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칼빈: 순례자와 목회자' 중에서
(부흥과 개혁사, 로버트 갓프리 지음, 김석원 옮김, PP.184-185)
서명범 목사 옮김 (2019.11.5)
세르베투스는 1553년 8월 제네바에 도착했다. 아마도 세르베투스는 의도적으로 칼빈에게 문제를 일으키려고 했던 것 같다. 그러나 들어가자마자 바로 들켜서 악질적인 이단으로 체포됐다. 칼빈은 세르베투스의 이단 여부를 재판으로 공정하게 가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시정부는 세르베투스의 재판을 통해 칼빈에게 망신을 줄 수 있는 기회임을 눈치챘다. 물론, 시정부는 세르베투스와 같은 편인 척을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재판을 질질 끌면서 칼빈을 괴롭히기로 작정했다. 시정부는 스위스의 여러 도시와 우럽의 다은 나라에도 편지를 보내, 세르베투스를 어떻게 다룰 것인지 자문을 구한다며 재판을 지체했다. 거의 모든 편지가 같은 내용의 조언을 보내왔다. 즉 세르베투스는 끔직한 이단이므로 사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10월에 드디어 재판이 열렸다. 시정부 의원들은 재판장으로 나섰고, 칼빈은 검사 역할을 했다. 세르베투스는 정죄됐고, 화형 선고를 받았다. 중세 시대 이단에게는 화형이 가장 일반적인 형벌이었다. 칼빈과 다른 목사들은 참수형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선처를 구했다. 참수가 화형보다는 훨씬 금방 죽고, 고통이 덜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정부는 이를 거부했다.
당시에는 형 집행을 바로했다. 세르베투스는 10월 20일에 재판을 받고, 10월 21일에 선고를 받은 뒤, 10월 26일 화형됐다. 칼빈과 동료 목사들은 세르베투스가 화영당하기 직전까지 회개할 기회를 주었다. 그러나 세르베투스는 이단적인 신념을 끝까지 버리지 않았다. 세르베투스의 마지막 유언은 조롱조로 남긴 “예수,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여 나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말이었다. 세르베투스는 불길 속에 죽어가면서도, 예수님의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세르베투스의 죽음 이후 오랫동안 칼빈은 너무 엄격하고 정죄하기 좋아하고 관용이라고는 전혀 없으며 아주 폭력적인 사람으로 묘사돼 왔다. 칼빈은 엄청난 종교 박해자로 그려졌다. 그러나 이단을 징벌하는 문제에서, 칼빈은 16세기 일반적인 정서를 그대로 반영했을 뿐이다. 오늘날의 관점으로 보면 야만인처럼 보일지 몰라도, 칼빈의 동시대인들은 여기에 전혀 과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실제로 당시 다른 유럽국가들과 비교해서 제네바는 이단에 대한 사형집행을 훨씬 적게 한 편이었다.
칼빈이 죽은 지 13년 후인 1577년에 칼빈의 오랜 적이었던 제롬 볼섹은 칼빈의 전기를 썼다. 이 책에서 볼섹은 세르베투스를 화형집행했던 것이 마치 칼빈의 잔인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증거처럼 강조하여 기록했다. 볼섹은 로마 가톨릭 교회로 다시 돌아갔고, 험담과 거짓말로 가득한 전기를 만들어 냈다. 칼빈에 대한 볼섹의 비난 중 어떤 것은 정말 황당한 것도 있다. 예를 들어, 볼섹은 칼빈이 동성연애자였으며 동시에 여자 문제가 복잡했다고 썼다. 볼섹의 거짓말 때문에 나중에 칼빈의 친구이자 동료 목사였던 데오도르 베자는 칼빈을 옹호하는 전기를 쓰게 되는데, 이 전기는 칼빈의 삶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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