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 진화론에 대한 신학적 비평
김병훈 교수 /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신학정론 제33권 제2호 / 2015.11)
유신 진화론이란?
과학계에서 진화론을 주장한 주장이 한 이후, 신학자들 가운데 이를 하나님의 창조의 방식으로 인정하는 부류들이 나타났으며 지금까지 상당한 이들에 의해 지지를 받고 있다.(2) 이러한 주장은 유신 진화론(theistic evolution) 또는 진화론적 창조론(evolutionary creationism)으로 불리며 “완전한 능력을 갖춘 창조”(fully gifted creation)라는 말로 표현되기도 한다.(3)
유신 진화론은 한 가지 차이로 인하여 두 가지 견해로 구별이 된다. 공통점은 하나님께서 창조를 진화의 방식을 따라 행하셨다는 이해에 있다. 구별 점은 진화의 방식을 따라 창조하시되 특정한 단계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초자연적 개입이 있으셨는가 아니면 오로지 진화의 방식만으로 창조를 하셨는가에 대한 견해의 차이로 인하여 나타난다. 과거의 일반적인 유신 진화론의 주류는, 전자에 해당이 되는, 하나님의 초자연적 개입을 완전히 부인하지는 않는 견해이었다.(4) 그런데 최근에 이르러는 하나님의 초자연적 개입의 여지를 부인하고 전적으로 진화론의 방식으로만 창조가 이루어졌다는 후자의 견해가 유신 진화론의 대표적인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5)
이러한 차이점을 고려하면서 유신 진화론의 정의를 찾아보면, 전자와 관련하여 벌코프(Louis Berkhof)의 것을 살펴볼 수 있다. 벌코프는 유신 진화론에 대해 말하기를, “그것은 우주의 배후에 존재하는 하나님을 설정하고, 그 하나님이 우주 안에서 대체로 불변하는 자연법칙과 물리력들만으로 활동을 하시며, 특별한 경우에, 예를 들어, 절대적인 창조라든가, 생명의 시작, 그리고 이성적이며 도덕적인 존재의 시작의 경우에, 직접적으로 기적적인 개입을 하신다.”고 기술을 한다.(6) 벌코프의 설명에 따르면, 유신 진화론은 하나님의 초자연적 창조의 사역을 인정을 하되, 그것들은 우주 자체가 시작이 되는 절대적인 창조, 그리고 생명체의 시작, 그리고 인간의 시작의 경우에만 그러한 것으로 한정을 한다. 그리고 다른 모든 창조의 사역들, 예를 들어 인간 이외의 동물들의 창조는 자연적인 진화의 방식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주장을 한다. 이런 종류의 유신 진화론은 천체물리학적이며 지질학적인 측면에서 진화론을 받아들이면서 생물학적 측면에서는 하나님의 기적적 개입을 인정한다.
유신 진화론에 대한 또 다른 정의는 오직 자연 안에서 진화의 방식으로만 창조를 설명한다. ‘진화적 창조’(evolutionary creation) 또는 ‘완전한 능력을 갖춘 창조’(fully gifted creation)를 주장하는 유신 진화론은 앞서 말한 전자에 해당하는 유신 진화론을 비판하기를 진화론으로 설명이 안 되는 생물학적 틈새를 막는 방편으로 하나님의 초자연적 활동을 덧붙인다고 한다. 이 견해에 따르면 전자에 해당하는 유신 진화론은 틈새를 막는 일종의 미봉책(stop-gap)으로 하나님의 기적적인 개입을 불필요하게 개입시키는 약점을(?) 지닌다. 전적으로 진화의 방식으로만 창조가 이루어졌다고 주장하는 후자에 해당하는 유신 진화론에 대한 반 틸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완전한 능력을 갖춘 창조’의 관점은 “전 우주를, 하나님의 끝없는 너그러움과 측량할 길 없는 창조성에 의하여, 끊어지지 않는 진화의 발전처럼 사람이 파악할 수 없는 어떤 것이 가능하도록 하는 데에 필수적인 자기-조직화(self-organization)와 변형(transformation)의 모든 능력이 주어진 하나의 창조물‘로 인식한다.”(7) 덧붙여 라무르의 정의도 참조할만하다: “진화론적 창조에 따르면, 하나님은 명령에 의해 정해졌으며, 보존이 되고 있고, 설계를 반영하는 진화의 과정을 통하여 우주와 생명을 창조하셨다. ... [진화론적 창조]는 창조주가 목적론적 진화를 포함하는 자연 법칙을 세우고 유지를 한다.”(8) 정의에 따르면 후자의 유신 진화론의 요점은 크게 세 가지이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창조를 하신 것을 믿는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피조 세계에 진화의 자연 법칙을 부여하셨다는 것이며, 마지막 하나는 하나님께서는 이 진화의 법칙을 따라 창조를 하신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핀 유신 진화론의 두 가지 견해들 가운데 전자는 점진적 창조론과도 유사점이 있으며 현대에 이르러서는 후자의 정의가 유신 진화론의 대표적 견해이므로, 본 논고에서는 후자의 정의를 따라 유신 진화론을 평가하고자 한다.
유신진화론의 관점: 진화론을 근거로 시도하는 창조와 진화의 상보적 조화
그런데 통념상 창조와 진화는 서로 대립 개념이 아닐까? 유신 진화론자들은 어떤 이유로 진화를 창조의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일까? 유신 진화론자들의 이와 관련한 설명에 따르면, 이러한 의문들의 배경에는 창조와 진화가 서로 대립을 한다는 갈등적 이해에서 비롯된다. 즉 창조와 진화의 관계를 갈등적으로 보는 이들은, 뚜렷한 설득력 있는 이유도 없이, “진화와 창조를 동시에 받아들이면” 문제가 된다거나 “하나님은 진화라는 방식으로 인간을 창조할 수 없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창조와 진화의 갈등론에 따르면, 만일 과학자가 진화론을 따라 생물과 인간의 창조를 완벽하게 설명을 한다면 창조론은 설 자리가 없으며, 또 반대로 창조론을 따르면 진화론은 성립이 되지 않는다. 만일 하나님께서 기적적인 방식으로만 창조를 하신다면 진화론은 틀린 것이며, 반대로 인간이 진화의 방식에 따라 출현하였다면 기적의 방식에 따른 창조론은 틀린 것이 된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창조와 진화를 대립하는 것으로 보는 까닭과 관련하여 우종학은 말하기를, 창조의 방식을 “마술사가 마술을 부리듯 신도 그런 방식으로 인간을 창조했을 거라고 상상”을 해왔던 탓이라고 한다.(9) 유신 진화론자들은 주장하기를, 이러한 상상에 묶여서 하나님의 창조 방식을 “너무나 제한된 관점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연 선택과 같은 진화의 방식으로 사용하여 인간을 창조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한다.(10) 우종학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성경을 보면 때로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거나 꿈에 나타나시거나 하는 기적적인 방식으로 일하시기도 하지만,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자연 현상인 가뭄이나 가뭄 뒤에 오는 비를 통해서도 일하시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를 기적적인 방식으로만 제한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과학으로 이해할 수 있는 자연의 원리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천지를 창조할 수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11)
이러한 이유로 유신 창조론은 창조와 진화가 서로 갈등하는 대립 관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창조와 진화는 서로 상보적이라고 주장한다.(12) 그것은 창조를 말하는 신학과 진화를 말하는 자연과학이 각각 서로에게 공헌을 할 수 있는 나름의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판단을 하기 때문이다.(13) 이러한 상보론은 특별계시인 성경과 일반계시인 자연을 두 권의 하나님의 계시의 책으로 여기는 유비를 사용한다. 성경과 자연은 둘 다 저자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성경과 자연은 서로 충돌되거나 모순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을 한다.(14)
이러한 유비는 성경의 신앙과 자연의 과학을 서로 취급 영역이 다르다고 보는 독립 관계론에서 종종 인용이 된다. 하지만 유신진화론에서 이 유비를 말할 때, 그것은 독립 관계론을 주장하는 굴드(Stephen Jay Gould)가 말한 ‘겹치지 않는 교도권들’(NOMA: Nonoverlapping Magisteria)이 뜻하는 바와 일정 부분 공통점을 가지면서도 다소 다른 개념을 포함한다. 굴드가 말한 노마(NOMA)는 신학과 과학이 각각 가르치는 영역과 의미가 분리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를 테면 과학은 경험적 우주와 관련하여 “그것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으며(사실) 그리고 그것이 왜 이런 식으로 작용을 하는 지(이론)”를 밝힌다. 반면에 종교는 “도덕적 의미와 가치의 문제들”에 대해 답을 준다는 것이다.(15) 즉 객관적 자연 세계에 대한 정보는 과학을 통해 얻으며, 주관적 윤리 영역에 대한 정보는 종교를 통해 얻는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종교와 과학은 전혀 갈등의 관계에 있지 않다고 말한다.
유신 진화론은 종교와 과학, 곧 성경과 자연의 관계가 갈등의 대립관계가 아니라는 점에서 굴드의 설명과 일치하는 점이 있으나, 한편으로 굴드는 성경과 종교를 주관의 영역에 제한을 하는 반면 다른 한편으로 유신 진화론은 성경의 자연에 대한 계시가 객관적이기도 하다는 점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굴드와 차이를 보인다. 즉 유신 진화론은 자연 과학과 신학을 완전히 독립된 두 영역으로 보는 견해에 대해서는 반대를 한다.(16) 특별히 최근에 대표적인 유신 진화론자인 반 틸은 신학과 과학의 관계와 관련하여, 특별히 창조와 진화의 논쟁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제안을 한다. 첫째, 창조인가 진화인가의 잘못된 양자택일의 토론을 버려야 한다. 둘째, 기독교 신앙에 본질적인 창조교리에 대한 역사적 신앙을 회복해야만 한다. 셋째. 진화를 말하는 과학의 개념이 창조의 형성사를 그려내는 데에 신뢰할 만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넷째, 기독교 창조교리가 자연주의 세계관보다 진화의 개념에 더 확실한 실체적 토대를 제공한다는 것을 제시해야 한다. 다섯째, 신학자들로 하여금 창조의 형성사에 대한 이러한 개념을 역사적 창조 신앙에 대한 현대적 설명과 통합을 하도록 격려하여야 한다.(17)
반 틸의 요점은, 신학이 성경이라는 책을 읽어내는 능력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연이라는 책을 읽어내는 능력이 과학에게 있음을 인정할 때, 과학도 신학과 더불어 창조의 형성에 대한 정보를 주므로. 과학이 주는 창조의 형성사에 대한 정보를 믿을 만한 것으로 인정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진화의 원리에 의해 밝혀진 결과물 속에 반영이 되어 있는 정보와 미적 탁월성에 대해서 신학은 창조주에 대한 신앙을 통해서 더욱 합리적이며 설득력이 증거를 한다고 말한다. 결국 성경과 신학은, 굴드가 말한 것처럼 단지 주관적인 윤리 영역에 대해서만 무엇인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인 발견해내는 진화의 현상들이 바로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에 의한 것이라는 창조 교리를 객관적으로 지지해주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창조와 관련한 적극적인 지지기반의 역할을 한다고 주장하는 셈이다. 즉 성경은 진화론을 지지함에 있어서 자연주의 세계관보다 오히려 더 든든한 버팀목이 된다는 것이다.
유신 진화론과 방법론적 자연주의
유신 진화론의 주장은 소위 말하는 방법론적 자연주의(methodological naturalism)를 전제한다. 방법론적 자연주의란 소위 유신론적 과학(theistic science)을 반대하며 기본적으로 “하나님 또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활동과 같은 신학적 개념은 자연과학에 고유한 부분이 아니라는 관념”이다.(18) 방법론적 자연주의에 따르면, 유신론적 과학은 잘못된 과학 철학이며 과학과 신학의 통합 방식에 대해 근본적으로 오도를 하는 잘못을 범한다. 방법론적 자연주의가 말하는 과학의 목표는 우연적인(contingent) 자연현상들을 엄밀하게 다른 우연적인 자연 현상들을 통하여 설명을 하는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과학적 설명들은 자연의 사물들과 사건들을 다루는 것이지, 인간이나 하나님의 인격적인 선택들과 행동들을 다루는 것이 아니다. 방법론적 자연주의 지지자들은 한편으로 초월적 주제는 과학의 영역이 아님을 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자연세계가 존재하는 모든 것’(natural world is all there is)이라는 형이상학적 자연주의와도 자신들을 구별한다.(19)
방법론적 자연주의에 대한 유신 진화론자의 견해는 어떨까? 우종학은 방법론적 자연주의에 대해서 단호한 지지를 보낸다. 그는 말하기를 “과학은 어차피 자연세계를 다루는 학문이니까 초월적 세계가 없다고 가정하든 있다고 가정하든 별로 상관없다”고 주장한다. 그의 생각에 “더 중요한 문제는 ‘우주와 생명체의 기원이 과연 자연적인 방식으로, 다시 말해 과학으로 설명될 수 있는가’ 하는 가에 있으며, 이 질문에 대해 기독교인들이 ”과학적으로 답할 수 있다“고 답을 하지 않아야 할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아울러 우종학은 이러한 방법론적 자연주의가 무신론적 자연주의로 나갈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방법론적 자연주의는 형이상학적 개념과는 무관하다고 말한다. 그 까닭은 자연적 원리로 우주의 기원을 설명한다고 하여도 그것이 형이상학적 무신론을 결과하지 않는 것은 그 자연적 원리에 따른 설명의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할 가능성도 똑같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방법론적 자연주의는 단지 자연을 연구하기 위해 필요한 전제, 곧 우주는 이해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반영한 견해일 뿐이며, 일종의 형이상학으로부터 중립적 가치를 지닌 과학적 방법이라는 것이다.(20)
하지만 반 틸은 방법론적 자연주의라는 말과 관련하여 우종학보다 신중한 태도를 보인다. 그러나 그 신중성은 방법론적 자연주의 자체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방법론적 자연주의가 형이상학적 자연주의를 낳는다는 비판에 대한 경계심에서 비롯된다. 우선 방법론적 자연주의에 대해 반 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것은[방법론적 자연주의는] 때때로 자연 과학은 스스로 인정을 하듯이 자연 현상들에 호소하는 이론들만을 제안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관념을 대표한다. 자연과학은 하나님의 활동과 관련한, 그것이 보통을 뛰어 넘는 특별한 것이든지 그렇지 않든지, 질문들을 다룰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의 방법론은 원자들, 분자들, 세포들과 같은 것들이 할 수 있는 것들에 호소하는 방법으로만 설명을 할 수 있는 현상들만을 오직 다룰 뿐이라는 한계를 갖는다. 이런 이해에 비추어 볼 때, 기독교인이 생명의 형성사(the formational history of life)와 관련하여 특별창조의 한 형태를 반영하는 이론을 제안하고자 할 때, 그 이론은 과학의 통상적 의미에서 “과학적”일 수가 없다. ··· 자연주의 세계관과는 달리, “방법론적 자연주의” 용어에는 하나님의 특별한(extraordinary) 행동에 호소하는 좀 더 포괄적인 이론들을 구성하지 못하도록 막는 어떤 것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러한 이론들은 자연 과학 이론이 아닌 다른 것으로 여겨져야만 하기 때문이다.“(21)
반 틸은 방법론적 자연주의가 자연과학의 방법론으로서 적절하다는 점을 인정하면서, 그것이 무신론적 형이상학의 어떤 암시를 결과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실히 강조한다. 유신론적 설명은 자연과학 이론이 아닌 다른 것으로 여겨져야 하므로, 자연과학은 초자연적인 개입과 관련한 이론을 부정할 위치에 있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반 틸은 방법론적 자연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를 달가워하지 않는다. 방법론적 자연주의를 형이상학적 자연주의가 낳은 자식인 것처럼 주장하면서 방법론적 자연주의 지지자들을 무신론적이며 유물론적인 자연주의로 몰아간다고 불평을 한다. 적어도 방법론적 자연주의가 자연주의적 세계관에 뿌리를 둔 과학적 방법론을 뜻한다면 단연코 방법론적 자연주의를 지지하지 않는다고 선언한다.(22)
빈 틸은 한 편으로는 하나님께서 창조를 직접적으로 하셨다는 특별창조론을 거부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자연주의 진화론을 거부하면서, 앞서 말한 바처럼 ‘완전한 능력을 갖춘 창조’(fully gifted creation)를 주창한다. 반 틸이 말하는 창조는 스스로 진화의 발전을 통해 자기 조직화와 변형을 이루어가는 자아 충족적인 체계이다. 그러한 창조는 오직 자연의 원리로만 설명이 되는 진화의 방식을 따라 발전이 되어가면서도 그러한 발전을 가능토록 하는 능력을 부여하신 하나님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반 틸은 방법론적 자연주의가 자신이 말하는 완전한 능력을 갖춘 창조의 자연현상을 설명함에 있어서 신적 개입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합당하지만, 그것이 어떤 무신론적 형이상학을 함축한다면 반대한다는 의견을 피력한다.(23)
그렇다면 결국 반 틸의 ‘완전한 능력을 갖춘 창조’(fully gifted creation)는 유신론적인 ‘방법론적 자연주의’라고 할 수 있겠다.(24) 형이상학적 견해는 유신론적이지만, 우주의 기원과 현상을 설명하는 방식은 방법론적 자연주의를 따르기 때문이다. 현재 방법론적 자연주의는 내용적으로 진화론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므로 그것은 유신 진화론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유신 진화론 비판(1): 기원과학으로서 방법론적 자연주의의 부적절성
유신 진화론은 자연 현상을 방법론적 자연주의에 따라 설명을 하는 것이 자연주의 세계관적인 함의를 내포하거나 전제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리차드 부비(Richard H. Bube)는 방법론적 자연주의와 관련한 세 가지 견해들을 제시한다. 하나는 방법론적 자연주의를 무신론 세계관에 의한 자명한 결과로 보는 무신론자의 견해이며, 다른 하나는 무신론자의 견해와 정 반대의 위치에서 무신론자들의 주장대로 방법론적 자연주의가 자연주의 세계관을 함의하는 것으로 보고 자연과학 방법에 있어서 초자연적 개입의 요소를 인정할 것을 요구하는 일부 기독교 변증가들의 견해이고, 마지막 하나는 형이상학적 함의를 고려하지 않은 채, 과학은 오직 자연 현상만을 설명할 따름이라는 관점에서 방법론적 자연주의를 수용하는 견해이다. 부비는 이 세 가지 견해들 가운데 자연주의를 과학적 메커니즘으로 보는 세 번째 견해를 지지한다.(25)
그러나 필립 존슨(Phillip E. Johnson)의 판단은 다르다. 그의 생각에 유신 진화론자들은 잘못된 판단을 하고 있다. 그들은 판단하기를, 한 편으로 진화론을 어떤 형이상학적 전제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은 채 과학적으로 검증을 받은 것으로 인정하면서, 다른 한 편으로 진화론을 과학적으로 확정이 된 것으로 단정을 한 방법론적 자연주의에 형이상학적 자연주의의 의미를 부여하는 리처드 도킨스와 같은 무신론자들을 경계하면, 유신론을 지켜낼 것이라고 판단을 한다. 그러나 존슨의 생각에 그것은 부족한 생각이다.(26) 존슨은 유신 진화론자들이 표방하는 것처럼 방법론적 자연주의가 형이상학적 자연주의의 함의에서 자유로울 것으로 생각하고, 방법론적 자연주의에서 신앙과 과학의 갈등을 해소하는 위로의 길을 찾는 것은 지혜롭지 않음을 지적한다.
“유신론적 방법론적 자연주의 논리의 약점은, 과학이 계속해서 우주의 전 역사를 설명한다고 주장을 하고, 결국에 가서 결론적으로 모든 문제들에 대해 자연주의적 해법이 가능하다고 전제를 할 때, “방법론으로의 자연주의”와 “세계관으로의 자연주의”의 구별은 붕괴되고 만다는 사실이다. 자연주의적 과정들을 찾고자 하는 결정은 단순한 방법론일 수도 있지만, 그것들이 항상 존재한다는 확실성을 선험적으로 가지려면 실재(reality)에 대한 강력한 가정을 전제하여야만 한다. ··· 만일 누군가가 하나님께서 생명의 창조에 직접적으로 개입을 하셨을 지도 모른다고 언급을 하면, 방법론적 자연주의자들은 그 생각을 “빈틈의 하나님”(God of the gaps)을 끼워 넣는 시도라고 경멸하며 업신여긴다. 왜냐하면 빈틈의 하나님은 과학이 화학적 진화의 진정한 이론(true theory)을 발견하게 되면 어쩔 수 없이 불신을 당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리는 하나님의 개입이라는 가능성에 대한 질문을 과학적 조사 영역 밖의 것으로 취급하며 자연주의를 허위로 입증할 수 없는 신앙의 문제로 만들어 버린다.“(27)
존슨의 설명은 만일 기독교인들이 방법론적 자연주의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음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를 하고, 나중에 자연영역의 탐지되지 않는 통치자로 하나님을 다시 그려볼 여지가 좀 있으려니 생각한다면, 그것은 지혜롭지 않다는 것이다. 방법론적 자연주의는 기독교 유신론이 지성적으로 흥미롭지 않으며 지지받을 증거도 없다는 결론을 암시하게 된다. 그렇게 될 때, 방법론적 자연주의는 자연주의가 대학들에 있어서 지배적인 철학으로 군림하도록 만들어 버리게 될 것이라고 존슨은 염려한다.(28)
알빈 플란팅가(Alvin Plantinga) 또한 방법론적 자연주의는 스스로 결코 전제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방법론적인 자연주의가 마치 가치중립적인 주장처럼 여겨지는 까닭은 과학에 대한 대중적 이해 때문이라는 것이다. 플란팅가는 “과학이 우리 자신과 세상에 대한 진리를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에 있어서 차분하고, 합리적이며, 전혀 감정에 치우치지 않으며, 이데올로기나 도덕적 신념들이나 종교적 또는 신학적인 헌신들과는 완전히 무관하다”는 생각이 “계몽주의 이래로 민간에 널리 퍼져 있는 생각”이라고 언급한다. 이러한 생각으로 인하여 방법론적 자연주의 또는 “잠정적 무신론”(provisional atheism)이 과학의 방법론적인 원리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 있게 들린다는 것이다.
플란팅가는 과학의 중립성을 이유로 어떤 학문이 과학적이기 위하여서는 하나님의 창조 활동을 고려해서는 안 된다는 방법론적 자연주의를 비판한다. 방법론적 자연주의 자체가 중립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플란팅가는 반 틸이 말하는 것과 같은 소위 ‘기능적 완전성’(functional integrity)이라는 신학적 전제도 방법론적 자연주의의 중립성을 지지하지 못한다고 논증을 한다. 방법론적 자연주의는 오직 경험적 분야에 대해서만 말할 권리가 있을 뿐이며, 어떤 종교적이며 신학적 전제를 금지할 권리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고 주장을 한다. 방법론적 자연주의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직접적으로 창조하셨다는 주장은 ‘과학 활동을 방해하는 것’(science-stopper)이라고 배척을 한다. 그러나 플란팅가의 판단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창조에 개입을 하셨다는 사실로 인하여 방해를 받는 것은 과학 활동 자체가 아니다. 하나님의 직접적인 창조가 방해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주가 창조된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있는 그대로 존재한다는 자연주의에 과학이 근거하여야 한다는 주장, 곧 방법론적 자연주의일 따름이다.(29)
존슨과 플란팅가의 주장을 유신 진화론 논의에 적용을 할 때, 우리가 얻는 것은 무엇일가? 그것은 방법론적 자연주의는 적어도 기원의 문제에 관하여 하나님의 직접적인 창조의 활동을 부정할 권리를 소유하고 있지 못하며, 또한 기원을 다루는 과학의 방법론으로서 부적절하다는 판단이다. 유신 진화론이 자연 현상을 설명함에 있어서 방법론적인 자연주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을 고려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유신 진화론 비판(2): 우주를 바라볼 뿐인 하나님 - 기능적 이신론
현대 유신 진화론의 대표적인 반 틸의 주장, ‘완전한 능력을 갖춘 창조’(fully gifted creation)는 하나님을 기능적으로 이신론의 하나님으로 만든다. 데이비스(John Jefferson Davis)가 지적하는 바와 같이,(30)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기를 조직화하고 변형을 해나가는 기능적인 능력을 완전히 부여하신 우주를 만드시고, 그 후에는 어떠한 초자연적인 개입도 하지 않으시며 우주 스스로가 생명을 창조해 나간다는 반 틸의 창조관은 하나님을 자신이 만드신 우주 밖으로 내몰아버린다.
반 틸은 일단 창조된 우주가 스스로 부여된 완전한 창조 능력으로 진화의 방식으로 창조를 해 나가는 과정에 하나님께서 어떤 초자연적인 개입을 한다는 창조론은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훼손하는 것이라고 주장을 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이를 테면 하나님께서 완전한 능력을 갖춘 우주를 창조할 능력이 없어서 우주를 만드신 후에 계속적으로 보완하고 수정을 하고 또 도움을 주어야 하는 불완전한 우주를 만드셨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최소한 두 가지 점에서 매우 잘못된 것이다. 하나는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실 때뿐만 아니라, 창조 이후에도 만드신 자연에 계속적으로 필요에 따라 섭리적인 개입을 하신다는 사실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반 틸이 말하는 ‘완전한 능력을 갖춘 창조’의 주장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자연의 질서 안에 직접적으로 개입을 하는 것은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다. 그러한 설명은 비단 창조의 문제를 넘어서 섭리 활동과 관련하여서도 하나님의 개입에 대해 자연주의적 차단을 하는 결과를 피할 수가 없다. 진화를 통한 창조의 과정에 개입을 못하시는 하나님께서 제 2 원인들의 인과관계를 목적대로 이끄시는 특별섭리의 활동 그리고 또한 기적을 행하시는 비상섭리의 활동을 하실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또 다른 하나는, 월터 브래들리(Walter L. Bradley)가 비판을 하고 있듯이, 하나님께서 우주를 만드시고 그 후에 자연 안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시는 것은 하나님 스스로 자신이 행하신 일이 완전하지 못함을 나타내는 것이므로 자신의 완전성을 부정하는 모순된 일이 발생한다는 식의 반 틸의 주장은, 본인이 결코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매우 하나님을 향한 경멸적인(pejorative) 표현이라는 사실이다.(31) 얼핏 들으면 반 틸의 말이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을 높이는 말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반 틸의 문제는 하나님께서 스스로 반 틸이 그리고 있는 ‘완전한 능력을 갖춘 창조’를 하시겠다고 그의 작정을 계시하시거나 약속을 하신 일이 있지 않다는 데에 있다. 반 틸은 자신이 확신하는 과학적 증거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창조가 자신이 설명하는 방식대로 일치하여야 한다는 주장을,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주장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스스로 세운 전제와 논리 안에서 하나님을 가두어, 창조 한 후에 어떠한 직접적인 개입도 하실 수가 없는 하나님으로 만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이 너그러움과 지혜와 능력의 하나님이시라고 주장을 하는 것이다.(32)
유신 진화론 비판(3): 과학적 사실에 근거한 것인가?
유신 진화론은 어떠한 형태의 것이든지 진화론을 확정된 견고한 과학적 사실로 전제한다. 그러나 진화론이 과학적 사실인가? 반 틸의 주장을 따르면, 자기 조직화의 완전한 능력을 갖도록 만들어진 우주는 스스로 생명을 창조해간다. 그것은 대진화(macro evolution)를 포함한다. 도대체 무생물인 물질이 현존하는 모든 생명체의 배열이 이루어지기까지 진화론적인 발전을 이루었다는 과학적 증거가 어디에 있는가? 물질의 분자로부터 시작하여 고도의 복잡한 생명체로 진화를 이루어 인간과 같은 존재까지 창조를 해내는 자연의 능력을 경험적으로나 과학적으로 인정할 증거가 있는가? 브래들리는 그런 주장은 입증될 수가 없다고 단언한다. 진화론을 반대하는 것은 과학 지식의 부족 때문이 아니다. 브래들리는, 반 틸이 말하는 “완전한 능력을 갖춘 창조”의 개념에 동의하기에 너무나도 경험적 데이터가 부족하다는 어려움을 호소한다. 브래들리가 자신으로서는 도무지 납득이 되지를 않는 반 틸의 주장을 마침내 이해할 수 있는 나름대로 찾은 실마리는 다음과 같다.
반 틸은 주장하기를 과학자들 대부분이 생물학적으로 중요한 분자들이 생명 체계의 속성을 가지고 있는 복잡한 형태로 자기-조직화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믿는다고 한다. 그는 이러한 결과를 하나님께서 주신 특성들 덕분인 것으로 돌린다. 그러나 과학 문헌들 안에 있는 수많은 최근 논문들은 매우 다른 그리고 훨씬 더 비관적인 그림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반 틸과 같은 과학자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생명의 자연주의적 기원을 믿는 것일까? 가장 그럴 듯한 설명이 덴버 대학교 생물학 교수인 플라트(James E. Platt)에 의해 제공이 되었다. 대부분의 고등학교와 대학 교과서에서 생명의 기원을 다루는 방식에 대해 말하는 미국 생물학 교사(American Biology Teacher)에 실은 최근의 논문에서 플라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 세부사항들에 대한 장황한 설명 없이, 나는 기꺼이 생명의 기원에 관한 주장들이 입문서들에서 일반적으로 다루어지지 않고 있는 난제 투성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겠다. 더 나아가 ? 일부 동료 교수들의 분노를 살 위험을 각오하고 ?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생명의 기원에 대한 자연주의적 설명을 믿는 주된 이유는 그들이 그렇게 확신할 만한 어떤 시나리오에 대한 증거를 찾았기 때문이 아니라, 단순 형태로부터 생명의 진화를 이루어 내온 과정과 동일한 과정이 이러한 단순 형태들을 만들어 내는 일에도 작용을 하였을 것이라는 원리를 열렬히 믿기 때문이다.”(33)
유신론자인 과학자들이 방법론적 자연주의를 주장하며 우주가 스스로 자기-발전을 통해 진화해가는 하나의 완전한 기능체라고 이론을 제시하는 것은 과학적 사실에 대한 확신 때문이 아니다. 지금 확인하고 있는 자연 원리가 진화를 말한다고 믿고, 그러한 원리가 생명의 첫 시작의 때에도 여전히 동일하게 작용을 하고 있다고 믿는 방법론적 자연주의 원리 때문이다. 지금 확인하였다고 말하는 진화론 자체가 이미 방법론적 자연주의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며, 그것을 가지고 기원을 말하는 것도 방법론적 자연주의의 환원적 방식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현재의 자연의 생명 현상들에 대한 자연주의적 설명을 통해서 생명의 기원을 말할 수 있다는 시각은 이미 생명의 기원이 자연에서 비롯되었다는 형이상학적 원리에서 비롯된다. 반 틸은 그 시각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된다고 말하지만, 이 지점에서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방법론적 자연주의가 형이상학적 자연주의의 함의에서 자유로울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지혜롭지 않다는 필립 존슨의 말을 경청해 듣는 것이 지혜로울 것이다.(34)
유신 진화론자인 라무르(Denis O. Lamoureux)는, 그의 표현을 따라, 진화론적 창조(evolutionary creation)가 과학과 통합된 생명의 기원에 관한 유일한 기독교적 견해라고 주장을 한다. 그러한 근거는 무엇일까? 라무르는 유신 진화론의 기본 방법론적 원리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진화론적 창조에는] 세계의 일상적 작용(the daily operation of the world)을 다루는 과학들과 과거의 기원을 조사하는 과학들 사이에 차별이 없다. 그리고 그것은[=진화론적 창조는] 진화론적인 생물학을 우주론과 지질학에게서 분리하지 않는다.”(35) 결국 라무르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유신 진화론자들이 유신 창조론자들과 구분이 되는 이유는 그들의 세계관과 관련이 된다. 유신 진화론은 지금의 세상과 마찬가지로 생명의 기원이 있기 전 세상에서도 동일한 과학적 원리가 작용을 하며, 그 원리에 따라서 생명이 시작되기 이전의 상태에서 생명이 자연 원리에 따라 나타났다고 믿는다.
이러한 견해는 과학적 사실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과학적 견해가 아니라, 하나의 형이상학적 믿음이다. 결국 유신 진화론의 문제는 두 가지로 초점이 모아진다. 하나는 진화론에 근거한 생명의 기원에 대한 설명이 과학적으로 확실하게 입증이 되기에는 불충분하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유신 진화론자들이 기독교인들이기 때문에 이러한 형이상학적 믿음이 성경에서 나온 것이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데에 있다. 성경의 하나님은 이신론의 하나님이 아니시며, 제 2원인으로만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며, 창조를 제 2원인으로만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유신 진화론 비판(4): 하나님의 창조를 자연의 활동으로 환원하는 오류
유신 진화론은 하나님의 창조가 오직 자연적인 인과관계에 의하여, 곧 제 2원인들에 의하여 이루어짐을 말하며, 어떠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개입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한 방식대로 하나님께서 창조를 지금도 계속해서 하고 계시는 것이 된다. 즉 유신 진화론의 창조는 진화가 계속되는 한 결코 완성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창조가 그러한가? 예를 들어, 데이비스는 반 틸의 창조론은 성경의 창조 개념과 다른 것임을 적절하게 제시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창조는 ‘창조하다’(???)를 뜻하는 동사의 용례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의 명령으로 말미암아 이제껏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존재하게 되는 것”을 가리켜 말한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창조적인 활동을 하셨다는 것이고, 창조된 것의 “새로움”(newness)에 있다.(36)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창조는 예부터 신학적으로 설명해온 ‘무에서의 창조’(creatio ex nihilo)인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의 초점은 질료적 원인(causa materialis)에 있지 않다. 그것은 오히려 실행적 원인(causa efficiens)과 관련한 것이다. 이를 테면 ‘무에서의 창조’는 두 가지 개념을 내포한다. 하나는 창세기 1장 1절과 히브리서 11장 3절(“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에서 보듯이,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명령을 발하시므로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존재하게 되는 일차 창조(creatio prima)의 개념이다. 또 다른 하나는 일차 창조를 통해 만들어진 것을 가지고 다른 존재를 만드시는 이차 창조(creatio secunda)의 개념이다. 이차 창조는 창조를 하기 위하여 질료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질료적 원인의 관점에서 보면 일차 창조만이 ‘무에서의 창조’가 된다. 그러나 ‘무에서의 창조’로 설명하는 관점은 실행적 원인의 관점임에 유의를 하여야 한다. 즉 그것은, 질료를 사용하든 사용하지 않든, 어떤 것을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서 존재하도록 하는 활동을 가리킨다. ‘무에서의 창조’로 표현이 되는 성경의 창조는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전달한다. 하나는 오직 하나님만이 창조의 실행적 원인, 곧 실행자라는 사실이다. 창조는 전적으로 제 1원인이 하나님의 직접적인 활동인 것이다. 다른 하나는 앞의 것에서 나오는 당연한 귀결로, 하나님 이외의 어떤 물질이나 작용원리가 ‘나타난 세계’의 원인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창조의 실행은 질료 자체가 스스로 존재하지 않은 무엇인가를 존재하도록 하는 창조의 능력을 가지고 행하여지는 것이 아니다. 요컨대 창조는 제 2원인들의 작용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37)
이 두 가지 사실에 비추어 유신 진화론이 범하고 있는 오류는 명확하게 드러난다. 유신 진화론은 매우 제한적 의미에서만 하나님을 일차 창조의 실행적 원인으로 인정을 한다. ‘완전한 능력을 갖춘 우주’를 창조하는 일차 창조에서만 하나님은 창조자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유신 진화론에서는 더 이상의 일차 창조는 없다. 단지 그 우주가 구체적인 모습을 갖추어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많은 이차 창조가 있을 뿐인데, 하나님은 이차 창조의 실행적 원인으로 작용을 하지 못한다. 모두 제 2원인의 작용 안에서만 이차 창조가 이루어질 뿐이다. 하나님이 아니라 자연의 원리들이 실행적 원인이 되며, 또한 질료적 원인이 된다. 질료가 스스로 실행의 주체가 되어 무엇인가를 창조하는 것을 반 틸은 자기-조직화(self-organization)이며 변형(transformation)이라고 일컫는다. 이것은 마치 자연 스스로가 생기를 가지고 자신을 변형시켜 나가는 유심론(vitalism)적 설명과도 유사하며, 극단적인 경우는 범신론적 성향을 띄게 될 위험성을 초래할 수 있다.
유신 진화론 비판(5): 성경이 증거하는 창조를 비롯한 여러 교훈들과의 충돌
유신 진화론이 성경의 창조 기록의 지지를 받을 수 없다는 비판은 그 이론이 제기된 이후로 끊임없이 있어 왔다. 이에 대한 유신 진화론의 대답은 성경의 창조 기록은 하나님의 창조의 사실을 말할 뿐, 창조의 방식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창세기 1장을 해석하면서 문자적 해석을 버리고 본질적으로 비문자적인 해석을 한다. 즉 창세기의 창조 계시를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한 것이며, 어떻게 창조가 되었는지에 대한 것은 아무 것도 알려주지 않는다고 주장을 한다.(38)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지지를 받을 수가 없다. 포이스리스(Vern S. Poythress)가 지적을 하고 있듯이,39) 창세기 2:21-22에서 하와의 창조는 아담의 옆에서 취한 갈빗대로 만드시고 살로 채우심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말씀하고 있는데, 이는 하와의 창조 사실뿐만 아니라 창조 방법도 아울러 계시하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창세기 1장의 6일의 창조도 또한 어떻게 창조하신 것인가에 대한 계시를 보이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유신 진화론은 이러한 해석을 전혀 무시한다.
라무르는 자신이 제안한 ‘진화론적 창조’(Evolutionary creation)의 난점에 대해 스스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진화론적 창조론에 있어서 가장 커다란 문제는 그것이 성경의 시작 부분에 대한 전통적인 문자적 해석을 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교회사를 통해 보듯이, 거의 모든 기독교인들은 창세기 1-3장을 과거에 실제로 있었던 사건들의 기본적인 기록으로 이해를 해 왔다. 구체적으로,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창세기 2장이 아담과 하와로 시작이 되는 인류의 역사를 계시하고 있다고 믿어 왔다. 이러한 진화론적 견해를 좀 더 어렵게 만드는 것은 예수님과 성경의 저자들이 창세기의 앞부분을 문자적인 역사적 서술로 종종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가장 날카로운 어려움은 인간의 죄와 육체적 죽음의 기원과의 관계를 설명하는 일이다.
창세기 3장, 로마서 5장과 8장, 그리고 고린도 전서 15장은 죽음이 세상이 온 것은 아담의 창조와 그의 원죄 이후라고 분명하게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진화에 대한 이 기독교적 관점은 화석의 기록이 인간이 등장하기 수 억 년 전에 죽음이 존재하였음을 결정적으로 입증한다고 주장을 한다. 다시 말해서, 진화론적 창조는 우주적 타락(cosmic fall)에 대한 전통적인 기독교 신앙을 거부한다. 따라서 진화론적 창조론자들은 기원에 관한 성경의 기록을 매우 부자연스러우며(unnatural) 반직관적인(counterintuitive) 방식으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 그러나 신자라면 진화론적 창조를 수용할 것을 고려하기에 앞서, 창세기 1-3장, 로마서 5장과 8장, 그리고 고린도 전서 15장과 관련하여 앞서 언급한 문제들을 직접적으로 고심하며 다루어야 할 필요가 있다.(40)
우리는 라무르의 글에서 유신 진화론자의 솔직한 문제인식을 볼 수 있다. 본래 젊은 지구론 자이었던 라무르는 자신이 겪었던 문제를 여기서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라무르 자신은 어떻게 이 질문들에 대해 답을 내린 것일까? 그가 내린 답은 우선 성경은 당대의 고대 세계관 또는 과학관을 반영한 글이므로 문자적으로 읽거나, 또는 현대과학에 따라서 성경 해석을 일치시키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과학이 말할 수 있는 사실과 영적 사실을 구분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인간은 선행인류(prehuman)에게서 육체적으로 진화를 이룬 결과라는 것은 과학적 사실이지만, 하나님의 형상과 죄의 문제는 영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진화론적 관점에서 설명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영적인 인간이 선행인류의 진화 가운데 어느 때에 나타나게 되었는지는 신비로운 사실로 남기고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41) 라무르는 세 가지 견해를 소개하며 어느 것이든지 선택을 하라고 제안한다. 하나는 ‘진화론적 인류일조설’(Evolutionary monogenism)이다. 하나님께서 어느 시점에 선행인류들 가운데 한 쌍을 선택하여 그들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하셨고, 이 쌍을 제외한 다른 선행인류들은 다 멸절이 되었으며, 현행 인류는 선택받은 선행인류인 아담과 하와의 후손으로 오늘에 이른다는 주장이다.
라무르는 이 견해의 지지자로 빌리 그래함(Billy Graham)을 언급한다. 다른 하나는 ‘특정시점의 인류다조설’(Punctiliar polygenism)이다. 어느 특정한 시점에 하나님께서 극적으로 개입을 하셔서 선행인류들 가운데 한 그룹이나 또는 모두에게 자신의 형상을 부여하시고, 나머지는 모두 멸절케 하신 것으로 보는 견해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아담과 하와가 여러 명으로 해석을 한다. 마지막 하나는 ‘점진적 인류다조설’(Gradual polygenism)이다. 선행인류들이 진화를 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형상과 인간의 타락의 양상이 점진적으로 알 수 없는 방식으로 나타났다는 견해이다. 이것에 따르면 역사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아담과 하와도 없다. 이 가운데 라무르 자신은 점진적 인류다조설을 수용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것이야 말로 창세기 2장의 역사성의 압박에서 라무르를 자유롭게 만드는 견해가 된다.(42)
유신 진화론이 제시한 이러한 견해들은 모두 성경을 신화나 우화로 보고, 성경에서 창조를 단순한 사실로만 읽고 창조의 방식을 인정하지 않음으로 나타난 결과이다. 이러한 흐름에서 라무르는 앞서 말한 성경 구절들이 증거하는 죄와 죽음의 관계에 대해 말하기를, 타락 전 죽음은 육체적 죽음을 말하며, 타락 이후의 죽음은 영적 죽음을 말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죄로 인하여 세상에 들어온 죽음은 타락 전에도 있었던 육체의 죽음이 아니라 영적인 죽음이라고 주장한다.(43)
그리고 성경의 기록에서 하나님의 계시로서의 메시지와 그것을 담고 있는 고대 세계관을 구별할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아담을 말한 기록을 볼 때,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사실 자체는 역사이지만, 예수님께서 아담을 가리켜 말한 내용은 고대 세계관에 의하여 아담을 새 창조(de novo creatio)의 모델로 보는 것을 반영한 것으로 해석을 할 것을 요구한다. 즉 예수님의 말씀은 고대 세계관에 따른 아담의 내용을 가리키신 것이고, 과학적으로는 현대 과학적 안목에 따라 선행인류들이 진화를 한 것이라는 것이 라무르의 대답이다.
결론적으로 아담은 존재하지 않았고 따라서 죄가 아담을 통해 세상에 들어온 것이 아니므로, 죄와 사망의 문제는 애초부터 없는 것이다. 육체적 죽음은 하나님의 심판에 의한 것이 아니고, 창세기 3장의 죽음의 기원은 목가적 시대를 상실한 고대 과학적 관념을 반영하는 것이다. 죄가 세상에 들어 왔으되 아담을 통해 온 것은 아니라고 결론을 내린다.(44) 이러한 라무르의 간단한 언급만으로도 유신 진화론이 얼마나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지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다.
결론: 유신 진화론은 신학의 토대와 구조를 무너뜨린다.
유신 진화론은 성경적 기독교에서 결코 받을 수가 없는 잘못된 신앙이해를 낳는다. 그것은 단순히 현대 과학시대에 성경의 창조기록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한 기독교적 답변으로 받을 수 있는 하나의 견해가 아니다. 유신 진화론의 오류를 몇 가지를 간추려 제지하면 다음과 같다.(45)
(1) 생명이 자연에서 기원한다는 진화론을 확정된 과학적 사실로 받는 과학적 오류를 범한다.
(2) 유신 진화론은 진리의 표준을 성경이 아니라 진화론으로 삼고 성경을 해석하는 오류를 범한다.
(3) 성경을 종교적, 도덕적 영역에 관한 진리에 국한시키고, 자연세계에 대한 객관적 영역에 관한 해석의 권리를 진화론에 속한 것으로 돌린다.
(4) 유신 진화론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직접적인 개입을 부정하고, 오직 방법론적 자연주의 원리에 따라 창조를 진화론으로 설명한다.
(5)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후에 초자연적 창조나 섭리를 행하실 수 없도록 하여 이신론의 결과를 낳는다.
(6) 진화론적인 관점에서 최초로 창조된 아담과 하와의 역사적 사실성을 부정하고, 선행인류에게서 오늘의 인간이 출현하였음을 말한다.
(7) 유신 진화론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지음을 받았다는 특별한 창조의 방식을 부인한다.
(8) 하나님의 형상과 이와 관련한 죄의 문제를 육체적 죽음과 관련하여 말하지 않는다. 타락한 아담에게 주어진 형벌은 영적인 죽음만이 아니며, 영적인 죽음과 동시에 육체적 죽음이라는 사실을 부인한다.
(9) 아담의 타락 이전에도 동물의 죽음이 있었다고 주장함으로 아담의 죄로 인하여 우주에 영적 죽음과 함께 육체적 죽음의 고통이 들어오게 되었음을 부정한다.
(10) 그리스도의 죽음은 영적 죽음만이 아니라 또한 육적 죽음이었으며, 그의 부활은 육적 부활이고 또한 그로써 그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선포하는 영적 부활이라는 의미를 불분명하게 하며, 그 결과 성도의 부활이 영적 부활일뿐만 아니라 육적 부활이며, 육적 부활이 없이는 영적 부활의 의미를 완성하지를 못한다는 신학적 기반을 허물어 버린다.
[참고 자료]
(1) 본 논문은 한국복음주의신학회의 제 66차 정기논문발표회 및 제 5차 국제학술대회에서 2015년 10월 31일
조직신학 분과에서 영어로 발표했던 것이며, 신학정론에 한글로 게재함을 밝힌다.
(2) Cf., Howard J. Van Till, Davis A. Young, and Clarence Menninga, Science Held Hostage (Downers Grove, I
L: InterVarsity Press, 1988); Howard J. Van Till, Robert E. Snow, John H. Stek, and Davis A. Young, Portraits
of Creation(Grand Rapids, MI: Eerdmans, 1990); Ian Barbour, Religion in an Age of Science (San Francisco,
CA: Harper & Row, 1990); Arthur Peacocke, Theology for a Scientific Age (Minneapolis, MN: Fortress, 199
3); Richard H. Bube, Putting It All Together (Lanham, MD: University Press of America, 1995); Denis O. Lam
oureux, Evolutionary Creation: A Christian Apporach to Evolution (Eugene, OR: Wipf and Stock Publishers,
2008); I Love Jesus & I Accept Evolution (Eugene, OR: Wipf and Stock Publishers, 2009); 유신 진화론을 창
조론으로 받으며 이를 알리는 단체로 BioLogos를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홈페이지: www.biologos.org. 오티
스(John M. Otis)는 유신 진화론과 타협을 한 몇 사람을 다음과 같이 열거한다. 팀 켈러(Tim Keller), 론 충(Ron
Choong), 그렉 데이빗슨(Gregg Davidson), 존 콜린스(C. John Collins), 그리고 피터 엔스(Peter Enns) 등이
다. f. John M. Otis, Theistic Evolution: a Sinful Compromise (McLeansville, NC: Triumphant Publications Min
istries, 2013).
(3) 예를 들어, 반 틸은 주장하기를 하나님께서는 진화론적인 발전을 전개하는 데 필요한 모든 능력을 갖춘 피
조계를 창조하셨고, 피조계는 부여받은 능력을 따라 진화를 통해 창조의 과정을 이행한다고 한다. 그는 이러
한 자신의 견해를 유신 진화론과 구별하여 “완전한 능력을 갖춘 창조”로 표현하기를 원한다. J. P. Moreland a
nd John Mark Reynolds, Three Views on Creation and Evolution: Young Earth Creationism, Old Earth (Prog
ressive Creationism), Theistic Evolution (Grand Rapids, MI: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99), p. 173; (한
역) p. 203.
(4)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의 주요 복음주의 영역의 신학자들 가운데 몇 몇이 이러한 주장을 개진하였다.
예를 들어 핫지(A. A. Hodge), 스트롱(A. H. Strong), 워필드(B. B. Warfield), 오르(James Orr), 그리고 라이트(G
eorge Wright) 등이다. Norman L. Geisler and J. Kerby Anderson, Origin Science: a Proposal for the Creatio
n-Evolution Controversy (Grand Rapids, MI: Baker Book House, 1987), p. 167.
(5) 대표적으로 반 틸(Howard J. Van Till)과 라무르(Denis O. Lamoureux)를 지목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우종학
과 한국기독과학자회(KCiS)에 속한 일부 학자들을 우선 열거할 수 있다. Cf. 우종학, 『무신론 기자, 크리스천
과학자에게 따지다』 (서울: 한국 IVP, 2009); Deborah B. Haarsma and Loren D. Haarsma, 『오리진』, 한국기독
과학자회 역 (서울: 한국 IVP, 2012).
(6) Systematic Theology (Edinburgh, UK: The Banner of Truth Trust, 1988, 1st ed. 1939), p. 139.
(7) Howard J. Van Till, “the Fully Gifted Creation,” in J. P. Moreland and John Mark Reynolds, Three Views on
Creation and Evolution: Young Earth Creationism, Old Earth (Progressive Creationism), Theistic Evolution, p.
173; (한역) p. 203. 이하 이 책과 관련한 인용출처는 Three Views on Creation and Evolution로 줄여 씀.
(8) Denis O. Lamoureux, I Love Jesus & I Accept Evolution, p. 26.
(9) “마술사가 마술을 부리듯” 창조를 하는 방식은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를 가리키는 우종학의
표현이다. 『무신론 기자, 크리스천 과학자에게 따지다』, p. 66.
(10) Ibid.
(11) 『무신론 기자, 크리스천 과학자에게 따지다』, p. 108. 볼드체는 인용문의 것.
(12) Cf. 유진열, “신학과 과학의 상보성에 대한 복음주의적 전망,” 『성경과 신학』 74(2015): 33-63.
(13) Howard J. Van Till, “the Fully Gifted Creation,” p. 177.
(14) Deborah B. Haarsma and Loren D. Haarsma, 『오리진』, pp. 80-82.
(15) Stephen Jay Gould, “Nonoverlapping Magisteria,” Natural History 106 (March 1997): 16-22. 굴드의 비공
식적 웹사이트(www.stephenjaygould.org)에서 읽을 수 있음.
(16) Howard J. Van Till, “the Fully Gifted Creation,” p. 175; (한역) p. 206.
(17) Ibid., pp. 181-82; (한역) pp. 212-13.
(18) J. P. Moreland and John Mark Reynolds, “Introduction,” in Three Views on Creation and Evolution, p. 19;
(한), p. 24.
(19) Ibid.
(20) 『무신론 기자, 크리스천 과학자에게 따지다』, pp. 174-76.
(21) Howard J. Van Till, “the Fully Gifted Creation,” p. 201; (한역) p. 233.
(22) Ibid., p. 202; (한역) p. 234.
(23) Howard J. Van Till, “Conclusion,” Three Views on Creation and Evolution, p. 245; (한역) p. 284.
(24) Phillip E. Johnson, “Reflection 2,” Three Views on Creation and Evolution, p. 271; (한역) p., 312.
(25) Richard H. Bube, “Reflection 1,” in Three Views on Creation and Evolution, pp. 259-61;(한역) pp. 298-30
0.
(26) Phillip E. Johnson, “Reflection 2,” p. 269; (한역) p. 309-10.
(27) Ibid., p. 272; (한역) p. 313.
(28) Ibid., pp. 272-73; (한역) p. 314. 이러한 방법론적 자연주의의 위험성을 존슨은 다음의 책들에서 실례를 들
어 설명한다. Cf. The Wedge of Truth, 홍종락 역, 『진리의 쐐기를 박다』 (서울: 좋은 씨앗, 2005); idem., Defea
ting Darwinism by Opening Minds, 과기원 창조론 연구회 역, 『다윈주의 허물기』 (서울: 한국 기독학생회, 20
00).
(29) Alvin Plantinga, “Methodological Naturalism 1,” Origin & Design Journal vol 18 no 1; idem., “Methodol
ogical Naturalism 2,” Origin & Design Journal vol 18 no 2를 볼 것. 이 논문들은 웹 사이트 www.arn.org/ode
sign에서 볼 수 있음.
(30) John Jefferson Davis, “Response to Howard J. Van Till,” in Three Views on Creation and Evolution, p. 22
8; (한역) p. 264.
(31) Walter L. Bradley, “Response to Howard J. Van Till,” in Three Views on Creation and Evolution, p. 225;
(한역) p. 260.
(32) Vern S. Poythress, “Response to Howard J. Van Till,” in Three Views on Creation and Evolution, pp. 238-
39; (한역) pp. 276-77.
(33) Ibid., p. 223-24; (한역) 259. 브래들리가 인용한 플라트의 글은 다음에서 인용된 것임. James E. Platt, Amer
ican Biology Teacher 55 (May 1993): 264.
(34) Phillip E. Johnson, “Reflection 2,” pp. 272-73; (한역) p. 314.
(35) Denis O. Lamoureux, I Love Jesus & I Accept Evolution, pp. 30-31.
(36) John Jefferson Davis, “Response to Howard J. Van Till,” p. 227; (한역) p. 263. 물론 여기서 데이비스가 ??
?가 창조이외에 보존의 사역에도 사용이 되고 있음을(사 40:28, 45:7; 렘 31:22; 암 4:13) 부인하고자 하는 것은
아닐 것이 다. 하지만 바빙크가 지적하고 있듯이 ???는 사람이 만드는 것에는 적용이 되지를 않았으며 항상
하나님께서 만드는 것을 가리켰다. 즉 하나님의 위대하신 활동과 능력을 표현한다. Herman Bavinck, Gerefor
meerde Dogmatick II, 박태현 역, 『개혁교의학』 2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1), p. 522.
(37) Herman Bavinck, 『개혁교의학』 2, pp. 524-27. 하인리히 헤페, 개혁파 정통 교의학, 이정석 역 (고양: 크리
스찬 다이제스트, 2000), 285-300.
(38) Richard H. Bube, “Reflection 1,” p. 252; (한역) pp. 290.
(39) Vern S. Poythress, “Response to Howard J. Van Till,” p. 236; (한역) pp. 274.
(40) Denis O. Lamoureux, I Love Jesus & I Accept Evolution, p. 31.
(41) Ibid., p. 137.
(42) Ibid., p. 138.
(43) 타락 전 죽음의 문제에 대한 비평적 견해를 위하여, 김병훈, “오랜 전 창조론의 신학적 딜레마: 타락전 죽
음?” 『성경과 신학』 72(2014): 85-121를 볼 것.
(44) Ibid., pp. 147-48.
(45) 유신 진화론의 비평을 위하여 다음의 책들을 참조하는 것은 복잡한 창조-진화론 논쟁이나 신학적 연구 작
업이 없이도 즉각적인 도움을 준다. Werner Gitt, Did God Use Evolution? (Green Forest, AZ: Master Books, 2
006); Jonathan Sarfati, Refuting Evolution (Powder Springs, GA: Creation Book Publishers, 2012, 초판 1999);
idem., Refuting Evolution 2 (Powder Springs, GA: Creation Book Publishers, 2011); John M. Otis, Theistic Ev
olution: a Sinful Compromise (McLeansville, NC: Triumphant Publications Ministries, 2013). 또한 웹사이트
www.icr.org; www.answersingenesis.org를 참조할 것.
https://m.youtube.com/@osola24 Osola (유튜브)
https://cafe.naver.com/data24 기독교 자료 (네이버 카페)
'위험, 이단 등'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기성 (위험) (선한목자교회) (1) | 2024.07.17 |
---|---|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한 바빙크와 워필드의 부정적인 평가 (1) | 2024.07.10 |
유신진화론, 결국 하나님과 인간 멀어지게 할 것 (0) | 2024.06.26 |
‘양태론’이 이단인 이유는 무엇인가 (0) | 2024.06.19 |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 무엇이 문제인가? (0) | 2024.06.12 |