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라기우스주의(Pelagianism)와 반펠라기우스주의(Semi-Pel.)
최더함 목사
교회사에서 2-3세기를 이단의 춘추전국시대라고 부른다. 그만큼 정통기독교 내에서 교리적인 확립을 이룩하지 못한 때였다는 것을 반증한다. 다행히 교부들과 변증학자들의 공헌과 각종 교회회의들의 결과로 교회는 조금씩 교리적 기반을 다지고 순항의 닻을 올리게 된다. 그런 점에서 4세기는 교회의 빠른 성장기로 본다. 그러나 성장의 후유증은 반드시 병폐를 수반한다. 로마제국은 종착역을 향해 달려갔다. 국경은 게르만족과 고트족과 훈족 등에 의해 서서히 무너지고 제국의 위용은 붕괴되고 있었다. 오히려 붕괴는 국경에서가 아니라 로마라는 중심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400년경, 아일랜드 출신의 한 수도사가 로마를 방문한다. 당시 로마는 모든 수도사들에게 이상향이었고 새로운 예루살렘이었다. 누구든지 로마를 한 번 방문해보고 싶지 않았으랴? 그러나 그 수도사는 큰 충격에 빠졌다. 그의 눈에 비친 로마는 영적으로뿐 아니라 윤리적으로도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도시로 타락해 있었다. 로마는 회복할 수 없을 만큼 퇴폐로 물들은 소돔이자 고모라였다. 고향으로 돌아온 이 젊은 수도사는 고민했다. ‘왜 로마가 이렇게 타락했는가?’ 하는 의문을 가지고 그 답을 찾기 위해 머리를 싸맸다. 이 수도사가 바로 교회사에서 빼놓지 않고 거론되는 그 유명한 자유의지의 주창자인 ‘펠라기우스’(Pelagius, 354~418?)이다. 그는 원죄, 그리스도의 구원, 세례 등을 부정한 이른바 ‘펠라기우스주의’의 원조이다.
결론적으로 그는 이 모든 원인이 어거스틴(Augustin, 354~430)에 의한 ‘운명론적인 결정론’에 있고, 이로 인해 로마사회가 극도로 퇴폐하고 타락하였다고 진단했다. 그는 어거스틴이 사람들을 무기력하고 무책임하고 나약한 존재로 만들었다고 보았다. 그는 인간 책임은 전혀 없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존하게 만드는 어거스틴의 사상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무엇보다 인간의 책임 있는 행동이 중요함을 역설하기 시작했다. 그의 사상은 대략 세 가지로 요약된다.
1)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 인간은 스스로 선과 악을 선택할 충분한 자유의지와 능력을 가지고 있다.
2) 신의 은총이란 단순히 외적인 것에 불과하며 모든 사람에게 원죄가 있다는 것은 옳지 않다. 아담의 죄는 완전히 개인적인 것으로 죄인은 이를 모방할 뿐이다.
3) 인간은 대부분 죄를 짓지만 신앙에 의해 죄를 용서받으면 인간에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므로 성령의 능력이 적극적으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어니다. 은총은 단지 인간 생활에 도움을 주는 조력자이며 사람의 의지 안에 있는 것이다. 은총의 수락여부는 개인의 의지에 달린 것이다.
펠라기우스의 이런 주장은 어거스틴의 은총론을 전부 부정하는 것이었다. 어거스틴은 인간은 완전히 타락하여 자연적인 강태에서는 하나님의 은총과의 어떤 협력도 할 수 없으며 신앙의 촉발도 인간의 의지에 달린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에 의존한다고 정의했다. 타락한 인간은 자신의 의지로 자신을 변화시킬 수 없는 것으로 보았지만 펠라기우스는 정반대로 본 것이다. 그는 412년과 418년에 칼테이지에서 열린 두 차례의 교회회의와 431년 에베소에서 열린 2차 세계교회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 받았다.
한편 429년부터 남부 갈리아지역의 일부 수도사들에 의해 어거스틴주의에 대한 새로운 도전이 일어났다. 수도사 카시아누스, 빈켄티우스, 파우스투스 등은 영혼의 구원을 위해 인간의 노력만으로 충분하다고 한 펠라기우스주의와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의 은총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어거스틴주의를 절충하여 ‘영혼의 구원에는 은총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나 그것을 받아들일지는 첫째로 인간의 자유의지에 달렸다’고 주장하였다. 상호 대척점에 있는 주장들을 절반씩 취했다는 이유로 교회사에선 이들을 ‘반(semi)펠라기우스주의’라 부른다.
그들은 특히 어거스틴의 핵심적 교리라고 할 수 있는 예정설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그들은 어거스틴의 예정교리는 전도의 목적을 파기하고 도덕적 정신을 약화시키며 사람들을 절망으로 이끈다고 선포했다. 초기엔 예정론만 아니면 그들은 어거스틴의 추종자들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았다. 그들은 펠라기우스의 이론을 강하게 질타했다. 펠라기우스의 원죄부정과 자력구원설은 폐기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원죄란 인간내부에 존재하는 인간을 타락하게 만드는 보편적인 힘이라고 믿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총이 없이는 이 타락의 힘을 극복할 수 없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삶과 행동에 하나님의 은총이 우선 필요하다고 했다. 이 점에 있어서 그들은 어거스틴을 따랐다. 그렇지만 그들은 어거스틴을 완전히 주장하지 않았다. 타락도 완전 타락이 아니라 부분 타락으로 보았다. 결국 그들이 정리한 결론은 “하나님이 인간의 구원을 위해 손을 내밀 때 인간 쪽에서도 같이 손을 내밀어 서로 붙잡을 대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했다. 이른바 ‘신인협력설’이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다.
490년 파우스투스가 죽은 뒤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호응을 받던 반펠라기우스주의는 중세의 금욕적이고 율법 편중적인 신심의 태도와 융화되어 카톨릭교회 내에서 정착하면서 활발하게 살아나 반펠라기우스주의 후기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6세기 들어 펠릭스 4세 교황(526-530)이 이 사상을 경계하자 세력이 약화되었고 마침내 529년 제2차 오렌지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 받았다.
그러나 이들의 전통은 여전히 죽지 않고 지금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후기에서 추종자들은 하나님의 도움을 하나님이 인간에게 능력을 불어넣는 내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밖에서 들려지는 복음처럼 순수하게 외적인 것으로 보았다. 특히 이들의 핵심은 ‘하나님의 정의’라는 개념이었다. 인간이 자신의 본성과 능력으로 구원을 향하여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한다면 하나님은 정의로운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공평하시고 공의로우신 분이시기에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으로 구원하지 않으며, 이 선택에서 제외한 사람의 입장에선 하나님은 정의로우신 분이 아니므로 인간에게도 선택권을 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행위구원은 이렇게 해서 다시 살아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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