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 이단 등

칼 바르트의 성경관 비판

Sola. 2024. 4. 20. 06:00

 

발트의 성경관 비판

 

김향주 교수 (Ph.D. 대한신학대학원대 석좌교수)

 

 

I. 서언

홍수처럼 밀려오는 자유주의의 물결 속에서 한국교회의 갈 길은 어디인가? 한국에서는 ‘발트 연구협회’까지 생기고 발트야말로 20세기의 최대 신학자라고 찬사를 보내고 있을 정도이다. 나아가 브루너, 헤겔, 슐라이에르마허, 틸리히, 불트만, 몰트만, 본 회퍼, 토인비, 니버, 니체, 월리암 제임스, 죤 두이 등의 서적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와 보수신학에 도전장을 내밀고 있고, 이런 개인주의적 신학의 표출이 역사교회가 쌓아온 개혁신학을 파괴하기에 이르렀다. 이 결과, 해방 후 한국교회가 자랑하던 ‘성경이 곧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는 신앙들은 퇴색되어 상당부분 자유주의에 물들어 버렸다. 이제는 초월주의적 계시관이 한국교회의 우상으로 떠올라 성경적 계시관이 오히려 열세에 몰릴 형편이 되어가고 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항상 큰 두 적을 대적하고 산다. 하나는 자연주의적 개념인 자유주의이며 다른 하나는 초월주의적 개념인 자유주의이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자유주의를 극복하여 개혁신학의 교리를 더욱 확고히 해야 한다.

 

문제는 성경관이다. 성경관을 바로 가지는 것은 기독인으로서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그런데 문제는 누구나 성경을 들고 나오면서 정경을 성경으로 보지 않는데 그 큰 문제가 있다. 모두다 성경을 말하나 그 견해가 각기 다 다르다. 그 이유는 성경에 대한 객관적 교리를 무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개인의 신학적 표출 내지 체험을 성경보다 앞세우기 때문이다. 성경은 해석상에서도 해석자가 능동이 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이 가는데 까지 가고 성경이 멈추는 곳에서는 더 이상의 것을 말하지 않는 성경의존주의 사상이 현대교회에서 절실하게 요구된다. 그런데 초월주의자들은 성경을 하나의 계시의 도구로 생각하고 자연주의자들은 인간이성의 도구로 사용하려고 하는 것이다.

 

성경에 대한 바른 관점과 교리를 지키고 세우기 위해서는 ‘역사적 교회가 성경을 어떻게 고백했느냐’하는 교회교본사로 돌아가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개혁신학은 교회의 역사적 신앙 고백을 신학의 중심으로 삼고 있다. 만약 오늘이라도 성경에 더 가까운 신앙고백이 나온다면 그것을 받아들이는 입장이다.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만이 참다운 개혁이다. 바꾸어 말하면 성경에 어긋난 개인주의 고백 내지 개인주의 신학적 표출은 용납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교리적 근거가 없는 성경해석이 우후죽순처럼 나돌아 현대 신자들을 유혹하고 순교의 피를 흘리며 쌓아온 교회를 무너뜨리려 하고 있다. 그래서 교인들은 어느 해석이 옳은지 조차 알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다. 역사교회는 성경대로 믿는 신앙을 위해 피를 흘리며 교리를 생산해왔다. 니케아 신조부터, 칼케돈 신조, 아타나시우스 신조, 벨직 신조, 스코트랜드 신조, 웨스트민스터 신조 등이 그것이다. 여기서 역사교회는 성경이 말씀하는 성경의 영감설, 예수의 신인양성, 그리고 3위1체론 등을 성경의 주된 교리로 삼고 여기서 어긋나는 경우는 이단으로 간주했다. 현대교회의 큰 비극 중의 하나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기 위해 싸워서 이룩한 교리에 대한 무관심이다.

 

서면이나 기타 매스컴을 통해 “교리는 사람이 만든 것이므로 필요가 없다.” 라고 교역자 자신들이 외치면서 자신들의 주관적 교리로 설교하는 자기모순을 범하고 있어도 그 말에 대한 대답을 하지 못하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즉 그들은 성경이 최고라고 하면서 성경교리를 무시하는 자기모순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성경에 대한 개인적 해석을 마구 끄집어내서 성경 한 구절에 교역자 하나하나의 해석이 다 틀리게 나오는 형편이다. 이토록 성경이 난도질당하는 현대교회의 원인은 어디서부터 시작됐는가?

 

그 원인은 인간 이성을 앞세워 성경의 영감설을 부정하려는 자유주의적 신학연구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19세기 예수에 대한 역사적 연구는 초 자연주의적 요소를 성경에서 제거하는 운동을 시도하였다. 결국 이 자유주의의 반동으로 신정통주의(Neo-Orthodox)라는 새로운 자유주의를 만들게 됐고 그 대표자가 칼 발트였다. 필자는 여기서 칼 발트의 신정통주의가 이룩되기까지의 역사적 배경을 잠시 훑어보고, 다음 그의 계시관을 생각해 본 다음, 각 신학파들의 발트에 대한 성경관을 소개하고, 그 다음에 성경의 영감설과 개혁신학의 성경관을 소개하고, 최후로 발트의 성경관이 왜 잘못되었는지 그 이유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II. 본론

 

1. 발트가 나오기까지의 역사적 배경

1) 19세기 이후

19세기는 사실상 헤겔의 역사주의와 슐라이엘마헬의 자유주의 전성시대이다.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은 역사적 연구를 시도한 나머지 전혀 초자연주의를 무시하고 역사적 자연주의 신학의 전성시대를 이룩하였다. 당시의 신학은 예수에 대한 역사적 사건을 집중적으로 탐구하여 “예수전 신학”이라고까지 불려졌다. 스트라우스(David Strauss)와 홀즈만(HeinnicnHoltzman)과 르낭(Joeeph, Renan)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그들이 역사적 예수를 아무리 연구해 봐도 기독교적 차원에서의 예수의 인격적 위치를 해결 할 길이 없었고 자유주의 신학은 집안싸움으로 탈진상태가 되어 버렸다.

 

2) 20세기 초엽

19세기는 자연주의로 인해 혼란이 가중되던 시기였다. 그러나 20세기 초엽 슈바이처(Albert Schweitze)에 의해 자연주의 신학에 치명타가 가해졌다. 그것은 지금까지 자연주의 입장에서만 예수를 연구해 오던 신학을 바꾸어 초자연적인 예수를 연구해야 된다고 외쳤던 것이다. 그러나 신학적 문제는 더 크게 발생했다. 자연주의자들은 말하기를, "예수의 초자연적 연구는 유대주의적 종말관에서 찾아야 한다. 예수는 유대주의적 천국의 복음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십자가에 던졌으나 역사의 종말은 오지 아니하고 예수는 십자가에서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예수의 실패는 어떤 의미에서 영적으로는 성공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이에 슈바이처는 시공간적 차원(Historie)에서의 자연주의 역사연구를 해석학적 차원(Geschichte)에서의 역사연구의 문을 열어 새로운 개혁주의 신학의 길을 열었다.

 

칼 발트(Karl Barth)가 20세기 초엽 로마서 주석을 내어 놓기까지의 시대적 상황은 19세기 예수전 신학이 한계점에 도달하여 그 반동으로 초월주의적 참 역사(Geschichte)의 신학적 개념이 나올 수밖에 없는 때였다. 19세기의 예수전 신학은 1차 대전 이후 등장한 허무주의로 인해 시들해졌는데 이를 배경으로 일어난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와 하이데거(Heidegger)의 실존주의가 전 세계를 강타하기 시작했다. 이때 교회는 만남을 매개로 하는 초월주의에 문호를 개방했다.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의 영향을 받은 실존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19세기에 활화산처럼 타오르던 자연주의 사상을 무너뜨리는 일등공신이 되었다.

 

이런 추세에 힘입어 칼 발트는 19세기 자연주의를 통렬히 비난하고 나섰다. 그 비난의 사상적 배경은 실존주의였다. 발트를 신학적으로 말하면 초월주의라고 명한다. 이는 철학적 실존주의와 내통하는 사상이다. 시공간의 사건을 중요하게 취급하지 아니한다는 의미에서 발트주의는 신 정통주의로 통한다. 다시 말하면 발트는 예수의 역사적 사건을 중요하게 취급하지 않고, 즉 예수의 부활을 역사적(Historie)사건이 아니라 참역사적(Geschichte)사건으로 더 중요하게 취급함으로서 신학적 접근을 시도했다. 또 발트는 하나님과 인간관계를 중요시하는 신학을 전개했다.

 

 

 

2. 신 정통주의(발트신학)가 신학계에 미친 영향

발트가 갑자기 유명해지기 시작한 계기는 그의 로마서 주석 때문이다. 그것은 당시 시대적 상황에서 하나의 신학적 혁명이었다. 그에 의해 자유주의신학을 반대하는 일명 ‘신 정통주의운동’이 도처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이 운동은 정화하는 불길처럼 타올라 라인홀드 리버같은 자유주의 신학자를 짓밟아 버렸다. 발트의 사상은 세계로 번지기 시작했으며 일본에서는 그가 신학적 제왕으로 묘사되었고, 미국에서는 금세기 최고의 신학자로 불리어졌다. 1931년에 에밀 브루너의 위기신학(The Theology of Crisis)이 일본에 먼저 소개되었는데 그때 발트에 대한 변증법적 신학이 함께 소개되었다. 이 소개서들은 일본신학계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한국에서는 1945년 해방이후에 소개되기 시작했다. 발트가 한국에 소개되자 극단적인 반응들이 나타났다. J.S.E라는 모 신학교수는 공공연히 신 정통주의를 주장하다가 교단의 재판을 받기도 했다. 그 후 그는 모 신학교 교장에 취임하여 “현대신학은 보수주의, 자유주의, 그리고 신 정통주의 세 주류로 구분할 수 있는데 이 세 주류 중에서 신 정통주의가 개혁자들에 가장 적합한 사상이며 현대인의 감각에 가장 맞으며 정통적인 기독교 교리를 따르는 길에 있어서 가장 타당한 입장이다.”라고 하였다.

 

 

 

3. 발트의 사상적 배경

1) 헤겔과 발트

(1) 죄에 대한 문제

발트는 하나님과 인간관계를 실존적 인식으로 말하는 반면 헤겔은 하나님과 인간을 분리하는 본질적 요소를 죄로 다루고 있다. 즉 죄를 정반합의 원리에 의해 ‘정신의 통일성과 필연성’으로 다루고 있다. 죄는 유한한 정신으로서의 인간 본질에 주어져 있는 하나의 장애물에 불과한 것으로 이 장애물은 인간의 존재에 있어서 필연적인 것이다.

 

(2) 하나님 인식

헤겔은 "하나님과 변증방법의 동일화"를 강조한다. 그리하여 “논리학의 변증법”이 하나님의 존재를 대치하게 된다. 그러나 발트는 우리들 자신이 그 속에 실존하고 있는 변증법, 우리 자신이 언제나 소유할 수 있는 방법은 은혜의 참된 변증법이 아니라고 말한다. 인간의 능력에 따라 좌우될 수 있는 변증법이 하나님의 은혜의 참된 변증법과는 판이하다고 발트는 말한다. 논리학의 변증법적 운동, 즉 진리의 자기 운동이 헤겔에 있어서는 하나님과 동일시 여겨지는 반면 발트는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라고 말한다.

 

발트가 헤겔은 보는 입장은 “하나님의 인식론은 하나님의 자연적 인식을 주장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발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계시에다 하나님의 인식을 규정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발트는 헤겔의 극단적인 반동이라고 볼 수 있다. 사실 헤겔의 사상이 발트의 사상을 역으로 낳았다고 볼 수 있다. 헤겔은 자연주의에 근거를 둔다면 발트는 주관적 경험론에 근거를 두고 있다. 헤겔은 그의 변증법적인 범주 안에다가 하나님의 인식을 포함시킨 반면 발트는 그의 반동으로 자신의 주관에다 하나님의 인식을 포함시켰다.

 

 

2) 키에르케고르와 발트

헤겔의 종합체계는 하나님의 역사와 인간의 역사를 서로 환원시키는 역사관이며 키에르케고르는 하나님의 역사와 인간의 역사를 완전히 분리시키는 역사관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외부의 객관적 세계로부터 추상화된 개인의 주관적 실존을 관심의 대상으로 삼았다. 여기서 키에르케고르은 헤겔의 종합철학을 비판하게 된다. 헤겔과 마르크스 철학은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그 이유는 기독교 사상을 객관세계 속에 있는 모순으로 환원시키는 면이 같다. 그러나 키에르케고르은 자기 자신에게 절망하여 신앙으로 비약하는 패러독스로 환원시킨다. 즉 키에르케고르은 주관주의인데 허무를 배경으로 하는 주관주의다.

 

그런 의미에서 불트만은 고가르덴과 함께 19세기의 신학의 결정적 반기를 든 신학적 방향키를 키에르케고르에게서 배웠다. 물론 발트는 이 키에르케고르가 말하는 내면성의 개념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키에르케고르가 헤겔을 비판하면서 자신의 것으로 형성한 여러 가지 중요한 통찰과 개념을 받아들이고 있다. 예를 들면, 하나님과 인간의 질적인 차이, 패러독스, 신앙의 결단, 순간, 동시성, 실존, 하나님에 대한 간접적 인식 등의 개념 및 통찰을 받아들이고 있다. 사실 발트가 말하는 변증은 헤겔의 "중재"를 통한 변증법에서 변형시킨 역설적인 변증법으로부터 배운 것으로 봐야 한다. 발트는 이러한 사실을 그의 로마서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인정하고 있다.

 

“만일 네가 하나의 체계를 가지고 있다면 이 체계는 키에르케고르의 시간과 영원의 무한한 질적 차이라고 불렀던 것을 끝까지 고수하는데 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 위에 있다. 이 인간에 대한 이 하나님의 관계와 이 하나님에 대한 이 인간의 관계가 나에게는 성경의 주제인 동시에 철학의 총화이다.”5)

 

 

3) 발트의 실존주의적 신학 사상

(1) 성육신의 교리

발트는 불트만, 고가르덴, 부르너 등과 함께 하나님의 성육신에 대한 신앙은 역사적으로(Historisch) 근거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하나님 자신을 통하여 근거된다.

 

(2) 기독교와 신학은 인간의 실존적 개입을 요구한다는 점에 있어서 발트는 다른 변증법 신학자들(키에르케고르)과 일치한다. 그러므로 "주체성이 진리이다."라는 키에르케고르의 명제는 발트에게 있어서도 부분적으로 타당성을 가지고 있다.

 

(3)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성육신은 우리가 믿든지 아니면 거부해야 할 사건이란 점에서 발트는 키에르케고르와 일치한다. 발트에 의하면 인간의 실존은 자신이 본질적으로 비약할 수 있도록(비약할 수밖에 없도록) 존재적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 신앙은 인간실존의 가능성이 아니다. 인간의 실존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현실이며,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오는 가능성일 뿐이다.

 

(4) 인간의 실존은 폐쇄되어 있지 않으며 개선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변증법 학자들과 의견을 일치하면서 키에르케고르의 입장을 취한다. 즉 인간의 모든 사고와 모든 신학 역시 목적지에 도달한 것이 아니라 이 목적지를 향한 도상에 있다.

 

(5)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하나님" 내지 "하나님 말씀"이라는 비변증법적인 것으로부터, 따라서 하나의 비변증법적인 상태로부터 오는 것인가? 아니면 인간이라고 하는 변증법적인 것으로부터, 따라서 하나의 변증법적인 상태로부터 오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답변에 있어서 발트는 변증법적 신학과 결별한다. 즉 변증법적인 반작용의 상태에 도달한다. 발트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비변증법적이고 또 비변증법적인 말씀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가능하다.

 

 

4) 비 판

지금까지의 발트의 사상을 본인의 입장으로 종합, 비판하자면 발트는 헤겔의 영향을 받아 퇴색해 가는 헤겔의 역사 철학의 반동으로 일어난 반 헤겔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즉 헤겔의 정반합에 의한 역사적 발전 과정의 변증법을 발트는 정체된(Silent Theory) 변증법으로 전환시킨 것이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무한한 투쟁이 이것이냐? 저것이냐? 의 선택으로 나타나는 결과이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헤겔의 반동이지만 헤겔의 철학이 없이는 그의 사상이 나올 수 없다는 점에서 그의 사상의 시초는 헤겔의 역사주의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즉 헤겔은 정반합의 역사적 원리를 인간의 실재에다 두고 전혀 하나님의 역사적 섭리를 무시해버린 반면 발트는 인간의 실존주의 철학에다 두고 하나님의 역사적 섭리를 무시해 버린 것이다.

발트는 결국 허무주의를 배경으로 한 실존주의 철학자인 키에르케고르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역사관도 자신의 초월주의적 경험에 의존하는 입장을 고수하는 것은 정체적 변증법적 입장에서 볼 때 다시 헤겔의 사상(Thesis)으로 돌아간 결과가 되고 말았다. 그는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주의적 영향을 받아 신학적 초월주의로 그의 사상을 전개한 것이다. 19세기 자연주의를 공격했다는 입장에서는 스스로 정통주의 입장이라고 주장할지 모르나 2천년 교회사적 입장에서 보면 그는 20세기 새로운 초월주의적 자유주의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의 실존주의에 배경을 둔 초월주의가 당시까지 없었던 신학적 입장의 독특한 면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4. 발트의 계시관에 대한 견해들

이제 발트를 보는 각 신학자들의 견해를 소개하고 그의 초월주의적 계시관을 소개하면서 비판해 보고자 한다.

1) 김의환 박사의 발트의 성경관 비판

김의환 박사의 저서 “도전 받는 보수신학 발트비평”에 대한 내용을 요약하면 발트의 신학은 신 정통주의 신학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 신 정통주의 신학은 여러 가지 면에서 자유주의 신학을 넘어뜨리는 데 크게 공헌을 끼쳤다. 그의 신학적 공헌은 그의 비평가들까지도 높이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성경 계시관에 있어서 발트는 큰 오류를 범하고 있다. 자유주의 신학이 역사적 차원만을 강조하는데 반하여 발트는 초역사적 차원을 강조하는 경향은 예수님의 부활사건 설명에 있어서 더욱 드러난다.

 

1962년데 발트가 미국 프린스톤 신학교에 와서 특강을 하는 중 한 신학생으로부터 ‘예수님의 부활을 신문 기자가 취재할 수 있는 것으로 믿는가?’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부정적인 대답을 하였다. 그렇다고 그가 주님의 부활을 전적으로 부인한 것은 아니다. 다만 역사(Historie)적인 부활이 아니라 참 역사(Geschichte)적인 부활이란 이야기다. 여기에 발트 신학의 매력이 있고 또한 그 위험성이 있다.

 

성경이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똑같은 분이시며 발트가주장하는 역사와 참역사의 구별도 성경에서 찾아 볼 수 없다. 발트의 초월주의적 경향은 성경을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 자체로 보지 않는 것이다. 성경 자체는 하나님 말씀에 대한 증거에 불과하다. 따라서 성경은 인간이 쓴 글이기 때문에 인간적 오류가 많이 있을 수 있다고 본다. 다만 이런 오류투성이의 성경일지라도 하나님이 이것을 계시의 증거로 사용하실 때만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계시관을 가지고 발트는 성경 자체가 주장하는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독자성이나, 신임성이나, 무오성을 믿어 온 정통주의 신앙에 대한 정면적인 도전을 하게 되었다.

 

결국 발트는 20세기의 역사주의적 자유주의 신학에 대항하여 지나치게 계시의 초월성을 강조하다 기독교를 하나의 초월 종교로 전락시켰다. 발트의 이러한 불안정한 계시관은 자연히 신앙고백의 영속적 가치성을 배격하기에 이르렀다. 1967년 미국 연합장로교회의 새 신앙고백으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대치시킨 신학자들이 발트주의의 신학자들이었음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오직 성경의 객관적 권위가 인정되는 곳에 성경에 근거한 기본 교리가 변하여질 수 없는 것이다.

 

 

2) 박형룡 박사의 발트 비판

칼 발트는 공언하되 “나는 자연신학의 공공연한 반대자다.”라고 하였다. 그는 또 “로마 교회와 근대 프로테스탄트주의는 그릇된 계시관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발트가 자연신학을 기각하는 이유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계시를 독특하고 배타적인 계시로 보는 개념에 있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동의하는 바다. 그에 의하면 사람은 처음에 계시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알고 다음에 그리스도 안에서의 계시를 그 계시의 특별한 형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계시에 대해서 무엇을 알기 위하여 반드시 그리스도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계시는 절대적인 의미에서 단회적이니 성육신을 떠나서는 우리가 계시를 말하기 불가능하다. 성육신에서 계시란 하나님의 은혜와 화목의 계시로 우리에게 온다. 하나님이 이 계시 외에 있는 다른 방법들을 통해서 알려질 수 있다고 하는 것은 그릇된 관념에 의존한다. 발트에 의하면 그리스도 안에서의 계시를 떠나서 계시를 미리 안다는 것은 유추(Analogy)의 방편에 의해서 하나님의 존재와 실유의 지식에 도달하기 가능하다고 생각함이다.

 

이에 대해 박형룡 박사는 발트는 결국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하나님의 실존은 단순히 이성의 자연적 광명에 의해 알려질 수 있으나 그 결과로 접촉되는 것은 계시의 참 하나님이 아니라 최상으로 아리스토의 추상적 실존의 개념이다. 또한 발트는 주장하기를 "정경에는 하나님의 말씀의 계시에서의 가능적 지성을 우리에게 말하는 성경적 사신의 결정선 내지 주요선이다. 이는 성경을 계시의 도구로 믿을 수 있고 계시 자체로 보기 어렵다. 즉 자연신앙과 함께 일반계시를 증명한다고 통상으로 생각되어 오던 성구들은 주선에 병행하는 종속선이요, 독립적 의미를 가진 것이 아니다“고 하는데, 그 성구들이 말하는 바는 하나님의 계시의 한 반사이며 투광이니 그리스도 다음에 가는 독립적 계시가 아니며 우주 안에 하나님의 처음 출발한 계시가 아니다. 시편 19편에서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한다.”고 한 것은 성경이 창조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하여 말하는 바를 우주의 본문에 읽어 드림이요, 우주 자체는 언어도 없고 음성도 없다(3절). 하나님의 창조적 사역을 통한 본래적 계시란 없고 우주의 본문 자체는 침묵하나 그리스도 계시의 광명이 우주에 비치어 들어오는 때에 성경은 보충선을 말하는 것뿐이다. 롬 1장에서 하나님의 계시와 사람의 반응에 대해서 말한다고 알려진 구절은 이교도 그대로를, 또는 일반적으로 말함이 아니라, 그리스도 계시의 광명에 비추어 말함이다. 골고다의 광명에 비추어 이교도는 핑계하지 못하게 된다.

 

또 발트는 바울이 로마서 1:19-20에서 말한 바를 이교도 그대로에 관한, 이교도 그대로가 소유한 계시에 관한, 추상적 사건으로 보는 것에 반대하여 경고한다. 이에 대해 박형룡 박사는 칼빈의 계시관을 이용하여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발트의 시 19편 해석은 칼빈이 주장한 창조계에 나타난 계시를 읽기 위해서는 특별계시의 안경인 성경이 필요하다고 강조한 것과는 전혀 다르다. 칼빈은 하나님의 작업에 나타난 그의 객관적 계시를 사람이 자기의 이해력이 흑암으로 변했기 때문에 정확히 읽지 못한다는 것이다. 특별히 계시의 말씀을 통해서 그 계시를 이해하는 것을 배운다는 것이다. 그러나 발트는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통한 본래적 계시란 전혀 없다고 부정해 버린다. 칼빈에 의하면 창조주의 발자국을 보여 주는 창조된 실재를 통한 하나님의 객관적 가능적 지적인 면은 존재한다. 그러나 흑암화 된 인간의 주관적 반응이 그 계시를 바로이해하지 못한다. 칼빈은 아는 것과 존재하는 것(Knowing and being)을 날카롭게 구분한다. 고로 칼빈이 불신자들이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다는 뜻은 결코 계시의 실재성을 부정함이 아니다.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유죄성이 폭로됨은 계시가 있기 때문이다.

 

 

3) 박윤선 박사의 발트 성경관 비판

박윤선 박사도 발트의 로마서 주석을 비평했다. 이에 따르면 발트는 성경에 대한 적극적 내용에 있어서 성경은 하나님 말씀 자체가 아니라고 믿는다. 발트는 말하기를 "성경은 계시 자체에서 구분돼야 한다. 증거는 그 증거된 것과 동일시 될 수 없다."라고 하였다. 그러면서도 발트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을 할 때는 성경 자체가 적극적 내용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는 것이다. 발트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의 관찰과 통찰되게 있지 않는 존재와 사건을 말함이다"라고 말하였고 더욱이 "우리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때는 하나님의 일을 말함이니 그것은 우리로서 취급할 수 있는 상태나 사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바라 볼 수 있는 것으로서 자유로운 하나님의 행동을 말함이다"고 하였다. 또 그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라고 함은 표적을 두고 말함이라고 하였다. 즉 발트는 그가 말하는 성경관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하는 의미는 성경이 계시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증거 역할을 하는 것으로 제한될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는 것이다.

 

또 발트는 "이 제한 내에서는 성경을 계시에서 구분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때에는 위에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의 적극적 내용이 성경에서 취급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그는 어디까지나 성경 자체는 사람의 말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그는 성경에 얼마든지 그릇됨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축자영감이란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실수 있는 말을 사용하신다는 것이며 또한 거기 실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받아야 된다는 것이다.” 라고 강조하였다. 이러므로 발트는 성경은 완전한 영감으로 된 계시 그 자체를 부정하였다. 발트의 이와 같은 이론은 성경이 말하는 딤후 3:16이 주장하는 모든 말씀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됐다는 주장과 다르다.

 

 

4) 폴만(A.D.Polman) 박사의 신정통주의의 성경관 비판

발트의 계시관은 성경 그 자체가 아니라 단지 계시의 증거라고 한다. 그는 “성경을 계시와 동일시 한다는 것은 결정적인 실수다. 모든 사람들은 하나의 특별한 사건과 특별한 사건의 서술을 구별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계시와 계시에 대한 인간의 서술이 결코 동일시 될 수 없다”고 한다. 또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증거를 제공해 준다. 그러므로 성경은 정확 무오한(Infallible)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고 완전한 인간의 책이다. 성경의 저자들은 정확 무오한 기계가 아니고 우리와 똑같은 정열을 가지고 있는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현실적인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것을 참작하지 못하면 낡은 세습주의의 오류에 빠지게 된다. 사람들은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사물에 대해서 모든 것을 다 아는 하나님의 지식을 가질 수는 없다.”고 했다.

 

발트에 의하면 성경의 저자들은 그들 시대의 산물들이었다. 그들은 우리와는 다른 예견력을 소유하고 있었고 그들은 역사와 전설이나 신화의 차이를 알지 못했으며 성경의 종교적이고 신학적인 양상은 모든 의미에서 역시 많은 취약점을 갖고 있는 것으로 파악했다. 또 성경의 저자들이 계시의 증인으로서 그들의 위치를 지키고 있었을 때에, 그들은 시대적 산물의 결과인 당시의 모든 언어적 개념을 사용했고, 그 결과 성경에는 여러 군데 모순이 있는데, 예를 들면 율법과 복음사이의 모순, 요한과 공관복음과의 모순 등이다. 즉, 예외 없이 성경 저자들은 그들의 한계력 안에서 말하고, 쓰고, 또한 상대적인 약점을 갖고 있고 상대적인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것은 반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발트의 영감설을 자세히 봐야 할 것이다. 그는 성경의 영감과 계시의 관계를 무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발트의 입장에서 영감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말인가? 오늘날 많은 신학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같이 발트는 성경을 기록함에 있어서 제 저자에게 하나님이 영감을 불어넣었다는 사실을 부인한다. 바울이 고전 2:6-16절의 "주의영감과 구약 정경의 거룩한 기록에 대한 말씀이라"고 간주한 것까지도 반대한 결과를 가져 온다. 발트는 “바울은 자신을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증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와 관련된 그의 말은 유일한 역사적인 기록으로서의 가치를 가진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발트는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모든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생각에서 근원을 찾고 있지만, 그것은 우리의 생각과 다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하는 말은 단지 정경에만 관계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존재에 관계되고 성경 안에서 사용되는 말이다.”라는 뜻이다.

 

발트는 말하기를 말씀의 영감은 성경이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대한 존경과 확실한 인정에 의해서 항상 받아 들여져야 한다. 말씀이 성경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사역이고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완전히 하나님의 영역에 속한다. 선지자들과 사도들은 계시의 증인으로서 그들의 위치를 지켰지만 그들은 실수할 수 있고 잘못할 수 있는 인간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기적이다. 예언이 정확하게 성취되었고, 절름발이가 걷고, 눈먼 자가 보고,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고, 그리고 이 말씀의 힘을 통해 죄인이 회개하는 것이다. 발트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경 사이에 어떤 차이와 간격을 두고 있고 그의 전 체계는 인간의 불가능성과 신의 가능성이 이러한 간격을 메워 줄 것이라는 가정을 믿고 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한다면 하나님은 인간의 모양대로 모든 옷을 입고서 말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결정적인 실수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경 사이의 동일성이 결여된 것이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실제적인 말씀과 모순되고 반대되는 입장에 선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경 사이의 차이를 메꿀 수가 있다. 이 차이가 메꾸어 진다는 것은 우리 측면에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측면에서만이 가능하다. 하나님은 어떤 방법이라도 사용하실 수 있고 메꿀 수가 있다. 그것은 전여 성령의 작용이기 때문이다. 성령의 감동으로 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구원받은 성도가 이해 할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기 때문이다. 발트는 우리가 성경이 독단적인 인간의 주장이라고 비난할 때 이미 실수를 범했다. 성경을 보면 매우 강력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작되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하는 성경에 대한 하나님 계시는 하나님 자신에 의해서 결정되었다. 하나님의 이러한 포고는 모든 피조물들의 생명에 대해서 무서운 결과를 포함하고 있는데, 예를 들면, 예배에 대해서 절대적인 의존과 복종을 하게하고 수만 명의 백성을 죽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성경을 펴서 그들의 생명을 지배하고 있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선언을 읽고 있다. 성령의 현재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계시가 모든 인간의 양심에 확고하게 증거 되어 있는 이 정경 본문에서 호소하고 있다. 근본적으로 부패되어 있는 인간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장을 멀리하고 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이 왕이 되어 우리를 지배하기를 원치 않는다. 이러한 우리의 마음의 상태를 변화시키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고맙고 감사한 선물이다. 신앙은 매순간마다 성령에 의해서 감동되었을 때 성경은 우리에게 값있는 참된 진리가 된다. 고로 성경 본문은 우리의 실제적인 경험으로 변화될 수 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 논의되는 인간의 주장은 어느 한 순간도 믿어질 수 없는 것이다.

 

 

5) 밴틸 박사의 신정통주의(발트주의) 성경관 비판

전 웨스트민스터신학교의 조직신학 교수였던 코넬리우스 밴틸(Cornelius Van Til, 1895-1987)박사는 신 정통주의는 로마주의보다 성경을 더욱 무시한다고 했다. 그 이유는 발트는 계시신학과 자연신학(Natural Theology)을 무시한 입장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발트는 성경이 하나님 말씀이라고 말을 하지만 칼빈의 주장과는 전혀 거리가 멀고 역사적으로 완성된 하나님의 계시를 부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개혁신학에서 주장하는 계시관에 의하면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나타내주지 아니한 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알 수도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이 말은 모든 세계는 하나님이 나타내 주시기 때문에 알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나타내 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알 수 있다. 그 알 수 있는 가장 큰 계시가 바로 성경이다. 이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나타내신 계시가 있기 때문이다. 바빙크(H. Bavinck, 1854-1921)나 워필드(B.B. Warfield, 1851-1921)가 주장한 계시관은 "오직 성경이 하나님에게서 부터 인간에게 주어져서 그것이 우리와의 전달이 이루어지 것이 계시이다."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와 같은 사항은 벌카우어(Berkouwer)가 오직 개혁주의만이 독자성 있는 성경관을 가지고 있으므로 "다른 성경관하고 분리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 바대로 우리는 타의 성경관하고 혼합될 수 없는 독자성 있는 개혁신학의 정경관을 따를 수밖에 없다.

 

 

6) 필자의 입장에서 본 발트의 성경 계시관

개혁신학자들은 성경과 계시를 하나로 보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 전제하에 신학을 전개해 나간다. 다시 말하면 성경과 특별계시를 동일시함이 가장 먼저 전제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는 성경을 계시로 보는 입장이고 이 계시는 하나님에 의해 완전한 영감으로 기록되었다는 입장이다. “성경은 곧 하나님의 특별계시요 이는 완전 영감 된 하나님의 말씀이다.”라는 전제를 받아들이고 신학을 전개해 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기록된 성경을 계시로 받아들인다. 이는 곧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입장이다. 결국 성경과, 하나님의 말씀과, 성경의 영감을 일치선상에 놓고 신학을 말한다.

 

그러므로 초월주의적 계시관을 주장하는 발트의 성경관은 사실상 성경의 부분적인 면만 강조함으로 성경적 계시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그 이유는 실존주의적 초월주의란 자기 주관주의적 경험의 근거에 의해 하나님을 만나는 입장이다. 이는 만남이란 매개로 인하여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연결하려고 시도하는 입장이다. 이때 성경은 하나님을 만나는 하나의 도두로 전락되어 버린다. 토마스 아퀴나스나 임마누엘 칸트는 이성주의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칸트는 후에 하나님의 인식론에 있어서 불가지론(Agnosticism)에 빠져 버리고 말았다.

 

이에 반하여 실존주의적 칼 발트는 만남이라는 매개체를 가지고 하나님과 나와의 다리를 놓으려고 한다. 이 만남의 입장은 초월주의에 기초를 둔 자기 경험주의이다. 이는 기적으로든지 개인적 환상의 경험으로든지 간에 성경을 그 뒤로 제치고 직접 초월주의에 기초를 둔 하나님과의 만남이다. 이는 우리가 강조하는 계시주의적(성경) 하나님과의 만남이란 입장을 파괴하고 만다. 우리는 오직 계시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는데 이는 주관주의적인 나의 경험이나 나의 이성에 의존함이 아니요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입장이다. 그러므로 발트는 성경은 하나님을 만나는데 있어서의 도구 내지 사용물로 취급하고 만다. 역사적인 기록내지 이적과 이스라엘이 걸어온 사건까지도 자기의 주관적 입장에서 해석이 가능하고 그것을 하나의 역사적 사건으로 보기보다 자신에게 어떻게 해석되느냐? 하는 데에 강조를 두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다. 성경이 나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임할 때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고 그렇지 아니할 때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고 하나의 종이에 글자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발트는 객관적 성경의 계시를 완전히 무시하고 오직 주관주의에 떨어지고 말았다.

 

다음에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자유주의자들의 발트에 대한 견해와 일부 보수 신학계에서 발트를 사회주의 신학자 내지 이성주의(자연주의) 신학자로 변모시키고 있는 것이다. 자유주의자들은 저마다 자신의 입장에서 마음대로 칼 발트를 요리하거나 나름대로 해석해서 발트를 칼빈주의자라고 말하고 또한 현대신학의 기수라고 말하며 어떤 이들은 정통주의자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것은 발트의 신 정통주의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발트의 신학을 자기 주관대로 말하고 있다. 자신의 신학 입장으로 발트를 평가하고 있는 형편인 것이다. 그 한 예로 전경연씨 같은 경우는 발트의 초월주의적 성경관을 한마디도 말하지 않고 발트의 성경관을 말하고 있다. 즉 역사적 사건(Historie)을 참 역사적 사건(Geschichte)과 구분 없이 하나의 성경을 교훈적 기록으로만 발트가 보고 있다는 입장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윤성범씨는 말씀(logos)과 성경의 일치성에다가 발트를 맞추려고 하는 억지 논리를 쓰고 있다. 요한복음 1장 1절의 말씀(logos)은 예수님을 가리키는 말인데도 윤성범씨는 "이 말씀은 성경이다."라고 발트가 주장했다고 강조하고 있다.

 

 

 

4. 계시와 성경과 영감의 관계

본 장에서는 성경이 절대 하나님의 말씀이요, 하나님의 완전영감에 의한 계시된 것을 주장하기 위해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논증에 의한 성경관을 진술하고자 한다.

1) 계시

(1) 의미

계시란 하나님 자신이 알려지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 자신이 피조물들에게 보여 주시는 행위라 할 것이다. 구약에서의 계시란 의미는 갈라(הלג, 창35:7)인데 본래 "벗어진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신약에서의 아포칼륍토(ajpokaluvϕtw) 역시 덮은 것을 제거하여 그 배후에나 저변에 있는 것을 드러나 보이게 함을 의미한다.

 

(2) 일반 계시

일반계시는 세계에 나타나는 현상들과 사실들을 자연법칙에 따라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이것은 창조에 기초하고 모든 지성 있는 피조물에게 나타나는 현상이며 그것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권위와 지혜의 충족함을 알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영적 교제의 하나님을 인식하는 일은 불가능 하다. 따라서 이 계시는 모든 인류가 다 받아들일 수 있다. 아담의 범죄 이후에 인간이 자연을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은 부분적으로만 약간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이 자연은 인간을 반항하고 인간은 죄의 노예가 돼 버렸다. 현존 자연계는 혼란일 일어나 인간을 해치기도 하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계시의 목적과는 정반대 현상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래서 특별히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하여 신앙의 안목으로 이 계시를 아는 자만이 능히 자연과 역사에 있어서 하나님의 능력을 감지할 수 있다. 여기서 자연계시의 올바른 이해는 오직 특별계시를 이해하는 자만 가능하다.

 

(3) 특별계시

일반계시까지도 특별계시가 없이는 그 해독이 불가능하다. 더욱이 인간의 구원은 특별계시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죄가 세상에 들어온 후 하나님의 자연계시는 흐려지고 사람의 이해력은 흑암화하여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를 해석하기 불가능하다. 그 결과로 하나님은 사람이 자연계시에 의하여 본래적으로 배울 수 있는 진리들은 초자연계시로서 재 공포, 교정, 해석하심이 필요하였고 성령으로 사람을 조명하여 그로 하여금 창조물을 통하여 하나님을 보게 하시었다. 칼빈은 그의 강요에서 하나님이 자기의 창조계에 놀랍게 계시되었다는 것을 설명한 후 사람을 인도하여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에게 오게 하는데 지도자로서의 성경의 필요를 강조하였다. 하나님은 전 인류를 동일한 정죄 하에 인치하기 위하여 만인에게 예외 없이 자기의 피조물을 통한 자기의 신격의 면경을 제시했으므로 천지간에 있는 매 안목 앞에 제출된 그 빛은 사람의 감사치 아니함에 구실을 주지 아니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를 창조주에게 인도하기 위하여서는 다른 보조가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기를 사람에게 알리어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해 자신의 말씀의 빛을 더 첨가한 것은 불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4) 계시의 진실성

그럼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계시의 진실성이다. 이교도들은 자신들의 경전에 대한 우수성을 주장하지만 저들은 저들의 계시성을 증명하지 못한다. 그런데 기독교가 주장하는 계시의 특별성은 절대 허위가 될 수 없다. 하나님은 역사의 사실을 초자연으로 간섭하시어 참된 구속사역을 전개하시며 구속의 진리들과 사실들을 성경에 특별히 계시하셨다. 이런 하나님의 특별계시가 가능한지 질문할지 모르나 전 우주의 법칙은 창조주의 간섭이 없이는 전혀 불가능하다. 그것은 자연주의자들도 우주의 힘은 신이라고 말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전 우주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은 이적으로 성경을 계시한 것이다. 그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5) 계시의 방법

그럼 여기서 벤자민 워필드(B. B. Warfield)의 계시의 3 양태와 성경의 관계를 생각해 보자.

 

첫째, 신현이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은 사람으로 더불어 친근히 교제하셨다.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시어 인간과의 깊은 교제를 나누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은 성막을 건설케 하시고 거기에 계시었으며 때로는 불꽃 가운데 때로는 이적을 통하여서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시었다. 주님은 때로는 천사를 동원하여 나타나셨고 또한 그리스도를 통하여 신성의 나타남이 절정에 이르렀으며 이는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역사 속에 나타난 하나님이 된 것이다.그러나 발트가 잘못 주장하는 것이 있는데 "하나님은 계시적 내용을 주셨으므로 이스라엘 민족이나 기타 민족이나 구분하지 않으시고 계시하신다."라고 하였다. 그 계시의 내용에 관한 한 모세에게나 플라톤에게나 그 외 어느 곳에든지 갈 수가 있다. 발트는 바울이 사용한 유대인이란 말을 의인이란 말과 동일시하여 어느 누구든지 선량한 도덕적 종교적인 백성을 의미한다고 말하였다.

 

둘째로 예언의 방법이다. 구약의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 계속적으로 계시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에 대한 예언, 종말에 대한 예언, 이스라엘의 흥망성쇠,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절대주권을 인식시키기 위해 민족과 민족의 대립에 대한 예언을 주셨던 것이다. 그리고 선지자들은 이러한 환상이나 꿈을 통하여 얻은 예언이 틀림없음을 성취를 통해 입증되었다. 신약에 와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의 절정을 이루었고 로고스는 구약에서 조각조각 예언한 내용의 결정체라고 말할 수 있으며 또한 예수님은 종말의 역사의 주권자로서 재림을 예언하고 있다.

 

셋째로 기적이다. 인간이 이교도에 유혹되는 악습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에 대한 불신을 종식시키려는 방편으로 성경에 기록된 기적의 계시는 그 우위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의 원하시는 이적을 통해 계시하심을 입증하고 있다. 여기서 최대의 이적은 예수님의 성육신과 십자가 부활 사건에서 결정을 이루었다.

 

위의 3가지 계시의 양태는 그의 독특성과 연결성을 가지고 있다. 독특성은 어떤 종교에서도 나타날 수 없는 신현, 예언, 기적이 역사성을 가지고 있으며 연결성은 예언을 중심으로 하여 이루어졌고 과거, 현재, 미래가 연속적으로 이루어져 있다. 성경의 예언은 반드시 역사적으로 이루어졌으며 또한 예언과 기적을 동반하고 있다. 또한 성경의 교훈적 계시는 교훈 그 자체만 가지는 것이 아니고 예언, 구원, 역사적 종말을 포함하고 있다. 최초 기록된 예언은 참된 신현과 연결돼 있었고 또한 기적과 밀접하게 연결되었다. 또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계시의 특징은 역사적이며 언어적 독특성이 있고 구원론적이며 역사적 종말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이 주관하심을 계시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성경이 말하는 계시의 내용이다.

 

 

2) 특별계시와 성경의 관계

모든 종교는 종교의 의식, 규율, 교훈이 있다. 그러나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성경은 역사적 기록을 포함하고 있으며 특별계시로 기록된 서책이다.

(1) 역사적 성격

성경은 문서로 옮겨진 계시의 책이다. 계시가 당시 당대만을 위해 기록된 서책이라면 영구성이 없다. 그러나 신현, 예언, 이적이 시공간의 역사 속에 나타났고 그 나타난 계시가 영구성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지혜가 발달하였다 할지라도 구전으로 전해오는 계시는 그 한계성이 있기 때문에 기록으로 전해져 내려와야 한다.

 

(2)계시와 성경기록의 신비성

첫째로, 계시는 하나님의 자기 시달이다. 성경은 하나님 시달의 기록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기 주권적 시달과 성경은 동일 시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의 주권적 시행이 구체적으로 전 인류의 문제까지 성경에 모두 다 기록되지는 않았다. 그러면서 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여기서 발트의 잘못은 "성경적 증언들은 그 자체의 다른 면을 지향한다. 만일 우리가 그것들을 진정하게 보는 것 즉 그것들 자체들의 보여 지기를 원한 방식으로 보는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다른 어떤 계시 자체와 직접으로 동일시하는 때에는 우리는 성경에 초라하고 그 자체에게 환영되지 않는 명예를 돌리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둘째로, 성경에 나타난 시간적 차이이다. 하나님이 계시한 시간과 기록된 시간의 차이인데 이는 성경이 처음 기록된 시간과 마지막 기록된 시간의 차이가 있다. 위와 같은 두 가지 시간의 차이를 발트는 구분하지 않으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이로 인하여 발트는 계시의 역사적 사실을 거절하려고 한다. 그의 주장과 같은 성경계시의 역사성을 의심하는 주장은 성경을 계시 자체로 볼 수가 없다는 이론이다. 이런 주장은 매장되어야 한다. 발트의 주장에 대해 성경의 다음과 같은 중대한 계시의 확실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a. 계시된 성경이 없다면 선지자들에게 전달된 예언과 그리스도의 계시성을 알 수가 없다. 성경의 절대성에 의존해야 이 그리스도의 계시성을 인식할 수 있다는 입장은 발트주의자들에게 아주 미움을 받는다. 그러나 개혁신학자들은 성육신하신 본체인 하나님의 말씀과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하여 구별한다. 개혁신학자들은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제 2인격으로 보고 있으며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 자체로 보고 있다. 그러나 발트주의는 말씀의 교리를 인간 사색주의로 이끌어가고 있다. 구약 선지자들은 "주께서 말씀하시되"라는 구절을 시종일관 사용함으로 그들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규정하였다. 또한 신약 역시 사도들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규정하고 있다.(살전 2:13). 예수님은 자신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규정하고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규정하였다(요 10:35).

 

b. 성경은 왜 하나님의 말씀인가? 첫째, 통일성 때문이다. 성경은 저자가 다수이며, 직업이 다양하며, 기록의 배경이 전혀 다르며, 저자들이 접하고 있는 사회와 관습이 전혀 다른 입장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의 기록의 내용은 아주 통일성이 있으며, 특히 1500여년의 역사를 통해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에 대해 공통된 신앙 고백을 하고 있다. 둘째로, 성경의 영적 감화력 때문이다. 성경은 누가 읽어도 같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인다. 무식과 유식을 막론하고, 사회적 지위를 막론하고, 성령의 감화력으로 인해 영혼의 감등을 일으킨다. 셋째로, 윤리적 도덕적 우수성이 타 종교와는 비교가 되지 않게 존재한다. 그러면서 도덕률이 영적 감화력을 동반하고 있다. 넷째로, 예언의 성취성 때문이다. 어느 종교에도 성경이 예언하고 있는 역사성과 성취성에 대한 경전이 없다는 것이다. 성경만 구약에서 역사적 사건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했고 그 예언에 따라 역사적으로 예수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고 또 그가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할 것을 예언했고 또 그대로 성취되었고 또 종말을 예언했고 그 예언대로 종말이 올 것이다.

 

 

3) 성경의 영감성

(1) 계시의 정확한 전달

하나님이 그 계시를 유오한 인간에게 맡기시지 않으시고 하나님이 직접 계시를 인간에게 주어 기록하게 하신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다. 쉐드는 말하기를 "하나님이 사건이나 교리를 인생의 마음에 계시하시고 그것의 정확한 진술을 확보하는 일을 아무것도 하지 않으신다는 것은 개연하지(Probable) 않으신다. 이것은 교리가 종교의 신비를 말할 때 특별히 그렇다. 특히 3위 1체 성육신, 대리 속죄 등을 오도하지 않기 위해 더욱 신중하고 명확한 계시를 요한다."고 말했다.

 

(2) 기록된 계시의 영감

a. 성경전서의 영감 : "모든 성경" 또는 "매 성경"은 성경전서와 연관되어 있다. 율법서와 역사서, 시편과 선지서, 복음과 서신서는 영감의 지도 아래 저술되었으므로 모두 동등으로 신적 권위를 가진 헤 그라페(헬라어)인 성경이다. 바울의 서신들이 구약 문서들과 동일한 수준에 배치되어 성경의 부분들을 한 묶음으로 구성하였다(벧후 3:15-16).

 

b. 성경 전체의 영감 : 찰스 하지는 성경 전체가 영감이라고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영감이 성경 모든 부분들에 동등하게 확장되었다. 이것은 첫째로 성경의 모든 책들이 동등으로 영감 되었다. 이러한 강조점은 성경이 무오하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이는 영감이 여러 책들의 모든 내용에 확장되었다는 의미이다. 이는 도덕적인 의미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가르치며 과학적 증거와 역사적인 사실들에까지 그 진리성을 진술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ㄱ) 성경 제 2의 저자들은 사실상 하나님의 도구들이었고 (ㄴ) 주님이 직접 성경은 폐하지 못한다고 하셨고(요 10:35), (ㄷ) 예수님과 사도들이 직접 구약의 기록된 모든 부분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관설하였고, (ㄹ) 그리스도와 신약 저자들은 구약에 기록된 모든 족보의 사실들까지도 무오한 것으로 간주하였고, (ㅁ) 성경의 각 부분은 각자 다른 부분을 쓰도록 하나님이 인물을 선택하였고 각 저자들은 전혀 하나님의 지시에 따랐다."

 

c. 완전 영감: 성경의 영감을 부분적이라고 보는 것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 이유는 (ㄱ) 구약의 자증이 있다(출 3:4, 4:6, 5:1, 렘1:1, 6:1, 7:22-28). (ㄴ) 사도들의 증거이다(마 10:20, 고전2:13, 행 4:25, 마 15:4). (ㄷ) 그리스도의 증거이다. 요 10:35절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변론을 "신들"이란 단어에 기초하여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라고 하였고 마 5:18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폐하지 못하나니" 라고 하였다. 그 외 눅 24:44도 증거하고 있다.

 

 

(3) 영감의 방식

영감에 있어서 기계적 영감이냐? 부분적 영감이냐? 유기적 영감이냐?를 논할 때 우리는 유기적 영감설을 받아들이는 것이 좋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성경 저자들에게 글자까지 넣어 주셔서 임의로 그 붓을 사용하기보다 오직 그들의 내면적 인격과 조화되는 유기적 방법을 성령에 의해 사용하신 것이다.

 

a. 인격적 요소가 하나님에게 사용된 것이다. 하나님은 인격적 요소를 즉 저자의 인격을 사용하시어 영감을 주어 기록하게 하셨다.

 

b. 문맥의 근원과 배경에 있어서 성경의 저자들은 자신들이 기록하는 사물을 미리 탐지하여 낸 경우도 있었다(눅1:1-4).

 

c. 문체와 용어에 있어서 성경의 각 저자가 각자 자신의 인격에 맞는 문체를 사용하였다. 이는 제 2저자가 사용한 문자는 기계적이냐? 아니면 축자적이냐? 하는 문제가 대두 된다. 위와 같은 요소로 볼 때 우리는 축자적인 유기적 영감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d. 발트와 영감설의 관계에 있어서 발트는 사실상 성경의 완전 영감설을 부정한다. 완전 영감설을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성경이 나의 인격 속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일 때에만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완전 영감설에서 볼 때 성경의 부분적 오류가 있다는 말로 들린다. 즉 발트의 영감설은 부분적 영감설로 결론지울 수밖에 없다. 발트에 있어서 성경이 비록 영감된 것이라 할지라도 나에게 말씀으로 적용될 때만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한다.

 

 

 

 

Ⅲ. 결 론

발트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라는 입장을 저버리고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되기도 한다."는 입장이다. 이는 사실 영감설의 입장에서 보면 부분적 영감설보다 더 사악한 입장이다. 사실 부분적 영감설은 "영감된 부분은 객관적인 영감으로 존재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그러나 발트는 모든 성경은 객관적 계시로서 완전 영감된 것을 저버리고 있다. 그 이유는 초월주의적 계시관이 그의 신학적 배경으로 깔려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객관적 계시인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인식한다는 입장을 저버리고 만남이란 매개체를 통해서 순전히 주관적(초월주의적)으로 하나님을 인식한다는 입장이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하나의 도구가 된 것이다. 자연주의를 포함한 이성주의자들은 인간의 지성으로 하나님을 인식(Knowing God)한다는 입장이다. 즉 토마스 아퀴나스는 모든 사물 즉 객관적 사실에 의해 인간의 지적 요소로 하나님을 알게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객관적 사실만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는 개혁주의 입장은 “인간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인식할 수 없도록 죄로 그의 심령이 타락해서 성령이 아니고서는 하나님을 분별조차 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이 특별계시인 성경을 통해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바로 인식한 후에 사물에 대한 바른 인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성주의의 정반대로 초월주의적 하나님에 대한 인식론이 있다. 발트의 초월주의는 나의 존재가 성경의 특별계시를 져버리고도 얼마든지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성경이 만남에 대한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읽고 감동받을 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을 수 있다는 입장이다. 그러지 않고는 "성경은 전혀 종이에다 옮겨 놓은 글자에 불과한 것이다."는 입장이다. 그래서 발트는 성경의 객관적 계시를 파괴하고 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성경 계시는 "인간이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서 성경이 예언한 그리스도와, 메시야의 초림과, 그의 재림이 안 이루어질 수 있단 말인가?" 하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이 성립될 수 있다면 인간이 성경의 계시를 받아들이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상관없이 성경의 계시는 역사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말이다.

 

그럼 여기서 우리는 성경은 왜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하며, 완전영감된 것이며, 하나님의 특별계시인가? 하는 것을 교회사가 주장하는 입장과 개혁교회가 주장하는 입장을 말하고자 한다.

첫째, 역사적 교회의 입장이다. 성경에 오류가 없다고 강조하는 것은 고대교회로부터 내려오는 중요한 교리이다. 이 견해는 프로테스탄트 교회와, 로마 카톨릭교회는 물론, 심지어 헬라정교회의 신조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로마 카톨릭교회와 개혁교회는 성경의 명료성 같은 중요한 문제에 의견을 달리하였다. 교회의 통상적 회원이 성경을 해석할 자격이 있다는 것을 로마교회는 부정한다. 그러나 성문된 말씀이 교리적 윤리적으로 신뢰할 수 있다는 입장은 개혁교회와 동일하다. 그런데도 발트는 위와 같은 성경신앙은 개혁시대 이후의 새로운 신학의 시도인양 잘못 알고 있는 무식을 범하고 있다.

 

둘째, 개혁신학자들의 입장이다. 루터는 야고보서, 유다서, 히브리서, 계시록을 정경으로 보지 아니했으나 그의 저서는 성경의 축자영감설을 완전히 믿고 있었다(Maicus Reu,"Luther and the Scripture.' 1944). 칼빈은 복음서의 조화에서 성경의 구조적인 인적 오류를 발견하려고 노력하였다. 결국 그는 축자영감의 교리를 주장하고 나섰다. 박형룡 박사는 그의 저서 교리학서론 1권에서 찰스하지의 입장을 인용하여 유기적 영감설을 주장하고 있다. 박윤선 박사는 전장에서 소개한 대로 그의 저서 성경신학에서 계시 의존주의 사상을 역설하고 난 후 계시는 오직 성경의 영감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벌코프는 성경론에서(그의 저서, 조직신학 서론) 정경의 계시성과 영감성을 강조한 후 성경만이 구원에 대한 충족성을 가진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그는 로마교회와 재세례파는 "성경을 완전한 계시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존 머레이(J. Murrey)머리는 그의 저서(Collected writing of John Murray)에서 성경의 최종성과 충분성을 강조했고 무오성을 강조한 후 성경에 대한 신구약의 통일성을 강조했다. 밴틸은 “In defence of the faith의 The doctrine of Scripture"에서 성경의 전제주의(presupposition)를 강조하면서 인간이 구원을 깨닫는 일에 성경의 특별계시만이 가능하고 하나님을 아는 길은 오직 성경계시에 의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구속의 은혜를 한없이 즐거워하면서 주님을 의지하는 개혁자들은 성경을 완전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고 그 명령을 준행하기 위해 목숨도 불사한 신앙을 가지고 걸어왔다. 성경이 오류가 있다는 말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배신할 뿐더러 하나님의 존재까지도 의심하는 자들이고 인간의 죄악성을 부정하는 입장이다. 현재 우리 주위에 떠들고 있는 환상, 이적, 방언, 신유 등의 은사를 주장하며 성경 외에 또 다른 계시를 주장하는 무리들이 있는데 이는 바로 허무주의를 배경으로 하는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주의 영향을 받은 발트의 초월주의임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온 세상이 변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변치 아니할 것이고 성경에 기록된 사실은 일점일획이라도 어김없이 이루어졌고 또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암담하고 실의에 빠질 때도 있으나 역사교회가 타락할 때에 소수의 개혁자들이 피를 바치고 뼈를 깎는 아픔을 감수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귀한 신앙의 유산을 우리에게 남겨 준 것을 기억하고 항상 개혁자들의 자세를 취해야 할 것이다.

 

 

출처: http://fisher1205.tistory.com/408?category=369387 [fisher1205.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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