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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아세례에 대하여

Sola. 2023. 5. 9. 07:00

 

유아세례에 대하여

 

 

유아세례는 그리스도께서 설립하신 제도와 표적의 본질에 가장 잘 부합된다.

 

 

서론

 

오늘날 교회 안에 잃어버린 것이 있다면 그것은 성례(세례와 성찬)에 대한 참된 의미와 그 은혜일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성례를 통해서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은혜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형편에 있는 것입니다. 온통 “성령세례”라는 신비주의적 은사만을 쫓아가는 이 시대에 성례의 의미를 다시 회복하기가 얼마나 힘이 드는지요. 그럼에도 참된 진리의 내용은 인간의 많은 죄악으로도 무너뜨릴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오늘도 성례의 참된 의미가 회복되리라는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요리문답 167문의 “오늘날 필요하면서도 대단히 등한시되어 왔습니다” 라는 고백처럼 너무나 성례의 의미를 무시해 왔습니다. 그러므로 인해서 우리는 “그러나 성도들은 사탄과 이 세상의 시험을 받으며, 그들 안에 남아 있는 죄의 부패한 요소가 깊이 퍼지고, 그들을 보존해 주는 은혜의 방편들을 무시함으로 해서 중한 죄에 빠질 수 있으며(마26:70, 72, 74), 그리고 얼마 동안 그 죄 가운데 거하기도 한다(시51:14). 그로 말미암아 그들은 하나님의 분노를 사며”(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17장3절)라는 고백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방편들을 무시함으로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 가운데 있음을 깊이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잃어버리고 또한 소홀히 여긴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할 것이며, 또한 이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소홀히 여김으로 우리에게 임한 하나님의 진노를 거두어 주시기를 기도하면서 성례의 바른 의미를 부지런히 증진시켜야 할 것이며 또한 이런 의무를 우리는 평생동안 지켜가야 할 것입니다(대요리문답167문). 이제 그런 의무의 하나로서 유아세례에 대한 참된 의미와 그 은혜의 내용을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본론

 

 

1. 유아세례의 본질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신약의 성례로서 은혜 언약의 표시와 인증이다(롬4:11; 골2:11,12.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28장 1절). 그렇기 때문에 유아세례도 이 본질적 의미에 속해 있는 것이다. 특히 이것은 세례의 효력처럼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에게 우리는 하나님의 것임과 그로인해서 부어주신 엄청난 은혜를 생각나게 하고 이를 새롭게 재현시키는 의미가 있다. 또한 우리뿐만 아니라 우리의 자녀들에게까지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를 보게 한다. 결국 우리는 유아세례의 집례를 살펴보면서 아무런 공로도 행할 수 없는 유아에게 엄청난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가 부어지는 것을 보면서 우리의 구원도 이와 같이 우리의 공로로 되어진 것이 아니라 값없이 하나님께서 거져 베풀어주신 은총에 의해서 주어진 것임을 더욱 확인하게 되어 깊은 감사를 드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특히 유아세례의 중요성과 관련해서 제네바 교리문답 338문의 “유아세례를 금지 할 경우 우리는 구약시대 사람들이 누렸던 어린아이들에 대한 하나님의 선하심과 긍휼하심의 증거를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유아세례는 우리의 위로에 크게 소용되며 처음부터 있어 왔던 약속을 더욱 굳게 하는 데에도 크게 효력이 있습니다”라는 고백처럼 유아세례를 금지하게 될 경우 하나님의 지극히 높으신 선하심과 긍휼하심에 대한 의미를 상실하게 될 것임을 주의 깊게 생각해서 유아세례의 의미를 잘 지켜가야 할 것입니다. 또한 이 유아세례의 의미를 잘 지켜가게 될 때 우리에게 주어지는 무한한 위로와 소망의 약속을 더욱 확신할 수 있는 은혜 때문이라도 더욱 이 의미를 지켜가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언급들 외에도 웨스트민스터 예배모범에는 다음과 같은 엄숙한 의미가 고백되어지고 있습니다.

 

자기와 자기 아이에게 주신 하나님의 긍휼을 생각하고 아이를 그리스도인 신앙 근거에 대한 지식과 주님의 양육과 훈계로써 기르게 하고 만일 게으르면 그와 아이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어떠함을 깨우치고 의무를 이행하겠다는 엄숙한 약속을 받아 낼 것이다

 

 

위의 내용에서도 동일하게 유아세례의 의미가 바르게 교회 안에서 지켜져 가야 하는 내용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이 의식의 의미에 대해서 무지하고 게을러지게 되면 하나님의 무서운 책망이 있음을 경고해 주고 엄숙하게 이 의미를 교회에서 지켜갈 것을 당부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엄중하게 경고하시고 계신 이유는 이 수단을 통해서 하나님의 교회에 계속적인 은혜가 부어지기 때문에 이것을 소홀히 하게 되면 교회가 급속도록 메말라지고 황폐되어지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2. 유아세례의 근거

 

1) 구약

 

전통적으로 교회에서는 세례의 기초를 구약의 할례에서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제네바 교리문답 334문에서는 “구약의 할례는 모세와 선지자들이 말한 것처럼 회개의 표시였으며 또한 바울이 말한 대로 신앙의 표시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 할례식에서 어린아이들을 제외시키지 않으셨던 것입니다”라고 고백하면서 할례가 세례와 동일한 의미인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또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도 “구약의 성례들이 상징하고 표현하는 영적인 뜻은 본질적으로, 신약의 성례와 동일하다(고전10:1-4 27장5절)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특히 유아할례와 관련되어서는 다음의 구절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창17:9)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창17:10)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창17:11)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창17:12) 대대로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혹 너희 자손이 아니요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무론하고 난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창17:13)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창17:14)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양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

 

위의 말씀을 보게되면 철저하게 할례의식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언약, 즉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창17:7-8)”이라는 약속의 표시로 주어진 것임을 보게됩니다. 이것은 세례의 본질적인 의미와 동일한 내용인 것입니다. 그래서 17:9절 이후에서는 계속적으로 언약에 대한 의미가 강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언약에 유아도 반드시 참여 해야 함이 명령되어져 있는 것(17:12)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칼빈은 이와 같은 할례와 세례의 공통점을 언약의 본질적인 의미에서, 그리고 차이점은 단지 확인하는 방법(방식)만이 차이가 있는 것임을 다음과 같이 언급해 주고 있습니다.

 

주께서 구약시대에는 그의 언약을 확인하는 방법으로서 할례를 제정하셨으나 할례가 폐지된 후에도 주의 언약을 확인 해야 할 이유는 여전히 변함이 없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공통점과 차이점을 생각해야 한다. 언약은 공통되고, 언약을 확인해야 하는 이유도 공통적이다. 다만 확인하는 방법만이 다른 것이다. 즉 그들을 위해서 할례가 하던 일을 우리를 위해서는 세례가 대신하는 것이다(강요4.16.6)

 

 

2) 신약

 

신약에서는 세례의 의미를 확증해 주고 있는 구절들에서(마28:19; 행2:38; 벧전3:21)의미를 찾고 유아세례와 관련해서는 마19:13-15절이 가장 대표적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마19:13) 때에 사람들이 예수의 안수하고 기도하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마19:14)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 하시고 (마19:15)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거기서 떠나시니라

 

위의 말씀이 어떻게 유아세례와 연결이 되는지를 칼빈은 다음과 같이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고 이유를 말씀하시면서 유아들을 데려오라고 명령하신 사실을 우리는 경시해서는 안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유아들을 안으시고 기도와 축복으로 그들을 하나님께 드리심으로써 그의 뜻을 행동으로 확증하셨다. 유아들을 그리스도에게 데려가는 것이 옳은 일이라면 왜 세례도 받게 하지 않는가? 천국이 유아들의 것이라면 왜 표징을 그들에게 주지 않는가? 표징은 이를테면 그들에게 교회에 들어가는 문을 열어 주는 것이며 교회에 가입된 그들을 천국의 상속자들 가운데 가입되게 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스도께서 자기에게로 부르시는 유아들을 우리가 쫓아낸다는 것은 얼마나 부당한 일인가?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은사로 장식하시는 유아들에게서 그 은사를 빼앗으며 그가 기꺼이 영접하시는 어린이들을 몰아내는 것이다(기독교강요4.16.7).

 

 

위의 설명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마19:13-15절에서 예수님께서 유아들을 받으시고 안으시고 안수하시고 기도하심으로써 그들이 자신의 것이라고 성별케 하셨음을 선언하신 것은 일반적으로 세례의식을 통해서 우리가 구별된 자로 인정되듯이 여기서 예수님의 행동을 통해서 우리는 유아들이 거룩하게 구별된 본질을 알 수 있기 때문에 그 구별됨의 표시도 여전히 유아들에게 주어야 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3. 유아세례의 효력(은혜)

 

유아세례에서 오는 은혜는 위에서도 이미 언급한 것처럼 하나님의 깊은 선하심과 긍휼의 크심을 깨닫게 되며 또한 우리에게 주어지는 무한한 위로의 내용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이제 칼빈의 언급을 통해서 이 은혜의 내용을 좀더 구체적으로 제시해 보겠습니다. 칼빈은 부모에게와 유아 자신에게 주어지는 은혜를 각각 다음과 같이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부모에게)

날인과 같이 어린이에게 전달된 하나님의 표징은 경건한 부모에게 주신 약속을 확인하며, 주께서는 부모들뿐만 아니라 그의 후손들에게도 하나님이 되실 것이고 그의 인애와 은총을 부모들뿐만 아니라 그의 후손에게도 천대에 이르기까지 주고자 하신다는 것이(출20:6) 확인되었다고 선언한다. 경건한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자기들 때문에 자기들의 후손까지 생각해 주시는 것을 볼 때, 여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이 무한한 너그러우심에 깊이 감동되어, 먼저는 주의 영광을 찬양하며 다음에는 비상한 행복감이 마음에 넘쳐 인애하신 아버지를 더욱 깊이 사랑하겠다는 고무를 받는다. 우리의 연약함을 보시고 이 문제에서 우리를 부드럽게 다루려고 하셨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비가 자녀들에게 미치리라는 약속을 믿는 사람들은 자녀를 교회에 바쳐 자비의 상징으로 인침을 받게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더욱 확신을 얻도록 분발하는 것을 자기의 의무로 생각해야 한다. 주의 언약이 자녀들들의 몸에 새겨지는 것을 자기 눈으로 보기 때문에 더욱 확신이 생긴다(강요4.16.9).

 

경건한 사람들로서는, 하늘 아버지께서 자기들에게 큰 은혜를 주셔서 자기들의 자녀까지도 돌보아 주신다는 것을 말씀으로 들을 뿐만 아니라 눈으로 보고 확신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일인가? 우리가 죽은 후에도 우리의 후손을 돌보아 주셔서 우리에 대한 계속 관심을 가지시는 하나님은 우리에 대해서 가장 선견지명이 있는 아버지시라는 것을 우리는 이 일에서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강요4.16.32).

 

 

(유아 자신에게)

교회에 접붙임을 받았으므로 교회의 다른 지체들에게 얼마만큼은 더 인정을 받게 된다. 그리고 장성해서 하나님을 경배하겠다는 열의가 더욱 고무된다. 이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깨달을 나이가 되기 전에 엄숙한 상징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되어 영접을 받았기 때문이다(기독교강요4.16.9).

 

이처럼 유아세례는 부모와 유아 자신에게 큰 위로와 은혜가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해 주셔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신 자비를 우리는 유아세례에 참여하면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무한한 은총과 사랑이 자신의 자녀에게 부어지는 것을 부모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게 될 때 부모는 더욱 하나님의 은총을 확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아에게는 하나님께서 전적인 은혜로 선택해 주셔서 구원을 베풀어 주셨음을 간직하게 되고 그 은혜로 인해서 평생동안 하나님의 인도하심 아래서 자라가게 될 은혜를 부여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의 내용이 예배모범에는 좀더 자세하게 다음과 같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하옵는 것은 주님께서는 주님의 이 말할 수 없는 은총을 더욱 계속 더해 주시옵고, 지금 세례 받고 엄숙하게 믿음의 가족에 들어온 이 아이를 하나님 아버지의 가르치심과 보호하심으로 영접해 주시고, 주께서 자기 백성에게 보여 주시는 은총으로 그를 기억해 주시옵시며, 또한 간구 하옵는 것은 만일 이 아이가 어려서 이 세상에서 취하여 감을 당하면 긍휼에 풍성하신 주여, 이 아이를 영광 중에 영접하여 주옵시고, 그가 살아서 분별하는 연령에 이르거든 주께서 말씀과 성령으로 그를 가르치사 그가 받은 세례가 그에게 효력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권능과 은혜로 그를 붙드시사, 그가 믿음으로 마귀와 세상과 육신을 이기고 마침내 최후의 온전한 승리를 거둘 때 가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권능으로 지켜 주시옵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니다.

 

이처럼 유아세례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총을 깊이 이해하고 간직하며 되돌아 볼 수 있는 은혜의 수단으로 제시되어 있는 것을 보게됩니다. 즉 이 유아세례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적 은총사상 아래서 보게 될 때 깊이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유아의 현재적 그리고 미래적 운명이 하나님의 주권에 있는 것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프린스톤의 개혁교회 신학자인 다위(E. A. Dowey)는 “스스로 자립하지 못하는 유아의 세례는 하나님의 자유로이 주시는 은총의 가장 극적이고 값진 상징이다”라고 이런 정신을 증거해 주고 있기도 합니다.

 

 

 

4. 유아세례에 참여하는 태도

 

유아세례에 참여하는 태도는 위에서 소개된 것처럼 부모로서 엄숙한 고백과 서약을 해야 하는 내용이 있기도 하며 또한 여기에는 부모뿐만 아니라 다른 성도들도 이 의식을 함께 참여해서 세례의 본질적인 의미들을 간직하고 증진시켜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아세례에서 오는 유익은 부모에게뿐만 아니라 이 의식에 참여하는 일반 성도들에게도 지극히 큰 위로와 은혜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요리문답 167문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세례 받고 있는 자리에 참석했을 때에, 세례의 성질과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제정하신 목적과 그것에 의해 우리에게 주어지고 보증된 특전과 혜택, 그것에서 행한 엄숙한 서약 등을 심각히, 그리고 감사히 생각함으로써 하고”라고 고백하면서 함께 참여하는자의 태도를 제시해 주고 있기도 합니다.

 

특히 우리는 여기서 세례의 의미들을 “심각히, 그리고 감사히 생각하며, 기억해야 한다”는 부분을 잘 정리해야 할 것입니다. 즉 참여자들은 유아세례가 집례되어지는 과정을 바라보면서 세례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언약들과 하나님의 은총들을 부지런히 생각하며, 기억해서 그 의미들이 우리의 마음 속에 다시 회복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예배모범에서는 “저희의 세례를 돌아볼 것과, 하나님과의 언약을 배반한 저희의 죄를 회개할 것과 저희의 믿음을 힘있게 할 것과 저희의 세례와 하나님과 저희 사이에 인친 바 언약을 개선하고 바르게 할 것이다”라고 소개하면서 세례의 의미들을 돌아보아야 한다고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결론

 

우리는 지금까지 유아세례의 바른 의미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유아세례는 세례의 의미를 더욱 보충해 주는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즉 세례의 본질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이것을 좀더 다른 방향으로 설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든든히 세워져 갈 수 있도록 성도들의 연약함을 고려하셔서 귀한 은혜의 수단들을 허락해 주셨음에도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우리의 무지와 게으름으로 이 귀한 진리의 내용이 너무나 무시되어지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보게됩니다. 다시 한번 칼빈의 글의 통해서 이 은혜의 내용을 교회 안에서 바르게 간직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사탄이 이런 심히 미묘한 수단(유아세례를 반대하는 주장들)으로 무엇을 의도하는지를 알 필요가 있다. 유아세례에서 얻을 수 있는 확신과 영적 기쁨을 우리에게서 빼앗으며 동시에 하나님의 인애의 영광을 조금이라도 감소시키려는 것이 사탄의 의도이다. 사탄이 이렇게 큰 군대를 동원해서 유아세례를 공격하는 목적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이 증거를 우리에게서 빼앗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의 눈앞에 놓인 약속도 결과적으로 점점 사라지게 하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자비에 대해서 감사할 줄 모르는 불경건한 태도뿐만 아니라 우리의 어린이들에게 경건을 가르치지 않는 태만이 생겨날 것이다(강요4.16.32).

 

우리는 위의 글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유아세례의 참된 의미를 교회에서 잃어버리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영적기쁨들과 약속들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며,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인애와 영광을 사탄에게 빼앗겨 버리는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런 은혜의 수단들을 통해서 교회를 든든히 붙잡아 주시려고 했으며, 또한 교회가 든든해져 감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려고 했기 때문에 이런 은혜의 수단이 가리워져 가게 되면 자연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워지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세례의 참된 의미가 교회에 다시 회복될 수 있도록 이 은혜의 수단을 증진시키는 일을 매진해야 할 것입니다. 특히 이 의식에 참여할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자녀들이 태어나는 즉시 자신의 자녀로 인정하시는 큰 자비를 생각해야 할 것이며, 그러므로 우리는 유아들에게 하나님을 깊이 두려워하며 율법을 지키는 길을 더욱 부지런히 가르치겠다는 강력한 자극을 받아서(강요4.16.32) 이 가르침이 교회에 더욱 견고히 세워져 갈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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