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은혜’로만으로도 충분한가?
(감리/루터교의 천주교와의 의화교리연합 선언 비판 - 역주)
김병훈 목사 (합동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교수)
* 시작하는 말
의롭게 함에 관한 최근의 일치 선언들
2006년 7월에 서울에서 개최되었던 세계 감리교회 협의회 제19차 대회에서 감리교회 대표자들은 천주교회와 루터교회의 대표자들과 함께 “세계감리교 회협의회와 의화(의롭게 하심) 교리에 관한 공동선언문”을 발표하였습니다. 선언문의 내용은 이미 1999년에 천주교회와 루터세계연맹 사이에서 공포되었던 “의화교리에 대한 공동선언문”이 감리교회의 이해와 일치함을 선언하고 이에 덧붙여 감리교회의 웨슬리안 고백이 위의 선언문과 어긋나지 않음을 덧붙이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일부 개신교파들과 천주교회와의 “의롭게 하심”의 교리에 관한 일치 선언들은 최근에 들어 갑자기 나타난 것이라기보다는 1960년대에 열렸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천주교회가 천주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기독교회의 일치를 도모하는 과정과 맞물려 이미 상당한 기간에 걸친 준비 끝에 이루어진 것들입니다. 그 결과로 나타난 주요한 몇 가지들만 언급을 하자면 루터세계연맹 산하의 미국 지회와 천주교회는 7차 대화를 통해 1983년에 “믿음으로 의롭게 하심”(Justification by Faith)을 발간하였으며, 바로 이어서 독일에서는 루터파 신학자들과 천주교 신학자들이 1986년에 “종교개혁 시대의 정죄들”(The Condemnations of the Reformation Era)을 발간했습니다.
1987년에는 영국 성공회와 천주교회가 “구원과 교회”(Salvation and Church)를, 1988년과 1992년 두 번에 걸쳐서 영국 감리교와 천주교는 “의롭게 하심 - 합의문”(Justification)을, 그리고 1993년에 독일의 루터교회와 천주교회의 공동 위원회가 “교회와 의롭게 하심”(Church and Justification)을 발간하였습니다. 이러한 흐름의 결과로 마침내 1999년에는 루터세계연맹과 천주교 사이에 “의화교리에 관한 공동선언문”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작년에 있었던 세계 감리교회 협의회 제19차 대회는 이것에 자신들도 동의함을 선언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1. 어떻게 평가하여야 할 것인가?
천주교회는 종교개혁신학을 정죄하고 자신들의 신앙고백을 천명하기 위하여 1545년부터 1563년까지에 걸쳐서 트렌트 공의회(Council of Trent)를 소집하였으며, 그 가운데 1547년 제6차 속회에서 자신들의 “의롭게 하심의 교리” (decretum de iustificatione)와 이에 관한 법령(canones de iustificatione)을 공포하였습니다.
칼빈은 트렌트 공의회의 결정을 비판하면서 오류를 수정하기 위한 “해독제”(antidota)를 밝혀 놓았기 때문에 이 두 자료를 중심으로 간략하게 종교 개혁 시대의 “의롭게 하심”의 교리에 관련한 핵심적인 논쟁점을 확인하도록 하겠습니다. “의화교리에 대한 공동선언문”(이하 공동선언문으로 표기함)은 “공동 선언문”, “선언문의 취지와 의미에 대한 공동 성명서” 그리고 “선언문을 작성의 전거를 밝히는 부록” 등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 중 “의롭게 하심”의 교리에 관한 공동 이해의 내용은 공동 선언문 4장의 해설을 중심으로 종교개혁 당시의 논쟁점에 대한 공동선언문의 견해를 확인하도록 하겠습니다.
종교개혁 시대의 “의롭게 하심”의 교리에 관련한 핵심적인 논쟁점들은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이미 16세기에 있었던 교리일치선언문이었던 “레겐스부르크(혹은 라찌스본, Ratisbon) 일치”(Regensburg Agreement)를 기준으로 하여 논쟁점들을 정리하고자 합니다.
비록 천주교회와 개신교회 양 진영에서 모두 비판을 받았으며, 공식적인 합의 수준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1541년에 회집 되었던 “레겐스부르크 협의” (이하 레겐스부르크)에는 세 명의 천주교 신학자들인 에크(J. Eck), 폰 플루크(J. von Pflug), 그롭퍼(J. Gropper) 등과 세 명의 개신교 신학자들인 멜랑흐톤(P. Melanchthon), 부처(M. Bucer), 피스토리우스(Pistorius) 등이 토론자로 참여하였습니다. 칼빈은 참석하였지만 토론자는 아니었습니다. 진지한 토론의 결과 교회와 성례에 관련하여서는 아무런 일치를 보지 못한 채 끝이 났지만 “의롭게 하심”의 교리에 관련하여서는 일치 선언문을 이끌어 내었습니다. 루터는 이 선언문에 대해서 개신교회와 천주교회의 신학이 짜깁기되었다고 비판하고 커다란 의미를 두지 않았습니다.
칼빈은 1541년 5월 파렐(Farel)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르기를 레겐스부르크는 천주교 신학자들이 상당한 양보가 있었으며 그 결과 개혁신학의 모든 것을 담고 있지는 못하지만 그 가운데 있는 것 가운데 개혁신학이 받지 못할 것은 별로 없다고 얼마간 긍정적으로 평가하였습니다. 칼빈이 다소 미흡하지만 이 정도의 합의를 이끌어 낸 것도 상당한 것이라고 평가한 까닭은 레겐스부르크의 “의롭게 함”에 관한 진술들이 “의롭게 함”의 개념과 “의롭게 함의 근거” 그리고 “믿음과 사랑의 관계”에 있어서 분명한 개혁주의 관점을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2. “의롭게 하심”이란?
트렌트 공의회(이하에서 ‘트렌트’로 줄임)의 강령은 총 16장에 걸친 교리 강령들과 33항목들에 걸친 법령들로 이루어졌는데, 이것들을 통하여 천주교회가 종교개혁신학에 대하여 비판한 초점들은 여러 가지이지만 레겐스부르크의 논점들과 관련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의롭게 하심”(iustification)이 무엇을 가리키는가에 관한 이해의 문제입니다. 트렌트는 교리강령 7장과 법령 11항에서 “의롭게 하심”이란 “죄의 사함과 더불어 속 사람이 실제로 거룩케 되고 새롭게 됨”을 가리킨다고 주장합니다. 아울러 단지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 받음으로만 의롭게 되거나 또는 죄의 사함을 받는 것으로만 의롭게 된다”고 고백하는 종교개혁의 신학에 대해서 정죄를 선언합니다.
칼빈은 이에 대해 바울이 로마서 4장에서 시편 32편을 인용하여 말한 바 “하나님께서 일을 한 것도 없이 의를 전가하는 사람의 행복에 대해 말하기를 자신의 불법함을 사함 받은 자는 복되도다”를 살필 때 성경은 “의롭게 하심”이란 “죄의 사함”에 있음을 교훈하고 있음이 분명하다고 비판을 합니다. 바울이 고린도후서 5장에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다”고 교훈을 한 것 또한 “의롭게 하심”이란 “죄의 사함”이며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됨”을 의미할 따름이라고 칼빈은 덧붙입니다.
칼빈에 따르면 “의롭게 하심”은 “거룩케 하심”(sanctification)과 구별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의롭게 하심”과 “거룩케 하심”이 서로 분리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칼빈은 이 둘은 하나님의 은혜의 두 측면들이기 때문에 영속적으로 서로 결합되어 있으며, 따라서 이 둘이 함께 연결이 되어 있음을 부정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강조합니다. 이것은 마치 태양의 빛과 열이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빛과 열을 동일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 잘못인 것처럼 “의롭게 하심”과 “거룩케 하심”을 하나이며 동일한 것으로 추론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 칼빈의 요점입니다.
“공동선언문”은 이와 관련하여 “의화에 관한 공동해설” 4.2장에 보면 “죄의 용서와 정의의 실천인 의화”(Justification as Forgivenness of Sins and Making Righteousness)라는 제목에서 “의롭게 하심”의 이해를 “죄의 용서”와 “실제로 의롭게 만드심”의 복합적인 개념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공동선언문”은 이 두 개념들이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다”고 말하며(22항) 천주교회는 후자를, 루터교회는 전자를 각각 강조하여 말할 따름이라고 해설을 합니다. 그리고 양 교회는 각각 다른 한 측면을 함께 인정하고 있음을 강조합니다(23, 24항). 그러나 이 해설은 종교개혁의 신학적 관점을 충분하게 반영하는 것이 아닙니다.
칼빈이 말한 바처럼 이 두 개념은 분리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하여 이 두 개념이 모두 “의롭게 하심”의 정의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의롭게 하심”은 “죄의 용서”만을 가리키는 것이며, 그것은 “실제로 의롭게 만드심” 곧 “거룩하게 하심”과 비분리적으로 연결이 되어 있을 뿐입니다. “공동선언문”은 이 두 개념이 “구별되지만 비분리적이라는” 칼빈의 논점을 불분명한 진술로 피해가고 있습니다.
3. 의롭게 하심의 근거는?
두 번째로 천주교회가 종교개혁자를 비판한 논쟁점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근거가 무엇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트렌트는 교리강령 7장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게 하실 때 우리가 단지 의롭다고 불리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일에 대하여 우리가 각각 협동함으로써 실제로 하나님의 의를 우리 안에 받아들인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근거가 우리 안에 주입된(infused) 내재적(inherent) ‘의’임을 뜻합니다.
칼빈은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영적인 중생으로 인한 질적 변화에 의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사하시며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imputation)하여 주시는 데에 있다고 말합니다. 이에 대해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받아들여짐과 동시에 그로 인하여 우리가 거룩한 생명 안으로 중생케 된다는 점을 인정한다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우리들 안에 있는 의의 어떤 부분이라도 질적인 것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며, 우리들이 의롭게 되는 것은 값없이 받아주심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을 한다”(‘트렌트 교리강령 7장에 대한 해독제’).
칼빈은 성화의 결과로 주입된 의가 우리 안에서 주어지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안에 주입되는 의가 있음은 결코 부정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것이 의롭게 하심의 어떤 근거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님을 분명하게 하였습니다. “공동선언문”은 4.2장과 4.3장에서 루터교회의 “죄의 용서”로서의 의화 개념과 마찬가지로 천주교회의 “내적 인간의 쇄신”으로서 의화 개념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인간의 협력과 별개로 주어진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24항). 그렇지만 이것은 논쟁의 초점을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지 않습니다. 인간의 협력과 별개로 주어진다고 말할 때 그것이 의미 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밝히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공동선언문”이 밝히는 “의롭게 하심의 공동 이해”(3장)에서 “의롭게 하심”에 대해 설명하기를 “의롭게 하심이란 그리스도 자신께서 우리의 의라는 것을 의미하며, 우리는 성령을 통하여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일치함으로써 이 의에 참여하게 됨을 뜻한다”(15항)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성령을 통하여”라는 말의 의미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개혁신학에 따르면 영적으로 죽은 자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중생케 되어 믿음을 고백하게 됨으로”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를 받아 그리스도의 의에 참여한다는 말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천주교회의 신학은 그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공동선언문”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의롭게하심에 있어서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선한 일들을 하도록 준비시키시고 부르시면서 우리의 심령을 새롭게 하시는” 성령이기 때문입니다(15항). 성령으로 인한 은총의 결과이라 할지라도 인간의 내재적 의가 의롭게 하심의 근거가 되는가의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협력과 무관하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는 진술은 어떤 의미에서 무관하다는 것인지 분명하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행위가 의롭게 하심의 근거가 결코 아니라고 말할 때, 그것이 공로적 의미에서의 근거를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리스도의 의를 받아 누림에 있어서의 수단적 혹은 도구적 의미에서의 근거를 말하는 것인가가 구별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칼빈이 “주입된 의”의 개념을 부정하고 “전가된 의”를 강조할 때, 그는 그리스도의 전가된 의가 우리를 의롭게 하는 유일한 공로적 원인임을 천명함과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는 수단은 오직 믿음일 뿐이라는 사실을 아울러 함축하여 말합니다. 따라서 “주입된 의”의 문제는 주입된 의가 비단 “의롭게 함”의 공로적 원인이 아니라고 말한다고 하여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더 물어야 할 질문은 주입된 의가 공로적 원인이 아니라면 그것을 근거로 하여 의롭게 하신다고 할 때, 그것은 수단적 혹은 도구적 원인이라는 뜻을 함축하는 것인가에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하여 “공동선언문”은 분명하게 진술하지 않고 있습니다.
4. 믿음과 사랑의 관계
천주교회는 우리 안에 주입된 의가 공로적인 의미에서 우리를 의롭게 하는 의가 된다고 결코 말하지 않습니다. 트렌트는 공로적 원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공로임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트렌트가 주입된 의를 의롭게 함의 근거라고 할 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 근거하여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을 때 우리 안에서 이루어져야 할 실제적인 의를 말합니다. 주입된 의는 우리의 협동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의이기 때문에 우리 편에서 보면 의롭게 하시는 공로적 원인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받기 위하여 우리가 이루어야 하는 책임이기도 하며 의롭다함을 받는 수단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종교개혁자들은 반(半)펠라기우스주의(semi-Pelagism)의 오류를 지적하고, 우리를 의롭게 하는 공로적 원인인 그리스도의 의를 받아 누리는 유일한 수단은 “오직 믿음”뿐임을 천명하였습니다. 트렌트는 법령 9항과 11항에서 마치 사람이 자신의 의지로 아무런 협동도 하지 않은 채 오직 믿기만 함으로써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말하거나, 또는 성령께서 사람의 마음에 부으시는 은혜와 사랑을 배제한 채 의롭게 된다고 말하는 자들에게 정죄를 선언하였습니다.
그러나 칼빈은 하나님의 의는 “믿음에서 믿음에 이른다”고 기록되어 있는 로마서 1장을 들어 말하기를 만일 의롭게 됨이 행위에 의한 것이라면 “믿음에서 행위에 이른다”고 기록되었을 것이라고 비판을 합니다. 이러한 지적은 천주교가 의롭다함을 두 단계로 나누어 처음 믿고 세례를 받아 의롭게 될 때에는 믿음에 의해 의롭게 되지만 그 후에는 행위의 순종으로 의롭게 된다는 주장을 하는 것을 의식하고 비판한 것입니다. 칼빈은 창세기 15장에서 보듯이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하실 때에 그는 이미 여러 해 동안 주님을 좇은 자로서 의롭다함을 받은 것이므로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고 교훈을 하였습니다(‘트렌트 교리 강령 8장에 대한 해독제’).
물론 칼빈은 “오직 믿음”이라는 주장으로 행위와 분리된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칼빈은 “오직 믿음”이라는 말로 주장하는 바가 사랑이 결여 되어 있는 믿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믿음만이 의롭게 됨의 도구적 원인임을 말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의롭게 하는 것은 오직 믿음뿐이지만, 믿음이란 사랑으로 역사하지 않는 죽은 믿음이 아니며, 의롭게 하는 믿음은 사랑으로부터 분리된 채 홀로 있는 것이 아님을 강조합니다(‘트렌트 법령 9항과 11항에 대한 해독제’). 요컨대 믿음이란 어떤 죽은 설득과는 다른 것이라는 것입니다(‘트렌트 법령 24항에 대한 해독제’).
특징적인 것은 칼빈이 힘주어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필연적으로 연결이 된다고 말하지만 그는 결코 사랑으로 의롭게 된다고는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말하면 그것은 결국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근거가 “주입된 의”에 있다는 주장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되기 때문이며, 우리를 의롭게 하는 그리스도의 의에 접붙임을 받는 유일한 수단은 오직 믿음이라는 성경의 원리에 충돌이 되기 때문입니다. “공동선언문”은 4.3장 “믿음으로 그리고 은혜를 통하여 의롭게 함”이라는 항목에서 의롭게 하는 믿음은 “하나님께 대한 희망과 그 분께 대한 사랑을 포함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사랑 안에서” 활동성을 갖는다고 말합니다(25항). 제목에서 보듯이 “공동선언문”은 의롭게 함의 두 가지 방편을 병렬해 놓고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으로”와 “은혜를 통하여”입니다. “은혜를 통하여”는 결국 사랑이라는 행위의 순종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공동선언문”에서 천주교회는 죄인이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죄의 용서”이면서 또한 “의롭게 하는 은총에 의하여 실제로 의롭게 되는 것”인데,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27항). 즉 “의롭게 하심”에 대한 개념이 “죄의 용서”로서의 개념과 “내적 인간의 쇄신”으로서의 개념을 여전히 복합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천주교회가 말하는 “의롭게 하는 은총”이란 다름아닌 “믿음, 소망, 사랑 안에서의 삶의 쇄신”을 가리키는 것일 따름이며(27항). 칼빈이 이해하듯이 그리스도의 공로를 이루시고 이것을 받아들이도록 “믿음”을 주신다는 의미에서의 “의롭게 하시는 은혜”와는 다른 의미를 내포합니다.
물론 천주교회가 루터교회와 마찬가지로 “믿음이 없으면 의롭게 됨”이 일어나지를 않는다는 의미에서 천주교회도 “오직 믿음”을 지지한다고 말하지만, 이어서 덧붙이기를 죄인은 세례를 통하여 의롭게 된다고 말함으로써 천주교가 말하는 “오직 믿음”의 의롭게 됨은 세례의 의롭게 됨과 연결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27항). 다시 말해서 세례를 의롭게 하는 수단으로 믿으면서 이 세례는 믿음으로 받는 것이므로 믿음을 의롭게 됨의 수단으로 연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칼빈의 견해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칼빈의 가르침에 따르면 세례는 은혜의 수단으로서 믿음을 자라게 하지만 의롭게 함의 수단이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천주교회는 트렌트에서 보듯이 의화의 단계를 둘로 구분하고 있음을 고려해야 합니다.
즉 천주교회는 죄인이 세례로 의롭게 되는 초기 의화와 세례 이후에 교인이 의롭게 됨을 유지하기 위하여 순종해야하는 후기 의화의 단계를 구별하고 있는데, 천주교회가 “공동선언문”에서 “믿음”을 말하는 것은 초기 단계의 의화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천주교회는 믿음을 말하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여전히 후기 의화와 관련하여서는 순종의 행위, 곧 사랑이 의롭게 하시는 도구적 원인임을 주장하고 있다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공동선언문”에는 “의롭게 하심”에 대한 개념을 복합적으로 사용하면서 이러한 점에 대해서 분명한 해명을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 맺는 말 - “오직 믿음”으로만 “오직 은혜”의 복음을 전할 수 있음
“의롭게 하심”의 교리와 관련하여 트렌트가 종교개혁신학을 비판한 점들은 이외에도 아담의 타락과 자유의지, 구원의 확신, 성도의 견인, 율법과 복음, 선행과 공로 등과 관련한 많은 주제들을 망라합니다. 그리고 “공동선언문”도 이러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을 다루지는 못하였습니다만 “레겐스부르크의 협의”에서 합의하였던 몇 가지 논쟁점을 중심으로만 다룬 것으로도 “의롭게 하심”에 관한 “공동선언문”을 평가하는 데에는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공동선언문”은 종교개혁시대의 신학적 논쟁점들을 새롭게 해결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하여 천주교회나 루터교회 가운데 어느 한 편이 다른 한편에게 신학적 견해를 양보하여 타협을 이룬 것이라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서로 어떻게 다른지를 병기하고 이것을 모두 “오직 은혜”라는 큰 틀에서 서로 일치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있다는 것이 의의라면 의의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의미에서 일치 선언은 사실 펠라기우스의 자력구원을 잘못 된 것으로 정죄한 5세기의 그리스도 교회의 결정을 재확인한 것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펠라기우스의 오류에 대하여 모든 그리스도의 교회는 “오직 은혜”를 말하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의 논쟁점은 “오직 은혜”를 어떻게 누리는가에 대한 이해의 문제에 있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를 어떻게 받아 누리는가에 대한 이해의 문제이었던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천주교회를 향하여 종교개혁자들이 단호하게 선언하였던 몇 가지 점들은 이러합니다. 하나는 우리 안에 주어지는 주입된 은혜로 인한 “내재적 의”가 아니라 우리 바깥에 있는 그리스도의 “외적 의”라는 것입니다. 또 의롭게 하심이란 “죄의 용서”와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음”이지 “내재적 의에 의한 삶의 쇄신이나 거룩케 됨”이 아니며, 따라서 의롭게 하심은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의 신분적 관계의 개념이며, 상태적 혹은 삶의 질적 개념이 아님을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의롭게 됨의 은혜는 “오직 믿음”으로만 누리는 것임을 말하였습니다.
요약하면 “오직 믿음”이 확고하게 덧붙여지지 않으면 “오직 은혜”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누리는 완전한 성경적 설명이지 않음을 선언한 것입니다. “공동선언문”은 이 점에 대해서 아무런 설명이나 해법을 주고 있지 않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개혁의 필요성에 관한 많은 설교와 주장들이 들려옵니다. 마땅히 필요하며 또 절실한 때인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은혜를 헛되이 말하면서도 구원을 확신하는 소위 “값싼 복음”의 신앙양태, 곧 믿음과 행함을 분리하여 행함의 열매를 염두에 두지 않는 믿음의 치중성에서 구원의 위로를 찾는 신앙의 양태에 대한 비판의 경종은 크게 울려져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지나쳐서 믿음이 곧 행함이라든가, 또는 믿음으로만이 아니라 행함으로 의롭게 되거나 구원을 받는 것이라는 등의 주장을 하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처음에 의롭게 되는 것은 믿음이지만 그 후에는 행위의 순종을 통해 계속적인 의로움을 유지하여 마침내 종말의 심판 앞에서 구원을 받게 된다고 주장하기조차 합니다. 이것은 매우 커다란 오류이며 잘못입니다.
종교개혁자들, 특별히 칼빈은 의롭게 됨과 거룩케 됨이 동일한 하나님의 은혜의 두 측면이므로 이것들이 서로 결코 분리되지 않음을 말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룩케 됨을 의롭게 됨과 구별하지 않은 채 혼동하여서는 안 됨을 역설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는 은혜 안에 있는 자들에게서 나타나는 “거룩케 하시는 성령의 부르심”에 따라 행하는 순종이란 “의롭다함을 입은 믿음의 증거이며 열매이지” 그 반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진리가 혼탁한 이 시대에 교회의 개혁과 복음의 바른 신학을 통한 바른 생활을 위하여 “오직 믿음”으로 베푸시는 “오직 은혜”의 복음을 전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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