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찬송

시편찬송 곡조의 기원과 형식

Sola. 2023. 9. 12. 06:00

 

시편찬송 곡조의 기원과 형식

 

2003년 8월 18일 언약학교 여름(시편공부2)

 

 

이 글은 "Fulfil Your Ministry"에 실린 K. Deddens의 글 “멜로디의 기원”을 언약의 자녀를 위하여 바꾸어 쓴 것입니다.

 

시편의 곡조의 짧은 역사

 

마땅히 하나님을 찬양하고 믿음이 강해지며,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와 자비를 얻도록 하기 위해서 시편은 다시금 주님의 백성들의 입에 담겨야 했습니다. 이것은 처음 구약 백성에게 주셨을 때부터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성신님께서 보존하여 남기신 시편의 찬송이 다시 교회의 모든 회중의 입에서 불려지도록 크게 봉사한 사람은 칼빈이었습니다. 칼빈은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들어 올리고 주님의 이름을 높이기 위하여” 시편을 모든 시대의 온 교회가 다함께 부르도록 봉사하였습니다.

 

스트라스부르크에서 교회의 온 회중이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며 시편을 찬송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마땅히 찬송을 받으셔야할 하나님께서 친히 자기 백성의 입에 주신 시편이 오랜 침묵을 깨고 자기 백성들의 입을 통하여 하나님께 돌려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만일 백성들이 침묵한다면 돌들이라도 소리를 지르며 하나님을 찬미해야 마땅한 일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백성들이 땅에서 하나님을 높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의 승리입니다. 십자가의 승리입니다. 그러나 칼빈의 봉사로 빛나게 된 이 승리는 계속해서 승리로 이어져야 합니다. 주님이 왕으로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계속되어야 하며 돌들에게 그 영광을 빼앗기지 말아야 합니다. 백성들은 계속해서 순종함으로 승리의 깃발을 휘날려야 합니다. 그리하여 풍성한 은혜를 입어야 합니다.

 

시편을 사람의 입에 두기 위해 곡조가 필요했습니다. 이런 필요를 느낀 칼빈과 많은 종들은 시편에 곡조를 붙여 주님의 백성들의 입에 친근해지도록 많이 수고하였습니다. 비록 어떤 곡들은 오늘 우리에게까지는 전해지지 않았을지라도 당시의 백성들은 그 곡조로 그 시대에 돌려드려야 할 하나님의 영광을 그들의 목소리로 돌려드렸습니다. 프랜시스1세의 궁정시인인 클레멘트 마롯, 스트라스부르크에 마티아스 크레이터, 데오도루스 베자, 그리고 칼빈.... 이들의 봉사가 컸습니다. 이렇게 해서 마침내 1562년 봄에 시편 찬송집이 완성되었다. 이 과정에서 20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다 완성되지 못하였던 기간 동안에는 부분적으로라도 시편을 책으로 출판하여 교회에서 불렀었습니다. 이제 곡조에 대해서 생각해봅시다.

 

 

 

곡조에 대한 어떤 주장

 

칼빈의 제네바 시편의 곡조는 종교개혁 당시의 유행가나 거리의 노래에 그 뿌리를 두었다는 주장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요수아 판 이페른 목사는 마롯과 베자의 시편이 본래 유행가와 거리의 노래를 사용해서 불려졌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런데 시편의 곡조에 관한 개혁교회의 연구결과들은 그 곡조의 기원이 심지어 회당의 노래와 구약 계시의 시대에 성전에서 불렀던 찬송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사실을 증명하였습니다. 결코 사람이 좋아하고 즐겨부르는 그런 곡조를 사용하지 않았던 것은 아주 분명한 사실입니다.

 

칼빈은 첫째로 가사와 곡조는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둘째로 칼빈은 초대교회와의 관계를 유지하고 계승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원칙으로 볼 때 칼빈이 당시에 유행하던 사람들의 기분에 맞는 천박한 곡조를 사용했을 가능성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오래도록 시편의 가사는 유행가의 방식으로 지어졌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지금도 죄인의 감정을 자극하는 박자가 강한 노래를 가지고 찬송을 하려고 하는 유혹들이 있습니다. 이런 찬양의 목적은 언제나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려는 것입니다. 제네바 시편찬송의 곡조의 기원이 왜 중요합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부르는 시편의 곡조는 이런 유행가와 그 동기와 기원이 달라야 합니다. 우리의 곡조는 하나님의 왕국의 백성들이 발전시켜왔던 그런 음악의 정신을 따라야 마땅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제네바 시편의 곡조는 사탄의 왕국과 대립하여 싸운 하나님 나라에서 사용된 음악의 중요한 장르이므로 우리에게 중요합니다.

 

 

 

유행가로 하나님을 찬송할 수 없다

 

먼저 거리의 노래, 유행가의 곡조로 하나님을 찬송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또는 지금 한국의 교회들에서 부르는 그런 복음성가의 곡조에 시편을 붙여서 부를 수는 없습니까? 실제로 시편의 가사를 복음성가에 붙여서 부르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제네바 시편이 우리에게 남겨준 곡조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일반적으로 노래 특히 유행가는 근본적으로 그 목적과 목적을 위해서 사용하는 방식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습니다. 세상에서 부르는 모든 노래는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오늘날 유행가들은 인기를 가장 중요시 하는데, 말하자면 어떤 노래가 가장 많은 사람을 기쁘게 해줄 수 있는가를 그 노래를 만드는 목적으로 삼습니다. 그러므로 그 노래에 사용하는 곡조는 그런 목적을 위해서 사용됩니다. 꼭 무엇이 옳고 나쁘고를 따질 것 없이 그냥 듣기 좋으면 그것이 유행하는 것입니다. 물론 가사도 사람을 기쁘게 하는 내용으로 가득합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노래에 사용된 곡조와 가사의 최종적인 목적이라면 거기에는 아무런 제한을 두지 않게 됩니다. 사람을 감동시키고 즐겁게 할 수 있는 모든 기교와 재료를 다 사용해야 합니다. 악기도 음색도 가사도 사람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됩니다. 거기에는 아무 제한이 없습니다. 그 목적을 위하여는 절제할 이유가 없습니다. 만약에 유행가가 그것을 부르는 사람에게 흥분하지 말고 너무 기뻐하지 말고 절제하라고 요구하고 긴장을 요구한다면 아무도 그런 노래를 부르지 않을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거리의 노래는 사람의 마음을 흥분시키고 자극과 재미와 감동과 위로를 주어야 합니다. 거기에는 아무런 절제도 없어야 합니다. 실제로 거리의 노래에는 사람을 기쁘게만 할 수 있다면 아름다움이라는 기본적인 개념까지도 깨뜨립니다. 요즘에는 더 이상 아름다운 노래, 아름다운 가사는 젊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습니다. 거기에는 아무런 제한이 없습니다. 이것이 모든 시대의 유행가가 가지는 곡조의 정신입니다.

 

그러나 찬송은 사람의 기쁨을 위해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있습니다. 부르는 사람은 그 찬송으로 자기를 기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부르고 싶은 곡조여서, 가사가 마음에 들어서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찬송에는 우리가 반드시 준수해야 할, 지나쳐서는 안되는 당위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불러 영광을 받으실 만하게 하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이런 목적을 위해서 노래를 부르기 때문에 거기에는 반드시 사람의 감정을 절제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 절제라는 것은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고 거기에서 자신의 즐거움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 긴장의 자세를 말합니다. 사람들은 아름다운 곡조에 또는 리듬에 쉽게 반응하고 흥분하게 됩니다. 여러 연구에 의하면 음악이 경쾌하고 힘차면 사람이 평소보다 더 힘을 내게 되고 그런 음악을 들으며 운전을 하면 교통사고율이 더 높아진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의식하든 무의식이든 음악의 곡조는 사람의 감정에 스며들며 큰 영향을 미칩니다.

 

음악이 운전에 영향을 미친다면 이 음악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에도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음악 자체가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도록 우리에게 도움을 줄 수는 있고, 따라서 하나님을 찬송하는데 방해의 요인이 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편찬송에는 하나님을 찬송하는 우리를 위하여 곡조를 사용할 때에 고도의 절제가 필요한 것입니다. 마치 학교 주변의 도로에 만들어 놓은 요철들이 운전자가 제 마음대로 차를 빨리 달리지 않고 서행을 하도록 도와주듯이 말입니다. 이처럼 제네바 시편은 이런 요철과 같은 것이 그 곡조에 가득합니다. 그러면서도 그 음색은 하나님이 주신 음악적 재능을 잘 살려야 했습니다. 이런 재능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에 아름다운 음색을 지어내는 것은 성도의 책임입니다. 격조있고 고급한 음악이어야 하지만 그러나 사람의 즐거움이나 영광을 위해서 부를 수 없는 것이므로 고도의 절제가 요구되는 것입니다. 교회에 적합한 음색, 하나님의 영광을 잘 드러내는 음색이어야 합니다. 음악적인 기교는 사람을 즐겁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는 기교 대신 단순함을 선택하여 감정의 절제를 요구하였습니다. 그런 절제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노래하고 있음을 기억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제네바 시편에 나타난 절제

 

음악에서 모데라토(Moderato)는 보통빠르기, 적당한 속도로 부르라는 용어입니다. 지나치지도 않고 적당한 속도로 부르는 것은 거기에 감정적인 절제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제네바 시편의 곡조는 속도에 있어서만 아니라 사람의 감정을 자극하여 찬송을 방해하지 않도록 절제를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이런 절제가 없으면 아름다운 곡조에 자극을 받아서 한 곡조의 아름다운 노래를 불렀다는 감정이 마음을 더 지배하게 됩니다. 비록 정신을 차리고 찬송을 하였다고 할지라도 훨씬 방해를 받을 가능성이 많게 되는 것입니다. 강렬한 곡조는 가사보다 더 강한 인상을 남기게 됩니다. 복음송이나 요즘의 경배송은 늘 바뀝니다. 유행을 따라 변한다는 말입니다. 요즘에 유행하는 경배송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유행한다는 것은 사람의 취향이 변한다는 뜻이고 결국 찬송을 하는 사람이 그 노래를 좋아하는지를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시간이 흘러서 인기 경배송이 바뀌었다면 그것은 새롭게 사람에게 인기를 끌었다는 의미이지 하나님께 인기가 있는 찬송이 되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찬송에 있어서 명분은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사람에게 인기를 끌어야만 사람의 정서에 맞아떨어져야만 비로소 부릅니다. 노래는 사람을 섬기고 비로소 사람은 자기의 기쁨을 위해 하나님을 노래를 합니다.

 

이렇게 인간의 전적인 부패를 믿는 개혁자들은 곡조에 절제를 요구하였으며 그래서 고상하게 격에 맞게 가장 아름다운 곡조로 하나님을 찬송하면서도 사람이 그것으로 자기를 즐겁게 하지 않도록 배려하였습니다. 이것은 음악적 재능이 있다고 되는 일이 아니고 쉬운 일도 아니며 취미로 할 수 있는 일은 더더욱 아닙니다. 보편교회의 복지를 위한 위대한 보편적인 봉사였습니다. 단지 당시 개혁시대의 교회만을 위한 봉사가 아니었습니다.

 

 

 

절제된 곡조가 주는 기쁨은 어디에 있나

 

그러면 시편을 노래하는 언약의 자녀의 진정한 기쁨은 어디에 있습니까? 곡조를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작곡하지 않았다면 사람은 그 노래를 하는 동안에 무엇으로 즐거움을 얻을 수 있습니까? 사람의 감정을 향해서는 절제와 적당함을 중시하고 절제를 요구하며, 멋진 곡조로 노래하고 싶은 욕망을 절제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시편찬송에서 기쁨과 위로를 얻습니까?

 

시편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부르도록 주신 것이며 백성들은 이 찬송을 통해서 큰 위로와 기쁨을 얻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시편은 직접 사람에게 위로를 주는 그런 방식으로 위로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섬김으로서 위로를 얻습니다.

 

부모가 우는 아이를 위로하기 위해서는 아이가 원하는 것을 들어줍니다. 맛있는 것을 사주고 놀아주고 하면 아이는 위로를 얻습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 아이의 요구가 진정 자기에게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 결국 그런 위로는 어린 아이를 버릇이 나쁘게 하고 불행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도리어 아이는 부모를 기쁘게 하기 위해 순종해야 합니다. 그래서 부모가 기뻐하는 것으로 자기의 기쁨을 삼아야 합니다. 순종함으로 건강하게 자랄 때 부모는 기뻐하며 비로소 이것이 아이에게도 기쁨이며 위로입니다.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이 아이에게는 기쁨이 아닌 것 같으나 참된 위로와 기쁨은 거기에서 옵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하나님께 위로와 기쁨을 얻으려면 그 언약의 말씀을 따라서 하나님께 순종하여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무거운 짐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영광을 돌림으로 하나님의 기쁨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의 참된 기쁨입니다. 그러므로 많은 절제가 있는 시편이어서 그 곡조가 우리를 흥겹게 하지 않고 또 우리 역시 감정을 자극하며 기분을 좋게 하려고 해서는 안 되지만 이렇게 온전히 하나님만을 찬송하고 하나님의 존귀하심만을 노래하였을 때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실 때,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가장 크고 위대한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기쁨을 위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시편찬송에 절제를 요구하고 지나치지 못하게 감시를 아끼지 않는 것은 우리를 따분하게 하고 힘이 빠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의 기쁨과 즐거움에 참여하게 해줍니다. 자기에 대한 절제와 자기 감시로 두려우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 그를 찬양하는 것은 아름다운 곡조를 노래하는 즐거움을 얻으려는 것이 아니라, 위로와 용서와 자유가 위로부터 베풀어지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시편에 나타난 절제

 

우리는 시편의 곡조에서 여러 가지의 절제(Moderate)를 볼 수 있습니다. 칼빈은 이렇게 ‘적당해야 한다.’ ‘혹은 절제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통해서 세 가지를 감시하며 견제하였습니다. 첫째는 시편의 곡조가 그레고리안 성가처럼 화려하고 기교적이 되는 것을 감시하였습니다. 두 번째는 유행가와 같이 경박한 것도 감시하였습니다. 세 번째로는 찬송하는 가운데 감정이 동요되어 흥분하지 못하도록 감시해야 했습니다. 적당해야 한다는 말 Moderate의 의미는 바로 이런 감시를 통해 오직 하나님만이 높임을 받고 영광을 받으시도록 가사에 집중하게 하려는 절제라는 뜻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런 절제가 어디에 나타나고 있는지 조금은 소박하게 그리고 좀 쉽게 눈에 띄는 요소들만을 살펴보겠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바르게 이해한다면 이런 어렵고 낯익지 않은 시편곡조에 대해서 우리가 느끼는 어렵다는 느낌이나 지루하다는 느낌이 들 때마다 불평보다는 도리어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시편 찬송을 대하는 태도가 될 것입니다.

 

가장 눈에 띄는 절제는 쉼표에서 나타납니다. 이 쉼표는 유행가나 복음성가와 구별되는 두드러지는 점입니다. 일반적으로 노래에서는 쉼표를 사용하기를 극히 피합니다. 꼭 숨을 쉬려면 죽지 않을 만한 때에 알아서 쉬는 것이고 그것도 아주 재빠르게 호흡을 보충해야 합니다. 성악가들은 아주 짧은 시간에 충분한 호흡을 들이마시는 훈련을 합니다. 그리고 어떤 섹소폰 연주자는 한 곡이 끝나기까지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연주할 수 있는 특수한 호흡법을 사용합니다. 이런 정도로 음이 호흡으로 끊어지는 것이 사람을 감동시키려는 음악에서는 그리 좋아하지 않습니다. 호흡은 감정의 흥분을 절제하게 합니다. 쉴틈없이 음정을 이끌어 감동으로 이끕니다. 일반적으로 거의 모든 노래에 숨을 쉬어도 좋다고는 표시하지만 숨을 쉴 시간은 표시해 놓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각자 알아서 쥐도 새도 모르게 숨을 쉬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제네바 시편은 무려 이분쉼표만큼 길게 숨을 쉬라고 각 음절마다 표시를 해놓았습니다. 한 음절을 노래한 후에 이분쉼표(실제로는 한 박자 길이이지만) 만큼을 쉬고서 다시 다음 음절을 노래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근원적으로 감정이 동요되어 흥분되는 것을 감시하고 있습니다. 거의 모든 감정들이 각 음절이 끝나고 쉬면서 가라앉게 감시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므로 특히 예배시간에 시편을 노래할 때는 이 긴 쉼표를 무시하고 길게 끌면서 찬송하는 것은 적어도 권장할 만한 방식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길이만큼 침묵하고 쉬는 것이 쉼표를 둔 본의라고 생각됩니다. 쉬지 않으면 각 음절의 끝이 두배로 길어져서 오히려 늘임표가 붙는 셈이 됩니다. 그러면 일반적으로 찬송에서 한 음절이 끝나는 부분이나 중간에 늘임표가 있는 경우와 같이 도리어 절제의 효과 대신에 강조의 의미가 되게 됩니다. 이와 달리 시편의 쉼표는 감정의 고조를 막는 감시의 방편이므로 노래의 흥겨움은 훨씬 떨어지지만 칼빈의 중용, 절제, 감시의 정신을 존중한다면 음을 길게 끌지 말고 쉬는 것이 좋습니다. 쉼으로 우리가 일생동안 우리의 자신의 기쁨과 정서의 만족을 위해서 노래하였던 습관을 벗고 자신을 감시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만 찬송해야 하는 직무를 배우고 연습하는 것이 좋은 일입니다.

 

또 하나는 규칙적인 리듬감을 철저하게 억제한 것입니다. 노래에는 하나의 일정한 흐름이 있습니다. 4분의 4박자, 4분의 3박자와 같은 리듬의 일정한 방식이 있습니다. 한 음절이 일정한 길이로 “강하게 약하게 중간, 약하게” 또는 “강-약-약 중간-약-약”과 같은 다양한 규칙을 가지고 반복함으로 노래를 구성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학교종이 노래를 부르면 “학교종이 땡땡땡 어서모이 자”가 네 마디로 된 한 음절이 됩니다. 거기에 각 마디에는 4박자로 되어 있는데 거기에는 강 약 중간 약으로 리듬을 이룹니다. “학 교 종 이 / 땡 땡 때 엥” 이렇게 일정한 규칙이 노래 전체를 일정하게 흐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학교 종이 땡땡 친다는 가사만 아니라 “딴 따 단 따 / 딴 따 다 안” 이라는 하나의 리듬이 마음에 여운으로 남게 됩니다.

 

이런 노래에 있는 일정한 규칙으로 인해서 배우고 기억하기가 아주 편하고 또한 그런 리듬으로 인해서 마음을 흥겹게 해줍니다. 실제로는 가사가 말하려는 것보다는 곡조를 지배하는 리듬이 주는 감동을 더 쉽게 즐기게 됩니다. 가사는 지성을 사용하지만 리듬은 우리의 감성을 자극하기 때문에 훨씬 쉽게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랑하는 제네바 시편찬송은 어떻습니까? 리듬이 있습니까? ‘딴따 단따’ 라든지 ‘따안 따’ 하는 여러 가지 변화무쌍한 리듬을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가능한 규칙적인 반복들을 감지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우리가 불렀던 헌상송 중 하나의 리듬인데 맞추어보세요. ‘따 /따안 따/따안 따/딴---//따안따/ 따안따/ 따안따/ 딴---/따안따/ 따안따/ 따안따/ 딴---//따안따/ 따안따/ 딴---’ 여기서 어떤 리듬이 반복이 됩니까? 각 마디는 ‘따안따’라는 특징을 골격으로 가지고 전체적으로는 3-4-4-3의 형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곡조인지 맞추어보세요. “내 주여 내 모든 것....”입니다. 이런 리듬은 우리의 이성으로 감지하지 않아도 우리의 감성은 “좋다”는 식으로 반응을 합니다. 그래서 유별나게 좋아하는 노래가 되기도 하고 왠지 멀리하는 노래가 되기도 합니다. 배우기 쉬운 노래나 어려운 노래가 되기도 합니다. 여기에 좀더 변화를 주어서 지루함을 덜기 위해서 중간에 변박자도 넣기도 하고, 처음 시작할 때 못갖춤마디를 넣어서 ‘따안따’로 시작하지 않고 ‘따 / 따안 따...’라는 식으로 기교를 넣었지요.

 

이렇게 가장 흔하고 일반적인 방식에 비해서 제네바 시편은 8편을 예로 보세요. 각 음절의 길이도 서로 다릅니다. 전체를 지배하는 하나의 규칙이 없습니다. 제네바 시편은 전체가 하나의 일정한 리듬의 법칙에 통제를 받지 않습니다. 당연히 노래를 익히기가 배는 어렵습니다. 아까 찬송은 ‘따안따/ 딴--’이라는 특징이 전체를 지배하고 있지만 제네바 시편의 곡조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리듬을 좋아하고 흥겨워하는 사람의 감성을 철저하게 감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 8편에서도 어느 정도 리듬을 찾으려고 한다면 찾아볼 수 있겠지만 사람의 감성이 쉽게 파악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곡조가 리듬에 지배를 받지 않는 것입니다. 지배적인 리듬은 없고 곡조만 있는 셈이어서 철저하게 하나님께 돌릴 거룩한 가사를 위해서만 봉사를 하며 사람의 기분과 정서적인 만족을 위해서는 절제의 끈을 놓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가사 없이 아름다운 소리와 리듬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귀신이 아니고 인격신이십니다. 아름답게 찬송하고 즐거운 리듬으로 찬양하면 하나님께서 그런 요소들 때문에 즐거워하십니까? 제네바 시편찬송은 언약백성들의 마음을 리듬이나 노래하는 그 자체에 빼앗기지 않고 하나님을 높이는 심정을 품도록 돕기 위해서 감시하는 일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제네바 시편은 참으로 합당하고 위대한 찬송입니다. 사람이 그 노래로 인해 흥겹도록 돕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서 감정의 흥분을 감시하도록 돕는 곡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소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합니다. 그러나 제네바 시편의 감시를 받으며 오직 하나님을 찬양하는 가사에 열중한다면 우리는 이 찬송으로 거룩하고 유익한 봉사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영적인 유익 외에도 이 곡조를 사용함으로 칼빈과 종교개혁자들의 봉사에 함께 참여하는 것이며 구약에 기초를 두고 있는 곡조를 사용함으로 구약의 교회와, 종교개혁시대의 교회와 우리 사이에 연결고리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과거와 현제와 미래가 시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 앞에서는 현재입니다. 그렇다면 구약의 성도와 사도시대의 초대교회와 종교개혁시대의 교회와 오늘 우리가 바로 오늘 다함께 같은 곡조로(완전히 동일하지는 않을지라도) 같은 가사로 같이 감시를 받으며 오직 하나님 높이는 일에만 집중하여 찬송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정서와 입으로 부르기 좋은 노래보다는 역사적인 주님의 몸 된 교회가 불렀고 또 적당한 찬송이므로 한 언약 안에서 하나된 모든 시대의 교회가 일관된 곡조로 함께 부르는 것이 지극히 좋은 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제네바 시편찬송을 부름에 있어서 그것이 어렵고 잘 기억이 되지 않고, 뭔가 우리의 감각에 썩 어울리지 않는 듯이 여겨지고 어색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것이 옛날 노래여서가 아니라 사실은 사람을 즐겁게 하는 일을 철저하게 감시하고 우리에게 절제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좋은 곡조의 도움을 거절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칼빈과 그 동역자들의 거룩한 봉사를 오늘 감사하며 즐겨야 합니다. 시편을 찬송하면서 이 곡조에 불평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곡조가 자신을 즐겁게 해주지 않는 사실에 불평을 늘어놓는 대신 크게 감사합니다.

 

이 찬송이 절제와 감시를 늘 요구하므로 노래를 하는 감흥을 즐기지는 못하였지만 자비하신 하나님께서는 이 봉사를 통해서 이 시편으로 노래하는 자기 백성을 위로하시고 힘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이 곡조로 하나님을 경배하게 된 일을 성신님께서 주시는 은사로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시편으로 주시는 은혜를 풍성하게 누리면서 이 고난의 세상에서 순종의 시작을 날마다 계속해 나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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