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 자료

사도신경 강해

Sola. 2023. 9. 24. 06:00

 

사도신조(경)

 

 

(1) 사도신경의 작성배경 및 논쟁 내용

 

사도신경에 대해서 우리는 크게 칼빈(John Calvin)과 바빙크(Herman Banck)의 설명을 통해서 자세한 내용을 배우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라 생각한다.

 

 

① John Calvin

 

칼빈의 1536년판 기독교 강요는 본문이 크게 6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에 사도신경은 십계명이나 주기도문과 같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우리는 살펴볼 수 있다. 사도신경이 성경에 없다고 하여 무시할 수 없는 것임을 칼빈은 종교개혁 당시 그의 저서에서 우리에게 밝히 보여주고 있는 바이다.

사도신경에 관해서 칼빈은 1559년판까지 그 내용을 버리지 않고 중요하게 다루고 있음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또한 1536년도판 보다 넓은 범위에서 다루고 있음을 우리는 다음 도표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1536
1539
1543-1550
1559
2. 믿음 →
4. 믿음:사도신경 →
5. 믿음:사도신경 →
3권 2장
사도신경
a. 1부 →
a. 1부 →
6. 신조 1 →
1권 13-14장
b. 2부 →
b. 2부 →
7. 신조 2 →
2권 12-16장
c. 3부 →
c. 3부 →
신조 3 →
3권 1장
d. 4부 →
선택과 예정
d. 4부 →
8. 신조 4. →
〃 →
〃 →
3권 25장
4권 1-9장
4권 11-12장

 

칼빈은 사도신경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얼마나 커다란 가치가 있으며, 그 내용이 성경과 어느 정도나 일치하고 있는지에 대하여 1559년도 판의 내용을 발췌하는 것으로 칼빈의 입장이 얼마나 분명한지 살펴보고자 한다.

 

사도신경은 우리의 구속의 중요한 점들을 간단히 요약하며, 그리스도에 대해서 우리가 유의해야 할 일들을 일일이 분명히 보여 주는 일람표와 같은 구실을 하고 있다. 나는 신경이라고 부르지만, 그 저자 문제는 전연 고려하지 않는다. 고대 저술가들은 신경을 사도들에게 돌리는 점에서 상당히 의견이 일치했다. 사도들이 공동으로 써서 발표했다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전한 가르침을 충실히 수집하며 요약한 것이므로 넉넉히 사도들의 이름을 붙일 만하다고 생각했다.

 

신경이 어디서 나타났든 간에, 교회의 바로 초창기 즉, 사도 시대에 모든 사람이 이구 동성으로 그것을 공중 고백서로 인정했다고 나는 확신한다. 어느 한 개인이 사적으로 쓴 것 같지 않고, 사람들이 회상할 수 있는 가장 오랜 옛날부터 확실히 모든 경건자들이 그것을 신성한 권위로 인정했다. 우리가 유의해야 할 유일한 점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전연 없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즉, 우리의 믿음의 역사 전체가 신경에 간명하고 질서 정연하게 요약되었으며, 성경의 순수한 증언에서 보증을 얻지 못하는 것은 하나도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점을 이해한다면, 저자 문제로 불안을 느끼거나 남과 논쟁하는 것은 무의미한 짓이다. 물론 성령의 진리를 확실히 파악하고 있으면서도, 누가 그것을 말했다거나 썼다는 것까지 알지 못하면 만족하지 않는 사람은 문제가 다르다.

 

김영규 교수는 기독교 강요와 사도신경의 관계에 대하여, “칼빈에게 있어서 참된 신앙의 구성요소에 하나님에 대한 지식(notitia)이 포함하고 있다. 즉 사도신경이 기독교 강요 전체 내용의 지변을 이루면서 ‘우리가 믿는다(credimus), 나는 믿는다(credo)’는 것을 하나님을 아는 것을 포함하는 것으로 해석했다고 볼 수 있다”고 제시하고 있다.

이상으로 사도신경의 내용이 성경과 무관하지 않다는 정도가 아니라 성경의 보증을 받고 있음과 칼빈 자신이 그 가치를 일찍이 깨닫고 기독교 강요를 집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② Herman Bavinck

 

바빙크는 사도신경이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되는 줄의 역할을 했다고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밝히 가르쳐 주고 있다.

 

사도신경은 가장 오래된 신조다. 그것은 사도들 자신들이 규정한 것은 아니지만 일찍이 2세기 초에도 존재했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스도 자신이 주신 삼위일체적인 세례명령으로부터 발전되었던 것이다(마 28:19). 근원에 있어서는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것보다 더 짧지만 기초형태는 같았다. 즉 그것은 기독교가 의존하고 있는 그 큰 사실들의 짧은 요약이었고 그와 같이 계속해서 그것은 공동체적인 근원이 되어 왔고 모든 그리스도 왕국의 통일의 끊을 수 없는 줄이 되고 있다.

 

바빙크는 사도신조의 처음 논쟁이 되었던 주제는 “당신은 그리스도를 누구라 하느냐?”였다고 한다. 이것은 교회가 주님의 말씀 자체로부터 모든 세계에 대하여 대답해야할 전 지배적인 물음이었는데 이것으로부터 잘못된 형태들이 나왔는데, 그 예를 다음과 같이 들고 있다.

 

유대주의를 따르는 무리들이란 예수를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의 인간, 기이한 재주를 가지고 태어난 인간, 선지자적 영으로 영감된 인간, 말에나 역사에 능력 있는 인간, 그러나 그 나머지에 있어서는 하나의 인간에 불과한 것으로 인식하려는 모든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교주의 편에서는 예수 안에서 신들의 아들, 하늘로부터 온 신형체(Godsgestalte)로 보려는 자들, 구약의 천사들과 같이 잠시 땅에 나타나 그림자의 몸을 취하였던 인물로 보려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이들은 그를 육신이 되신 아버지의 독생자로서는 고백하려고 하지 않았다.(이단)

 

이 두 이단들을 대항하여 교회는 성경에 맞게 그와 같이 그리스도는 참으로 육신으로 오신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참된 독생자이심을 주장해야 했다. 이것을 교회는 긴 싸움 끝에 위에서 말한 신앙고백서들로 고백했고, 사도 요한과 더불어 하나님의 아들이 육체로 오신 것을 부정하는 모든 교리를 거절했다(요일 2:18, 22; 4:2, 3). 그와 같이 그리스도적 교회는 그의 본질이요 핵심이 기독교의 특별한 전체 특성을 주장했다.

 

이것이 이 큰 일을 행한 공의회와 종교회의가 전체 기독교에 있어서 근본적이고 커다란 의의를 가진 이유다 (작성배경). 사도신경에서 요약하고 있는 기독교의 사실들, 그리스도의 인격과 하나님의 삼위적 본질 속에 그리스도 교회들 사이에 존립하는 통일점이 있으니, 이 통일점은 그들 모두가 서로 유대주의와 이교주의를 반대하는 데 하나가 되게 하고 교회를 분리하는 무서운 의견차이에서도 잊게 되거나 무시될 수 없게 한다.”

 

 

 

(2) 사도신경의 특징 및 영향

 

사도신경의 특징은 먼저 가장 오래된 신조라는 것과 매우 단순하고 간결하여 어떤 수준에 있는 사람이건 어떤 예배를 위해서건 다 만족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학적 지식이 매우 수준급에 있는 사람들에게 공적인 교리를 규정해줌에 있어서도 매우 적절하다는 것이다.

 

사도신경은 다른 신조들의 기초 역할을 하였다. 예를 들어 니케아 신조는 사도신경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한 교리를 보다 분명하게 확대시켰고, 아다나시우스 신조는 사도신경의 삼위일체 교리와 그리스도의 품위에 관한 교리 전체를 더욱 확대시켰다.

 

 

 

(3) 사도신경에 대한 평가

 

칼빈은 사도신경이 성경의 내용과 잘 일치한다고 평가할 뿐만 아니라 사도신경을 믿음의 요약이요 총체라고 평가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믿음의 본질이 무엇이냐에 대해서 사도신경으로부터 배울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사도신경은 우리의 구속의 중요한 점들을 간단히 요약하며, 그리스도에 대해서 우리가 유의해야 할 일들을 일일이 분명히 보여 주는 일람표와 같은 구실을 하고 있다고 하였다.

 

핫지(A.A.Hodge)는 영국에서는 소요리문답을 처음 출판했을 때 주기도와 십계명과 사도신경을 첨가했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 “사도들이 작성했다거나, 성경의 일부분으로 여길 것은 아니지만 기독교 신앙의 요약이며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며 그리스도의 고대 교회들이 받아들였기 때문이다”라고 설명을 첨부했다고 한다.

 

이 외에도 많은 평가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우리는 이상의 평가만으로도 사도신경이 초대 교회 이후에, 종교개혁 시대조차도, 아니 오늘도 교회에서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심각한 점은 오늘날 이단들도 사도신경을 외형적으로는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에 단지 사도신경을 받고 있다고 바른 교회라고 인정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다. 즉 이단이 그만큼 자신들을 속이기 위해서 많은 포장을 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각 분파마다 사도신경을 어떻게 받고 있는지를 더욱 깊이 조사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그리고 더욱 안타까운 일은 오늘날 일반교회에서도 이 사도신경이 가르쳐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예배 때 신앙고백의 순서에 의해서 이것을 암송하지만 그 의미를 소개받는 것은 전무하다는 것이다. 즉 10년, 20년 신앙생활을 해도 이 사도신경의 내용을 체계적으로 소개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형편인 것이다. 그러면서도 외형적으로는 사도신경을 받아들이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결국 내용은 모른채 외형만 받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오늘 우리의 모습 속에서 이 사도신경이 어떻게 취급되고 있는가를 보면 우리의 교회 모습이 전통적인 개혁교회의 모습과 얼마나 다른지를 알 수 있다. 즉 당시 교회에서는 이 사도신조의 공통적인 고백과 표현을 통해서 교회를 세워 갔고 또한 이단과 거짓 교사를 막으면서 교회를 지켜 왔던 것임이데 오늘날에는 전혀 의미가 없이 교회에 남아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교회 모습이 신조를 얼마나 무시하고 무가치하게 여기는지 알 수 있는 것이다.

 

 

(출처: 가져온 곳에서는 s처럼 표기됐으나 관련 글의 출처가 불명확한 점이 여러 글들에서 보이고 s가 평소에 다른 글 도용이 많으므로 저작자 사실 여부 확인 필요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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