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시편찬송을 불러야 하는가?
윤석준 목사 (유은교회)
I. 왜 시편찬송을 불러야 할까? : 성경이 말하는 대로만
“왜 시편찬송을 불러야 하는가?”라는 문제에 대답하기 위해서 제일 처음 해야 하는 대답은 “우리 신앙은 모든 곳에서 성경에 기초해야 하기 때문이다”라는 대답입니다. 이 말은 당연한 말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실제로 이를 그대로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믿고 따른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대다수의 사람들은 성경을 받아들일 때, 자신의 삶의 대부분의 문제들에 대해서 성경은 침묵하고 있다고 믿는 방식으로 성경을 받아들입니다. 즉, 성경에는 구체적인 삶의 문제는 나오지 않기 때문에 결국....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자기 스스로” 찾거나, “실용적인 목적에 따라” 해결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들의 범위는 오늘날에는 더욱 광범위해져서, 사실은 오늘날 복음주의권의 대다수의 사람들이 믿는 성경이라는 범위는 지독히 좁아졌습니다. 성경은 거의 “겨우 사람이 구원받게 되는 방법” 정도에 대해서만 기술하고 있고, 나머지 영역 전부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알아서” 결정해야 되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1. 하지만 개혁신앙은
하지만 개혁신앙은 그렇게 믿지 않습니다. 개혁신앙이 철저하게 믿고 신앙하는 요소 중 하나가 “인간의 전적인 부패”입니다. 이 “전적인 부패”라는 말은.....인간은 너무나 타락하여서, “가장 경건하고 고상한 일에서조차도(예를 들면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과 같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는커녕, 자신의 죄성을 드러냄으로써 그 고상한 일을 망친다는 것입니다.
개혁자들은 예배의 상세한 부분이 성도들의 취향에 따라 결정되어서도 안 되고 인기 있는 어떤 방법에 따라 결정되어서도 안 되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이 당신을 예배하기를 원하시는 방식에 따라서 결정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1)
2. 신조들에서
이것은 개혁파 신조들에서 잘 표현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21장 “종교적 예배와 안식일”의 1항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참되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합당한 방법은 그 자신이 친히 제정하셨고, 그 자신의 계시된 뜻에 의해서 한정되어 있다. 그러므로 어떤 가견적인 구상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상상이나 고안 또는 사탄의 지시에 따르거나 성경에 규정되어 있지 않는 다른 방법을 따라서는 하나님을 예배할 수가 없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은 35주일 96문에서 십계명의 두 번째 계명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문 : 제2계명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 어떤 형태로든 하나님을 형상으로 표현하지 않는 것이고, 하나님이 그의 말씀에서 명하지 아니한 다른 방식으로 예배하지 않는 것입니다.
신조들은 “하나님을 아무렇게나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예배하는 것”을 2계명을 어기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실제로 개혁파 교회들에서 2계명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방법”입니다.
일반적으로 개혁주의자들이 많이 인용하는 문구 중에 “성경이 가라는 곳까지 가고, 성경이 서라는 곳에서 선다”라는 말이 있는데, 성경을 존중하는 사람들조차도 성경이 ‘서라고 하는 곳’에서는 서지만(금지한 것은 하지 않음), 성경이 ‘가라고 하는 곳까지만 가는 일’은 잘 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것은 우리 인생에서 매우 협소한 부분에만 국한되어 있고 우리의 삶은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성경이 우리 삶을 다 커버하지 못할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자세는 매우 불신앙적입니다. 개혁파 신앙이란 “성경의 절대성”을 믿는 것입니다. 성경은 실제로 우리의 모든 삶에 나침반이 되심을 우리는 믿습니다! 우리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 1장에서 고백하는 대로의 성경을 믿습니다.
“하나님 자신의 영광과 인간의 구원, 신앙과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에 관하여(‘모든 것’에 주의하십시오!)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는 모든 계획은 성경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든지, 아니면 선하고 필연적인 귀결에 의하여 성경에서 찾아낼 수가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장 6항)
우리는 예배를 드리는 순간에서조차도 “우리의 마음에 원하는 대로 따를 때는 하나님을 제대로 예배할 수 없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본 회퍼는 시편에 대해 설명하면서 “제자들이 스스로도 기도할 수 있을 터인데 왜 주님께 어떻게 기도할지를 물었는가?”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 ‘주여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간청했습니다. 그들 스스로에게는 기도할 수 있는 능력이 없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그들은 기도하는 법을 배워야만 했습니다. 기도하는 법을 배운다! 이것은 어쩌면 모순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오늘날에는 기독교가 널리 전파되어 있으니 당연히 기도를 잘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위험한 착각입니다. 우리는 종종 마음에서 저절로 흘러나오는 모든 것, 즉 소원, 소망, 한탄, 하소연, 찬양을 기도와 혼동하곤 합니다. 이는 땅과 하늘, 인간과 하나님을 혼동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단순히 속마음을 털어놓는다는 뜻이 아닙니다.....어느 누구도 자기 스스로는 기도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기도에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2)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는 비뚤어져 있기 때문에 결코 하나님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방식이 아니라면 우리는 기도할 수 없습니다!3)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방식이 아니라면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에서조차 우상숭배를 저지를 것입니다!4)
존 머레이(John Murray)는 『Collected Writings of John Murray』 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수용가능한 방법이란 하나님께서 스스로 제정하신 것들과 따라서 그의 계시된 의지에 의해 제한된 것들이다. 그분은 거룩한 성경 안에 규정하신 것 외에 어떠한 다른 방식으로도 예배 받지 않으신다.” G. I. 윌리암슨(G. I. Williamson)은 『The Singing of Psalms in the Worship of God』 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적절한 방법이 무엇인가?....오직 그가 의지하신 대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적절하다. 이 말은 그의 말씀에서 명령하시고 제정하셨거나 규정하셨던 방식대로만 예배하는 것을 의미한다” 라고 말합니다.5)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의 구성요소 하나하나마저도 “우리의 필요에 따라 마음대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점에 단호해야 합니다. 오늘날에는 은혜만 된다면 형식은 어떻든지 괜찮다고 생각하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형식조차도 마음대로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았습니다. 예배시간에 토크쇼나 간증을 하거나, 설교 대신 꽁트나 연극, 패션쇼를 하거나, 예배를 나이트 클럽에서 드려도 된다고....누가, 누구의 권위로 인정해 주었습니까? 예배가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이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더 신중해야 합니다.
찬송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시편을 불러야 합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제일 일차적인 대답은, “적어도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 인간적인 것이 들어가서는 안 된다”라는 고백입니다. 예를 들어 축도를 생각해 보십시오. 개혁파 교회들은 성경 말씀에 기록된 대로만 축도하지6) 거기에 사람의 말을 집어 넣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성경말씀을 통해 복주시겠다고 하신 것으로 족한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다가 자꾸 사람의 말을 더하는 이유는 “말씀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개혁파 교회들은 축도 뿐 아니라 예배 순서 안의 어떤 요소들에도 성경말씀만을 가지고 말하지 사람의 말을 집어 넣지 않습니다(예를 들면 ‘예배 부름’이나 ‘축복의 인사’, ‘사죄의 선포’등에서도 일절 성경 말씀 외 다른 것을 넣어 말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말이 개입될 소지를 극도로 줄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에 너무 무감각한 이유는 “우리가 너무 지혜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몸에 익었기 때문입니다.
찬송에 있어서도 그 찬송이 “사람의 말”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성경 본문 자체를 가사로 하는 것만을 예배 시에 불러야 합니다. 찬송가를 1800년대에 유통되던 가스펠송을 가지고 만들어 놓다보니 한국교회의 찬송가에는 얼마나 문제가 많습니까? (한국교회 찬송가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뒷부분에서 잠깐 다루겠습니다)
II. 시편찬송의 당위성 1 : 성경적 근거
본질적이고 가장 중요한 것으로서 예배 때 불러야 하는 찬송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사로 한 노래들이어야 한다”는 점은 앞 장에서 살펴본 내용으로 동의가 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제 이후의 내용들에서는 교회가 시편찬송을 불러야 하는 근거를 크게 두 가지 주제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는 “성경적 근거”입니다. 성경 말씀이 과연 시편 찬송을 부르도록 말씀하고 있는지를 살피는 것을 통해서 시편찬송의 당위성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역사적 근거”입니다. 역사적 근거는 다른 말로 하자면, “과연 우리의 선조들은 시편을 찬송해 왔는가?” 혹은 “과연 이전 시대의 모든 교회들은 시편을 예배의 노래로 사용해 왔는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먼저 성경의 근거들을 살펴보도록 합시다.
1. 구약에서
먼저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구약백성들이 시편을 노래했다는 여러 증거들을 읽을 수 있습니다.
1) 시편 자체가 찬송가이다
먼저 시편 자체가 이것을 증언합니다. 시편은 원래가 노래로 지어졌습니다. 그리고 구약시대에 시편은 구약백성들의 찬송가였습니다.
시편에는 많은 경우 표제가 달려 있는데 이 표제들은 이 시편들이 공예배시에 사용되었음을 보여줍니다. 표제 중 많은 것들이 음악기호입니다. 어떻게 노래해야 할 것인지를 알려주는 표시입니다. 많은 시편 표제에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등의 표제가 붙어 있습니다. 많은 시편 표제에 “절기와 연관된 구절”이 있습니다.
시편은 원래가 구약 백성들의 찬송가였습니다.
2) 대상16장
역대상 16장 말씀은 다윗이 궤를 매어 올 때의 상황입니다. 다윗이 궤를 매어올 때의 모습이 4절 이하부터 나타나는데 레위 사람들이 찬양하고 나팔을 불면서 시편을 노래합니다. 8절 이하의 인용구는 시편 105편 말씀입니다. 34절은 이 ‘위대한 할렐’7) 구절의 직접적인 인용입니다.
역대상 16장의 말씀은 이스라엘의 중요한 축일에 시편을 불렀다는 직접적인 인용입니다.
3) 대하20:21
“백성으로 더불어 의논하고 노래하는 자를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하며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 자비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게 하였더니”
역대하 20장의 이 구절은 여호사밧이 백성들을 이끌고 나갈 때의 장면입니다. 이 장면에서도 시편의 할렐 구절이 등장합니다. 우리는 이런 구절들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공적인 예배나 의식, 혹은 전쟁에서조차도 시편을 불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4) 사30:29, 겔40:44
이사야 30장 29절 말씀은 거룩한 절기를 지킬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노래를 불렀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에스겔 40장 44절 말씀은 성전 안뜰에 노래하는 자들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들이 여기에서 부른 노래들이 시편이었다는 것은 신약성경의 구절들을 살펴보면 매우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2. 신약에서
신약 시대에 이르러서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시편을 불렀다는 것은 매우 많은 곳에서 나타나 있습니다. 회당에서 혹은 절기에 시편을 부르는 것은 유대인들의 오랜 전통이었고, 예수님께서도 제자들과 시편을 노래했습니다. 그리고 신약교회가 성립되고 나서는 서신들을 통해 사도들이 교회에게 시편을 노래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1) 마26:30 “이에 저희가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나아가니라”
마태복음 26장에서는 우리 주님께서도 제자들과 함께 시편을 노래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자체에는 ‘찬미하고’라고 밖에 되어 있지 않지만, 예수님 당시 절기 때 유대인들이 ‘할렐’을 불렀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헤르만 리델보스는 마태복음 주석에서 이 부분의 노래가 무엇인지에 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여기에 언급된 찬미는 할렐의 두 번째 부분을 부르는 것으로, 유월절 의식의 마지막 순서였다. 할렐의 첫 번째 부분(시편 113편, 어떤 사람은 114편도 포함)은 유월절 정찬을 들기 전에 불렀다. 만찬이 끝난 후에는 두 번째 부분을 부르는데, 이것은 시편 114편(혹은 115편)으로 시작하여 118편으로 끝났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음을 얼마 남겨 놓지 않고 예수님과 제자들은 구원과 찬양에 대한 옛 이스라엘의 찬송을 함께 불렀다(시116편과, 특히 118편을 보라). 그리고 그들은 성을 떠나 감람산으로 갔다.”8)
2) 고전14:26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고린도전서에 나와 있는 ‘찬송시’라는 것은 “너희가 모일 때에”라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분명 공예배 시를 가리킵니다. 뿐만 아니라 문맥을 보아도 14장 26절 이하의 말씀들은 성도들이 예배로 모였을 때 어떻게 방언과 예언을 사용할 것인지에 관한 지침을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신약교회가 함께 예배로 모였을 때 그들의 예배 순서에 ‘찬송시’라는 것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찬송시’라는 말, 헬라어 ‘프살모스’는 ‘시편’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구약성경의 헬라어 역본인 70인역에서 ‘시편’을 가리키는 말이 ‘프살모스’이며,9) 실제로 전체 시편 중 총 57편의 시편에 ‘프살모스’라는 제목이 붙어 있기 때문에 ‘프살모스’가 시편 책 전체의 타이틀이 되었습니다. 영어로 시편을 의미하는 Psalm 혹은 Psalter 라는 말이 바로 헬라어 ‘프살모스’에서 유래한 것입니다.10)
이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바는 신약교회가 초창기부터 모여서 함께 예배할 때 예배찬송으로 시편을 사용했다는 점입니다.
3) 엡5:19와 골3:16
엡5:19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골3: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앞에서 설명한 ‘프살모스’는 신약성경에 총 7번만 나오는데(눅20:42,44; 행1:20;13:33; 고전14:26; 엡5:19; 골3:16), 이 중에서 시편을 인용하면서 ‘시편’이라고 번역된 것이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구절들이고, ‘시편’이라고 직접 인용되지 않고 신약성도들의 예배나 삶과 연관되어 나타나는 구절이 뒤의 세 구절들입니다.
- 고린도전서 14:26은 앞에서 설명한 대로 고린도 교회가 공적 예배를 드릴 때 사용했던 ‘찬송시’를 말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 에베소서 5:19과 골로새서 3:16에서는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이라고 언급되었는데, ‘시’가 ‘프살모스’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이 두 구절에서는 한 가지 더 살펴야 할 점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에서는 시편이 단지 ‘찬송시’라고만 언급되었는데,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에서는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라고 언급되었습니다. 이 말은 신약교회가 예배할 때 시편 외에도 ‘찬송’이나 ‘신령한 노래’라는 것이 더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까? 이것은 예배 안에 시편 외에 사람들이 창작한 노래들을 끼워 넣어도 된다는 것을 암시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앞에서 ‘프살모스’가 시편에서 총 57회 제목으로 붙어 있기 때문에 그것이 시편 전체의 제목이 되었다...라고 했습니다. 즉 ‘프살모스’는 시편의 ‘대표 이름’이지만 시편에는 프살모스라고 제목이 붙어 있지 않은 다른 시편들도 있다는 말입니다.
다른 시편들에는 다른 제목들이 붙어 있습니다. 70인역 성경의 시편을 보면 57개의 시편에 ‘시’(프살모스)라고 붙어 있고, 6개의 시편에는 ‘찬미’라고 붙어 있습니다. 35개의 시편에는 ‘신령한 노래’라고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11) 즉 고린도전서가 ‘찬송시’(프살모스)라고만 말할 때는 시편의 대표 표제를 말한 것이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라고 할 때는 시편을 조금 더 상세하게 지칭한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약교회가 시편 외의 다른 찬송을 부르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고린도전서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의 말씀들 역시 신약교회의 하나님의 백성들이 함께 모여 하나님을 찬양할 때 무엇을 사용했는지를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편을 부르는 일이 오늘날의 우리에게나 색다른 일이지, 구약과 신약의 성도들에게는 아주 당연한 것이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4) 참고 : 성도의 생활에서 나타나는 시편들
우리가 성경시대의 하나님의 백성들의 압도적인 노래가 시편이었다는 것을 이해하기만 한다면, 성경에 나타나는 수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찬미들이 시편을 어떻게 강조해주고 있는지를 쉽게 알게 됩니다.
예를 들자면 야고보서 5장 13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라고 말씀하셨을 때에 ‘찬송할지니라’는 무슨 찬송가를 가지고 노래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시편찬송입니다. 실제로 야고보서 5장 13절의 ‘찬송할지니라’라는 단어는 ‘프살모스’의 동사형 ‘프살로’입니다. 즉 ‘시편찬송을 하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찬송가가 시편이었다는 점을 알고 있다면 성경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찬미들은 모두 시편을 의미한다는 통찰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옥에 갇혔을 때 무엇을 노래했을까요? 시편을 노래하지 않았을까요? 히브리서 2장 12절 말씀의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라고 할 때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한다”는 것은 무슨 노래를 일컫는 것일까요? 시편을 찬송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교회 중에서, 즉 회중 가운데에서의 찬송이라면 당연히 시편을 연상케 됩니다)
우리는 시편이 ‘교회의 노래’, ‘예배의 노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삶 가운데에서 불렀던 노래들도 역시 시편이었을 것이라는 점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3. 단지 그 시대의 찬송이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 아닌가?
성경적 근거들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는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신구약 성경에 찬송과 관련된 것들이 다 시편일 수밖에 없는 건 그 당시에 찬송가라곤 그것밖에 없어서가 아닌가? 오늘날처럼 찬송이 많은 경우에는 굳이 왜 시편만을 불러야 한다는 것인가?”
이에 대한 대답은 간단합니다. 이것은 이렇게 물어보면 쉽습니다. “왜 교회는 그 오랜 기간동안 예배나 절기를 위한 ‘새 찬송’들을 만들지 않았을까?”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은 현대처럼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는 일에 ‘인본주의적이고’, ‘자유로운’ 시대가 아니었던 때에는 훨씬 더 조심스러웠습니다. 누구도 예배 안에 어떤 요소를 쉽게 가져올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수많은 다른 노래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예를 들어 ‘이스라엘 민속찬양’ 같은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을 “예배 자리로는”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일반적인 노래들은 반드시 일반적인 생활의 자리에서만 불려졌을 뿐,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에서는 반드시 ‘영감된 가사를 가진’ 성경 말씀으로 된 찬송만을 불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원리적으로 그들과 같은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다른 많은 노래들이 있을지라도, 다른 많은 복음송들이 있을지라도,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는 반드시 “영감된 가사를 가진 시편만을”(혹은 더 추가한다 할지라도 성경구절을 가사로 가진 찬송만을)12) 불러야 하는 것입니다.
III. 시편찬송의 당위성 2 : 역사적 근거
그렇다면 이제 시편찬송의 당위성을 말하기 위해 역사적 근거를 살펴보도록 합시다. 아마 우리는 이제 “성경 시대의 사람들이 시편을 부른 것은 당연하다”라고 이해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이후의 사람들은 어떠했을까요? 성경에 나타나는 그 시기 이후에 시편찬송은 실종되어 없어져 버렸을까요?
1. 초대교회 시기
1) ‘위대한 교회사가’라고 불리는 필립 샤프는 그의 책 “기독교회의 역사”라는 책에서13) “사도시대 이후 초대 교회 기간에는 찬송가(Hymn)는 없었고, 오직 시편 찬송밖에 없었다”라고 말합니다. 알려진 역사적 사료 안에서는 초대교회 시절에 시편 찬송 외에 공예배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다른 노래는 없었습니다.
2) 뿐만 아니라 4세기의 교부인 크리스소톰의 여섯 편의 설교에 보면14) “모든 사람이, 모든 장소에서, 모든 경우에 불러야 할 노래로 시편을 이야기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3) 주후 360년에 열린 라오디게아 공의회에서는 교회안에서의 ‘찬송가’(Hymn)를 금지하는 결정을 하였습니다. 교회가 찬송가를 금지하는 결정을 했다는 말은 당시 찬송가가 많이 유행했다는 현실을 반영합니다. 당시 이단들에 의해서 교회 안에 시편 찬송 대신 Hymn이 유입되기 시작했으며 공의회는 이의 확산을 막기 위해서 공식적으로 교회 안에서는 찬송가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결정에만 비추어 보더라도 주님의 교회는 항상 시편만을 예배시에 불러왔습니다.
2. 중세 암흑기
중세로 접어들면서 성경 말씀 뿐 아니라 찬송도 암흑기가 찾아왔습니다. 로마교회는 신자들의 손에서 성경을 빼앗아 갔을 뿐 아니라, 입술에서 찬송도 빼앗아 갔습니다. 성경말씀도 일반 성도들이 읽을 수 없는 라틴어로만 전파했고, 찬송도 오직 사제들로 구성된 찬양단원들만 부를 수 있었습니다. 성도들은 단지 구경꾼에 불과했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서는 성도들이 함께 찬양하기도 하지만, 중세 교회의 흉내를 내는 장면이 있습니다. 성가대가 그것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이 중세로부터 해방시킨 것은 “성도들 중 누구도, 예배 시간 중 어떤 순간에도 특정 사람들만 찬양을 부르고 나머지 사람들은 구경꾼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종교개혁의 후예들이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스스로 중세의 제도들을 다시 부활시켜 “찬양을 구경하는 시간을 만든 것”은 매우 가증스런 일입니다. 특히 예배 안에 ‘칸타타’나 ‘성가 발표회’같은 시간을 가지는 일은 성도를 찬양에서 배격시키는 일과 예배를 발표회로 전락시키는 두가지 죄를 동시에 저지르는 일입니다.
3. 종교개혁기
종교개혁자들은 종교개혁을 통해서 단순히 ‘성경중심’만 회복한 것이 아니라, 교회생활도 함께 회복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루터나 칼빈이 단순히 ‘교리적’ 회복이나 ‘설교의’ 회복만을 가져왔다고 알고 있지만, 실제로 개혁자들은 교리나 설교 못지 않게 “교회 생활 자체”를 변혁시키는데도 큰 힘을 쏟았습니다. 로마교회의 예배는 “설교가 중심에 있는” 하나님과 언약적 교제를 누리는 예배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죽으심을 당하는 제사가 시행되는” 미사15)였습니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자들이 로마교회의 미사를 완전히 배격하였을 때 완전히 새로운 예배형식이 필요했습니다. 루터나 츠빙글리도 예배형식을 만들었고, 종교개혁자들끼리 영향을 받았지만, 마르틴 부서나 칼빈은 오늘날 개혁교회가 받아들이고 있는 예배 예전의 뼈대를 형성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예배 예전에서 칼빈은 “시편 찬송을 불러야 할 것”에 대한 기초를 놓았습니다.
1) 위클리프와 후스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 성경을 번역하고, 종교개혁 정신의 토대를 놓았던 위클리프나 후스는 교회에 시편 찬송을 소개했습니다.
2) 칼빈
칼빈이 파렐의 요청을 받고 제네바 교회에 처음 부임했을 때(1536년 7월) 그가 가장 먼저 한 두 가지 일이 “신앙고백서를 작성한 일”(1536년, 21개조)과 “교회 조직과 예배에 관한 조항들”(1537년 1월)을 작성한 일입니다. 여기에서 칼빈이 추구한 바가 드러납니다. 칼빈은 1) 신앙고백서를 통해서 자녀들과 기본적인 교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사람들을 가르치기를 원했고, 2) 교회 조직과 예배에 관한 조항들을 통해서 교회의 구조를 성경적으로 만들고자 하였습니다.
이 때, 1537년 1월에 제출한 이 “교회 조직과 예배에 관한 조항들”에 시편 찬송을 불러야 한다는 항목이 들어가 있습니다. 각 조항의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들입니다.
1) 성찬과 출교의 권리를 교회에 일임할 것
2) 혼인예식을 로마교회의 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방식으로 집전토록 한 것16)
3) 자녀교육, 요리문답 작성17)
4) 예배에서 시편 찬송을 부른다.
칼빈은 설교만 한 사람이 아닙니다. 칼빈이 담으려고 했던 교회의 모양은 “설교만 성경대로 행해지는 교회”가 아니라, “교회의 모든 생활이 성경 말씀의 지배를 받는 교회”였습니다. 우리가 오늘 강의에서 제일 앞부분에 다루었던 것과 같은 내용입니다. 개혁신앙이란 항상 사상 뿐 아니라 생활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제대로 나타나는 것을 말합니다.
칼빈은 이듬해인 1538년에(4월 25일) 시의회와 시민들에게 쫓겨나 스트라스부르크로 망명생활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칼빈이 쫓겨난 이후 엉망이 되어버린 제네바에서 다시 유능한 목사였던 칼빈을 청빙하기를 원하였고, 다시 제네바로 칼빈이 돌아갈 때에는 교회를 제대로 개혁할 수 있는 요구를 하게 됩니다.
하지만 칼빈이 스트라스부르그로 후퇴했을 때, 거기에서 마르틴 부서를 통해서 예배 예전과 시편 찬송에 대한 많은 도전을 받고 실례들을 보고 배웠으며, 그래서 그 기간 동안 찬송책을 실제로 만들게 되었습니다. 1538년에 19개의 시편18)과 시므온의 노래, 십계명과 사도신경이 포함된 시편찬송을 만든 것입니다.19)
이후 1542년에 “The form of Praters and Ecclesiastical Songs”(기도문과 교회 찬송가)라는 이름을 가진 찬송책이 출판되었습니다.20) 여기에는 30개의 시편이 더 추가되었습니다.21) 후에 제네바 아카데미의 학장이 된 테오도르 베자가 시편 운율화 작업에 참여하였고, 1551년판, 1559년판이 베자의 수고에 의해 만들어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최초의 완성된 시편찬송이 1562년에서야 그 모습을 완전히 갖추게 되었습니다. 칼빈에 의해 시작된 시편찬송의 작업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노력에 의해 무려 20년에 걸쳐 이루어진 작업이었습니다.
3) 마틴 루터
루터는 사실 예배 예전을 개혁하는 데 대해서는 매우 주저한 편이었습니다. 루터는 전반적으로 신앙의 외적인 면조차도 성경이 말씀하는 데로 개혁하는 데 대해서는 소극적이었기 때문에 루터파 교회들과 성공회 교회들은 지금도 거의 로마교회와 비슷한 예전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루터 역시 교회가 시편을 노래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대체로 의견이 일치했습니다. 그는 찬송의 정의를 “음악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22)이라고 이해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 설교되지 않을 때, 사람은 노래할 수도 읽을 수도 심지어는 함께 나아올 수도 없다”23)고 말했습니다. 즉 그에게 있어 찬송이란 철저히 “말씀을 위한 종속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루터는 사람의 저작과 경험으로부터 찬송을 끌어내는 것에 대해 찬성하지 않았습니다. 더 나아가 그는 사람의 본성은 스스로가 성령과 진리로 예배할 수 있는 것처럼 믿도록 이끄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했고, 따라서 오직 성경만이 공예배에서 찬송의 역할을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24) 루터는 찬송 역시 반드시 구원을 선포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25)
4. 종교개혁 이후
1618-19년의 도르트 회의26)는 “교회 질서 제 69항”에서 “시편 150편만이 교회 안에서 유일한 찬송이 되어야 한다”고 결의했습니다. 이러한 도르트 회의 등의 영향 하에 있는 현대의 개혁교회들은 현재에도 모두 시편찬송만을 예배시에 사용합니다. 개혁교회들 중에서도 간혹 자유화되는 교단들이 있어, 이들은 현대의 음악들을 받아들이기도 하지만, 개혁신앙을 고수하는 개혁교회들은 늘 시편을 불러왔고 지금도 그러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직접 시편 자체를 거론하지는 않지만 앞에서 여러 번 인용했던 대로 예배에서 인간의 말이 점하게 되는 것의 위험을 여러 곳에서 경고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작성자들 중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청교도들은 예배 예전에 있어서 가장 엄격함을 유지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날에도 미국을 예를 들자면 북미 연합 장로교회는 1905년부터 두 번의 대회를 열었는데27) 두 대회 모두가 예배에서 시편 찬송을 부르자는 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모인 것이었습니다.
이후에도 개혁파 교회들과 전통적 장로교회들은 시편찬송을 부르는 전통을 잃어버리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전 세계의 개혁교회들은 예배시간에 ‘오로지 시편찬송만을’ 찬송합니다. 이 신실한 사람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 인간적인 것이 조금도 유입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에 종교개혁기 때 개혁자들에 의해 다시 수립된 시편찬송을 부르는 전통을 5백년이 지난 지금도 그대로 고수하고 있습니다.
5. 왜 우리는 이 전통은 받지 못했는가?
그러면 왜 우리는 ‘시편 찬송’이라는 말조차 듣지 못했을까요? 그것은 우리가 미국교회가 전적으로 이 전통으로부터 이탈하던 시기에 복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 복음이 전파되는 시기는 미국 내에서도 2차 대각성 운동을 주도한 찰스 피니 등의 영향력이 확산된 때였습니다. 전통적으로 교리를 가르치고, 엄격한 예전을 가르치던 교회들을 천막집회와 간증, 부흥사와 찬양집회가 대신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던 교회가 심리학적 도구를 가지고 사람들을 웃고 울리는 집회들로 대치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 건너온 선교사들은 비록 복음에 대한 열정은 대단했지만, 자신들이 이러한 시대적 영향력 하에 태어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 영향력을 고스란히 우리나라 교회 안에 쏟아부었습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 부흥회나 간증 집회에 많이 쫓아다닌 경험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우리의 선교 배경이 그러했기 때문입니다.
IV. 시편찬송의 당위성 3 : 실제적 효과 + 찬송가의 문제들
1. 시편의 유익
교회가 시편을 노래함으로써 얻게 되는 유익은 매우 큽니다. 전통적으로 유럽 대륙에서 자란 많은 신학자나 목회자들이 시편으로 하나님을 노래하는 것의 엄청난 유익들을 많은 글에서 이야기합니다. 본회퍼가 말하는 시편찬송의 유익을 한 번 들어봅시다.
“주일마다 혹은 매일 시편을 돌아가면서 함께 읽거나 노래로 부르는 교회가 많습니다. 이러한 교회들은 엄청난 부요함을 누립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단지 시편을 매일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의 기도책을 통해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시편의 기도들은 가끔씩 읽기만 해도 우리가 또 다시 더 가벼운 음식물에 매달리지 않도록28) 우리의 생각과 힘을 매우 강하게 해 줍니다. 시편을 규칙적으로 진지하게 기도하기 시작한 사람은 자기가 사용하던 다른 기도책을 내던져 버리며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아! 이 기도책은 내가 시편에서 발견한 것과 같은 풍부함과 힘, 그리고 그 강렬함과 열정을 주지는 못하는구나! 너무 냉랭하고 너무 무덤덤하다(루터).”29)
칼빈은 공교회가 시편을 찬송해야 하는 이유를 세 가지로 말했습니다.
첫째, 시편찬송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둘째, 시편찬송은 교회 회원들의 믿음을 강화한다.
셋째, 시편찬송은 그리스도의 분량에까지 자라나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칼빈이 말한 이유를 읽으면서, “뭐야? 저런 건 CCM을 부르면서도 얼마든지 가능한 거잖아?”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스스로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교회 회원의 믿음이 강화되거나 그리스도의 분량에까지 자라난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칼빈이 말한 교회가 시편찬송을 부르는 세 가지 목적, 다른 한편으로는 얻게 되는 세 가지 유익을 캐나다 개혁교회 파브르 교수(R. Faber)가 정리한 내용을 읽어 봅시다.
“1) 찬송을 부르는 근본적인 목적은 믿음에 대한 우리의 반응을 표현하거나 그에 대한 우리의 감정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로 인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칼빈은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는 올바른 방법에 관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정확한 원칙은 시편에 기록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찬송을 드림에 있어 초점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습니다.....하나님을 송영하는 데 있어서 어떤 특정한 시대의 미적인 가치나 그 시대의 문화가 방해의 원인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2) 공예배 시에 시편찬송을 부르는 두 번째 목적은 신자의 믿음을 강화시키는 데 있습니다.....시편찬송은 우리의 마음에서 세속적인 것을 내려놓게 하며 영적인 것을 착념하는데 도움을 줍니다. 그리스도의 회중들이 마음과 입술로 찬양함으로써 하나님 말씀에 더욱 착념하도록 고무시킵니다.....시편을....부름으로써...그리스도의 회중들이 시편 말씀에 대한 이해를 진전시킬 수 있게 됩니다.
3) 시편찬송을 부르는 세 번째 목적은 하나님의 은혜의 효과들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시편찬송은 슬픔과 고난의 시기에 있는 그리스도의 회중들을 격려하며 힘을 북돋우는 역할을 합니다.30) 또한 시편찬송은 자신의 죄와, 그리스도의 속죄와, 순종의 요구들에 우리의 주의를 집중시킵니다....이러한 이유로 인해 칼빈은 ‘우리 심령의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목소리와 찬미’....라고 하였습니다.”31)
실제로 화란에 유학한 교수님들의 말을 들어보면, 화란 출신 학생들을 한국 학생들이 절대로 따라갈 수 없는 부분이 두 가지 정도가 있는데, 하나는 교리문답이나 신앙고백서에 대한 이해도이고, 다른 하나는 시편에 대한 이해라고 합니다. 이 둘 모두 그들은 평생 동안 교회와 학교에서 배워온 것들입니다. 한국 학자는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도(시편으로 박사를 받은 사람이라도) 시편의 구석구석에 숨어있는 구절들을 시기적절하게 인용하는 능력을 거의 갖추지 못합니다. 하지만 평생을 시편찬송을 불러온 개혁교회의 성도들은 이런 일들을 자유자재로 합니다.
2. 찬송가의 문제점들
그러면 이제 잠깐 짚고 넘어갈 문제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찬송가들의 문제점에 대해 간단히 생각해 봅시다.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우리나라의 찬송가는 그 태생이 부흥집회 때 불려졌던 가스펠입니다. 성가대와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은 ‘찬송가’를 매우 신성시하고, 예배 시간에 찬송가 외에 가스펠을 부르는 것에 기겁하는 경향들이 있어 왔지만, 사실 이것이 우스운 일인 이유는 우리 찬송가는 200년 전의 가스펠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의 접합성”이라는 점에서 따져 볼 때, 찬송가와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따위의 노래와는 전혀 아무런 격의 차이가 없습니다. 둘 다 그저 가스펠일 뿐입니다.
오히려 90년대 이후 ‘경배찬양’이라는 장르가 생기면서 오히려 현대의 가스펠이 찬송가보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는 훨씬 더 좋은 곡들이 많습니다. 실제 한국교회 찬송가의 곡들 중에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가 아니라 “신세한탄조”의 노래들이 많습니다. 이런 노래들 보다는 오히려 요즘의 경배찬양들이 찬송으로는 더 좋습니다.32)
찬송가의 문제점은 몇 가지로 구분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간단히 언급해 보겠습니다.
1) 찬송가 가사가 성경말씀과 다른 경우(장수는 옛날 찬송가 장수입니다)
예를 들어 “나의 사랑하는 책”(234장) 같은 곡의 가사에 보면 “주의 선지 엘리야 병거 타고 하늘에”라는 가사가 나온다. 하지만 성경에는 분명히 불수레와 불말은 엘리야와 엘리사 사이를 격하고 엘리야는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주 예수 해변서”(284장)라는 찬송도 그렇습니다. 여기 보면 주님께서 오병이어 기적을 내린 장면을 “해변서” 벌어진 일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성경말씀에 의하면 오병이어가 일어난 지역이 바다와 가깝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요한복음 6장 3절에 의하면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이 함께 거기 앉을 때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5절) 이들에게 떡을 먹이는 일을 행한 것입니다. 이곳이 바다 근처이기는 하지만 오병이어가 일어난 곳은 산쪽입니다. 그리고 10절에 의하면 “거기에 잔디가 많았다”고 합니다. 우리가 “주 예수 해변서 떡을 떼사”라고 노래하면 꼭 바닷가 모래밭에 앉아서 떡을 뗀 것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성경의 언급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찬송가 가사의 틀린 부분들은 단순히 가사가 틀렸다...가 문제가 아니라, 인간적인 실수가 들어갈 수 있는 가사를 가지고 예배에 사용하면서 하나님을 노래하니까 문제라는 것입니다. 틀릴수도 있는 가사를 가지고 예배에 사용한다! 끔찍한 일이 아닙니까?
2) 아예 찬양 자체가 아니고 사람이나 다른 대상을 높이는 노래
이런 찬송가도 많습니다. 예를 들어 어버이날에 많이 부르는 “어머니의 넓은 사랑”(304장)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입니까, 어머니를 찬양하는 노래입니까?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면서 어머니를 칭송하는 설교나 찬송을 한다는 것이 너무 이상하지 않습니까?
마찬가지의 맥락에 있는 많은 찬송들이 있습니다. “가슴마다 파도친다 우리들의 젊은이”(303장)는 청년들을 칭송하고 북돋우는 노래이지 찬양이 아닙니다. 5월에 많이 부르는 “사철에 봄바람 불어 있고”(305)와 같은 노래는 가정을 찬양하는 노래입니까?
“어둔 밤 마음에 잠겨....계명성 동쪽에 밝아 이 나라 여명이 왔다”(261장).... 이것은 마치 1970년대에 새마을 운동가로 어울릴 듯한 노래인데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송가로 불리워지고 있습니다. “어느 민족 누구게나 결단할 때 있나니”(521장) 이 역시 민족정신을 함양하기 위한 선동적인 노래는 될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는 아닙니다.
3) 잘못된 교리를 가지고 있는 노래들
잘못된 교리를 가지고 있는 노래들도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성령’과 관련된 노래들은 예배시간에 부를 때마다 몹시 불편했습니다. 내가 믿는 성령론이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개혁신앙인이라면 우리는 “불길 같은 성신여”(173장)라든가, “주여 성령의 은사들을 오늘도 내리어 주소서”(178장) 따위의 노래를 부르지 말아야 합니다.
528장의 “주여 나의 병든 몸을”과 같은 찬송은 전형적인 은사주의자들의 찬송입니다. 우리는 신유에 대해 그런 견해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325장의 “주 예수 대문 밖에” 같은 곡들은 내가 문을 걸어잠궜으니 주님께서 못 들어오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얼마나 끔찍한 가사입니까? 그리고 앞에서도 나왔지만 “어둔 밤 마음에 잠겨”(261장) 같은 찬송가는 김재준 씨가 지었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을 받아들이지 않고 배격하는 교회들인 우리가, 어떻게 찬송가는 국내에 자유주의 신학을 전파하는 선봉장이었던 사람의 노래를 부른다는 말입니까?33)
4) 찬양의 취지에 맞지 않는 신세타령
그리고 한국교회 찬송가에서 엄청나게 많이 발견할 수 있는 노래들이 바로 이런 신세한탄조의 노래들입니다. 비록 그것이 신앙적인 동기와 결부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예배시간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는 굉장히 부적합한 것입니다.
290장 괴로운 인생길 가는 몸이
330장 고통의 멍에 벗으려고
440장 멀리 멀리 갔더니 피곤하고 곤하여
5) 모든 이에게 공유될 수 없는 개인적 경험
그리고 찬양이 회중이 하나님께 함께 드리는 공동의 찬송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지극히 사적인 경험은 찬송의 소재가 될 수 없습니다. “나 어느 날 꿈속을 헤매며”(84장)와 같은 찬송은 꿈에서 헤매며 주님을 만나지 않은 사람에게 어떻게 찬송이 될 수 있습니까? “저 장미꽃 위에 이슬 아직 맺혀 있는 그 때에 주의 음성을 들은” 경험이 없는 사람에게 어떻게 그것이 찬송이 될 수 있습니까? 어머니의 무릎을 베고 성경을 듣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나의 사랑하는 책 비록 해어졌으나 어머님의 무릎 위에 앉아서”라고 찬송할 수 있습니까?
V. 시편찬송과 관련한 몇 가지 내용들
시편찬송에 대해 간단한 내용들을 개관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실제로 시편찬송을 부르고 있는 교회들에 대해 몇 가지를 소개하는 것으로 글을 맺겠습니다.
1. 캐나다 개혁교회 시편찬송 서문
개혁교회가 사용하는 시편찬송에는 찬송 뿐 아니라 신앙고백서와 예배 예전 서식들 등이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시편찬송에 대해 도움이 될 듯하여 서문을 그대로 싣습니다. 내용은 이전에 저희 교회에서 공부하기 위하여 번역한 것입니다.
캐나다 개혁교회 시편찬송가 서문
trans. by SeokJun Yun
‘찬송책: 앵글로 제네바 시편(The Book of Praise: Anglo-Genevan Psalter)’은 캐나다 개혁교회들의 공적 예배에서 중요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 제목의 “찬송(praise)”이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히브리서의 한 구절을 떠올리게 한다: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13:15). 하나님의 자비와 신실하심 때문에, 공적예배는 하나님의 자기 백성과의 만남이다. 그의 말씀에 대한 응답으로 우리는 시편찬송(psalms)과 찬송가(hymns)들로 우리의 찬양의 제사를 올려 드린다. 또한 신조들과 신앙고백서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고백하는 입술의 열매들이다.
우리의 ‘찬송책’은 세가지 주요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각 부분들은 우리의 개혁 유산들을 일깨워주는 데 봉사하고 있다: 시편찬송, 찬송가, 교리표준, 그리고 예전예식서와 기도문들.
개혁교회들은 항상 하나님의 언약의 노래들의 모음집으로서의 시편에 커다란 가치를 두어 왔다. 첫 번째 완성된 시편찬송은 제네바에서 1562년에 출판되었다. 4년후 제네바 선율이 페트루스 다테누스(Petrus Dathenus)에 의해 그의 시편 화란어 운율역에 붙여졌다. 제네바 시편찬송은 그 이후로 쭉 종교개혁 교회들과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되었다. 화란에 있는 개혁교회[해방파] 회원들이 2차 세계대전 이후 북아메리카로 건너와 캐나다 개혁교회를 세우게 되었을 때, 그들은 제네바 시편 찬송에 대한 그들의 존중을 함께 가지고 왔다. 1954년 초에 우리 교회들의 최초의 총회는 영어로 그와 같은 시편찬송을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을 연구토록 위원회를 임명했다. 1972년에 최초의 완전한 ‘찬송책: 앵글로 제네바 시편(The Book of Praise: Anglo-Genevan Psalter)’이 제시되었고, 전체 시편의 영어 운율판이 최초로 16세기의 공인된 제네바 시편 멜로디에 맞춰 불리워질 수 있게 되었다. 현재의 본문은 이 시편찬송의 개정작업을 통한 것이며, 1980년 총회에 의해 결정판으로 받아들여졌다.
개혁교회 예전에서 시편찬송이 탁월한 입지를 가짐에도 불구하고, 우리 교회들은 성경적인 찬송가들(hymns)의 사용을 제외시키지는 않았다. 그것들 역시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구속의 사실을 노래할 때 감사를 올려드리는 찬양의 한 부분을 구성한다.
우리 교회들의 교리표준이 그 다음에 포함되어 있다. 화란 개혁교회들의 공교회적 본문들이 화란에 있던 영국과 스코틀랜드 피난민들로 구성된 교회들에 의해 영어로 먼저 번역되었다. 이 번역들은 미국 개혁교회(Reformed Church in America)에 의해 아주 약간만 개정된 형식으로 사용되었으며, 이후에 또한 기독개혁교회(Christian Reformed Church)와 캐나다 개혁교회(Canadian Reformed Churches)에 의해서도 사용되었다. 니케아 신경을 제외하고는, 우리의 신경들과 신앙고백서들은 지금은 더 현대적인 영어 번역판으로 출판되었고, 최근 총회들에서 받아들여졌다.
예전양식들과 기도문들은 세가지 주요 부분들로 이루어져 있다. 유아세례 집례를 위한 양식들과 주의 만찬을 위한 양식들, 그리고 페트루스 다테누스의 화란어 시편찬송(1566)에서 처음 나타나는 장엄한 결혼을 위한 예식서가 그것이다. 교회의 권징을 위한 양식들과 목회자의 임직, 그리고 장로와 집사들의 임직을 위한 양식들이 1586년 헤이그(Hague) 총회에서, 성인세례 집례를 위한 양식이 1618-19년의 도르트 총회에서 추가되었다. 이 양식들을 존대하여 캐나다 개혁교회들은 처음에는 뉴욕에 있던 화란 개혁파 개신교회에 의해 1767년에 출판된 판을 사용하였다. ‘찬송책’의 완전히 개정된 이 판에서 그것들은 더 최근에 받아들여진 양식들과 함께 출판되었다. 기도문들의 모음집도 종교개혁 시기로부터 기원한 양식들을 따른다; 이 또한 다테누스의 시편찬송에 실려있던 것이다. 이 기도문들의 영문판은 지금은 현대화되었다. 이 기도문들의 사용이 규정적인 것은 아닐지라도, 이것들은 공적, 그리고 사적 예배에서 대단한 가치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교회정치(The Church Order)는 처음에는 ‘찬송책’의 부록으로 간주되어 포함되었다. 이 문서는 1571년에 엠덴(Emden)에서 열린 화란 개혁교회 최초의 총회에서 기원하고 있다. 그리고 이는 후에 도르트 총회에서 개정되었다. 이 책에는 캐나다 개혁교회에 의해 채택된 개정판이 실려 있다.
우리는 이토록 오랫동안 기다려 이 판이 최종적으로 출판되게 될 수 있었던 것에 대해 감사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교회에 축복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 이 책의 사용을 통하여 우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게”(시22:3) 될 것이다. 오직 그분께만 지금부터 영원히 모든 영광이 함께 하시길!
캐나다 개혁교회 ‘찬송책’ 편찬 위원회 (이하 생략)
각 주
1) J. Kortering, "Psalm Singing : A Reformed Heritage"
2) 본 회퍼, 『본 회퍼의 시편이해』(홍성사, 2007), p.15
3) 잠28:9 “사람이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
4) 실제로 성경에는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하면서 우상숭배를 저지른 수많은 예가 기록되어 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을 섬긴답시고 금송아지를 만들거나(출32장), 북이스라엘에서처럼 성전예배를 폐하고 마음대로 벧엘과 단에 성소를 지정하거나, 여로보암 왕처럼 제사장이 아닌 사람을 아무나 제사장으로 삼거나, 사사기의 미가 집안처럼 아무 곳에서도 우상을 만들어 하나님이라고 섬기는 것이다. 이런 예는 오늘날에도 아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5) R. Aasman, "시편과 찬송가를 노래함“, Clarion, VOLUME 48, NO. 23 NOVEMBER 12, 1999
6) 축도는 잘못된 말입니다만, 이해를 돕기 위해 이렇게 썼습니다.
7) ‘할렐’이란 유월절이나 오순절 등 절기 때 부르는 노래를 말한다. 특별히 시편 136편은 찬양구절이 계속 반복되어 나오기 때문에 ‘위대한 할렐’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8) 헤르만 리델보스, 『마태복음(하)』 (여수룬, 1999), p.750.
9) 눅20:42 “시편에 다윗이 친히 말하였으되...”; 24:44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등에서 ‘시편’이 ‘프살모스’이다.
10) 시편(Psalms 또는 Psalter)이란 말은 구약성경 그리스어 번역본 70인역에서 유래했다. 바티칸 사본(Codex Vaticanus, 기원후 4세기)에는 프살모이(Psalmoi)라는 원래의 제목과 비블로스 프살몬(Biblos psalmon, 시편)이라는 부제가 사용되었으며, 알렉산드리아 사본(Codex Alexandrinus, 기원후 5세기)에는 프살테리온(Psalterion)이란 명칭이 나온다.
11) J. Kortering, "Psalm Singing : A Reformed Heritage"
12) 개혁교회에서는 시편찬송을 부르지만, 이 시편찬송가 안에는 Hymn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한국교회가 사용하는 찬송가와는 전혀 다릅니다. 개혁교회의 Hymn은 반드시 성경구절만을 가사로 가지고 있습니다. 개혁교회가 시편찬송만으로 만족치 못하고 Hymn을 채택한 이유는 우리처럼 인본주의적인 이유가 아니라, 시편으로만 노래할 때는 신약적 성취로서의 그리스도를 노래하는데 약간의 부족함을 느꼈기 때문에 신약성경의 구절이나 십계명, 주기도문, 사도신경 등을 가사로 하는 Hymn을 도입한 것입니다.
13) Phillip Schaff,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Vol. I, p.463.
14) Mcclintock and Strong, "Biblical Theological and Ecclesiastical Cyclopedia", Vol. 8, p.735
15) 미사에 관하여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80 문: 주의 만찬과 로마가톨릭 미사는 어떻게 다릅니까?
답: 주의 만찬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십자가 위에서 단번에 이루신 한 번의 제사로 우리의 모든 죄가 완전히 사해졌음을 확증합니다. 주의 만찬은 또한 성령이 우리를 그리스도께 붙이셨으며,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몸과 함께 지금 하늘의 하나님 우편에 계시며, 그곳에서 우리의 경배를 받으시기를 원하심을 확증합니다. 그러나 미사는 사제들이 그리스도를 지금도 매일 산 자들이나 죽은 자들에게 베풀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한 죄 사함이 그들에게 없다고 가르칩니다. 미사는 또한 그리스도는 떡과 포도주 형식으로 몸이 현존하며, 그러므로 그 안에서 경배를 받게 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미사는 근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단번의 제사와 고난을 부인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비난받아 마땅한 우상숭배입니다.
16) 로마교회에서 혼인예식은 세례, 성찬과 같은 ‘성례’ 중 하나였습니다. 로마교회는 성경에도 없는 성례를 덧붙여서 일곱 개나 되는 성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세례, 성찬, 입교[성인식], 고해, 사제서품, 결혼, 종부[장례식]).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이 명령하고 있는 두 성례(세례와 성찬)만을 남겨두고 나머지는 모두 성례가 아니라고 공언했으며, 이는 당시 종교개혁자들이 로마교회를 치열하게 비판한 주제이기도 합니다. 기독교 강요에도 이 항목이 아주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17) 1년 중 특정한 시기에 아이들이 목회자 앞에 나와서 교리를 배우고 문답을 해야 했다. 부모는 여기에 기꺼이 애써야 한다.
18) 19편의 시편 중 칼빈이 직접 지은 것은 6편이었고, 대부분인 13편은 궁정시인이었던 클레멘트 마롯이 지었다. 칼빈은 스스로 시를 짓는 일에 능하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에 이후 대부분의 시편 운율화 작업에는 관여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이 일을 맡겼다.
19) K. Deddens, “우리의 시편 멜로디의 기원”, Fulfil Your Ministry
20) J. Kortering, 앞의 글
21) K. Deddens, ibid.
22) “Preface to Georg Rhau's Symphoniae Iucundae” (1538). 루터작품집. vol.53, 323 “노래라는 선물은 오로지 사람에게만 주어진 것으로서,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말과 음악 모두로서 찬양해야만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말하자면 음악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다.”
23) “공예배 규칙에 관하여”(1523). 루터작품집. vol.53 (ed.,U. Leupold; Philadelphia: Fortress, 1965), 11.
24) R. Faber, “공예배에서 시편찬송과 찬송가에 대한 개혁자들의 입장”, Clarion, Vol.50 (March 16. 2001)
25) ibid.
26) 도르트 회의는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대로, “칼빈주의 5대 교리”로 잘 알려진 내용들이 결정된 회의입니다. 도르트 회의는 기존의 전통적 신앙고백들(하이델베르크, 벨직)을 배척하며 성경적이지 않다고 가르친 야콥 알미니우스의 가르침을 심의하기 위해 모였던 개혁교회의 중요한 회의이며, 이 때 회의에 참석한 개혁교회의 회원들은 알미니우스의 가르침을 정죄하고, 알미니안 주의와 정반대되는 내용으로 ‘도르트 신경’을 작성하여 발표했습니다. 보통 현대 개혁주의 진영에서 언급되는 칼빈주의 5대 교리란, 이 도르트 신경의 수많은 조항들을 크게 카테고리로만 묶어 다섯가지로 정리한 것입니다. 5대 교리는 매우 중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이것이 개혁주의 신앙의 전체인 것으로 착각하면 곤란합니다. 5대 교리는 단지 알미니안 주의(인간의 행위를 강조하는 반펠라기우스 주의)에 대한 개혁신앙의 입장일 뿐입니다. 개혁신앙의 영역은 더 넓고 광범위합니다.
27) 피츠버그와 시카고
28) 사탕이 입에 달지만 이를 썩게 하고, 인스턴트 음식물들이 편리하지만 몸에 해로운 것처럼 신앙생활에서도 얄팍하고 쉬운 것을 사람들이 선호하지만 이것은 분명히 몸에 해로운 독입니다. 신자들은 장성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단단한 식물을 먹을 수 있도록 자라는 데에 관심이 있지 않고, 오로지 쉽고 재미있는 것만을 추구하는 오늘날의 신앙양태는 분명히 우리를 망가뜨리는 악한 요소입니다.
29) 본 회퍼, 『본 회퍼의 시편이해』(홍성사, 2007), p.30
30) 오해하지 말 것은, 시편 곧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위로는, 얄팍하고 감상적인 노래 가사들이 주는 것과 본연적으로 다르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참으로 믿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말씀‘만이’ 줄 수 있는 참된 위로가 무엇인지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31) R. Faber, “공예배 시에 시편찬송과 찬송가에 대한 칼빈의 입장”, Clarion Vol. 51, No.16 (August 2, 2002)
32) 한국교회는 1893년에 찬송가가 처음 나온 후 각 교파별로 찬송가를 출판하여 사용하다, 1945년 해방과 더불어 당시 사용되던 신정찬송가, 신편찬송가, 복음성가를 하나로 묶어 합동찬송가를 만들었다(1949년). 그 후 교파 분열 과정에서 다시 새찬송가(1962년)와 함동찬송가를 개편한 개편찬송가(1967)가 나왔다. 이후 한국선교 100주년을 기념하는 사업의 일환으로 1981년에 찬송가 공회가 조직되었고, 1983년에 지금의 찬송가가 생기게 되었으며, 이후 성경을 개정하는 작업에서 찬송가를 함께 개정하여 현재는 ‘새찬송가’가 나오게 되었다. 새찬송가는 한국인 작사/작곡의 곡을 다수 포함시키기면서 많은 곡이 추가되었으나,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본질적인 찬송에로의 전환은 전혀 찾아볼 수 없고, 오히려 한국인 작사/작곡의 곡들을 추가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이전보다 더 찬송같지 않은 노래들이 많이 들어왔다. 찬송가에 있어서는 일종의 후퇴라 할 것이다 (앞부분은 김영환, “언약의 예배”에서 인용).
33) 가사는 조금 낫기는 하지만, 감리교 창시자 웨슬리가 지은 찬송도 있다. 알미니안 주의를 배격하는 개혁파 신자가 웨슬리의 찬송을 부른다는 일은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Sola 주: 오타나 칸 띄어쓰기 등 교정했습니다.)
https://m.blog.naver.com/bagraphe/220636205901
http://cafe.daum.net/sola-gratia/RLq8/43?docid=1JVNp|RLq8|43|20110126133807&q=%C0%AF%C0%BA%B1%B3%C8%B8%20%C0%B1%BC%AE%C1%D8%B8%F1%BB%E7
https://m.youtube.com/@osola24 Osola (정통신학 유튜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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