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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정치와 성경적 국가관

Sola. 2024. 12. 11. 06:00

 

보수정치와 성경적 국가관

 

김민호 목사 (2019.11.21)

 

 

정치를 논할 때 무엇보다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할 부분은 ‘국가관’이다. 사람이 태어나면 누구나 자기 의지와 관계없이 특정한 국가에 귀속되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국가에 대한 바른 기준을 잡아야 마땅하다. 이것은 너무도 당연한 논리의 귀결이다. 두려운 사실은 시민들이 국가관을 어떻게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국가의 흥망성쇠(興亡盛衰)가 결정된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대한민국 사람들 중에 국가관이 명확한 사람들은 접하기가 쉽지 않다. 무엇보다 기독교인들 가운데 성경적인 국가관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더욱 어렵다.

 

이런 사회적, 교회적 흐름에 반하여 오늘날 젊거나 지적인 사람들의 국가관은 매우 위험한 수위에 있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장 자크 루소나 마르크스, 더 나아가 주사파의 국가관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다.

 

루소의 국가관은 어떤 것인가? 루소는 국가의 권리가 자연적으로 생긴 것이 아니라, 계약에 기초한다고 주장했다.1) 이것을 ‘사회계약론’이라고 한다. 놀랍게도 루소는 이 논리를 가정에까지 확대 적용한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 속에 있는 가정도 자연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계약의 관계라고 한다.2) 루소의 논리 속에는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이 들어설 자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전적으로 무신론적이다. 이런 루소의 논리는 가정을 정치사회의 최초 모델로 삼으면서 “국가의 우두머리는 아버지와 흡사하고 인민은 자식들과 흡사하다”3)는 논리적 비약으로 간다.

 

이런 논리적 비약의 목표는 국가가 가정의 책임을 모두 떠안도록 하는데 있다. 국가는 국민들이 낳은 자녀들을 키우고 먹이고 교육시킬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다. 이런 루소의 논리가 네 명의 자녀를 낳기 무섭게 고아원과 길거리에 내 버린 무책임한 그의 이기심에서 나온 놀리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놀라운 사실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국민의 삶을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는 복지의 개념이 여기서 나온다는 사실이다. 루소는 자기의 무책임함을 국가의 탓으로 돌린 것이다. 이런 무책임한 루소의 국가관은 많은 사람들의 이기심에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시민들은 국가가 국민의 복지와 생계를 책임져 주지 못할 경우 계약을 파기하고 혁명으로 새로운 정부를 세울 수 있다는 논리에 환호하게 됐다. 그것이 바로 프랑스 혁명이었다.

 

장 자크 루소의 이런 국가관은 후에 마르크스의 국가관에 영향을 준다. 마르크스의 국가관은 헤겔의 변증법적 유물론과 루소의 국가관을 결합하여 계급 구조로서의 국가를 보게 한다. 국가는 본래 원시 공동체에서 고대 노예제 국가, 봉건국가, 자본주의 국가로 진화하다가, 최종적으로는 루소가 주장하는 국가, 즉 국민 모두의 삶을 국가가 책임지는 공산주의 국가로 간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마르크스가 외쳤던 유토피아였다. 이런 차원에서 막스의 국가관은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지배하는 기구, 즉 지배계급의 권력기구”4)로 보았다. 이 권력기구는 사회계약의 연속적 파기라는 혁명 과정을 통해 종국에는 공산국가로 진화한다고 본다. 국가가 국민의 생계 전체를 책임지지 못한다고 판단한다면 국민과 권력자의 계약은 파기되고 혁명을 맞이하게 된다.

 

오늘날 주사파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대한민국의 국가 정통성 자체를 부정한다. 그들은 대한민국이 태어나서는 안 될 사생아였다고 주장 한다. 이들은 오로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북한만 국가의 정통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국가관을 가지고 있기에 그들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를 전복하여 북한이 주도하는 국가가 되도록 한다. 이들의 국가관은 김일성 세습 왕조 자체가 국가다. 마치 조선시대에 왕(혹은 왕족)이 곧 국가였던 사고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놀랍게도 이들의 국가관은 김일성 영생교라는 종교적 국가관이 같이 섞여 있다.

 

그러면 성경이 가르치는 국가관은 무엇인가? 기독교인이라면 세상 사람들과 국가관에 있어서도 구별됨이 있어야 한다.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인들만의 성경적인 국가관이 정립돼야 마땅하다. 우리는 세속적 국가관으로 세속 국가를 바라보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이 바라보는 국가관은 영역 주권설의 관점에서 성경이 가르치는 국가관으로 보아야 한다. 실제로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이루는 대표적인 나라인 미국이나 영국은 그들의 국가관이 성경에 기초한다. 이 국가관은 루터와 칼빈의 종교개혁의 결과로 만들어진 산물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개혁파 신학의 관점으로 국가관을 이해해야 한다.

 

성경적 보수주의 국가관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국가가 하나님의 섭리가 만들어낸 창조물”5)이라는 관점이다. 국가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창조물이라는 관점은 법이 국가를 이루는 요체라는 점에서 출발한다. 이런 관점은 칼빈이 기독교 강요에서 국가의 구성요소를 “법의 보호자요 수호자인 통치자, 통치자의 통치의 기준인 법, 법에 의해서 다스림을 받고 통치자들에게 복종하는 백성”6)으로 규정한데서 잘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법이 국가의 영혼”7)이라고 본다. 때문에 보수의 입장에서 국가는 하나님께서 법의 수호자로 주신 섭리적 창조물로 이해된다. 성경적 보수주의자들이 법을 국가의 영혼으로 보기 때문에 여기서 법치주의(法治主義)가 나온다. 법치주의는 “(하나님께서)대중에게 두려움을 일으키시는 보이지 않는 경찰”로서 도움을 주기 위해 사용하시는 방식이기도 하다.8) 이렇게 하여 하나님은 세속적인 국가가 하나님의 통치 수단이 되도록 하셨다.

 

특히 흥미로운 점은 아브라함 카이퍼의 국가관이다. 카이퍼는 국가관으로서 정부의 역할이 맹인, 농아, 혹은 장애인들과 같은 약자들에게 편중된 통치가 돼서는 안 된다고 한다. 그는 정부의 역할이 ‘보통 시민들’을 위해 설계되어야 한다는 관점을 강조한다. 이는 오늘날 국가와 정부가 소위 약자나 소수자에게 특권을 줘야 한다는 P.C.[Political Correctness]적 사고와 분명한 선을 긋는다. 그렇다고 해서 사회적 약자들이나 소외자들을 향해 국가가 무관심해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카이퍼는 이들을 위한 예외적인 생계 보장을 추구해야 한다는 조언을 잊지 않는다.9) 단지 국가는 모든 시민을 법 앞에 공평하게 대해야 한다는 것일 뿐이다. 만일 약자나 소수자들이라는 이유만으로 특권을 주고 법의 공평성을 포기하게 된다면, 그들은 또 다른 차원의 특권층이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미주

 

1) 장 자크 루소,「사회계약론」,김중현 역,(팽귄클래식코리아,2015),P.34.

2) Ibid.,p.35.

3) Ibid.

4) 임승수,「원숭이도 이해하는 마르크스 철학」,(시대의창,2012),p.225.

5) 러셀 커크,「보수의 정신」,이재학 역,(지식노마드,2018),P.105.

6) 기독교 강요.Ⅳ.20.3.

7) 기독교 강요.Ⅳ.20.14.

8) 아브라함 카이퍼,「아브라함 카이퍼의 정치 강령」,손가화 역,(새물결플러스,2018),p.121.

9) Ibid.,p.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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