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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타나시우스 신조 강해

Sola. 2023. 10. 17. 06:00

 

아타나시우스 신경 강해

 

손재익 목사 (2014)

 

 

Ⅰ. 아타나시우스 신경에 대하여

 

명칭

이 신경의 명칭은 ‘아타나시우스 신경’(The Athanasian Creed)입니다. 이 신경의 첫 부분이 라틴어 Quicumque vult salvus esse 라고 시작하기 때문에, “쿠비쿰쿠베 불트”(Quicumque vult)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작성자

이 신경을 누가 만들었을까요? 그 명칭만 봤을 때 우리가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이름은 ‘아타나시우스’입니다. 니케아 신경의 작성과 관련된,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 피조물에 불과하다’ 라고 주장한 아리우스(Arius)의 이단적인 사상에 대항하여 예수님이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것을 잘 강조해 주었던 대표적인 분으로 아타나시우스(293~373년)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분의 이름이 이 신경의 이름에 붙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신경은 사실 그 사람이 작성한 것은 아닙니다. 9세기 즈음에는 아타나시우스가 이 신경을 작성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내용에 있어서 아타나시우스의 가르침과 일치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학자들이 자세히 알아본 결과 17세기 즈음 되어서는 아타나시우스가 지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몇 가지가 있는데, ① 아타나시우스가 쓴 글이나 당시에 살았던 사람들의 어떤 글에도 이 신경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만약 이 신경을 아타나시우스가 작성했다면, 아무런 언급이 없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② 이 신경에 나와 있는 내용에는 아타나시우스가 죽은 373년 이후인 451년에 작성된 칼케돈 신경의 성자의 두 본성에 관한 것, 어거스틴이 420년 경에 체계화한 삼위일체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③ 6세기 이후에 서방교회가 신조에 넣기 시작한 ‘성령의 이중발출’(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신다)을 담고 있습니다. 이러한 정황들을 볼 때에 아타나시우스가 작성했다고 보기에는 어려운 것입니다.

 

이처럼 이 신경을 정확하게 누가 작성한 것인지는 알기 어렵지만, 아마도 8세기 말이나 9세기 초에 북아프리카 지방에 있던 어거스틴 학파의 사람들이 작성하고, 그 이름을 ‘아타나시우스’ 라고 붙였을 것으로 봅니다.

 

이 신경은 삼위일체 교리를 분명하게 확립하는데에 큰 기여를 한 ‘아타나시우스’의 이름을 붙이고 있으므로, 우리는 이 신경을 고백할 때마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질 뿐만 아니라, 이 교리의 확립을 위해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교회역사의 귀한 인물인 아타나시우스를 떠올릴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구조

아타나시우스 신경을 내용에 따라 크게 구분하면 4개로 나눌 수 있습니다.

 

1-2항은 서문입니다.

3-28항은 삼위일체에 관한 것입니다.

29-37항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두 본성에 관한 것입니다.

38-43항은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에 관한 것으로 사도신경에 나오는 것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44항은 결론입니다.

 

이 중에서 3-28항의 삼위일체에 관한 것은 주로 어거스틴의 영향을 받은 것이고, 29-37항의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관한 것은 8세기 중엽의 성육신에 관한 설교들을 기초로 하고 있고, 두 본성에 관한 것은 칼케돈 신경의 것에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나머지 38-43항은 사도신경을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

 

 

신경의 공교회성

이 신경은 사도신경과 마찬가지로 누가 작성한 것인지를 알기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신경을 공교회적 신경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이유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관하여서 니케아 신경과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에서 다루고 있는 것들을 잘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위격과 본질에 대해 자세하고도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벨기에 신앙고백서 제9조 “삼위일체 교리의 성경적 증거”라는 조항에 보면 “그러므로 우리는 이 교리에 관한 세 신경인 사도신경, 니케아신경, 아타나시우스 신경을 기꺼이 받아들입니다.”라는 문구가 있습니다.

 

교회 역사에서 이 신경을 공교회의 신경으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데, 동방에서는 11세기 이후에 비로소 알려졌지만, 서방에서는 일찍이 프랑스, 북아프리카, 스페인 등지의 교회에서 각광을 받았으며, 카를 대제(샤를마뉴, 768~814) 시대에 이미 ‘보편적인 신조’(fides catholica)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중세의 로마가톨릭교회는 아타나시우스 신경을 아침 기도회나 기도 시간마다 사도신경을 대신해서 사용할 정도로 그 권위를 높이 평가했고, 종교개혁자들도 이 신경을 중요하게 받아들였습니다. 특별히 종교개혁자들은 사도신경, 니케아 신경과 함께 기독교의 3대 신경으로 여겼습니다. 이에 따라 우리가 속한 대한예수교 장로회 (고신) 총회는 2011년에 총회 헌법을 개정하면서 부록에 사도신경, 니케아 신경과 아타나시우스 신경을 수록했는데, 이것은 한국교회 최초의 일입니다.

 

그런데, 이 신경은 동방교회는 사용하지 않습니다. 서방교회 전통에서만 합니다. 그래서 사도신경, 아타나시우스 신경은 서방교회만 사용하는 것이고, 니케아 신경은 서방교회와 동방교회 모두가 사용하는 것입니다.

 

 

 

Ⅱ. 본문 설명

 

제1-2문장

 

아타나시우스 신경의 서문에 해당하는 제1-2문장은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1) 구원받기를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무엇보다도 보편적인 믿음을 소유해야 합니다. (2) 누구라도 이 믿음을 온전하고 순수하게 보존하지 않는다면, 의심의 여지없이 영원토록 멸망받을 것입니다.”

 

“예수 = 천국”이라는 등식에 익숙한 우리들이 제1-2문장을 읽고 나서 그 뒤에 이어지는 내용을 자세히 보면 충격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1-2문장에서는 보편적인 믿음이 없으면 구원을 받지 못하고 영원토록 멸망받는다고 하였는데, 그 보편적 믿음에 대해서 제3문장 이하에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그러나 그 “예수님을 믿는다”라는 말이 어떤 의미이냐에 따라 달라질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라고 할 때의 “예수님은 위격상 성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성부와 동일한 하나님이시며, 성부는 아니신 분입니다.” 이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죄가 없으시지만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셨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 없이 예수님을 믿는 것은 결코 구원을 보장해 주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보면, 만약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 그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아닌 인간이기만 한 예수님이라면 우리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반드시 하나님이신 예수님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또한 성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이 자동적으로 삼위일체를 믿는 믿음도 포함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를 믿지 않고 믿는 예수님은 사실 예수님이 아닌 것입니다. 예컨대, 아리우스가 믿은 예수님은 예수님이 아닙니다. 그는 예수님은 처음부터 계신 분이 아니라 피조된 존재라고 했는데, 우리가 구원얻게 되는 예수님은 그런 예수님이 아니니 아리우스는 구원에서 제외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타나시우스 신경의 제2문장 “(2) 누구라도 이 믿음을 온전하고 순수하게 보존하지 않는다면, 의심의 여지없이 영원토록 멸망받을 것입니다.” 라는 말은 협박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마지막 제44문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44) 이상이 보편적인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라도 신실하고 확고하게 믿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할 것입니다.”라는 말은 절대로 협박이 아닙니다. 진리입니다.

 

이 사실은 제44문장의 근거가 되는 마가복음 16장 16절에 나오는 말씀을 보면 분명해 집니다. 이 구절을 보면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라고 하고 있는데, 믿고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마태복음 28장 19절에 의하면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의 이름으로”(eivj)라는 말은 ‘수단’(by)라는 개념이라기 보다는 삼위 하나님을 향하여(in)라는 의미에 가깝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믿고 세례를 받음으로 삼위 하나님과 연관된 존재가 됩니다. 그래서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반면에 아타나시우스 신경에서 다루고 있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믿음, 즉 보편적인 믿음이 없다면 구원에 이를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삼위일체를 믿는 신앙이야 말로 구원얻는 믿음이라는 점은 제1문장과 제44문장에 잘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제28문장은 “(28) 그러므로 구원받기를 원하는 자는 이와 같이 삼위일체를 깨달아야 합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제1문장에 나오는 ‘보편적인 믿음’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공교회적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가르쳐 줍니다.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독특한 것이 되어서는 안되고, 역사적으로 주류로 흘러내려온 믿음이어야 합니다.

 

제19문장에 가면 이 ‘보편적인 믿음’이 ‘기독교 진리’와 동격이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편적인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바 믿음을 말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철저히 성경에 근거한 것이어야 합니다.

 

아타나시우스 신경은 아주 잘 짜여진 구조로 되어 있고, 그것을 통하여 궁극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보편적인 믿음을 얻어야만 하는 이유에 대해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첫 문장과 두 번째 문장에서 말하는 보편적인 믿음을 소유해야 하며, 그 보편적 믿음이란 3번째 문장 이하에 나오는 아타나시우스 신경의 고백에 담겨 있듯이, 삼위로 계시는 한 분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와 예수 그리스도의 두 본성에 대한 바른 이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믿음을 기록된 성경 말씀과 교회 역사를 통하여서 우리에게 전수된 신조들을 통하여서 분명히 해 나가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제3-6문장

 

제1-2문장에서 보편적인 믿음만이 구원얻는 믿음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였는데, 이제 제3문장부터는 과연 보편적인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3문장은 “보편적인 믿음이란 다음과 같습니다.”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44문장은 “이상이 보편적인 믿음입니다.”라는 말로 마치고 있습니다. 그러면 제3문장부터 제43문장까지의 내용이 보편적인 믿음이라는 것인데, 과연 무엇입니까?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고 예배하는 것입니다. 제3문장을 보시면 “우리는 삼위로 계시는 한 분 하나님, 일체이신 삼위를 예배하되”라는 말로 이어지고 있는데, 여기에 보면 ‘믿는다’는 말은 없고 ‘예배하되’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것은 믿음의 대상과 예배의 대상이 같고, 믿는 행위가 곧 예배의 행위와 같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믿고 예배하는 대상은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입니다. 우리의 예배의 대상은 절대로 성부만도 아니요, 성자만도 아니요, 성령만도 아닙니다. 삼위 하나님에게 드리는 예배입니다. 우리의 기도의 대상도 마찬가지요, 우리의 찬송의 대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생략)

 

삼위로 계시는 한 분, 일체이신 삼위. 이것이 하나님의 존재 방식인데, 삼위라는 것이 무엇이며, 일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제4문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 위격들을 섞지 않으며, 그 본질을 나누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 제4문장이 있으며 이렇게 표현하고 있을까요? 삼위일체에 대해서는 인간의 이성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습니다. 그래서 일찍이 어거스틴은 말하기를 “삼위일체를 부정하려는 사람은 구원을 잃을 위험에 처하지만, 삼위일체를 이해하려는 사람은 지성을 잃을 위험에 처한다.”라고 표현한 바 있습니다. 청교도 신학자 토마스 왓슨도 “우리의 좁은 사고 능력으로는 호두껍질에 모든 바닷물을 담지 못하듯이 단일신(Unity) 안의 삼위일체(Trinity)를 이해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언어의 한계와 시공간의 한계로 인해서 우리보다 더 크신 존재인 하나님을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설명이 어려운 주제이기 때문에 삼위일체에 관해서는 무엇이 맞는지를 중심으로가 아니라 무엇이 틀렸는지를 중심으로 설명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삼위일체를 설명할 때에 무엇 무엇이 맞다고 설명하기보다도 무엇 무엇은 분명히 아니다 라고 설명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제4문장의 경우도 바로 그러한 경우입니다. 하나님께서 삼위로 존재하신다고 하는데 그 삼위의 위격들은 서로 섞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체이신데, 그 일체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본질이라는 말이고 그 본질은 나누지 않습니다.

 

이렇게 3개의 위격이지만 하나의 본질이기에 제4문장이 말하는 것처럼 그 위격들을 섞지 않으며, 그 본질을 나누지 않습니다. 만약에 위격을 섞어버리면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구분이 모호해 집니다. 만약에 본질을 나누어 버리면 성부께서 하나님, 성자께서 하나님, 성령께서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부인됩니다.

 

이 말의 의미를 제5-6문장이 좀 더 분명하게 설명해 놓고 있습니다. 위격들을 섞지 않는다는 말은 제5문장에, 본질을 나누지 않는다는 말은 제6문장에 설명되어 있습니다.

 

제5문장을 보시면 “성부께서 한 위격이시고, 성자께서 한 위격이시며, 성령께서 한 위격이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각각이 독립적인 인격이시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성부, 성자, 성령이 각각 한 분인 이유는 각각이 신격(divine person)을 가지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세 위격들이 섞이지 않는다는 것은 마태복음 3장 13절 이하에 보면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때 하늘에서 성령님께서 비둘기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예수님 위에 임하십니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성부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라고 합니다. 이 장면에서 바로 하나님에게 성부, 성자, 성령이라고 하는 3개의 위격이 있을 뿐만 아니라 위격들이 섞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삼위를 섞지 않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께 각각 예배를 드립니다.

 

이렇게 제5문장을 통해서 삼위를 각각의 위격으로 구분하는 것은 초대교회에도 유행했었고, 현대에는 위르겐 몰트만이 주장한 소위 성부 고난설(patripassionism)이라고 하는 것이 잘못되었음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이 주장이 뭐냐 하면, 십자가에 죽으신 이가 성자 예수님일 뿐만 아니라 성부 하나님이기도 하다는 주장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삼위를 구분합니다. 위격들을 섞지 않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가 성자 예수님이시지, 성부 하나님은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는 제5문장을 고백함으로써 이러한 이단들의 생각을 반대합니다.

 

이렇게 세 위격들을 섞지 않고 각각의 독립된 위격이 있다고 하면, 하나의 본질이 나뉘어진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성부가 일부분, 성자가 일부분, 성령이 일부분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제6문장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다 한 하나님이시고, 그 영광은 동등하시며, 위엄도 다함께 영원하십니다.” 이 문장은 철저히 성경에 근거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 30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라고 하셨고, 요한복음 14장 9절에서는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빌립보서 2장 6절에 보면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라고 해서 성부와 성자가 동등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여기 제6문장에서 성부 성자 성령 모두를 하나님이라고 칭하고, 영광과 위엄이 동등하며 영원하다는 것은 그 이전에 ‘아리우스’ (Arius, 250-336)와 같은 이가 성자의 하나님되심을 부인하였고, 콘스탄티노플의 감독 ‘마케도니우스’ (342-360)가 성령의 신성을 부인하였던 것을 염두에 둔 문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미 성자의 하나님되심에 대해서는 니케아 신경을 통해서, 성령의 하나님되심에 대해서는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을 통해서 분명하게 확립되었고, 아타나시우스 신경이 두 신경의 모두를 종합하였습니다. 그래서 아타나시우스 신경의 제6문장은 니케아-콘스탄티노플신경에 나오는 “성부와 성자와 함께 경배와 영광을 받으시는 분이며”라는 고백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아타나시우스 신경을 고백한다면, 이제 그 누구도 교회 안에서 성자나 성령이 성부나 성자에 비해서 열등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혹 있다 하더라도 우리가 이 고백을 함으로써 우리는 그 사람을 우리와 한 교회에 속하지 않았다고 분명하게 말하는 것입니다.

 

제3-6문장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 3개의 구별되는 위격으로 존재하십니다. 그래서 성부는 성자가 아니고, 성자는 성령이 아니며, 성령은 성부가 아닙니다. 이 하나님은 본질이 하나입니다. 그래서 성부도 하나님이시고, 성자도 하나님이시고, 성령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세 분이 아니라 한 분입니다. 이 세 위격은 각각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삼위는 본질과 능력과 영광과 위엄에 있어서 모두가 동등하십니다. 어느 한 분이 더 낮거나 더 높거나 하는 것이 없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우리가 믿는 것입니다.

 

 

제7-20문장

 

제7-14문장은 제5-6문장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풀어서 설명하는 것입니다. 제5문장이 말하듯 성부, 성자, 성령이 각각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위격임을 강조함과 동시에 제6문장이 말하듯 성부, 성자, 성령 모두가 하나님의 본질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제7문장은 삼위가 각각 존재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부께서 계신 것 같이, 성자께서도 그렇게 계시며, 성령께서도 그렇게 계십니다.” 이것은 제5문장의 연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성부, 성자, 성령이 계십니다. 그런데 성부가 계시는 동안에도 성자가 계시고, 성자가 계시는 동안에도 성령이 계십니다. 성부가 성자가 되시는 것이 아니라, 성자가 성령이 되시는 것이 아니라 성부가 계심과 동일하게 성자, 성령이 계신 것입니다.

 

이러한 고백이 중요한 이유는 그렇지 않으면, ‘양태론’(Modalism)이라는 이단에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양태론’이란 고대 교회에 늘 있어왔던 이단인데, 성부, 성자, 성령이 구별되는 위격이라는 점을 부인하는 경우로서, 성부, 성자, 성령이란 한 하나님께서 각기 다른 시기에 자신을 드러내신 3가지 양태(three modes of manifestation)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을 창조하실 때는 아버지, 구원행위에서는 아들, 인간의 성화를 위해 활동하실 때는 영으로 당신을 드러내신다고 합니다. 이것을 비유하기를 마치 어떤 남자가 “직장에서는 회사원으로, 자녀들에게는 아버지로, 아내에게는 남편으로” 나타나는 것과 같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런 주장을 한 사람으로는 2-3세기에 Noetus(노에투스), Praxeus(프락세아스), Epigonus, Cleomenes 등이 있고, 특히 3세기의 Sabellius(사벨리우스)가 대표적입니다. 18세기의 스웨덴 보리(Swedenborg) 같은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믿지 않습니다. 양태론이 옳지 않다는 것은 마태복음 3장 13절 이하에 보면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구절에 보면 성부, 성자, 성령께서 한 시기에 함께 나타나십니다. 그러므로 양태론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이어서 제8문장부터 제10문장은 제6문장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8) 성부께서는 창조되지 않으셨고, 성자께서도 창조되지 않으셨으며, 성령께서도 창조되지 않으셨습니다. (9) 성부께서는 무한하시고, 성자께서도 무한하시며, 성령께서도 무한하십니다. (10) 성부께서는 영원하시고, 성자께서도 영원하시며, 성령께서도 영원하십니다.” 여기에서 언급하고 있는 창조되지 않았고, 무한하시고, 영원하다는 것은 하나님에게만 붙일 수 있는 것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이 각각 구별되는 위격이지만 본질에 있어서는 하나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본질이 하나, 즉 본질이 같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특히 성부만 아니라 성자, 성령도 창조되지 않으셨다는 것과 성부만 아니라 성자와 성령도 무한하시다는 것, 성부만 아니라 성자와 성령께서도 영원하시다는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성자의 경우 우리와 동일한 육체를 입으신 분임에도 불구하고 무한하시며 영원하시다는 것은 성자가 하나님이심을 분명하게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자께서 하나님이심은 성경에서 예수님을 ‘하나님’(The God)이라고 말하는 구절들을 통해 더욱 분명해 집니다. 대표적인 구절 몇 개를 살펴봅시다. 요한복음 1장 18절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로마서 9장 5절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요한일서 5장 20절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성부, 성자, 성령 모두가 하나님이라고 할 때에 생길 수 있는 오해가 있습니다. 세 분의 하나님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제11-12문장이 다시 변호하고 있습니다. “(11) 그러나 영원하신 세 분 하나님이 아니라 영원하신 한 분 하나님이십니다. (12) 마찬가지로 창조되지 않은 무한한 세 분 하나님이 아니라 창조되지 않은 무한한 한 분 하나님이십니다.”

이 사실에 대해서 제15, 16문장에서도 계속 강조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제16문장을 보면 “그러나 세 분 하나님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이십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런 말이 나오는 것은 그만큼 구별되는 위격과 동일한 본질이라고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을 각각 하나님이라고 할 때에 핵심은 세 분 하나님이 있다는 개념보다도 성부, 성자, 성령 모두 본질상 한 분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19-20문장을 보면 이 사실을 아주 강한 어조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19) 기독교 진리를 따라 각 위격이 하나님이시고 주님이심을 고백함과 같이 (20) 보편적인 믿음을 따라 세 분 하나님이 계신다거나 세 분 주님이 계신다고 말하는 것을 금지합니다.”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강한 어조의 말씀이 있다고 하는 것은 교회가 역사를 흘러 오는 가운데에 하나님을 한 분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을 성부, 성자, 성령의 구별된 3개의 위격이 존재하는 분으로 보지 않는 주장이 미친 영향이 얼마나 큰 지를 잘 보여줍니다.

 

이렇게 “3의 구별된 위격”에 “하나의 동일한 본질”의 강조는 ‘삼위일체’라는 용어가 나타나도록 해 주었으니, 여기에서의 ‘체(體)’는 ‘몸’의 개념보다는 ‘본질’의 개념으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

 

 

제21-28문장

 

제21-26문장은 성부, 성자, 성령의 관계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먼저 제21문장에서 말하기를 성부는 무엇으로부터도 만들어지지도 창조되지도 나시지도 않았습니다. 다음으로 제22문장에서 말하기를 성자는 만들어지지 않으셨고 창조되지 않으셨다는 점에서는 성부와 같으나 나셨으며, 성부로부터 나오십니다. 특별히 여기에서 ‘만들어지지 않으셨고, 창조되지 않으셨다’는 표현은 아리우스가 주장했던, “예수님이 영원 전부터 계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첫 창조물이다” 라는 주장을 매우 염두에 두고 사용한 표현입니다. 마지막으로 제23문장에 있듯이 성령께서는 만들어지지 않으셨고 창조되지 않으셨다는 점에서 성부, 성자와 같으나 나시지 않으셨으나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십니다. 이것은 성부, 성자, 성령의 관계를 말해 줍니다.

 

제22, 23문장에 보면 성자와 성령의 차이는 성자는 나셨습니다. ‘낳아진’ 분입니다. 그런데 성령은 ‘나오는’ 분입니다.

 

특히 제23문장은 ‘성령의 이중발출’(double procession)에 대해서 잘 다루고 있습니다. 니케아-콘스탄티노플신경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만, 성령은 성부만이 아니라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십니다. 무엇보다도 성령님은 성부로부터 나오시는데, 요한복음 15장 26절을 보시면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라고 해서 성령님께서 성부로부터 나오신다는 점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외에 성경에 보면 성령님을 가리켜 하나님의 영(롬8:9; 고전3:16; 6:11; 엡4:30)이라고 할 뿐 아니라, 예수의 영(행16:7), 그리스도의 영(롬8:9), 아들의 영(갈4:6)이라고 말하기도 하기 때문에 성령은 성자로부터도 나오십니다. 이처럼 성령님께서는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출하십니다(spiratio). 이렇게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셨다고 해서 ‘이중발출’(double procession)이라고 합니다.

 

이 이중발출은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나뉘게 되는 계기가 되는데, 소위 ‘필리오케’(filioque) 논쟁이라고 불리우는 것 때문입니다. 동방교회(러시아 정교회, 그리스 정교회)는 서방교회(로마가톨릭, 개신교)와 달리 성령님이 성부로부터 ‘성자를 통하여 나오신다’(processio per Filium)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서방교회는 앞서 언급한 이유를 근거로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신다고 봅니다. 이에 대한 입장 차이 때문에 두 교회가 나뉘게 되었고, 서방교회가 주장하는 “성자로부터 나오신다”라는 것 때문에 ‘성자로부터’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필리오케’(filioque)를 써서 ‘필리오케(Filioque) 논쟁’이라고 한 것입니다. 아타나시우스 신경은 서방교회의 전통을 받아들여서 제23문장에서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시고.....” 라고 했습니다.

 

지금까지 성부, 성자, 성령의 관계에 대해서 다뤘는데, 왜 이런 관계가 중요한가 하면 3개의 위격이 구별되이 각각 존재한다는 것 때문입니다. 즉 제4문장에서 말했듯이 그 위격들을 섞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24문장은 지금까지 성부, 성자, 성령의 관계에 대해 다룬 이유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 성부께서 계시되 세 성부가 아니시며, 한 성자께서 계시되 세 성자가 아니시며, 한 성령께서 계시되 세 성령이 아니십니다.” 이렇게 제24문장은 제4문장에서 위격들은 섞지 않는다는 고백과 관련이 있습니다.

 

제21-23문장에서 언급한 성부, 성자, 성령의 관계에 대한 설명은 오해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자나 성령이 각각 성부 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셨다는 점은 성부가 가장 높고, 그 다음은 성자, 마지막으로 성령의 순서로 오해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사실을 염두에 두고 제25문장과 제26문장은 그렇지 않다는 점을 다시금 강조하고 있습니다. “(25) 그리고 이 삼위일체에 있어서 누구도 앞서 계시거나 뒤에 계시지 않으며, 누구도 더 크시거나 더 작지 않으십니다. (26) 오히려 세 위격 모두 동일하게 영원하시고, 동등하십니다.” 삼위의 동등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강조함으로써 삼위일체에 대한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우리로 하여금 유의케 하고 있습니다. 아타나시우스신경은 이렇게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설명을 함에 있어서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이 해왔던 방법들을 잘 취하고 있습니다. 즉, 중요한 내용들을 설명하면서도 그 내용들 때문에 갖게 될 오해들을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제27문장은 지금까지 다룬 내용에 근거하여서 성부 성자 성령께서 한 분 하나님으로, 한 분 하나님께서 성부 성자 성령으로 예배의 대상이 됨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제3문장과 연결되어 있고 제28문장은 제1문장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제29-37문장

 

아타나시우스 신경은 제1문장에서 구원의 조건으로 ‘보편적인 믿음’의 소유를 언급했습니다. 그러면서 제3문장에서부터 ‘보편적인 믿음’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언급하고 있는 보편적 믿음의 한 부분은 ‘삼위일체’입니다. 그래서 제3문장에서부터 제27문장까지에서 삼위일체에 대해 설명했고, 제28문장에서는 구원의 조건으로서의 보편적인 믿음의 한 부분이 바로 삼위일체임을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제 제29문장부터 제37문장까지에서는 보편적인 믿음의 또 다른 부분을 언급하고 있는데요, 그것은 바로 ‘성육신’(incarnation)과 그로 말미암아 생겨난 ‘예수님의 2가지 본성’(Two Natures in Divine Person of Jesus Christ)입니다.

 

제29문장을 봅시다. “나아가 영원한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도 신실하게 믿어야 합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서 성육신을 믿는 것이 보편적인 믿음의 한 부분인 이유에 대해서 제30문장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바른 믿음이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시라는 것을 믿고 고백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제30문장은 우리가 성육신에 대해 바르게 믿어야 할 중요한 이유를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제30문장을 통해서 우리가 확인하게 되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방식인 성육신을 믿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 다 되는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 성육신의 결과로 말미암아 생겨난 예수님의 위격과 2가지 본성, 즉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위격과 그 예수님은 신성(Divine Nature, vere deus)과 인성(Human Nature, vere homo)을 하나의 위격(Divine Person)에 함께 갖고 계신 분이라는 사실을 믿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신 일”은 한마디로 ‘성육신’(incarnation)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결국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에게 원래 갖고 계시던 신성과 더불어 또 다른 본성인 인성을 취하게 하시도록 하기 위한 역사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육신과 예수님에게 하나의 위격에 2개의 서로 다른 본성을 갖고 계시다는 사실은 분리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성육신, 즉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하나의 위격에 신성과 인성이라는 2개의 서로 다른 본성을 갖고 계시다는 것이 보편적인 믿음이라는 사실의 성경적 가르침은 다음의 두 구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먼저 로마서 1장 2-4절에 “(2)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3)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4)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라고 말씀하는데, 이 말씀에 의하면 그의 아들에 관한 것이 곧 복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에 관한 내용이 바로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믿는 것이 곧 보편적인 믿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의 아들에 관한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로마서에서 바울은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드러나게 된 것을 말합니다. 즉 육체를 입으신 예수님께서 또한 신성을 가지신 분이라는 점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골로새서 2장 9절에 보면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라고 되어 있어서 예수님의 신성이 그분의 인성 전체에 퍼져 있다는 사실을 말함으로써 하나의 위격 안에 2개의 본성이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말씀의 가르침에 따라 우리는 아타나시우스 신경의 제29문장과 30문장이 말씀하고 있는 바가 진리라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성경 뿐만 아니라 이 사실을 믿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교회 역사에서 이 사실을 부인하는 자들이 끊임없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이 부인은 주로 4가지 형태로 나타나는데, 첫째는 예수님의 인성을 부인하는 형태, 둘째,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는 형태, 셋째,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인정하면서도 이 본성 중 일부를 나누거나 혹은 섞어 버리는 형태, 마지막 네 번째, 예수님의 두 본성이 2개의 인격체에 나누어져 있다고 보는 형태 등으로 나타납니다. 그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예수님의 인성을 부인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있었던 영지주의자들(Gnostics)이 대표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물질을 영혼과 대립되는 것으로 본 헬라의 이원론에 기초하여 육체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예수님께서 육체로 오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부인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주장하기를 예수님은 참된 인간이 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형태만 띄고 오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완전한 인성을 취하신 예수님이 아니라 예수님의 신성이 잠시 인성의 형태로 나타나기만 했을 뿐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잘못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 참 사람이십니다. 완전한 사람이십니다. 이런 잘못된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요한이서 7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런 자가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그리고 요한일서 4장 2절에는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라고 해서 예수님께서 육체로 오심을 믿는 것이 곧 참된 것과 거짓 것을 구분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는 점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는 자들입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은 이미 살펴본바 있는 아리우스(Arius) 라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 아니다”라고 말하면서, “예수님이 존재하지 않았을 때가 있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니케아 신경을 통해서 여러 번 살펴보았기 때문에 생략하겠습니다.

 

그런데 아리우스 외에도 에비온파(Ebionite)에 속한 사람들이 이러한 주장을 했습니다. 아리우스와는 조금 다른 형태로 주장하였는데, 이 사람들은 예수님이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야임을 인정하면서도 그는 철저한 인간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들에 따르면 예수님은 원래 하나님이 아니고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로서 나사렛에서 사셨던 모범적인 인간이신데, 그가 모범적일 뿐 아니라 율법을 매우 잘 지키므로 하나님께서 그를 택하사 성령으로 충만케 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입양하셨다는 것입니다. 사람이신 예수님의 성령 충만한 삶이 인간인 그를 메시아가 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잘못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신성을 가지신 분에서 인성을 취하신 것이지, 인성을 가지신 분이 신성을 취하신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이 사실은 제31문장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데, 이 문장에 의하면 성자 예수님의 신성은 성부의 본질에서 나온 것으로, 창세 전에 나신 것입니다.

 

세 번째는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인정하면서도 이 본성 중 일부를 나누거나 혹은 섞어 버리는 등의 견해를 피는 사람들입니다. 이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주장으로 나타납니다.

 

먼저, 라오디게아의 감독이었던 아폴리나리우스(Apollinarius, 319-390) 라는 사람은 예수님의 인성이 우리와는 조금 다른 인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사람은 기본적으로는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이 하나의 위격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인성 중에서 몸과 영혼을 구분하여 말하기를 “예수의 영혼은 신적이다. 그러나 예수의 육체는 인적이다.” 라고 했습니다. 즉 그는 그리스도는 인간의 몸을 가지고 계셨지만 인간의 정신이나 영은 갖지 않으셨고 그리스도의 정신과 마음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신성에서 비롯되었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예수님의 온전한 인성을 절단시키고(divide)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콘스탄티노플의 유티케스(Eutyches, 378-454)라는 사람은 예수님은 신성과 인성이 혼합되어 이루어진 새로운 본성, 곧 하나의 본성을 소유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성과 신성은 온전한 인성과 신성이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참 하나님이요 동시에 참 인간이신 예수님이 아니라, 예수님은 반신반인의 본성이 하나의 본성을 이루고 있는 분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마지막 네 번째, 예수님의 두 본성이 2개의 인격체에 나누어져 있다고 보는 주장입니다. 네스토리우스(Nestorius, 386~451)라는 사람이 이러한 주장을 폈는데, 이 분은 아폴리나리우스(Apollinarius, 319-390) 라는 사람의 주장 즉, 예수님의 인성이 우리와는 조금 다른 인성, 즉 몸은 인성이고 영혼은 신성이라는 주장의 잘못을 비판하면서, 예수님이 참 인간이라면 예수님은 인간의 완전한 인격체, 곧 인간의 육체뿐 아니라 인간의 영혼도 소유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는 완전한 인간의 인격과 함께 신적 인격을 입은 것으로 보아 그리스도 안에 인성과 신성이라는 독립된 두 개의 위격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은 예수님의 두 본성이 하나의 위격에 있다는 성경적 가르침에 어긋납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모든 주장들은 잘못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의 위격 안에 2개의 구별되는 본성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이러한 잘못된 주장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AD 451년 10월 8일부터 11월 1일까지 콘스탄티노플(현재의 이스탄불) 근처에 있는 ‘칼케돈’이라는 도시에서 4번째 에큐메니칼 공의회가 열렸습니다. 이것을 칼케돈 공의회라고 합니다. 이 회의에는 동서방교회에서 약 600명 가량의 감독들이 참여했는데, 이 공의회의 결과로 채택된 것을 아폴리나리아니즘, 네스토리아니즘, 유티키아니즘으로부터 보호된 칼케돈 정의(Chalcedonian Definition)라고 부릅니다.

 

그 결정의 내용은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영혼과 마음을 지니지 않으셨다는 아폴리나리우스의 주장에 반대하여 “이성적인 영혼과 몸으로 구성되신 진정한 인간”임을 강조했고, 두 개의 위격에 두 개의 본성을 지니셨다는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에 반대하여 “두 개의 서로 다른 각 본성의 특성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한 위격과 한 본질에 있어서 결합되어 있음”을 강조했고, 그리스도는 신성과 인성이 혼합된 한 개의 본성을 가지셨다는 유티케스의 주장에 반대하여 “두 개의 본성이 서로 섞이지 않고, 변화하지 않고, 분리되지 않으며, 나누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이러한 교회 역사의 교훈을 따라 아타나시우스 신경은 제29문장 이하에서 예수님의 성육신과 그분의 두 본성에 대해 믿는 것을 보편적인 믿음이라고 말한 것이고, 제31문장 이하에서는 그 내용에 대해 구체적으로 열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31문장은 신성과 인성의 본질의 기원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데, 그래서 “하나님으로서는”이라는 말로 시작하면서 성부의 본질에서 나온 본성이라고 말하고 있고, “사람으로서는” 이라는 말로 시작하면서 모친의 본질, 즉 마리아로부터 나온 본성이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문장은 유티케스의 주장에 대한 반대입니다.

 

그리고 제32문장은 성자 예수님께서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이성을 가진 영혼과 인간의 육신을 모두 갖고 계신 완전한 사람이십니다.” 라고 강조함으로써 그리스도는 우리와 다른 영혼을 갖고 계신다고 주장했던 아폴리나리우스의 주장을 단호히 배격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동일하게 이성을 가진 영혼과 육신을 모두 갖고 계신 분입니다.

 

제34문장은 “그분은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사람이시지만, 두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함으로써 두 개의 위격에 두 개의 본성을 지니셨다는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에 반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의 위격이십니다.

 

제36문장은 “온전히 하나이신 것은 본질의 혼합에 의해서가 아니라 위격의 일체성에 의해서 된 것입니다.”라고 함으로써 네스토리우스나 유티케스가 오해하였던 신성과 인성의 관계를 잘 가르치고 있습니다.

 

 

제38-43문장

 

제38문장에서부터 제43문장까지의 내용은 사도신경의 제4문장에서부터 제7문장까지에 나와 있는 예수님의 사역에 관한 내용을 거의 그대로 반복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 부활, 승천, 좌정, 재림, 최후심판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문구의 표현도 거의 그대로입니다.

 

이런 점을 보면서 생각해 보면 아타나시우스 신경의 제29문장에서부터 제37문장까지의 내용은 사도신경의 제3문장에 나와 있는 “그분은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으며”라는 말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사도신경 이후에 나오는 모든 신조들은 사실상 사도신경의 각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제38문장에서부터 제43문장까지의 내용이 가능하려면 제29문장에서부터 제37문장까지에서 다루고 있는 예수님의 위격과 두 본성의 문제가 정리되어야만 가능합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에게 신성과 인성이 있고, 두 본성이 하나의 위격에 있기에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 부활, 승천, 좌정, 재림, 최후심판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29문장부터 제37문장까지의 내용은 제38문장부터 제43문장을 고백하기 위한 전제가 되는 것입니다. 두 내용은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이제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제38문장을 봅시다. “그분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고난을 받으시고, 음부에 내려가셨으며, 삼일 만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라고 고백합니다. 이 문장은 사도신경의 제4문장과 제5문장을 그대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문장에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 표현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은 철저히 대속의 고난과 죽음입니다. 우리를 위함입니다. 예수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고난 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의 본성을 취하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본성을 취하심과 동시에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하늘에 계셔야 할 왕이신 분이 이 세상에 오셔서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과 같이 되셨으니(빌2:7) 그 자체로 고난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구유에 누이신 그 순간부터 이미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우리는 흔히 십자가에서 당하신 고난만을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사실 예수님은 그 생애의 시작부터가 이미 고난이셨습니다(a life of suffering). 이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그의 삶 가운데 고난이 아닌 부분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고난은 우리를 위한 고난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고난당할 수 없고, 우리가 주님을 위해 고난을 재현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고난당하신 예수님께서 결국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당한 죽음의 크기에 대해 우리는 “음부에 내려가셨으며”라고 고백합니다. “음부에 내려가셨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사도신경을 통해서 배웠듯이, 실제로 가셨다는 것이기보다는 십자가의 죽으심에서 겪으신 ‘영적 고뇌’를 지옥과 같은 극심한 고난이었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그 영이 지옥에 가신 적이 없지만, 얼마나 극심한 영혼의 고통을 당하셨는지 그가 지옥의 고통까지도 우리를 위해 당하셨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죽으신 예수님은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고난 받으신 것과 죽으신 것은 그의 인성으로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만약 신성만을 갖고 계신 분이라면 고난 받으실 수 없고 죽으실 수 없습니다. 반면에 예수님께서 살아나신 일은 그의 신성으로 가능한 일입니다. 만약 예수님에게 인성만 있다면 예수님은 죽으심으로 끝이 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있는 신성이 예수님을 영원토록 죽음 안에 가두지 못한 것입니다.

 

제39문장은 “하늘에 오르셨고,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승천과 좌정입니다. 사도신경의 제6문장과 같습니다. 좌정은 예수님의 현재 상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의 우편에 앉아계시다는 사실은 예수님의 신성을 아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셨다는 것은 그가 성부 하나님이 행하시는 대로 똑같이 모든 일들을 행하시며 또한 성부와 동등한 권능을 부여받으셔서 그것을 시행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점에서 신성을 인정하느냐 하는 것은 예수님의 좌정을 믿느냐 하는 부분과 뗄 수 없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좌정은 아무도 본 적이 없고 오직 성령님께서 말씀으로 우리에게 계시해 주셨기 때문에 알 수 있을 뿐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제40문장은 “거기로부터 살아있는 자들과 죽은 자들을 심판하러 오실 것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재림과 최후심판입니다. 이 문장은 사도신경의 제7문장과 같습니다.

 

제41문장은 “그분이 오실 때에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의 몸으로 다시 살아날 것이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사도신경의 제11문장 “몸이 다시 사는 것”이라는 고백과 같은 것인데 아타나시우스 신경은 좀 더 자세하게 이 몸의 부활이 언제 일어나며 누구에게 해당하는 지를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몸의 부활의 시기는 예수님께서 오실 때에 일어납니다. 재림과 동시에 몸의 부활이 일어납니다. 이 부활의 대상은 신자 뿐 아니라 불신자도 포함합니다. 이 세상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이 함께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42-43문장은 “(42) 자기의 행위를 직고할 것입니다. (43) 선을 행한 자들은 영원한 생명으로, 악을 행한 자들은 영원한 불에 들어갈 것입니다.”라고 고백하는데, 이 부분은 사도신경에도 없고 니케아신경에도 없는 내용입니다. 대신 이 내용은 사도신경의 제7문장과 아타나시우스신경의 제40문장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면 심판하실 것인데 어떻게 심판하실 것인가? 하는 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42문장에 따르면 우리의 모든 행위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 심판에 따라 선과 악으로 나뉘게 되고,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불로 보상받게 됩니다. 제43문장은 제42문장에 의한 결과를 말해주고 있는데, 이 문장은 요한복음 5장 29절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이 문장에 의하면 최후 심판은 2가지 서로 다른 결과를 가져다 줍니다. 의인은 생명의 부활, 악인은 영원한 불로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한 가지 우리가 이 말씀을 볼 때에 유의해야 할 것이 있는데, 마치 행위구원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선한 일을 행한 자”와 “악을 행한 자”라고 표현했기 때문에 우리의 행위 자체가 중요하다는 식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행위 구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의인과 악인을 그런 식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제44문장

마지막 문장인 제44문장에서는 “이상이 보편적인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라도 신실하고 확고하게 믿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할 것입니다.”라는 고백으로 아타나시우스 신경을 마치고 있습니다. 이 문장은 제1문장과 수미상관(首尾相關)을 이루고 있습니다. 앞서 제1문장에서 보편적인 믿음이 있어야만 구원얻는다고 했는데, 제44문장은 보편적인 믿음이 없으면 구원받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제3문장에서 “보편적인 믿음이란 다음과 같습니다.”라는 말로 시작했는데, 여기에서 “이상이 보편적인 믿음입니다.”라고 함으로써 지금까지의 내용, 즉 삼위일체에 관한 것과 예수님의 일위이성(一位二性, one person two natures)에 관한 것과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에 관한 것을 믿는 것이 바로 보편적인 믿음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하였습니다.

 

 

 

Ⅲ. 결론

 

지금까지 우리는 보편교회의 신조 중에 하나인 아타나시우스 신경을 배웠습니다. 이 신경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가 구원얻기 위해서 반드시 요구되는 보편적인 믿음이 무엇인지를 배웠습니다. 그것은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반드시 삼위일체 하나님을 향한 것이어야 합니다.

 

사실 이 사실은 너무나 분명한 진리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것이고, 모든 기독교 교리에 대한 신앙은 삼위일체론에 있으며(fides omnium Christianorum in Trinitate consistit) 삼위일체의 신앙조항이 우리 고백의 핵심이요 기독교의 구별하는 표요 모든 참된 기독교인들의 영광이요 위로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날 교회 안에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너무나 부족한 경우가 많습니다. 교회란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교회원이 되어 삼위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동체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삼위일체 하나님이 좀처럼 가르쳐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 신경을 잘 배우고 잘 고백함으로 삼위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이해가 풍성해져야 하겠습니다. 참된 보편교회라면 이 고백을 우리의 고백으로 잘 받아들여서 삼위 하나님을 영원토록 고백하며 찬송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끊임없이 삼위일체를 가르쳐야 하고, 설교단은 철저히 삼위일체 하나님을 선포하는 곳이 되어야 하고, 교회의 예배는 궁극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높이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는 기독교회를 특징짓고 다른 종교와 구별하는 요소일 뿐 아닐라 하나님을 이해하고 그분이 역사와 맺는 관계를 이해하며 인간과 교회의 정체성을 이해하는 기초가 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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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세기 'The Leofric Psalter'에 실린 영어 번역본 아타나시우스 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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