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개혁신학
김영규 목사 강의 / 김남진 전도사 정리 (1996년 추정)
참고: 96 개혁합신주간 발표논문,‘17세기 개혁신학’
반갑습니다. 우리 성경 말씀 사도행전 20:7-12까지 제가 봉독하도록 하겠습니다.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하여 저희에게 강론할쌔 밤중까지 계속하매 우리의 모인 윗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 앉았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 층 누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보니 죽었는지라.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저에게 있다 하고 올라가 떡을 떼어먹고 오래 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 하고 떠나니라. 사람들이 살아난 아이를 데리고 와서 위로를 적지않게 받았더라.”
우리 잠깐 기도드리겠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의 말씀으로 이세상을 창조하신 그대로 우리에게 그의 말씀을 감당할 수 있도록 세세역사해 주셔서 이 마지막 세대에 그 같은 말씀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부름을 받고 또한 하나님의 교회로서의 이 지상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열매를 또한 나타내도록 이 땅에 두시고 존속시키시고 그 홀로 두시지 마시고 늘 역사하셔서 주께서 원하시는 수준까지 그 역사속에서 그 열매를 거두는 주님이여,
저희들이 그 한모퉁이에 앉아서 저희들이 주의 말씀을 상고하며 그 뜻을 다시 헤아리게 되었사오며 하나님께서 과거에 진리로 심어셔서 주의 교회를 보존케하여 주시고 또한 그 진리 때문에 주의 종들이 이 세상에 고난을 받으며 그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을 배우고 하나님을 인식하고 그 진리 때문에 그 생명이 다하도록 충성하며 또한 모든 세대에 그 진리를 전달하도록 모든 힘을 다하여 오늘날 까지도 많은 주의 종들이 걸어온 길들을 저희들이 이 시간에 확인하게 되옵니다. 아버지께서 성지 학교에 은혜를 주셔서 이들의 생명은 이 세상에 잠간 가더라도 참으로 진리만은 남을 수 있도록 이 학교를 세우시고 각자의 심령대로 거룩한 것으로 심으시고 그들의 온 생애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이 시간도 주님께서 부족한 죄인들이 모여서 서로 이야기 하며 과거에 주님이 교회를 세우는 진리를 위해서 함께 생각하는 기회를 주신데 대해서 감사드리오며 이 시간도 함께하여 주시옵소서. 감사하오며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우리가 17세기 개혁신학이 성립했던 배경을 다음시간에 이야기하고 우리 전반시간에는 어떻게 그 신학이 독특성을 갖게 되었는지, 그 개혁신학이라고 불릴 수 있는 특별한 특성이 무엇이 있는지 중점적으로 여러분들과 생각하도록 한다. 그래서 개혁신학이 무엇인가를 알려줄 뿐만 아니라 지금 현 신학적인 성격을 규정하고 우리의 방향을 암시적으로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여러분들이 이 강의가운데에 미래의 개혁신학의 과제도 드러날 수 있고 소위 개혁신학이라 했을 때 그 개혁신학의 핵심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함께 드러나리라 생각한다. 머리말을 먼저 생각하겠다.
여기서 두 인물을 생각했는데 하나는 바빙크와 바르트를 생각했는데 제가 왜 17세기 개혁신학이라는 제목으로 여러분과 함께 생각하려고 했는지 여기에 대해서 머리말에 나와 있다. 즉 두사람이 현대 신학에서 정수라고 할 수 있고 어떤 의미에서 두 사람이 다른 길을 갔던 이런 성격에 있어서의 공통점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다면 그 두 분이 다 그들이 신학을 시작할 때 하나는 쯔빙글리를 연구한 사람이고 하나는 독립적으로 그동안 많이 자유주의와 싸우다가 그가 강의를 맡을때는 칼빈으로부터 시작한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분이 칼빈을 통해 돌아가는 것들은 거기서 보화를 발견하려고 했을 때는 17세기로 돌아갈려고 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결국 개혁신학 했을 때는 그 본 원리로 돌아가는 것은 17세기로 돌아가는 것인데 헤르만 바빙크는 도르트회의에서 승리로 이끌던 레이든 대학의 교의학 교수들이 공동으로 낸 오랫동안 화란 보수주의 계열에서 정통개혁신학에서 교재로 사용되던 순수신학통론이라는 책을 이것을 다시 발견해서 그것을 기초해서 바빙크는 시작했고 칼 바르트는 17세기 개혁신학을 돌아갈 때 헤페의 책을 재 편집하는 단계에 와서 그것을 텍스트로 삼아서 연구를 해서 강의를 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바르트에 경우는 그 신학이 로마서 주석에 잘 알려져 있어서 그가 괴팅켄 대학 교의학 교수로 청빙을 받았는데, 문제는 17세기를 보더라도 이미 체계가 세워진 그러한 상태에서 17세기 개혁신학을 보는 이런 면이 있었다. 물론 바빙크도 역시 쯔빙글리를 연구하고 캄펜에서 보수주의 계열에 있었지만 그가 레이든에 있었을 때는 독특한 상황과 같은 바르트와 상황과 같은 상황에서 공부를 해서 그가 독특한 길을 걸어간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이제 칼 바르트의 경우에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첫째로 그 정신을 그가 분명히 하고 17세기로 돌아갔는데 종교 개혁자를 통해 바로 성경으로 가는 프로테스탄트 교회에게 돌아간 것이 아니다고 보았다. 반드시 그 돌아가는 길에는 정통주의라는 한 정거장을 거쳐야 된다는 확신을 가졌는데, 그래서 그가 Neo라는 즉 신정통주의라는 것은 다른 사람이 붙였다 하더라도 본인은 그 Neo라는 말을 본인은 사용하지 않았다. 거기에서 정통이라는 말을 쓸려고 했고 정통이라는 말을 쓸 때 돌아가는 모양은 이런 신교에서 즉 16세기로 돌아가는 길에서 바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돌아가는 방식에 있어서 17세기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둘째로 정통주의로 돌아가는 것은 그안에 머물러 있고 그것과 동일하게 행하고자 한다 이런 뜻이 확고하게 있었다. 어떤 면에서 바빙크도 정통이고 바르트도 정통인데 그러나 바빙크 측에서 본 바르트는 신 정통이라고 붙일 이유가 있게 되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두가지 의식을 특별히 바빙크가 가지고 돌아갔다는 것이다. 그다음에 헤페의 입장을, 과거 17세기 자료를 가지고 돌아간다고 해서 바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바로 돌아가는 방식에 있어서 어떻게 돌아가느냐가 중요한데 그 어떻게 돌아가는 방식에서 헤페의 자료를 비판했는데 그것이 바빙크의 견해와 동일하였다.
즉 헤페의 역사적 관점은 칼빈을 개혁주의 아버지로 돌린 것이 아니라 후기 멜랑히톤을 개혁주의 아버지로 돌렸다는 이점에 비판을 했다. 그러니까 그가 칼빈을 돌아가데 그 17세기를 이해하는 그 헤페의 입장에 멜랑히톤 쪽이라는 것이다. 지금 현재 독일신학의 전반이 개혁주의라 하면 후기 멜랑히톤 학파의 속해있다. 그래놓고 개혁주의 이름으로 불려있고 그것이 연결이 되어 있다. 우리가 뒤에 17세기에 자세히 논하면서 확인할 수 있는데 그만큼 그는 17세기를 돌아가되 칼빈을 굉장히 앞서 있다. 더구나 헤페에 있어서는 데카르트주의와 결합된 코케이우스와 그 추종자들의 언약신학의 돌입을 깊은 문제로 여겼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바르트 신학을 이야기할 때 이 배경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즉 그가 데카르트주의를 비판할 뿐만 아니라 코케이우스와 그 추종자들을 강한 비판으로하는 노선에서 개혁신학을 시작한다. 물론 이런 오해가 있다. 그가 시작하는 바탕이 변증법적인 분위기가 루터란들과 결합되어서 그가 시작하는 바탕이 물의가 접촉하는 인물들이 루터란들이고 불트만도 있고 가르텐도 있었을 때 그가 그들과 사귄 친구들고 말미암아 후에 얼마나 고통을 당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그분들과 자기들과 혼돈을 대 사회적으로 신학적으로 변증하기 위해서 반틸의 비판에 그가 고통스러워 했다.
그런데 두분과 거의 동일하게 바빙크가 물론 쯔빙글리를 연구했지만 그가 최종적으로 기초한 대부분의 신학은 칼빈의 신학이다. 그가 칼빈을 깊이 연구해서 그가 그것을 몸에 전 교의학 책에 베여 있는데 그런 비슷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거기에 문제가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여기에는 결국 문제가 어떤 문제가 생기느냐 하면 지금 우리시점에서 17세기로 돌아간다는 것은 우리 시대의 인간상 우리 시대의 양태를 완전히 벗겨내기가 어렵다는 것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고 17세기로 돌아가든 16세기로 돌아가든 그 돌아가는 그 길에 있어서는 아주 다양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우리가 관찰되는 것은 바르트가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바르트가 돌아가는 그런 방식과 달리 바빙크가 돌아가는 방식과 달리 우리가 어떻게 돌아가야 될 것인가? 여기에서 가장 초점을 맞춘 것은 오늘의 갖는 문제를 가지고 돌아가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또한 오늘시대에 연구했던 17세기 신학에 대해 얘기했던 칼빈에 대해서 연구했던 그것에 의해서 돌아갈 수 는 없다. 여기의 초점은 주로 인물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돌아가는 것이 어떤 것이 가장 좋은 개혁주의로 돌아가는 것인가 하는 이 기준에 대해서 생각하고자 한다. 이것을 발견함과 동시에 여러분들이 기준을 가지게 되는데 전통개혁신학이 무엇인가, 무엇을 보면 정통개혁신학이라고 할 수 있고 어떤 책을 평가하든 그 초점이 어떤 입장이냐에 따라서 정통개혁신학에서 어떤 라인에 속해 있냐가 결정된다. 자 그런면에서 머리말을 이야기할 수 있는데 그래서 이제 한국장로교회와 정통개혁신학에 대해서 생각하겠다.
초기 선교사들이 퓨리탄의 인물들이였음을 인정하고 있다. 춤추는 것, 담배피우는 것, 카드놀이 하는 것 다 죄로 여기고 주일을 엄격하게 지키는 것은 퓨리탄의 전형적인 핵심적인 내용이다. 어떤 정신적으로 핵심되는 것으로 상징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교회가 성립될 때 그 분위기가 복음주의 교회라고 할 수 있는 분위기이다. 즉 선교사들이라든지 내적으로든지 다른 미국이나 호주나 달리 새로운 교회를 새워야 되겠다, 물론 신대륙에서 새로운교회를 세워야 되겠다 하는 것이 회중교회가 되어서 오늘날 독특하게 미국의 정신적인 틀을 형성했던 것 처럼 우리교회도 그런 상황이 있었는데 그 때 분위기는 선교사들이나 내국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분위기가 복음주의 교회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었고 한 복음주의 동시에 한국 그리스도 교회를 만들려는 분위기였다. 결국 이 자료는 그 당시 장로교 선교사들의 회의의 내용을 근거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합동운동에는 감리교의 집회운동이 장로교안에 일어난 이후 한국 교회의 부흥의 모범이 되었고 그것이 크게 영향을 끼쳤고 우리에게 큰 자랑거리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그 신학적 분위기 자체는 그런 한국 그리스도교회를 세울려는 분위기였다. 어떤 의미에서는 신학적인 근거에서 볼 때 결국 장로교와 감리교가 구분이 가지 않는 그런 의미에서 교회였다. 역시 선교사를 보낸 교회에서 한국의 일어난 일련의 분위기가 1901년 이후에 미국에서 발생하게 된 오순절 운동으로 같다고 판단하였다.
이런 분위기에서 실패할 경우를 생각해서 선교회에서 1908년에 독립적으로 장로교회를 세울려고 했던 것인데, 그 계획과는 달리 1907년 9월 17에 생기게 되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역사로 보는데 그 때 갑자기 세워진 독로회는 세워질 때 결국 바로 장로교회, 지금 선교사들이 섬기고 있는 장로교회의 그 신경과 정치가 들어오게 된 축복을 얻게 되었다. 그래서 1907년 임시로 채용된 신경과 정치가 1908년 신경과 정치를 위한 위원회에 보고를 받아서 완전히 채용이 되었는데 이 때 채용된 내용이 우리가 지금까지 갖게 된 12개 신경이다.
그런데 예정론에서 유기론에 대한 고백이 없고 그리스도의 제한된 속죄에 대한 고백이 분명하게 나타나 있지 않는 그런 고백이었다. 물론 그것이 일반적으로 선교지 신학의 한계를 나타낸 것이며, 사실 아르미니우스트 주의가 빠졌던 같은 사고의 위험성을 허용하는 성격에 다소간 있게 되는 것인데 우리가 이것을 진단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특별히 북장로교회의 1902년과 1903년에 웨스트민스터 개정작업이 있는 줄을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다고 믿는다. 어떤 수정하고 개정하는 분위기하고 우리가 신조를 택하게 되는 분위기가 같은데 거기에 보면 웨스트 민스터 개정하면서 성령에 대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선교에 대해서 각 34장 35장에 첨가하였고 또 16장 22장 25장을 첨가하였다. 맹세에 거절되는 죄를 부정하고 카톨릭을 거기에서는 적그리스도라는 말을 바꾸고 비 성경적이라고 하므로 카톨릭을 포용하는 입장으로 교정이 되었고 이방인들에 대한 선을 인정해야 한다고 했는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 무시해서는 안되고 찬양할 가치가 있고 유용하다는 식으로 수정하였다.
우리가 관심을 두어야 하는 것은 왜 이렇게 바꾸었느냐는 것인데, 이것이 그 당시의 선교 분위기와 밀접하게 연결되어서 이렇게 바꾸어야 되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 개혁교회는 전부 이것을 부정하였다. 이 때 개정하였던 1908년 이후까지 개정하였던 것을 박윤선박사님이 다 제하여 버렸다. 1646년 원래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그대로 우리교회로 채용하였다. 이것이 물론 신학적으로 큰 개혁인데 물론 이성격에는 우리가 말하는 여러 가지 성격이 있다. 더구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3장과 10장에 관한 해석으로서 1902년과 3년에 선언문을 첨가하였는데, 이 선언문이 바로 그 당시의 미국 장로교회의 예정론에 대한 입장이었다고 볼 수 있다. 실제적인 내용이다. 물론 앞에 웨스트 민스터 신앙고백의 예정론에 대한 내용이 있음에도 그 첨가된 것이 그 시대의 본질이었다. 마치 카톨릭에서 성경이 영감이 되었다고 완전히 믿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전통을 또한 붙임으로 그 정통이 신학적 입장이 된 것 처럼 이때도 선언문이 그 당시의 신학적 입장이었다.
거기에 보면 영원한 작정교리는 온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다라고 거기에 강조된 것이 온 인류이다. 그 다음에 그리스도의 죽으신 것, 유화이든지 온 세상의 죄를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구원의 은혜는 만인에게 미친다는 교리로서 그 조화를 선언하였다. 그래서 하나님이 죄인의 죽음을 원치않으셨다는 것과 하나님은 역시 그리스도안에 모든 이를 위한 충분한 구원을 이루셨고 그 구원을 모든이에게 적용하시며 그리고 값없이 모든이에게 제공하였다는 입장이었다. 더구나 웨스트민스터 10장 3항에 보면 유아로 죽은 자는 누구나 이렇게 되었다. 누구나, 그 본문에는 유아로 죽은 택자인데 이때로부터 유아로 죽은 누구나로 되었다. 그래서 은혜의 선택안에 포함이 된다. 그래서 그것을 적용하였는데 그리스도안에서 성령을 통해서 그가 기뻐하신 때와 장소, 및 방법에 의해서 중생되고 구원받는다는 선언을 하게 되었다. 이런 선언을 실제적으로 진단해보면 우리가 뒤에 도르트회의에서 아르미니우스트에 대한 어떤 입장이었는가 생각하겠는데 그 당시 아르미니우스트에 훨씬 진보적이었고 훨씬 웨슬레 주의와 가까운 선언이었다.
이런 분위기가 선교지의 분위기였다. 물론 남 장로교회만은 그대로를 보존하였다. 그러나 북장로교회는 그렇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국내적으로 복음주의적 한국적, 통일된 그리스도교회를 세워야 된다고 했는데 사실상 그 때 이루어져야 되었다. 그 때 실패한 것은 오늘날 물론 실패한다. 어쨌던 내적인 분위기가 전부 그런 분위기였다. 하물며 선교지에서 그런 변화가 있어서 요청이 되었고 자연적으로 이런 상황에서 인도 장로교회의 12개 신조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저는 이제 강조하는 것은 한국 장로교의 신학은 바로 거기에서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제가 강조하는 것은 박형룡 박사의 신학의 특이성이 한국교회의 신학을 결정하였다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17세기로 돌아가는데, 그 분이 과연 싸웠던 정통신학이란 무엇이었는가이다. 이것을 먼저 언급할 이유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 정통신학은 무엇인가를 세가지로 나누어 보았다.
첫째로는 박형룡 박사의 유학시절에 두드러지게 보수주의 기수의 역할을 하였던 메이천의 전통신학과 자유주의 신학을 대조시킨 그런 틀이 그의 틀과 같은 것일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왜그런가 하면 박윤선 박사님도 메이천을 추천하였다고 볼 수 있고 또 박형룡 목사님의 입김도 크니까 우리가 부정할 수 없다고 본다. 물론 총신하고 고신하고 갈라질 때 어떤 의미에서는 박형룡목사님과 박윤선목사님의 선택의 성격도 있는데 그러나 두분은 실제적으로 같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한분은 메이천을 너무나 강조함으로 생긴 차이일 수 있는데 그러나 두분은 같은 입장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바르트를 박윤선 목사님은 바르트를 많이 비판을 하셨는데, 그만큼 반틸의 영향도 있었고 그러나 반틸의 입장을 박형룡 박사님이 안하였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기 때문에 같다고 생각한다. 결국 그 당시 박형룡 박사가 1929년에 메이천의 신앙이란 무엇인가?가 번역되었고 메이천의 1921년 작품인 바울의 바울종교의 기원과 1923년의 기독교와 자유주의의 그 카테고리를 굉장히 많이 사용하였다. 그러기 때문에 메이천의 정통신학과 자유주의 시학의 대조로 생각할 수 있다.
둘째로는 그의 대조는 근본주의와 자유주의와 같은 대조일 가능성이 있다. 문제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자유주의와 싸우되 역시 근본주의와 싸우는 베르코프의 틀과 박형룡 박사의 틀과 비교해야 되기 때문이다. 물론 루이스 베르코프 근본주의자들과 똑같이 모세오경저작설 문제와 성경무오성의 변호를 위해 얀센과 싸웠지만, 언제든지 전천년설을 부정하고 현실에 대해 적극적인 무천년설의 입장에 서 있었다. 박형룡박사의 후기 신학이 바로 그 신학인데 우리가 아는데로 천년문제에 있어서는 다른데 그 당시의 전통신학과 자유신학의 대립이 1910년 이래 5년동안 출판된 그의 저서 신학난제에 보면 근본교리의 입장을 자기의 입장으로 받았고 그 범주들도 진화론, 비교종교학 고등비평, 사회적 복음신학 비판의 주제들도 그 주제들과 거의 같다. 그러기 때문에 문제는 근본주의와 자유주의와 싸우는 그 대립현상속에 왔을 때 그 양상 속의 신학적인 모든 문제가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셋째로 개혁주의 전통에 입장에서 정통신학과 자유주의 신학 사이의 대립이었다는 가정하지 결국 메이천을 문제로 해결하고 또 근본주의와 자유주의의 대립의 문제에 있어서 근본주의를 뛰어들었던 인물중에서 워필드도 있었고 다른 많은 분들이 있는데 여기에 해당된 인물에 속해있었다. 특별히 그의 기본자료로서 찰스 핫지와 스트롱의 조직신학을 사용하였고 제임스 오르와 제임스 데니의 작품을 많이 인용하였다. 이때 제임스 오르와 제임스 데니는 자유주의와 싸우는 그 근본주의 내에서의 그 근본주의 교리를 썼던 인물들이다.
그러나 그들의 특성은 근본주의의 입장에서 자유주의와 싸운 것이 아니고 자유주의와 싸우되 근본주의와 합세해서 싸웠는데 결국 제임스 오르는 스코틀랜드의 개혁주의 보수주의자, 즉 성경의 무오설 문제, 물론 그가 신복음주의의 경향을 가지고 있지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성격은 스코틀랜드의 개혁신학의 성격이었고 데니도 마찬가지이고 그가 역시 1937년에 뵈트너의 작품을 번역함으로서 그가 확실히 개혁주의라인에 서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루이스베르코프의 후에 조직신학을 써서 그분이 바로 사용했을 때 그가 그런 바탕, 개혁주의신학자로 근본주의 성격에 참여했고 자유주의와 싸웠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그분이 그런 라인에서 그분이 흡수했던 모든 것이 신학입장들이 한꺼번에 그분의 생과 함께 그분이 신학작업과 함께 한국교회의 신학으로 고스란히 옮겨오게 되었다. 그래서 그에 대한 평가는 개혁주의 올바른 노선이나 그 다양성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신 정통주의를 비판하고 신 복음주의 비판하고 신 중립주의를 비판하면서 건전한 근본주의적 입장을 펴나갔을 때 그때에도 여기에 대해서는 많은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래서 본 강의에서는 그런 신학이 갖는 특성에 있어서 그분의 신학중에서 그분이 고스란히 남겨온 신학에서 어떤 것이 핵심인가? 그것 때문에 개혁주의라 할 수 있는 몇 가지 것들을 생각하고자 한다.
첫째는 그리스도는 택자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것이다. 이런 핵심적인 물음은 아르미니우스와 갈등과 논쟁점에서 생긴 것이 아니다. 개혁주의라인에 있어서 하이텔베르크의 신학의 영향에 있는 노이스타트가 있고 헤르보론이 있는데 헤이보른의 신학이 17세기 전까지 유지되어서 16세기 개혁주의신학의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요한네스 피스카토르이다. 그가 물음은 주로 책을 섰을 때 이런 물음을 썼다.
첫째로 아담은 필연적인 의지에 의해서 하나님으로부터 타락하였다. 둘째로 하나님은 결코 모든 이들을 긍휼히 여기거나 모든 이들을 구원하시기를 원치 않으셨다. 셋째로 그리스도는 결코 모든 이들을 위해서 죽으시지 않으셨다. 그리스도는 그의 양들 즉 교회를 위해 죽으셨다. 이런 논점과 관련해서 하나님은 어떤 유기지들도 구원에 이르도록 부르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기자들 중 어떤 이가 구원받은 일이 일어나기를 원하지 않으셨다고 진술하고 있다. 특별히 예지된 믿음이란 의존하지 않는데 대해서 그의 책에서 상당히 길게 다루고 있다(1595년 자료). 이런 내용이 중심내용이었고 결국 이런 가르침을 받는 17세기 개혁주의 신학에 있어서 교육을 받은 사람에게 있어서는 이런 주제는 아주 당연한 주제였고 역시 도르트 회의는 그 핵심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문제는 오늘날 학자들이 이 문제와 관련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그럼 칼빈은 어떤 이야기를 했느냐이다. 그것은 요한일서 2:1-2절에 보면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자 이문제이다.
본문의 이 내용을 어떻게 핵심하는 것이 칼빈의 논지인데 이 해석에 의해서 칼빈주의의 특성이 나타나는데 그분의 해석이 “확층으로 인하여 여기에 덧붙힌 것은 신자들 즉 그리스도에 의해서 제공된 속죄는 믿음으로 복음을 수용하게 될 모든 이들에게 미친다고 확인된다는 사실이다” 모든이에게 미친다고 할 때 칼빈이 말하고 있는 모든 이는 모든 이인가? 여기서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데 결론적으로 모든이는 택자 모든이이다.
그래서 다음 사실에 “어떻게 온 세상의 죄들이 속죄되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이것을 핑계로 모든 유기자들, 따라서 사탄까지 구원을 인정하는 미치광이들의 잘못들을 생략한다.” 이때 미치광이라고 했을 때 불링거를 많이 암시한다고 말을한다. 즉 개혁주의 내에서의 쮸리히의 계열을 말하는 것이다. ..... “이 모순을 피하기를 원하는 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위해서 충분히 고난을 받으셨으나 택자들을 위해서만 유효하다고 주장한다.” 그것이 일반학교에서 확고한 입장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위해서 충분히 고난을 받으셨으나 택자를 위해서만 유효하다.” 이 말은 무엇이냐 하면 구원의 성취에서는 충분히 모든 세상을 위해서 구원을 이루셨지만 구원의 서정에서는 그것은 택자였다는 논리인데 이것이 일반적인 보편적인 견해이다.
그러나 칼빈이 부정하는 것은 구원의 성취부터 택자를 위해서부터 택자를 위해 죽으셨고 구원의 서정을 유효하게 하는 것도 택자를 위해 죽으셨다는 입장이다. 그래서 “일반적인 학교에서 해결하고 있는 이런 것에 대해서 비록 그러할지라도 그 말이 진리임을 나는 고백한다. 그런데 현 구절에 적합하지 않는다” 이는 요한의 의도가 모든 교회가 공통적으로 이것이 선한것이다라는 외에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모든 이들 아래서 유기자들을 이해하지 않았다. 그것을 배제시켰다. 그래서 동시에 앞으로 믿을자들이고 세상의 다양한 재난들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을 의도한 것이다. 결국 칼빈은 그당시에 학자들 사이의 건전한 해결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세상에 대해서 충분하되 그 실제적인 적용에 있어서 택자들에게만 유효하다는 주장이였음을 확증하고 있다.
그러나 칼빈은 그 해결에 조건을 달았다. 그래서 칼빈에게 있어서 모두라는 말은 문맥의 정확한 뜻과 상관없이 유기자들을 제외한 택자들로 이해하게 되었다. 그런데 아르미니스트의 주장은 바로 그것이다. 그리스도는 영생을 위해 택한 그들을 위해서 죽을 수 없고 죽어서는 안되며 죽지 않았다. 그것이 핵심적인 아르미니스트의 주장이다. 이렇게 칼빈주의와 정 반대가 되었고 알미니우스트가 칼빈주의 즉, 베자라인과 쟌키우스라인을 이런 면에서 부정하게 되었다. 이런 면에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이고 그러나 이런 입장에 대해서 웨스트민스터 회의 때에도 논의가 되었는데 즉 요한복음 3:16에 관해서 논쟁이 되었는데 거기서 에드먼드 칼라미라고 리챠드 박스터와 친밀한 관계였던 물론 리챠드 박스터와 비슷한 내용을 가지고 있는데 박스터주의란 바로니즘 또는 아르미안 주의와 동일하다고 본다. 그때 그가 그런 말을 했다. 그리스도를 주신 하나님의 의도는 택자를 위해서만 아니고 유기자를 포함한 모두라고 발언하였다. 이것이 문제가 되었다. 그래서 그가 변증하길 도르트회의를 부정하지 않았다고 하고 다만 유기자들에 대해서 은혜의 경륜에 대해서 이야기 하려고 하였다고 말함으로 결국 본인이 포기함으로 종결이 되었던 문제이다. 이렇게 해서 이것이 웨스트민스터의 성격에 대해서는 그렇게 해서 규정되었다. 실제 내용적으로 내적으로 참여한 모든이가 이런 견해를 가지느냐에 있어서 칼리미는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칼빈주의자들은 다 알미니우스의 입장에서 칼빈을 연구하고 있다. 이것이 문제이다. 우리가 한가지 언급했던 이문제는 종결이 되었다. 17세기에 이미 리베트가 레이든대학의 교수 도르트회의의 승리를 이끌었던 인물중에서 불란스 사람 리베트가 도르트회의의 승리이후에 레이든 대학에 돌아오게 되는데 알르미니스트가 물러가고 리베트가 다른 무리와 돌아오는데 이분과 쇼무르 학파 카메론, 불란스에 있는 이 카메론은 스코틀란드 출신이다. 그런데 여기에 쇼무르, 즉 불란스에 와서 가르치게 되었는데 물론 카메론이 쫒겨난 것은 아르미안주의 때문인데 지금 카메론은 많이 찬양을 받고 있고 여기에 아미로트도 몰트만이 논문을 썼던 사람이다.
여기 몰트만이 논문을 쓴것도 아미로토를 찬양하기 위해서 드러내기 위해서 썼다. 물론 몰트만의 신학이 여기서부터 출발된다. 모든 것들, 그 후에 있는 모든 신학의 양상들은 이분을 택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 때 아미로트와 논쟁을 했을 때 이미 그 논쟁은 종결되었다. 카메론에 따르면, 칼빈이 그리스도가 믿는 자들을 위해서 충분하게 만족시켰고 역시 그 만족은 경건한 자들을 위해서 유효하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리베투스는 칼빈이 그리스도께서 모든 이들을 위해서 동등하게 죽으셨다고 말하였다는 기록은 어디에서도 보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 해결로 인해서 17세기에서는 이 논쟁으로 종결이 된다. 칼빈이 어떤 입장에 있었는가 여기에 종결이 된다.
개혁주의 정통신학에 있어서 물어야 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누구를 위해서 죽으셨습니까? 이것에 대한 대답이 어떤 대답이냐에 따라서 모든 것이 달라진다. 자 굉장히 긴장하는데 하여간 정통개혁주의 신학이라 했을 때 개혁신학이라 했을 때 이 물음은 반드시 물어야 할 물음이다. 특히 칼빈을 따른다 그 핵심을 따른다 했을 때 그것을 가지고 고난을 받느냐, 안받느냐는 결정하는 것은 루터란과 싸우든지 너가 이 강단자리를 설것인지 안설것인지를, 피 신학에 대한 근본 기준은 바로 이 기준이다. 예정론이다.
바로 이 예정론 때문에 쟌키우스가 스트라스부루크에서 쫓겨났고 하이델베르크가 루터란에 의해서 포기되어서 노이스타트라는 새로운 도시를 새웠고 이 예정론 때문에 많은 사람, 600여명의 많은 신학자들이 그 고백에 찬성하지 않는다 하므로 다른길을 택하였고 그 때 비로소 개혁주의를 보호했을 때, 그 인물들, 관원들이 누구냐에 따라서 번성하는 도시가 결정되었던 것이다. 그 장소가 개혁주의 신학의 중심지라 이말이다. 개혁주의 신학이 옮긴다는 말은 그 중심사상을 가진 자가 거기에 머물러있는 곳이고 그 사람이 다른 곳에 옮겼을 때 그 개혁주의 신학은 거기에서 있다고 말한다.
그 다음 두 번째로 언약의 통일성문제이다. 칼빈의 신구약의 통일성을 말할 때 단순히 기독론의 통일성을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적 통일성이요, 구원의 길과 서정에까지의 통일성을 의미한다. 한 예를 들어보자. 우리가 바머선언을 알고 있는데 우리가 그것은 히틀러에 대한 승리인데, 원 작성자는 바르트이다. 바르트가 왜 세계적인 신학자로 부각되었는가 하면 히틀러시대의 몰락과 함께 그 후 반세기 동안에 승리의 신학으로서 세계의 주도적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바머선언은 중요한 것이다. 승리의 신학으로서 에큐메니칼의 인도자가 되었고 결국 루터주의자들이 아무말을 못하도록한 가장 근본적인 이유이다. 패배자로서의 모습이다.
그런데 거기에 핵심은 무어냐 하면 언약의 통일성문제이다. 즉 바르트가 주장한 것은 유태인을 왜 죽이느냐인데 그 근거가 신교쪽에서는 히틀러쪽에서 국가교회는 죽여야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과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것인데, 우리는 택함을 받았다는 것이다. 유태인은 버린자식이라는 것이다. 이슬람종교와 동일하고 우리와 상관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무슨일까지 했는가하면 구약을 다 버렸다. 이쪽과 관련된 부분은 다 조작을 해서 성경도 따로 만들었다. 극단의 사람들, 그런데 바르트가 얘기한 것은 아니다. 그 이스라엘은 우리의 교회였다. 이때까지 율법과 복음을 늘 갈등을 삼았고 문제를 삼지 않았다. 그러나 바르트는 율법이 있기전 복음이 있었고 율법의 뿌리는 복음이다. 그래서 신약만을 교회에 사용될 수 없고 구약도 토타스크립투라가 다 권위가 있다고 선언한 것이 바머선언이었다. 그래서 신학적으로 대변을 하였다. 그래서 이 신학적인 대변이 결국 그 모든 시대의 개혁주의의 승리를 이끌게 한 중요한 선언이기도 하다.
그런데 바르트가 이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 바르트 자신에게 온 것이 아니고 칼빈의 예레미야의 주석에서 건졌다. 또 책을 쓸 때 “복음과 율법”이라고 순서를 바꾸었는데 그 동안에는 “율법과 복음”이라고 했는데 여기서는 순서를 바꾸었다. 그래서 여기서 칼빈의 말을 인용하는데 율법은 복음의 필연적인 형식이다. 이것이 정확하게 정통주의 개혁신학에서 언약의 통일성과 관련이 되는 것이다. 그럼에 따라 당연히 개혁주의 내에서도 작정의 다양성을 이야기하고, 물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작성할 때 논쟁이 굉장하게 된 것은 무엇이냐 하면 작정이 하나냐 다양한것인가? 이것을 생략할 것인가? 안할건가? 굉장히 논의가 되었는데 결국 생략을 하였다. 그러면서 도르트에서 신구약의 통일성을 부정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코케이우스가 말하는 그런것에 대해서 어느정도 열려주는 방향으로 결정이 난것인데 그러나 그것은 다수의 의해 결정이 되었다.
그 코케이우스의 사상이 잘못된 것이 무엇이냐 하면 물론 다양한 것이 있지만 언약신학에 있는데 그것은 작정의 다양성, 언약의 다양성을 이야기 하는데, 그런데 언약의 다양성을 어디까지 이야기 하느냐 하면 구약에서의 용서의 차이가 있다고 한 것이다.
칼빈과 부쩌이래, 부쩌뿐 아니라 크리소스톰에 신구약의 실체의 통일성을 늘 얘기했는데 그것이 부쩌, 칼빈, 불링거를 통해서 이어져 개혁신학의 핵심을 이루는 것인데 이런 내용에 대해서 실체의 통일성을 말할 때 구약의 성도들도 신약의 성도들과 마찬가지로 구원의 서정의 방식까지 동일하게 같은 방식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뭐 주체뿐만 아니라 삼위일체뿐 아니라, 그런 것을 다 포함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것을 코케이우스가 부정을 했다. 용서의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 이런것들이 코케이우스가 부정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
셋째로 유한은 무한을 받지 못한다. 이말은 쉽게 말해서 성육신의 문제이다. 그리스도가 전부터 계셨는데 그리스도가 육체를 입을 때에 그냥 육체속에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한꺼번에 다 있는 것이다. 신성이 육체밖에 있는 것이다. 루터란들은 신성이 육체안에 가두워 진 것이다라고 한다. 우리는 신성이 육체밖에 있다. 여기에 개념이 토투스와 토툼의 개념이다. 전체성, 토투스는 인격체 전체성은 토투스는 편재하다. 그러나 토툼만은 편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우리와 하나가 된 모양이 있다. 그러나 신성만은밖에 있다. 그래서 유명한 말이 소위 하이크 오그만이 개혁주의의 3가지 독특성을 이야기 한다. 에티암 엑스트라 엑클레시암, 즉 교회밖에도 구원이 있다. 또는 성만찬 밖에도 구원이 있다. 에티암 엑스트라 꼬에남, 그다음에 에티암 엑스트라 카르넴, 육체밖에 로고스가 있다. 이런 세가지 특성을 이야기 했는데 그중에 엑스트라이다.
루터주의자들은 여기에 주장한대로 육체밖에 로고스가 없다는 것이고 쯔빙글리와 우리측은 그리스도의 신성이 인성안에 거하는 인격적 통일성을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신성은 인성밖에 있다는 이런 주장을 한다. 그래서 이것이 중요한 주장이 결국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서 1536년부터 계속 남아있다. 루터주의와 싸움은 루터주의의 주장은 무엇이냐 하면 그러면 너희들은 네스토리안 주의가 아니냐인데 안디옥학파의 주장이 아니냐 즉 실체의 하나됨을 부인한 것이 아니냐 인데 그것은 아니다. 실체의 하나의 다양한 양상, 그래서 루터주의와 우리와의 싸움은 성만찬과 싸움과 동시에 이 문제에 싸우게 되고 이것이 지금까지 싸우게 되는 문제이다. 그래서 이것이 하나의 중요한 특성으로서 개혁주의에 있다.
네 번째로 장로회의 정치원리이다. 이것은 쉽게 말해서 교회의 열쇠가 누구에게 있느냐이다. 회중에게 있느냐, 한 개인에게 있느냐, 또는 다수에게 있느냐하는 문제이다. 즉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있어서 베드로가 신자로서의 그 고백을 기초해서 열쇠권을 주었느냐? 사도들을 대표해서 베드로냐? 아니면 한 개인을 대표해서 한 것이냐? 즉 그리스도를 대표격으로, 이것이 교황제도와 회중제도와 우리와의 차이점이다. 그래서 우리는 늘 부정했다. 그래서 앵글리칸하고 부정되는 것은 결국 고위 성직자, 한 머리교회, 한 주교회 이것을 부정하고 완전한 교회로서는 지교회를 포함한 지교회의 열쇠권을 가진 직원들의 모임이 열쇠권을 가졌다고 하면서 노회와 총회 이런 교회의 정치를 포함해서 완전한 교회다고 했다.
지교회자체로서는 완전한 교회가 아니다. 지교회 자체로서 완전한 교회로 주장하는 사람은 회중교회이다. 이것과 늘 갈등이 있어서 다음과 같은 많은 내용들을 갈등이 있었음을 생각할 수 있다. 회중교회의 비판을 아르미니스트와 소키니우스 주의와 그 근원적으로 같다고 비판한다. 왜냐하면 이분들의 교회관에 있어서는 회중교회의 입장과 동일하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제 물론 중심적으로 이야길 할 수 있는 것이 의장이라는 개념은 그것은 박윤선박사님이 개혁을 했는데 이런것들은 우리 장로교회에 있어서 중요한 개념으로서 오늘날 까지 남아있다. 그래서 오늘날 스코틀랜드에서 하지도 않는 것을 우리 장로교회가 오래전부터 해오고 있다. 그런데 우리교회에서 개혁을 했는데 다시 돌아가서는 안된다. 박윤선박사님이 가장 큰 개혁을 했다면 혁명적인것인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나오게 된 배경이 정치의 개혁인데 신학적인 개혁이 아니다. 신학적인 개혁의 입장에서 비판한 사람은 즉 앵글란드의 로드 주교이다. 신학적인 문제가 아닌데 왜 나가느냐 했을 때 우리의 주장은 그것은 아니다. 신학적인 문제는 교회안에 다 있다. 그래서 갈라질 문제가 있다. 이런 부분에서 핵심적인 내용이 웨스트민스터의 신앙고백서의 정치문제인데 이 문제를 즉 총신과 관련해서 우리가 개혁해서 나온 것이다. 이것을 결론내린 것을 바로 박윤선박사님이 하셨던 것이다. 물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자체에 신학적인 작업도 중요하지만 이런 권징문제에서나 기타 문제에 결론을 내렸는데 물론 그 분이 회중교회를 약간 반영한 이런 문제에 있어서는 다소 생각해야 할 문제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혁한 것은 제 자리를 올려놓은 것이다. 이것을 제가 강조하고 싶다. 특별히 교단과 관련해서 굉장히 강조하고 싶다.
다섯째가 세속정치와의 교회의 독립성 문제이다. 우리가 말하는데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와 이런 부분에서 다 일치가 된다. 저항권은 교회안에서의 저항권을 인정하고 관원에 대한 저항권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것이 확고한 입장이다. 이런 배경에는 결국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나라와 이 나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근원부터, 목적도 모두가 다르다. 오히려 이것은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데 그것은 전혀다른 목적에서 참여하는 것이다. 즉 그나라의 영광이랄까 그 시민의 정체를 드러내는 독특성을 위해서 그 적극적인 일이 이르다는 것이지 그것과 동일시하거나 혼동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가 무슨 장로교회가 개혁주의가 민주주의에 무슨 공헌을 했느냐는 이것은 주제와 완전히 다른 것이다. 사람들 사이에 너가 어떤 조건에 있든, 어떤 땅이나 종류의 법아래 살든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이다. 그래서 그런 내용을 독립성을 이해한다고 볼 수 있고 또한 에라스투스와의 갈등이 있었다. 그 당시 관원과의 관계는 피할 수 없었다. 관원이 생명을 보존해 주어야지 목사들도 성직의 활동을 할 수 있었는데 그 관원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칼빈주의는 거리를 가졌다. 관원이 주인이 아니다.
앵글란드를 보면 관원이 주인이 되었는데 그분이 임명하면 영원한 회장도 되고 이렇게 되었다. 그래서 그것을 부정하고 나온 것이 우리 장로교의 성격인데 거기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에라스트주의이다. 에라스트주의라는 것은 하나님의 내적인 치리자이고 외적인 경영자는 관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세속정권도 있고 교회권도 외적으로 관원에게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개혁주의 베자이래 에라스트 논쟁이었던 하이델베르크 영역이나 제네바 영역에서 에라스트를 배척하는 것은 결국 교회는 독립적이다라는 것이다. 법도 다르고 질서도 다르고 모든 것이 다르다. 이런면에서 부정하는 입장에 서 있었다. 그래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작성할 때도 에라스트와의 싸움도 중요한 문제였다. 독립교회와의 싸움뿐 아니라 이 에라스트와의 싸움이 결정이 되는데 그러나 다행히도 승리를 일으킨 것이 장로교의 승리를 입었다.
마지막 여섯째로 주일성수와 예배의식이 있다. 주일성수는 어떤 근거에 되었는가는 율법의 제 3사용에 그 원리가 있다. 즉 중생이후에도 율법은 그대로 유용하다. 물론 율법의 언약의 통일성과 연관이 되겠지만 우리가 제 4계명을 지키는 것은 그것은 도덕법으로 지키는 것이다. 예식법으로 버리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퓨리탄들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퓨리탄이 주일성수를 이야기할 때 이런 원리에 의해 시작이 되었다. 그래서 미스터 바운드의 경우에 그런 것이 있었는데 엘리자베스여왕때 이런 문제로 인해 핍박을 받고 이런 것을 인하여 책이 회수되고 출판되지 않았지만 은밀히 그 책들이 읽혀졌다. 그래서 주일성수는 내적으로 존속되어 왔다.
열매는 결국 스코틀랜드에서 열매를 맺고 아일랜드에서 열매를 맺고 후대에 핍박이 좀 가라앉았을 제임스때에 와서 점점, 물론 제임스때 핍박이 계속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혁명이 일어나서 공화정 혁명때 꽃을 피게 된 것이 주일 성수 문제인데 문제는 여기에 보면 그 퓨리탄의 운동을 방해하기 위해서 영국교회가 하나 내놓은 것이 오락의 책에 관한 내용이다. 교회에서 이책을 읽도록 했고 그것을 거부했을 때 치리의 대상이 되었다. 그래서 목사가 면직되고 그래서 이때 소위 non- Confirmation개념이 나왔다.
퓨리탄의 성격이 강한 것은 주일성수를 온전히 성수하는 것을 우리는 온전히 지킨다. 오후에 오락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 이런 것은 우리에게 허용할 수 없다. 그래서 내가 면직을 당하면 당했지 서명을 하지 않겠다고 했다. 이것이 퓨리탄의 성격이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많은 희생이 따랐다. 그래서 장로교의 특징이든 퓨리탄의 특징에서 이 안식일, 주일성수 문제가 핵심적인 내용으로 보존되었다.
동시에 다른 유대 절기를 거부했는데, 크리스마스나 부활절 모두가 외부 미신으로부터 온 것이다. 잡신을 섬긴 것이 오용이 된 것이다. 오직 성일은 주일만을 지키는 것이 스코트랜드 입장이고 그후에 모든 입장인데 이것이 유럽개혁에 논쟁이 된다. 퓨리탄에서, 그래서 여기와서 우리라인이 결정이 된다. 우리가 이런 면에서 결국 확고한 입장이고 이러한 입장이 몇가지 의식과 관련해서 프린스턴신학에 밀러가 강의를 처음 핀트를 세울 때 이것을 중심해서 장로교 신학을 결정해서 세워왔고 그것이 프리스톤 신학이고 우리가 당연히 그 입장에 서야 될 것이다.
17세기 개혁신학의 역사적 배경을 이야기하는 이유가 개혁신학 중심지가 어디이고 중심인물이 어떻게 해서 이동을 했고 그다음에 도르트회의에서 개혁신학이 하나로 회의로서 모이게 된 배경으로 모이게된 배경을 알기 위해서 생각하고자 하는데, 도르트회의에서 있었던 내용인데, 당시 도르트 회의에는 의장자리가 있고 관원들이 있고 관원에 대한 서기가 있다. 제일 뒤쪽에는 대학을 대표하는 교수 5명이 있었다. 화란개혁에서 6명정도가 있고 제일 앞줄에 7명이 있었다. 프랑스 출신의 교수들은 참석하지 못했다. 제일 가운데는 아르미니우스가 있었다. 브레멘의 출신이 3명이 참석했다. 앰덴에서 2명, 제네바에서 2명, 독일에서 오늘날 말부룩출신에서, 지겐에서 1분, 헤르본에서 1분(알스타드), 스위스 연합 쭈리히에서 1분, 불링거 쯔빙글리 라인 1분, 바젤에서 2분, 베른에서 1분, 샤프하우젠에서 1분, 같은 독일 지역에서 헤센에서 3분(말부룩 3분), 카센에서 1분, 하이델베르그 3분, 여기 5분이 도르트회의를 끝내고 난 후 교수들로 레이든 대학에 모이게 되는데 이분들이 쓴 정통개혁주의 교의학이 오랫동안 교과서가 되었다. 이분들이 승리자가 되었다.
도르트회의의 승리는 지금도 논쟁이 된다. 도르트회의를 따르냐 안따르냐에 따라 교파가 나뉜다. 바빙크가 돌아간 것이 5명의 신학자로 돌아갔다. 독일에서 브레멘, 옘덴, 제네바, 스위스 연합에서 쮜리히, 바젤, 베런, 독일에서, 제일 마지막이 프랑스이다. 이지역이 개혁교회를 대표한다. 관원과 함께 교회가 보내는데 이 지역이 개혁교회로서 중심지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어떻게 해서 이런 17세기 신학을 낳게 되는 이런 대표적인 신학으로서 도르트회의가 성립되기전까지 신학적인 과정, 중심지가 어떻게 해서 옮기게 되어서 이런 중심지가 생기게 되었는가를 살펴보자.
일단은 유럽개혁신학하면 칼빈은 물론이고 토사노스는 하이델베르크에서 대표적 신학자이다. 물론 우르시누스 이후에 우르시누스의 제자로 토사노스인데 격변기로서의 중요한 인물이다. 그분이 소위 16세기 후반을 대표하는 인물로서 그레네우스하고 그후 쟌키우스, 유니우스를 들고 있다. 물론 다른 분은 이분 특성으로 돌리는 것이고 그레네우스는 바젤에서 중심지로 삼고 쟌키우스는 하이델베르크에서, 유니우스는 하이델베르그, 노이스타트, 헤르본에 갔다가 레이든 대학을 개혁주의 신학의 본산지로 만들었다. 일반적으로 두가지 성격이 있었다.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개혁주의 신학에 관련해 있어서 제네바의 유학이 중요하다. 그다음에 1540년 출신의 인물들, 16세기 말기의 인물들은 제네바와 하이델베르그를 거친다. 물론 1530년대의 인물들, 나서 자란 인물들은 대개 방황의 인물들이다. 제네바도 갔다가 비텐베르그도 갔다가 스트라스부르크도 갔다가 이렇게 되는데 그런 과정속에서도 이미 목사가 된 상태에서도 칼빈을 좋아해서 칼빈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귀도, 더버래, 페트로스 다대노스, 하이덴, 타펜, 사라비아, 헬미키우스, 쟌폴리안드- 레이든 교수중의 한 사람의 아버지, 귀도 드브레가 특별한 사람인데 그들이 벨직 신앙고백을 만든 사람이다. 물론 수정을 다른분이 모테트, 사라비아가 도왔지만 우리에게 가장 큰 유산으로 남아있다. 칼빈과 접촉을 했어도 칼빈에게 사사를 하지 못했다. 그러나 칼빈주의를 따르면서 그런 작품을 내었는데 그러므로 현 네델란드 고백의 원조가 된다. 그래서 이런 성격에서 이분들이 종교개혁자라고 할 수 있는데, 특별히 다데누스는 영국을 거쳐서 프랑크푸르트에 왔는데 유아세례문제로 어려움을 겪는다.
여기서 중요한 문제는 성만찬과 세례에 대해서 루터와 칼빈의 큰 차이가 있었는데 칼빈주의자들은 세례는 은혜은약의 표징이고 믿는 부모의 자녀들은 그들의 이미 세례표를 받기전에 은혜언약속에 받아진다고 가르쳤다. 그래서 어린아이가 잃지 않는 것은 세례를 받아서가 아니고 그가 영생을 받도록 선택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복합적인 은혜언약과 선택사상에 의해서 루터주의와 구분이 되어서 선택과 은혜언약이 강조되었다. 그러나 대신 루터주의는 세례는 구원의 필수적이라고 했다. 아까 에띠암 엑클레시아 꼬에남, 성만찬 밖의 구원이 있는 이런 구원이라는 것은 바로 이런 배경을 갖는 독특성인데, 이때에 루터주의와 확고한 갈등이 여기서 시작되어 구별이 되고 피난민생활로 돌아가게 된다. 이때부터 이런 역사적인 과정을 거쳐서 개혁주의 독특한 신학이 분리되었다. 그때 분리되는 과정에서 단순히 세례문제만 아니라 언약론과 선택문제가 늘 따라다녔다.
그 다음에 중요한 사건은 종교개혁시대에 루터란주의를 환영한 오토 하인리가 있었는데 그 자녀중에서 프레데릭 3세가 40세의 나이에 왕을 계승할 때 이분이 개혁주의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래서 불러들이기 시작했는데 물론 그전에 루터란주의, 즉 신교입장을 따라서 하이델베르크의 교수로 모시게 된 일이 1558년에 있게 되는데 이것은 하나의 독특한 우연인데 정식으로서 개혁주의가 하이델베르크에 심어지게 된 것은 즈가랴 우르시누스하고 올레비아누스를 영접함으로서 되는 것이다. 이것은 여러 가지 배경을 가지고 있는데 특별히 페트로스 페르닝글로스가 오토 하인리의 치정시에 관원들과 친밀한 관계로 인해 이분으로 말미암아 2분이 추천이 되어서 거기에 오게 된다. 그래서 이분들이 이제 고백서를 내게 된 것이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이다. 물론 이런 배경이 무엇을 나타내는가 하면 어떻게 해서 제네바와 하이델베르그가 개혁주의 신학의 중심지가 되었냐 하는 것인데, 그때 중심인물이 누가오느냐에 따라 다른데, 페트로스 보쿠비누스가 왔다는 것, 프레드릭 3세에 의해 올레비누스와 우르시누스가 오게 된 것, 그분들이 하이델베르그를 작성해서 루터주의와 분리되기 시작했다.
물론 프레데릭 3세가 등장함으로 루터주의가 베젤이 추방당하는 성격으로 나타나는데, 또 하나의 인물이 히레니무스 쟌키우스가 1568년에 오게 된다. 특별히 쟌기우스는 이태리의 출신의 마티르 베르밍글리우스의 제자로서 결국 스트라스부루크에서 부쪄가 죽은후 계승자 노릇을 하게 되었는데, 그가 죽은후에 결국 루터주의 요한 말바흐의 강세에 의해 좇겨나는 성격이 된다. 이것은 성만찬과 예정론의 대한 것인데, 성만찬과 예정론에 압력을 넣는 여러 가지 방식에 있어서 서명을 하는 일이 있었는데 그 서명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자기의 신학을 지켰는데, 그것을 인하여 결국 좇겨나게 되고, 그런 여러 가지 피난민 생활과 목회하는 과정에서 하이델베르그에서 부름을 받는 일로 인해 중심지가 하이델베르그가 된다.
이후에 유학생들이 불란스와 스위스와 네델란드의 유학생들이 반드시제네바와 함께 하이델베르그에 거치게 되었다. 그래서 그 신학이 형성되게 되었는데, 그후에 프레드릭 3세가 죽자 루드비히 6세에 계승되는데 이분이 루터란 주의에서 결국 같은 형제인 개혁주의인 입장을 가졌던 요한네스 카시미르가 아무리 권고해도 루터주의를 강하게 펴서 개혁주의의 신학자들을 몰아내기 시작한다. 제일먼저는 강단을 맡고 있는 다니엘 코사노스를 몰아내고 루터주의로 바꿈으로 제일먼저 카시퍼 올레비누스가 교수를 했고 패트로스 봉코가 추방이 되고 이분이 로잔에 가서 세상을 떠나서 1578년 봄까지 600여명의 설교자들이 교수들이 쫒김을 받음으로 루터주의의 지배를 받게 된다. 그래서 하이델베르그에서 루터주의의 복고가 된다.
그러나 이런상황에 동생 요한네스 카시미르가 형의 잘못을 보고 자기의 지역으로 피신한 교수들을 옮기는데 여기서 세운도시가 노이스타트이다. 이때 일부 대부분의 교수들을 옮김으로 여기에서 중심지가 되서 하이델베르크를 거치지 않고 노이스타트에 개혁주의자들이 유학을 가게된다. 그래서 여기서 노이스타트의 특징은 개혁주의신학의 재 해석이 이루어졌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으로는 루터주의와 잘 구분이 안된다. 물론 칼빈의 선에서 모든 것이 구조화 되었지만 뚜렷이 되지 않고, 노이스타트에서 그것을 재해석을 우르시누스가 함으로서 여기에서 소위 제자들이 이것을 이강의록을 만들게 되고 여기서 수제자가 생기게 된다. 그래서 이때 생긴 수제자가 파레우스가 17세기 초까지 살게 되어 증인이 된다.
도르트의 마지막 어른중 중요한 인물로 증인이 되는데 이때 노이스타트에 와서 독특한 입장이 서게 되는데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해서 개혁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이 인성과 본질적인 속성을 실제로 공유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런 비난에 대해 개혁주의자들이 그런 주장을 하는데 대해서 비난하는데 대해서 대답을 하는데 개혁주의자들은 그리스도안에 두 본성의 각각 독특한 것이 그리스도의 인격에 공유된다는 주장함으로 루터주의자들의 본성과 위격이 차이를 무시하는 경우를 배제시켰다. 이 때 나온 것이 소위 이미 두번째로 말한 육체밖에 그리스도가 있다는 사상이 여기에도 연결이 된다.
두 번째로 성만찬 해석이 아주 중요한데 칼빈주의 해석론과 관련되서 아주 중요한 것인데, 여기서 나타난 것인데 성만찬의 개혁주의자들이 그들이 비난하기를 성경구절이 애매하여 다른 구절의 관계속에서 탐구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고 한다. 우리가 말하는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루터는 해석은 로쿠스는 성경자체로서의 해석이다라는 논리로 개혁주의에서 부쩌나 그 이후에 대부분 통일성이 있는 것은 성경을 다른 성경으로 해석을 한다는 이러한 논리이다. 그런데 이것을 비판하는 것이다. 그래서 개혁주의는 해석과정에서 이런 외래적인 의미를 부어넣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성만찬에서 그런 견해가 나왔다고 한다. 그러면서 우르시누스가 주장하기를 매 말씀은 철저히 판명하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칼빈의 독특한 해석방법이다. 로쿠스 자체가 충만하고 충분하고 판명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다른 구절에 의해서 애매해진 것이 분명해진 이런 논리가 아니다. 칼빈이래 우르시누스도 마찬가지지만 본문자체 어느구절이든지 그 자체 본문으로 판명하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 때문에 그 근거 때문에 다른 구절을 통하여 해석이 될 수 있다는 논리이다. 그래서 우리가 단순히 이 구절로 다른 구절을 해석한다는 논리로는 그것은 인문주의적 방식이다. 개혁주의 독특성에 관련해서 이 부분에 중요한 것이다. 왜그런가하면 루터주의와 칼빈주의와 구별되는 해석학적인 방법이 되어 온것이다. 따라서 몸이다라는 것이 단순히 의미가 다른 것이 아니고 여기서 강조된 것이 칼빈도 그렇게 말했지만 무엇을 덧 붙였는가 하면 확증하고 강화하며 은혜를 제공한다고 해석을 한다. 그래서 실체적, 육체적, 장소적으로 현존하는 것이 아니고 관계적으로 영적으로 현존한다고 확고히 해석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전번에 몇가지 이야기 했는데 그 독특성과 관련해서 루터주의와 구분해서 우르시누스가 칼빈주의 입장에 확고히 섬으로 결국 제네바와 하이델베르그가 그 독특성을 가지고 개혁교회의 입장에 서게 된다.
세 번째는 일반적으로 알고 있다. 이런 내용으로 하이델베르그가 성립이 되었다가 그다음에는 다시 루드비히 6세가 세상을 떠남으로 그 아들이 어리고 분별력이 없었지만 마침 카시미르가 루드비히 동생 카시미르가 힘이 전반적으로 미침으로 그 아들의 교육의 단계에 개혁주의 신학을 그에게 심어준다. 그래서 그 할아버지의 프레더릭 3세의 신학적 입장이 프레더릭 4세에 이어진다. 그래서 그 후에 하이델베르그는 개혁주의로 고정이 된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렇게 된다. 이렇게 됨으로 노이스타트의 개혁주의자가 하이델베르그로 다 옮기게 되고 이런 변화가 있게 된다. 그러나 그중에서 일찍 하이델베르그를 쫒겨와서 노이스타트로 가지 못하고 피신생활을 했던 올레비누스는 이때쯤에 비트겐스타인의 제후에 의해 헤르본으로 데려온다. 그래서 헤르본에 개혁주의 신학을 심게 된다.
이때 헤르본에 올레비누스가 옴으로 또 부름을 받는자가 피스카토르이다. 아까 예정론과 관계해서 중요한 초점을 정리한 피스카토르가 헤르본으로 부름을 받게 된다. 그는 원래 스트라스부르크에서 쟌키우스의 강의를 들었고 마르바흐의 신뢰받는 제자였다. 오히려 루터주의의 신뢰받는 제자였다. 그래서 비텐베르그에는 멜랑히톤이 죽음으로 쯔빙글리 경향으로 기울어져 갔는데 이때 이사람은 어느정도 강하기에 비텐베르그를 피하고 튜빙겐으로 갈 만큼 그만큼 루터주의 입장이었다. 그러나 그가 스트라스부르크에서 강의를 들은 것은 쟌키우스의 강의였다. 그것이 그를 사로잡았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쟌키우스강의를 생각하고 동시에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연구함으로 그가 변화를 입게 된다. 그래서 여기에서 결국 변화를 받음으로 개혁주의 입장으로 바꾸어 지고 헤르본에서 피스카토르가 중심인물이 되는데, 피스카토르에게 있어서 문제의 하나는 의의 원인이 되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을 부정하고 수동적 순종만을 인정함으로 개혁주의 라인에서 떨어져 나간다. 다른 중요한 문제에 있어서 다 동일한데 여기서 떨어져 나간다. 그래서 모든 개혁주의에서 비판을 받음으로 우리라인에서 떨어져 나간다.
그다음에 헤르보른 대학에 생길즈음에 프라넨크에 대학이 생기게 된다. 이때에 마르티니 리디우스가 첫 학장이 되는데 우르시누스의 제자로서 하이델베르크의 제자로서 그와 동시에 지브란트 루베르투스가 부름을 받게 된다. 그는 우르시누스나 그 당시 하이델베르크의 학파에 속하는 그 제자들이다. 거기에서 만난 제자들이 유명한 개혁주의자가 된다. 여기에서 특징은 특별히 요한네스 폴리안더도 같은 동료였는데 여기서 하이델베르그로 옮겼던 인물중에 특별한 면은 브레멘의 라틴학교가 있었는데 그 라틴학교에서 가르침을 받던 인물들이 하이델베르크로 모이게 되었는데 그중에 요한네스 폴리안더이고 지브란트이다. 그래서 어린 시절의 교육이 중요한 성격을 띄게 된다는 것이 여기에 나타난다.
프라넨크에도 레이든 대학이 있는데 특별히 여기 레이든 대학에도 1575년에 세워졌는데 강의하는 자들이 있었는데 이분들이 명성을 얻지 못하자 유니우스가 처음 1592년에 오게 된다. 유니우스 이후에 노이스타트의 제자인 지브란트와 동료인 프란시스 고마루스가 여기 옮으로 주 라인이 생긴다. 문제는 레이든 대학에서 문제가 생기는데 레이든 대학의 유니우스가 결국 흑사병으로 1562년에 죽음으로 알미니우스가 계승이 된다.
알미니우스가 계승함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1557년부터 1644년까지 거기에 궁중설교자로 요한네스 위튼보게트가 있었다. 이분이 결국 제네바 출신이고 베자의 제자로서 이분이 알미니안주의자로서 특성을 아주 강하게 주장했는데 이분의 궁중설교자로 인사권에 영향을 끼쳐서 야곱푸스 알미니우스를 레이든 교수로 끌여 들인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왜그런가하면 위텐보게트나 알미니우스는 제네바출신으로 칼빈의 신학사상, 베자의 사상을 다 받았음을 알고 아무런 문제를 여기지 않고 받아 들였다. 오히려 어떻게 생각하였는가 하면 유니우스가 닥친 문제가 그 당시 다른 지방에 온 알미니우스주의자와 논쟁이 있었는데 그 해결을 알미니우스가 해결할 줄 알았는데 그 문제를 뛰어들게 한 분이 바로 이분들이다. 그런데 이분이 바로 교수로 등장해서 그에 대한 대답의 방식에 있어서 칼빈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방식을 따름으로 지금 소위 알미니우스 사상이 생겼다는 것을 염두해 두어야 한다.
그다음에는 고마루스에 대해 언급하고, 고마루스의 신학이 중요성을 갖는 것은 도르트회의에서 타락전선택설 입장을 고수한 핵심적 인물이 고마루스이다. 고마루스가 교육을 받은데에 특성이 있는데 이 고마루스는 이미 언급한데로 노이스타트에서부터 지브란트와 함께 강의를 들었던 인물이고 그런 인물들이 유럽에서만 강의를 들은 것이 아니고 옥스포드도 가고 캠브리지도 가서 하이테크한테 공부를 한다.
고마루스의 신학 특성이 몇가지 있다. 예정론에 대한 입장을 말하는데, 주님앞에서 그 신비들이 남아있기 때문에 그 교리들에 대해서 신중하게 논해야 하고 우리에게 계시된 것은 탐구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예정은 보편적으로 모든 만물들에게 미치고 특별히 지적 피조물, 천사와 인간들로 보았다. 인간들에 대한 특별한 예정에 있어서 문제는 어떤 인간을 택하였는가 하는 문제이다. 일반적으로 정확히 예지하고 창조되어 타락한 인간, 혹은 창조하고 타락하게 될 인간이 예정의 대상이었다. 그 예정의 대상에 대해 그렇게 말했는데 여기서 구별한 것은 그가 작정과 예정에 대해 구별하고 그 작정에 대해서 피조물, 인격체로 제한하고 예정의 대상을 타락한 인간이냐, 창조된 인간이냐의 입장에 따라서 도르트회의에 중심인물인데 그는 예지되고 창조된 타락한 인간, 혹은 창조되고 타락한 인간을 대상으로 삼았고 이런 입장을 표명했고 둘째로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해서 피스카토르를 비판하게 된다.
셋째로는 주일성수의 문제에서 폴킨스의 입장에서 엄격한 안식일 성수를 주장했던 그런 텔링크나 우데마루스의 주장의 반대로 그가 폴킨스와 하이델베르그와 접촉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주일성수에 대해 그가 약한 입장을 보였다. 그것이 그당시 경건주의 입장에 있었던 윌리암 델링크와 우데마루스와 갈등이 있게 되고 퓨리탄의 입장과 거리를 두게 된다. 그런 입장이 개혁주의 라인에서 아주 중요한 웨스트민스터의 신앙고백서와 일치된 선이지만 이 주일성수와 관련해서 고마루스가 우리의 라인에서 분리되는 이러한 성격을 확인하게 된다.
그 다음에는 이런 프라누크의 레이든 대학을 이야기하고 흐로닝겐대학을 이야기할 때 흐로닝겐대학에서 중심인물이 라벤스 베아거, 그다음에 고마루스가 여기에서 레이던대학에서 쫒겨났다고 쇼무르에게 있다가 목회를 하게 된다. 그래서 다시 흐로닝겐대학에서 강의를 하게 되는데 그가 마지막까지 여기에 있게 된다.
그외에도 흐로닝겐대학에는 하인리히 알팅이 라안스 베아스거를 계승을 하였고 고마루스의 제자의 성격으로 사무엘 마레시우스가 유명한 인물이 된다. 사무엘 마레시우스는 고마루스가 레이든 대학을 떠나 프랑스의 쇼무르에 대학에서 가르칠 때 가르침을 받았고 1643년에 흐로닝겐 대학에서 교수를 함으로서 오랫동안 여기에서 가르쳐왔던 고마루스 신학을 계승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와 같은 고마루스의 제자인 보에티우스와 화합하지 못함으로 여러 가지 갈등을 겪게 된다.
보에티우스는 고마루스와 알미니우스가 레이든 대학에 있을 때에 그들의 제자였다. 1611년부터 목회를 하다가 1619년 여름에 도르트에 부름을 받는다. 그래서 리베투스의 추천을 받고 우트레이트의 신학교수로 재직하게 되는데 우트레이트 신학교의 대표적인 인물이 된다. 특별히 이분이 코케이우스와 갈등이 있게 된다.
코게이우스의 언약론 문제에 강하게 그런 구약과 신약의 용서의 차이를 부정하게 된다. 그래서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고 이분의 아주 중요한 것은 건전한 선교신학의 효시로 알려진다. 그래서 그의 교회 개척에 있어서 선교를 택자들의 소명과 회심으로 보고, 그러니까 건전한 말을 쓴 것은 보에티우스의 선교신학에 관심을 갖자는 것이다. 그분의 입장은 오히려 택자들의 소명과 회심으로 보고 미래의 대한 약속과 지금 현재의 하나님의 선교명령을 강조했다고 알려진다. 특별히 예정론과 선교가 잘 조화된 것을 볼 때 그의 섭리에 대한 정확한 이해에 있었다고 알수 있는데 그의 선교의 대상에서도 다양했다. 이방인들, 유태인들, 모슬렘을 포함하여 불신앙인과 이단들, 분리주의자들까지 포함되었다. 그런면에서 택자의 개념이 또한 섭리의 개념이 아주 특별했다고 볼수 있다.
물론 보에티우스는 경건주의의 강한 입장을 가지고 있음을 선교신학면에서 뿐만 아니라, 주일성수에서도, 언약론에서도 우리입장을 고수하고 있는데, 단지 그분에 문제는 회중교회의 입장이었다는 것이 우리의 라인과 구분이 되는 것이었다.
그다음에 브레멘대학에서 어떻게 페쩰이 라틴학교를 이룬후에 그후에 도르트회의에 참석한 마르티니와 그로키우스가 거기에 어떻게 오게되었는가이다. 그다음에는 쯔리히에 대해 언급했고 바젤에 유명한 교수는 그레니우스라고 소개했다. 그는 바젤 루터주의자인 슐츠의 제자였지만 그 입장을 따르지않고 칼빈의 입장을 택하여서 그의 독자적인 연구에 의해서 개혁주의자로 옮김을 통해서 루터주의로부터 심한 미움을 받았던 자이다. 그가 바젤 구약교수로 있었고 슐츠가 사망한 후에 루터주의사망후에 그의 후계로 신약을 가르치고 이때 바젤에서 칼빈주의를 심었던 유일한 자가 그레니우스이다.
그래서 바젤 고백을 세웠을 때 칼빈주의로 바꾸고 그것을 제 몇판을 출판함으로 반 루터주의성격을 바꾸었고 그 씨가 바젤라인이 칼빈주의 라인을 서게 됨으로 특별히 유명한 자가 아만더스 폴라누스라는 사람이 있게 되었다. 그래서 바젤대학의 특징이 폴라누스에 의해서 서게 되는데 폴라누스는 베자의 기본적인 입장을 받아들였던 신학자 중의 한 사람이었고 그러나 멜랑히톤의 소유학파적인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받아들였을지라도 아리스토텔레스의 근원적으로 비판한 라무스 논리를 일부 받아들인 인물로서 특별히 사람들이 비판하기를 그가 아리스토텔레스주의라고 이런 비판에 우리가 결코 라무스의 입장을 배제해서는 안된다 이런 말이다.
영국에서의 개혁주의는 에드워즈의 6세 때의 개혁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메리의 핍박으로 인해 엘리자베스때는 에드워즈 6세의 개혁을 다시 고정하는데, 에드워즈 6세때의 고백의 불완전성 때문에 그보다 더 개혁을 하고자하는 운동이 핍박이 받게되는 재미있는 현상이 일어나는데 거기에서 개혁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고 고정이 되는시대인 엘리자베스때인데 엘리자베스때는 과거의 메리여왕때의 핍박을 없애고 복구할려는데 너무 과거의 에드워즈 6세때의 개혁의 폼을 그대로 수용하고 받아들일려고 하다보니까 그것이 순교신학으로 남아있게 되었다. 순교신학이 더 개혁신학으로 남아 있어야 되었는데 그 불완전성 때문에 엘리자베스여왕때 그 순교의 신학이 더 개혁할려는 정신을 받을 수 없었다. 이로인해 퓨리탄의 희생이 시작된다. 엘리자베스때의 퓨리탄의 형성은 에드워즈 6세때의 불완전한 개혁에 대한 더 개혁으로인한 희생이라고 할 수 있다.
화란에서 개혁주의는 결국 어떤 말인고 하면 스코틀랜드의 독립적으로 말할 수 있고, 아일랜드도 그렇고 화란도 그렇지만 거기에 메리여왕때, 제임스때, 엘리자베스때의 핍박을 피해 화란과 아일랜드로 피신해서 거기에서 자기의 신학을 바탕으로 교회를 세우는 자유를 얻었을 때 거기의 교회를 세우게 되었다. 이 때 정치적 형태와 교회의 정신이 있게 되는데 이것이 장로교의 효시가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대신 그와함께 브라우니스트라는 회중교회의 입장이 병행해 있어 갈등이 있었다. 그래서 이런 배경이 대충 정리가 되었다.
- 질문1: 우르시누스가 성경을 해석을 할 때 성만찬에 제한 것인지 아닌지, 다른 구절에 관련해서 해석을 해서는 안되는 것이가?
- 답: 해석과 관련해서 칼빈의 입장을 우르시누스가 칼빈의 라인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성경론과 해석론에 있어서 이런 점은 특별한 점이다. 제가 논문을 쓸 때 “진리는 그 자체로서의 진리다”라는 전제로 논문을 썼는데 물론 오늘날 사고방식도 이런 것을 동의하지만 대개 학문자체가 발견한다든지, 산출한다든지 이렇게 보지만 우리는 진리는 그 자체로서 진리다이다. 성경은 그 자체로서 진리를 의미하지 다른사람이 해석을 해서 진리가 된다든지, 다른 본문에 의해 해석이 되어진다고 해서 진리가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로쿠스는 그 자체로서 충분하고 판명하다. 이것이 근거해서 하지 않으면 다른 구절로 본문을 해석한다는 것이 별 의미가 없다.
이 본문이 다른 본문을 해석을 하려고 했을 때 이 자체로서 분명하고 판명해야지 이것이 다른 것에 대한 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원리적으로 그렇다. 그러니까 루터주의가 비판을 받을 수 있는 것이 다른 본문으로 인해서 첨가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즉 불완전해서, 애매해서, 그렇게 우리가 입장을 취할 수 없다. 우리의 판명성, 성경의 판명성이라는 것은 단순히 우리인간에게 잘맞다 가 아니다. 그것이 근원이 어디에서 온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계시를 강조하고 영감을 강조하고 그것이 누구의 것이냐가 중요하다. 그래서 로쿠스 그 자체 구절로 인해서 충분하고 판명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구절로 다른 판명성으로 다른 구절을 본다는 것이다. 불충분하기 때문이 아니다. 다소 다를 것이다.
- 질문2: 한국교회의 있어서 역사적으로 볼 때 개혁주의 입장에서 올바로 가르쳐 져 왔다고 보기 힘들다고 했는데 우리의 예배의 모습이 어떻게 되어야 한다는 것인가?
- 답: 나는 이 본문대로 제안한다. 크리스마스는 되도록이면 그 정신이 근원이 로마의 짜투르신을 숭배한 것을 그대로 날짜만 정신을 기독교식으로 바꾼것이고, 이방여신 오스트, 이스트 오스트란 말은 이방여인이다. 달걀은 그런 의식은 다 오스트에서 왔다. 루터주의도 마찬가지고 앵글란드도 마찬가지인데 그런데 우리는 칼빈주의는 의식법과 함께 제외해 버렸다.
단, 안식일은 도덕법으로 주일만은 성수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것은 보편의 법칙이다라고 고백한다. 유일하게 성일은 주일이고 그것을 축제로 하고 그것에 대해 지켜야 한다. 언급하지 않았지만 윌리암 귀즈는 웨스트민스터에서 성직자 중에서 교리적인 문제에 있어서 주도적인 위치를 가졌던 인물이다. 그 인물이 본문에 사도행전 20장에서 온종일 (밤 12시부터) 새벽(다음날)그 때를 일주일의 시작을, 그래서 온종일 지킬 것을 말한다.
물론 온종일 지킬만한 해석은 카톨릭이든지 영국국교회가 주일을 부패시킬려고 했고, 물론 그 이유는 퓨리탄을 근절시킬려고 공적으로 금지할려고 했는데, 원흉들은 카톨릭이 주일성수를 하려고 하지 않았고 앵글란드도 주일성수를 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분들은 주일성수를 부패시키는 장본인들이었다. 위험시해야한다. 우리와 입장이 같다고 하는데, 그들은 자유가 있다. 언제든지 변한다. 자기가 결정했을 때 그 결정이 법이다. 우리는 항상 성경이다. 이것이 다르다. 카톨릭과 조화할 때 주의할 것은 이것이다. 연합할 때 연합하더라도 그 후의 문제이다. 조화하고 개혁신학을 잃게하고 핍박하고 망케하는 인물들이다. 물론 이런것들이 박윤선 박사님께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1646년 것을 회복했을 때는 그런 적그리스도라는 명칭을 보존하겠다는 것을 의미이다. 그후 개정을 할 때 개혁주의자들이 카톨릭입장을 비성경적이라고 했는데, 그것을 보존하려는데는 의미가 있다고 보는데, 오늘날 화합하려는 정신과는 맞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대화하고 화합하려는 것은 그것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 전혀 다른 정신에서 할 수 있다.
신적인 선택과 유기에 대하여
계속해서 도르트의 예정론의 문제이다. 우리가 튜울립가지고 신학을 공부해서는 안될 것이다. 도르트회의는 튜울립사상이다. 도르트회의는 여기 본문정도가 최소한이고 브레멘 신학적 입장이 있고 엠덴 신학적 입장이 있고 제네바 입장이 있고 다 있다. 각각 입장이 있는데 각 신학적 입장이 있다. 우리가 공부를 할 것은 더 들어가야 한다. 브레멘의 신학적 입장이 엠덴의 신학적 입장과 어떻게 차이가 있는가? 다양성속에 들어가야 한다. 우리가 말한 튜울립은 그것은 아니다. 소위 말해서 어린이들 한테 배우는 단계이고, 여기에 나온 내용들이 최소한이다. 공통적인 입장을 생각해보자.
아르미니스트과 무엇인가? 도르트회의의 결정은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 필요가 있다. 그냥 알미니우스, 알미니우스하는데 과연 알미니우스가 무슨 주장을 했기에 도르트회의에서 그런 판단을 했는가를 내용적으로 알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소개를 한다. 두가지를 대답을 했다. 서로 반대주장을 갖고 있는데, 전자는 알미니우스의 대답이고 후자는 도르트의 성직자들의 대답이다. 공동적인 교각이다. 물론 여기에 보면 브레멘 입장이 다소 liberal한 입장, 좀 하이델베르그의 입장이 타락후 선택설의 입장이다.
물론 그전에 거기에 선조들은 우르시누스를 포함해서 타락전 선택설인데 그 때 분위기에서 타락후 선택설, 즉 불링거의 영향이 굉장히 크다. 그래서 많은 브레멘은 그렇지 않지만, 엠덴이나 제네바도 좀 그렇고 상당히 타락후 선택설입장을 택한다. 택자는 만인을 위할 수 있는데 타락한 인간을 택하였다는 것이다. 순서적으로 좀 다르다. 그 말은 죄인을 내가 선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그렇다. 즉 그런면에서 복음적인 입장이고 선교를 열어놓은 것이다. 물론 모두는 택자인데, 택한 죄인이라고 했다. 좀 다르다. 타락전 선택설은 그전, 타락전에 택하였다는 입장이다. 창조된 인간, 창조되기전의 상태인데, 여하튼 간에 이런 다양성이 있는데, 다양성속으로 들어가기전에 이것만은 공통적인데 이것은 최소한 알아야한다.
알미니우스의 주장은 믿고 그 신앙과 그 신앙의 순종성을 견고케하는 것을 구원코자 하는 하나님의 뜻이 구원의 이르는 선택에 이르는 완전한 결정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안에는 오직 이 결정에 대해서 계시 되었다. 이것이 알미니스트의 주장이다. 아주 비슷하다. 우리가 지금 믿고 있는것과 비슷한데, 지금 알미니우스와 혼돈되었고, 웨슬리주의 감리교안에, 침례교안에 판을 치고 있는데 우리하고 그분의 입장을 같이 하다 보니까 알미니우스주의 주장을 많이 잃어 버렸다.
알미니우스가 누구인지..., 그런데 여기보면 믿고 그 신앙과 신앙의 순종 속에 견고히 하는 자들을 구원코자 하는 하나님의 뜻이 구원에 이르는 선택에 이르는 완전한 결정이라는 것, 그러니까 아직 결정이 되지 않았는데 그것을 보고 결정했다는 것이다. 네가 신앙을 가질 것을 보고 결정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도르트회의, 성경은 믿을자들을 구원하시길 기뻐하실뿐 아니라 어떤 확실한 사람을 영원전부터 선택하였다는 것이 증거되었다. 그것이 그 대답이다. 믿음은 선물이지 그것을 보고 주어진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공통적이다.
두 번째, 영생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은 다양하여 어떤 경우는 보편적이고 명확하지 않거나 다른 경우에 특별하고 명확하다는 것, 이렇고 저럴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 선택은 불완전하고 철회할 수 있으며 결정적이지 않고 조건적이거나 혹은 완전하고 철회할 수 없으며 결정적이며 완전하다는 것, 그러니까 완전할 수도 있고, 철회할 수 도 없는것이면서 조건적일 수도있고 결정되지 않는 것, 이런 입장이 아르미니스트이다. 이들은 혼돈의 사람이다. 그러면서 구원의 이르는 결정적인 선택없이 의롭게 하는 신앙의 선택이 있다고 가르친다. 구원에 대한 결정적 선택이 없고 즉, 아직 선택이 되지 않고 아직도 인간에 남겨있는 그런 선택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도르트회의에서 증거하기를 성경이 말하지 않은 인간 상상의 소산이요, 선택의 교리가 부패되었고, 우리의 구원의 근거들이 파괴되고 있다고 대답 하였다.
세 번째, 성경의 선택교리에서 언급하고 있는 하나님의 기뻐하심과 의도는 하나님이 다른 사람들 앞에 어떤 특별한 사람들을 선택한데 있지않고 모든 가능한 조건으로부터, 또는 모든 만물의 질서로부터 하나님은 은혜롭게 어떤 완전한 순종을 여기고자 하셨고 영생의 보상의 가치가 있다고 여긴 신앙의 행위와 불완전한 순종의 자체를 구원의 조건으로하여 선택하였다. 선택론을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하여 선택이냐하는 문제이다.
도르트회의 성직자들은 비판하기를 이런 해로운 오류로 인해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그리스도의 공로가 무가치하게 되었고 사람들이 무익한 물음을 통하여 은혜로운 칭의의 진리와 성경의 단순성으로부터 추상된 것이며 사도의 교훈에 위배된것이라고 평을 하였다.
네 번째, 신앙에 이르는 선택의 경우 이 조건이 미리 요구되었다는 것, 마치 선택이 사물들에 결코 의존하지 않는 것처럼, 인간의 자연의 빛을 정당히 사용하고 경건하며 작고 낮으며 영생에 적합하다는 것이고 주장에 반대하였다. 도르트회의 성직자는 이것은 펠라기우스적 견해라고 못을 박고 있다.
다섯째, 구원에 이르는 특별한 사람들의 불완전하고 비결정적인 선택은 예지된 신앙으로부터, 이것은 카톨릭의 오랜 주장이다. 처음 시작하였거나 계속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지속하는 회심, 거룩, 하나님의 구원으로부터 일어났다는 것, 그러나 완전하고 결정적인 선택은 예지된 궁극적 견인으로부터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잘믿는 것 보고 그다음에 선택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 때문에 선택된 그가 선택되지 않는 자들보다 더 가치가 있는 은혜롭고 복음적인 가치성이다는 것, 그 때문에 신앙, 신앙의 순종, 거룩, 하나님의 구원, 견인은 영화에 이르는 불변의 선택의 열매들이 아니라 그것은 미리 요구되고 성취된 것으로서 완전히 선택되었던 자들 안에서 예지된 조건들이고, 그것 없이 영화에 이르는 불변의 선택이 일어나지 않는 원인들이다는 주장에 반대하여 도르트회의 성직자들이 대답하기를 전성경에 충돌된다고 하였다.
여섯째, 구원에 대한 모든 선택이 불변한 것이 아니라, 어떤 하나님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어떤 선택들이 잃을 수 있으나, 영원히 잃을 수 있다는 주장에 도르트회의 성직자들이 반대하였다. 즉 그들의 주장은 견인에 대해서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가변적이 아니시다고 하였다.
일곱 번째로 영화를 위한 불변의 선택에 대한 열매나 느낌이 없다는 주장에 반대하여, 도르트회의 성직자들은 있다고 말한다.
여덟 번째로 하나님은 그분의 순수 의롭게 하시는 뜻으로부터 아담의 타락에서와 죄와 저주의 일반적인 상태에서, 신앙과 회심을 필요로하는 은혜의 경륜속에 아무도 결정하지 않았다는 가르침에 반대하였다. 이것은 확고하다고 하였다.
아홉번째로 하나님은 다른 민족보다 어떤 한 민족에게 복음을 보내시는 원인은 하나님의 순수하고 어떤 기뻐하심이 아니라, 한 민족이 복음이 전달되지 않는 다른 민족보다 더 좋고 가치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즉 인간을 보았다는 것이다. 사실상 아르미니스트들이 평화주의자들이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내용을 보면 불평등주의, 평등주의자들이 지금 데모크로티즈들이 아르미니스트인데 민주주의의 시조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그분들이 불평 등의 원인자들이다.
결론적으로 인간구원의 신적기원을 가능한 한 인간론(인간의 자유)에 기초하고자하여, 전적인 은혜의 차원에 심한 손상을 주고 있다. 그들의 민주주의 이념과 반대되게, 그들이 하나님의 민족 차별성을 민족우위성에 기초하고 있다. 또한 그들의 예저온에 대한 파괴와 성도의 보존에 대한 파괴와 분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의 대답에 대하여 일반적인 공통적인 틀에 의하면, 이런 입장에서, 이것이 하이델베르크신앙고백의 순서에 따른 것인데, 첫째는 죄론 다음에 기독론을 언급한다. 우리가 알 듯이 칼빈의 특징은 하나님의 지식이 인간의 지식보다 앞선다. 신앙은 지식을 포함한다. 그런데 그 지식은 하나님의 지식이 앞서고 인간의 지식이 뒤를 따르는데 서로 관계가 있는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지식은 하나님의 지식에 의해서 알려지려고 하는데 그 지식은 바로 죄에 대한 지식이다. 그래서 인간론은 죄론이 포함된다. 그것이 교의학의 특징이다. 순서적으로 인간론에 들어가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로쿠스가 발달되어서 그렇지만, 실제 칼빈주의는 인간론은 죄론에 해당되는 것이다.
인간론이 등장한 것은 죄론을 위해서, 하나님이 인간에 대해 죄에 대한 인식, 이것에 대한 강조인데 그런 순서에 따른 입장이 하이델베르그도 그렇고, 여기 도르트회의에서도 그런 입장을 따라서 죄론 다음에 기독론이 언급이 된다. 그안에서 이루어지는 구원에 대한 적용의 차원에서 신앙의 자리를 언급하고 있고 이부분에 와서 하나님의 진노와 영생의 개념을 고백하고 있다. 즉, 그 복음을 믿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진노에 머물고 그것을 받아 드리고 참되고 살아 있는 신앙을 가지고 구주 예수를 받아 드리는 자는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와 그 부패로부터 구속되며 영생을 선물로 얻는다는 고백방식이다. 칼빈처럼 여기에서 예정론에 대한 열쇠를 풀고 있다. 즉 하나님이 시간상 어던 이들을 신앙으로 선물하셨고 어떤 이들을 선물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의 영원한 결정으로부터 나왔다는 고백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성경적 성경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여기에서 칼빈 기독교 강요 1558년의 순서를 따라서 했다는 특징이 이 도르트회의 결정문서의 특징이다.
비록 강퍅할지라도, 이 결정에 따라서 하나님은 택자들의 마음을 은혜로부터 부드럽게 하고 굽히어 믿도록 하시고 그의 택자들이 아닌 자들을 그의 의로운 판단에 따라서 그들의 악과 강퍅케 됨으로 내버려 두신다. 여기에 그리고 이런 식으로 그들은 깊은 인간의 차이, 긍휼히 여기시고 의로우신 차이, 선택과 유기의 결정을 인식하고 고백하고 있다. 그 첫째로 그 선택은 불변의 하나님의 작정이다. 하나님 자신이 지극히 지혜롭고 불변하며 전지하고 전능하시기 때문에, 그 선택도 불변하고 번복되지 않으며 깨지거나 이미 택한 자들이 다시 버려지거나 수에 있어서 변경되는 것이 아니다.
이런것들이 다 무엇인가 하면 한 구절 구절마다 다 아르미니스트주장들을 구절구절마다 반대하는 문구이다. 그래서 우리가 이런 부분에 대해서 가치를 두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문구는 개혁주의 라인에서 공식적으로 늘 보고 있는것인데 사실상 이 도르트회의를 거치지 않는 일이라는 것은 이해가 안된다. 특별히 예정론에 관해서, 여러분들의 교의학 책에서...,
두 번째로는 그 선택은 세상의 기초전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택자들의 수가 확실하다. 그리고 그 택자들이 다른 자들보다 더 좋거나 가치가 있어서가 아니다. 다른 사람들과 같이 곤비한 자들, 즉 처음 정직하였으나 그들 자신의 죄로 인하여 타락하여 죄와 부패안에 있는 온 인류로부터 택하였다. 여기서 타락후 선택설의 입장이 분명했다. 그 선택은 하나님의 뜻의 자유롭고 기뻐하심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은혜로운 선택의 원인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성향들이나 역사들을 모든 가능한 조건으로부터 구원의 조건으로 택하셨다는 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확실한 어떤 사람들을 일반 죄인들의 수로부터 자신의 소유로 삼았다는데 있다.
사실상 은밀히 말해서 개혁교회의 예정론은 불평 등을 배제한 것이다. 은밀하게 말하면 평 등의 원리이다. 예정론이 갖는 가장 깊은 의미는 그 평등의 사상을 하나님의 지식에 포함시켜서 확고히 한 것이다. 인간 평등이나 불평 등이론에 있어서, 예정론의 가치를 아주 크게 두어야할 이유가 이런데 있는데, 그래서 우리가 예정론을 이런 면에서 다루지 않았는데 예정론사상은 믿지 않는 일반 시민에 대해서도 진정한 인간 존중의 기틀이 되는 것이요 가난하고 무시받는 자에 대해서도 강한 사랑을 나눌 수 있게 하고, 반면에 보이는 교회의 부패와 사회부패에 대해서도 비판정신과 혁명정신의 원동력이 되게 한다. 이래서 그런 말이 된다. 사실상 신론에 두어야 한다. 인간에 대한 불평등 평등은 신론에 두어야만 가장 평등한 것이다.
그다음 셋째로 순수한 은혜로 그리스도안에서 택함을 받았다. 하나님은 그 그리스도를 영원전부터 모든 택자들의 중보자와 머리로, 구원의 기초로 세우셨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도록, 그가 친히 그를 주시고 능력있게 그의 로고스와 영을 통하여 같은 교통으로 부르시며, 만나시며, 혹은 그를 믿는 참된 신앙으로 선물하시고 의롭게 하시며 거룩히 하시고 그의 아들과의 교통가운데 능력있게 보존하게하여 마지막 그의 긍휼을 증명하도록 영화롭게 하시어 그의 사랑스러운 은혜의 부요성을 찬양하도록 결정하였다. 즉 하나님의 온전한 역사라는 것이다. 이것이 강조된 것이다.
오늘날 조직신학에서 문제점이 이것이다. 구원의 서정에 관련해서 중생만을 하나님의 직접인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총신경우에 그런 것을 보는데 그것은 도르트회의의 근본정신과 조금 다르다. 구원의 서정에도 그 모든 부분에서, 중생과 모든 성화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라는 것을 강조한다. 삼위일체문제도 요즘 문제가 되지만 바로 이점에서도 도르트회의와 만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선택은 원인과 조건으로서 예지된 신앙과 신앙의 순종, 거룩 혹은 어떤 다른 좋은 성향이나 능력으로부터 일어나지 않았고 택함을 입은 인간 안에서 미리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신앙과 신앙의 순종과 거룩에 이른다. 즉 선택이 구원의 모든 은택의 샘으로서 그로부터 신앙과 거룩, 다른 구원의 은사들, 마지막 영생까지 열매로서 나오는 것이다(엡 1:4). 역시 택자들은, 서로 다른 단계들과 다른 방식일지라도, 그의 때에 그들의 구원의 영원하고 불변의 선택에 대해서 확신하게 된다. 그 지각은 그들이 하나님의 은폐되고 깊은 것을 호기심을 가지고 탐구했을 때 지각되어 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는(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신앙, 하나님에 대한 자녀다운 두려움과 하나님에 대한 갈증, 죄를 넘어 의를 향하여 주리고 목말라 하는 것) 선택의 실패할 수 없는 열매들을 자신들 안에서 영적인 기쁨과 거룩한 즐거움으로 지각하는 것이다. 여기에 그리스도의 참된 신앙, 하나님에 대한 자녀다운 두려움, 하나님에 대한 갈증, 죄를 넘어 의를 향하여 주리고 목말라 하는 것, 이런 것들이 외적으로 나타난 인간됨, 그 사람이 택자이냐 아니냐하는 것을 판가름하는 중요한 포인트이기도 하다.
그래서 10번째, 그 선택은 여러 가지가 아니라 신약에서나 구약에서나 하나요, 동일하다. 즉 하나님의 작정하시고 기뻐하신 뜻은 하나요 유일하며 그것을 통하여 영원전부터 우리를 택하시되, 구약이나 신약이나 동일하게 은혜와 영광과 구원과 그가 준비하신 구원의 길에 이르도록 택하셨다. 여기에서 소위 구원의 방법이 구약과 신약과 동일하다. 어디에 근거하느냐 하면 택자의 교리, 선택의 교리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로 말미암은 인간의 구원에 대하여
우리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의의 만족은 우리의 육체와 영혼에 대한 일시적이고 영원한 형벌로 벌받음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아버지와 성령과 똑같은 영원한 무한한 본질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저주를 받음으로 완전히 만족된다. 그런데 바로 복음의 약속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누구나 영생을 얻는다는 내용이다. 여기에서 강조한 것은 이 복음을 하나님께서 모든 민족들과 사람들에게 차별없이 보내신다는 점이다. 이점은 도르트회의 결정은 선교에 적극적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관점이다.
그러나 직접적으로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의 주장대로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확실하고 분명한 도모없이 일어났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예정론을 부인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리스도의 죽음은 확실하고 분명한 도모없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웨슬레는 지금을 강조하는데, 지금 당신이 그 표를 하면 지금 바로 예정이 되고 구원받았다는 것이다. 지금을 강조한다. 그가 이것을 가지고 성공을 하였다. 지금 당신이 그것에 대한 신앙을고백함으로 바로 그것이 구원에 대한 표징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예정론을 부정한다. 그가 아르미니우스주의라고 했지만, 여기 에 확실하고 분명한 도모없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이렇게 됨으로 문제가 된 것은 결국 구원의 성취도 없고 구원의 서정도 없는 이런 형태에 있어가지고 구원의 성취와 구원의 서정은 그러한 개념은 사라지고 오직 인간이 그것에 대한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하는 그런 구조만 있게 된다. 그래서 우리에게 구원의 성취의 개념이 있고 구원의 서정이 있다는 것은 그런 면에서 아르미니우스와 분리하는 대답이다. 그런데 이런 것을 없앴다.
완전 자유로운 하나님의 도모와 하나님의 뜻과 기뻐하심에 의해서 영원전부터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의 은택들이 주어진 것이라고 도르트회의의 성직자들은 고백하고 있다. 여기에서 택자들을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는 표현방식으로 고백되어 있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그의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아 영원전에 구원하기로 선택하였으며 아버지로부터 그에게 주어진 모든 자들만을 모든 민족들과 혈족들, 종족들, 방언들로부터 구원하시기를 원하였다는 표현으로 고백되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모두는 분명히 택자로 고백하고 있으나, 그리스도께서 그 택자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표현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가 말하는 칼빈주의 성격에 있어서 좀 퇴색된 그러한 성격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타락후 선택설이 갖는 성격이 대개 이런 여러 가지로 관계된다. 주로 택자들에게 일어나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게 될 구원에 관한 도모가 세계의 시작부터 실패함이 없이 지금까지 성취되었고 역시 계속 성취될 것이다는 논점이 기술되어 있다. 그렇다면, 인간이 타락한 후 비로서 구원의 백성이 실제적으로 선택되었다는 사상이 타락후 선택설의 입장이 아니었음이 확인되고 있다.
우리가 도르트회의가 타락후 선택설의 입장이라고 했는데 그래서 나중에 도르트회의에서 타락전 선택설과 타락후 선택설 문제가 분명한가, 또한 그 대상에 있어서 분명한가, 어떠한 사람을 택했냐, 이논쟁에 있어서 고마루스가 도르트회의 결정이후에 흐로닝겐에서 계속 자기입장을 주장했다. 그런데 거기에 반대한 사람이 있었다. 도르트회의에서는 그런말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는데 왜 타락전 선택설을 주장하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고마루스의 갈등은 거기서 생긴 것이다. 논쟁에 있어서 고마루스는 말하길 “아니다. 도르트회의에서는 나도 참석했는데, 그러나 거기에서는 타락의 대상에 대해서 정확하게 의도한 것이 아니었고, 타락전 선택설과 타락후 선택설문제에 있어서 명확하지 않았다”고 했다.
물론 이런것들이 고마루스가 위험한 지경에 있고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특별한 문제를 가지지 않고 넘어갔고 오늘날도 그런 문제를 삼아서 학위논문을 쓴 사람이 있다. 물론 이런것들이 어떤 논점들은 어떤 보수주의 신학교가 시작하게 되는 예정론에 대한 입장에 하나의 일부분이기도 하다. 그것을 어떤 입장에 대하느냐에 따라서이다. 다음주에 유해무교수가 그것을 발표할 지 모르겠는데 캄펜입장이 그런 예정론에 대한 입장을 가지고 학위논문을 했다. 이런 성격이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다른데, 우리에게는 분명치 않는데 화란에서는 굉장히 미묘한 문제이다. 그다음 이런 도르트회의의 성직자들의 고백중 첫째로 ‘실패함이 없이’ 혹은 ‘능력있게’라는 표현은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이 그리스도의 성취된 구원이 어떤 사람에게도 실제적으로 전유되지 않았다는 주장에 대한 반대 입장이다.
둘째로 창조전 택자들과 그리스도에 관한 하나님의 도움에 대한 언급은 그런 도모를 부정하고,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목적이 단지 은혜의 새 언약을 사람들과 체결할 수 있는 순수한 권리를 얻고, 구원의 성취와 적용사이의 구별을 없애는 어떤 새로운 조건 즉 구원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달려있다는 것과 그의 죽으심을 통하여 구원이 그런 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힘이나 완전한 의지를 아버지 하나님 앞에서 얻는데 있었다고 하는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한 대답이었다. 그러니까 인간의 자유의지를 통하여 이루어질수 있는 그러한 힘과 완전한 의지는 아버지가 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예정론을 부정한다.
그 특징이 반펠라기우스주의자들이 카톨릭 입장인데, 즉 자유의지는 예정론안에 방식으로서 주어졌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배제시켜 왔다. 셋째로 우리의 죄에 대해서 우리에게 책임이 있다든지 우리 대신 그리스도께서 그 죄책을 지셨다는 도르트회의 성직자들의 고백은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이 아무도 저주의 원칙에 대한 죄책이 없고 모든 인간들이 이런 죄의 책임으로부터 자유롭다는 주장에 반대하는 고백이다. 그들은 원죄가 없다고한다. 아담은 자기죄로 죽었다는 것이고 우리는 우리죄로 인해 죽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원죄 사상이 있음으로 그 원죄사상으로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고 하고 그리스도가 그것 때문에 근거한다고 하는데 그것을 무너뜨린다. 그래서 다음에 인간의 부패성과 하나님에게로 회심과 그 방식들을 고백하게 된다. 그래서 튜울립의 전적부패사상이 바로 여기서 나온다.
인간의 부패성과 하나님에게로 회심과그 방식들.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의 주장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잘 확인하고 구분해보자. ;
원죄는 그 자체에 있어서 전인류를 저주하거나 일시적이고 영원한 형벌들을 받기에 충분하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 인간의 의지에는 영적인 은사들이나 선한 영향, 선과 거룩, 의와 같은 덕들이 존재할 수 없고 그 의지 자체는 결코 부패되지 않는다는 것, 그러니까 의지자체를 분리했다. 그것은 아주 선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의지자체는 선이나 무슨 성향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중립이라는 것이다.
칼빈은 이것을 굉장히 비판을 했다. 자유의지와 관련해서 중립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것은 누구의 견해인가? 그것은 헬라사상의 견해이다. 그것을 가지고 대답을 했다. 같은주장을 칼빈을 반대해서 주장했다. 중생되지 않은 사람은 죄로 완전히 죽지 않고, 영적인 선에 완전히 무능하지 않다. 남아 있다. 중생하지 않은 사람에게 선에 이르는 능력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밖에 구원이 가능하다. 타락후에도 남아 있는 보편은혜나, (이 보편은혜는 그들이 상당히 많이 사용한다. 그래서 우리가 보편은혜를 받을 때 아르미니우스주의와 잘 구분해서 사용해야 한다) 은사들은 부패된 자연인이 사용할 수 있다는 것, 그렇게 좋은 사용에 의해서 좀 더 즉 복음적이나 구원적인 은혜, 구원 자체까지 점진적으로 그리고 단계적으로 도달할 수 있다는 것, 인간의 참된 회심의 경우 의지에 어떤 새로운 성향, 능력이나 은사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다만 인간의 행위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의지의 변화까지가 아니다는 것이다. 의지는 중립적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전적으로 회심했을 때는 온 인격이 회심하는 것이다. 의지까지 그렇다. 그런데 이 의지만 살짝 피해 놓았고, 분리시켜 놓았다. 그래서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아르미니우스를 반대하는 것은 전적타락, 전적부패성을 말할 때는 무엇을 말하는가 하면 의지의 타락을 말한다. 의지까지 타락! 우리가 하나님께 회심하게 된 은혜는 부드러운 충고 외에 다른 것이 아니거나(참 재미 있는 말이다. 구원의 서정을 굉장히 약하시킨 말이다.) 이것이 인간의 회심에 있어서 가장 고상한 역사의 방식이며(아주 도덕적인 말을 고상하다고 했다) 충고에 의해서 일어나는 인간의 본성과 가장 일치한다는 것, 하나님이 힘있게 그리고 실패함이 없이 신앙과 회심으로 기울게 하는 그의 전능의 그런 능력들을 인간의 중생에 사용하지 않으신다는 것, 중생에 대한 직접적인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서는 부정을 한다. 그러니까 중생의 가치를 없앤다.
우리는 중생을 강조한다. 중생되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할 정도로 구원의 서정에서 강조하는데 이들은 중생을 하나님의 큰 역사가 아니라고 한다. 은혜와 자유의지가 회심의 시작을 행하는 영적인 원인들이요, 두가지가 다 영적인 원인들이라는 것이요, 역사의 순서에 있어서 은혜가 의지의 역사에 앞서지 않으며(분명히 했다) 인간의 의지가 스스로 움직이기 전에는 하나님의 회심에 이르도록 힘있게 인간의 의지를 돕지 않는다는 것 등이다. 순서의 문제이다.
결국 인간의 의지와 은혜의 순서에 있어서 은혜를 앞세우지 않고 뒤에 두었다.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sola gratia이다. 이것을 알아야 한다. sola gratia라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 그렇다. 앞뒤를 바꾸는 이런 운동에 대해서 오직 은혜라는 것은 여기서 나온 것이다. 박윤선박사님 오직은혜라는 강조점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은 바로 여기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도르트회의 성직자들은 기독론과 구원론의 뿌리를 굳게 할 필요가 있었다. 구원의 서정에 있어서 하나님의 독특한 역사를 분명히 정의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타락전과 타락후 그 변화에 대해서 분명히 고백하였는데, 타락 전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인간의 의지 안에 의로 장식되 어 있었다고 고백하였고, 타락 후에는 오성과 의지와 마음에 있어서 전적인 타락을 고백하고 있다. 이런 전적타락은 그런 것이었다.
즉 첫째로 모든 인간들은 죄 안에서 태어났고 진노의 자녀들로서 태어났으며, 어떤 구원하는 선에 이르기에 무능하고, 악으로 기울러져 죄들 가운데 죽으며 죄의 종들이다. 따라서 중생케하는 성령의 은혜 없이는 하나님께 돌이키려고 하지 않고 돌이킬 수 없으며(전적무능), 그들의 부패한 본성을 개선하지 못하며 스스로 개선에 이르지 못한다는 대답이다. 그래서 전적무능, 전적타락이라는 것은 이런 성격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의지, 돌이킬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둘째로 원죄와 관련하여 외적으로 펠라기우스주의를 비판하면서 아담의 부패성은 하나님의 으로운 판단에 따라서 모든 그의 자손에게 이르되, 모방에 의해서가 아니라 부패된 본성의 전가(전이)에 의해서 자손들에게 이른다는 확고히 고백이 되었다. 아르미니우스는 모방을 강조했는데, 이것은 아니고 부패된 본성의 전가, 이런 아담의 죄의 전가는 후에 직접적인 전가와 간접적인 전가 방식으로 나뉘었지만, 도르트회의에서 분명히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보편적인 입장으로 정리된 셈이다.
그다음 셋째로 타락후에도 자연의 빛이 남아 있을지라도, 그런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 자연의 빛이 있다고 했을 때 어떤 위치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자연의 빛이라고 했을 때 성경의 필요성에 대해서 나온 말이다. 그것에 대한 적극적인 말이 아니다. 이것을 알 필요가 있다. 타락후 자연의 빛이 남아 있을지라도 그 빛으로 구원에 이르는 하나님의 지식에 이르거나 스스로 하나님께 돌아 올 수 있기에는 아주 멀다. 그러나 자연의 빛이나 첨가된 율법에 의해서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성령의 능력과 말씀을 통하여 할 수 있다는 것이요, 이것이 메시야의 복음이며, 신약에서와 구약에서도 그것을 통하여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고자 기뻐하셨다. 이렇게 고백을 한다.
넷째로 하나님의 이런 뜻의 비밀을 하나님께서 이미 구약에 있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신약에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계시하셨다. 그런 다른 경륜의 원인은 한 민족이 다른 민족보다 더 많은 가치성에 의존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완전 자유로우시고 기뻐하신 뜻과 넘치는 사랑에 있다는 고백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먼저 택함을 받는 것은 우리가 다른 민족보다 먼저 택함을 받는 것은 우리의 가치성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을 분명히 한 것이다.
그다음 다섯째로 하나님의 기뻐하심에 따라서 택자들에게 구원이 때가 되어 적용될 때, 크고 놀라운 은혜로 능력에 의해서 일어나고 그 변화는 새 창조의 역사이다. 우리의 새 창조의 역사를 중생에 강조를 두는 것은 아르미니우스와 반대되는 입장에 있다는 것을 이해하면 된다. 따라서 죽음으로 깨어나는 것이요 살아나는 역사인 중생이란 전혀 초자연적인 역사이요 큰 능력의 역사이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적적이면서 비밀의 역사이다. 이 때문에 거기에 하나님 자신 만이 일하신다. 이것이 중요한 초점이다. 이는 구원의 은혜에 대해서 영원히 하나님에게만 감사하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그와 동시에 신앙이 하나님의 선물인 것은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의 자유의지에 제공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인간에게 직접 전달되고 불어 넣으며 일어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믿을 만한 능력을 주어 인간의 자유의지로부터 동의나 직접적인 신앙을 기대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거기에서 의지를 일으키고 산출하시는 그 분이 참으로 모든 것들에 있어서 모든 것을 이루기 때문에, 인간안에서 믿고자 하는 의지와 신앙 자체를 산출하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도르트회의 성직자들은 구원에 있어서 신인협동설을 주장하는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의 입장에 반대하여 구원의 성취에서 뿐만 아니라 구원의 서정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전적인 사역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성화에서 관찰할 때 성화에서 신인협동설을 강하게 주장하면 루터주의와 가까운 것이 된다. 루터주에에 더 가까운데, 물론 아르미니우스주의와 가깝고 그러나 조건이 항상 있어야 하는데 그것도 전적인 하나님의 사역이다. 그러나 그것이 하는 방식에 있어서 특별한 방식이였다라고 생각하면 잘 이해한 것이다.
여섯째, 중생의 이런 은혜는 인간의 의지와 속성들을 없이하는 것이 아니요 힘으로 강요하는 것이 아니요, 그로 하여금 영적인 삶을 살도록 하고, 자발적이고 바른 영의 순종이 우세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 것도 하나님의 역사라고 보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성도의 견인이 있다.
그다음 레이든 신학자의 신학은 이런 타락후 선택설에 있어서 선택론도 인간론 다음에 있다. 이런 여러 가지 특성들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도르트의 입장을 고스란히 반영하여 신학을 하게 된 것이 레이든 대학의 신학자라고 할 수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신학에 대해서는 예정론에 관계해서 다음과 같이 몇가지 말할 수 있다. 그 다음 언약의 통일성도 있는데, 도르트회의 결정은 타락후 선택설의 입장이지만, 그러나 타락전 선택설의 입장도 반대하지 않는다하는 혼합적인 정통주의라 이름을 붙였다. 그대신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에 작성한 참여한 퓨리탄들은 아르미니안주의를 완전히 배제시키고 확고히 타락전 선택설에 기초해서 작성하였다. 그래서 다만 1645년 10월에 있었던 그 논의 과정에서 일부 성직자들의 발언 배후에 있는 타락후 선택설을 허용하는 정도에서 머물렀다. 이미 우리가 언급했었다.
이것은 도르트신조보다 훨씬 엄밀한 칼빈주의 노선을 확인한 셈이다. 웨스트민스터의 신앙고백서는 그 라인의 성격이 아주 철저한 칼빈주의요, 가장 엄밀한 칼빈주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도르트회의를 위에 서서 훨씬 개혁되는 차원에서 서 있는 고백서가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이다. 그 고백위에 우리 교회가 세워져 있다. 그럼에 따라 유럽개혁교회의 신학적 입장이나 세계 어느 개혁교회의 입장보다 독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누가 해 줄 사람이 없다. 세계어느곳에서도 이것을 해 줄 사람이 없다. 여러분들이 이것을 작업하도록 과제를 주거나 그렇지 않다. 그러면 누가해야 하는가? 여러분들이 해야 한다. 우리땅에서 해야할 과제가 이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꽃은 한 번도 피어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다시 강조한 것이 17세기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 시대의 부요성으로 돌아가서 거기서 온생애를 보낸 후에 그 다음에 우리것을 이해하는 자리를 찾자는 것이다. 지금 물결따라 가면 우리 다 신학을 잃게 된다. 또 그들로부터 배울려하면 여러분들의 신학을 다 버려야 배운다. 그만큼 한국의 신학적 과제는 굉장히 중요하다. 왜그러냐? 영국도 이 신앙고백을 감당하지 못했다. 미국은 회중교회로 돌아가 버렸다.
일부가 심어져서 지금 장로교회가 있지만은 그 뿌리가 축복이 되어서 우리와 연관이 되었는데 지금 그들이 얼마나 약해졌는가! 그 작업을 미국이 하지 못했다. 지금 그래서 그분들은 교회를 잃는다고 판단할 수 있다. 우리도 이 작업을 하지 못하면 반드시 교회가 없어진다. 장로교회의 이름을 붙일 수 없다. 이름만 있지 신학은 없는 것이다. 그 누가 해야 하는가? 여러분들이 해야 한다. 여러분들이! 여러분들 외에는 아무도 없다. 그 만큼 실력을 높이어야 되고, 라틴어도 많이 해야되고, 헬라어도 많이 해야하고, 고대 원본을 찾아 헤메서 다른 사람이 감추고 있고 보여주기를 거절하는 것을 찾아서 다시 발견하고 우리 라인을 결정하고 그 부요성을 다시 재창조해야될 의무는 여러분에게 있다. 그래서 이 17세기의 의미는 이런 의미가 있다.
이제 맺음말을 하고자 한다. 한국교회안에서 정통개혁주의를 회복한다는 것은 곧 종교개혁을 의미한다. 그러나 어떻게 정통개혁주의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 문제이다. 우리가 1930년대에 자유주의와의 신학적 논쟁에서 그 논쟁점의 신학만을 유산으로 받은 것이 아니라, 고 박형룡 한 사람의 신학과 그 신학이 배경으로 삼는 그 벌콥신학을 받은 것이다. 지금 우리가 정통개혁주의로 돌아갈 때, 지금의 보수주의 개혁주의 신학 혹은 어떤 보수주의 신학자를 통하여 돌아가는 것이 정통개혁주의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였다. 16세기나 17세기로 돌아가는 것이 바로 정통개혁주의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할 것이다. 더구나 단순히 도르트 신앙고백서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로 돌아가면 바로 정통 개혁주의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함이 중요하다.
우리가 돌아갈 때 어느 인물을 통하여 어느 선을 따라 돌아가야 하는가가 중요하다. 그러나 쯔빙글리, 부쪄, 칼빈으로 바로 돌아간다는 것조차도 신학의 다양성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역사적 속에 잠간 도달한 것일지라도 가장 완전한 정통개혁주의를 통하여 인물을 따라 거슬러 가야한다. 이렇게 돌아가는 과정이 바로 우리의 참된 종교개혁이다. 그렇게 돌아가는 과정을 하다보면 그것이 종교개혁이다. 자연스럽게 종교개혁이 오는 것이다. 종교개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참된 개혁은 그 시대에 헤르만 바빙크, 죠지 길레스피, 사무엘 러드포드, 스테판 마샬, 다니엘 코드레이, 카아트라이트, 월터 트래버스, 멜빌, 베자, 칼빈 등과 같은 인물들이 한 교회 안에서 수 없이 활동하고 있을 때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그 나라와 그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최대의 선물이다. 우리가 보면 환란중에 잠간, 강의도 몇 명 듣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난 강의는 책으로 남아서 씨를 뿌리게 되었다. 어떤 교회는 7-8명 뿐이다. 그 긴 강의서와 라틴어 서적이, 강의자는 몇 명이 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 신학책은 그 신학만은 영원히 있게 된다. 이것이 개혁주의 신학이다. 그들의 선물일 뿐이 아니라 우리의 선물일 수 도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저는 낙관적이지 않다. 왜? 그런 선물은 오직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두 학기 강의인데 여러분들한테 한꺼번에 뿌려서 전부 이해되지 않을거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것을 기초로 해서 비교해보고, 확인해보고, 없으면 찾아보고, 이렇게 하다보면 여러분들이 공부가 될 것이다. 그때가면 한참 이것, 10년공부해야 겨우 아나! 이렇게 될 지 모른다. 왜 그러냐 하면 자료도 없지, 외국에 가도 어떤 모양으로 어떤 길로 파야될지, 그것이 문제니까, 일단 외국에 가면 여러분에게 등장시키는 것은 이것을 파라고 주지 않고 언어해야지, 친교해야지, 그 담당교수가 준 것 해야지, 그 사람만 연구를 해야된다, 이것 전혀 공부할 수 없다, 어디에 가 있는지, 책이 어디에 있는지, 정신이 없다.
질문1 : 레이든 대학 신학자의 신학, 에라투스주의와의 논쟁, 독립교회주의와의 논쟁, 코케이우스언약신학에 대한 것에 대한 내용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어떤 책을 보아야 되는가?
답 : 아마 라틴어로 되어 있는데, 번역도 안되었고 바빙크가 라틴어로 된 그것을 1800년도에 그 자료만 있다. 그렇지 않으면 17세기로 돌아가야 한다. 여러분들이 어떻게 돌아갈것인가? 이 시대나 그것과는 상관없는 시대이다. 지금 공란을 두었지만 의미가 큰 것이다. 물론 이런 것을 연구하는 자가 몇분 있는데, 거기까지는 제가 있는 한, 주께서 허락하시는 한 그일을 위해서 연구하고 해서 여러분들에게 소개할 것이다. 지금은 그분에 대해서 어떤 형태만 갖고 있고 여러분들에게 내놓을 단계가 아니기 때문에 생략하겠다.
질문2 : 장로교 정치에 있어서 총회의장과 노회의장과의 개념의 차이가 있다.
답 : 민감한 문제인데 학자로서 진리는 진리니까 발언을 하겠다. 물론 근본적으로 말했지만 우리하고 정반대의 사상은 one head church또는 주교회, 오늘날 이문제가 상당히 많다. 무슨 남서울 교회, 주교회이고 독립을 안시켜 준다. 이런 문제, 이런 교회를 주교회, chief church다. one head church. 오늘날 문제가 되는데 직접관련해서 장로교회에서는 우누스를 부정하는 것은, 또 우니타스만 강조하는 것은 그 열쇠권이 장로회, 여러 직원들 자체에 있다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서에 분명히 나와있다. 직원들에게 하나님의 열쇠에게 있다. 회중들에게 있지않고! 그래서 노회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노회가 존재한다. 그래서 임직을 회중에서 하는 것이 아니고 노회에서 임직한다. 그런데 거기에서 그말은 무슨말인고 하면 회 자체에 열쇠권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문제에 있어서 회원권과 관련해서 당회든지, 노회에 가서 회원권이 있는데 회의때에 우리가 두가지 있다. 원리적으로는 회원권은 목사는 누구든지 회원권이 있다. 동등한 권리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지교회를 강조하다보니까 지교회가 없는 목사는 권리를 주지 않는 그런 경향이 생긴 것은 회중교회적 성격이다. 장로교회의 형태에서 다른 양상과 결합한 형태이다.
그러나 의장의 권한에 있어서는 우니타스에 강조점을 둔 것이다. 여기서 다른 성직자 위에 어떤 방식으로도 없다는 것을 말한다. 한 개인이, 다수의 권리를 침해할 수 없다는 그러한 원리를 갖고 있다. 그래서 여기에 보면 스코틀랜드 교회 전통에서 회를 대표하는 상비적인 인물로서의 비숍이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항구적인 의장이다. 항상 매년 비숍은 정해져 있다. 의장 노릇도 하고 계속 있다. 그러나 한국교회에서는 회장이 그런 모든 것을 다한다. 물론 1년간 기간이지만 어떻게 보면 우리 총회의 역사에서 우리 장로교역사에는 6개월도 있고 1년도 있다. 그런데 거기에는 파의 의식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 회에 대하여 치리회가 치리행위를 그만둔다는 것이다. 그때 치리해서 의장, 그 회를 인도하는 자는 그회로서 끝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스코틀랜드 Dictionary of Scottish & Theology, 1993년 사전을 보면 정확히 당회의장은 목사이어야 하며 공석일때는 노회에서 임시당회의장을 임명한다. 노회에서 뽑힌 노회의장은 1944년까지는 6개월 임기였으나 1966년부터 1년 임기로 변경되었다. 노회의원 3인 이상 요구시에 언제든지 회집할 수 있다. 일이 생길때만 회집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국회처럼 임시노회, 정기노회로 나누었는데, 원래 장로교회에서는 일이 생길 때 임시노회를 하는 경우인데 그것이 원래 개념이다. 그래서 여기서 정했다.
총회의 의장은 그 교회의 의장이 아니요 교회의 권위자나 대교회 대변인이 아니다는 것이 중요하다. 확고히 표현했다. 그것이 처음 제 2권징조례에서 스코틀랜드교회에서 확고히 모든 의장에 대해서 정의되었고 역시 제네바의 의장제도가 그 근원이라고 알려지고 있으며, 토마스 카트라이트의 정치 지침서에서 가장 정확하게 정의 되었다. 그래서 이런 성격이 있는데 그다음에 우리 헌법이 이것을 번역했는데 1907년을 번역했다. 그런데 우리의 헌법은 1917년 것을 박윤선박사님이 번역하였는데, 그런데 그 번역에서 우리는 총신보다 훨씬 그 본문에 충실했다. 그러나 그 중에서 위원회성격에서 임원회에 대하여 설명했는데 이것은 장로교 정치에서 중요한 원리인데 우리의 헌법에는 생략해 버렸다. 거기에 shall have no power of the initiating action exception as here in after provide. 위원회이라는 것은 맡은일 외에는 그 회 동안에는 발기할 수 있는 권리가 없다. 그 말은 폐회를 의미한다. 그 회에서 총회에서 일어난 모든 일이, 임직도 하고, 그것으로 끝나야지 그 나머지 누가 또 대신해서 개인이 한다던지, 총회에서 결정나지 않은 일을 어떤 위원회가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것을 우리는 임원제도를 박윤선 박사님은 헌법에서 제외시켜 버렸고 그 다음에 거기서 폐회라는 말을 썼고 동시에 의장이라는 말을 썼다. 그것이 개혁된 것인데 우리가 현재로서는 서로간에 화합하고 대화하는 성격을 갖다보니까 지금 수정을 했던 것이다. 물론 이런것들이 의미가 있는 것들은 장로교안에서 서로 화합하고 연합하자는 연결된다고 보게 되는데 참 어려운 문제이다. 그러나 정상의 자리는 우리편에 있다. 가장 정확한 장로교는 우리편에 있다. 자신을 가지고 자부를 가지고 희망을 가져도 좋다. 여러분들이 이제 이런 정신을 가지고 교회를 섬기고 성도를 섬기면 된다고 생각된다.
우리가 늘 유혹을 받는 것이 뭐 국회 제도든지, 이런 것을 통해서 모방을 하다보니까, 이런 것이 있는데 그러나 장로교회는 독립성이 있듯이 그 독립성에 합당하게 확실한 원리가 서 있는 상태에서 전통의 뜻과 의미를 잘 이해해서 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질문3 : 박윤선 박사님이 굉장히 바르트를 비판하였는데, 정통개혁신학과 접맥해 바르트를 보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것 아닌가?
답 : 바르트의 신학이 우리와 구분된다는 것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예정의 주체로서의 그리스도에 대해서 강조하여 제한속죄를 포기하려는 바르트주의는 루터주의(종교개혁 주저서에서 희미하게 나타나는, 언약의 주체가 그리스도라는 사상)는 될 지언정, 역사적 정통 개혁주의와는 거리가 있음에 틀림이 없다. 기타 다른 문제는 박형룡박사의 신학난제의 배경을 보면 가장 확실하게 비판이 되어 있다. 저의 입장은 박형룡 박사의 신학난제에 나온 바르트의 비판이 가장 바르트를 비판한 것이라고 여러분들에게 이야기 할 수 있다. 언약의 통일성, 가장 혁명적인 것은 그리스도께서 택자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이 보편론을 바르트가 포기한 것인데, 이런 기준이라는 것이다. 언약의 통일성문제에 있어서 바르트가 어떤 요소가 있다.
(계속된 질문에) 그런 신학적 자세는 좋은 자세로 본다.(웃음) 늘 보면 함부로 바르트 이야기를 했을 때는 좋은 이야기를 했을지라도 적극적인 입장에서 비판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질문4 : 코케이우스의 언약론으로 개혁주의 신학의 몰락이 왔다고 하는데, 어떤사람은 코케이우스를 개혁주의자라고 보고, 바빙크는 개혁주의라고 안보고 있는데,
답 : 개혁주의자라고 보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고 근본사상에 있어서 주 라인, 바빙크가 좋아하는 라인, 주된 라인, 17세기가 갖는 칼빈 라인과 좀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칼빈은 실체의 통일성을 늘 강조하는데 여기서는 실체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즉 구약과 신약에 있어서 죄 용서의 차이가 있다고하고 이런 것이 차이가 있고 작정의 다양성, 언약론의 다양성을 이야기한다. 하나님은 언약에서 변한다고 하는데, 우리는 언약론에 있어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동일하다. 이것이 확고히 있다. 현재 보편적으로 갖는 17세기 정통개혁신학이라는 것은 좀더 포괄적이고 넓고, 기준이 없는, 예를 들어 하나님 중심사상이라든가, 이것은 루터주의라든가 어디든지 다 있는데, 그것을 어떤 칼빈주의 사상이라고만 해서는 안된다. 칼빈주의라는 독특성이 있는데 그리고 보편성에 해당되고, 어떤의미에서는 신자들이 갖는 하나님의 중심사상은 보편성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독특성을 지적해주어야 한다. 그런선이다.
질문5 : 교수님께서 신학자들이 잠깐 도달한 신학적 유산들을 아는 것을 통해서 종교개혁이 이루어진다는 데 대해서 동의한다. 그런데 실질적으로 우리 신학 커리큘럼이나 신학적인 산물들을 경향을 공부한다. 교수님은 신학자들을 따라서 잠간 도달한 신학적 완성품들을 연구하는 것이 그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라고 하셨다.
답 : 그런 것이 많다. 조직신학 분야라든가, 성경신학, 기타 분야 어떤면에서 계몽주의 이후시대의 카테고리를 보수주의도 포용하고 있고, 너무 각 분야가 개별화되다 보니까, 신학적인 통일성이랄까 이런 것이 문제가 된다. 방법론에서는 좀 여러 가지 방법을 쓸수 있다고 본다. 정확한 신학적 입장을 구축한 상태에서 각분야별로, 예를 들어서 그 시대에도 각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고 헬라어면 있었고 히브리어 분야도 있었고, 철학 분야도 있었고, 거기에 교의학 분야가 특별한 분야가 뚜렷하게 나타난 것이 있다 할지라도 그러나 지금의 발전상태에서 개발할 수 있다. 그시대의 그 사람들이 작업한 가운데서 특히 주경신학분야, 이런 분야에서 좀더 많이 개발해서 소개하고 그것을 좀 더 심도 있게 그것을 기초해서 신학의 기본 노선, 정신을 흐리지 않은 상태에서 이렇게 그분들이 보지 못한 부분들을 오늘에 새롭게 개발되는 또는 밝혀진 분야가 다시 개발한다던지 그런식으로 발전적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바로 돌아간다는 의미는 대충 신학적인 기본 어떤 눈이랄까, 기준을 의미하지 오히려 이런 의미에서는 모든 학생에게 이런 최소한 지식을 가져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보편성과 연관되어 있다고 본다. 그위의 작업에서는 자기 역량대로 분야대로 심도있게 기본적으로 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이러한 길은 낙관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문화가 있는데, 여러분들이 바로 나가면 차를 타야 된다. 갈수 없다. 이길로 갈수 없다. 낙관적이지 않다. 차를 타면서 그 책을 본다는 것은 어려운 것이고 이 카테고리안에서 그 책을 본다는 것은 어렵다는 말이다.
여러분들이 바르트를 이야기 하는데, 바르트를 하면 다 바르트다. 세상이 다 바르트다. 그러면 바르트를 계속 연구하다 보면 바르트를 전체 연구하다가 다 끝나버린다. 왜냐하면 전부 바르트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할 수 없다. 개혁을 쉽게 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칼빈연구를 하는데 바르트의 칼빈연구자들이 테마를 준다 이말이다. 기독론 차원에서 좀 칼빈에 대해서 연구해보라. 그러면 어떻게 할 건가? 그러면 학위따기 위해서 해야 된다. 이것이 바로 낙관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지금 다 바르트 사상이고, 칼빈신학, 유럽에는 바르트의 입장에서 칼빈을 연구하도록 칼빈신학협회에 대부분 사람들이 칼빈주의인데 바르트적인 칼빈을 연구해 달라는 것이다. 책들이 다 바르트입장에서 칼빈을 본 것이다. 삼위일체에 대해서 너무 발굴하지 말고 구약의 기독론을 발견해 달라는 것이다. 그런 실제 낙관적이지 않다는 것은 이런 복함적인 의미가 있다. 단지 여러분들에게 이것을 주는 이유는 정수, 어떤 무엇을 하는데 결정적인 점에 있어서 아주 칼빈주의로 가는 결정적인 차원에서 우리가 분별하는 능력, 어느 점에가서 아주 미묘한 것이 있는데, 거기가서 설 때 이쪽을 택하라는 의미에서 준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이 우리가 이것을 할 때 그것을 하면 너 다른 학자가 반대했기 때문에 하지말라, 그것을 삭제하라, 그 몇글자 빼라는 것이다.
여러분들에게 있어서 복음주의 운동이 얼마나 거센가? 아르미니우스주의자라고 계속 주장했다가는 어떻게 되는가? 예정론만 주장하면 너 교회나가라고 한다. 왜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가 하면서 말이다. 우리는 사람을 사랑하는데 같이 사랑하는데 다른 방식으로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외적으로는 나타난 것이 너무 엄밀하다라고 하고, 나가라! 너 때문에 부흥이 안된다고 한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나갈 건가? 좀 피하고 말해야 할 것을 말하지 않고, 앉아 있는 것이다. 박윤선 박사님이 그런 말을 했다. 안전한 자리에 돌을 던지지 말라! 개혁주의하게 되면 피곤하고 고통스럽고 매일 마음이 상한다. 얼굴이 찡그러진다. 할 수 없는 것이다. 너무 비판적이니까, 견딜수 가 없다. 그러니까 할 수 없지 않은가! 침묵하든지, 웃든지, 같이 가자든지, 그것 뿐이지, 그것 뭐 태도 나지 않으니까, 뭐 쉬운 것이다. 인간을 존중한다는 것이 굉장히 어렵다.
질문6 : 개혁주의신학을 정의할 때 목사님은 인물, 계보로 정의를 하는데, 다른 분은 개혁주의 신학이라 정의할 때 도그마로 정의했을 때 어떤 차이가 있는가?
답 : 이런 것들은 보편성, 보편성은 실재적으로 거의 다 차지하고 있다. 조직신학의 전체체계에서 이런 부분이 논의된 것은 소단위이고 나머지는 보편성이다. 그리스도의 갖는 보편성에 관한 고백이다. 그런데 이런면에서 어떻게 해서 이런 것이 발견되었느냐 할 때는 다른 회중교회의 입장이든지, 보에티우스와 고마루스의 차이, 현대에 와서 바르트와 반틸차이, 이렇게 차이가 나는데, 바르트와 반틸의 차이는 근본주의와 자유주의 차이라는 카테고리로 해결이 된다. 그때는 여기 17세기로 갈 필요가 없다. 그것은 보편성에 관한 내용이니까, 그때가서 미묘한 것은 그것을 분별하는 이런 것에 있어서 어떤 것이 초점이 있는가 이것과 관련해서 보다보니까 이런 정의가 나온 것이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 카이퍼의 칼빈주의, 자 그것은 다 맞다. 그러나 대부분은 보편성이다. 칼빈주의 독특성과 관련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보편은혜에 관해 상당히 강조가 많다. 거기에 칼빈주의 정의에는 독특한 특성이 있다. 카이퍼 갖는 특성, 그것에 의해 칼빈주의가 정의가 되기 때문에 그런 정의가 나오게 된다고 보고, 여러분들이 칼빈주의 역사와 특성(정성구.양낙흥 번역)이란 책은 에큐메니칼 입장에서 교회사를 썼다. 독특성을 가지고 쓰지 않았다. 한 예가 된다. 자료는 없으니까 그 자료는 좋으니까 우리가 들어보지 못하고 개혁주의에 대해 말하지만 우리가 판단하기로서는 그 발굴하는 눈은 이것을 해야 하는데 저것을 한다 이것이다. 그때는 칼빈주의자라고 열심히 연구하고 책을 썼지만 그러나 에큐메니칼적인 칼빈을 발견한 사람이다라고 보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많다. 독일가면 많다. 한신출신들이 칼빈 연구자 대표자들이 학위취득하려고 왔는데, 그들이 하는 얘기가 칼빈이 종교개혁하지 않았다고 하고, 1934년의 글들을 연구한다. 그들에게는 개혁하려는 의지가 없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칼빈을 어떻게 연구하느냐가 아주 중요하다.
저도 실패한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제 선생은 바르트주의자이다. 저에게 주문하기를 내가 논문을 쓰는데, 이 나라를 위해서 좀 써달라는 것이다. 이 나라의 교회를 위해서, 그러나 그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삼위일체를 강조했고 그는 그리스도를 강조했다. 더구나 본인만 유일하게 개혁주의 라인인데, 루터주의는 칼빈의 구약을 다루면 정면 충돌한다. 그런데 그분이 이 주제를 두고 어떻게 기회를 보고 통과시킬려고 하는데 이런 입장으로는 낼 수 없다. 그것을 삭제하라. 근본적인 요소는 제하라하고 나는 못한다고 했다. 그가 말하길 교수는 누구와 할 것인가? 독일에는 할 사람이없다. 그래서 나는 괴팅겐에는 학위를 못받겠다고 했다. 물론 저의 고백이 되었는데, 실제 가면 그렇다. 좁은길이다. 여러분들을 영접해 줄 사람이 없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거기에는 회중교회를 연구하라고 한다. 존코튼을 연구하고(웃음), 잘 피해서 딱서고 오는 것이고 다른 것을 가르치는 것이 현명하다. 한마디로 여러분들이 제길로 간다면 영접할 곳은 없다.
질문7-2 : 우리가 개혁주의를 가지고 싸우는 대상은 자유주의보다는 복음주의가 갖는 유혹거리라고 보는데,...
답 : 이런 점은 우리가 여러분들과 대화를 하고 있는중이고 여러분들에게 태제를 내려놓으면 여러분들이 받을만한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있다. 복음주의와 함께하고 하는 여러분들이 있는데, 그분들은 그분나름대로 정신이 있다. 그분들과 함께 일하면서 이런것들이 방해된다고 보는 것은 힘이 드는데, 우리가 정신을 잘 차려서 걸어가기만 하면 된다. 우리가 대안할 수 있으니까,
질문7-2 그러면 개혁주의에서 바라보는 진정한 부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답 : 하나님앞에서의 부흥이다. 하나님께서 사랑해주시고 하나님의 깊은 역사, 역사가 있기 때문에 교회가 있고 나도 있고, 교회의 부흥도 그분이 역사함으로 있지, 그분에게 있지 어떤 다른 표징에 대해서는 우리가 믿고 있는 교회의 표징, 그것을 확인하면 된다고 본다. 부흥이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일수 있고 여러 가지 형태로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데 그 말씀을 듣는자가 온다는 것이다. 부르심을 받고 온 것이다. 그것이 수가 많든 적든 많이 오든 적게 오든 그것이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내가 전할 때 그 소리를 듣도록 소리를 발하는데 있어서 가장 좋은 것을 주고자하는 마음으로 선포하면, 그런데 그것을 받으면 내가 전하는 자의 축복이 아니고 받는자의 축복이라는 것이다. 그를 하나님께서 이곳으로 이끌게 하셨다는 것이다.
부흥은 무엇인가? 부흥은 누구의 눈인가이다. 하나님의 눈인가, 우리의 눈인가? 이것을 잘 이해해야 한다. 부흥의 성격이 무엇인가라 했을 때 아마 그것은 쉽게 대답할 문제라고 본다. 우리는 믿는다. 주님앞에서 소리를 낼 때 그 소리를 듣는자가 있다. 주께서 귀를 여실 때 그 말씀을 듣는자는 연다. 그리고 확신한다. 그리고 영원히 진리와 함께 산다. 그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것이 축복이다. 부흥이다. 부흥이 아니고 그것이 축복이다. 뭐 설교가 되어서(웃음).
짧게 기도하고 마칩시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드립니다. 주께서 이런 귀한 기회를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입을 열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귀를 주님앞에 열수 있도록 도우신 것 감사드립니다. 듣는자나 바라는 자나 주님의 은헤인줄 알고 감사하오며, 이 시대에 대해서 특별한 사명을 가질 수 있도록 은혜를 더하여 주시옵소서. 기회는 우리에게 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순간인지, 내일의 순간인지, 우리는 아무도 알 수 없사온데 그러나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시사 우리로 그 자유로 이 세상에 대해서 승리하는 자로 남아 있게하여 주시옵소서. 감사하오며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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