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천과 성찬
손재익 목사 (2014.11.15)
(생략)
Ⅲ. 교회사 속에서
지금까지 우리는 성경 본문에서, 그리고 신조인 요리문답서를 통하여서 오늘의 주제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제는 교회사 속에서 이 문제를 한 번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그동안 제가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여러 번 말씀드렸다시피, 성경의 어떤 주제에 대하여 우리가 살펴나가는 순서에 있어서 “성경 - 신앙고백 - 교회사” 라는 순서로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드린 것과 연결됩니다.
교회사 속 성찬 논쟁
교회 역사에 보면 성찬과 관련하여 중요한 논쟁이 있습니다. 크게 4가지의 서로 다른 주장이 있습니다. 로마 가톨릭의 주장은 화체(化體)설(transubstantiation)이라고 하는데, 이 주장은 성찬을 행할 때에 빵과 포도주가 주님의 살과 피의 본질과 같은 본질로 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제가 “이것은 내 몸이니라” “이것은 내 피니라”는 예전문을 낭독할 때 빵과 포도주의 본질에 형이상학적 변화가 일어나서 실제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본질(substance)로 변하게 된다(trans-)는 견해입니다. 빵과 포도주의 형태로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인 몸과 피가 임재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루터파의 주장은 공재(共在)설(consubstantiation, 문자적으로 with the substance)이라고 하는데, 이 주장은 빵과 포도주는 아무런 변화가 없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찬에는 빵과 포도주 안에(in), 그것들과 함께(with), 그리고 그 아래(under), 몸과 피를 포함하는 그리스도의 전인격이 신비스럽고 기적적인 방법으로 임재한다는 주장입니다. 루터와 그의 추종자들은 그리스도의 육체적인 몸과 피가 성찬시에 장소적으로 임재(local presence)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 견해는 화체설과 별반 다를 것이 없습니다.
쯔빙글리의 주장은 기념설(Symbolic Representation)이라고 하는데, 성찬이란 하나의 표징 또는 상징으로서, 영적인 진리와 복을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상징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그 상징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행하신 일을 단순하게 기념하는 그리스도인의 신앙고백의 표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이 주장에 의하면 성찬은 주의 죽으심을 ‘기념’할 뿐이라고 봅니다.
이 모든 견해에 반대하여, 칼뱅은 실제적 영적 임재설 (Real Spiritual Presence)이라는 것을 주장하였는데, 성찬은 단순히 그리스도의 과거 사역 곧 죽으신 그리스도와 관련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현재의 영적 사역 곧 영광 중에 살아계신 그리스도와 관계가 있다고 믿습니다. 비록 그리스도께서 육체적으로 그리고 장소적으로 성찬 시에 임재하시지는 않지만, 그 능력과 권능 가운데 자기의 임재를 보여주시며, 마치 몸으로 계신 것처럼 언제나 자기 백성 중에 계시며, 그들에게 자기의 생명을 불어넣으시며 그들 속에 사시며 그들을 지탱시키시고 강건하게 하시고 활력을 주신다고 믿습니다.
이 주장 중에 어느 것이 맞는가? 우리는 당연히 칼뱅이 주장한 ‘실제적 영적 임재설’의 주장을 따릅니다. 왜 그럴까요? 로마 가톨릭과 루터파의 주장은 예수님의 인성이 성찬 가운데 함께 한다고 보기 때문에 그분의 승천과 관련하여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이 두 주장은 아예 깊이 고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기념설은 왜 틀렸을까요? 맞는 것 같지 않습니까? 우리가 분명 성찬을 행할 때에 예수님을 기념하지 않습니까? 다함께 고린도전서 11장 24-25절을 보십시다.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라는 말이 24절과 25절에 각각 한 번씩 해서 두 번 반복하여 나옵니다. 이 구절만 보면 마치 기념설이 맞는 것처럼 보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성찬에 있어서 예수님을 기념하는 일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념설이 잘못되었다고 믿는 것은 기념설의 문제점은 기념하는 것이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기념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기념설은 여기에 계시지 않은 예수님을 기념합니다. 기념설은 예수님의 인성이 여기에 계시지 않다는 것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신성마저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기념설을 넘어 “실제적 영적 임재”를 믿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신성이 성찬 가운데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성찬은 분명 주님을 기념하는 예식입니다. 그런데 성찬은 단순히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기념하는 수준을 넘어, 그분의 신성에 함께 참여하는 예식입니다. 비록 그분의 인성은 함께 하시지 않습니다만, 그분의 편만한 신성이 성찬에 함께 하여 우리가 그것을 먹고 마실 때에 실제적으로 영적으로 임재하십니다. 이처럼, 우리가 실제적 영적 임재를 믿는 것은 그분의 승천이 그분의 신성마저도 다 올라가신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성찬을 통해서 예수님을 기념할 뿐만 아니라 지금도 이 성찬 가운데 실제로 임재하시는 주님의 신성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기에 계시지 않은 예수님이 아니라 우리와 여전히 함께 하시는 구주 예수이십니다.우리는 성찬에서 주님의 임재를 경험합니다. 성찬은 죽으신 그리스도 뿐만 아니라 영광 중에 다시 살아나셔서 하늘에 계신 예수님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하늘에 계시지만 땅에도 계신 예수님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찬은 단순한 기념의 식사가 아니라 주님과의 교제의 식사입니다. 함께 성찬을 나누는 성도들과의 교제 이전에, 여기에서 당신의 신성으로 임재하신 주님과의 교제의 식사입니다. 우리는 성찬에 참여하면서 지금 여기 계시는 주님과 교제합니다. 우리는 성찬에 참여하면서 예수님께서 지금 막 승천하신 것처럼 그리고 잠시 후에 곧 다시 오실 것처럼 임하되 또한 동시에 여기에 우리와 함께 식사하시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위 논쟁의 본질
그렇기에 종교개혁 당시에 있었던 성찬에 관한 논쟁은 겉으로 볼 때에는 성찬에 관한 논쟁처럼 보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성찬에 관한 논쟁이 아니라 주님의 두 본성에 관한 논쟁입니다. 이 논쟁의 본질은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성찬에 임하시느냐?” 하는 문제요, “주님의 인성과 신성이 과연 어디에 계시느냐?” 하는 것에 있습니다.
이에 대해 로마 가톨릭과 루터파는 하늘에 계신 예수님의 인성이 마치 지상에서도 임하는 것처럼 오해합니다. 반면, 쯔빙글리의 주장은 그러한 주장에 대해 반대하여, 예수님의 인성이 여기에 없다는 것을 잘 강조하였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예 예수님의 신성에 관한 부분을 다루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칼뱅은 예수님의 인성은 편재하신 것이 아니라 분명히 하늘에 계시다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 그와 동시에 예수님의 또 다른 본성인 신성이 성찬에 함께 임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영적 임재설을 주장한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신성과 인성에 관한 문제가 성찬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은 주님의 승천과 성찬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오늘 주님의 승천과 성찬에 대해 함께 살피는 것은 매우 성경적일 뿐 아니라 신학적이며, 나아가 교회사적이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고난과 부활을 중요하게 여기면서, 그리고 그것들을 성찬과는 연결시키면서 정작 주님의 승천에 대해서는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승천을 성찬과 연관짓지 못합니다. 하지만,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승천을 아주 중요하게 여겼고, 승천과 성찬을 연관시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서는 승천에 관하여 제46문답에서부터 제49문답에까지 총4개의 문답에서 다루고 있으니, 주님의 부활에 관한 부분은 제45문답 단 하나에서 다루고 있는 것과 아주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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