로 다르며 서로 다른 본질이라고 한다. 그러나 저자는 하나님에 대한 말은 모두가 본질에 관한 말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다. 하나님의 본질을 위대하고 선하시다고 할 때나 그 밖에 하나님 자신에 대하여 말할 때와 다르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해 상대적으로 즉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과 다른 존재와의 관계에 대해서 말하는 것도 있다.

 

예컨대 하나님을 성자에 관해서 아버지라 부르며 하나님을 섬기는 피조물에 관해서 주라고 부른다. 이렇게 상대적으로 그 자신 이외의 어떤 존재와 관련해서 말하는 것은 심지어 시간 안에서 나타나는 일인 때가있다. 예컨대 주여 당신은 우리의 피난처가 되셨나이다라고 한다. 이런 때에 하나님 자신에게 어떤 변화가 생기는 것이 아니며 그 본선 또는 본질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하나님께는 물질적이거나 변하는 것이 전혀 없다. 하나님은 변함이 없는 유일한 존재이다. 아리우스파가 났다와 나지 않았다만을 근거로 주장하는 이단 설을 반박한다. 우연한 것은 항상 어떤 변화를 의미한다. 하나님에 대한 말은 우연성에 대한 말이 아니라 본질과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하나님에게는 우연성에 대해서 말할 수 없다. 하나님은 변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나지 않았다고 해서 아버지가 아닌 것이 아니며 아버지라고 해서 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다. 났다라는 말은 아들이라는 말과 같은 뜻이다.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과 난 이라고 부르는 것이 정확히 서로 같은 뜻다.하나님에 대해서 실체에 관한 말은 각 위격에 대해서 따로따로 하는 말이며 삼위일체에 대해서는 함께 하는 말이다. 하나님께는 한 본질과 헬라어로 세 휘포시타시스, 라틴어로는 세 위격이 있다. 성부는 하나님이시요, 성자도 하나님이시요, 성령도 하나님이시라는 것은 본질에 대한 말이다. 우리는 삼위일체를 세 하나님이라고 하지 않고 한 하나님이라고 한다. 세분이 위대하신 것이 아니라 한 분이 위대하시다고 한다. 성부 자신만을 말할 때에는 아버지라는 이름을 쓴다. 하나님이라는 이름은 성부,성자,성령을 모두 의미한다. 삼위일체 신은 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세 위격은 인간적인 뜻으로 해석하면 적당치 않다. 한 본질로서의 하나님에게만 속한 일들을 삼위일체에 대하여 말할 때에는 단수로 쓰고 복수로 쓰지 않는다. 삼위일체를 성부나, 성자나, 성령으로 부르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 삼위일체 안에 계신 한 위격을 부를 때에는 그 고유명사로 부른다. 상호 관계를 표시하는 이름이 없을 때가 있다. 삼위일체에서 시초라는 말을 어떻게 쓰는가. 성령의 유일한 시초는 성부와 성자이다. 성령은 선물로 주시기 전에도 주신 후와 같이 선물이었는가. 선물과 주어진 것은 뜻이 다르다. 주어지기 전에도 선물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주어지지 않았으면 주어진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시간 안에서 하나님에 대해서 하는 말은 상대적인 것이며 우연적인 것은 아니다.

 

 

 

제6권

 

사도는 어떻게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라고 하는가. 문제가 제기된다. 성부 자신은 지혜가 아니고 지혜의 아버지이실 뿐인가. 또 지혜가 지혜를 낳았는가. 그러나 이에 대한 대답은 잠깐 뒤로 물리고 성부, 성자, 성령의 하나되심과 동등하심을 증명한다. 그리고 우리는 삼위일체신을 믿어야하며 삼중 신을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다. 끝으로 힐라리우스가 한 말성부 안에 영원성, 형상 안에 나타남, 은사안의 효용을 설명한다.성자는 성부의 능력과 지혜라고 사도는 말한다.

 

그래서 정통파는 초기 아리우스 파를 반박했다. 어려운 문제가 생긴다. 성부 자신은 지혜가 아니시고 지혜의 아버지이실 뿐인가. 여러가지 이름이 열거된다고해서 하나니이 그와 동등하게 영원한 여러 아들들의 아버지시라는 결론이 나오지 않는다. 지혜인 것은 확실히 권능이며 권능인 것은 지혜이기 때문이다. 성부 없이는 성자는 하나님이 아니시며 그 역도 참이며, 성부와 성자는 함께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는 그가 성부 안에 계셨다로 이해해야 한다. 성부와 성자의 본질적 존재가 서로 하나임은 우리가 하나이라는 말씀으로 추측된다.

 

성자는 지혜와 모든 다른 일에서 성부와 동등하시다. 성령도 모든 점에서 성부 성자와 동등하시다. 하나님은 어떻게 단순하고도 다양한 본질적 존재이신가.하나님은 삼위일체이시지만 삼중은 아니시다. 하나님의 본성에는 아무것도 덧붙일 수 없다. 한 위격을 유일한 신이라고 부르는가. 또는 삼위를 합해서 그렇게 부르는가? 힐라리우스는 각 위격에 속성을 배정했다. 삼위일체는 피조물에 나타나신다.

 

 

 

제7권

 

하나님이신 성부는 그의 능력과 지혜이신 성자를 낳으셨는데, 그 성부는 능력과 지혜의 아버지일 뿐 아니라 그 자신도 능력과 지혜이시며, 성령도 마찬가지이시다. 그러나 세 능력과 세 지혜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한 능력과 한 지혜이시다. 다음에 탐구하는 문제는 무슨 까닭에 라틴 사람들은 한 하나님 안에 한 본질과 세 위격이 있다고 말하고 헬라 사람들은 한 본질과 세 숩스탄티아, 혹은 휘포시타시스가 있다고 말하는가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가지 표현 방법은 언어상의 필요에 의하여 생긴 것임을 밝혀서 우리가 어떤 세분이냐는 질문을 받을 때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라는 세분이라는 참된 고백을 할 수 있도록 한다.

 

삼위일체의 각 위격이 지혜이신가라는 질문으로 돌아간다. 이 질문을 해결하는 데에는 어떤 곤란이 있으며 방법이 무엇인가. 성부와 성자는 함께 한 본질적인 존재인 것과 같이 함께 한 지혜이시다. 그러나 한 말씀인 것은 아니다. 성부와 성령도 지혜이신데, 성경에서 주로 성자를 지혜라는 이름으로 알리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 함께한 지혜이다. 어떤 사정으로 헬라인은 세 휘포스타시스를 말하고 라틴 사람들은 세 페르소나를 말하게 되었는가. 한 하나님 안에 세 페르소나가 있다는 말씀은 성경에 없다. 하나님에 관한 말로는 에센티아가 합당하고 숩스탄티아는 적당하지 않다. 삼위일체에 대해서 한 페르소나와 세 에센티아를 말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위에서 말한 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삼위일체에 대해서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랐으며 또 그 형상이다. 에센티아가 屬이고 숩스탄티아나 페르소나가 種이라면 셋을 세 숩스탄티아나 세 페르소나라고 하는 것같이 세 에센티아라고 해야된다고 한 말을 제거해야 되겠다. 만일 에센티아가 한 속이라면 하나밖에 없는 에센티아는 종이 없다.

 

 

 

제 8권

 

성부가 성자보다 크시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성부와 성자를 합해도 성령보다 크시지 않으며 세분을 합해도 어느 한분보다 크시지 않다는 것을 설명하여 증명한다. 다음에 진리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최고 선에 대한 우리의 지식과 의에 대한 타고난 사랑을 근거로 어떻게 하나님의 본성을 이해할 수 있는가를 밝힌다. 아직 의롭지 못한 영혼도 의로운 영혼을 사랑한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려면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무엇보다도 역설한다. 성경에 하나님을 사랑이라고 했으며 사랑에는 삼위일체의 형적이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위에서 말한 것의 결론으로서, 믿음에 관한 더 어려운 문제들을 생각할 때 지켜야 하는 원칙이 있다.

 

하나님 안에서는 한 위격보다 세 위격이 더 크지 않다는 것을 이성에 의해서 밝힌다. 하나님이 어떻게 진리이신가를 이해하려면 모든 물체적인 생각을 버려야 한다. 하나님이 최고선이심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마음이 하나님을 지향하지 않고는 선하게 되지 않는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우선 바른 믿음으로 그를 알아야한다. 알지 못하는 삼위일체를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가.그러므로 우리는 허락되는 범위 내에서 삼위일체의 영원성과 동등성과 통일성을 이해하기를 원하지만 이해하기 전에 먼저 믿어야한다. 아직 의롭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그 사랑하는 의로운 사람을 알수 있는가. 의로운 사람이 아니면 아무도 무엇이 의로운 사람이신가를 모른다면 의로운 사람이 아니면 아무도 의로운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 의롭지 않을 때에도 어떤 근거로 무엇이 의로운 사람인가를 아는가.

 

우리 이외의 것에서 안다면 어떤 몸에서 알 것이다. 마음이 다른데서 본 일이 없는것을 자체 속에서 본다는 것이야 말로 이상한 일이다. 참으로 의로운 마음을 바르게 보는 그 마음은 그 자체가 마음이며 아직 의로운 마음이 아니면서도 자체 안에서 의로운 마음을 보는 것이다. 의롭다고 믿어지는 사람은 형태와 진상 때문에 사랑을 받는 것이며 형태와 진상은 그를 사랑하는 사람이 자기 속에서 보고 이해하는 것이다. 삼위일체를 알도록 인도하는 진정한 사랑에 대하여 천사들과 함께 기적을 행함으로써 하나님을 외부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선한 천사들의 경건을 본받음으로써 내부에서 찾아야 한다.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한다. 그는 하나님에게서 오며 하나님인 그 사랑 자체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의의 변함없는 형태를 사랑하기 때문에 의인들을 사랑하게 된다. 사랑에는 마치 삼위 일체의 형적처럼 세 가지 면이 있다.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이 품은 것이며, 사랑을 받는 것이 받는다.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을 받는다는 것과 사랑, 이 세 가지이다.

 

 

 

제 9권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 안에는 일종의 삼위일체가 있다. 즉 마음과 마음 자체를 아는 지식과 마음이 그 자체와 그 자체를 사랑하는 그 사랑, 이 셋이다. 그리고 이 셋은 서로 동등하며 그 본질이 하나이다. 우리는 삼위일체를 어떻게 연구할 것인가. 우리는 믿어야 할 일을 믿으면서 의심하지 말며, 이해해야 할 일들을 신중하게 주장해야한다. 사랑에서 발견되는 세가지를 고려해야 한다. 내가 무엇을 사랑할 때에는 관련된 것이 셋이다. 즉 내 자신과, 내가 사랑하는 것과, 사랑 자체이다. 어떤 것을 사랑하는 사람을 내가 사랑하는 것이 아니면 나는 사랑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를 알며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 속에 삼위일체의 형상이 있다. 마음은 자체를 통해서 자체를 안다. 마음 자체와 그것에 대한 사랑과 지식 이셋은 하나이며 이 셋은 실체적으로 존재하며 관계적으로 서술된다. 이 셋은 분리할 수 없다. 이 셋은 부분들인 듯 결합되거나 혼합되지 않으며 한 본질적 존재며 서로 관계적인 존재이다. 이 셋은 각각 자체로 있으면서 서로 모든 것 안에 있다. 사랑을 그 자체로서 아는 지식과 영원한 진리 안에서 아는 지식은 다르다. 물질적인 사물들도 영원한 진리의 법칙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 우리는 영원한 진리 안에서 본 것들을 근거로 말(언어)을 마음 속에 잉태하며 낳는다. 말은 피조물의 것이거나 창조주의 것이거나 간에 사랑으로 잉태된다. 그러나 이 사랑은 욕망과 다르다. 욕망과 사랑은 어떻게 다른가. 영적인 사물에 대한 사랑에서는 난 말과 잉태된 말이 같은 하나이지만 육적인 사물에서는 그렇지 않다.

 

사랑을 바든 지식만이 마음의 말인가. 우리는 미워하는 것도 안다. 그러나 싫어하는 것을 마음에 잉태하고 낳는다고 말 할 수 없다. 마음이 자체를 알고 사랑할 때에는 반드시 사랑이 마음과 그 말을 연결한다. 그리고 마음이 지식을 사랑하며 사랑을 알기 때문에 말이 사랑 안에 있고 사랑이 말 안에 있으며 둘이 다 그 사랑하며 말하는 사람 안에 있다. 자체를 아는 마음의 형상 즉 그것이 낳은 말은 그 마음 자체와 동등하다. 지식은 마음의 자식인데, 무슨 까닭에 사랑은 그렇지 않은가. 이 질문에 대답한다. 마음과 마음 자체에 대한 지식과 자체에 대한 사랑, 이 셋은 삼위 일체의 형상이다. 우선 알려질 수 있는 것이라면, 아직 알려지지 않았어도 알려질 가능성은 분명히 있다. 마음은 자체를 사랑하기도 전에 자체를 사랑할 능력이 있었으므로 자체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

 

 

 

제 10권

 

사람의 마음에는 기억과 이해력과 의지라는 삼위일체도 있음을 밝히며 이 삼위일체는 더 분명하다. 연구심이 강한 마음의 사랑은 모르는 것에 대한 사랑이 아니다. 지식의 경우에는 그에 대한 사랑을 일으키는 대부분이 그런 지식을 찬양하며 권고하는 사람들에게 권위가 있다. 언어라는 종 개념이 마음에 떠오를 때 그는 그것을 알며 그것이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모르는 것을 사랑하는 사람은 전혀 없다. 마음이 자체를 사랑할 때에는 자체를 모르는 것이 아니다. 마음은 자체를 부분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안다.

 

영혼을 향해서 자체를 알라고 명령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마음이 자체의 본체에 대해서 오해하게 만드는 원인은 무엇인가. 마음이 자체에 대해서 가진 견해는 기만적인 것이다. 영혼의 본체에 대한 철학자들의 견해 영혼을 한 물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오류는 영혼에 대한 지식의 결함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이질적인 것을 첨가하기 때문이다. 발견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마음 속에 현재 있는 것과 같이 지식에 가까이 있는 것은 무엇인가. 마음은 눈이나 다른 감각기관으로 물건들을 찾는 것과 같이 신체감각을 통하지 않고 마음 자체를 통해서 알려고 할 때에도 그 찾는 것을 발견한다. 영혼은 어떻게 자체를 탐구하는가. 영혼 자체에 대한 영혼의 오류는 어디서 오는가.

 

마음은 자체를 알아야 하되 목전에 없는 자체를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은 네 자체를 알라는 교훈을 이해함으로써 자체를 안다. 마음은 자체에 관해서 확실히 세 가지 일을 알고 있다. 즉 이해한다는 것과 있다는 것과 살아있다는 것이다. 기억력과 이해력 (또는 지성과) 의지에서 우리는 능력과 지식과 이용을 보아야한다. 기억과 이해력과 의지는 본질적으로 하나이며 상대적 관계적으로는 셋이다. 기억과 이해력과 의지를 가진 마음은 삼위 일체의 한 형상이다. 마음이 기억하며 이해하며 원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발견한다. 마음은 항상 자체를 항상 알며 항상 결정하는 것임이 알려졌으므로 그것은 또한 동시에 항상 자체를 기억하며 항상 이해하며 사랑 한다는 것이 이해되었다.

 

 

 

제 11권

 

외면적 인간에게서도 삼위일체의 일종의 형상이 지적된다. 우선 외부로부터 지각되는 것들이 있다. 즉 보이는 물체와 보이는 사람의 시각에 새겨지는 형상과 이 둘을 결합하는 의지의 목적이 있다. 다만 이 셋은 서로 같지 않고 한 본질도 아니다. 한 본질이 얼마씩 셋이 일종의 삼위일체가 되어 마음 자체 속에 있는 것을 본다. 마치 밖으로부터 지각한 것들이 마음 속에 도입된 것 같다. 즉 물체의 형상이 기억 안에 있으며, 생각하는 사람의 마음의 눈이 그리로 향할 때 그것에서 얻는 인상이 있으며 그 둘을 결합하는 의지의 목적이 있다. 그리고 이 뒤의 삼위일체에는 외적 인간에 속한다고도 한다.

 

그것은 밖으로부터 지각한 물체로부터 마음 속에 도입되기 때문이다. 외면적 인간에게도 삼위일체의 형적이 있다. 시각에 있는 일종의 삼위일체 시각에는 본성이 다른 것이 셋이 있다. 보이는 물건의시각, 즉 어떻게 형상이 생기는가. 실례를 보면 더욱 분명히 알 수 있다. 이 세 가지가 어떻게 결합되어 하나가 되는가. 보이는 물체와 그 시상과 이 둘을 연결한 마음의 주의력은 분명히 서로 구분해야 한다. 보이는 물체의 형태가 있고 그 형태가 감각기관에 인상을 주어 시상이 되고 영혼의 의지가 감각기관을 대상으로 향하게 하여 거기에 고정되게 만든다. 처음 것 곧 보이는 물체는 우리가 우리의 몸을 볼 때 이외에는 보는 생물의 본성에 속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둘째 것은 거기에 속해서 그 몸안에 나타나며 몸을 통해서 영혼 안에 나타난다. 즉 감각기관 안에 나타나며 이 감각기관은 몸이나 영혼의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의지는 영혼에만 속한 것이다. 이 셋은 본질이 심히 다르지만 함께 하나가 되어 처음 둘 즉 보이는 물체의 형태와 감각기관 안에 생긴 형상은 서로 분리하기 어렵다. 이성이 개입해서 판단한 때에는 예외이다. 기억력과 내면적 시상과 이 둘을 결합하는 의지 이 셋은 생각에서 하나가 된다. 어떻게 이와같이 하나가 되는가. 같은 의지의 의도가 기억에 있는 물체상과 생각한 시상을 결합해서 마음의 눈이 기억을 보고 얻은 시상을 결합해서 어떤 통일체가 생겨난다. 이 셋은 본성이 다르지 않고 전체가 한 마음 속에 있으므로 본질이 같다.

 

외면적 인간의 삼위일체는 즉 외적인 시상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다. 죄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형상을 원한다. 외적인 시상에서 물체의 형상은 어버이이고 시상은 자식이다. 이것들을 결합하는 의지는 성령을 암시한다. 보이는 일에서 의지의 휴식과 종말은 어떤 것인가. 본 것을 다시 생각하는 사람의 기억에는 다른 삼위일체가 있다. 생각하는 양식이 다르다. 형상은 다음 형상을 만들어 낸다. 우리가 보지 않은 것에 다른 데서 본 것을 상상이 첨가한다. 내면적 인간에게서 같은 이 삼위일체를 탐구하며 외면적 인간으로부터 내면으로 들어가도록 노력해야겠다.

 

 

 

제 12권

 

지혜와 지식을 구별한 다음에 올바른 의미의 지식에 있는 일종의 특별한 삼위일체를 지적한다. 이 삼위일체는 확실히 내면적 인간에게 속한 것이지만 아직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부르거나 생각할 만한 것은 아니다. 외면적 인간과 내면적 인간은 어떤 것인가. 생물 중에서 사람만이 물체들이 있는 영원한 이치를 깨닫는다. 정관(靜觀)에 속한 높은 이성과 행동에 속한 낮은 이성은 한 마음 속에 있다. 영원한 사물을 정관(靜觀)하는 마음의 부분에만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 남녀의 결혼과 그 자식들에게서 삼위일체의 형상을 만들어내는 견해는 배척해야 한다.

 

만일 사람이 성자의 형상대로 창조되어 그 결과로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 성자의 형상이라면 성자와 하나님이 같지 않게 된다. 그러나 성경에서 성부와 성자가 동등해서 서로 같으시므로 인간은 성부의 형상대로도 창조되었다. 남자는 어떻게 하나님의 형상인가. 여자도 하나님의 형상이 아닐까.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라고 한 사도의 말씀은 어떻게 비유적 신비적으로 해석해야 하는가. 갈3:26-28에서처럼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다고 하므로 사물의 영원한 이치를 보며 생각하는데만 전념하는 마음의 측면이 여자에게도 있다. 하나님의 형상을 저버리는 것은 결국 최저의 타락 상태까지 점진적으로 가게된다. 내면적 인간에게는 일종의 숨은 혼인이 있다. 불법적인 쾌락을 생각하고 실행하지 않는 것은 결심하고 외적으로 나타난 것보다는 훨씬 적은 죄이다.

 

남자는 마음을 의미하고 여자는 신체 감각을 의견이 있다. 그러나 동물에게도 신체 감각이 있으므로 이 의견을 배척한다. 지혜와 지식은 어떻게 다른가. 하나님께 대한 경배는 곧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다. 영원한 것들에 대한 정신적 인식은 지혜를 통해서 온다. 플라톤과 피타고라스의 회상설에 반대한다. 사모스의 피타고라스에 대하여, 그리고 지혜와 지식의 차이에 대하여, 또한 무상한 것들에 대한 지식에서 삼위일체를 찾는데 대하여. 영원한 사물에 대한 정신적 인식은 지혜에 속하며 무상한 사물에 대한 합리적 인식은 지식에 속한다는 것이 지혜와 지식에 대한 바른 구별이다.신체 감각과 형상이 되어 우리의 영혼 또는 정신에 들어오는 것들에서 삼위일체를 얻어본 것과 같다.

 

 

 

제 13권

 

저자는 전권에서 지혜와 지식을 구별하고 지식을 검토하면서 거기서 삼위일체를 찾기 시작했는데, 여기서 그 검토를 계속한다. 그리고 이 기회에 기독교 신앙을 추천하며 신자들의 믿음은 공통된 하나라는 것을 설명한다. 모든 사람이 행복을 원하면서 모든 사람이 행복으로 가게 하는 믿음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고 하며 이 믿음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어야 하며 그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죄를 용서받고 마귀의 지배에서 해방되지 못한다고 하며 그리스도가 마귀를 정복하셨을 때에 힘이 아니라 의를 쓰실 필요가 있었다는 것을 밝힌다. 끝으로 이 믿음의 말씀을 기억해 둘 때에 마음 안에 일종의 삼위일체가 있다고 한다.

 

사람이 생각하지 않을 때에도 그 말씀의 소리가 기억 안에 있고 사람이 그 소리들을 생각할 때 회상하는 마음의 눈 그것을 향하고 끝으로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며 회상할 때에 의지가 둘을 결합한다. 성경에 의해서 지혜와 지식의 직분을 구별하려고 한다. 요한 복음의 초두에서 어떤 말씀은 지혜에 속하고 어떤 말씀은 지혜에 속한다. 어떤 것은 믿음의 도움을 받아야만 알 수 있다. 우리는 어떻게 우리 안에 있는 믿음을 보는가. 요한복음 기사 중에서 어떤 것은 신체 감각으로 알 수 있으며 어떤 것은 마음의 이성으로만 알 수 있다. 믿음은 신체가 아니라 심정에 속한 일이다. 믿음은 어떻게 신자에게 공통되며 같은가. 신자들의 믿음이 하나인 것은 뜻하는 사람들의 뜻이 하나인 것과 같다. 어떤 욕망들은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이며 각 사람이 알고 있다. 행복하고자 하는 소원은 모든 사람이 같지만 행복 자체에 관해서는 소원이 매우 다양하다.

 

모든 사람이 행복하기를 원하는데, 행복에서 멀어지는 것을 택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사람이 언젠가 행복하게 되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하다. 행복은 내세에서만 얻으리라. 교만한 철학자들의 행복은 가소롭고 가련한 것이다. 영생이 없이는 행복이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인간의 이론이 아니라 믿음의 도움으로 장래의 행복은 참으로 영원하리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성육신 하셨기 때문에 행복이 영원하리라는 것을 믿을 수 있게 된다. 죽을 운명의 불행에서 사람을 구출하기 위해서는 말씀의 성육신보다 더 적당한 방법이 없었다. 우리의 공로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사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의 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가? 아담의 죄 때문에 모든 사람이 마귀의 권세에 넘겨졌다.

 

사람은 힘이 아니라 마귀의 권력에서 구출되어야 했다. 그리스도께서 죽을 책임이 없으면서 죽으셨기 때문에 죽을 책임이 있는 사람들을 해방하셨다. 죽음과 금생의 재난들이 남아 있는 것도 선택된 자들을 위해서 유익하게 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하심을 얻기 위해서 그리스도가 죽으신 것은 어떻게 합당했는가. 하나님의 진노란 무엇인가. 무슨 까닭에 하나님의 아들은 아담의 종족과 처녀에게서 인간성을 취하셨는가. 하나님은 다른 방법으로도 할 수 있으셨따. 그러나 정복을 당한 종족에게서 인간성을 얻음으로써 인류의 원수를 정복하게 하시며, 처녀에게서 인간성을 취하므로 정욕이 아닌 영에 의해서 수태한 것이다. 성육신의 말씀에서 지식에 속한 것과 지혜에 속한 것은 무엇인가. 육신이 되신 말씀이 우리를 위해서 시간과 공간에서 겪으신 이 모든 일은 우리가 지적한 구별에 의하면 지식에 속한 것이며, 말씀 자체에는 시간과 공간이 없으므로 성부와 함께 동등하게 영원하며 도처에 전적으로 계신다.

 

이 말씀에 참된 말을 할 수 있다면 그 말은 모두 지혜에 속한다.실천적 지식과 진정한 믿음에서 발견된 일종의 삼위일체에 우리는 점진적으로 어떻게 도달했는가.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이 믿음은 사랑으로 역사하며 여러가지 덕성도 모두 이 믿음과 관련된다. 이 믿음을 품고 이 생활을 하는 신자의 마음 속에 어떤 생각들이 기억에 보존되며 회상으로 검토되며 의지로 수락될 때에 한 독특한 삼위일체가 형성된다.

 

 

 

제 14 권

 

사람의 진정한 지혜를 논한다. 사람은 그 마음에 관해서 하나님의 형상이지만 이 형상은 무상한 것들에 두어서는 안된다. 기억과 이해력과 사랑이나 시간 내에 있는 믿음이나 마음 자체를 연구하는 마음에도 둘 것이 아니라 영구한 것에 두어야 한다. 하나님이 자기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신 그 형상에 따라 마음이 하나님을 알아 새롭게 되며 지혜에 이를 때에 이 지혜가 완성된다. 지혜에서는 영원한 것을 정관한다.우리가 여기서 논하려는 지혜는 무엇인가. 철학자라는 이름의 유래와 지혜와 지식의 차이에 대해서 이미 말하였다.

 

시간적인 믿음을 품으며 정관하며 사랑하는 데는 일종의 삼위일체가 있지만 그것은 아직 정확히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할 수 없다. 영혼의 본성은 영원불멸한 것이며 영혼이 처음으로 창조된 이후 영혼에 있는 가장 좋은 것이 그 영원불멸성과 함께 영속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형상은 이성적 영혼의 영원성에서 찾아야 한다. 삼위일체는 어떻게 마음 속에 설명되는가. 유아들의 마음은 자체를 아느가. 자체를 생각하는 마음 속에 어떻게 일종의 삼위일체가 있는가. 이 삼위일체는 어떤 몫을 하는가. 마음으로 보는 작용은 그 본성에 속한 일이며 마음이 자체를 생각할 때에는 그 본성에 다시 소환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비물체적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기억 속에 있는 것들을 마음이 회상할 때에 마음의 눈이 어떻게 생기는가. 또한 생각하기 전에 기억으로 삼라의 속에 있던 것이 생각할 때에 어떻게 나게 되는가를 설명했다. 이제는 마음의 가장 고귀한 부분에서 하나님의 형상인 삼위일체를 찾아야 겠다. 내세에는 공의와 그 밖의 덕성들이 없어질 것인가. 자체를 기억하며 이해하며 사랑하는 마음이 어떻게 한 삼위일체를 형성하는가. 기억은 현재의 일들도 기억하는가. 마음 속에 있는 삼위일체는 마음이 하나님을 기억하며 이해하며 사랑한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리고 이렇게 하는 것이 지혜다. 사람은 어떻게 하나님을 잊으며 회상할 수 있는가. 마음은 자체를 바르게 사랑함으로써 하나님을 사랑한다. 마음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자체를 미워한다고 해야 한다.

 

약하고 그릇된 마음도 자체를 기억하며 이해하며 사랑하는 점에서는 항상 강하다. 마음은 하나님을 기억하며 이해하며 사랑함으로써 행복하게 되기 위해서 하나님에게로 방향을 돌려야 한다. 영혼은 장래의 행복을 기대하지만 잃어버린 행복을 회상하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와 원칙들을 기억하고 있다. 올바른 생활들의 변함없는 원칙들은 불경건한 자들도 알고 있다. 하나님의 형상은 어떻게 사람 안에서 새로 형성되는가. 마음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은 어떻게 새롭게 되어 드디어 행복한 점에서 마음 속에 있는 하나님의 모양이 완성되는가. 사도 요한의 말씀은 우리가 장차 몸도 영생하리라는 점에서 하나님의 아들과 같을 것이라는 뜻이다. 요한의 말씀은 우리가 영생으로 삼위일체의 완전한 모양이 되리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지혜는 행복에서 완성된다.

 

 

 

제 15 권

 

이제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영원하고 비물질적이고 변함없는 사물들에게서 탐구하게 되었다. 이런 사물들을 완전히 정관하는 것이 우리에게 약속된 행복이다. 그러나 금생에서는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이면서도 이 삼위일체를 거울로 보듯이 희미하게 볼 뿐이다. 우리 자신의 마음에 있는 말을 근거로 하나님의 말씀이 나시는데 대하여 추측과 설명을 할 수도 있지만 두 말씀이 심히 다르기 때문에 큰 곤란이 있다. 성령이 나오시는 문제도 우리의의지가 성령과 결합하는 사랑을 근거로 설명된다. 하나님이 마음 위에 계신다. 우리가 본성(마음) 위에있는 것을 찾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비록 이해할 수 없을 지라도 항상 찾아야 한다. 삼위일체의 흔적을 피조물에서 차즌 것은 무익하지 않다.

 

우주 전체는 하나님이 계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자연적인 이성으로는 삼위일체를 설명하기 어렵다. 하나님의 단순성에 어떻게 삼위일체가 있는가. 사람에게서 볼수 있는 삼위일체들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이 나타나신다. 우리가 언급한 삼위일체들에서 하나님이신 산위일체를 발견하는 것은 쉽지 않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을 거울로 본다고 하는 사도의 말씀은 아직 우리가 완전한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함을 말한다. 마음의 언어에 대하여 우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울과 수수께끼로 보듯한다.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와 같은 것은 우리의 외면적이며 감각적인 말에서 구할 것이 아니라 내면적이며 심적인 말에서 구해야 한다. 우리의 말이나 지식과 하나님의 말씀이나 지식 사이에는 최대의 차이가 있다.

 

성부에게서 나신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점에서 성부와 동등하시다. 우리의 말과 하나님의 말씀은 어떻게 다른가. 우리의말은 영원하다고 할 수 없다. 우리의 말은 결코 우리가 하나님과 같이 될 때에도 하나님의 말씀과 동등할 수 없다. 성령을 어떻게 사랑이라고 부르며 또 성령만을 사랑이라고 부르는가. 성경에서 성령을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은 합당하다. 하나님의 선물 가운데서 사랑이 가장 귀하다. 성경에서는 성령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부른다. 삼위일체 내에서 성령만이 사랑이신 것은 아니지만 특히 성령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사람 안에 있는 삼위일체와 하나님 안에 있는 삼위일체와의 차이가 있다. 하나님의 삼위일체는 불가분성이 심히 위대하기 때문에 사람의 경우와 다르다. 지금은 믿음의 도움으로 삼위일체를 거울로 보듯하며 미래에 약속된 대면시에 더 분명히 보게 되리라 한다.성령은 나시지 아니하셨고,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신다는 것은 우리가 천국에 이르렀을 때에만 이해될 것이다. 성령은 그리스도께서 두번 주셨다.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시는 것은 시간과 관계없는 일이며, 성령을 두분의 아들이라고 부를 수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