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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네바에서의 칼빈의 초기 사역과 제네바 교회

Sola. 2024. 5. 26. 06:00

 

제네바에서의 칼빈의 초기 사역과 제네바 교회

 

18개월의 초기 사역과 그 성격

 

작자 미상 (기독교 편집)

 

 

1. 제네바로 오기 이전의 칼빈

 

(1) 1533. 11. 1. Nicolas Cop의 빠리 대학 총장 강연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주해에 근거한 루터파적인 내용의 강연

 

-Erasmus의 신약성서 제 3판의 사상과 언어를 그대로 따르고 있으며 주해 부분에서 Bucer가 라틴어로 옮긴 루터의 해석을 상당 부분 그대로 따르고 있음.

 

 

(2) 샤를르 데스뻬빌르(Charles d'Espeville)라는 가명 사용하며 피신

 

쌩똥쥬(Saintinge)에 있는 앙굴렘므(Angoulême), 네락(Nerac), 노이용(Noyon), 빠리(Paris), 다시 쌩똥쥬(Saintinge), 뽀아티에(Poitiers), 오를레앙(Orléans) 등

 

이 기간에 Psychopannychia 씀(1534)

(출판은 1542년), 7. 28일에 파렐에게 한부 보냄

 

 

(3) 프랭카드 사건(the affairs of Placards), 1534. 10. 17-18

 

- 천주교의 미사를 비판하는 프랭카드가 프랑스 곳곳에 빠리, 오를레앙, 뚜르(Tours), 블로와(Blois), 암브로이스(Ambrois) 붙은 사건

 

- 아마도 (파렐의 친구요 뇌사뗄에서 개신교 목사가 된) 안뜨완느 마르꾸(Antoine Marcourt)가 쓰고, 삐에르 드 벵글(Pieere de Vingle)이 인쇄한 것으로 추정

 

- 이 때문에 칼빈은 귀족 친구인 루이 뒤 띠에(Loius du Tillet)와 함께 프랑스를 탈출하여 Basel에 도착

(Johann Oecolampadius와 Oswald Myconius가 종교 개혁적 작업하고 있는) 1535. 1월쯤

 

- Martinus Lucianus라는 익명으로 바젤에 머뭄. (Catherine Klein의 집에)

(30년후 Peter Ramus도 이집에 머뭄)

"마치 감취어진 것처럼, 몇몇 사람에게만 알려진 채로"("preface to Psalms," xli)

 

 

(4) 기독교 강요 집필과 출간

 

- 프랑스 복음주의자들의 박해 기간 중에 쓰임.

 

- 헌정사: 1535. 8. 23

 

(1) 종교에 대한 어떤 열정을 가진 사람들을 참된 경건에로 이끌 수 있도록 어떤 초보적인 것을 전달하려는 것(pedagogical motive)

 

(2) 변증적 동기(apologetic motive)

 

"그런데 당신께서 다스리시는 나라에서 지금까지 어떤 악한 사람들의 분노가 창궐하여, 이 땅에 바른 교육이 있을 수 있는 여지가 없음을 보게 되나이다"(1)

 

그래서 바른 복음을 따르는 이들이 정당한 이유없이 이단을 따르는 이들로나 잘못된 것으로 판단되어서 계속해서 옥에 갇히고, 죽임을 당하는 일을 막아보려고, 오해를 불식시키려는 목적(2)

 

(3) 왕으로 하여금 공정한 변호에 귀를 기울이도록

 

- 출간: 1536. 3. Johann Oporin 지원하에 바젤의 출판업자 Thomas Platter와 Balthasar Lasius에 의해 출판됨

 

(4) 이탈리아의 Ferrara 여행(1536년 봄)

 

(5) 빠리의 칼빈 (1536. 6. 2)

 

꾸르시 칙령(The Edict of Coucy): 자신의 신앙 때문에 조국을 떠난 이들이 6개월 이내에 복종 서약을 제출하면 고향에 돌아 오는 것을 보장한다는 내용

==> 이것이 칼빈으로 프랑스를 떠나도록 결단하게 함

(아우 앙뜨완으로 하여금 재산 처분케 하고, 마리와 함께 안전한 도시로 가기로 함)

 

(6) 1536년 7월 하순, 혹 8월 초에 프랑스를 떠나 Strasbourg를 향해 여행

 

챨스 5세의 황제군과 프랑스 군대의 충돌 때문에 있게 된 군대의 이동 때문에 남쪽 우회로로 제네바에 들르게 됨

 

 

 

2. 칼빈과 파렐의 만남

 

("시편 주석 서문"에 있는 칼빈의 말)

"나는 어디로 가든지 내가 {기독교 강요}의 저자라는 것만은 숨기려고 늘애써 왔다. 따라서 나는 기욤 파렐이 상담과 훈계로서가 아니라, 마치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그의 강한 손을 내밀어 나를 움켜 잡는 것처럼 느끼게끔 하는 무서운 저주로서 나를 마침내 제네바에 머물게 할 때까지는 계속해서 이 비밀을 유지하고 자신을 밝히려고 하지 않았다.

 

그 당시 내가 칩거하려고 했던 스트라스부르그로 가는 직선 코스가 전쟁으로 막히게 됨에 따라 나는 제네바에서 단 하룻밤만 머물고 떠나려고 했었다. 이보다 얼마 전부터 내가 방금 언급한 그 뛰어나 사람과 삐에르 비레(Pierre Viret)에 의해 천주교는 제네바 시에서 축출되고 있었다. 그러나 사태는 아직 결말이 나지 않고 있었으며 시는 경건한 자들과 위험한 파당으로 양분되어 있었다.

 

결국 변절해서 로마 카톨릭으로 되돌아간 한 사람이 나를 알아내고는 다른 사람들에게 소문을 냈다. 이 소식을 듣고 복음을 전파하는데 남다른 열심을 가진 파렐이 즉각적으로 찾아와서 나를 눌러 앉히느라고 사력을 다했다.

 

다른 일에 시간을 빼앗기지 않고 조용히 앉아 연구에 몰두하고 싶은 나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협상으로는 아무 결과도 얻어내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던지, 사정이 이리도 급박한데 도움을 주기를 거절 한다면 하나님께서 나의 은거 생활과 조용한 연구 생활을 저주하실 것이라는 악담을 늘어 놓기 시작했다. 이 저주 섞인 악담에 겁에 질린 나는 여행 계획을 취소하였다. 그러나 내가 천성적으로 수줍음을 잘타고 소심하기 때문에 어떤 특별한 직무도 맡지 않기로 했다."

 

 

 

3. 제네바 교회의 성경 봉독자 (Reader in Holy Scripture to the Church in Geneva), 목사

 

(1) 성경 봉독자 (Reader in Holy Scripture to the Church in Geneva), 성경 강해자로 시작한 칼빈(1536년 8월)

 

당시의 상황을 보여 주는 후기의 칼빈의 언급:

 

"내가 이 교회에 처음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들이 설교는 하였으나 그것이 전부였다. 그들이 상을 찾아 내어서 불태우는 것은 좋은 일이었으나 거기엔 다른 개혁 운동이란 없었다. 모든 것이 혼돈 상태에 놓여 있었다"(Opra, IX, 891-92).

 

 

[ 당시 제네바 배경 ]

- 베른의 개혁 운동의 시작(1525. 2. 7) 시의회의 가결

- 바젤(1525)

- 베른의 노력으로 제네바에서의 주교권 상실 1530, 그러나 주교는 계속 존재

- 베른의 추천으로 온 처음 개혁자들: 올리베땅, 안뜨완 소니에(Antoine Saunier), 기욤 파렐(G. Farel (1532. 10) 그러나 반대파의 암살 모의 속에 도망

 

- 1533. 5. 폭동으로 시의회원 1명 살해당함. 주교는 주모자 체포했으나 시행정당국은 주교의 법정 권한에 의문 표시. 주교는 떠나고 피의자 처형

 

- 주교를 지지하는 사보이 공국의 챨스 3세가 포위(1533. 12) 용병 500인

- 제네바 시의회는 프랑스에 도움 요청, 프랑소와 1세는 먼저 프랑스의 지배를 받겠다는 결의 요구

- 시의회에서 기각됨

- 1534년 초 Farel 돌아옴

- 그의 설교 듣고 200인 의회가 미사 종결 결정(1534. 11. 29)

- 1535년 2월 선거에서 아미 뻬랭과 개혁파 지도자들이 선출됨

- 도박, 카드 놀이 금지(파렐 지도 하의 의회)

- 주일 설교 시간과 밤 9시 이후에는 술파는 것 금지

- 빵은 합리적 가격에만 팔도록

-1535. 6. 13. 모든 사업장은 주일에 문 닫을 것 결의

- 베른은 영향력을 고려해서 1536. 2. 6,000명 군대 파송하는 결의로 제네바를 해방시킴

- 1536. 5. 복음을 좇아 살아 가기로 투표를 통해 결정.

 

 

(2) "설교자, 파렐과 칼빈" (1537. 7. 3. 자 제네바시 기록)(Packer, 129)

 

그가 설교자가 된 것은 아마도 아마도 1536. 11. 10일 이전이 아닐까? (Packer, 129)

왜냐하면 그 날자로 <신앙 고백서> 제안한 것을 보면 그가 이제 목사회(company of pastors)의 정식 회원으로 받아들여진 것이 아닐까?

 

(파렐을 제네바의 설교자로 칼빈을 성경 봉독자로)

 

 

(3) 다른 지역의 교회들의 개혁을 위한 도움

 

-1536. 10. Lausanne 신학 논쟁에 참여하여 Vaud 지방의 교회 조직을 위한 기반 마련에 도움을 주었다.

-Pierre Viret. G. Farel 도움

 

-특히 넷째 날 성만찬에 대한 토론 때에 한 카톨릭 토론자의 교부 인용이 자의적 인용이었는데, 칼빈은 준비 없이도 터툴리안, 크리소스톰, 어거스틴 등의 교부의 글을 자유자재로 인용하면서 화체설을 논박함.

 

- "영적인 끈을 통해서, 성령의 묶어 주심으로 인해서 이 영적인 교제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성찬입니다"

 

- "당신이 그들의 책을 읽지 않았음을 시인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 당신은 잠잠히 입다물고 앉아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 때 참여한 멜랑흐톤에게 큰 감화를 주었다고 함)

 

-이 반론으로 프란시스 교단의 탁발 수도승이었던 장 땅디(Jean Tandy)가 돌아서고 수개월 내에 80명의 사제들과 120명의 수도사들이 돌아섰다고 함

 

 

(4) 1536. 11. 10. 제네바 신앙 고백(the Confession of Faith)이 의회에 제출됨

 

- "제네바의 모든 시민들과 거주민들이 지키겠다고 약속해야만 하는 신앙 고백"

 

- cf. "교회에서 이같이 목사와 교사로 선포되었으므로 ... 그는 간단한 형식의 신앙고백서를 준비하였다"(Coladon, Opera Calvini (Corpus Reformatorum), 21, 58f., cited in Packer, 129)

 

- "복음을 따르는 자들과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 보다는 교황의 왕국에 속하는 것을 더 사모하는 자들에게" 신앙을 알리기 위해(Op. 10a, II) 의회원들이 먼저 서명하고, 다음에 시민들이 서명하도록 함(Theological Treatises, LCC, 53)

 

- 교회의 임무는 가능한 모든 수단을 사용하여 구성원들의 점진적 성화에 기여하는 것, 이를 위해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을 축출하는 권리를 갖는다.

 

- 이는 1537년 3월에도 아직 시행되지 않아 목사들은 의회에 이전에 이 일에 통과 되었음을 알렸고

 

- 4월 17일까지도 시행 방안이 마련되지 않았으므로

 

- 7월 29일 목사들은 다시 200인 의회에 이 사실을 상기 시켜 줌

 

- 그 결과 성 삐에르 교회의 한 구석에서 서명해야 한다고 결정 내림(1537. 7. 29)

 

- 그러나 11월까지도 어떤 이들은 거부하거나 보류했고, 새로운 교회 질서에 강력히 반대하는 몇몇 사람들이 거주하는 독일인 거리(rue des Allemands)에서는 아무도 나와 서명하지 않았음.(11. 12. 소의회에서 강력히 결의, 11. 15. 200인회의의 가결)

 

 

(5) 1537. 1. 16. "제네바의 교회 조직과 그 예배에 관한 규정"(Articles on the Organization of the Church and its Worship at Geneva)이 의회에 제출됨

 

[새로운 교회 조직의 기초를 위한 규칙 제안 ]

 

1) 주의 만찬은 교회로 모일 때마다 거행되어야, 적어도 매 주일마다 한번씩은 거행되어야

(Theological Treatises, LCC, 49)

 

- 그러나 이런 혁명적 변화는 바람직하지 못하므로 처음에는 한달에 한번씩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함

 

- 또는 제네바 시의 각 교회가 제네바 전 시민들을 위해 돌아가면서 성찬을 거행할 수 있도록 할 수 있다고 제안

 

- 주의 만찬이 예수님께 전혀 속하지 않았음을 보여 주는 그러한 사람들의 참여로 인하여 더럽혀지지 않도록 주의해야(Theological Treatises, LCC, 50).

 

- 이는 주께서 (1) 자신의 성찬의 순결성을 보존하고, (2) 타락한 자들을 회개시키며, (3) 다른 이들에게 경고가 되도록 하기 위하여 친히 제정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주께서 교회에 주신 "가장 유익하고 이로운 것들 중의 하나"로서 "교회는 이 규례를 지키지 않고서는 교회의 참된 상태를 유지해 갈 수가 없다"(Theological Treatises, LCC, 51).

 

- 이는 꼭 필요한 경우에만 국한되어야 하고,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재재의 수단으로 더 이상 이용되어서는 안된다.

 

-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마음에 감동을 일으킬 수도 있으므로 설교를 듣는 것은 허락해야 하고[수찬 금지], 그가 회개하였다는 분명한 증거를 보여 줄 때는 다시 교제를 회복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를 시행하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선한 생활을 하고 있고 모든 신실한 사람들의 증거가 있으며 쉽게 오염되지 않는 사람들을 선출하여 지정할 것을 여러 분들께 제안합니다. 그들이 이 도시의 모든 지역마다 배치되어서 생활을 감독하고, 그들의 각 관청을 감독하고, 만일 어떤 사람의 죄악이 현저하게 드러난다면 그들이 목사와 함께 의견을 교환하여, 형제 사랑으로 그 죄악을 지적하고 훈계하고 권고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가 자신의 실수를 발견하게 된다면 이 권징의 유익이 얼마나 큰 것이 되겠습니까?

 

 

2) 시편 찬송을 예배 중에 부르도록 함

 

-열심과 열정을 가미하기 위해(찬송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열정을 불러 일으킬 힘)

 

"시편을 찬양하지 않고서는 시편을 통해 발견되는 신앙 성장의 내용들을 맛볼 수 없습니다. 신자들의 기도가 너무 냉냉해져서 도리어 우리를 수치와 혼란에 빠뜨리고 있습니다. 시편은 우리 마음을 하나님께로 높이 끌어 올리며 찬양을 통해 그의 이름이 영화롭게 되는 열정을 우리에게 줍니다")

 

- 그러나 회중의 대부분은 문맹이고, 곡조와 가사를 알릴 수 없으므로 일단은 알아 듣기 쉽게 노래하는 소년 찬양대를 운영할 수 밖에 없으나, 회중들은 "온갖 신경을 곤두 세워서" 듣고 천천히 가사와 곡조를 익히면 될 것이라고 함.

 

 

3) 고대 형식을 따라 교리 문답을 시킬 것

 

- 신앙은 단절 없이 후대에 전달되어야 하므로

(부모가 올바로 가르치지 못한 이 상황에서는 갑절이나 더 필요하다)

 

- "기독교 신앙의 간단한 요약"을 작성했으므로 이것을 공부해서 정기적으로 목사에게 검사를 받도록

 

 

4) 혼례법 개정의 필요

 

- 매우 복잡하고 미묘한 문제이므로 관례(practice)와 전례(precedent)를 참조하여야 한다.

 

- 따라서 (시의원들과 목사들로) 위원회를 조직해서 사건을 판단하고,

 

- 분쟁의 큰 원인들을 고려해서 법령을 기초하게 하고, 후에 의회에 제출해서 법으로 제정하도록 해야

 

**** 이런 제안의 근본 정신: 신자들은 "자유하게 하시는 그리스도"만을 유일한 왕으로 인정하며, "한 자유의 법, 즉 복음의 거룩한 말씀에 의해서만 지배를 받는 것이다"(Opera selecta (eds. Barth and Niesel), I, 233, cited in Packer, 130)

<== 소의회(Little Council)의 논의 결과(1537. 1. 16)

 

- 성찬을 3개월에 한 번씩 하도록

같은 날 200인 의회 소집: 소의회 결정을 재가(1537. 1. 16)

 

- 더 나아가서 주일날 "대종의 마지막 타종 이후에는

푸주간이나 창자 파는 상점이나 다른 상점이나 중고푸蚑상은 개점해서는 안되며,

집에 상이 있는 이들은 즉각 부숴버려야 하고

쓸데 없는 노래를 부른다든지, 운에 맡기는 게임을 해서는 안되고

빵장수도 예배 시간에 빨리 사라고 소리지르지 못하도록 하는 법을 제정함(Opera Calvini (Corpus Reformatorum), 21, 207, cited in Packer, 140)

 

 

(6) 1537년 삐에르 까롤리(Pierre Caroli)의 문제

 

프랑스 빠리 대학 출신의 인재로서 르페브르의 학문에 감동되어 브리쏘네로부터 배움

알렝송(Alencon) 지방에서 목회하면서 천주교식 성례에 회의

 

1535. 프랑카드 사건으로 제네바로 피신 ==> 바젤

1536. 봄 ==>뇌샤텔(Neuchâtel) 교회 목사

1536. 11. 로잔의 수석 목사

이 때 제네바의 개혁자들은 Pierre Viret를 지지

Caroli가 죽은 자를 위한 기도 주장 하자 더 반발

 

베른 시에 제기된 이 문제에 대한 논쟁에 칼빈이 참가하자 1537. 2. 17. Caroli가 칼빈과 파렐을 Arius주의자들이라고 공격

<== 제네바 요리문답 초판의 삼위일체 하난님에 대한 설명

 

Caroli는 고대 교회의 세 가지 신조(사도신조, 니케아 신조, 아타나시우스신조)에 서명할 것 요구

 

1537. 3. 14 로잔에서 다시 소집된 베른 지역 교회 회의

Caroli의 목회권 박탈

Claude Aliodi라는 목사는 자신의 아리우스주의를 회개한다고 발표

 

1537. 5. 31. 독일어권 목사들의 모임(Berne) 베른시 200인회의도 참여

베른 지역에서의 Caroli의 목회 사역 금지

제네바의 사역자들의 정통성 확인

 

Caroli는 프랑스로 돌아가서 천주교로 복귀

1539년 다시 교회에 참여

1543년 다시 천주교로 돌아감

 

1537. 3월 칼빈은 화란에서 온 두명의 재세례팡의 공격 대상이 됨(비정통파"라고)

3월 16, 17일 토론의 결과 그들의 추방이 결정됨.

 

 

(7) Bernes ceremonies의 문제

 

(배경 1) 1538년 2월 3일 연례 회의에서 선출된 4인의 행정관들이 반대파

(배경 2) 프랑스의 제네바 편입 시도와 이에 따라 나타난 베른의 우위권 다짐하려는 간섭

 

- 200인 의회의 금지 조항:

정치적인 문제를 설교자들이 강단에서 말하지 말고 오직 복음만 설교할 것

(교회의 설교권에 대한 직접적 제재 조치)

 

- "베른주의 규칙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 하에 살아 갈 것" 결정

- 세례는 세례반(성수반)에서 행해져야 하고

- 주의 만찬의 떡은 무교병이어야 하고

- 성탄절, 부활절, 예수 승천일, 성령 강림절의 4대 절기는 지켜져야 한다.

 

이와 연관해서 성 금요일에 의회는 부활절 성찬 때에 무교병 사용할 것을 요청

목사들의 답변이 없자 순종하지 않으면 설교 금지시킬 것이라는 위협 받음.

목사들은 답변 없이 부활절에 설교만 하고 성찬을 행하지 않음

 

- 다음 날 200인 의회는 교체할 사람을 찾는 즉시 제네바를 떠날 것을 명령

 

- 그 다음 날은(1538. 4. 23) 그것도 기다릴 것이 없이 3일 이내에 떠나기를 명함.

 

 

 

  <제네바에서 추방당하는 칼빈과 파렐 목사님>

 

 

칼빈의 대답

 

"이제 올 것이 왔구나. 만일 우리가 사람을 섬겼다면 우리는 정말 잘못된 대우를 받은 것이지만, 우리가 위대하신 하나님을 섬겼으므로 그 분이 우리에게 보답해 주실 것이다"

(Registers of Council, xxxii, 36)

 

추방된 파렐과 칼빈은 베른에도 호소하여 동감을 얻고, 취리히 대회에 호소

 

- 교회 정치에 대한 14개 조문 제출, 이것이 인정됨

 

- 그러나 칼빈도 믿음이 약한 사람들을 위한 보장 조항과 함께 베른식 예식 받아들임

 

- 지니친 열정과 그렇게 훈련 받지 못한 사람들을 부드러운 마음으로 대하지 못했으므로 대부분 잘못했음을 인정하나 베른시가 중재에 나서 목사들의 복직을 요청하기로 함

 

5월에 베른의 사절 파송되었으나 효과가 없었고 6월 초 바젤로가기로 결정하고 거칠고 비내리는 긴 여행 후 바젤에 도착.

 

 

 

4. 제네바를 떠나서

 

후에 칼빈은 뇌샤텔(Neuchâtel) 교회로 목회하러 간 파렐에게 편지하면서 "겸손했어야 했고, 이 모든 일을 그의 장중에 휘어 잡고 계시는 하나님을 참고 가다렸어야 했다"고 함(Calvin's Letters, I, 51).

 

심지어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이제 간신히 헤어 나왔는데, 다시 그런 일에 종사한다고 하는 일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 아닌가"고 의문을 품기도 함(Calvin's Letters, I, 48-49).

 

"나의 목회 사역이 나에게 비참하게 실패한 것으로 보였던 그 재난"

 

"이후에는 주께서 분명하고 명확하게 불러 주시지 않는 이상 다시는 교회와 관련된 일을 하지 않기로 굳게 결심"(Calvin's Letters, I, 211).

 

그래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라고 하시는 것을 깨달을 때까지는 당분간 바젤에 남아 있기로 함.

 

 

 

5. Bucer와 Capito의 Strasbourg 초청:

 

프랑스인 교회(400-500명 교인)의 목사와 신학 강의 담당

 

- 관대한 Bucer와의 만남으로 인격적 성숙, 목회자적 인품, 학문작 발전 얻음

거절하다가 1538년 9월 8일에 새로운 직책(성 니꼴라 교회의 모인 프랑스피난민에게 설교)

 

"나는 어떠한 공직도 맡지 않고 조용하게 살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탁월한 종 마르틴 부셔가 이전에 파렐이 했던 것과 유사한 권고와 단언으로 나를 다른 직책으로 다시 불러내었다. 그가 내 앞에 요나의 예를 제시할 때 나는 다시 가르치는 짐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1538. 10. 20 Tillet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시민권 신청하여 스트라스부르그의 시민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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