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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적 샤머니즘에 가미된 한국식 기독교 전통, 새벽기도회
(새벽기도회 길선주목사)
지원용 교수 (최소 2013.7 이전)
새벽 “기도”와 새벽 “기도회(예배)”는 분명히 다르다. 성경대로 행하는 개인적인 기도는 언제 어디서든지 바른 실행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종교형식으로 자리를 잡게 됨으로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는 풍조가 일어나고 있다. 개인이 자발적으로 시간을 정해서 실행하는 것은 그의 믿음을 보여주지만, 공식적인 예배로 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못하다. 육신적 열성은 결국 순수한 기도를 망치고 교회의 바른 성장을 저해하기 때문이다. 이는 한국식 기독교에 익숙하고 외형적 종교행위에 젖어있는 사람들은 깨닫지 못하는 부분이다.
1. 한국 토속신앙이 교회로 유입되다
(1) 선도(仙道)의 삼영군신(三靈神君)에게 하던 기도- 새벽기도회
한국에서 처음 기독교를 접한 사람들 중에는 개종하기 전에 토착종교의 수행을 통해 토착신앙의 종교체험을 한 경우가 많았다. 그 중 대표적인 사람이 새벽기도회를 시작하고 확산시킨 “길선주” 목사이다. 그는 기독교로 개종하기 전에 선도(仙道)를 수행하여 도인(道人) 칭호를 받았었고, 개종 이전의 선도 수행 과정에서 현실을 초월하여 영적 존재와 교류하는 신비체험을 했었다. 그의 선도 수행에 대해 “김린서”는 이렇게 전한다.
“주문을 통독한지 4일에 몸이 떨리고 강령(降靈)이 되어... 중병이 떠러지고 기력이 강하여지니... 옥경(玉經)을 배우고 구령삼정주문(九靈三精呪文)을 외우며... 부인에게 시술(試述)로 주통(呪通)하여 본 즉 부인이 앉은 대로 오륙척을 뛰고 선생이 자신을 시험하여 보아도 기력이 배가하엿다.”(김린서, 영계선생소전(靈溪先生小傳); 신학지남, 1931.11 P39)
그가 예수를 믿기 이전의 상황이 오순절 은사주의자들의 체험과 유사하다. 이런 그가 선도가 참 도인지 기독교가 참 도인지 알려달라며 “상제”(上帝)께(옥황상제(玉皇上帝)=길선주가 수행했던 도가(道家)에서의 하느님) 기도하던 중에 다음과 같은 체험을 하게 되었다.
“...기도하는데 옥적(玉笛) 소리 갓흔 청랑(凊朗)한 소래가 방에 들니드니 이에 총소리 갓흔 요란한 큰소래가 잇서 공기를 진동하는지라 선생이 크게 놀래어 잠잠하니 공중에 ‘길선주야! 길선주야! 길선주야!’ 3차 부르거늘 더욱 두렵고 떨니여 감히 머리를 들지 못하고... 기도하면서 방성대곡하니 그 때에 선생의 몸은 불덩이처름 다라서 더욱 힘써 기도하엿다.”(김린서, Ibid. P41)
길선주가 기도할 때 나타났던 옥피리 소리, 총소리, 몸의 떨림과 같은 현상은 그가 과거에 선도 수행을 했을 때 종종 체험했던 토속신앙의 신비 체험이었다. 선도를 수행하면서 삼영신군(三靈神君)에게 기도하면서 체험했던 신앙이 소위 “상제”께 기도할 때도 나타났다는 것이며, 이것이 그의 개종에 나타난 신비체험이었다.
길선주는 개종 후에도 선도식 수행을 계속했는데, 기도생활에서 더욱 뚜렷하게 지속되었다. 그는 선도 수행 때부터 행하던 대로 하루 세 차례 시간을 정해 기도했다. 특히 새벽기도를 하고 선도식 체조를 했는데, 이 선도식 체조는 선도 수행의 필수과정 이었다. [이덕주, 한국 토착교회 형성사 연구 (서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1) P284]
이런 점에서 길선주의 기도는 토속신앙인 선도식 기도였다. 특히 새벽 미명(未明)은 소위 신령한 존재와 영적 교류를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시간으로 여겨졌기에 한국의 여인네들은 남편과 자식을 위해 새벽마다 정화수를 떠놓고 간절하게 비는 종교행위를 해왔던 것이다. 길선주는 이런 한국의 토속신앙의 모습을 그대로 실행했던 것이다. [이덕주, 초기 한국 기독교사 연구 (서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2) P99]
그러므로 그가 행했던 토속신앙의 수행 방법을 소위 이름만 기독교적인 것으로 바꾸어 적용하여 실행했을 뿐이다. 따라서 이전에 토착신앙에서 몸에 배었던 종교행위들은 개종 후에도 소위 기독교적인 계승과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그대로 유지되었다. 여기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이다.
1906년 가을에는 평양의 장대현 교회에서 길선주가 개인적으로 하던 새벽기도에 박치록이 함께 하게 되었고, 한 달 후에는 수차례 당회에 청원한 결과 당회의 결의로 전 교회가 새벽기도회를 공식적으로 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교회의 정기적인 집회로 자리 잡은 첫 번째 사례이다.
이렇게 시작된 새벽 “기도회(예배)”가 1907년에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것을 두고 새벽기도회가 부흥의 물결을 일으킨 것이라고 평가되고 있지만, 토속신앙에 근거했기에 한국인들이 수용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2) 정화수 ‘새벽기도’- 부인 사경회의 새벽기도회
길선주의 토속신앙에 따른 새벽기도회(예배)가 전국으로 확산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는데, 이러한 새벽기도회가 한국의 토속신앙에 따라 발생했다는 또 다른 증거를 1905년 초에 열린 개성지방 “부인(夫人) 사경회”에 대한 선교사 캐롤(A. Carroll)의 증언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아침 여섯시가 되자 마치 아침을 알리는 시계처럼 건너에 있던 (여자)교인들이 일어나 찬송을 부르며 기도를 하는 바람에 나도 일어나야 했다. 그런데 다음날에는 새로 몇 사람이 오더니 새벽 4시에 사람들을 깨워 무려 한 시간 반 동안이나 그런 식으로 대화를 나누는 것이었다.” (Ibid. P348)
이와 같이 한국의 초기 여자 신도들이 새벽에 기도를 했다는 것은 기독교가 전래되기 전부터 새벽에 기도를 했던 경험이 많았기 때문이다. 즉 아침 일찍 일어나 정화수(井華水)를 떠놓고 남편과 자녀들을 위해 조왕신(竈王神)에게 빌던 습관이 사경회 기간 중에 새벽기도회로 모습을 바꾸었던 것이다. (Ibid. P349-350)
어떤 인사들은 이것을 기독교의 토착화로 말하고 토착화신학이라고도 하지만, 성경적 신앙을 벗어난 것 외에 그 이상의 가치를 둘 수는 없는 것이다.
2.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열성”이 아니라 “지식”을 따르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새벽기도회의 기원에 대해서 토속신앙의 유래를 부인할 수 없을 때, 궁색하게 내놓는 변명이 과거에는 토속신앙의 대상이 미신들이었으나 참 하나님으로 기도의 대상이 바뀌지 않았느냐고 언성을 높인다. 또 기도의 근거도 성경 말씀에 따라 구하는 것이기에 차원이 다르다고 주장한다. 물론 대상이 바뀌고 신앙의 종류가 바뀐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 행위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의 신앙은 인간적인 방법이 아니라 성경적인 방법일 때에만 하나님께서 받으시기 때문이다.
새벽기도회의 대상이 잡신들에서 하나님으로 바뀌었지만 구하는 기도의 제목들, 즉 내용은 바뀌지 않았다. 초기의 상황은 더욱 말할 것도 없고, 지금 현재의 새벽기도회에서 핵심적인 기도제목 역시 “자신을 포한한 가족들의 안녕과 복”이 0순위이다. 물론 사람들의 필요는 자신과 가족들에게서 우선적으로 나온다.
그러나 토속신앙에서 복을 구하던 내용은 성경적인 기도에 따라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기도로 변하지 않았고, 기복신앙(祈福信仰)으로서의 새벽기도회로 출발했으며, 지금도 마찬가지다. 물론 개인과 교회들의 모든 기도가 기복신앙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새벽기도회는 처음부터 현재까지, 기복신앙으로 특징되는 토속신앙에서 빌던 것들과 별반 내용이 바뀌지 않았다는데 문제가 있다.
실태를 확인하고자 최근에 참석해 보았던 교회들의 새벽기도회, 특히 새벽기도회로 유명한 교회들의 새벽기도회에서 들은 설교의 핵심 주제는 역시 “축복”이었으며, “축복하실 줄 믿습니다... 아멘,” “축원합니다... 아멘”의 반복이었다.
일제의 강점기에 살기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던 민초들이 대상을 바꾸어 토속신앙에서 유래한 기복신앙의 형태로 새벽기도회를 하였듯이, 한국전쟁 이후에는 잘 살아보겠다는 목표에 따라 산업화, 도시화의 물결 속에 서민들이 갈구했던 기도 역시 축복을 벗어나지 않았다. [김흥수, 한국전쟁과 기복신앙 확산 연구(서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9), P131-193]
결국 어떤 다른 기도와 견줄 수 없이 새벽기도회는 토속신앙의 본래적 기도 내용이 그랬던 것처럼 전혀 변하지 않았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물론 다양한 기도 제목들이 함께 언급되기도 한다. 그러나 새벽기도회를 나오는 사람들의 바람이나 설교자들의 대응에서 기복신앙의 엄연한 사실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는 토속신앙적인 바람이 새벽기도회를 찾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자리 잡고 있어 종교성이 강한 한국교회의 토속 신앙적 새벽기도회가 시작되었고 지금도 계속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성경적 신앙은 단지 종교적 열성이 아니라 성경 지식을 따르는 것이어야 한다. “내가 그들에 대해 증거하노니 그들에게는 하나님께 대한 열성은 있으나 지식을 따라 된 것은 아니니라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들의 의를 세우려 함으로써 그들 스스로 하나님의 의에 복종치 아니하였음이니라”(롬 10:2,3).
한국 교계의 열성은 성경 지식에 따라 바로잡아야 한다. 새벽기도회는 제도화된 한국식 기독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토속신앙을 포함해서 타종교들에서도 행하는 것이다. 인간이 종교행위로 의로워지고자 하는 것은 타종교들의 공통된 특징이다. 유대교에서는 아침에 일어나 아침 기도를 드리고, 이슬람교는 새벽에 메카를 향해 기도하며, 불교는 새벽마다 예불을 드리고, 천주교도 마찬가지며, 한국인들은 정화수 떠놓고 기도하는 것은 물론, 토속적인 민간신앙에는 지극정성으로 새벽에 비는 기도가 일상적인 것이었다.
교회사를 통해 볼 때도 수도원에서 새벽에 정해진 시간에 기도드리는 관례가 있었으며, 베네딕트(A.D. 480~547)는 수도자들이 새벽을 포함해서 하루 8회에 걸쳐 기도한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하게 했다. 중세 이후에는 카톨릭 사제들도 아침과 저녁으로 기도해야 했으며, 아침,점심,저녁 세 번 종을 칠 때 기도하는 3종기도(三鐘祈禱)의 전통이 생겼다. 이것들 모두 지식을 따르지 않은 인간의 종교적 열성, 곧 “종교행위”들일 뿐이다.
목회자들은 새벽기도회에 참석하는 열성을 보이는 소위 “10%의 알짜배기 교인들”의 종교적 열성을 활용하려는 계획을 버려야 한다. 또 축복을 남발하며 교인들에게 10%의 “핵심멤버들”을 좋은 모델로 제시하면서 비성경적인 종교행위를 부추기는 일도 그만두어야 한다. 김삼환 목사는 새벽기도에 교인의 영적 발전을 성막에 비유하여 이렇게 말한다.
“뜰 신앙”은 단순히 주일 예배만 참석하는 교인이요. “성소 신앙”은 주일저녁과 부흥회에도 참석하는 교인이며, “지성소 신앙”은 하나님께 헌신적인 교인으로 새벽기도회에 참석한 교인이라고 말한다.”(오세호, 『새벽의 조용한 개혁-명성교회 성장과 새벽기도에 관한 연구; 그 말씀』, 1994.2 p.170)
역시 한국적 정서의 종교적 열성을 자극하는 발언이다. 물론 교회의 공식적인 집회와 모임에 참석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며, 그렇게 참여하는 성도들이 성장하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최상의 것들을 받을 수 있다는 것도 당연하다. 그런데 비성경적인 집회를 만들고 종교행위를 강조하면서 김목사처럼 이렇게 주장하는 것은 성경을 왜곡하는 수준이다. 오히려 목회자들이 해야 할 일은 성도들이 진정으로 말씀과 기도에 전념하도록 가르치고 훈육하며 모범을 보임으로써 “스스로의 기도 생활에서” 영적 힘을 발휘하고 성장하는 성도들이 되도록 산고를 치르는 것이다.
3. 그러면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는 유대인의 습관적인 기도와는 달랐다. 즉 종교행위로서의 실천이 아니었다. 정해진 시간을 채우는 기도가 아니라 때로는 몇 시간씩 기도하셨고, 때로는 밤을 지새워 기도하셨다(막 1:35, 6:46, 눅 6:10). 그러나 주님의 ‘새벽기도’와 ‘철야기도’는 왜 한국 교회의 ‘새벽기도회’나 ‘철야기도회’와는 다른가? 주님께서는 기도를 위해 어떤 방해도 받지 않은 새벽이나 밤에 한적한 곳으로 가셨다. 그러나 교계의 새벽 “기도회”나 철야 “기도회”는 결코 한적하지 않다.
기도의 방법 중에 하나는 골방에서 은밀한 가운데 보시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었다(마 6:6). 예배와 같은 형식이 있거나 여러 사람들이 통성으로 기도하는 것은 주님께서 알려 주신 기도의 방법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런데 새벽 “기도회”를 정당화 하려는 사람들이 주님의 새벽기도는 물론이고 칼빈 (생략) 루터 등의 새벽기도를 예로 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도 칼빈도 “새벽에 혼자서” 기도했으며(생략) 마틴 루터도 매일 새벽에 2시간을 기도하지 않으면 그날의 승리는 마귀에게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하면서 “개인적으로” 기도했지만, 이들 중 누구도 한국 교계의 새벽 “기도회”와 같은 “기도회”(예배)를 통해 기도하지 않았다.
진정 기도를 통해 영적인 성도가 되고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기 원한다면 “한국식 기독교의 토속신앙적인 새벽기도회(예배)”를 그만두고, 주님과 믿음의 선배들처럼 “한적하게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무릎 꿇는 기도”를 해야 한다.
임영수 목사(전 영락교회)는 습관적으로 어려서부터 새벽기도회에 다니다가 대학 2학년 때부터 가지 않았는데, 목회를 하게 되었을 때 다시 새벽기도회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고백이 적합한 사례가 될 것이다.
“왜 새벽기도[회]를 안 나갔느냐 하면, 그 이른 아침에, 많은 사람들 틈에 끼어서, 여러 사람이 같이 시끄럽게 기도하고, 남의 이야기를 듣고 하루를 시작한다는 게 제 자신의 인격과 삶에 그렇게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했고, 조용하고 차분하게 하루를 시작하지 못하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신학교 다닐 때도 혼자서 쭉 기도했지요. 그렇게 하다가 교회 담임하고부터는 새벽기도[회]를 시작했는데, 바로 그런 문제점들이 교인들로 하여금 자주성 있는 신앙으로 서지 못하게 하고 늘 의존하게 하는, 하나님과 일대 일로 영적인 면에서 깊이 대화하는 그런 훈련을 오히려 새벽기도회가 약화시킬 수 있는 그런 문제점도 있지 않는가 하는 것을 제 개인의 체험에서 한 번 생각해봤습니다.”(임영수,『새벽기도회를 살리자』, 월간목회(1987년 8월, 132호), p.40-41)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목사가 한국 교계의 상황에서는 문제 많은 새벽기도회를 계속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는 분명 성경적 방법이 아니기에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한 통계조사에 따르면 한국 교인들 100명 중 3명만이 매일 성경을 읽는다. 이와 같이 기도의 생활도 매우 미약하여 3%정도의 수준이다. 교회가 바르게 가르치고 실행하도록 이끌지 않고, 공식적인 예배의 형식으로 사람들을 새벽기도회로 모이게 하는 것은 성경적인 열매를 기대하기 어렵다.
김남준 목사(열린교회)가 특별새벽기도회를 시작했을 때에 얻은 교훈 역시 한국 교회들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김목사의 특별기도회에는 평소보다 많은 교인들이 참석했고 멀리서도 새벽 5시에 오는 열성을 보였다. 그런데 그 열매는 어떤 것인가?
“짤막히 드리는 새벽예배가 끝난 후 단 십오 분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모인 400여명의 교인들 중에 그때까지 남아서 기도하는 교인들이 40-50명도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그때 나는 깊이 깨달은 것이 있다. 사람들을 기도하도록 모이게 하는 일은 사람이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그들로 하여금 마음을 바쳐서 기도하게 하는 것은 프로그램으로는 불가능하구나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조국교회 기도운동의 약점이다.”(김남준, 『한국교회 새벽기도를 향한 주마가편』, 빛과 소금(1997년 9월 150호), p.47)
한 번 새벽기도회를 다녀오기 위해서 일어나서부터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까지 평균 2시간 정도이고 많게는 3시간이나 그 이상이 걸리기도 한다. 그런데 얼마나 기도하는가? 진정으로 주님의 기도를 따르고 성경적으로 열매를 맺기 원한다면 그 시간을 골방에서처럼 한적한 상태에서 진지하게 개인적으로 기도드려야 한다.
이런 기도를 막고, 교인들의 수준을 낮추고, 섬김을 형식화하고 제도화하는 것이 바로 한국식 기독교의 새벽기도회이다. 성도들이 개인적으로 주님께 드리는 진지한 새벽기도와 철야기도는 성경을 따르는 것이지만, 토속신앙에 뿌리를 두고 종교적 열성을 발휘하게 하는 교계의 새벽 “기도회”(예배)는 성경에서 나오는 열매가 전혀 아니다. 세계적으로 유래를 찾기 어렵고 독특한 한국 교계의 자랑이 새벽기도회라도 주장하고 자부하는 사람들은 한국 교계의 열매를 제시해야 한다.
단지 사람들이 많이 모였고 교회가 양적으로 부흥했다는 것을 열매라고 할 수 있는가! 그런 외형적 성장을 열매로 누가 인정해 주고 있는가! 한국식 기독교에 갇혀있는 사람들에게라면 몰라도 하나님께는 인정받을 수 없다. 또 한국식 기독교의 현재 모습은 아직도 영적 지식과 영적인 생활에 대해 새벽기도회를 하지 않는 다른 나라들에 빚을 지고 있는 실정이다. 새벽기도회는 결코 이 나라를 성경적으로 복음화하거나 성장시키지 못했다. 어둡고 차가운 새벽공기 마다 않고 새벽기도회(예배)에 모여들고, 또 예배가 끝나자 순식간에 빠져나가는 사람들을 보면 일종의 집단최면에 걸린 사람들을 보는 것과 같은 인상을 받는다.
그러나 교인들은 그렇게 행하는 것을 정상적인 것으로 배웠기에 습관적으로 해왔고, 또 매일 반복하고 있다. 살아 있지 않고 오히려 화석화 되어 있는 새벽기도회(예배)의 모습은 마치 기념비처럼 생명력이 없었다. 이런 교회의 모습에 책임져야 할 사람들은 목회자들이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기 때문에 비성경적인 종교행위들을 조장하고, 방치하며, 또 그 속에 파묻히는 것이다. 진정 성경대로 믿고 실행하고자 한다면 종교적 열성이 아닌 성경 지식을 따르는 성경적인 기도와 그 정신의 실행으로 변해야만 한다. 그럴 때에만 한국 교회들에 희망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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