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필드 박사의 투지
김대운 목사 / 경성교회(수원) (2019.10.2)
1870년 11월 6일 프린스턴 신학교, 맥코쉬 교수의 오후 강의 중 우리의 유명한 B.B워필드 학생이 강의 내용을 노트하기 보다는 같은 반 친구인 제임스 스틴의 모습을 과도하게 희화한 그림(원문 그대로 번역하면, 과도하게 무례한 그림)을 그렸는데, 학생들이 그 그림을 돌려서 보게 됩니다. 결국 이 일로 두 청년은 프린스턴 신학교의 채플 앞에서 주먹 다짐을 하게 됩니다. 물론 크게 다치진 않았지만, 이 사건으로 워필드는 "The pugilist", 권투선수라는 별명을 얻게 됩니다. 3대 칼빈주의자 중의 하나로 꼽히는 워필드 박사의 별명이 권투선수였다니....너무 재미있네요.
이 사건에서 보여준 워필드의 투지는 이후에도 나타납니다. 물론 주먹다짐하는 싸움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싸움에서요. .
1927년 프린스턴 신학교가 정통 신학을 지키려는 자들과 돈과 실용적인 것을 추구하기 위하여 더 포용적인 입장을 취하려는 자들(당시 총장이었던 스티븐슨은 후자 편이었습니다)과 한창 다툼이 진행 중일 때 스티븐슨 총장의 부인이 워필드 박사에게 이런 권면을 했습니다. "박사님, 저는 당신이 총회와 모든 면에서 조화롭게 행동하길 기도합니다." 이에 대한 워필드의 대답은 "부인, 저는 거기에 다툼이 있길 기도합니다." 그의 동료들은 그를 진리의 투사(A fighter)로 기억했다고 합니다.
그가 진리의 투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교회사, 성경신학, 조직신학만을 연구하고 전공한 교수들보다 더 잘 가르칠 수 있을만큼 신학의 전분야를 섭렵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프린스턴에서 교회사를 가르쳤던 John Dewitt박사는 "워필드는 미국 장로교회사에서 가장 유명한 개혁주의 신학자였던 찰스하지, W.R.T쉐드, 헨리 .B스미스와 절친한 사이였지만, 워필드 박사가 이들 3명보다 더 신학적인 깊이가 있었다고 평가했습니다. 그의 제자요, 그의 뒤를 이어서 조직신학을 가르쳤던 메이첸 박사도 "그의 눈에 띄는 결점들에도 불구하고 그는 내가 아는 사람 중 최고"라고 평가했습니다.
Biblical Doctrine, B.B Warfield, "One Productive Life"-A Short Biography of B.B Warfield를 읽다가 흥미로운 부분이 있어서 옮겨봤습니다. 워필드와 같은 투지를 기르기 전에 그 투지를 갖게 하는 신학의 깊이와 넓이와 폭을 갖추어야 함을 또 절감했습니다. 아직은 너무 얕고 좁고 작아서 감히 신학을 공부했다고 말하기도 부끄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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