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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 계몽주의, 현대신학과 관련된 글

Sola. 2024. 3. 16. 06:00

칸트, 계몽주의, 현대신학 (편집자 주)

 

배현주 목사

 

 

현대 신학의 가장 심각한 오류는 시간의 개념에 대한 절대화이다.

현대 신학은 18세기 계몽주의 이후에 발생했다.

 

18세기 계몽주의 사상이란 뉴튼의 고전 역학의 [자연 철학의 수학적 원리]를 따라서 임마누엘 칸트가 완성한 사상이다.

 

그것은 시간의 영원성과 공간의 무한성이다.

시간의 영원성이란 항상 앞으로 전진하는 시간의 앞과 뒤에 따라서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시계추와 같은 시간 개념이다.

이러한 시간 개념은 항상 기계로 움직이는 시간을 객관적인 시간으로 인식하였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객관적인 시간이 있다는 것을 동일하게 인식한다는 증거는 없다.

 

다만 18세기 이후에 계몽주의 인간형이 된 현대인들은 시계추에 따라 돌아가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채칵 채칵 돌아가는 시간에 모든 것을 맞춘다.

현대인들의 시간 속에 갇힘이다.

현대인들은 시계추처럼 돌아가는 기계적 시간에 갇혀 있다.

이렇게 시계추처럼 돌아가는 기계적 시간에 익숙해진 현대인들은 더 이상 신구약 성경이 기록될때에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사고 방식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었다.

 

항상 자기로부터 시작하는 인생들은 사도들의 서신을 현대 시대 사고구조로 해석하려 한다.

전혀 해석이 되지 않는다.

항상 오류가 발생한다.

18세기 이후에 하나님의 존재까지도 거부한 배교적 사고방식으로 전환된 그러한 사고 방식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에 한 걸음도 접근 할 수 없다.

 

과연 신구약 성경이 현대 시대 사고방식으로 기록되었는가?

그렇지 않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사도들의 서신을 이해하기 위해서 현대인들은 자신의 기계적 세계관을 버려야 한다.

시계추처럼 돌아가는 시간의 개념을 버리지 않는한 신구약 성경의 해석은 난항이다.

주후 2세기 교부들은 사도들의 사고 구조와 동일하다.

그래서 그들은 삼위일체론이라는 매우 중요한 신론을 확립하였다.

후대 교회를 위해서 세워진 매우 고귀한 교리이다.

 

사도 신조- 니케아 신조 - 칼게돈 신조- 아타나시우스 신조로 이어지는 거룩한 보편 교회의 공적 선포와 함께 사도 요한의 제자 폴리캅과 그의 제자 이레니우스 그리고 아타나시우스와 캎파도기아 교부들로 이어지는 정통 교부들의 저서는 사도와 선지자들의 기록으로서 신구약 성경을 사도 시대 사고 구조로 해석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지침서이다.

 

성 어거스틴은 거룩한 보편 교회가 그 빛을 잃어버리고 마지막 역사속에 사라져가기 직전에 활동한 정통 교부였다. 그는 고대 교회 시대를 닫고 중세 교회 시대를 열었다고 평가받는 고대 교부 시대 마지막 정통 교부였다.

어거스틴에 의하여서 정통 교리는 마지막 확립을 마쳤다.

그리고 어거스틴의 신학적 과제들은 16세기 종교 개혁으로 다시 계승되었다.

 

쯔빙글리- 부쪄 - 불링거 - 존 칼빈 - 데오도레 베자 - 프랑스 개혁 교회 - 대영제국 장로 교회 장로주의 퓨리턴들로 이어지는 정통 개혁주의 신학은 단숨에 로마 카톨릭의 거짓 교리를 분쇄하고 교부 시대 정통 교리를 회복하였다.

 

그렇게 개혁주의 정통 신학이 중요하다.

역사적으로 정통 신학은 한번도 그 교리적 노선을 비켜간 적이 없다.

하나의 교리적 노선으로 좀더 확대되고 판명하게 확장되었을 뿐이다.

그것은 교부 시대부터 형성된 정통 신학의 지식을 바탕으로 그렇게 확립되었다.

교부 시대에 정통 신학의 지식이 축적되어 후대 개혁주의 정통 신학의 밑거름이 되었다.

성 어거스틴의 저서들은 정통 신학의 시금석과 같다.

실로 무척 귀하다.

 

우리는 성어거스틴의 신학적 입장을 매우 유심히 살펴야 한다.

현대 시대는 기계주의적 세계관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사도 시대와 무척 다르다.

그러한 사고 구조로는 신구약 성경에 대한 참된 해석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현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을 내려 놓아야 한다.

자신의 완고한 사고 구조를 유지하면서 사도들의 서신을 이해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18세기 이후 현대인들의 사고 구조는 이미 배교적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실존을 믿지 않는 과학혁명의 사고 구조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과학 혁명과 고전 역학으로 형성된 사고 구조는 하나님의 존재를 거절한다.

그렇게 배교적인 사고 구조로 성경을 접근하면 더욱 어둡다.

우리는 하나님의 실존부터 믿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의 실존을 믿는 사고 구조를 가져야 한다.

사도 바울은 그의 저서 히브리서에서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고 증거하였다.

 

하나님의 실존 자체를 믿지 않는 현대인들에게 신구약 성경의 해석이 열리겠는가?

그러한 불신앙의 사고 구조로 신구약 성경을 대면하기에 유보적 칭의론이 나오는 것이다.

그렇게 계몽주의 신학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닫혀 있다.

결코 열리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실존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 성경 해석은 단지 그들의 문화 생활을 보태주는 지적 유희만 될 것이다.

 

폰라드, 아이크로트, 슐라이마허, 벨하우젠, 그라프, 아놀드 폰 하르낙, 등등

자유주의 신학으로 문화생활 했던 지적 유희 현대 신학자들이 여럿 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에서 멀다.

그들은 하나님의 실존을 믿지 않았다.

과학주의적 사고방식을 믿었다.

그들이 어려서 교과서에서 배운 고전 역학을 더욱 신뢰했다.

 

그 시대가 하나님이 없는 세계관을 가지고 학생들을 키웠기에 그 배교의 사고 구조로 고민 없이 그렇게 자라서 배교적 신학자가 되었다.

그들이 독일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이다.

그 배교적 신학이 온 교회를 덮었다.

이제 현대 신학에서는 정통 신학을 찾을 수 없다.

그러나 20세기 양자 역학의 시대가 도래하였다.

인간이 좀더 겸손해졌다.

양자 역학을 주창한 자연 과학자들은 말한다.

“자연은 우리가 그렇게 바라보기 시작하면서 그렇게 보였다.”

이러한 주장이 양자 역학이 고전 역학보다 겸손해졌다는 것이다.

 

자연은 인간보다 더 크고 광대하다.

인간이 자연을 헤쳐도 그것은 자연의 극히 일부이다.

18세기 이후에 겸손하지 못한 고전 역학적 사고 구조를 가진 인간들이 자연의 신비를 다 드러내겠다고 덤벼들었다.

 

그러나 20 세기 양자 역학으로 인간들은 많이 겸손해졌다.

자연을 자연 과학으로 다 알 수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연이 인간보다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연보다 크시다.

그러니까 인간이 하나님을 알 수 없다.

이것이 불가지론이다.

 

그렇다.

믿음으로가 아니라면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알 수 없다.

현대인들의 사고 구조는 여전히 하나님의 실존을 거부한다.

무신론적 사고 구조

지금 그리스도인들은 현대인들과 달리 사고해야한다.

 

사도 바울의 선언처럼 하나님의 실존부터 합리성을 가지고 믿어야 한다.

하나님은 존재하신다.

그것은 오직 믿음으로만 알 수 있다.

시편 기자도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고 한다.”(시 14:1)고 선언하였다.

다윗 시대에도 비록 그 마음으로 말하겠지만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한 자들이 있었다.

그것은 인간의 근원적인 부패성이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조명을 받지 않는한 어느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할 수 없다.

신구약 성경 안에 시간의 개념과 현대인들의 시간의 개념이 다르다.

신구약 성경의 기록자들은 지금 현대인들과 같은 시간의 개념이 없었다.

 

사도와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특별 계시를 기록하였다.

항상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신적 작정으로부터 만물에 대한 그의 모든 계획을 우주 창조를 시작으로 펼치시는 하나님의 역사는 항상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백성들을 선택하신 예정론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그것은 현대인의 시간 개념으로 해석이 되지 않는 교리이다.

예정론은 숙명론도 결정론도 아니다.

 

하나님의 신적 작정의 교리는 신구약 성경으로부터 그대로 수납해서 믿어야 하는 철저하게 성경적인 교리이다. 현대 교회 신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려면 그 만큼 하나님의 존전 앞에서 진심으로 애통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 시대 사고 구조가 배교적이다.

주의 은혜가 없다면 신구약 성경은 항상 닫혀 있는 유물로 그 사람에게 남을 것이다.

그래서 신구약 성경은 인간이 이해하기 불가하다.

그래서 자꾸 혼선이 빚어지고 정통 교리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신구약 성경의 기록 목적을 알면 더 이상 혼선을 빚을 이유도 없고 현대인들이 사고 구조에 얽매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지도 않으리라.

오직 신구약 성경의 가장 큰 주제는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다.(Soli Deo Gloria)

그리고 신구약 성경의 기록 목적은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다.

신자들은 현대 신학이 오류를 범하고 있는 기계적 시간 개념의 절대화를 버려야 한다.

 

하나님의 구원은 시간을 뛰어 넘는 그러면서도 항상 변함없는 이신 칭의 교리를 따라서 그의 은혜로 주어진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8-9)

 

신구약 성경에 대한 해석은 인간의 학문적 수행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믿음으로 그의 은혜로 받는 값없는 선물이다.

자신의 사고 구조까지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밑에 내려 놓아야 신구약 성경이 정통 교리를 따라서 해석이 되리라.

 

세속화된 무신론적 사고 구조는 하나님의 말씀의 접근을 가로 막는 가장 무서운 장애물 일 수 있다.

이래 저래 현대인들의 배교적 사고 구조는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가는 것을 가로막는 가장 무서운 장애물이 되고 있다.

 

주님의 은혜가 ..

주님의 자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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