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산책 (12) 금욕주의와 수도원 주의
닉네임: 나그네 / 칼빈장로교회 (2019.11.2)
- 금욕주의와 수도원 주의
고대 교회의 순수성이라는 것은 하나의 특징일 뿐 모든 면에서 건전하고 안정된 교회치리와 신앙의 규범들이라는 뜻은 아니었다. 계시가 완성되었지만 보편교회에 진리의 기둥으로 바로 서는 문제는 단번에 해결될 수 없었고 이후 수 세기를 지나면서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 아래에서 세워져 나가야만 한다. 신앙의 순수성이 진리로 다듬어지지 않을 때 인간의 부패성은 늘 다른 방향으로 치닫게 된다. 금욕주의와 수도원 주의는 그런 면에서 명암이 있다.
1. 금욕주의에 대하여
초기에 기독교 사회는 신앙 생활을 내면의 성향보다 외적 행위들, 즉 다양한 행위들로 보려는 분위기가 있었다. 가장 이상적인 덕을 세상에서 도피하여 은둔 생활을 하고, 자발적으로 재산과 결혼을 단념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겉으로 공로를 쌓고 심지어 여분의 공로를 위해 기도, 금식, 구제, 가난과 독신 등 가짓수를 늘리며 양적인 도덕관이 있었다. 이런 경향이 기독교 사회에 거역할 수 없는 기세가 되어 니케아 시대의 은둔 생활과 수도원주의로 몰아가게 된다. 이것은 기독교의 도덕성을 오해하고 왜곡케 만들었다. 하나님의 선물로써 자연과 질서를 무시하는 영지주의적 사고가 들어왔으며, 고행이나 금욕 등을 그리스도의 공로보다도 높이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내부자들의 지향점은 지상에서 천상의 천사들처럼 살고자 하는 것이었다.
금욕주의는 창조주께서 규정하신 정상적인 생활과 경건의 삶을 비정상적이고 자기 공로적인 덕과 경건을 목표를 삼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말씀의 규례들을 경시하게 되기도 했다. 그들은 세상 가운데에서 하나님 나라 건설을 목표로 삼지 않고 세상을 철저히 등지는 방식에 의존하려고 했다. 이런 경향들은 사실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도 나사렛파, 에세네파 등에서 이미 존재하였다. 또한 금욕은 불교나 이집트의 이교도들에게서도 발견된다.
고대 교회는 ‘금욕주의자들’ 또는 ‘절제하는 사람들’으로 불린 그리스도인 계층들이 있었다. 이들은 같은 사회에 속해 있으면서 자발적으로 재산과 결혼을 포기했고 금식과 기도와 명상에 전념함으로 완전성에 도달하고자 했다. 이들은 집단을 결성했고 교회 안의 교회라는 인식을 갖고 있어서 동료들에게 존경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공예배 때 좌석을 따로 배정받기까지 했다. 박해 때에는 순교를 완성으로 생각하여 순교하기를 열망했다. 금욕주의가 곧 바로 수도원 운동으로 발전하지는 않았다. 이는 콘스탄티누스 재위 기간과 그 이후에 생겨났는데. 교회와 국가가 결합하며 세력을 얻게 되고 순교가 사라지게 되자 비롯된 결과였다. 이러한 금욕적 원리는 고대와 중세 교회의 도덕과 경건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2. 금욕주의 내의 두 부류
고대 교회 내의 금욕주의는 (1) 이단적 금욕주의와 (2) 가톨릭적 금욕주의가 있었다. 전자는 이교 철학에서 후자는 기독교 사상으로부터 발전되었다고 본다. 이단적 금욕주의는 시작부터 사도들의 비판을 받았다(딤전 4:3 혼인을 금하고 어떤 음식물은 먹지 말라고 할 터이나 음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골 2:16, 롬 14 참조) 이들 사상 안에는 동양사상과 플라톤 철학, 물질과 죄의 혼합이론이 이원론, 하나님과 창조계 사이의 적대적 관점 등 물질과 육체가 본질적으로 악하다고 간주하였다. 고대 이단들 가운데 더 극단적인 부류들이 있었다. 에비온파는 가난을 구원의 조건으로 삼았고, 마니교도 물질을 혐오했기에 사유재산을 반대했다. 결혼과 출산을 마귀의 사역으로 금했던 부류도 있었다.
가톨릭적 금욕주의는 성경의 특정 구절을 문자적으로 경직되게 해석하는데서 출발했다. 그들은 실천적인 면에서 성경의 단순하고 확고한 한계를 벗어났다. 그 결과 이단을 혐오했으나 실제로는 육체를 영혼의 감옥으로 간주하여 영지주의, 마니교와 만난다. 그래서 결혼과 가정 생활을 과소평가하며 지나치게 자아를 학대하였다.
3. 성직자 독신
성직자들은 기독교 도덕의 이상을 구현하는 사람으로써 안수를 받은 후 엄격한 성적 금욕을 요구받았다. 당시에는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이 교회의 정절과 성직자 독신의 근거로 받아들여졌다. 이 제도는 니케아 이전에는 아직 법제화가 되지 않았고 선택의 문제였다. 그러나 교회 내에는 이미 독신에 의한 순결을 과도하게 높이 평가하였고 반면에 결혼의 의미를 낮게 평가되었다. 동방교회에는 성직자 결혼이 존속했으나 독신을 더 높이 평가했고 점차 결혼을 제한하고 천시하는 데로 발전했다.
성직자 독신주의는 사도 바울이 감독의 자격으로서 “한 아내의 남편”(the husband of one wife)이라고 한데에서 출발한다. 서방교회에서 3세기 초에 두 세 번 결혼한 성직자들이 많았다. 사도바울의 의도는 재혼이나 중혼 또는 첩이나 노예나 이혼한 여성과의 결혼 등까지도 포함되는 뜻으로 볼 수 있다. 초기의 다른 문서들 속에서도 이러한 연유들에 의해 성직자들의 독신을 더 높이 평가하게 되었다. 그러나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낙원에서의 질서와 더불어 보통의 자연질서에서 보아도 해를 끼치게 되었으며 오히려 성직자 사회에서 더 지독한 부패의 결과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4. 수도원 주의
이 시기에 수도원 주의는 몬타누스파를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다. 그들은 금욕주의와 엄숙주의, 천년왕국등으로 집약되었다. 그들은 처음부터 이단분파로 형성한 것이 아니라 초기 교회의 실천적 윤리와 권징에 대해 과도하게 집착한데에서 출발하게 되었다. 느슨한 권징에 반대하여 광적인 성결과 과도한 권징을 내세웠다. 뿐만 아니라 이후에 등장하는 신령주의들과 같은 결말을 맞이하게 되었다.
2세기 중반 몬타누스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작은 마을로부터 시작된 그의 과도한 열정은 그곳을 하늘의 새예루살렘이 임할 곳으로 가르쳤으며 집회 때에 방언과 예언들이 수행되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로마와 북아프리카에까지 퍼져나갔고 교회는 이러한 소동에 동요했다. 곧 감독들의 회의는 이들을 사탄의 사역으로 규정짓고 몬타누스와 추종자들을 정죄하였으나 6세기까지 존속했다.
이들의 주장은 전통적 신앙 규율을 확고히 강조했다. 유아세례를 반대했으나 삼위일체 교리의 발전에 이바지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의 실수는 기독교 신앙의 도덕적 이상과 규범을 지나치게 높게 강조한 데에 있었다. 그리고 사도시대 이후 보편기독교회가 출범하였는데 이때 그들은 사라졌던 초자연적 은사들, 즉 사도의 은사들을 재현하려는 데 있었다. 그리고 임박한 심판, 박해, 천년왕국, 금욕 등에 대한 집착이 대단히 강했다. 정치적인 이면으로는 성직위계제도에 대한 반발도 있었다. 그래서 성직을 성령의 직접적이고 자유로운 역사로 보고, 평신도들이나 여성들에게도 부여했다. 반면에 여성들의 장식 달린 옷을 금했고, 처녀들은 베일을 착용하도록, 순교를 사모하도록 했으며, 성직자와 평신도들도 재혼을 간음으로 규정하기까지 했다.
몬타누스파의 영향은 그들이 사라진 이후에도 비슷한 부류들이 끊임없이 나오도록 하는데 그 첫발을 내딛었다고 본다. 그들은 도나투스파, 프란체스코회, 재세례파, 퀘이커 그리고 오늘날에도 여러 형태의 분파적 이단들의 효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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