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찬송

개혁주의 유산으로서의 시편 찬송

Sola. 2023. 10. 7. 06:00

 

개혁주의 유산으로서의 시편 찬송

 

J. Kortering / 번역: 칼빈아카데미

 

 

번역자 주:

최근 들어 한국 교회에는 ‘찬양과 경배’ 혹은 ‘열린 예배’라는 명분 하에,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온갖 악기를 동원하여 거의 오락에 가까운 노래를 찬송이라고 부르는 것이 마치 유행병처럼 번지고 있는 듯합니다. 이러한 때에 개혁파 교회 성도로서 우리는, 역사적 개혁파 교회가 가르쳐 나온 올바른 찬송, 곧 성경이 가르치는 찬송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제대로 배워서,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찬송으로서 하나님께 예배드려야 하겠습니다. 이제 1부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개괄적으로 살펴보면서 한국 교계 앞에 공개적으로 비판문을 게재한 한 뜻있는 목사의 글도 살펴보았습니다. 2부에서는 이에 대한 대안으로 교회가 이해해야 할 예배 찬송의 바른 의미를 적절하게 연구한 미국 개혁 교단(PRC)의 코터링(J. Kortering) 목사의 “Psalm Singing: A Reformed Heritage”를 번역하여 살펴보겠습니다.

 

 

 

들어가는 말

 

개혁파 성도인 우리는 시편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합니다. 여기에서 ‘시편’이라고 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오랜 기간에 걸쳐 음악으로 만들어 온 구약 성경에 있는 시편을 일컫습니다. 원래 시편은 노래 부르기 위해 성령으로 작곡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시편을 노래함으로 오랫동안 복을 누려왔습니다.

 

'구약 성전에서 불리던 이 노래들은 수많은 영웅적 인물들에게 감화를 주었다. 유대 성도들과 애국지사들은 회당과 전쟁터에서 이 시편을 노래했고, 사도들, 복음전도자들은 시리아, 갈라디아, 마게도냐 광야의 위험 가운데서 이 시편을 노래했다. 사자들 앞에 먹이로 내던져졌던 로마의 순교자들이 조용히 읊조렸던 것도 이 시편이었으며, 루터파, 종교개혁자들이 독일의 숲이나 고지에서 생명을 호흡할 수 있었던 것도 이 시편을 통해서였다. 이 시편으로 참회하는 영혼들은 그 비장한 마음을 표현했고, 승리의 영혼들은 그 기쁨을 노래했다. 아이를 돌보는 어머니들은 이 시편을 노래하면서 밤을 지새웠고, 외로운 길을 걸으며 눈물 흘리던 사람들에게 이 시편은 희망의 빛으로 다가왔다. 순례자들은 사망의 골짜기로 다닐 때 이 시편에 담긴 확신을 자신들이 의지할 지팡이로 삼았다.'i)

 

하나님께서 16세기 종교 개혁을 통해 교회에 시편 찬송을 회복시키신 것은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마틴 루터는 1517년, 비텐베르그에 세 가지 중요한 조항을 발표했습니다. 즉 하나님 말씀에 대한 권위, 이신 칭의, 만인 제사장이라는 진리였습니다. 종교 개혁은 루터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가 이룬 일은 진리 발전의 촉진제 역할을 했습니다. 칼빈은 이 터 위에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이라는 거대한 요새를 세웠습니다. 루터와 칼빈 모두 예배에서 회중 노래를 회복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루터는 예배 찬송을 시편만으로 제한하진 않았지만, 시편을 아주 높이 평가했습니다.ii)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송가에 시편 만한 책이 어디 있겠는가? 고아들의 아버지, 아이들의 교사이신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모를 때 그걸 아시고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 교사가 아이들에게 편지와 짧은 기도문을 작성해 주고 그것을 부모에게 보내게 하는 방법처럼 (시편) 책을 준비하게 하셔서 그 말씀과 느낌을 하늘 아버지께 전하게 하신다.'iii)

 

 

한편, 존 칼빈은 개혁주의 교회 내에서는 시편 찬송만을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시편에 대해 큰 경의를 표했습니다.

 

'아무리 자세히 살펴보아도, 성령께서 만드시고 다윗이 노래한 시편 이상으로 좋은 노래나 찬송의 목적에 부합한 노래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우리가 시편을 노래할 때는 마치 하나님께서 당신 영광을 찬양하도록 당신이 친히 우리 안에서 노래하신 것처럼 우리 입에 친히 말씀을 주신 것을 확신하게 된다.'iv)

 

이 글에서 우리가 사실로 받아들여야 할 것은, 첫째, 모세가 시편을 기록한 때부터 오늘까지 오직 시편만을 노래하는 교회가 항상 있어왔다는 사실입니다.v) 둘째, 우리가 예배 중에 이런 시편만을 노래하는 것은 성경에 신실하기를 바라는 개혁주의의 유산이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이 시편을 노래함으로 위대한 영적인 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속한 교회가 시편을 노래하고 있는 교회라면, 나는 여러분이 이 시편 찬송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생각하고 이 좋은 유산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계속해서 이 시편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속한 교회가 예배 시간에 시편과 찬송(hymn)을 함께 노래하고 있다면, 나는 여러분이 시편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제대로 인식하고 이 시편이 도외시되지 않고 예배에서 정당한 위치를 차지하기를 바랍니다. 만일 여러분이 속한 교회가 예배 시간에 시편 찬송vi)을 하지 않는다면, 시편을 사용함으로 개개인의 영적 생활과 예배가 얼마나 고양되는지 잘 생각해 보도록 제안합니다.

 

 

 

종교 개혁과 시편 찬송

 

말씀을 정당한 위치로 회복시키기 위해 하나님께서 말틴 루터와 죤 칼빈을 사용하셨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누가 웜스(Worms) 국회를 잊을 수 있겠습니까! 이 국회에서 모든 저작 내용을 취소하라는 명령을 받았던 루터는 “내 마음은 하나님 말씀에 사로잡혀 있다!”라고 단호하게 대답했습니다. 이 확고한 결의는 그의 신앙과 삶 전체에서 절대적 권위를 보여 주었습니다.

종교 개혁자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찬송가를 찾아 시편으로 돌아온 것은 의미가 큽니다. 성령께서 노래를 위한 목적으로 이미 마련해 놓으신 책이 바로 이 시편입니다.

 

성령께서 회중의 노래로 주신 이 시편을 개혁자들이 예배에 다시 회복시키려 한 것은 기쁜 일입니다.vii) 배교한 로마 교회는 일반 성도들이 하나님 말씀을 읽을 수 있는 권리를 박탈했습니다. 마찬가지로, 회중의 노래를 사제들과 훈련받은 성가대 즉 “전문적인 사람들만이 하는 것”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개혁자들은 하나님의 백성 모두 하나님의 성가대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개혁자들을 사용하시어 당신의 백성들이 무엇을 노래할 것인지 그 내용까지 주셨습니다. 그들의 죄가 그리스도의 피로 사함 받았을 때, 그 마음은 얼마나 환희로 가득했겠습니까! 자신들을 의롭다 하기 위해 나무에 달리신 분은 누구십니까? 칭의의 근거가 되는 것은 자신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임을 알았습니다.

 

이 사실을 깨닫고 성도들은 행위의 짐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고 하나님의 의를 노래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다윗의 시편보다 그들 마음을 더 잘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있었을까요? 시편은 그들이 마음속에 느끼던 하나님께 대한 표현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루터와 칼빈은 하나님의 말씀 연구에 전적으로 헌신했습니다.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교리에 관하여 그들은 아주 비슷한 견해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례 부분과 예배에서 시편만을 사용해야 하는가 하는 부분에서는 견해를 달리했습니다. 칼빈은 처음부터 교회에서 시편만을 노래해야 한다는 입장을 지지했습니다. 1537년 제네바에 도착했을 때, 칼빈과 파렐은 예배 순서에 시편 찬송을 포함시켰습니다. 칼빈이 제네바에서 추방당해 독일 스트라스부르그에 은둔해 있는 동안, 그곳 사람들이 활기차게 부르던 시편의 진가를 재평가하게 되었습니다. 칼빈은 직접 마로(Marot), 베자(Beza)와 함께 시편을 노래 가사로 쓰기 시작했습니다.viii) 다시 제네바로 돌아와 올바른 예배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펼치기 시작하면서, 시편 찬송을 정당한 위치로 회복시켰고 그때부터 개혁교회와 장로교의 전통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점에서 칼빈이 직접 한 말을 듣고 그의 생각을 분별해 보아야 합니다. 칼빈이 언어를 사용하는 경배 행위로서의 공중기도와도 같은 찬송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봅시다.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 몸의 각 부분에서 나타나야 하며 노래 및 말을 포함한 언어가 이 일에 도구가 됨은 매우 합당한 일이다. 언어는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특별히 만들어졌다. 언어는 주로 공중 기도에 사용되며, 이런 기도를 통해 성도들은 동일한 음성으로 한 성령과 같은 믿음으로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게 되며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ix)

 

 

노래는 기쁨을 나타내는 표현방식으로서 그 기쁨은 말씀으로 성화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칼빈은 또한 경고합니다.

 

'성령께서는 성경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즐거워하도록 깊이 권고하시며, 그 목적을 위해서는 즐거움조차 자제하게 하신다.x) 기쁨에 끌려다니는지 아시기 때문이다. 우리 죄 된 본성은 온갖 어리석고 부도덕한 기쁨을 구하는데 자신을 방임하고 내어주지만 주님께서는 우리를 세상의 유혹으로부터 주님께로 이끄시기 위해 당신께서 권고하시는 영적 기쁨이 우리를 사로잡도록 가능한 모든 수단xi)을 제시하신다.'xii)

 

 

이 사실은 노래 곡조에도 적용됩니다. 칼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우리 마음이 말씀의 영적 의미에 쏠리는 것보다 우리 귀가 곡조에 더 귀를 기울이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야 한다. 어거스틴도 이 위험성을 염려한 나머지 때때로 아타나시우스가 지키던 전통이 지켜지기를 원했다. 아타나시우스는 음송자들에게 명령하기를 음성에 억양을 적게 넣도록 함으로써, 노래를 하기보다는 말하는 것 같이 들리도록 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자신이 노래하는 데서 많은 유익을 받았음을 회상하고서 노래의 긍정적인 면도 인정했다. 적당한 절제가 이루어진다면 노래 역시 대단히 유익하고 건전하다는 걸 의심할 여지가 없다. 반면 감미로움과 귀의 즐거움만을 목적으로 작곡된 노래는 교회의 권위에 합당치 못하고 하나님을 심히 불쾌하게 만들 수밖에 없다.'xiii)

 

 

예배 중에 하나님의 백성이 불러야 할 노래를 칼빈이 시편으로 제한시킨 것은 확실히 교회의 노래에 대한 이런 경건한 접근에 기인합니다. 시편이 노래로 불리기 위해서는 운문으로 고쳐져야 하고 음악이 준비되어야 하지만, 칼빈은 계속해서 시편만이 예배 중에 불려져야 할 하나님의 노래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성 어거스틴이 지적한 대로,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로부터 받지 않은 것으로 하나님의 놀라우신 일을 노래할 수 없다. 이런 이유로, 세상 어디에서도 우리는 성령께서 다윗을 통하여 말씀하신 다윗의 시편보다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더 유익하고 더 적절한 노래를 찾을 수 없다. 그것은 성령께서 만드셨고 성령을 통해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시편을 노래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입에 당신의 말씀을 두셨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 마치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 안에서 당신의 영광을 찬양하기 위해 노래하고 있는 것 같은 확신을 갖게 된다.'xiv)

 

 

 

역사적으로 살펴본 시편 찬송

 

시편 찬송에 대한 칼빈의 관심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역사적 관점에 주의를 기울여 봅시다. 죤 칼빈이 예배 중에 시편 찬송만을 불러야 한다고 말했을 때, 이것은 전혀 새로운 시도가 아니었습니다. 놀라실 테지만 시편 찬송은 영광스러운 긴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구약의 시편은 노래하는 것을 목적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시편’이라는 표제는 ‘찬양의 책’이라는 뜻입니다. 시편 전체에 나오는 ‘셀라’라는 말은 음악적인 표현입니다. 삼하 6:5을 보면 예루살렘으로 언약궤를 옮길 때 이미 악기가 연주된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사밧이 자기 군대를 이끌고 전투에 나갈 때 시편을 찬송했습니다(대하 20:21). 이사야 선지자는 거룩한 절기에 노래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사 30:29). 에스겔은 성전 안뜰에 노래하는 자들을 두었습니다(겔 40:44). 여기서 불리던 노래는 모두 시편을 말합니다.

 

우리가 알기로는, 회당에는 노래가 없었습니다. 적어도 성경에 이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마지막 유월절을 보내시면서 시편을 찬송하셨습니다(마 26:30). 이 찬송(hymn)은 시편 113-118편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위대한 할렐xv)이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교회 가운데서 내가 당신을 찬양합니다”라고 표현했습니다. 이것은 회중 노래에 대해 언급한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에서 저지른 잘못은 “각자가 마음대로 시편을 노래했다”라는 것입니다(고전 14:26). 순서대로 회중이 같이 노래를 부를 때를 기다리는 대신에, 몇몇 교인들은 자기들 마음대로 시편을 노래했습니다.

 

교회는 ‘시편을 노래하도록’ 명령 받았습니다(엡 5:19과 골 3:16). 이것은 어떻게 예배에서 서로를 권고해야만 하는지에 대해 교회에게 준 교훈입니다. 약 5:13에서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라,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로 하여금 시편을 찬송하게 하라.” 이에 대해 기록된 예는 행 16:25에서 볼 수 있는데, 매 맞고 상처 난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서 시편을 찬송합니다.

 

이런 동일한 전통이 사도 시대 후 초대교회에서도 계속 이어졌습니다. 필립 샤프(Phillip Schaff) 박사는 ‘기독교회의 역사’라는 책에서xvi) 이 사도 시대 후 초대 교회 기간에는 찬송(hymn)이 없었고 오직 시편 찬송만이 있었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맥클린톡과 강력한, 성경적, 신학적, 교회론적 사이클로피디아’(McClintock and Strong, Biblical, Theological and Ecclesiastical Cyclopaedia)xvii)에는 찬송가에 대한 우수한 글이 실려 있습니다. 4세기의 교부인 크리소스톰이 한 여섯 편의 설교에서 모든 사람이 모든 장소에서, 모든 행사에 불러야 될 노래로 어느 성경책보다도 시편을 격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때 이단자들은 교회 안에서 찬송(hymn)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영지주의자들과 아리우스파, 도나투스파는 시편 찬송(psalms) 이외의 다른 노래(songs)를 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주후 360년 라오디게아 공의회에서는 교회 안에서 찬송(hymn) 사용을 금지할 것을 결정하기에 이르렀습니다.xviii) 오랜 암흑기 곧 5세기부터 16세기까지 시편 찬송은 수도원에 보존된 반면, 성당 미사에서는 성가(chanting)가 소개되었습니다. 종교 개혁의 새벽별인 위클리프(Wycliffe)와 후스(Huss)는 시편 찬송을 교회 안에 다시 소개했습니다.

 

종교 개혁 후, 시편 찬송은 뿌리를 내리고 유럽 전역 곧 프랑스, 스위스, 독일, 영국, 네덜란드, 스코틀랜드에 순식간에 퍼졌습니다. 시편 찬송은 화란만의 유산은 아닙니다. 정통 장로교의 표식은 교회 안에서 오직 시편만을 찬송하는 것으로 구별됩니다.

 

장로교의 이 유산은 미국에서도 계승되었습니다. 북미 연합 장로교회 공의회의 지시로 1905년에 두 번의 대회(처음엔 피츠버그에서 두 번째는 시카고에서)가 열렸는데, 두 모임 모두 예배에서 시편 찬송을 부르는 안을 통과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배에서의 시편 찬송’xix)이라는 책은 이 집회에서 행해진 강연 내용을 모아 놓은 글로서 시편 찬송에 대한 전 면모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주제를 가장 배타적이고도 철저하게 다룬 것이었습니다.

 

이런 일이 화란 교회에서도 있었습니다. 시편 찬송은 화란에서 최고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페트루스 단틴(Petrus Dantheen), 그리고 몇몇 사람들은 시편 운문을 다수 작곡하였습니다. 음악과 말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고 여기에서 잘 알려진 시편 찬송가가 작곡되었습니다. 1618-19년에 도르트 총회는 교회 헌법 69항에서 다윗의 시편 150편만이 교회 안의 유일한 찬송이 되어야 한다는 내용을 포함시켰습니다.xx) 그리고 다른 노래, 예를 들면 아침과 저녁의 찬송, 십계명, 마리아의 노래, 스가랴의 노래 등을 시편 찬송가에 포함시켰습니다. 그 이후 예배에서 찬송 (hymn)은 부르지 말고 오직 시편 찬송만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 논쟁을 불러일으키게 되었습니다. 네덜란드에서 국가 교회로부터 분리될 때, 1834년에 압쉘딩(Afscheiding)의 지도자들은 오직 시편만을 찬송해야 한다고 지지했습니다.xxi)

 

유사하게, 미국에서도 미국 개혁 교회(Reformed Church of America, RCA)에서 기독 개혁 교회(Christian Reformed Church, CRC)가 분리되어 나올 때 이들은 시편 찬송만을 부르도록 결정했습니다. 미국 개혁 교회는 예배 중 다른 찬송 부르는 것을 허용했고, 기독 개혁 교회는 그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예배 시간에 시편만을 찬송해야 한다는 것을 여전히 지지하고 있는 개혁 교회들과 장로교회들은 그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고 훌륭한 유산을 소유하고 있음을 자부하고 있습니다.

 

 

 

예배를 규정하는 원리

 

(생략) 전 시대를 걸쳐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만든 찬송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큰 축복이었습니다. 우리는 좋은 찬송을 알고 우리 가정과 학교에서 그 찬송을 즐겨 부릅니다. 예배 이외의 때 바치는 경배의 문제와 예배에서 어떤 노래를 사용해야 하나 하는 문제는 다릅니다.xxii)

 

죤 칼빈이 그 당시 교회에서(편집자 Sola 주: 이단 천주교를 말함) 그릇되게 드려지는 예배를 바라보며 합당한 예배가 무엇인가에 관심을 가졌음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기억해야 할 것은 칼빈 당시의 교회들은 큰 예배당을 건축하고 그것을 장식하는 데에는 지대한 관심을 가졌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의 영적 상태에는 관심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예배도 겉모양만 화려한 것이 그 특징이었습니다. 정교한 예배 의식, 잘 짜여진 성례전, 화려한 사제들의 옷, 이런 것들로 하여 예배는 전시회를 보여주는 것 같았습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스콜라 철학에 영향을 받아 그것을 설교에 적용했기 때문에, 성도들의 마음을 울릴 수 없었습니다. 기껏해야 성도들의 마음을 환기시켜 주는 정도였습니다. 앞에서 지적했던 것처럼, 성도들은 예배시간에 노래를 부를 수 없었고 훈련받은 성가 대원들이 그레고리안 성가를 불렀습니다. 예배로부터의 경건한 반응 보다 축제 분위기를 주는 오르간 연주는 건물을 더욱 우아하게 보이게 했고 외적 형식을 더 강조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개혁자들이 바른 것과 그른 것을 결정하는 어떤 방향, 즉 그 근거를 찾아내려 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 근거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배는 그 세세한 부분까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이 당신을 예배하기를 원하시는 방식에 따라서 결정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개혁자들은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성도들의 취향에 따라 결정되어서도 안 되고 인기 있는 어떤 방법에 따라 결정되어도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주권자이시며 만물의 창조주이시고 또한 보존자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모든 방식은 거룩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는 온 땅에게 침묵하라고 요청하십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는 하나님의 아드님께서 갈보리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셨을 때, 그 분의 인격 안에서 친밀하게 만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능력으로 세상을 통치하시고 말씀과 성령으로 교회를 다스리십니다. 그래서 위대하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당연히 당신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는 것이어야만 합니다. 존 칼빈은 전 생애를 바쳐 이 사실을 밝히기 위해 전력을 다했습니다. 모든 예배는 전능하신 주권자를 찬양해야 함과 동시에 당신의 백성들에게도 유익이 되어야 합니다. 올바른 예배는 하나님께도 영광을 돌리고 동시에 당신의 백성도 양육하게 됩니다.xxiii)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규정하는 예배 원리가 적용되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믿음을 결정짓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계시하신 것을 믿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고 계명을 지켜야 하는지 등 기독교인의 행동도 제시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또한 어떻게 하나님을 예배해야 하는지 그 세세한 내용까지 규정해줍니다. 이에 대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다음과 같이 아름답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본성의 빛(light of nature)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 하나님은 만물에 대하여 통치권과 주권을 행사하신다. 그는 선하시며, 만물에게 선을 행하신다. 그러므로 인간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를 경외하며, 사랑하며, 찬양하며, 부르며, 신뢰하며, 그리고 섬겨야 한다 그러나 참되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합당한 방법은 그 자신이 친히 정해 주셨으므로 그 자신의 계시된 뜻 안에서 한정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상상이나 고안, 또는 사탄의 지시에 따라 어떤 가견적인 구상을 사용하거나, 성경에 규정되어 있지 않는 다른 방법을 따라서는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다.'xxiv)

 

 

제 2계명에 대해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이 설명하는 부분에서도 이와 유사한 표현을 발견하게 됩니다.

 

'제 2계명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어떠한 형태로든 신의 형상을 만들지 말고 말씀을 통하여 명령하신 것과 다른 방법으로 그를 섬기지 말라는 것이다.'xxv)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명백하게 밝힌 대로 여호와를 예배하며 우리가 부를 수 있는 노래는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신 노래 곧 시편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하나님의 백성이 부를 수 있는 노래를 규정한다면, 우리는 당연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고 처음부터 교회가 불러온 노래인 시편을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에베소서 5장 19절과 골로새서 3장 16절에서 말하는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의 교회에게시편 찬송을 사용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 날에 다윗이 아삽과 그 형제를 세워 먼저 여호와께 감사하게 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여호와께 감사하며 그 이름을 불러 아뢰며 그 행사를 만민 중에 알게 할찌어다. 그에게 노래하며 그를 찬양하며 그 모든 기사를 말할찌어다”(대상 16:7-9).

그리스도께서도 유월절에 제자들에게 시편 찬송을 하게 하셨습니다(마 26:30).xxvi)

바울은 신약 교회에게 시편 찬송을 하라고 명령했습니다(엡 5:19,골 3:16).

 

엡 5장 19절과 골 3장 16에 대해 몇 가지 설명이 필요합니다. 이 두 구절은 무엇인가 유사한 점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찬송)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송하라”(골 3:16). 이 두 구절은 교회에게 말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개별적인 성도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에베소서에서는 우상을 예배하는 축제에 빠져 술이 취해 있는 자들과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모인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술이 취하여 재잘거리지 말고 오히려 성령 안에서 노래하라고 백성들에게 권고합니다. 골로새서에서도 3장 16절의 바로 앞 구절인 15절에서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말함으로 교회 안에서 다른 성도들과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골로새서 3장 16절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말씀은 골로새 성도들에게 설교된 말씀입니다.

골로새 성도들은 시편을 찬송함으로 그리스도의 말씀이 자신들 가운데 거한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고 알려줄 수 있었습니다. 성도 개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교회로서 골로새 성도들은 시편을 찬송했습니다.

 

여러분은 이 구절들이 정반대의 사실을 가르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의구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 두 구절은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Psalms, hymns, and spiritual songs)에 대해 말합니다. 이 삼중적인 표현을 이해함에 있어 논쟁과 해석의 차이는 끊임없이 있어왔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차이점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이 삼중 구조가 세 가지 다른 주제(subjects)를 말하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제롬과 다른 교부들). 곧 이들은 시(Psalms)는 윤리적 주제를 다루는 것이고 찬미(hymns)는 하나님의 신적인 장엄함을 다루는 것이고 신령한 노래(spiritual songs)는 자연과 세상에 대한 주제를 다룬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다음으로, 이 삼중 구조는 세 가지 다른 형식(forms)을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어거스틴과 힐러리).

 

곧 이들은 시는 악기로 연주하는 것이고 찬미는 목소리로만 찬송하는 것이고 신령한 노래는 짧은 탄성으로 외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삼중 구조는 세 가지 다른 원전(sources)을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베자와 그로티우스).

 

곧 시는 구약의 수집물이고 찬미는 사가랴의 노래와 마리아의 노래와 같은 여러 찬송들을 수집한 것이며 신령한 노래는 노래를 위해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우리 개혁파는 이 삼중적 묘사를 다윗의 시편에 대해 언급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이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는 모두 시편의 명칭입니다. 다음 다섯 가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첫째, 만일 바울과 성령님께서 마음속에 시편 외에 다른 노래를 생각했다면, 그것은 어떤 노래였을까요? 그 당시 교회 안에 다른 노래가 없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증명된 사실입니다. 그 당시 소위 말하는 마리아의 노래와 같은 그런 노래들은 없었습니다. 그것은 훨씬 뒤에 노래로 만들어졌습니다. 바울 서신에서 마음에 의도하는 송시나 노래가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완전히 추측일 뿐입니다.

 

둘째, 바울이 이미 있는 노래를 언급한 것이 아니라 교회에게 새 노래를 만들라고 말하고 있다고 해석한다면 이는 성경의 의미를 왜곡시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교회에게 교화와 훈계의 목적으로 그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사용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셋째, 찬미로 번역된 이 단어는 신약의 마태복음 26장 30절에서도 사용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에 시 113-118의 할렐을 노래했다는 사실은 논쟁의 여지가 없습니다.

 

넷째, ‘신령한 노래’라는 명칭은 일반적인 의미로서의 영감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성령께서 영감 하신 노래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명칭은 테이어, 크렘머, 로벗슨과 같은 희랍의 대가들에 의해 주어진 명칭입니다. 성령께서 교회에게 주신 노래가 무엇입니까? 오직 한 가지 시편뿐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시대에 있었던 성경은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 성경입니다. 이 70인역 성경에서는 각각의 시편에 표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표제는 영감 된 성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추가된 명칭으로서 초대 교회가 인정한 것입니다.) ‘시’(Psalms)라고 기록되어 있는 시편은 67개이고 6개의 시편 위에는 ‘찬미’(hymns)라는 표제가 붙여져 있고 35개의 시편 위에는 ‘신령한 노래’(spiritual song)라고 씌어 있습니다. 나머지 시편들은 이 명칭들 중 한 가지 이상 결합된 것입니다.

 

왜 시편이 각각 그런 명칭을 가지게 되었는가 하는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시’는 가장 넓은 의미로 사용되고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그에 대한 우리의 반응을 나타냅니다. ‘찬미’는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영혼을 고양시키고 ‘신령한 노래’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생활 영역에서 얼마나 중요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표현합니다.

 

예배를 포함한 모든 생활의 영역에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규정되는 원리로 개혁 교회들은 초대 교회의 모범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의도하셨던 시편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골 3장 16절에서 말하는 대로 시편은 우리를 가르치고 훈계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 목적으로 우리에게 시편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시편의 적합성

 

때때로 신약 교회에서 시편 찬송을 계속해서 부르는 것이 적절한가 하는 문제가 제기됩니다. 이 문제는 구약의 하나님을 보는 입장과 신약의 하나님을 보는 입장이 다르기 때문에 생기는 오해입니다. 이런 견해는 ‘기쁘다 구주 오셨네’와 ‘주 달려 죽은 십자가’라는 찬송을 작사한 이삭 왓스라는 사람이 취하는 입장입니다. 그는 시편 찬송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복음 정신에 거의 반대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교회를 위하여 만들어지지도 아니한 시편 찬송을 마치 유일한 찬송인 것처럼 여기고 있다. 시편에는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노래하기에 적당하지 아니한 구절들이 많이 있다. 시편 13, 16, 36, 68, 69, 109편을 보면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을 따르지 못하게 막는 저주들로 가득 차 있다.' (예배에서의 시편 찬송, p. 472, index p. 570.)

 

그렇지 않습니다. 시편에서는 분명 한 분이신 참하나님을 계시하고 있습니다.

불의 한 자들에게는 맹렬한 진노로, 구원하시는 하나님으로서는 은혜와 자비로 나타나십니다.

 

구약 성경이 그리스도를 볼 때 신약교회가 알아볼 수 없고 신약시대에 부적합한 분이라고 했습니까?

오늘날 교회가 시편 찬송을 사용해야 한다는 사실에 반대하는 가장 흔한 비난은 이것입니다.

그러나 주의 깊게 시편을 연구한다면, 완전히 다른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성령께서 바울을 통하여 교회에게 시편을 노래함으로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가운데 거한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셨을 때(골 3:16), 성령께서 바르게 지적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시편이 당신께 대해서 말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제자들에게 시편을 자주 인용하셨습니다.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눅 24:44). 실로 시편은 그리스도에 관하여 말합니다. 그리스도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들은 시 16, 18, 21, 61, 72, 118편 등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삼직 곧 선지식(22편), 제사장직(110편), 왕직(2편)에 대해 노래한 시편들도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설명하는 시편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90편은 주님의 영원성을 노래하고 40편과 22편은 성육신, 22편은 거부당하심, 8편과 118편은 승리의 입성, 41편은 매 맞으심 22편은 십자가에 달리심, 31편은 그 분의 죽음, 60편은 부활, 16편은 승천 50편과 72편과 98편은 심판을 위해 다시 오심을 노래합니다. 이 시편의 예언적 특성은 신약 교회에 결코 부적합한 것은 아닙니다. 시편은 자주 그리스도의 사역을 이미 성취된 것으로 기록했습니다. 그리하여 항상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으로부터 그리스도의 영원한 왕국이 설립될 세상의 끝에 위엄있게 다시 오실 그때까지의 교회를 높여 노래합니다. 하늘에서조차 우리는 모세와 어린 양의 노래를 부를 것입니다(계 15:3).

 

시편 찬송이 오늘날 사용하기에 적합한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성령께서 시편 기자들의 삶에 이런저런 방식으로 역사하셔서 기자들 자신의 내적 열망, 죄로 인한 슬픔, 용서를 위한 부르짖음, 하나님을 향한 소망을 시편들에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분명히 예배가 경배와 교화를 위한 것이라면, 시편은 하나님께 정당한 자리를 내드리게 합니다. 왜냐하면 시편은 하나님을 보여 주되 하나님을 향한 주관적이고 감정적인 신뢰할 수 없는 경험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참 하나님을 칭송하며 회개와 찬양 가운데서 무릎을 꿇게 하기 때문입니다. 시편은 또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품을 수 있는 깊은 감정을 표현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정서는 단순히 사람에게서 흘러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합당한 만남 가운데서 나오는 참된 감정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가 시편에서 표현한 슬픔과 고통과 멍에가 우리의 것으로 느껴집니다.

 

이런 감정들의 원인을 사람에게 두지 않고 하나님께 두기 때문에 그 감정들은 참되고 올바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도록 부르짖음으로써 우리는 여호와께로 올라가며 그리스도 안에서 여호와의 자비를 목격합니다. 공의를 취소하시지 않는 여호와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 당신 자신의 아들 안에서 이루어지는 그 사랑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 자녀들의 이러한 부르짖음은 하나님의 아들의 신음하는 소리와 합해져 만군의 여호와의 귀에까지 상달됩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주권자이십니다.

 

만일 시편 노래 부르기를 억제한다면, 이는 성령의 사역을 제한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만일 성령께서 시편을 영감 하셨다면, 성령께서 교회에 적합한 노래를 작곡하도록 다른 사람들을 사용하실 수 없다는 뜻입니까? 이렇게 작곡된 노래는 다른 종류입니다. 재능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기독인의 고양된 감정을 노래로 썼을지도 모르며 성경 구절을 음악화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배에서 이렇게 작곡된 노래를 사용할 수 있습니까?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알아두어야 할 것은 우리가 노래하는 노랫말 그 자체는 영감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개혁자들과 다른 사람들이 시편에 곡을 붙이고 작시를 한 것은 그 역사가 오래되었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잘 만들었고 어떤 사람들은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이 영역에서 개선과 재평가의 여지가 여전히 있습니다. 요점은 이것입니다. 곧 시편 찬송에 성경의 다른 주제나 구절을 추가해도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시편 찬송에 다른 성경 구절을 음악화하여 추가하려는 것은 매우 매력 있는 생각입니다. 이것은 교회에 찬송(hymns)을 유입한 한 방법입니다. 이 문제를 다룸에 있어 성령의 사역을 제한한다는 관점에서 이 문제에 접근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교회에 재능 있는 사람을 주셔서 그들로 하여금 찬송을 작곡하도록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더 기본적인 것입니다. 성령께서 이미 그런 식으로 사람을 인도하여 시편과 같은 찬송책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우리가 적절하지 않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만일 성령께서 신약 교회에도 다른 찬송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셨다면, 우리에게 구약 시대에 시편을 주신 것처럼 다른 찬송책을 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실제로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보다 더 지혜로워지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만일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예배를 규정하는 원리에 충실하려고 한다면, 그런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예배를 위해서 시편을 노래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시편 찬송이 주는 유익

 

하나님의 선물로 교회에 시편 찬송이 주어진 사실에 감사합시다. 또한 하나님께서 개혁자들을 사용하여 다시 시편 찬송이 회복된 사실에 감사합시다. 시편을 찬송하는 것은 참으로 복된 일입니다. 시편 찬송을 부르는 전통이 없는 신자들이 우리와 같이 예배드리면서 시편 찬송을 소개받았을 때 그들이 보인 반응은 과거에 불러왔던 찬송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에 좌절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시편 찬송을 제대로 평가하게 되고 예배에서 시편 찬송을 계속해서 불러야 된다고 주장하는 가장 강력한 지지자들이 되는 것을 보았을 때, 저는 개인적으로 얼마나 위로를 얻었는지 모릅니다. 이 시편 찬송이 너무나 친근한 나머지 우리나 우리 자녀들이 이런 훌륭한 상속에 대해 무심하게 대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예배에서 이런 의미 있는 시편 찬송과 같은 노래를 여전히 부를 수 있는 축복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야 할 것입니다. 진실로 열정을 가지고 칭송하는 마음으로 이 시편들을 노래합시다. 우리가 이 시편 찬송 노래를 교회 예배 시간에만 제한하지 맙시다. 우리가 이 시편을 가정과 학교에서도 노래하면 할수록 우리 자녀들은 더욱 더 이 시편과 친근해질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은 자기들이 잘 아는 노래를 부르고 싶어합니다. 야고보를 통해서 성령께서 하신 말씀은 여전히 사실입니다.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찌니라”(약 5:13).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서 음악적인 재능이 있는 사람들을 길러내셔서 작사와 작곡을 정확하게 할 수 있게 하신다면, 이 면에 있어서 발전의 여지가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옛 노래를 새로운 곡조로 배우기 원하면, 그렇게 할 수 있지만 오직 이 일을 행함에 있어서 조심스럽게 해야 할 것입니다. 화란 개혁자들은 화란 시편 찬송을 사랑하였습니다. 많은 조상들이 밤에 경비를 서면서 이 시편 찬송을 불렀고 죽음에 임한 침상에 누워서도 이 시편 찬송을 불렀습니다. 영어로 된 아름다운 시편 찬송도 있습니다. 이 시편 찬송은 잃어버릴 수 없는 영적 생명의 한 부분이 될 것입니다.

 

유산은 전통과 혼동되어서는 안됩니다. 전통주의자들은 단순히 변화를 거부하기 때문에 과거에 의존합니다. 만일 시편 찬송을 유산이라고 생각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것으로서 시편 찬송을 잘 보존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편 찬송이 각 세대에 적절하게 개작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성령의 사역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더욱 더 열심히 시편을 노래합시다. “오 하나님, 나의 확고한 마음이 곡조 있는 현으로 멀리 당신을 찬양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새벽이 나의 노래를 들을 것입니다. 내가 당신을 오래도록 찬양합니다. 당신의 백성들이 모인 곳에서 감사드립니다.” 시편을 찬송함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릴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시기 바랍니다.xxvii)

 

 

 

i) The Psalms in Worship, 1907; The United Presbyterian Board of Publication, page 486, 487; Lecture by Rev.T.H.

Hanna on Specimens of Eulogies on the Psalms.

ii) 번역자 주: 예배는 그리스도인이 구원받은 목적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경배하고 찬송하는 행위는 예배인데, 이를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창세 전부터 택하시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십니다(사 43:21 엡 1:12 계 4:11). 그래서 예배는 성도가 하나님의 영광을 인정하고 자신의 마음을 낮추어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인데, 이때 찬송을 통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기리고 높이게 됩니다.

iii) Ibid. p. 495.

iv) John Calvin, Preface to the Genevan Psalter.

v) 번역자 주: 시 90편을 말합니다.

vi) The Psalter, copyrighted by the united Presbyterian Board of Publication, 1912, published by Wm. B. Eerdmans Publishing.

vii) 번역자 주: 예배와 관련하여 교회가 지켜야 할 중요한 원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배는 ‘성경에 계시된 원리’에 따라 드려져야 하는 원리입니다. 인간 쪽에서 일방적으로 드리는 데서 예배의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이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요 4:23-24).

예배는 첫째,진실한 인격으로서 드려져야 하며,

둘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내신 구속의 진리를깨닫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에 근거에 따라 드려져야 합니다. 성경을 제대로 깨닫게 된 개혁자들은 예배의 원리를 진술했는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21장에 잘 진술되어 있습니다.

특별히 5절에서 찬송을 할 때 시편을 노래하라고 한 부분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viii) 번역자 주: 끌레멍 마로(Clement Marot)는 칼빈을 도와 13곡의 찬송을 작곡했고, 이후 칼빈이 추방지로부터 다시 돌아왔을 때, 49곡의 시편을 작곡하였습니다. 이후 베자가 이 일을 계속했고, 마침내 1562년 봄에 시편 전체에 곡을 붙인 찬송가가 출판되게 됩니다.

ix) John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Book Ⅲ, chapter 20, section 31.

x) 번역자 주: 즐거워하는 행위 그 자체를 자제시킨다는 뜻입니다.

xi) 번역자 주: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xii) John Calvin, Preface to the Genevan Psalter.

xiii) John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Book Ⅲ, chapter 20, section 32.

xiv) John Calvin, Epistle to the Reader, June 1543.

xv) 번역자 주: 유월절, 오순절 등 절기 때 부르는 노래를 Hallel이라고 합니다.

xvi) Phillip Schaff, History of the Chistian Chrurch, Vol. Ⅰ, p.463

xvii) McClintock and Strong, Biblical, Theological and Ecclesiastical Cyclopaedia, Vol.8, page 735.

xviii) 번역자 주: 이 글에 나오는 ‘hymn'은 모두 찬송으로 번역하여 시편 찬송‘과 구별합니다. 이렇게 교회 초기 시대 때부터 사람들이 사적으로 노래를 지어서 하나님을 찬양하였던 것을 보게 되는데, 이는 이미 이때부터 예배의 타락이 이런 식으로 시작되었다는 의미입니다.

xix) The Psalms in Worship see above.

xx) Viewpoint expressed by Rev. D. Engelsma in an excellent series of articles on Music in the Church Published

in the Bacon Light, a magazine for Protestant Reformed youth. February, March,April 1983.

xxi) 번역자 주: 찬송은 음악이 주가 아니고, 음악은 가사를 표현하는 보조 수단입니다. 하지만 로마 카톨릭 교회에 의하여 주객이 전도되는 기이한 현상이 나타나 교회의 찬송은 극도로 타락하게 됩니다.

따라서 종교 개혁 당시 화란 총회는 오르간을 교회당에서 퇴출시키기로 결의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지금도 이런 정신은 진정한 개혁파 교회에서는 생명처럼 지켜집니다. 가령 캐나다 개혁교회의 경우 교회 헌장 55조에서 “총회에서 채택한 운율에 따른 시편과 총회에서 승인한 찬송을 예배의식에서 불러야 된다”고 못박아 놓았습니다.

xxii) 번역자 주: 예배에서 부르는 노래와 일반적으로 가정과 학교에서 부를 수 있는 노래를 구분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예배에서는 시편만을 노래해야 하고 예배 외에 가정과 학교에서는 찬송도 부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찬송을 아예 부를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충분히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개혁주의 교회 내에서도 찬송은 부릅니다. 그러나 예배시간에는 시편만 노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차이점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xxiii) 번역자 주: 칼빈은 기독교 강요 4권 10장에서 그릇된 예배의 세 가지 유형을 소개하였습니다.

첫째는 사람의 생각을 가르치는 예배입니다(24). 이는 사람의 계명을 가르치는 예배(마 15:9, 사 29:13-14),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가르치는 예배(골 2.4-8)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빙자하여 실질적으로 그 시대의 정신과 민족적 전통, 또는 교파적 전통(장로의 유전) 등 인간의 생각을 가르치는 왜곡된 예배입니다. 그는 특별히 골로새서 2:23의 ‘자의적 숭배’를 가장 전형적인 그릇된 예배로 규정하였습니다.

그들은 혹독한 금욕주의를 실천하는 종교적 철저성을 보여주지만, 그것이 전혀 주님의 명령이 아니라 스스로 만든 종교성입니다. 자기의 종교성과 영성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추구하는 종교적 노력과 예배행위는 그것이 아무리 철저하고 인간적으로 존경스럽다 할지라도 하나님에게는 그릇된 예배인 것입니다. 그것은 그 시대인들의 종교적, 정서적 필요를 충족시키고, 그 민족의 종교적 전통을 반영하며, 그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킨다 할지라도, 올바른 예배가 아니며 인간중심적인 자기예배일뿐입니다.

 

둘째는 바리새인의 예배입니다(26). 칼빈은 ‘바리세인의 누룩’(마 23:3, 16:6)을 조심하라고 경계한 예수님의 말씀을 상기시키면서, 율법의 해석자로서 모세의 자리에 앉아 권위를 주장하며 무리한 실천을 강요하고, 스스로 본을 보이지 않으면서 지식만 팔고있는 삯군이 인도하는 예배가 바로 그릇된 예배라고 규정합니다.

예배를 좌우하는 것은 예배 인도자라는 점에서, 이 지적은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거나 경배하지 않는 형식적이고 지식적인 차가운 죽은 정통의 예배가 여기에 속합니다.

셋째는 연극적 예배입니다(29). 분위기와 의식은 우아하고 화려하며 음악과 설교는 장엄하지만, 인도자는 연극 배우와 같이 연기를 하고 신의식과 외경심이 결여된 멋있는 예배입니다. 교인들은 예배를 즐기지만, 하나님과의 만남은 없습니다. 정열적이고 감성적인 예배이지만, 연극을 관람하거나 음악회에 참석하거나 감동적인 영화나 드라마를 보거나 명강의를 들은 것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순간적인 엑스타시가 있지만, 삶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고 그 경험 자체를 소중히 생각하고 흠모할 뿐이며, 그 체험은 마음의 열기를 고조시키는 종교심리적 조작에 의한 유사경험일 뿐입니다. 칼빈은 이러한 거짓 예배를 교회에서 정화하기 위하여 성상철거, 미신타파, 단순한 성경적 예배로의 복귀, 말씀에 대한 강조, 예배자가 이해할 수 있는 서민적 언어사용을 통하여 경건하고 순수한 영적 예배를 드림으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xxiv)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 21장 1항.

xxv)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 35주일 96문.

xxvi) 번역자 주: 이에 저희가 찬미하고 감람 산으로 나아가니라.

xxvii) 번역자 주: 하나님은 바른 찬송을 기대하십니다. 올바른 찬송은 예배와 방불한 것이요, 곧 예배 행위가 됩니다. 왜냐하면 올바른 찬송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제물로 취급되기 때문입니다(시40:3 69:30-31 히 13:15-16).

 

제네바 시편찬송 23편 (1604년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