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케아 콘스탄티노플 (Nicaea Constantinoplis) 신조 (381년)
개혁 아카데미
(1) 콘스탄티노플 신조의 작성배경 및 논쟁 내용
이 신조는 381년 콘스탄티노플에서 모인 에큐메니칼 공회에서 150명의 감독들이 채택한 신조로 알려져 있고, 승인을 받은 것은 451년의 칼케돈 에큐메니칼회의라고 한다. 앞에서 본 신조들의 작성 배경에는 이단의 잘못된 사상을 대항하기 위함이었음을, 바른 교리를 지키려는 끊임없는 싸움이 있었음을 살펴 보았다. 이제 우리가 살피고자 하는 칼케돈 신조도 그러한 환경에서 작성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쉽게 알 수 있다.
칼빈은 콘스탄티노플 신조의 작성 배경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고 있다. “아리우스가 일어났을 때에 니케아 회의가 소집되었다. 회의는 그 권위로 저 불결한 사람의 악한 노력을 분쇄해서, 그가 흔들어 놓은 교회들의 평화를 회복하며 그의 모독적인 가르침을 물리치고 그리스도의 영원한 신성을 주장했다. 그 후에 유노미우스와 마케도니우스가 새로운 소동을 일으켰을 때에 콘스탄티노플 회의가 그들의 미친 생각에 대해서 대책을 강구했다(작성 배경).…사탄이 흉계를 꾸밀 때마다 교회는 처음부터 이런 방법으로 단결을 유지하는 것이 통례였다.”
칼빈의 평가를 통해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객관적 신앙고백과 일치하지 않는 내용을 제시하는 행위는 “사탄의 흉계”로 인정될 정도 정죄되어야 할 악한 죄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신앙고백의 역사를 보게 되면 사도들의 신앙적 정신을 이어온 정통교회에서는 교회에서 전체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객관적 신앙고백의 기준을 벗어나는 행위에 대해서 철저하게 근절하고 금했던 것을 보게 된다. 그런데 오늘날은 포용과 관용과 연합이라는 명목 하에 전통적으로 인정되지 않았던 분파와도 얼마나 가까이 하고 또한 정당한 교회로서 인정을 하고 있는지를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교회는 진리의 내용을 변질시키는 분파와도 연합과 일치를 이루도록 세워 주신 것이 아니라 시편의 “나는 주를 경외하는 모든 자와 주의 법도를 지키는 자의 동무라”(시119:63라는 말씀처럼 진리를 바르게 인정하는 분파와만 일치하고 연합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진리를 바르게 인정하지 않는 분파와는 어떤 면에서도 가까이 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다음과 같이 배격하고 멀리해야 하는 자세를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롬16:17)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교훈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 (살후3:6)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규모 없이 행하고 우리에게 받은 유전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요이1:10)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우리는 성경에서 왜 이토록 철저하고 엄격하게 신앙이 다른 자들을 분리시켜야 한다고 하는지를 명심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관용이나 자비가 없어서가 아닌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긍휼이나 자비심을 떠나서 하나님의 영광과 그 이름의 거룩하심을 지키고 드러내는 신본주의적 정신에 입각한 행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의 진리에 대해서 결코 어떤 흠집과 불명예와 모독도 허용하시지 않고 가장 엄격하게 경고하시며, 말씀하고 계신데도 인간이 단지 자비를 내세워 하나님의 뜻과 반대로 행한다면 하나님 앞에 결코 용서될 수 없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니케아 신조와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의 중요한 차이점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첫째로, “성부의 본질에서”라는 문구가 생략되었다는 것이다. 이 표현에 대해서 세미아리안주의나 성령피조설과 조화를 이루려고 했다는 비평도 있으나 이것은 잘못된 것이고 뒤에 “성부와의 동일”이란 말이 생략되지 않고 있기에 이 표현으로 충분한 것으로 보여진다.
둘째로는 “신에게서 나온 신”이란 말이 빠졌다. 이 표현도 피상적으로 보면 성자의 신성을 부인하는 것 같으나 그렇지 않다. 그 다음에 “빛의 빛”, “참 하나님에게서 나은 참 하나님”이란 말이 있기 때문에 생략되어도 성자의 신성을 표현하는데 있어서는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차적 신이거나, 혹은 일부분일 수도 있다라는 의혹을 없애버린 효과도 있다.
셋째로는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서 성령론에 대한 부분이 많이 보완되었다는 것이다. 즉, 성령의 신성이 강조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주님” 혹은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이 의미가 확고히 되었다. 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란 표현을 통해서 성부와 성자와의 동일을 드러내 주고 있다. 다음으로는 “성부로부터 나오시고”라는 표현을 통해서 성령은 구별된 위격으로서의 존재로 표현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성령의 독립적인 자리가 아니라 삼위일체의 구조를 가지고 있는 분으로 소개되었다는 것이 특기할 만하다. 마지막으로 “성부와 성자와 함께 예배와 영광을 받으시며”라는 표현을 통해서 위에서 말한 내용, 즉 삼위가 동질일 뿐만 아니라 동등하심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2) 콘스탄티노플 신조의 특징 및 영향
이 신조는 “초대교회의 예배의식에서 사용되어 세례예식 때에 고백되었고 또 성만찬 예식의 고백으로서도 6세기부터 사용되다가 칼케돈 공회 후에는 모든 신조들 가운데서 가장 널리 사용되었다”고 한다. 즉 신조는 교회 안에서 개인이 가지고 있는 신앙에 대하여 객관적인 확인을 할 수 있는 중요한 기준이 되었던 것이다. 즉 이와 같은 객관적 기준에 입각하여 신앙을 고백하고 드러내게 될 때에 그를 성도로서 인정하고 또한 교회의 정식회원으로서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처럼 신조는 개인에게 있어서나 교회에 있어서 가장 기초적인 주춧돌과 같은 역할을 초기교회부터 감당해 왔던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런 역사를 통해서 우리는 신조가 교회안에 얼마나 중요한 사용되고 인정되었는지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3) 콘스탄티노플 신조에 대한 평가
콘스탄티노플 신조는 “동방교회의 형식으로 된 초기의 신조이지만 니케아 회의 시대의 상황을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신성이나 성령에 관한 언급에 있어서도 사도신경 보다도 더 명확하고 자세하게 밝혀놓고 있다. … 동질(coessential), 동등(coequal), 창조 이전의 발생, 참 하나님의 참 하나님, 발생되고 피조되지 않으심 등과 같은 용어들은 동방교회가 반세기 이상 끌어오던 아리안 이단과의 피나는 싸움 끝에 얻어낸 트로피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더욱이 콘스탄티노플 신조는 니케아 신조를 그대로 이어 받고 있으며 (단지 첫 두 항목을 약간 수정했고) 가장 중요한 점은 니케아 신조에서 문제시 되었던 성령에 대한 문제가 극복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신조의 발전 과정을 우리는 살펴보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즉 시대가 지날수록 이단들은 더욱 교묘하게 정통적인 신앙의 교리를 흐트러뜨리기 위해서 교회 가운데 도전함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욱 분명한 신앙의 내용을 성경에 입각하여 드러내게 된 것이다. 결국 우리는 이런 역사를 통해서 객관적인 신앙고백의 작업들은 바울의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후11:14-15) 라는 지적처럼 사탄의 거짓된 활동을 철저하게 봉쇄하고 무너뜨려서 교회를 지키려는 거룩한 싸움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또한 한 가지 더 놀라운 사실은 “(고전11:19) 너희 중에 편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라는 말씀에서 성령께서 지적하고 있듯이 교회 안에서 이와 같은 신앙고백적 기준을 통하여 바른 진리를 드러내고 이단과 거짓 교사를 분리시키는 일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되어 지는 것임을 발견하게 된다. 즉 하나님의 진리와 영광이 더욱 드러나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거짓된 자들을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이 거짓된 자들과 자신을 더욱 철저하게 구별하기 위해서 애쓰고 노력해야 해야 하는 것임을 발견하게 된다.
결국 객관적 신앙고백의 표명은 하나님의 섭리적인 관점에 의해서 볼 때도 이것은 게으르게, 또는 회피하거나, 또는 무관심하거나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부름심, 즉 소명임을 깨닫고 반드시 교회 안에서 목숨을 다하여 세워야 하고 또한 지켜야 하고, 또한 전해야 하는 것임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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