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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바빙크의 타락전 후 선택설의 이해

Sola. 2023. 7. 19. 07:00

 

헤르만 바빙크의 타락전 후 선택설의 이해

 

이남규 박사 / 한양대학교 전자공학과(B.A.) / 합동신학대학원(M.Div.eq)

안양대학교 신학대학원(Th.M.) / 화란 아펠도른 기독교대학교(Dr. theol.)

서울성경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타락후 선택설이 교회신앙고백서에 더 많이 진술되었어도, 타락전/후 선택설이 개혁교회 안에 둘 다 인정되어 왔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이 두 입장의 차이는 단순히 예정의 대상을‘창조된 후 타락한 사람들’(creatus et lapsus)인지‘창조되고 타락할 수 있는 사람들’(creabilis et labilis)인지처럼 단순히 짧게 언급함으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바빙크는 보여준다. 두 입장을 초대교회로부터 시작하여 자기시대까지 끌어오는 신학적 사색은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두 입장에 대한 바빙크의 해설에 대한 이해는 우리의 신학적 사고를 풍성하게 할 것이다. 바빙크는 개혁주의 내에 있었던 타락전/후 선택설의 입장을 평가하고 둘 중 어떤 특정 입장에 서지 않고, 자신의 입장인‘유기적 순서’(organische orde)를 제안했다. 본 논문은 먼저 바빙크의 타락전/후 선택설에 대한 이해와 평가가 무엇인지, 왜 ‘유기적 순서’를 주장하게 되었는지를 그의 개혁교의학을 통해서 알아본다. 두 번째 바빙크의 이해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 16세기말과 17세기의 개혁신학자들의 입장을 살펴보기로 한다.

 

 

 

1. 헤르만 바빙크의 토론

 

가. 어거스틴과 칼빈에 대한 평가

 

타락전/후 선택설(supra/infra-lapsarismus)란 단어는 도르트회의(1618-19) 이후 10년 즈음에 나타났으며 17세기 중반에 이미 널리 퍼져 사용되었다. 도르트 회의상에서 타락전 선택설의 입장에 섰던 고마루스는 이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이 용어가 널리 퍼지게 된 것은 개혁파 예정론에 대해 비판적 입장이었던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이 사용하면서다.

 

알려진 바로는 1622년 아르미니우스주의자인 코르비누스(Johannes Arnoldi Corvinus, 1580/1583?-1650)가 타락전 선택설 자들의 교리(doctrinam supralapsariorum)란 단어를 사용했고, 1636년 루터주의자 포이르보른(Justus Fuerborn, 1587-1656)이 이것을 한번 인용했다. 그런데 1645년 아르미니우스주의자였던 쿠르첼래우스(Stephan Curcellaeus, 1586-1659)가 이용어를 자기 책에서 supralapsarii(7번), sublapsariorum(2회)를 사용한 것을 볼 때, 이 용어가 이 시기에 널리 퍼지고 있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개혁주의쪽에서는 사무엘 마레시우스(Samuel Maresius, 1599-1673)가 1645/46년 이후로 사용했다.1)

 

그 단어들이 17세기에 널리 사용되어 졌다고 해서 그 내용이나 견해의 차이가 17세기에 들어서 비로소 등장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빙크는 타락전 선택설과 타락후 선택설의 차이를 논하면서 흥미롭게도 어거스틴에게까지 올라가고 있다. 바빙크에게는 펠라기우스와 싸우면서 어거스틴이 펼친 예정론에 이미 타락전 선택설과 타락후 선택설의 원리가 둘 다 보인다. 그가 어거스틴에게까지 올라가 타락전/후 선택설의 사상을 발견하고 있지만, 실제로 어거스틴이 두 견해의 차이나 논쟁을 알았기 때문이 아니라 후시대의 관점에서 예정론 자체가 갖는 하나님의 주권과 죄문제의 관계를 어떻게 고려하는지를 어거스틴에게 찾아내고 그 의미를 평가하기 위한 것을 보인다.

 

바빙크가 볼 때 어거스틴의 예정론의 진술은 기본적으로 타락후선택설이다. 어거스틴이 기본적으로 타락후 선택설의 입장이라 할 수 있는 것은 그에게서 항상 창조와 타락에 대한 허용의 작정이 선택과 유기의 작정 앞서기 때문이다. 선택과 유기는 타락한 인류를 전제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부당하게 어떤 사람을 저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원죄는 유기에 대한 충분한 원인(genoegzaam reden)이다. 바빙크에 의하면 어거스틴은 유기를 하나님의 공의의 행위로 여긴다.2) 용어사용에 있어서도 예정을 주로 선한 의미에서 사용해서 선택과 관련지어서는 예정이란 단어를 사용하고, 유기에 대해서는 예지를 사용했다.3)

 

그러나 어거스틴에게서는 또한 타락전선택설의 생각도 드러난다고 바빙크는 주장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유기가 하나님의 주권행위라는 타락전선택설적인 묘사가 여기 이미 포함되어 있다”4) 이 진술은 타락후 선택설은 유기가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라는 것을 부인한다라는 오해를 불러올 수 있다. 바빙크는 타락후 선택설에서도 유기가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임을 부인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진술한 이유는 타락전 선택설의 원리가 이미 어거스틴에게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어거스틴은 순서에 있어서 타락후 선택설의 입장을 따르면서도, 모든 것을 하나님의 필연에 돌려서, 하나님의 뜻에 반대되는 것도(contra Dei voluntatem) 하나님의 뜻 밖에(prater eius voluntatem) 있지 않는다고 한다. 따라서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허용은 수동적이지 않고 능동적이다. 원죄는 충분한 원인이지만 최종적이며 가장 깊은 원인(de laaste en diepste oorzaak)은 아니다.5)

 

따라서 바빙크는 어거스틴이 선택과 유기의 원인을 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돌린다고 한다. 결국 바빙크는 하나님이 어떤 이를 버리고 어떤 이를 택하는 원인은 하나님의 뜻과 기뻐하심밖에는 없다는 편에서 타락전 선택설의 원리가 어거스틴에게서 발견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바빙크는 어거스틴에게까지 올라가서 타락전/후 선택설의 원리를 발견하는 시도를 했다. 거기서부터 어거스틴은 기본적으로 순서에 있어서 타락후 선택설의 입장이다. 그러나 바빙크는 타락전 선택설의 입장도 어거스틴에게서 발견한다. 즉 어거스틴에게도 선택과 유기의 최종적인 원인은 하나님의 기뻐하심에 돌려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바빙크는 어거스틴의 사상에서부터 타락후 선택설의 입장인 유기를 죄와 관련지어서 생각하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종 원인은 하나님의 주권에 돌리는 것(타락전 선택설적 입장)이 둘 다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타락전/후 선택설의 논의는 후대에 나타났지만 이미 어거스틴에게서 발견된다는 암시를 갖게 한다.

 

종교개혁자들이 타락전선택설에 다가가는 길목에 이중예정이 있다. 여기서 이중예정(gemina praedestinatio)이란 선택과 유기가 단순히 하나님의 작정의 내용으로 있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어거스틴에게 유기는 지나치는 것(praetere)이나 내버려두는 것(derelinquere)이지 선택의 예정과 같은 수준은 아니었으나(즉 아직 이중예정은 아니었다),

 

후대의 신학자들은 예정아래 사망으로의 예정(praedestinatio ad mortem)과 영광으로의 예정(praedestinatio ad gloriam)을 나란히 두었다. 이 이중예정에서 선택과 유기가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은 아니었다.

 

유기에 있어서 타락에 선행하는 (따라서 공의의 행위가 아닌) 주권적 행위인 소극적 유기(reprobatio negativa)와 타락에 후행하는 (따라서 공의의 행위인) 영원한 형벌에 두기로 하는 적극적 유기(reprobatio positiva)가 구분되었다.6) 소극적 유기를 말하는 것은 유기가 어떤 댓가를 근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발전상을 정리하면 어거스틴에게서 유기는 하나님의 공의의 행위로 소개되면서, 동시에 가장 깊은 원인은 하나님께 돌려지는 방식이었다.

 

스콜라학자들에게서 유기자체는 한편 주권적인 행위(소극적유기)이며 동시에 공의의 행위(적극적유기)가 되었다.

 

바빙크는 이 소극적 유기와 적극적 유기의 개념을 사용해서 어떻게 종교개혁자들이 타락전선택설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설명한다. 선택이 예지된 공로 때문에 있게 된 것이 아니듯, 소극적 유기는 죄 때문에 있게 된 것이 아니다. 소극적 유기는 죄를 허용하고 이 죄에 관련한 적극적 유기가 있다. 그런데 이때 허용이 수동적인 허용이 아니다. 결국 소극적 유기와 적극적 유기의 구별은 아무 의미가 없게 된다. 왜냐하면 논리적으로 적극적 유기도 소극적 유기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이것이 종교개혁자들(루터, 츠빙글리, 칼빈)이 타락전 선택설에 이르게 된 경로이다. 그러므로 타락전선택설에 의하면 선택과 유기의 작정은“타락, 죄, 그리스도안에서의 구속에 관한 작정에 선행해야 하는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이다.7)

 

바빙크는 타락전 선택설에 이르게 된 원리를 설명함으로써 타락전 선택설이 갖는 근본적인 구조 또는 원리를 드러내고 있다. 그것은 선택에 있어서 인간의 공로에 앞서듯 유기에서 있어서 타락에 앞서는, 즉 모든 것을 선행하는 하나님의 의지에 돌리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바빙크에 의하면 하나님의 의지의 선행성과 주권에 대한 강조가 종교개혁자들(루터, 츠빙글리, 칼빈)이 타락전선택설에 다가가게 된 근본적인 이유다.

 

그러면 바빙크는 칼빈을 타락전선택설자로 규정하는가? 여기서 바빙크의 초점은 칼빈이 타락전선택설자라고 규정하는 것에 있지 않다. 바빙크는 타락전선택설을 옹호한 주요학자들을 각주에 나열하는데, 칼빈은 없고 베자부터 시작하고 있다. 바빙크의 관심은 칼빈이 타락전선택설인가 타락후선택설인가를 예리하게 드러내는데 있지 않고, 타락전/후 선택설의 중심구조와 원리를 드러내는데에 있다.

 

바빙크는 이 주제에 대한 칼빈의 생각을 정리할 때 타락후선택설의 구도의 설명이 칼빈에게 분명히 있었고 그 유익성을 인정했다는 것을 말하면서, 동시에 타락전선택설의 구조가 나타난다는 것을 지적한다. 칼빈은 타락후선택설의 방식 안에서 구원과 저주의 가까운 원인을 찾았으며, 롬 9:21의 진흙을 타락한 인간으로 이해했다는 것을 지적한다. 나아가 칼빈은 저주받은 아담의 후손가운데서(ex damnata Adae sobole) 택하고 유기했다는 것이 더 신학적이고 기독교에 적합하고 교육적이다라고 했다는 것을 바빙크는 인용한다.8)

 

이렇게 칼빈은 어거스틴처럼 그 진술에 있어서 타락후선택설의 입장을 보였던 적이 분명히 있다. 그러나 칼빈은 단순히 여기에서 만족한 것이 아니라 먼 원인을 찾았다. 칼빈은 타락에 선행하는 더 높은 하나님의 계획(altius Dei consilium), 먼 원인(causa remota), 하나님의 감추인 계획(arcanum Dei consilium)을 말했다. 따라서 유기의 궁극적이고도 가장 심오한 원인은 하나님의 뜻에 있다는 것이 또한 칼빈의 생각이다.

 

바빙크는 칼빈에게서 타락전 선택설과 타락후 선택설의 견해가 번갈아 나타난다고 말한다. 바빙크에 의하면 칼빈처럼 타락전 선택설을 주장한 신학자들은 타락후 선택설을 정죄하면서 타락후 선택설을 대체하는 타락전선택설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함께 있는 타락 전 선택설의 정당성을 주장했다.9) 바빙크는 칼빈에게서도 타락전/후 선택설 두 주장을 함께 발견하고 있으며, 나아가 후에 오는 타락전 선택설 자들도 칼빈처럼 두 견해가 같이 드러난다고 주장한다. 단순히 작정의 순서나 작정의 대상을 어떻게 규정하는가로 칼빈이 타락전 선택설인가 타락 후 선택설인가를 규정하는 잣대를 댄다면 칼빈은 타락후선택설로 규정될 것이다.

 

그러나 바빙크는 먼원인을 찾는 칼빈의 신학적인 사고를 고찰함으로 칼빈에게 있는 타락전 선택설의 사상을 보여주었다.

 

바빙크의 설명을 보면 어거스틴과 칼빈에게 흐르는 신학적 사고의 역사에는 유기를 설명하는 방식에서 가장 큰 차이 또는 발전이 있다. 어거스틴은 유기가 원죄를 고려한 하나님의 공의의 행위처럼 나타났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선택과 유기의 결정적 이유에 대해서 하나님의 뜻이라 답함으로써 하나님의 주권에 돌렸다.

 

스콜라시대에 이르면 주권의 결정을 강조하는 소극적 유기와 공의의 결정을 강조하는 적극적 유기가 구분되었다. 칼빈에 이르면 교육적인 유익에서 칼빈은 예정의 대상을 저주받은 아담의 후손이라고 하면서도, 먼 원인을 하나님께 돌림으로써 타락전 선택설의 견해도 보여주었다. 이렇게 둘이 동시에 나타난다는 것이 바빙크의 관점이며 이 관점에서부터 결국 그의 독특한 관점인 유기적 순서를 말하게 되는 것이다.

 

 

나. 타락전/후 선택설에 대한 평가

 

바빙크는 타락전/후 선택설 둘 다 개혁파적이라고 평가한다. 바빙크가 개혁파적인가를 판단하는 질문은 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 가이다. 이것을 두 가지 질문으로 생각해본다면 다음과 같다.

첫째, 죄의 원인이 인간에게 있다고 말하는가?

둘째, 죄가 하나님의 작정가운데 포함되는가?

 

이 두 질문 모두에 대하여 개혁파는 그렇다고 해야 한다. 그러나 타락전 선택설은 첫 번째 질문에 대하여 추궁받으며, 타락후 선택설은 두 번째 질문에 대하여 의심받는다. 타락전 선택설로 가면 하나님은 죄의 조성자가 되는 듯하며, 타락후 선택설로 가면 타락이 하나님의 주권으로부터 벗어난다고 오해한다. 그러나 타락전선택설자들도 하나님이 죄의 조성자가 아니며 인간에게 죄의 원인이 있다고 한다.

 

타락후 선택자들도 타락과 죄를 하나님의 단순한 예지의 대상으로 말하지 않고 작정에 포함시킨다. 따라서 바빙크는 이렇게 결론내린다.“따라서 작정 자체와 그 내용에 대하여 전혀 차이가 없다.” 두 견해 모두에게서 신앙은 선택의 원인이 아니고, 죄는 유기의 원인이 아니다.10)

 

따라서 바빙크는 두 견해의 차이를 작정의 순서로 본다. 타락후 선택설은 역사적이고 인과적인 순서를 택하고, 타락전 선택설은 이상적이고 목적론적인 순서를 좋아한다. 여기서 예정이란 개념의 범위가 다르게 이해된다. 타락후 선택설에서는 작성의 순서 안에 있는 예정, 곧 선택의 작정 자체를 예정으로 보기 때문에 좁다. 타락전선택설에서는 목적론적이기 때문에 예정 아래 모든 작정들이 포함되기 때문에 넓다. 여기서 다시 작정의 복수성이 강조되는지, 작정의 통일성이 강조되는지의 문제도 지적한다.11)

 

바빙크가 여기서 작정의 복수성과 단수성 중 어느 것이 강조되는지를 지적한 것은 그가 주장하는 유기적 순서와 깊이 관련을 맺는다. 바빙크는 작정에 대해서 소개하면서 작정을 단수‘작정’으로 표현해야 하는지 복수‘작정들’로 사용해야 하는지 고찰했다. 여기서 작정의 통일성이란 하나님께서 단 하나의 단순한 작정만 갖고 계시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고, 작정의 복수성이란 단 하나의 작정이 시공간 속에서 우리에게 펼쳐지는 다양한 풍성함을 드러낸다.

 

하나님은 단일한 계획인 작정을 시간 속에서 하나씩 펼쳐 보인다. 하나님의 다양한 지혜와 풍성함을‘작정들’로 말하게 된다. 하나님의 계획이 단일하고 단순한 작정으로 여겨져야만 해도, 바로 이련 이유로 작정을 복수로 말하는 것을 거부할 수 없다.12) 이렇게 바빙크는 작정에 대한 통일성과 복수성을 말할 때에도 그의 유기적 관점이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바빙크는 자신의 유기적 관점에 의해서 타락전/후 선택설 중 어느 것 하나를 더 지지하는 방식을 취하지 않고 각각의 강점과 약점을 지적하는 방식을 취한다. 타락후 선택설의 강점은 역사적이고 인과적인 순서에 계속 머무르며 실재적 요구를 더 고려하는 것이다.

 

그러나 타락후 선택설이 어떤 효과적인 해결을 본 것은 아니다. 타락후 선택설에서도 죄는 유기의 원인이 아니며 유기의 원인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기뻐하는 뜻에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유기의 작정은 사실 죄허용의 작정에 선행한다. 여기서 타락후선택설은 타락전선택설과 동일한 방식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13)

 

바빙크는 타락전선택설의 강점을 타락후 선택설이 실패한 이 지점에서 찾는다. 타락전 선택설은 하나님을 정당화하려는 헛된 시도들을 피하고 불가해한 하나님의 뜻에 근거를 두는 것이다. 그러나 타락전 선택설이 문제를 완전히 해결한 것이 아니다.

 

바빙크는 세 가지를 언급한다.

첫째, 하나님의 최종목적아래서 바로 선택과 유기를 설명하는 것이 왜 하나님이 그러한 방식을 취했는가의 완전한 대답이 될 수 없다고 한다. 이것은 바빙크의 독특한 관점인데, 그 전의 대부분의 개혁신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하나님의 영광이란 목적을 섬기기 위해 선택받은 자들의 구원을 통한 하나님의 자비가, 유기자들을 심판하심을 통한 하나님의 공의가 드러나야 하기 때문이다. 타락전 선택설자들은 이런 구도 아래서 목적론적 관점에서 본다면 선택과 유기가 선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대해 바빙크는 하나님의 영광이란 목적자체가 선택과 유기를 가져오는 당위성을 갖는가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한다. 선택과 유기가 하나님께서 영광을 위해 정하신 수단인 것은 틀림없지만, 하나님의 영광자체가 그 수단(선택과 유기)까지를 포함하는 당위성을 갖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14)

 

둘째, 타락전 선택설이 존재 가능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다는 것이 약점이다. 이것은 실재적 작정이 아닌 임시적인 작정이다. 비실체에 대한 선택과 유기가 있고, 그 다음 창조와 타락이 있고, 그 이후 실재적으로 존재하는 자들에 대한 선택과 유기가 있다. 따라서 타락전 선택설은 결국 타락후선택설의 순서로 돌아온다.15)

 

셋째, 선택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이 영원한 구원이 수단인 것처럼, 유기에서 죄를 동일한 방식과 의미에서 수단으로 삼는다는 점을 지적한다. 죄는 사실 타락전 선택설과 타락후 선택설의 구별없이 개혁파 모두에서 하나님의 뜻 아래 있는 것으로 취급된다. 두 견해 모두 허용이란 단어를 써도 능동적 허용이기 때문에 허용이란 단어가 어떤 해결을 주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어쩌면 타락전 선택설은 타락후 선택설이 타락후에 유기를 두었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면이 있다.

 

여기서 바빙크는 묻는다. 허용을 사용하는 것이 아무 해결을 주지 않음에도 허용을 사용하지 않고 죄를 설명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 허용을 사용하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을 손상시키는 듯하여 이 단어가 필요없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허용이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 순간 하나님의 거룩성이 손상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주권과 거룩성을 둘 다 보호하는 신학적 단어가 사용되는데,‘능동적 허용’이나‘유효한 허용’를 사용하게 된다. 어쨌거나 타락전 선택설도 결국‘허용’을 사용하지 않고는 죄를 설명하지 못한다. 타락전 선택설도 죽음으로의 예정(praedestinatio ad mortem)은 사용하나 죄로의 예정(praedestinatio ad peccatum)이란 표현은 거절했다는 것을 지적한다.16) 결론적으로 이것을 취급함에 있어서 타락전 선택설도 타락후 선택론과 같은 자리에 서게 된다.

 

따라서 바빙크가 볼 때 타락전 선택설과 타락후선택설의 한 견해만 일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온전한 방식이라고 할 수 없다. 두 견해 중 하나만으로는 성경의 다면성을 정당하게 취급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17) 또는 충만하고 풍성한 성경의 진리를 포함하지 못하고, 신학적 사고를 만족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18) 바빙크는 타락전/후선택설의 일방성에 갇힐 때 다다르게 되는 한계를 다섯 가지로 정리한다.

 

바빙크는 처음 세 가지 점은 주로 목적론적 관점에서 유기가 하나님의 목적과 어떻게 관련되는지를 논하고 있다. 여기서 유기에 대한 대한 바빙크의 깊은 신학적 사색이 드러난다.

 

가장 먼저 만물의 궁극적 목적을 택자들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자비의 계시와 유기된 자들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공의의 계시로 정의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지적한다. 하나님의 영광이 모든 것의 최종 목적이지만 이것이 선택을 통한 자비와 유기를 통한 공의를 필연적으로 담보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두 번째로 나아가는데, 유기된 자들의 저주를 예정의 목적으로 제시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지적한다. 즉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이 원했던 일이라고 할 수 있지만 구원과 같은 방식으로 그것을 원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하나님은 죄와 형벌 그 자체를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서 자신의 미덕들의 승리를 기리는것이다.”19)

 

따라서 이중예정이란 용어를 받을 때에도 바빙크는 유기가 선택과 동일한 방식이라는 의미에서는 받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저주 자체가 목적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빙크는 세 번째로 나아가서 영광의 상태만이 하나님이 창조 가운데 의도한 참되고 직접적인 목적이라고 진술한다. 왜냐하면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에서“공의와 은혜, 거룩과 사랑, 주권과 자비가 드러나기 때문이다.”20)

 

여기서 바빙크가 공의를 언급한 것은 은혜는 선택과만 연결시키고 공의는 유기와만 연결시키는 일방성의 한계를 염두해 둔 것이다. 위 세가지 점에서 결국 바빙크가 지적하는 것을 다시 요약하면, 선택과 유기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수단일 수 있으나) 하나님의 직접적 목적일 수 없고, 더구나 유기된 자들의 저주는 (하나님의 목적은 오직 선해야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목적일 수 없고, 결국 하나님이 의도한 직접적 목적은 결국 영광의 상태에서 드러난다는 것이다. 따라서 바빙크는 유기를 하나님의 직접적 목적과 연결시키는 목적론적 견해를 신학적 한계를 갖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바빙크는 네 번째로 두 견해 모두 선행하는 수단들이 뒤에 오는 수단들을 위해 존재하는 방식으로 상호종속관계로 만들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수단들이 단순하게 선후 관계로 서로에게 종속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창조가 타락에 선행하기 때문에, 단순히 타락을 위한 수단만이 아니라 영광의 상태에서도 그 의미를 갖는다. 역사의 순간들은 단순히 다음에 오는 것을 섬기고 사라지는 수단이 아니다. 수단들은 계속 영향을 미치고 영원 가운데 그 결과를 남긴다.

 

바빙크는 여기서 선택과 유기 또는 타락전과 타락후가 완전히 대등한 방식으로 맞서 있는 단순한 구도를 다시 한 번 거절한다. 이 땅에서 택함 받은 자들에게서도 악한 것이, 유기된 자들에게서도 선한 것이 나온다. 선택과 유기는 죄를 전제하는 자비와 공의의 행위들이며(타락후) 동시에 둘 모두 신적인 주권의 행위들이다(타락전).

 

유기는 선택과 동등하기도 하지만, 승리는 새예루살렘으로 나타나듯이 유기는 선택에 종속된다.21)

 

결국 타락전/후 선택설 모두 충만하고 풍성한 성경의 진리를 포함하지 못하고, 우리의 신학적 사고를 만족시킬 수 없다고 바빙크는 결론내린다. 물론 각 견해가 갖는 장점들이 있다. 타락전선택설 아래서 작정들은 통일성을 이루고 모든 작정들이 최종목적을 섬긴다.

 

특히 죄에 대하여 말한다면 하나님이 생각하지 못했거나 예지하지 못했던 것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이 원했고 결정한 것이다. 타락후선택설 견해 아래서 작정들은 비록 단일하지만 그 대상들의 관점에서 본다면 구분되며, 작정들안에서 목적론적 순서만이 아니라 인과적 순서도 구분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창조와 죄는 최종 목적을 위한 수단들로만 여겨질 수 없다. 죄는 무엇보다도 일차적으로 창조의 파괴였으며 죄 자체만으로 본다면 하나님은 죄를 결코 원하지 않으셨다.22) 바빙크가 각 견해에서 바른 요소라고 하는 부분들을 다른 편에서 거절하고 있다고 읽어서는 안된다.

 

죄에 대해서 타락전선택설자들도 죄 자체로 말하면 하나님은 죄를 원하지 않으셨다고 하며, 타락후선택설자들도 죄를 하나님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보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다만 바빙크는 각 견해가 갖는 강조점이나 지향하는 면을 지적한 것이다.

 

 

다. 유기적 순서

 

신학자가 타락전/후 선택설의 한 견해를 일방적으로 취하는 방식 아래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바빙크는 목적론적 순서와 인과적 순서가 아닌 유기적 순서로 나아간다. 작정들은 인과적 순서와 목적론적 순서만이 아니라 유기적 순서도 갖는다. 유기적 순서란, 선후관계로 협력하는 방식이 아닌 나란히 협력하는 관계를 말한다. 현재는 미래를 위한 계시의 수단이 지만 동시에 그 자체로 계시이며 가치를 갖는다. 바빙크의 생각에 인과적 세계관과 목적론적 세계관은 갈등은 인간의 한계를 보여준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들이 보는‘작정들’을 단일한‘경륜’(raad)으로 보신다. 우리가 마주치는 역사적 사실들은 부분적으로 드러난다.

 

미래에 한번 완전하게 드러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작정들과 경륜의 관계다. 바빙크에게 이 관계는 풍성하며 복잡해서‘타락전선택설’이나 타락후선택설‘이라는 하나의 용어로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과적 관계인 동시에 목적론적 관계다.“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의 경륜과 거기에 상응하는 세계역사는 타락전 선택설이나 타락후 선택설이 했던 것처럼 오로지 앞뒤를 가진 단일 직선, 원인과 결과, 수단과 목적으로만 묘사되어서는 안된다.”23)

 

바빙크는 타락전/후 선택설의 한쪽의 일방성 아래에 놓여진 한계들을 지적하며 유기적 순서를 제안했다. 그러나 이것을 목적론적 순서나 인과론적 순서를 거절하면서 제안했다고 이해하기 보다는 둘이 갖고 있는 장점들을 잃지 않으면서 오히려 풍성하게 드러내는 방식이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래서 목적을 잃지 않으면서도 각각의 수단들의 뚜렷한 의미는 그대로 남는 방식이다. 성경이 선택과 유기를 죄를 전제하는 자비와 공의의 행위들로 언급하고(롬 9:15; 엡 1:4), 동시에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를 언급하기(롬 9:11, 17, 21) 때문에 바빙크의 유기적 순서는 성경적 근거를 갖는다. 그러므로 타락전/후 선택설 둘 다 각각 성경에 근거를 두고 주장하였고, 개혁교회 안에서 둘 다 인정되어 왔다는 것이 오히려 바빙크의 유기적 순서에 대한 증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 개혁주의 안의 논의들

 

바빙크가 어거스틴에게까지 올라가 타락전/후 선택설의 사상을 발견하지만, 구체적 토론은 개혁신학자들 사이에서 있었다. 타락전/후 선택설에 대한 바빙크의 신학적 사색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개혁신학 자들 안에서 두 가지 견해가 어떤 차이를 드러내며 진행되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여기서 16세기 말의 토론의 모습을 보여주는 다니엘 토사누스의 견해를 보고, 구체적 당사자들인 도르트회의에 참여했던 네덜란드 교수들의 견해를 짧게 살핀후, 마지막으로 바빙크의 유기적 순서의 암시를 주는 시도들을 짧게 살펴보기로 한다.

 

가. 다니엘 토사누스의 평가

 

타락전/후 선택설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하이델베르크 신학자인 다니엘 토사누스(Daniel Tossanus, 1541-1602)의‘예정에 대한 교리’(Doctrina de praedestinatione)는 좋은 자료가 된다.24) 이 책은 토사누스의 말년에 쓰여진 것으로 보이며 사후에 출판된 책이다. 그래서 16세기 말에 타락전선택설자의 입장에 서 있는 개혁파 신학자가 바라보는 예정론을 잘 보여 준다. 토사누스는 로마가톨릭과 루터란의 예정론을 비판할 뿐 아니라, 멜란히톤가 제네바를 비교하고, 하이델베르크 동료 교수의 예정론의 차이점을 지적하고 평가한다. 여기에서 타락전/후 선택설의 견해가 갖는 차이를 개혁파내에서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알 수 있으며, 이 문제에 대한 바빙크의 신학적 사색을 이해하는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토사누스가 멜란히톤을 다루는 이유는 멜란히톤에게 호소함으로서 개혁파 예정론을 비판하는 자들 때문이다. 실제로 멜란히톤은 칼빈이 예정론을 말하는 방식에 대해서 우려의 시선을 보낸적이 있으며 개인적인 편지에서 제네바의 예정론 논쟁을 염두에 두고,“아! 끔직하다! 외국의 논쟁 때문에 복음이 가리웠다!”라고25) 말한 적이 있다. 그것은 제네바의 예정론 자체보다는 그런 논쟁에 대한 우려였다. 반면 칼빈에게 멜란히톤은 사람들의 이해에 맞추며 적응하기 위해 너무 많이 나아가는 사람으로 비춰졌다.26) 토사누스에 의하면 멜란히톤은 우유성을 스토아주의의 필연성으로 대체한 것으로 칼빈의 생각을 오해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멜란히톤은 제네바 신학자들처럼 예정교리의 적용과 사용은 좋아했다. 토사누스는 멜란히톤이 제네바와 같은 기초를 갖고 있다고 한다. 멜란히톤과 제네바는 함께 말하기를 택함받은 자들, 곧 부름받은 자들의 모임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선택되고 하나님의 양자가 되는 것은 본성이나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의한 것이다.27) 똑같이 하나님의 의지의 원인을 의롭다고 하며 하나님의 계획과 작정은 변하지 않고 영원하다고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지를 원인중의 원인으로 본다. 또한 멜란히톤과 제네바는 유기된 자들이 저들의 자발적인 불경건 때문에 벌을 받으며,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기를 기뻐하신다고 한다. 토사누스는 멜란히톤과 제네바는 함께 하나님의 의지를 최고의 원인으로 두며, 동시에 유기된 자들의 형벌의 원인이 그들 자신에 있다고 말한다. 후에 올 타락후선택설자들과 타락전 선택설들처럼 멜란히톤과 제네바는 하나님의 주권을 높이며 동시에 형벌의 원인을 인간에게 돌린다는 공통된 기초를 갖는다.

 

멜란히톤과 제네바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렇게 중대한 차이는 보이지 않는다고 토사누스는 말한다. 그러면서도 용어들의 차이를 말한다. 멜란히톤을 따르는 자들 중에서 몇몇은 다만 성도들의 예정, 즉 선택으로서의 예정만을 언급한다. 멜란히톤 외에 피터마터 버미글리도 그렇게 사용했다. 여기에 대해서 토사누스는 이런 예정을 말한다해도 결국 논리적으로 유기자들을 하나님께서 미리 결정하신 것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고 답한다. 그러나 멜란히톤이 선택과 유기를 완전히 거절했던 것은 아니고 종종 사용했다.28)

 

다만 예정이란 단어를 선택에 제한시켜 즐겨 사용했다는 것이다. 토사누스는 예정이 선택만을 위해서 사용되는지 선택과 유기를 다 포함하면서 사용되는에 대한 의견차이가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것은 바빙크가 타락전/후 선택설의 설명할 때 출발점이었던 예정의 개념이 넓은가 좁은가에 대한 범위의 차이이해가 이미 16세기 말에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인식가운데에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용어의 차이는‘유기’라는 단어를 어떻게 이해하는지에서도 나타난다. 멜란히톤은 유기의 원인이 유기자들에게 있다고 했는데, 토사누스에 의하면 멜란히톤이 유기라는 단어를 자기 시대와 똑같은 의미, 즉 창세전에 있었던 작정으로서 사용하지 않고 실제적인 영원한 형벌이란 의미로 유기를 사용했다.29) 즉 토사누스에 의하면 멜란히톤이‘유기’를 유기의 작정으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유기의 작정의 실행으로서 사용한 것이다. 이것은 바빙크가 ‘유기’를 설명할 때에, 선택과 완전히 대등한 방식으로 설명하는 것을 신학적 사고에 합당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는 것과 연결된다.

 

이미 종교개혁자 멜란히톤이 선택에 대해서는 선택의 작정을 생각하면서 단어를 사용하면서, 유기에 대해서는 유기의 작정의 실행으로 사용한 것은 후에 올 타락후선택설자보다 훨씬 더 조심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멜란히톤의 제자들이 제네바를 미워한다는 오해는 무엇 때문일까? 여기서 멜란히톤의 제자들이란 멜란히톤 사후에 강한 루터주의자들로부터 정죄당하며 비텐베르크로부터 밀려났던 노선을 말하며 이들은‘비밀 칼빈주의자’(Crypto-Calvinists)로 불렸다. 토사누스는 둘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는 없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런데 예정론에 있어서 둘 사이에 갈등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무엇인가? 여기에 대한 설명에서 타락전선택설이 받고 있는 오해가 드러난다. 토사누스는 두 가지를 지적한다.

첫째, 하나님을 죄의 조성자로 만들고, 인간의 의지가 죄의 원인이라는 것을 부정한다는 것이다.30)

둘째, 제2원인과 인간행동에 있는 모든 우연을 없애고 스토아주의적 필연성을 두었다는 것이다.31) 물론 제네바가 하나님을 죄의 조성자라고 한 적이 없고, 스토아주의적인 필연성을 세운 것도 아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죄의 조성자로 만들고 모든 우연을 뺏는다는 것은 결국 같은 것이다. 인간이 우유성(contingentia) 속에 있지 않다면 인간의 죄의 책임은 필연성에 돌려져야하기 때문이다.

 

토사누스는 하나님께 모든 것이 필연이나 인간에겐 많은 것이 우연이며, 이 우연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다스려진다고 답한다. 하나님을 죄의 조성자로 만든다고 제네바가 오해받는

점은 바빙크가 지적하듯이 타락전선택설이 받는 오해와 같다.

 

토사누스는 좀더 직접적으로 나아가 하나님의 예정에 타락이 고려되는지 아닌지를 논의 한다. 16세기 말에 이미 이런 토론이 있었다는 흥미로운데, 그 토론의 대상이 동료 교수였다는 것이 더욱 놀랍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이델베르크대학 신학부 내에 타락전 선택설자와 타락후 선택설자가 함께 가르쳤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토사누스는 그의 책에서 이름을 밝히지 않고 논의를 시작하지만 논쟁의 대상은 게오르기우스 소니우스(Gerogius Sohnius)이다.32)

 

토사누스는 말한다.“그들은 타락한 인간에 대한 예지에서부터 예정을 정의한다. 구체적으로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작정이란 [하나님께서] 창조와 타락 후에 있는 이성적 피조물들을 스스로 예지하고 고려한 후에 기뻐하심을 따라 복과 벌로 미리 정하셨다는 것이다.”33) 토사누스는 여기서 타락에 대한 예지와 고려를 타락을 하나의 조건으로 보는 것과 같은 것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창조와 타락이 예정을 위한 조건으로 이해되면 절대적 예정을 훼손한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절대적 예정이란 무엇인가란 논의로 넘어가서, 토사누스에게 예정의 절대성에 대해서, 조건적인 것의 반대로 절대를 말하며, 그래서 오직 하나님의 의지에 의존하는 것을 말한다.34)

 

한편 소니우스도 절대적인 것에 대해 논의한다. 그는 하나님이 타락한 인간을 고려한다는 측면에서 완전히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고 한다. 즉 소니우스는 타락을 고려하지 않는 예정론에 대해 알고 있으며 이것을 거절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가치를 고려하지 않고 결정하셨다는 면에서 절대적이라고 말한다. 즉 인간의 절대적 무가치성이 강조된다.

 

나아가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신 자들을 영생에 이르도록 의롭게 하시는데, 그렇게 하시기로 결정하셨기 때문에 완전히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고 한다. 여기서 수단으로서 믿음이 등장한다. 인간은 스스로의 의지로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오직 믿음은 오직 하나님께만 달려 있다는 의미에서 절대적이다.35)

 

소니우스는 개혁주의자로서 생명으로의 예정과 사망으로의 예정을 말하는 이중예정론자이고, 예지를 하나님의 의지와 분리하지 않으며, 타락이 유기의 원인이라고 하지도 않는다.

 

16세기 말에 개혁신학자 안에 이미 타락전/후 선택설에 대한 내용과 인식과 토론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서도 바빙크가 지적한 타락전 선택설과 타락후 선택설의 강조점이 분명히 드러난다. 토사누스에게서는 절대적이란 단어를 통해서 하나님의 주권(타락을 포함해서 인간의 어떤 조건도 고려되지 않기 때문에)이 강조되고, 소니우스에게서는 인간의 무가치성(타락했기 때문에)과 무능력(믿을 수 없기 때문에)이 강조된다. 토사누스에게서는 최고원인이신 하나님이 강조된 반면, 소니우스에게서는 타락과 믿음이라는 수단들이 드러난다. 토사누스에게서 목적론적인 순서가, 소니우스에게서 인과론적인 순서가 강조된다.

 

 

나. 도르트 신학자들의 견해

 

타락전/후 선택설이 개혁교회에서 공식적 논쟁이 되었던 도르트회의와 신학자들의 견해를 살피는 것이 바빙크를 더 잘 이해하게 할 것이다.36) 도르트회의에서 선택과 유기의 원인에 있어서 하나님의 의지가 선행하고 이 결정은 불변한다는 점에서 모두가 동의했다. 그런데 네덜란드 교수단에서 판단문을 발표할 때에 한 가지 차이가 드러났다. 세명의 교수들(Polyander, Thysius, Walaeus)은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구원으로의 예정은 영원하고, 가장 자유롭고, 변할 수 없는 하나님의 작정이다. 이 작정에서 하나님은 그의 의지의 은혜로운 기뻐하심으로, 죄로 타락해서 멸망한 온 인류로부터, 어떤 사람들을 구원하시려고,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셨다. 그의 선택에 따라 바로 그들을 말씀과 성령을 통해 효과적으로 부르시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그들을 의롭게 하고, 그들을 거룩하게 하고, 믿음과 거룩 안에서 보존하시고 마지막에는 그들을 영화롭게 하시기로 결정하셨는데, 그의 은혜와 자비의 풍성함을 보이시기 위해서다. 이것이 특정한 사람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하심에 대한 참되고 유일하며 전체적인 선택의 작정이다.37)

 

그리고 유기에 대해서도 이렇게 발표했다.“유기는 가장 자유롭고 가장 의로운 하나님의 작정이다. 이 작정에서 하나님은 죄로 타락한 인류로부터 어떤 이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지 않기로 결정하셨다.”38)

 

세명의 교수들은 타락한 인류를 선택과 유기의 대상으로 규정함으로 타락후선택설의 입장을 보였다. 고마루스는 동료들의 판단문에서 단 하나를 제외하고 동의한다고 했다. 그는 예정의 대상을“타락한 인류로부터”라고 규정한 것에 동의하지 못했다. 그러나 다른 교수루베르투스는 여기에 동의했고 서명했다. 루베르투스는 자기 자신의 판단문을 발표했는데,“부패한 인류로부터 어떤 이들을”(ex corrupto humano genere aliquos)이라고 했다.39)

 

고마루스는 다시 일어나 루베르투스의 의견에 이 한 가지만 빼고 모두 동의한다고 했다. 고

마루스는 자신의 판단문을 발표했는데, 선택에 대해서“보편 인류로부터”(ex universo genere humano)라고 규정했다. 여기서 예정의 대상이 타락전인지 타락후인지 특정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유기를 규정할 때 타락전인 것이 암시되어 있다.

 

“멸망의 유기는 하나님의 작정인데, 그것으로 그의 가장 자유로운 의지로 그의 보수하시는 의의 선포를 위해서, 보편 인류로부터 어떤 이들에게 은혜와 영광을 주시지 않기로, 그러나 그들을 자유롭게 죄로 타락하도록 허락하시기로, 죄에 남기기로, 마지막에 공의롭게 죄 때문에 정죄하시기로 결정하셨다.”40)

 

여기서“보편 인류로부터”라고 타락전이나 타락후를 특정하지 않았어도, 뒤에 결정의 순서에 있어서 타락하도록 허용하시는 결정이 뒤에 따르고 있어서 예정의 대상이 타락전인 것을 암시하였다.

 

판단문에 들어간‘타락한 인류로부터’ 또는‘부패한 인류로부터’와‘보편 인류로부터’는 회의상에서 여러 토의를 거쳤으나 대다수의 총대들이 예정의 대상을 타락후선택설의 방식을 원했으므로 회의의 결과물인 도르트신경은“처음의 순결함으로부터 자기 잘못으로 죄와 멸망으로 타락한 보편인류로부터”(e universo genere humano, ex primaeva integritate in peccatum & exitium sua culpa prolapso)라고 결정하였다.41) 고마루스는 회의가 자신의 견해를 정죄하지 않고 용납했으므로 제안된 이 신경에 서명했다.

 

도르트회의의 판결문에 나타난‘타락한 인류로부터’와‘보편인류로부터’에서 두 입장의 생각을 더 자세히 알아내는 것은 어렵다. 두 입장의 생각을 알기 위해서 다른 자료로 넘어가보자. 고마루스는 로마서 주석에서, 특히 로마서 9:21을 해설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자세히 피력했다.42)“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이 본문은 인류의 선택과 유기에 대한 말씀이다. 여기서 질문은 두 가지다. 창조될 인류인가 아니면 창조되고 타락한 인류에 대한 것인가.43)

 

고마루스가 창조될 인류를 택하는 이유는 목적이 대상의 존재이유이기 때문이다. 먼저 의도가 있고 실행이 나중에 온다. 하나님께서 선택 안에서 자비와 유기 안에서 공의를 선포하심으로서 자신에게 영광이 돌려지게 목적하셨다면 먼저 선택된 자들과 유기된 자들이 필요하다. 따라서 선택과 유기의 작정이 창조와 타락과 구원보다 앞선다.

 

도르트회의에서 예정의 대상에 대한 문제에서 고마루스의 반대편에 섰던 신학자들이 참여한‘순수신학통론’(Synopsis purioris Theologiae)은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예정의 대상에 대해서 도르트회의의 판단문에서 후퇴함이 없이 이렇게 말한다.“대상(거기서부터 하나님이 얼

마를 은혜로 선택하셨다)은 처음의 순결함으로부터 자기 잘못으로 죄와 멸망으로 타락하고 나아가 그 앞에서 정죄의 죄책있는 인류이다.”44)

 

성경이 온 세계가 죄아래 있다고 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바로 이런 인류로부터 선택하기로 결정하셨다. 이렇게 주장한 이유는 예정은 수단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구원으로의 선택과 구원의 수단이 구분되어 고려 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기꺼이 인정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작정안에서 이 행위들이 실제로 다른 것이라는 것은 우리는 부정한다.”45) 즉 레이든신학자들은 예정이 수단과 분리될 수 없기 때문에 예정은 수단을 포함하는 방식으로만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절대적 예정이란 수단을 배제하지 않는 예정이다. 구원의 결과를 위해 정하신 수단을 절대적으로 배제하는 예정에서 하나님은 아무도 결코 절대적으로 구원에 이루도록 선택하지 않는다.46) 소니우스처럼 절대적이란 단어를 사용하지만, 사용하는 방식이 다르다.

 

소니우스는 수단을 배제한 예정을 의미하는 단어로서 절대적이란 말을 이해해서, 예정이 완전히 절대적이 아니라고 했다면, 레이든 신학자들은 예정에는 수단이 절대적으로 포함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선택은 목적만이 아니라 수단도 포함해야 한다.47) 따라서 우리가 거룩하도록 그리스도안에서 선택받았다(엡 1:5)는 것은 우리가 먼저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불의했고 양자되기에 합당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고마루스는 목적을 물으며 접근하고, 레이든신학자들은 수단을 포함한 예정을 말한다. 목적론적 사고 아래서 고마루스는 목적을 생각하기 전에 그릇을 만드는 토기장이는 어리석다고 말한다.48) 그러나 모든 구원의 수단들은 우리가 그 필요성 아래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비가 선포되려면 우리는 먼저 비참한 처지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 레이든신학자들의 견해이다. 바빙크가 타락전선택설을 목적론적이라고 보고 타락후 선택설을 인과론적이라 파악하고 논의를 전개 했는데, 고마루스와 레이든신학자들이 이 두 견해를 잘 보여준다.

 

 

다. 다른 시도들

 

그런데 우리는 개혁주의 신학자들 내에서 목적과 수단을 동시에 고려하는 시도들을 발견할 수 있다. 비록 타락전선택설을 옹호하기 위해서 하는 말이지만, 트렐카티우스(Lucas Trelcatius)는 목적의 예정과 수단의 예정을 구별해서 이렇게 말한다.“만일 당신이 목적의 예정을 고려한다면, 예정의 대상은 보편적이거나 절대적으로 인간이다. 만일 목적을 위한 수단의 예정을 고려한다면 아담 안에서 죄책을 가지고 있는 스스로 멸망할 인간이다.”49)

 

도르트회의에 참여해서 고마루스 편에섰던 타락전선택설자 마코비우스(Johannes Maccovius, 1588-1644)도 다음과 같이 예정의 대상을 구별해서 말한다.“의도에 관한 목적을 고려할 때, 창조될수 있는 인간이다; 실행에 관한 목적을 고려할 때 창조될, 창조된, 타락으로 허용될, 타락한 인간이다.”50) 여기서 마코비우스는 의도에 관한 목적과 실행에 관한 목적을 구분하며, 실행에 대한 목적에 대해서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가 드러나는 실행을 생각하면서 인간의 창조와 타락을 고려하였다. 마코비우스는 타락전선택설 입장을 포기하지 않았지만, 실행에 대해서 창조와 타락이 고려될 수 밖에 없음을 인정한 것이다.

 

마스트리히트(Petrus Mastricht, 1630-1706)는 긍휼과 공의의 영광을 나타내려는 목적에서 예정의 목적을 생각하고, 이들에게 타락을 허용하고, 타락한 인류 가운데서 긍휼의 영광을 위해 일부를 선택하고, 공의의 영광을 위해 유기하는 것을 생각했다. 여기에서 예정의 대상과 타락의 허용작정 뒤에 오는 선택과 유기의 대상을 구분했다. 그래서 예정의 대상은 창조될 수 있고 타락할 수 있는 인간, 창조되고 타락할 인간(homo creabilis et labilis, creandis et lapsurus)가 되고, 선택과 유기의 대상은 창조되고 타락한 인간(homo creatus et lapsus)이 된다.51)

 

트렐카티우스나 마코비우스처럼 타락전 선택설자들도 예정의 목적과 함께 수단도 함께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마스트리히트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긴 했지만 결국 목적과 관련해서 예정의 대상을, 목적을 위한 과정을 생각해서 선택과 유기의 대상을 구분한 것은 같은 생각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타락전 선택설자들이 제기하는, 목적 없이 수단을 생각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과, 수단을 배제한 예정이 하나님께 가능한가라는 타락후 선택설자들의 물음 중에서 어느 것 하나를 배제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것이다. 나아가 타락전선 택설자들도 수단을 생각했듯이, 타락후 선택설자들도 목적없는 예정은 거절했다.

 

바로 목적과 수단을 함께 생각하는 이 자리에 바빙크의“유기적” 순서가 있다.

 

 

 

3. 결론 및 제언

 

우리는 지금까지 바빙크의 타락전/후 선택설에 대한 그의 판단과 그가 대안으로 제시하는 유기적 순서를 보았고, 개혁주의 내에 있었던 관련 논의들을 살펴보면서 바빙크의 견해와 어떤 관련을 맺는지 그의 대안이 정당한지를 평가하려고 했다. 타락전/후 선택설 사이에 있는 예정의 개념의 범위에 대한 이해의 차이, 필연성과 우유성안에서 죄와 유기 대한 이해, 목적론적 사고와 인과론적 사고의 차이, 이것과 관련된 목적과 수단에서 바라보는 예정의 대상 등 다루어졌던 모든 논의들을 고려하여 그의 깊은 신학적 사색을 보여준 것으로 평가한다. 그의 유기적 순서에 대한 제안은 타락전/후 선택설의 토론의 역사 가운데서 이미 목적과 수단을 예정에서 함께 고려하려던 모습들이 있었다는 것을 볼 때 정당하다고 평가 내릴 수 있다.

 

하나님은 영원가운데 있으며 우리 인간은 시간 안에 산다. 하나님은 목적하시며 우리는 그 수단이다. 우리는 시간에 살면서 하나님의 영원을 말하고, 수단인 우리가 하나님의 목적을 말하는 것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필연이 있다는 것을 믿지만 많은 내용을 우연으로 부딪쳐야만 하는 자다. 우리는 하나님의 필연을 우연으로 살아야 하는 자들이다. 그렇게 우연 속에 살기에 우리의 죄는 우리 자신의 죄책이다. 하늘위 하나님의 작정으로 올라가, 땅위에 선 채로 시간 속에서 우연으로 다가오는 현실을 살아내야 하는 자신의 현실을 망각한 자는 하이퍼 칼빈주의의 오류에 빠지며, 하나님의 주권적 계시를 무시하고 영원을 시간 아래 종속시킨 자는 알미니우스주의의 오류에 빠진다. 신자는 시간을 살아내야 하지만 믿음으로 영원을 보는 자다. 내일은 불확실함으로 다가오나 신자는 확신 가운데서 내일을 맞이한다. 타락전/후 선택설은 함께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바라보며 시간을 믿음으로 살아내라 우리를 격려한다.

 

 

 

각 주

 

1) TRE, s.v.“Pradestination[3.2.1.].”

2) Herman Bavinck, Gereformeerde Dogmatiek (Kampen: Kok, 1928), 323.

3) Bavinck, 345.

4)“De supralapsarische voorstelling, dat de reprobatie eene daad is van Gods souvereiniteit, ligt hier reeds in opgesloten.” Bavinck, 323.

 

5) 같은 곳.

6) 같은 책, 324.

7) 같은 책, 324-25.

8) Calvin, De aeterna Dei praedestinatione, in Corpus Reformatorum, XXXVI, 317. Bavinck, 325.

 

9)“Zij pleiten voor het recht hunner opvatting naast, niet in plaats van de infralapsarische voorstelling.[강조는 바빙크가 한 것이다]” Bavinck, 326.

10) 같은 책, 346.

 

11) 같은 곳.

12) 같은 책, 335-36.

13) 같은 책, 347.

14) 같은 책, 348.

15) 같은 책, 349.

16) 같은 책, 349-50.

17) 같은 책, 351.

18) 같은 책, 354.

19) 같은 책, 352.

20) 같은 책, 352.

21) 같은 책, 353.

22) 같은 책, 354.

23) 같은 책, 355.

24) Daniel Tossanus, Doctrinae de Praedestinatione, brevis ac perspicus ac quaestionibus comprehensa, et in septem capita distincta a D. Dan. Tossano. Additae Sunt Ad Calcem Duae Epistolae, quibus totidem Nic. Serarii Jesuitae Moguntini ad Dan. Tossanum litteris respondetur., Hanau 1609.

 

25)“O rem miseram! Doctrina salutaris obscuratur peregrinis disputationibus.” CR 7: 931-32.

 

26) Wengert, Timothy,““We Will Feast Together in Heaven Forever”: The Epistology Friendship of John Calvin and Philip Melanchthon,” in: Maag, Karin (Ed.), Melanchthon in Europe: his work and influence beyond Wittenberg, Grand Rapids 1999: 31.

 

27) Tossanus, 14.

28)“... Philippum electionem & reprobationem solere accipere ...” Tossanus, 15.

 

29)“Philipppum Electionis & Reprobationis vocibus non semper usum in ea significatione, qua nos uti solemus, sed pro exequutione Praedestinationis, sive finali salvatione & damnatione: quo sensu scribere solet, reprobos esse causam suae Reprobationis […]” 같은 책, 13-14.

 

30)“Quod existimarentur facere Deum autorem peccati, quod illi constantissime negant agnoscentes hominis voluntatem sponte a Deo se auertentem causam esse peccati.” 같은 책, 15.

 

31)“tollere omnem contingentiam etiam in causis secundis & actionibus humanis, & statui Stoicam necessitatem.” 같은 책, 15.

 

32) Nam Kyu Lee, Die Pradestinationslehre der Heidelberger Theologen 1583-1622, (Go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2009), 159.

 

33)“... qui Praedestinationem definiunt a praescientia hominis lapsi, quod scil. sit aeternum decretum & immotum, quo creaturam rationalem a se praescitam, ut post creationem & lasum extitura erat, consideratam secundum beneplacitum ad beatitudinem vel poenam praeordinavit ...” Tossanus, Doctrina de praedestinatione, 17.

 

34)“Dei decretum quod in Praedestinatione maxime consideratur, non esse conditionale sed absoluntum, & a mera Dei voluntate pendens.” 같은 책, 18.

 

35) Nam Kyu Lee, 159-63.

36) 도르트회의의 타락전/후 선택설에 대한 논쟁에 대해서 다음을 참고하라: J. V. Fesko,“Lapsarian Diversity at the Synod of Dort,” in Drawn into Controversie: Reformed Theological Diversity and Debates Within Seventeenth-Century British Puritanism, ed. Michael A. G. Haykin and Mark Jones (Go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2009), 99-123.

 

37)“Praedestinatio ad salutem est aeternum, liberrimum & immutabile Dei decretum, quo pro gratuito voluntatis suae beneplacito quosdam homines ex universo genere humano in peccatum prolapso ac perdito ad salutem in Christo elegit, eosdemque secundum suam electionem per verbum ac spiritum suum efficaciter vocare, per fidem in Christum iustificare, sanctificare, in fide ac sanctitate conservare, et tandem glorificare constituit, ad divitis suae gratiae ac misericordiae demonstrationem, Atque hoc est, de certis quibusdam hominibus in Christo et per Christum salvandis, verum, unicum et totum Electionis decretum.” Acta Synodi Nationalis Eccesiarum Belgicarum III, 3.

 

38)“Reprobatio est liberrimum ac iustissimum Dei decretum, qui statuit quosdam homines ex genere humano in peccatum prolapso, non eligere in Christo ...” Acta III, 9.

 

39) 같은 책, 12.

40)“Reprobatio peremptoria est decretum Dei, quo, pro voluntate sua liberrima, ad declarationem iustitiae suae vindicantis, certos ex humano universo genere homines, nec gratia nec gloria donare, sed in peccatum libere prolabi permittere & in peccatis relinquere, iusteque tandem propter peccata condemnare constituit.” 같은 책, 25.

41) 도르트신경 I.7, Acta I, 250.

42) 여기에 대한 자세한 해설은 다음을 참고하라: J. V. Fesko,“Lapsarian Diversity at the Synod of Dort” 107-11.

 

43)“... bifarium, ut ad genus humanum, aut condendum, aut conditum et lapsum referatur.” Franciscus Gomarus, Opera I, 428b.

 

44)“Materia ex qua Deus quosdam gratiose elegit, est genus humanum e primaeva integritate in peccatum sua culpa prolapsum, ac proinde et coram eo condemnationis reum.” Johannes Polyander et al., Synopsis Purioris Theologiae, ed. Herman Bavinck (Lugdunum Batavorum: 1881), 226[Dispuatatio XXIV. xxi].

 

45)“Etsi vero libenter concedamus, electionem ad salutem, et salutis media, distincte posse considerari, ... negamus tamen, propterea hos actus in Dei decreto revera esse diversos ...” 위의 책, 225[XXIV, xviii].

 

46)“... Deus nunquam quemquam absolute ad salutem elegit, si abso1ute excludat media, quae Deus ad salutis consecutionem ordinavit ...” 위의 책, 225[XXIV, xix].

 

47)“... quia electio haec non tan tum finem, sed et media ad salutero necessaria complectitur ...” 위의 책, 227[XXIV, xxv].

 

48)“Figulis ille stultus merito cenceretur, qui decerneret vasis effectionem primum, deinde de fine cogitaret.” 위 의 책, 428b.

 

49)“Si praeordinationem finis respicias, praedestinationis materia homo est communiter seu absolute; si vero mediorum ad finem, homo est a se et in se periturus et reus in Adamo.” 재인용, Heinrich Heppe, Die Dogmatik der evangelisch, reformierten Kirche (Neukirchen: Neukirchener Verlag, 1958) 133.

 

50)“Ratione finis, prout est in intentione est homo creabilis; Ratione finis, qui est in executione, est homo condendus, conditus, permittendus in lapsum, lapsus ...” Maccovius, Distinctiones et Regulae Theologicae ac Philosophicae, (Franeker, 1653), 72.

 

51) Petrus Mastricht, Theoretico-practica theologica (Traiecti ad Rhenum, 1725), 284; Heinrich Heppe, 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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