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 이단 등

큐티(QT)의 위험성과 성경 읽기의 방향

Sola. 2024. 3. 30. 06:00

큐티(QT)의 위험성과 성경 읽기의 방향

 

김병혁 목사

 

 

오늘날 말씀 묵상의 방편으로 활용되고 있는 QT가 지닌 몇 가지 내재적 위험성을 지적한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오늘날 QT는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의 원리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개혁자들과 신실한 개혁 교회 성도들은 성경을 이해함에 있어서 오직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본의를 찾는 일에 관심을 가져 왔습니다. 흔히 적정과 절도의 원리라고 불리우는 이 정신에 관해 칼빈 선생은 기독교 강요에서 이렇게 진술한 바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말씀 외에는 어떠한 곳에서도 하나님을 찾지 않을 것,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되는 것 외에는 하나님에 대해서 어떠한 것도 생각하지 않을 것, 혹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것은 어떠한 것도 말하지 않는 정신이다” 성경을 바르게 이해한다는 것은 이처럼 오직 성경으로부터 유출되는 뜻과 의미를 생각하고 말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개혁자들은 성경을 해석할 때에 헛된 상상이나 호기심으로 성경에 접근하는 태도를 지양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에서 말하지 않는데도 관심을 가지려 한다거나 성경에서 말하고 있지도 않는데 그 범위를 넘어서려는 어떠한 의도에 대해서도 단호하게 거절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QT는 성경 본문을 대하는 사람이 자신의 의도와 목적에 따라 성경을 잘못 해석하고 적용하더라도 아무런 제제, 경고, 대책을 제시할만한 성경적, 신학적 안전장치가 부족하거나 아예 없는 것이 태반입니다.

 

왜냐하면 일차적으로는 오늘날 유행하는 QT의 내용과 방법론을 만들어 시중에 공급하는 이들조차도 ‘오직 성경 사상’의 엄밀한 성경 이해의 기준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QT 자료들이 신학적으로 얼마나 빈곤한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는지를 보기만해도 확연하게 알 수 있습니다.

 

 

 

둘째, 오늘날 QT는 '전체 성경'(Tota Scriptura) 사상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어쩌면 QT의 가장 큰 문제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한된 분량의 성경 구절을 통해 자신의 실제적인 삶과 관련된 제한된 적용을 찾으려고 애쓰다 보면, 성경 전반에 걸쳐 조망되어야 할 전체적인 의미를 상실한 채 결국 자신의 형편과 이해와 수준에서 내용을 단정하는 우를 범하게 됩니다. 또한 성경에 나타난 몇몇 구절을 가지고서 성경 전체를 아는 양 우쭐거릴 수도 있습니다.

 

부분별로 성경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이러한 활동은 언제나 전체 성경 안에서 확인되어야 합니다. 모름지기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뜻을 찾는 이라면 자신의 취향과 목적에 합하는 부분적 내용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성경 전체 속에서 의미적 모순이나 갈등 없이 일관되게 전달되고 있는 하나님의 바른 뜻을 찾아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QT를 보면, 전체 성경 사상보다는 부분 성경 사상을 정당화하는 방편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QT를 하는 사람 중에는 성경 자체 혹은 성경 전체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 자신에게(특히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말씀만을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다’라고 생각하여 그 말씀만을 신주 받들듯이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실재성과 내재성 사이에 간격을 벌인 신정통주의, 그중에서도 바르트 신학이 끼친 치명적인 영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생각과 느낌과 경험에 따라 가감할 수 없습니다. 오직 성경은 오직 전체 성경 안에서만 그 가치를 발휘하는 것입니다.

 

 

 

셋째, 오늘날 QT는 신령주의와 주관주의로 흐를 수 있습니다.

성경의 절대성과 객관성은 올바른 성경 해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초이며 권위입니다. 성경이 정말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진리가 아니라면, 성경은 한낱 이방 종교의 경전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개혁자들과 개혁 교회 성도들은 성경의 절대성과 객관성을 근거로 한 성경 해석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늘 애를 썼습니다. 그래서 강조하게 되었던 것이 역사적 신앙고백(신조와 교리문답)입니다. 성경 내용의 일관성과 확실성 그리고 계대성을 더욱 분명하고 정확하게 이해하고 표현하는데에 이보다 더 좋은 신앙적 유산은 없습니다. 따라서 개혁교회는 역사적 개혁신학으로 공인된 신앙고백서들의 내용과 체계를 통해서 성경을 바르게 깨닫고, 성경대로 묵상하고, 성경에 따라 살도록 하는 일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역사적 신앙고백서의 내용과 체계에 충실하다는 것은 곧 성경의 내용과 체계를 바르게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개혁 교회 성도들은 성경을 이해할 때에, 각자의 독특한 정황에 따른 상이한 해석과 깨달음을 추구하기 보다는 모든 교회의 성도들이 고백한 객관적인 신앙고백적 진술과 기준에 따라 통합적인 차원에서의 성경 이해를 추구하는 일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QT는 이러한 개혁교회의 성경 이해 방식과 전혀 다른 길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더구나 근래에는 무분별한 은사주의와 신비주의, 포스트모더니즘, 뉴에이지 운동, 그리고 심리학적 관상신학 등의 영향으로 점점 더 성경을 주관과 내면을 만족 혹은 고양시키는 수단 정도로 여기는 경향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단적인 예로, 기도를 마치 신탁을 찾기 위해서나, 신의 음성을 듣기 위한 명상으로 설명하고, 경건이라는 말은 영성이라는 애매한 표현으로 바뀌어 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더 심각한 것은 사용되는 용어보다도 오늘날 QT에서 실제적으로 적용되는 방법론입니다.

 

대개의 경우, QT는 실행하는 자신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즉 성령의 내적인 조명하심에 따라 성경의 본의를 깨달아가기 보다는 자신이 먼저 설정한 목적이나 기대에 따라 성경을 해석하려 하고, 자신에게 유익한 정보와 결과만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합니다. 다시 말해, QT를 통한 궁극적인 관심이 자아 만족과 현세적 성공이면서도 그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QT 자료집 안에 교묘하게 수록되어 있는 수많은 심리학적 해설과 예화 등이 이 사실을 반증해 줍니다. 위에 언급한대로 오직 성경과 전체 성경 사상에 따라 바르게 시행되는 성경 읽기나 묵상이 아니라면, 오히려 사람의 영혼을 갉아먹고, 교회를 파괴하려는 사탄의 역사를 따르는 잘못된 행위가 될 수 있음을 인지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른 QT 혹은 바른 말씀 묵상이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 경험에 비추어 실제적으로 적용 가능한 답변을 짧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성경을 읽고 묵상해야 하는 본질적인 목적이 무엇인지를 늘 염두하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진리의 책입니다. 이 말은 성경을 읽고 묵상한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옳게 이해하고, 분별하고, 고백하기 위한 일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말씀을 대하는 첫 번째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는 일은 우리 자신의 지혜나 노력으로 되어지는 일이 아니라고 합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의 본의를 바르게 깨닫고, 인정하여 받아들이는 일은 말씀으로 역사하시는 성령의 조명의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대할때마다 먼저 자신의 뜻과 요구를 앞세울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말씀을 가지고 증거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신뢰하고, 간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의 책이며 동시에 성령의 책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사람들을 통하여 기록케 하셨으므로, 성경의 참 뜻을 찾기 위해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일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이 부분을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는 사람은 언제나 교만과 자랑의 유혹에 빠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을 대할때마다 더욱 겸손한 태도로 성령을 의지해야 할 것이고, 깨달은 말씀에 대해 전적으로 순종하는 태도를 취해야 할 것입니다.

 

 

 

둘째, 역사적 신앙고백서와 병행하여 성경 읽기와 묵상에 임하기를 권면드립니다.

앞서 주지한 바대로 바른 성경 읽기와 묵상에 관한 한, 신앙고백서의 중요성과 역할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신앙고백서는 성경 진리를 체계적이고 객관적으로 담고 있는 기준 자이고, 틀입니다. 개혁교회에서 고백하는 모든 신앙고백서들의 고백과 문답들은 모두 성경 구절을 근거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다시 말해, 신앙고백서는 성경에 관한 일종의 가장 좋은 해설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신앙고백서를 면밀하게 공부하다 보면, 신학적 통찰력은 물론 성경해석에 대한 객관적인 기준과 적용적 근거를 갖게 됩니다. 성경을 옳게 이해하는데 너무나 중요한 부분입니다. 말씀에 충실한 모든 개혁교회들이 성도를 교육하고 양육하는 데 있어서 성경과 더불어 신앙고백서를 중요하게 취급하고 활용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셋째, 설교나 성경 공부 내용으로 읽기와 묵상하기를 권합니다.

오직 성경만이 유일한 은혜의 방편입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이 방편은 언제나 말씀 선포(설교)을 통해 실현됩니다. 특히 성경 묵상 하는 일이 낯설거나 스스로 성경 지식이 부족하다고 판단하는 분이라면 금주에 들은 목사의 설교 내용을 음미하면서 더 깊은 묵상으로 나아가는 것은 상당히 유익한 일일 것입니다. 물론 이때에는 설교를 전한 목사의 내용이 성경적으로 타당한 것이어야 합니다.

 

기본적으로 이것이 보장되어 있지 않다면, 묵상 역시 성경 의도와 다른 방향으로 갈 확률이 높습니다. 하지만 목사가 바른 신학적 관점에서 옳게 전달한 설교라면, 그 내용을 근거로 묵상을 하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청교도 시대의 성도들은 이같은 성경 묵상 방식에 매우 익숙하였습니다. 그래서 주일 뿐만 아니라 주중에도 목사로부터 들은 설교 내용을 가지고서 묵상하며, 그 가운데 더 깊은 의미를 찾아내는데 시간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설교 뿐만 아니라 좋은 성경 공부도 성경 읽기와 묵상에 큰 도움이 됩니다. 아무런 원리나 기준없이 무턱대고 하는 것보다 들었던 설교와 성경 공부 내용을 의지하여 한다면, 더 좋은 효과를 가져올 것이라 확신합니다.

 

 

 

넷째, 기본적인 신학 지식과 성경 언어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성경 읽기와 묵상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모든 성도가 신학교 강단 위의 신학교수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성도는 각자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적용한다는 점에서 모두가 신학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대 교회는 갈수록 신학의 중요성에 관해 강조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일반 성도가 신학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금기시하기까지 하는 풍조입니다. 하지만 신학은 특정인을 위한 전유물이 아닙니다. 신학은 모든 성도를 위한 것이어야 하고 곧 교회를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할수만 있다면 일반 성도라고 할지라도 신학을 이해하고, 성경 언어를 배우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일반 성도들의 말씀 이해 수준과 능력이 성장해 간다는 것은 교회가 영적으로 장성해 간다는 증표이며, 교회의 이름으로 누릴 수 있는 가장 복된 일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을 기억해 보십시다.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 인간적으로 잘 대우해 준 데살로니가 성도들보다 베뢰아 성도들을 더 신사답게 여겼습니다. 그들은 사도가 전한 말일지라도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행 17:11) 할 줄 아는 이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시대의 교회에 간절히 요청되는 교인은 목사의 말에 무조건 맹종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말의 진위를 따질 줄 알며 나아가 그 말씀으로 성경을 더 묵상하는 성도입니다. 이런 수준의 성도가 되려면 부단히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익혀야 할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바른 신학과 성경 언어를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라면 금상첨화라 하지 않을 수 없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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