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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금, 청지기 정신과 구제를 표현하는 방편

Sola. 2024. 5. 31. 06:00

 

헌금, 청지기 정신과 구제를 표현하는 방편

[십계명(78) - 제8계명(10)]

 

손재익 목사

 

설교본문낭독: 역대상 29장 14절; 사도행전 4장 32-35절; 고린도후서 8장 1-4절

 

 

서론

 

다른 계명도 마찬가지지만, 제8계명 “도둑질하지 말라”는 좁게만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넓게 생각해야 합니다. 이 계명 안에는 수많은 원리와 그에 대한 구체적인 실천, 그리고 여러 가지 내용들이 담겨 있습니다. 사유재산의 원리, 청지기 정신의 원리, 우리의 소유가 과연 누구의 것인가?, 노동, 정당한 방법을 통한 재산증식, 저축, 일중독과 휴식, 뇌물, 복권, 다단계, 구제 등등이 제8계명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8계명은 한 마디로 표현하기 어렵고, 단순하게 설명할 수 없습니다.

 

제8계명과 관련된 이 많은 원리와 실천들 가운데 또 하나 포함되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헌금’입니다. 제8계명과 헌금이라. 쉽게 이해가 안될 수 있습니다. 헌금을 단순히 예배 중에 이루어지는 한 순서 정도로만 생각한다면, 혹은 내가 열심히 번 돈을 하나님께 바치는 행위라고만 생각한다면, 헌금과 제8계명의 관계를 도무지 떠올리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헌금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을 다시 돌려드리는 행위라는 사실을 이해한다면, 그리고 헌금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예배드리는 교회 공동체에 속한 자들과의 성도의 교제의 수단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제8계명과의 관계를 쉽게 떠올릴 수 있습니다.

 

‘헌금’은 ①제8계명의 정신이라고 할 수 있는 청지기 정신을 표현하는 중요한 방편이 되며, ②제8계명의 한 실천이라고 할 수 있는 구제를 하는 중요한 방편이 됩니다. 이런 점에서 헌금은 제8계명을 구현하는 방법 중 하나입니다. 왜 그런지 그 이유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본론

 

Ⅰ. 청지기 정신을 표현하는 방편으로서의 헌금

 

청지기 정신을 표현하는 헌금

 

첫째, 헌금은 제8계명의 정신이라고 할 수 있는 ‘청지기 정신’을 표현하는 중요한 방편입니다. 청지기 정신이란 우리가 제8계명에 관한 설교 두 번째 시간에 배운 것처럼 나의 것이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는 생각을 드러내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것이 사유재산이지만 또한 동시에 하나님이 주신 것임을 분명하게 인식하는 것을 가리켜서 ‘청지기(steward) 정신’이라고 합니다.1) 그런데 헌금은 바로 그러한 의미를 잘 드러냅니다. 왜 헌금이 청지기 정신을 드러내는 방편입니까? 크게 2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청지기 정신인 근거(1); 헌금의 대상

 

헌금이 곧 청지기 정신의 표현인 근거는 첫째로 헌금의 대상 때문입니다. 우리는 헌금을 할 때에 하나님께 드립니다. 우리가 드리는 헌금의 대상은 하나님입니다. 헌금(獻金)이라는 자체에 그런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헌금이라는 말은 ‘바칠 헌(獻)’ ‘쇠 금(金)’을 써서 “돈을 바친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칩니다. 하나님께 바칩니다.

 

헌금을 드릴 때에 주로 부르는 찬송가 50장 “내게 있는 모든 것을”이라는 가사에도 보면 “주께 드리네 주께 드리네”라고 합니다. 헌금송으로 자주 사용되는 찬송가 634장은 오늘 본문 역대상 29:14에 근거해서 “........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왔으니 이 예물을 주께 드리나이다”라고 노래합니다. 그런데 역대상 29:14이 바로 우리가 제8계명을 살피면서 ‘청지기 정신’에 대해서 배울 때에 보았던 본문입니다.

 

 

청지기 정신인 근거(2); 헌금의 이유

 

헌금이 곧 청지기 정신의 표현인 근거는 둘째로 헌금의 이유 때문입니다. 헌금이 곧 청지기 정신을 표현하는 것인 근거가 단지 헌금을 드리는 대상 때문 만은 아닙니다. 그냥 하나님께 드린다고 해서 다 헌금이 되는 것도 아니고 다 청지기 정신을 표현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이유가 중요합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께 드립니까? 그냥 돈이 남아서 드립니까? 아니면 내가 열심히 일했으니 하나님도 그 일부를 조금 가져가실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교회에 돈을 내어야 교회도 운영이 되니까 합니까? 교회에서 설교도 듣고 점심도 먹으니 영화나 강의 한편 가격의 수준에서 그에 대한 요금을 내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헌금을 하는 이유는 나의 모든 것이 나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의 것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다 돌려 드려야 하는데 다 드리지는 못하고 일부만 드리는 것입니다.

 

원래 우리들은 가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가진 것은 모두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관리할 뿐입니다. 우리는 “내 것입니다.”라고 말할 만한 그 어떤 소유도 없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돈, 재물, 명예, 권세가 모두 하나님의 것이며 단지 위임받아 관리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헌금을 통해서 우리는 그러한 정신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원칙적으로 불신자에게는 헌금이라는 개념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물론 불신자도 헌금이라는 외적 행위가 가능합니다. 하지만 헌금이라는 실질적 행위는 불가능합니다. 불신자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냥 불신자의 돈이 하나님에게로 옮겨지는 것일 뿐입니다. 물리적 이동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행위 안에는 자신의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고백이 없기 때문입니다.

 

헌금은 이러한 성격을 가진 것이기에 기부(寄附, contribution)와도 구분됩니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돌려드린다는 고백이 아닌 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되어 버린다면 그것은 헌금이 아니라 기부입니다. 그런데 헌금은 기부가 아닙니다. 우리 교회가 헌금에 대한 ‘기부금 영수증’을 바람직하지 않다고 판단하는 이유가 바로 이런 것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혹은 교회에 기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을 다시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헌금에 대한 우리의 바른 고백을 세상 앞에 표현하는 것입니다.

 

 

정리

 

정리하면, 헌금은 우리의 모든 것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고백하고 인정하는 행위이기에 청지기 정신을 표현하는 중요한 방식입니다. 헌금을 통해 우리는 자신이 가진 일부를 하나님께 바침으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합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임을 드러내는 행위이기에 예배 시간에 헌금을 하는 것입니다. 헌금은 곧 예배인 것입니다.

헌금을 할 때 우리들이 ‘입’으로는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지만, 헌금 주머니에 헌금을 넣는 ‘행위’안에 이런 메시지를 담습니다. “하나님~! 나의 모든 것은 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다만 그 중에서 일부를 드림으로써 그 의미를 표현합니다. 나머지 것은 비록 드리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기셨으니 청지기 정신에 따라 잘 사용하겠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이런 점에서 헌금은 제8계명의 의미를 드러내는 중요한 방편입니다.

 

 

 

Ⅱ. 구제를 하는 방편으로서의 헌금

 

구제를 실천하는 방편으로서의 헌금

 

둘째, 헌금은 제8계명의 실천이라고 할 수 있는 구제를 실천하는 하나의 방편입니다. 지난 주일에 살핀 것처럼 구제(救濟)란 제8계명의 긍정적 명령입니다(엡 4:28).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는 과연 성경에서 말하는 구제(救濟)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상당수의 사람들이 성경이 가르치는 구제와 사회복지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구제는 2가지 중요한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는 성경에서 말하는 구제는 1차적으로 ‘교회 안’의 어려운 사람을 위한 것이었다는 점입니다. 갈라디아서 6:10을 보시면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이 본문은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제141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111문답에서 근거구절로 사용하고 있는 구절입니다.

 

또 하나는 지난 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사적인 방식의 구제보다는 주로 공적인 방식의 구제를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집사회’를 통한 구제입니다. 이 2가지 특징을 잘 실천할 수 있는 방식이 바로 ‘헌금’이라는 점에서 헌금은 구제를 실천하는 방편이 됩니다.

 

 

사도행전 4장 32-35절에 나타난 성경적 구제

 

이러한 사실은 오늘 우리가 읽은 사도행전 4:32-35에 잘 나와 있습니다. 보시면 “(32)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33)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34)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35)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라고 말씀합니다.

 

이 내용을 보면 ①‘믿는 무리들’이 서로 통용합니다(32). 34절에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라고 되어 있는 ‘그 중’은 바로 ‘믿는 무리’를 말합니다. 이처럼 구제의 대상이 ‘교회 안’입니다. ②그리고 35절에 보면 구제를 하기 위해서 직접 갖다주는 것이 아니라 사도들의 발 앞에 둡니다.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다는 말은 당시의 ‘헌금’을 하는 그 당시의 방식입니다. 그렇게 ‘헌금’을 통해 모여진 것에 대해서 사도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줍니다. 사적인 방식이 아닌 공적인 방식의 구제가 이루어집니다. 이렇게 교회 안의 구제, 공적인 방식의 구제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를 실천하기 위해서 사용되는 방식은 바로 ‘헌금’입니다.

 

 

고린도후서 8장에 나타난 ‘교회 안’의 범위

 

조금 전에 제가 성경에서 말하는 구제란 ‘교회 안’을 대상으로 한다고 했습니다. 이 때 우리는 ‘교회 안’이라는 범위를 단순히 개체교회로 생각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좀 더 넓은 의미로 생각해야 합니다.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보편교회라는 범위로 확장해야 합니다.

 

이 사실이 오늘 우리가 읽은 고린도후서 8장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1-2절에 보면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향해 마게도냐에 있는 교회들이 헌금한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1)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2)환란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마게도냐는 그리스의 북부지역입니다. 이곳에는 빌립보, 데살로니가 교회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곳에서 ‘헌금’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그곳 교회 성도들은 자기들의 형편이 어려운데도 불구하고 풍성한 연보(捐補) 즉 ‘헌금’을 하는 일에 참여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고린도교회가 알았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이런 말로 고린도후서 8장을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마게도냐 교회들은 왜 헌금을 했습니까?

 

다함께 로마서 15:25-26을 찾아보겠습니다. “(25)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26)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연보하였음이라” 여기에 보면 바울은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를 위하여 헌금하였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 헌금을 들고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당시에는 은행을 통한 온라인 시스템이 없었으니 직접 들고 가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구제입니다. 이런 점에서 구제의 범위인 ‘교회 안’은 보편교회를 말합니다. 그리고 그 방식은 바로 ‘헌금’입니다.

 

이러한 원리에 따라 현재 우리교회를 돕는 교회들이 있는 것입니다. 언약교회, 실로암교회, 동래언약교회, 광교장로교회, 나눔교회, 삼일교회 등이 우리를 돕고 있는 것입니다.

 

 

구제가 교회 안을 대상으로 한다는 것의 의미

 

구제의 대상이 ‘교회 안’이라는 것으로 한정되는 것을 통해서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구제’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구제’는 단순히 남을 돕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 안에서 하나다”라는 신앙을 드러내는 방편입니다. 신자들 가운데에 간혹 구제를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는 개념이나 사회복지와 긍휼 사업 정도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아닙니다. 구제란 복음 안에서 하나임을 드러내는 방식입니다. 예컨대, 교회 공동체 안에 어려운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집사회가 그 사람에게 구제를 합니다. 이것은 집사회가 가난한 사람을 돕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한 교회 공동체 안에 속해 있으니 복음 안에서 하나라는 신앙고백을 실천하는 행위입니다. 마찬가지로 다른 교회가 우리를 돕고 우리교회가 다른 교회를 돕는 것은 불쌍해서 돕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가 복음 안에서 하나로 묶여져 있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라는 고백의 실천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구제를 위한 방편인 ‘헌금’을 가리켜서 ‘교제’라고 표현합니다. 오늘 본문 고린도후서 8:4에 보면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말은 헌금한 일을 가리켜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데, ‘참여’라는 말의 헬라어가 ‘교제’라는 뜻의 ‘코이노니아’입니다. 왜 이런 표현을 사도 바울이 사용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헌금하는 일이 성도가 서로 교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2) 헌금은 단순히 돈을 모아서 불쌍한 사람에게 갖다주는 것이 아니라 성도가 성도를 섬기는 ‘성도의 교제’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교제하며 성도의 사랑을 느끼는 것입니다.3) 헌금은 성도들이 복음 안에서 서로 교통하는 것입니다. 사도신경에서 고백하는 바 성도의 교제를 실천하는 방편이 헌금입니다.

 

 

헌금의 성격

 

이러한 사실과 관련해서 우리는 ‘헌금의 성격’에 대해서 좀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상당수의 신자들이 헌금을 하나님께 내는 것이라는 의미는 제대로 이해하고 있으면서 그것이 또한 동시에 우리가 우리에게 내는 것이라는 의미가 없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내가 교회에 낸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교회와 나를 분리시켜 버립니다.

 

하지만, 헌금이란 내가 제3의 기관에 내는 기부가 아닙니다. 기부는 내는 주체와 받는 대상자가 구분됩니다만, 헌금은 내는 주체와 받는 대상자가 구분되지 않습니다. 교회는 나와 구분되는 존재가 아닙니다. 내가 곧 교회입니다. 그래서 내가 나한테 내는 것이 헌금입니다. 나를 위해서 사용합니다. 내가 낸 돈이 나와 한 몸을 이루고 있는 교회공동체를 위해서 사용됩니다. 내가 낸 돈이 내 가족과 마찬가지인 성도를 위해서 사용되는 것입니다. 내가 낸 돈이 내가 속한 교회 안의 가난한 자에게 사용되고 내가 낸 돈이 나와 같은 복음을 소유한 다른 교회를 위해서 사용되는데, 그 대상자는 남이 아닙니다.

 

 

정리

 

정리하면, 헌금은 구제를 실천하는 구체적인 방편 중 하나입니다. 헌금을 통해 우리는 교회 안에 가난한 사람이 없도록 하고, 제8계명에서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의미를 실천하게 됩니다.

 

 

 

Ⅲ. 헌금의 정신을 제대로 드러내어야 함

 

정신이 중요함

 

헌금이란 단순히 돈의 오고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정신이 중요합니다. 그 정신이 제대로 구현되지 않은 채로 행해지는 헌금, 그리고 그 헌금을 통해 모여진 재정의 사용에 있어서도 그 정신이 제대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헌금의 의미는 사라지고 말게 됩니다.

그렇기에 헌금을 하는 사람은 철저히 청지기 정신에 따라 해야 하고, 내가 내는 돈이 남에게 간다는 생각보다는 나와 한 몸을 이루고 있는 자들을 위해서 사용되어진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정신을 드러내는 방식 - 자발적이고 형편과 필요를 고려한 방식

 

이러한 정신에 따라 헌금은 자발적(voluntary and willingness)으로 해야 합니다. 그리고 형편(abilities and condition)에 따라 해야 합니다. 그리고 필요(need)에 따라 해야 합니다. 헌금을 하는 동기는 자발적이어야 하고, 헌금을 하는 수준은 형편과 필요가 고려되어야 합니다. 즉 내는 사람의 형편에 따라 해야 하고, 교회가 사용해야 할 필요에 따라 해야 합니다. 형편이 넉넉하다면 넉넉하게 해야 합니다. 형편이 넉넉한데 조금 하는 것은 헌금의 정신에 어긋납니다. 반대로 형편이 어려운데 많이 할 수 없습니다. 형편에 맞게 해야 합니다. 필요가 많다면 많이 해야 합니다. 써야 할 곳이 많은데 적게 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때 형편과 필요가 항상 일치하지 않습니다. 형편과 필요에서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형편보다 필요가 더 많을 수가 있습니다. 이 때는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 자신의 형편보다 조금 더 내어 놓을 수 있습니다. 형편이 안된다고 해서 필요를 채우지 않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형편과 필요 둘 사이에서 ‘필요’에 좀 더 비중을 두되 그렇다고 해서 형편을 너무 어렵게 만들 정도로 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헌금을 하는 수준에 대한 기준이 오늘 본문 고린도후서 8:3에 잘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라고 말합니다. “힘대로”라는 말은 ‘형편에 따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원하여”라는 말은 자발적으로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힘에 지나도록”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바로 형편보다 조금 더 한다는 것입니다.

 

이외에도 고린도후서 8:11에 보면 “..... 마음에 원하던 것과 같이 완성하되 있는 대로 하라”라고 말씀하는데, 여기에서 “마음에 원하던 것과 같이”라는 말은 ‘기꺼이’(willingness) 라는 말과 ‘자원하는 것’이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이어서 “있는 대로”(according to your means) 라는 말은 ‘형편대로’(according to their ability)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고린도후서 9:7에도 보면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이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라고 말씀하는데, 인색하게 해서도 안되고 억지로 해서도 안된다고 말합니다. 특별히 여기에서 “인색함으로”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고통스럽게’(out of pain), ‘염려 가운데서’ 또는 ‘꺼리면서’(reluctantly)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기준에 의해서 하는 것이 헌금이기에 헌금은 절대로 강요될 수 없습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헌금을 강요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것은 오히려 제8계명을 어기는 것이 됩니다. 헌금은 항상 자발적이어야 합니다. 지나친 요구로 인하여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적절하지 않은 헌금을 하게 하는 것은 제8계명을 어기는 일입니다. 헌금은 형편과 필요에 맞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형편과 필요를 무시하면서까지 우리들의 물질을 요구하지는 않으십니다.

 

 

헌금의 사용

 

성경이 이렇게 가르치고 있기에 교회는 성도들이 낸 헌금을 사용함에 있어서 집사회가 그 중심이 됩니다. 집사회는 성도들의 헌금으로 모여진 교회의 재정을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를 따라(행 6:3) 지출합니다. 그리고 지출의 용도는 말씀봉사자를 위한 합당한 생활비(고전 9:4-14; 딤전 5:17-18), 성도들을 교육하기 위한 지출, 구제(행 4:32-37), 선교(빌 4:15-19), 다른 교회를 돕는 일(행 11:27-30; 롬 15:26; 고전 16:1-4), 그 밖에 교회 공동체를 유지해 감에 있어서 필요한 곳에 합니다.

이 때 가장 먼저 사용해야 할 곳은 예배를 위한 지출인 말씀봉사자를 위한 합당한 생활비입니다. 그 다음이 성도들을 교육하기 위한 지출, 그리고 구제의 순서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그렇게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헌금의 방식

 

헌금을 함에 있어서 무기명(無記名)이라는 원칙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자발성을 강조해야 하겠기 때문입니다. 억지로 하게 하면 헌금의 정신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청지기 정신을 제대로 드러내기 위해서는 성도들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고백을 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필요를 무시하지 않습니다. 그냥 알아서 하게 하면 부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성도들에게 교회의 재정지출을 공개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투명성’ 때문이 아닙니다. 종종 사람들이 교회재정을 공개하는 것이 마치 ‘투명성’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라 생각하여 교회 안을 벗어나 다른 사람에게 공개하거나 심지어 회계감사를 받기까지 하는데, 그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교회가 재정지출을 공개하는 이유는 교회의 필요를 회중들에게 알리는 것입니다.

(생략)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자발적으로 형편과 필요에 따라 드리는 헌금은 청지기 정신과 구제를 표현하는 방편입니다. 수직적으로는 청지기 정신의 표현이요, 수평적으로는 구제의 실천입니다. 그렇기에 헌금은 한편으로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표시로 드리는 것이요,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의 회원으로서 교회공동체를 위한 필요를 내는 것입니다.4) 그리고 헌금 행위의 기반은 위로는 하나님과의 관계이며, 아래로는 다른 회중과의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헌금을 통해서 나의 것이 나의 것이 아니라 나의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는 점을 드러내어야 하며,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은 나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와 함께 한 교회를 이루고 있는 성도들을 위해서 사용되어야 한다는 점을 드러내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할 때에 헌금은 제8계명을 드러내는 중요한 방편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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