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찬송

공예배 시에 시편찬송의 이해

Sola. 2023. 8. 22. 06:00

 

공예배 시에 시편찬송의 이해

R. Faber

 

클라리온에 실린 R. Faber의 글을 언약의 자녀를 위하여 이해하기 쉽게 정리하였습니다.

 

서론

 

공적인 예배시간에 우리는 시편을 찬송합니다. 왜 꼭 시편으로 하나님을 찬송해야 하며 그렇다면 그 시편을 어떻게 불러야 합니까? 그냥 교회에서 부르니까 부르는 것이어서는 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시편찬송은 오래 전 구약시대에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셨고 그것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게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필요가 있어서 다른 성경들과 함께 성신님께서 그것을 계시의 말씀으로 보존하여 두셨습니다. 구약의 백성들이 섬겨왔던 그 하나님을 동일한 원리에 따라서 섬기며 동일한 언약에 참여한 장래의 후손들을 위하여 성경 안에 시편을 포함하여 거룩한 유산으로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약의 언약백성들과 동일한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의 언약에 순종하여 사는 후손이라면 그 유산 가운데 시편도 함께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즉 노래할 말씀을 성경과 함께 받았으므로 성경을 읽고 배워야 할뿐만 아니라 노래해야할 막중한 책임을 동시에 물려받은 것입니다. 그 책임이라는 것은 단순히 시편의 가사를 가지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노래를 붙여서 불러야하는 책임입니다. 구약의 백성들이 시편에 곡을 붙여 부름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였듯이 계속해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서, 그리고 우리가 생명을 호흡하며 살고 있는 지금 이 시간에, 우리의 자비하신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의 입술에 담겨진 찬송을 통하여 빛나도록 해야하는 책임을 받았습니다. 시편을 유산으로 받음으로 우리는 가장 위대하고 합당한 방식으로 우리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자랑스러운 책임을 지게 된 것입니다.

 

현재 개혁교회들이 사용하고 있는 찬송의 책들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이들 중에서 가장 위대하고 탁월한 찬송의 책은 시편찬송입니다. 지금 개혁교회들에서 사용되는 찬송의 책에 수록된 시편찬송은 1561년의 제네바 시편찬송과 상당한 부분이 동일한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제네바 시편찬송이 형성이 되기까지 칼빈의 역할은 아주 컸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왜 시편을 찬송하려고 했고 어떤 원리에서 꼭 시편을 불러야만 했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 시편찬송책이 있다는 것은 알지만 이 찬송을 불러야하는 언약 자손으로서의 책임감을 느끼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여러 찬송책들 중의 한 종류 정도로만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의 학문적인 관심에서만 접근할 뿐입니다. 그래서 굳이 그것을 교회가 계승해야 한다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칼빈이 시편찬송을 받아들이게 되었던 원리에 대해서는 주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시편찬송이 오늘에 전승되기까지 원리와 과정을 살핀다면 그 시편으로 오늘도 찬송해야할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왜 히브리인의 시편찬송과 500년이나 묵은 그 곡조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감사하게도 우리 홈스쿨과 언약학교는 그 중요원리를 기쁨으로 받아들이며 배우려하고 그래서 시편찬송을 성신님께서 교회의 유산으로 남기셨다고 믿습니다. 언약의 자녀들에게 시편으로 찬양하도록 기쁨으로 가르치며, 이것은 참으로 즐겁고 대단히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성경에 근거함

 

주일에 드리는 공적인 예배시간에 부르는 시편찬송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왜 우리가 하나님을 반드시 예배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부모님께서 예배를 드리니까 따라서 드리고 그러다 습관이 되고 전통이 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옛언약과 새언약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옛언약과 새언약은 서로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옛언약 백성들과 신약의 새언약 백성들을 서로 나누지 아니하셨고 서로 다른 내용으로 언약을 맺지 아니하셨습니다. 구약의 성도와 신약 교회의 성도는 서로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백성들에게 요구하신 예배는 신약의 그리스도인들도 동일하게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구약시대에 택하신 언약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언약의 말씀으로 부르셨다는 것을 잘 압니다. 우리는 그들의 영적인 후손이며 같은 백성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하신 말씀을 그냥 옛날에 하셨던 이야기로만 듣지 않고 바로 우리에게도 예배하도록 요청하시는 말씀으로 인정합니다.

 

한 언약 안에서 부르셨기 때문에 이렇게 구약의 백성과 신약의 백성 사이에 하나가 되게 하셨다면 이제는 언약백성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에서 시편찬송이 얼마나 중요한 위치에 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 중요한 위치는 신구약의 언약백성과 오늘의 그리스도인들 모두에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누리며 살도록 도와주는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과의 관계라고 한다면 그것은 언제나 예배하는 관계입니다. 우리의 모든 생활은 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생활이 되어야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언약의 자녀의 모든 생활, 특별히 공부하고, 먹고 마시는 일상적이고 사소한 일들조차도 하나님을 찬미하고 그 영광을 높이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언약백성의 생활전체가 예배하는 생활이며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과 예배하는 자와의 살아 움직이는 관계의 표현입니다. 이렇게 예배하는 생활이 언약의 자녀의 생활이라고 한다면 그런 예배에 있어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시편찬송의 위치는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며 찬양하는 생활에서 찬송은 결코 빠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노래는 하나님께서 구약 백성들을 통해 오늘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단순히 시편가사만 아니라 어떻게 불러야 하는지도 우리는 유산으로 살펴야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찬양은 특별한 시간이나 예식에서만 아니라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사용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우리의 모든 생활 가운데서 특별히 공적인 예배, 즉 주일에 모여 드리는 예배에서 시편의 위치에 대해서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이와 같은 세 가지 원리가 있습니다. 즉 첫째로 하나뿐인 언약 안으로 모으시고, 둘째로 신구약의 언약백성들은 하나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예배하는 백성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시편의 위치가 무엇인가가 바로 오늘 언약백성들이 시편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대해서 가르쳐준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언약백성들의 찬송인 시편에 대해서 언약백성으로서의 윤리적인 책임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교부들

 

칼빈은 교부들에게서도 도움을 얻었는데 힐라리는 ‘시편은 그리스도의 복음의 조명 아래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이 말은 시편은 단순히 과거 구약의 이스라엘에게만 주신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고난을 믿는 신약의 성도에게 더 풍성한 빛을 던져준다는 의미입니다. 말하자면 신약 성도에 의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더 잘 이해되고 밝게 빛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불러야 할 찬송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주 합당합니다.

 

어거스틴은 시편이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의 언약의 표현이라고 하였습니다. 여러 가지 고난과 슬픔에 처한 언약백성들에게 주시는 풍성한 약속이 거기에 있고 또 언약의 백성은 그 언약에 의지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며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 언약은 모든 언약백성들에게 주신 것이므로 교회가 그 언약에 의지하여 부를 찬송이며 그들의 머리가 되신 그리스도를 향하여 드리는 찬송입니다. 이렇게 시편은 언약백성들의 입에 목소리를 줍니다. 신약의 성도는 구약의 성도들과 마찬가지로 모든 생활에서 시편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도록 허락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히브리인에게 주신 계시와 교회에게 주신 계시는 동일한 것입니다. 구약의 히브리인의 생활과 관련하여 하신 말씀은 바로 오늘 우리의 순종하는 생활을 향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처럼 시편은 보편교회의 찬양의 원천입니다. 그리고 시편을 찬송하기 때문에 그 찬양은 권위가 있는 것입니다.

 

이미 교부들이 증거한대로 언약이 모든 시대에 있어서 하나라고 이해할 때 한 시대의 언약백성에게 주신 시편은 동시에 모든 시대에 살고 있고 또 앞으로 태어나 자기들의 시대를 살아갈 언약의 자녀들을 위해 똑같이 가치있는 것입니다.

 

 

 

찬송의 두 요소, 가사와 곡조에 대한 고전적인 원칙들

 

그러면 찬송 자체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칼빈은 곡조와 가사라는 두 가지 요소로 노래가 이루어져있다는 일반적인 명제를 받아들였습니다. 이것은 플라톤의 영향을 입은 것입니다. 이 두 요소로 이루어진 노래가 사람의 영혼에 영향을 주기 위해서는 이 두 요소가 다 중요하며 가사와 곡조를 결정할 때 깊이 주의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중에서 사람의 영혼에 영향을 주는 가사에 비해서는 곡조(멜로디)는 덜 중요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플라톤이 주장하였던 고대의 이해는 어거스틴에게서도 나타납니다. 어거스틴은 찬송은 곡조와 가사라는 두 가지 요소를 가지고 사람의 감정과 지식에 영향을 준다고 하였습니다. 곡조와 같은 소리의 형태로 가사가 우리의 내면의 마음과 감정에 접근해올 때 우리의 영혼은 변화를 입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에 접근해오는 곡조는 가사에 적합한 것이어야 합니다. 곡조가 적합하면 영혼이 곡조에 실려 다가오는 가사에 교훈을 받고 유익을 얻게 되지만 곡조가 적합하지 못하게 되면 가사 보다는 사람의 감정이 마음을 지배하게 되어서 가사가 주는 위로나 약속들을 생각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무엇을 노래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감격하지 못하고 단순히 곡조에 기분이 좋아지고 노래하는 즐거움에 만족하게 됩니다. 사람의 생각이 노래하고 있는 내용 즉 하나님이 왕이시며 그 왕의 언약이 무엇이며 그러므로 그 언약이 고통과 슬픔속에 있는 언약백성에게 어떤 효력을 내는 것인지를 생각하고 그러한 위대한 사실을 노래함으로 하나님께서 영광을 얻으시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곡조가 마음에 들어서 시편을 찬송하는 것이 아니라 곡조에 담아 불려지는 가사에 감동해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 교부는 시편은 노래할 것이 아니라 한편의 시를 암송하듯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곡조로 인해서 기분에 사로잡혀 가사를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위험을 피하도록 하려는 뜻에서 한 말입니다.

 

곡조(曲調)라는 말을 정의해보자면 순수한 우리말로 가락, 혹은 노랫가락이라고 하는데 소리의 높고 낮음과 소리의 길고 짧음을 서로 잘 조화시켜 놓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노랫가락이 일정한 규칙에 따라 반복할 때 그것을 리듬이라고 합니다.

 

이런 곡조와 리듬은 그 안에 담긴 가사와 상관없이 사람의 감정을 흥분시키고 때로는 슬프게 때로는 즐겁게 만들어줍니다. 기분이 좋으면 콧노래를 부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반대로 곡조는 가사 없이도 사람의 감정에는 변화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편을 담는 곡조가 적합하지 못하면 부르는 사람의 감정을 흥분시켜서 가사를 생각하지 못하고 감정, 기분에 사로잡히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하는 사실은 생각지 않고 노래 그 자체를 즐거워하는 잘못에 빠지게 됩니다. 이런 원칙들은 칼빈에게서 새롭게 알려진 것이 아니고 아주 오래전 고대로부터 보편적으로 주장해오던 그런 원칙들입니다. 오늘도 찬송의 거룩한 가사는 적당하고 좋은 곡조를 필요로 합니다.

 

 

 

찬송의 정의

 

그러면 칼빈은 찬송이 무엇이라고 생각했는지 정의를 내려봅시다. 칼빈은 찬송하는 것과 기도하는 것이 같다고 말하였습니다. 공적인 기도가 찬송의 형식을 취하는 경우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시편 72:19절에서 시편의 맨 마지막에 “이새의 아들 다윗의 기도가 필하니라” 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시편찬송의 가사는 시편이 하나님을 향한 수많은 기도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다윗에게 시편으로 찬양하는 것은 하나의 기도였습니다.

시편은 우리에게 하나님께 무슨 말로 기도할 것인지를 가르쳐주며 또한 찬송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도록 격려하고 가르쳐줍니다. 교회의 찬양은 시편에서 배워야 하며 동시에 언약의 자녀는 바로 시편을 사용해서 찬송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배할 때 시편으로 찬송하게 되는데 그 찬송을 무엇으로 생각해야 합니까? 찬송은 언약백성과 그의 자녀들이 다 함께 공적인 예배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말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기도로서의 이 찬송은 어느때에 부를 수 있습니까? 시편의 저자이신 성신님께서는 기쁠 때나 즐거울 때만 아니라 그들의 영혼이 슬프고 절망에 떨어졌을 때 혼란에 빠졌거나 두려움에 떨어졌을 때, 그러한 언약백성들의 마음에 있는 영혼의 상태를 들추어내십니다. 다양한 모든 상황에 처한 언약백성들의 마음을 다 아십니다. 그리고 그런 처지에서 하나님께 찬송으로 기도하도록 격려하십니다. 자신의 죄로 인해 슬플 때 시편은 우리가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찬송해야 하며 그렇게 하여 하나님께 기도드려야 한다는 것을 잘 가르쳐 줍니다.

 

우리는 때로 원수로 인해서 슬픔에 처했을 때 우리는 괴로움을 달래기 위해서 산책을 하거나 영화 한편을 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러나 더 지혜로우신 성신님께서는 바로 그런 때에 찬송으로 기도하도록 가르쳐주십니다. 우리의 형편을 모르고 그러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삶의 형편과 마음의 고통을 다 아십니다. 시편에는 사람이 처할 수 있는 모든 상황과 마음의 상태가 다 나타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형편과 처지에서라도 우리는 시편에 의지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공적예배에서 시편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며 찬송해야 하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시편은 언약백성의 공적인 기도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칼빈이 시편찬송을 말할 때는 형식에 있어서는 곡조를 가지고 있는 시편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찬송이라고 할 때는 그것이 성경의 시편에 그 근원을 두는데 특히 곡조를 가지고 있는 시편을 말한다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찬송의 범위에 있어서 시편 150편으로 제한하지 않고 성경에 근거한 찬송으로 제한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시편 외에도 구약의 성도들이 하나님을 찬송하였던 기록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칼빈은 선지자나 시므온의 찬송들에서 그러한 근거를 제시하였습니다.

 

왜 이렇게 칼빈은 성경에 근거해서 찬송해야 한다고 하였습니까? 얼마든지 자유롭게 노랫말을 만들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만한 찬송을 만들 수 있으리라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스스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만한 선한 것이 우리에게 있다는 오류에 빠지지 않아야 합니다. 비록 우리가 거룩한 하나님을 노래하는 글을 지을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이 우리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라거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멀리해야 합니다. 우리는 전적으로 부패하였으며 모든 악을 행하려는 방향으로 기울어져 있습니다.(하이델베르그 3주 8문) 비록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자가 되었을지라도 우리는 일생 하나님의 은사를 의지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의 가진 것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하게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시편)으로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하게 찬송을 드려야 합니다.

 

 

 

공교회의 찬송의 목적

 

이제 찬송을 하는 목적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첫째로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분이나 우리의 슬픔을 하나님 앞에서 노래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인해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반응이나 감정을 하나님께 표현하는 것이 아닙니다. 찬송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만을 바라며 하나님을 높이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형편과 처지에 있든지 중요한 것은 우리가 아니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찬양할 때 찬송하는 자녀는 자신의 현실 가운데서 찬양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생활환경은 늘 변화무쌍합니다. 슬픔과 고통이 있고 기쁨과 소망이 있습니다. 위로가 있지만 우리를 절망으로 몰아가는 위험한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정말로 하나님만 의지해서는 세상의 모든 두려움에서 구원을 얻을 수 없을 것만 같은 두려움이 몰려올 때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닥치는 현실은 참으로 우리를 두려움에 빠지게 합니다. 바로 이런 환경이 언약의 자녀가 하나님께 시편으로 찬송하려고 서야하는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둘째로 시편은 그런 우리의 믿음을 강하게 하여 그런 처지에서라도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려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편에는 우리가 처한 절망적이고 고통스러운 상황에 대해 말하지만 우리의 눈을 들어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을 응시하게 합니다. 기도하는 자녀가 하나님을 주목하여 바라보고 묵상하면 모든 두려움과 근심에서 자유롭게 됩니다. 신뢰하는 마음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편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응시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슬픔이나 두려운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 노래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늘의 자비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편은 언제나 가사가 의미하는 바를 분명하게 이해하면서 부르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러기위해 시편은 자기나라의 언어로 번역해야 하며 필요하다면 이해에 도움이 되는 단어로 바꾸어 부름으로 찬송하는 자가 보다 분명하게 시편의 의미를 이해하도록 도와야 할 것입니다.

 

세 번째로, 이렇게 하나님을 응시함으로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와 자비를 묵상하는 것이 시편을 찬송하는 목적입니다. 성령님께서는 고난 중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가 어떤 은혜를 입게 되는지를 약속하시고 그 약속에 대해서 깊이 묵상하기를 원하십니다. 비록 지금 고난 중에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크신 은혜와 자비를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시편은 우리의 죄에 대한 그리스도의 속죄를 약속으로 주십니다. 그리고 그런 크신 은혜와 자비는 고난과 두려움과 슬픔 중에서라도 더욱더 순종하여 살고자 하는 마음으로 우리를 이끌어줍니다. 그렇게 하여 시편의 목적대로 시편의 찬송은 우리의 윤리적인 생활에 아주 강력한 영향을 끼칩니다. 어떤 어려움에서도 하나님께 순종하여 살도록 시편을 찬송할 때 은혜와 자비를 베풀어 주십니다.

 

 

 

곡조와 형식

 

가사를 담아 노래하는 곡조와 노래의 다양한 형식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시편을 노래할 때 성스러운 곡조가 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성신님께서는 시편의 가사처럼 그것을 부를 곡조까지도 보존해주시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특별한 곡조는 없습니다. 다만 곡조는 성스런 찬송이 되도록 도와줄 수 있는 도구가 될 수 있을 뿐입니다. 곡조는 가사를 기억하고 마음으로 이해하도록 도움이 되어야 하므로 조금이라도 방해가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합당한 곡조를 사용할 뿐 아니라 부르는 자들도 주의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곡조가 너무 신나고 흥분하게 한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방해가 됩니다. 예를 들어서 노래를 보다 화려하게 하고 흥미있게 하려고 반음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나, #을 이용하여 단순한 온음 대신에 반음을 사용하면 우리의 감정을 자극해서 관심을 훨씬 곡조에 붙들어 매게 됩니다. 그러나 작곡자는 곡조가 단조롭지 않게 하려고 반음을 사용하고 싶어하며 마찬가지로 노래하는 사람도 단조로운 노래에 금방 실증을 느끼고는 좀더 새롭고 신선한 곡조를 찾게 됩니다. 현재 개혁교회의 반주책에도 이렇게 약간의 편곡을 하여서 단조로움에 미미한 변화를 첨가하고 있습니다. 심하지는 않지만 이런 요구가 음악가나 노래하는 언약백성에게 늘 있는 것이므로 주의해야할 부분입니다. 속으로 “노래가 참 따분하다 하지만 별 수 없이 부르는 것이야” “좀 흥미있는 곡에 붙여서 부르면 훨씬 즐거울텐데...” 하는 생각이 계속 일어날 것입니다. 조바꿈이나 편곡하여 변화를 시도한다거나 2부나 4부 화음으로 합창하는 것도 우리가 가사에 집중하는 데는 도움이 되는 요소가 되지는 못한다고 칼빈은 생각하였습니다. 아름다운 소리에 마음을 쓰는 대신에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과 조화를 이루는데 마음을 다 쏟아야 할 것입니다.

 

이처럼 다시 한번 공적인 예배시간에 강조할 것은 시편의 찬송의 주된 것은 시편의 가사입니다. 곡조가 도움을 주는 것이기는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노래하고 있는 가사의 내용입니다. 그 가사가 무슨 의미인지를 분명하게 이해해야만 시편을 노래하는 목적에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목소리나 아름다운 곡조보다는 분명한 말과 정확한 목소리가 더욱 강조되어야 합니다. 언약의 자녀들은 시편을 찬양하고자 할 때 보다 크고 분명하게 가사를 발음하고 그 뜻을 생각하기위해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예배하게 되며 자신의 믿음이 강화되고 은혜로 인해서 감사하게 되고 더욱더 순종하여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더욱더 생활 전체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영화롭게 해드리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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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찬송 23편 (제네바 1604년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